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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제 시 모음

'길'을 주제로한 시 모음 (28)

작성자돌샘이길옥|작성시간26.06.10|조회수71 목록 댓글 0

-송광사 가는 길-말러의 교향곡 1번을 들으며/구광렬-

   1   

  무대 뒤에서 울려 퍼지는 트럼펫소리, 그 신비로운 서주(序奏)에 창 밖 가로수 잎맥들, 팽팽하네   

  쌀 튀밥 같은 이팝나무, 보릿고개 시절 눈으로만 삼키던 미미(美味), 오지 않을 것만 같던 봄날들,

저만치 매달려있네

 

   트럼펫 팡파르, 차창에 내려앉는 꽃잎들, 27번 국도의 오르막은 한껏 축제 중이라네   

 

  못물이 넘실대는 논바닥이 부드럽고 스케르초와 부드러운 왈츠 덕에 차창풍경이 경쾌하네 오케

스트라와 팀파니가 하행 모티브를 강하게 주고받으니, 저 모퉁이를 돌면 곧장 풍성한 여름과 만나

겠네  

  2   

  현악기 하모닉스로 풍경이 술렁이네 흔들리며 밀려가는 농부들, 바이올린, 첼로, 트럼펫, 농기 대

신 악기를 들쳐멘 듯하구나 큰북을 이고 가는 양 저 노인네, 차를 세우고 손을 빌려주고 싶지만 저

세상 사람 같네 막 겨울이 야산 끝자락에 회색의 입술자국을 남겼네

 

   뻐꾸기 노래하니 ‘울지 말고 노래를 불러라, 노래를 부르는 동안, 기쁨이 올 것이니’* 축제의 노

래, 고조되지만 애달프게 붉어져만 간 나의 계절, 차창 밖 나무둥치가 돼버린 난, 지난날 뿌리혹들

을 아파하네   

  3   

  주암호반도로를 달린다네 수면이 파르르 깨져있네 나무들이 호수 위로 찢겨져 내리누나 ‘보리수’

의 선율을 지닌 트리오, 팀파니의 리듬을 타고 저현이 어둡구나 차창 밖은 봄이건만, 차창 안은 겨

울이라네 룸미러에 성에가 끼고 마디마다 겨울이 쌓이네 창문을 내려보지만 날개 잘린 겨울은 쉬

빠져나가질 않는구나

 

   논바닥, 깊게 패인 손금처럼 물속 검은 고랑이 출렁이네 여기저기 모가 꽂히면 저 고갯마루도 말

랑해지리라 거칠고 활기찬 스케르초와 유연하고 사랑스러운 트리오가 대비를 이루니, A장조의 렌

틀러에 오보에가 대선율에 얽히누나   

  4   

  d단조, 팀파니의 희미한 연타에 등장하는 더블베이스 선율, 뒤이어 등장하는 ‘카바레 풍’의 밴드

선율, 두 계절 간의 벽이라네   

 

  호수 끝 자락쯤, 떠나지 않은, 아니 떠날 수 없었던 철새 한 뭉텅이, 플라맹고 자세를 취하누나 ‘그

대 함께 언약한 내 사랑의 고향, 나 잊질 못하네, 그 아름다운 Annie Laurie를 위해서라면 나, 기꺼

이 목숨을 바치리라’**바이올린소리에 첼로가 묻혀버리고 4도 하행 음정이 저만치 들려오네

 

   영화스크린 속의 봄, 관람객으로서 맞는 봄…… 꽃향기, 피 냄새, 밥 냄새, 아, 냄새도 맡지 못할

내 아버지의 겨울 속 내 어머니의 봄    풀어지는 바이올린에 ‘그녀의 밤색 눈동자’가 애처롭네 멀리

송광사 팻말이 보이고 조계산 끝자락이 막 눈에 들어오네   

  5   

  2/2박자, 자유로운 소나타 형식인 포르티시모 총주에 깜짝 놀라네 기어봉을 움켜쥐어보지만 연

주자들의 손가락, 입술, 어깨, 지휘자의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이 온몸을 간질이고 문지르네   

