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가 길이 되어 가는 것/박노해-
올곧게 뻗은 나무들보다는
휘어 자란 소나무가 더 멋있습니다.
똑바로 흘러가는 물줄기보다는
휘청 굽이친 강줄기가 더 정답습니다.
일직선으로 뚫린 바른 길 보다는
산따라 물따라 가는 길이 더 아름답습니다.
곧은 길 끊어져 없다고 주저앉지 마십시오
돌아서지 마십시오
삶은 가는 것입니다 그래도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건
아직도 가야 할 길이 있다는 것
곧은 길만이 길이 아닙니다.
빛나는 길만이 길이 아닙니다.
굽이 돌아가는 길이
멀고 쓰라릴지라도 그래서 더 깊어지면
환해져 오는 길 서둘지 말고 가는 것입니다.
서로가 길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생을 두고 끝까지 가는 것입니다
-소사 가는 길, 잠시/신용목-
시흥에서 소사 가는 길, 잠시
신호에 걸려 버스가 멈췄을 때
건너 다방 유리에 내 얼굴이 비쳤다
내 얼굴 속에서 손톱을 다듬는, 앳된 여자
머리 위엔 기원이 있고 그 위엔
한 줄 비행기 지나간 흔적
햇살이 비듬처럼 내리는 오후,
차창에도 다방 풍경이 비쳤을 터이니
나도 그녀의 얼굴 속에 앉아
마른 표정을 다듬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당신과 나는, 겹쳐져 있었다
머리 위로 바둑돌이 놓여지고 그 위로
비행기가 지나가는 줄도 모르고
-집 속엔 길이 없다/김규진-
1
신발을 숨겨버리고
전화도 끊어 버리고
종일 집 속에서 뒹군다.
---일찍이 출근하는 시인은 없었다.
숨쉬는 것은 오직 나와
베란다의 난초 몇 그루뿐.
내가 뒹구는 집을 꿈꿀 때
이 식물들은 떠나는 길을 꿈꿀까?
집은 하루 종일
수도꼭지로 마시고 솥과 냄비로 끊여내고
변기의 똥구멍으로 쏟아낸다.
---우리 시대에 '존재의 집'은 철거되었다.
가격의 단지가 서 있을 뿐이다.
몇 개의 길들이 문을 두드린다.
난초잎 두어 개가 흔들렸으나
기척을 느기지 못한 길들은 이내 돌아가 버린다.
열쇠의 구멍은 언제나 밖에 있다.
지친 나그네만이 그 문을 열 수 있다.
2
기원전 588년
싯다르타는 길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길에서 죽었다.
기원전 4년
예수도 길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길 위에서 죽었다.
행복했으리라
존재의 집마저 짓지 않았던 그들은.
56번 도로
내 가슴속에 영원히 포장되지 않은 길.
칡넝쿨이 엉금엉금 기어나오는 비포장길을 달리다
낮술을 마신다.
목마름을 목마름으로 다스리기 위해
어데까지 가제예?
난데없는 주모의 물음.
마치 혜능에게 점심을 어디다 두었냐고 물었던 주모처럼.
낮술 때문에 길은 비틀거리고
3
갑작스런 흐드득 흐드득 비
해발 1,300미터 구룡령 넘어가는 길.
비안개는 뿌리고 차는 진창에 빠지고
---차를 버릴까?
나는 아직도 쓸데없는 것들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다.
액셀을 북북 밝으며 간신히 한 굽이 돌아
아, 보았다.
끝도 없이 펼쳐진 연보라색 도라지꽃.
비안개 속에서
수천, 수만의 길을 열고 있던 꽃무리들.
하늘도 언덕도 뭉개버리고
비안개를 타고 놀며 저들끼리 축제를 벌이고 있던 꽃무리들.
함께 비안개를 타고 놀며
교접의 뿌리마저 내던져 버리고 싶던
산비탈의 꽃무리들.
4
모든 길이 걸어 들어간 바닷가
물결에 몸을 맡긴 채 발을 씻는다.
넘어온 수많은 들과 산을 물 위에 띄워 보내며
꽃잎처럼 하나 둘.
또한 마음의 길까지도
아직 나에게도 길이 남아 있을까
나의 길은 아직도 나의 발자욱 소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친구에게 편지를 쓴다.