 

  산이 통째로 차 안으로 밀려오네 계곡물이 스미고 칡덩굴이 핸들을 감아쥐네 차를 길섶 모퉁이에

세울 수밖에 없네

 

   차창 밖 편백나무도, 배롱나무도, 여전히 옷고름을 물고 있는 송광사도 다들 예쁘기만 한데, 천

하의 이태백(李太白)의 시에 곡을 붙였던 그가 괴로워하네 ‘대지가 노래한다’고 말한 그가 대지 위

에서 눈물을 보이네 안과 밖, 불이문(不二門)이건만 지금 후광 가득 문설주 아래 내 나이 또래인 그가……

 

 

* 멕시코 민요 「Cielito lindo」(내 예쁜 사랑)의 한 소절

** 스코틀랜드 민요 「Annie Laurie」(애니 로리)의 한 소절

 

 

-빈 칸에 길 넣기/박이정- 


전철 빈 칸에 앉아서 건너편의 빈 칸을 바라본다


길 하나 들어와 빈 칸에 앉는다


장난감 총을 쏘는 아이 둘. 두꺼운 책 속에서 길 닦는 학생 앞을 왔다 갔다
빈 칸에 신발 신은 채 나란히 올라간다. 전철손잡이를 잡으려다 공사 중인 길을 까치발로 덮친다


글자 속에서 길을 닦던 노동자가 전철바닥으로 나동그라진 책을 줍는다. 빈 칸에 앉아서 길찾기에 다시 빠져든다


질끈 동여맨 생머리가 흐트러진 어린 엄마
젊은 생의 무게를 싣고 어두운 터널을 비명처럼 달려가는 지하철. 학생 나이뻘 얼굴을
창밖으로 돌린다 꽉 낀 스키니진 입은 감각 하나를 유리창 안개꽃밭에 묻는다


아이 둘 유리창에 길을 그린다 끊어질 듯 이어진다 새로 태어나는 길


빽빽한 세상에 몸 쉴 빈 칸 하나 갖고 싶어 길을 닦는 어린 엄마는
아이들의 길이다 아이들의 빈 칸이다


전철이 안개 낀 살얼음 강을 건너고 있다 빈 칸에 앉은 눈동자들 안개늪에 빠진다


눈꺼풀을 내려 속눈썹 끝 차마고도에 길을 닦다
신길역 하차 안내방송에 눈을 뜬
깜빡 세상
전철 밖으로 뛰어내리는 길이 작별인사 하듯
뒤를 돌아본다


공사 도중에 끌려온 세상 하나가 혼잣말을 안개처럼 흩으며
빈칸에 앉는다

 

 

-길이 아닌 길/이선영-

저렇게 잘 닦인 길이 왜 내 길이 아닌가?고
눈에 한참 밟히던 길이 있었다
아마 원주나 제천 가는 길목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때 줄지어 가는 차들을 행렬에 끼여 있었다
세상엔 내가 알거나 모르는 수많은 갈래의 길이 있지만
그 길들은 그저 멀거나 조금 가까운 갈랫길일 뿐
내가 밟고 가는 길은 늘 하나의 길일 수 밖에 없다
흔한 발자국들 찍힌 세상의 흔한 길 중 하나가 될지라도
저 의젓한 길은 어디로 향하는가,
여짓껏 나와 다른 길을 밟아온 길,
내게서 멀지 않은 거리에 있으면서
그러나 나와는 다른 곳을 향해 가고 있는
저 길은어떤 까닭으로 이리로 이어져서
어떤 추억과 상처의 바퀴를 굴리기 위해 벋어 있는가,
저 길을 통해 다다를 수 있는 곳은 낯선 천국이라는 것인가
아니면 낯선 오지라는 것인가, 저 길은
가는 길이 아니라는 것이다
단 한걸음도 들여놓지 못할 그 길을
나는 한동안 가슴에 담았었다
내 갈 길 이 아닌 그대를   

 

 

-생활쓰레기매립장 가는 길/박형권- 

   

어제 나는 먹다 남긴 치즈 조각이었다가

오늘은 어디를 덧대어도 더러움을 빨아들일 수 없는

행주 조각이 됐다

유월 아카시꽃 주르르 흐르는 이 길은 치명적으로 아름다운 길

꽃 따라 마지막으로 향한다면 그리 섭섭할 것은 없다

생활쓰레기매립장이 산중턱에 있어서 오르막을 오르면

내가 탄 오물 칸에서 운명처럼 꽃이 진다

나는 한때 잘나가는 사내의 백구두였고

결혼식장의 흰 목장갑이었고

처녀의 허리를 죄어 주는 코르셋이었고

뒷산 소쩍새 소리를 듣는 이어폰이었다

가끔은 애인이 나를 발견하게 되는 안경테였다

아주 잠깐이었다 꿈속의 꿈이었다

나는 생활쓰레기로 분류되어 당신을 기억한다

당신이 사는 세계에서는

당신이 당신을 분류하고 다른 당신이 다른 당신을 분류한다는 것을

분류하다가 끝나는 인생과

분류되다가 끝나는 인생, 단 두 종족만이 남았다

나를 실은 위생과 트럭이 느리고 힘센 기어로 변속하고

초여름을 뻘뻘 흘리며 기어오른다

싱크대의 홈통에 낀 라면 면발들에게도 한번은 꽃 피어라고

누가 이런 꽃길을 열어 놓았다

아, 천 년 썩을 터전이 다가온다

고맙다, 나는 당신이 쓰다 버린 천 년이었다

 

 

-용인(龍仁) 지나는 길에/민 영-

저 산벚꽃 핀 등성이에
지친 몸을 쉴까
두고 온 고향 생각에
고개 젓는다.

도피안사(到彼岸寺)에 무리지던
연분홍빛 꽃너울.
먹어도 허기지던
삼춘(三春) 한나절.

밸에 역겨운
가구가락(可口可樂)* 물 냄새.
구국구국 울어대는
멧비둘기 소리.

산벚꽃 진 등성이에
뼈를 묻을까.
소태같이 쓴 입술에
풀잎 씹힌다.

* 가구가락 : '코카콜라'의 중국식 표기

 

 

-길/이연주-

가보라 하더구만, 끊어진 길 어귀에서
그래,
내 갔지,
어허, 어둡고
천지사방 막혀
갈퀴진 길, 벌건 살 뻐드러진 험한
내 갔던 길,

그래, 내
또 갔지,

어디 골대를 겨냥해서 잘 차 넣은
공처럼
적중......
적중의

길이 있었던가? 절벽길
또 가야 한다면
삶의, 어디
사람이 벌처럼 모여 반짝이는
마을 앞에 서게 될지, 글쎄
아니라 해도......

 

 

-구불구불한 길/삐에르 르베르디-

시간 속에는 먼지로 뽀얀 잔인한 사람 하나 있다
억센 날개 달린 남풍 한 자락
탄식하는 꺼칠한 목소리들의 소용돌이에서 솟구치는
파산의 저녁과 습기찬 어둠 속으로 공명하지 않는 물의 메아리
혀에 와 닿는 재의 맛
오솔길에 들려 오던 파이프 오르간 여음
요동치는 마음의 배
그 많은 생업의 재난들이 있다

사막의 등불들이 하나 둘 꺼져 갈 때
풀잎처럼 두 눈이 젖어들 때
이슬이 잎새 위에 벌거벗은 발을 내릴 때
힘겹게 떠오르는 아침마다
은밀한 뒷길에서 잃어버린 어느 주소를 찾아 헤매는
누군가가 있다
녹이 벗겨진 별들과 꽃들은
부러진 나뭇가지 사이로 영락하고
어두운 시내는 금방 벌어진 제 부드러운 입술을 씻고 있다
계수하는 시계문자판 위 나그네의 발걸음이 규칙적으로 운행하며 지평선을 밀어붙일 때
모든 아우성은 과거로 사라지고 모든 시간은 마주친다
그리고 나는 쏟아지는 햇살을 바라보며 하늘로 걸어간다
내 머릿속엔 수많은 이름들과 알 수 없는 소음들
살아 있는 얼굴들
세상에서 벌어졌던 모든 일들
그리고 향연이 있다
나 나의 시간을 유실했던 그 향연이

 

 

-소백산맥-영덕 가는 길/채영선-

 

산 앞에 산이 있고

산 너머에 산이 있네

산 위에서 오르는 산

산 아래에서 내려가는 산

굽이굽이 올라가도 앞서가는 산

굽이굽이 내려가도 다가오는 산

 

디디고 간다 어깻죽지를

헤치고 간다 머라카락을

언제 서슬 푸르게 일어서 보려나

허리 잘린 그 모습 그 상처를

누구도 기억하고 싶지 않으리

수천년 고이던 등 언저리에

철모르고 오고가던 우리 자손들

 

오르고 내려가도 도로 그 자리

산과 산 맞닿은 분수령에서

춤추어 볼거나 노래해 볼거나

어디에나 금수강산 수려한 줄기

한 맺힌 그리움 이 산에 묻고

돌아가 볼거나 내려가 볼거나

훠이훠이 춤추며 내려가 볼거나

 

 

-비의 길-고흐의 무덤으로 가는 길/조 은

끝없는 밀밭을 짓누르는
하늘로 솟구치며 까마귀 운다
까마귀 간 길이 어두운 하늘 속에서
실꾸리처럼 감긴다

갑자기 나타난 말 한 마리
사납게 발길질을 하자 흙이
번뜩이는 눈을 뜨고 우리에게 달려든다
인광이 미친 말의 몸을 벗어나 빗방울에
매달린다 빗방울은 무엇과도
온몸으로 닿으며 존재를 바꾸고
밀밭은 금세 윤기 흐른다

그러나, 말은 미쳐서도
제 무릎 아래께에 있는
울타리의 관념 하나 뛰어넘지 못한다
그것을 알고 있는 우리에게

바람은 먼 먼 곳의 빗방울을 부려놓는다
언덕은 그의 무덤으로
우리를 끌어간다

 

 

-폐타이어가 있는 산책길/최영숙-


종점, 길은 언제나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막막하게
생의 변두리를 도는 자
외곽에서 중심을 구하는 자의 배경에는
벌판과 바람 길은 휘어져
어디에 닿았는지 가늠할 수 없다
삶은 단지 스쳐가거나 봄볕에
살을 말리는 뿌연 것,
어느날 아주 먼 어느날
우리가 인연이라 말하던 순간도 다 쓰고 나면
바람 빠진 폐타이어 닳아진 허울만 남아
한곳에 쌓일 것이다 재생의 날을 기다리며
우연한 봄날의 담에 기대다 보면
지나온 길의 어디쯤 진실도 있었다고, 말해주는 것들
먼지를 풀풀 날리며 덤프트럭이 지나고
갓 스물의 청춘이 노래한다 마른 연기
피어오르는 들판의 한끝 희망은 그런 대로
연명하기에 좋았으나 몸의 바퀴가 닳아 멈추었을 때
내 앞에 놓인 밥그릇 하나,
햇살이 가득 담긴 사발을 놓고 조는 듯 깨이는 듯
등허리며 머리카락 사이로 따뜻한 기운이 흐르고
길은 그때부터 시작인지 모른다

 

 

-나의 별에 이르는 길/박수진-

가벼워야 하리 내 영혼
저 하늘 빛나는 나의 별
먼 그곳에 닿기 위해선
쌓고 채웠던 모든 것
허물고 비우고 덜어내
더 가벼워야 하리.

흐린 눈으로는 가지 못하리
미움과 욕망의 체중으로
더욱 가지 못하리
언젠가는 내 가야할 곳
머언 그곳에 닿기 위해선
비우고 덜고 버려야 하리.

가벼워진 몸으로 훨훨 날아
새벽 하늘 맑은 별자리로
나 떠오를 수 있다면
잠들지 못하는 지상의 꽃들과
모든 가난한 생명들의
따뜻한 벗이 되어 빛나리니...

오랫동안 비워 둔 나의 별
멀고 먼 그곳에 닿기 위해선
날마다 뜨거운 눈물로 씻어
가벼워야 하리.

내 영혼
둥둥 가벼워야 하리...

 

 

-길 위에 길/윤관영-

머리 속에 뭘 넣어야 한다고
대가리 처박고 신문이라도 보던 시절 지나니,
보인다. 노란 맹자(盲者)의 길
강박의 길 지나니,
오돌도돌한 직선과 직각의 길 보인다
무료와 권태 속에 있지 않으려던
억지 집중을 지나니,
힐끔힐끔, 힐난의 눈길도 받는,
딴청이 날 보게 한다
색으로 난 길과
몸무게를 직접 받는 굽과
두툼한 발바닥-
말초신경이란 말을 괜히 알 듯도 하여
헛웃음 참으며 또 힐끔거리며
발가락을 빨아도 아름다운 그대
뭐 이런 속스런 생각에 기분이 동해
그런 애인이라면 뭐 하면서,
이 때는 전동차 창밖을 보게 된다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앞자리 여인을 할금거리며

 

 

-무량사 가는 길/배영옥-

 

무량사 팻말 아래 화살표는 보신탕집을 가리키고 있다
한 팻말 안에 절 이름과 보신탕집 이름이 사이좋게 합방하고 있다
도량 건너에는 오리전문점과 암소갈비집도 있다
일종의 묵계 아래 성업 중인,
개들이 꼬리를 말고 당도하는 저곳에서
향냄새를 말끔히 지운 사람들이 질근질근 개고기를 씹어댄다
하릴없이 화살표를 따라 걷거나
차를 타고 지날 때마다
무량사와 보신탕집까지의 백여 미터 거리
그 짧은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나는
독경소리보다 개 짖는 소리에 번번이 마음을 빼앗긴다
죽은 부처에게 바치는 오체투지도
지복을 달래는 향공양도
제 육신마저 흔쾌히 연옥의 불길에 던져버린
견공들의 성불에는 미치지 못하리라
문득 곰곰 생각해 보니
저 화살표가 가리키는 곳이 소신공양의 정토(淨土)였던가
무량사 가는 길이 까마득하다

 

 

-청송으로 가는 길/김종제- 

 

어느 날 네가 선 자리에

예고도 없이 찾아온 낯선 삶에게

결별이라는 수갑으로

덜컥 손목 채우고

발목에는

안녕이라는 쇠고랑 채우고

아무도 모르게 그곳으로 떠나가야 할

때가 있을 것이다

살아 숨쉬다가

죄라는 죄는 모두 다 저질러

청송이라는 땅으로

지나버린 시간을

문득 묻으러 갈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거진 생生의 수풀을

휘적휘적 헤치고 가다가

손으로 건드린 것들 참으로 많았고

길도 아닌 생(生)을 걸어가다가

발로 차 버린 것들 억세게 많았으니

구불구불 주왕산 산길을 걸어 올라

주산지(注山池) 바라보면서

사랑에 대해서

너에 대해서

뼈속 깊이 뉘우치라는 것이다

물속에 뿌리박고 서 있는

왕버드나무를 바라보며

그와 똑같이 반성의 자세로

삶을 다시 꺼내 반추해 보라는 것이다

물속 독방에 홀로 갇혀

찾아올 누구 없이

고요하게 적멸해 보라는 것이다

 

 

-착한 길/-

나뭇가지들이 미로 같은 허공을 밀어내며
쉴 새 없이 길을 내고 있다
작은 가지 하나만 부러져도
온몸이 함께 아픈 길

수천의 나뭇가지는 나무가 내는 작은 길이다
살을 에는 눈꽃들이 삭혀낸 힘이다
흙의 내면을 향해 나아가는 뿌리들의 수행(修行)

새들도 날아와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온기를 옮겨준다
어머니의 어머니들이
마실을 지켜오던 신목(神木)앞에서
어둠이 다 닳도록 빌던 이유다

연둣빛 어린잎들의 내밀한 기행이
저 무성한 길을 다 만들었다
그 아래로 등 굽은 칠순 노모를
꾸부렁길이 함꼐 부축해 가고 있다

 

 

-바늘의 길/김인숙-​ 

  

三代를 완성하기 위해

딸을 낳았지만 여전히 구멍뿐이었다

 

빗나간 가윗날에 밑단은 사라지고

바늘구멍은 보이지 않았다

실꾸리에 감긴 실처럼 하얗게 늘어지던 졸음

바늘 끝이 자꾸 길을 잃었다

돋보기를 쓰고도 저고리 도련을 꺾던

할머니의 야무진 손놀림만

더욱 깊어졌다

골무에 닿은 불빛이

어둔 눈빛을 인도하던 밤은 길었다

 

구렁이는 구렁이의 길을 가서 외롭고

할머니는 할머니의 길을 가서 외로웠다

 

바늘 끝이 외롭다는 걸

진작 알았다면

딸을 낳지 않았을 것이었다

할머니의 자투리 시간을 내일로 이어붙이는 동안

한 일생이

다른 일생으로 전이되고 있었다

 

바늘귀를 빠져나가는

괘종시계의 초침 소리가 무거웠다

생계는 영원히

실마리가 풀리지 않았다

 

 

-구절리 가는 길-길 잃으니 환하게 길 잘 보인다/이재무-

 

비 온 뒤 연달아 피어오르는 안개의 혀
큰 산의 나신 핥는다
뱀의 등허리가 되고 물고기의 지느러미가 되고
아아, 안개는 내 여인의 가는 허리가 되고
큰 산은 쑥스러워 靑靑 웃는다
가도가도 구절양장의 길 구절리
한 굽이 돌 때마다 거기, 우리에 아픈 생의
내력 있다는 듯 자동차 바퀴에 튀어
옆구리 퍽, 질러오는 묵언의 저 돌멩이들.
노변, 싸리나무꽃이 있었다
볼우물 수줍은 그녀
내 어릴 적 공부에 게으른 날
종아리 파랗게 아프게 하더니
오늘은 불룩해진 아랫배 쿡 찌르며 웃는다
길 좇다 길 잃고 길 잃으니
내 잠시 비워두고 온 세간
저렇듯 반짝이는 녹엽으로 멀리서도 환하다
산사가 차려주는 저녁공양
달게 비우고 山心에 젖어 어둠이
어둠을 낳는, 밟을수록 더욱 싱싱해오는
산길 한 마리 산짐승 되어 꿈틀꿈틀
내려온다 이미 밤은 깊어서 광 속처럼
빼곡히 들어찬 어둠의 속살
나는 상장 받은 아이인 양
내일이 전혀 두렵지 않다
한낮에 본 사랑에 눈먼 철부지 안개 처녀들아
큰 산 데불고 다들 어디고 갔나 벌써 그것들
내 안에 들어와 꽃으로 웃고 있는지
내 몸은 산으로 의젓하고 또, 얇은
종잇장 되어 한없이 가볍게 날아오른다

 

 

<돌샘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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