<시인은 출근하지 않네
집 속에 길이 없네
이리로 오게
이리 와 걸어가세
바다의 밑바닥을.
한번도 걷지 않은 가슴 속의 황야를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길을.>
-갈 수 없는 길/구향순-
낯선 마을 어귀
솟대 대여섯
문득 집에서 기르던
백구가 생각 난다
팔려가다 혹시나
뒷걸음질 치며 버둥거리던 녀석
그렁그렁 그 눈물에 갇혀
아직 놓이지 못한 십여 년
이름 부르면 먹먹해지고
콧날 시큰한
사랑이란 보내고 나면
갈 수 없는 길
올 수 없는 바람이다
그저 망연히 그리움으로 서서
먼 길 냄새만 맡고 있는
저 나무새처럼
-예산가는 길/윤향기-
용산역, 플랫폼으로 들어서는 기차
장항선이 아닌 익산행 새마을호가 낯설다
꼭 남인도 빈민가에서 만난 사람 같다
거무룩한 피부
웅덩이처럼 푹 꺼진 벨벳엉덩이
그르렁 쿨럭 질룩 쩔룩 시원찮은 관절로
무수히 기멸(起滅)하며 달리는
설청의 문장들을 더듬더듬 펼쳐 읽는다
오디 댕겨 오신대유 참말이지 반갑구먼유
이장님은 많이 쾌차 하셨다남유
서산 댁은 이달에 세 번째 손주를 봤다면서유
그려, 방앗간 집 막내딸도 혼사가 정해졌댜
저어기 아직도 사과가 매달려 있는 것 좀 봐유
무한천 달빛두레밥상위 민달팽이들
칸칸이 밝은 서로의 내력이
친근한 종교처럼 한집안 식솔들처럼
구김없이 흘러간다
-산을 내려오는 길/김일용-
두어 발 남은 햇살에
산봉우리가 불그레 익고 있다.
저 아래 모롱이를 돌아가는 열차는
오늘따라 쉰 목소리를 길게 빼 물었다.
놀란 억새들이 산을 흔들었다.
골짜기마다 가을을 내려놓고 가는 열차,
억새는 늙은 간이역에 혼자 남아
허연 머리를 쓸어 넘겼다.
떠나온 길 되짚고 가는 길
서걱서걱 바람을 씹어 삼켰다.
겨를 없이 앞만 보고 달려가는 사람들
아무도 따뜻하게 길러준 이가 없었다.
시린 발등 옹이가 몇 개나 박혔기에
퍼렇게 멍든 하늘을 휘적이고 있는가,
소슬한 색조, 지는 해 산 그림자에
우리네 부질없는 몸짓이 일렁인다.
티끌을 떨쳐버린 그들 앞에서
허욕과 허세를 숨죽인다.
산을 내려오는 길, 석이가 돋은 미륵불이
무채색 마음 한 가닥을 내어놓는다.
석등이 켜지고
이윽고, 찾아 헤매던 마음 속 길 하나
환하게 뚫린다.
-모래내 길/전동균-
새로 생긴 옥천냉면집 주인은
아침에 닦은 유리창을 또 닦고 있다
감자탕집 연변댁은 핸드폰 통화를 하면서
흐느끼듯 파를 다듬고
은하약국 담 밑 스티로폼 상자에는
상치들이 푸른 물처럼 솟구치고 있다
비 오고 잠깐 해 나고 바람 불고 다시 비 뿌리다
또각또각 해가 나는 사이
골목들은 늙으면서 더 부지런해져서
내일은 또 무슨 일을 할지 모르는데
니에미, 날마다 우유를 사도 인사 한 번 안 하는
하얀슈퍼 뚱땡이 녀석은
허벅지에 새끼토끼 같은 스쿠터를 끼고서도
빗물 고인 웅덩이를 잘도 피해간다
예전엔 화장터였던 곳
-악기 사러 가는 길/이정란-
무궁화 악기점 진열대에 첼로가 서있다
유리창에 이마를 들이대고
초롱한 눈빛으로 창 밖 거리의 악보를 읽는다
첼로의 느슨한 줄이 내 눈길 쪽으로 당겨지자
도시의 오후가 팽팽해지고
음을 맞추는 소리 붕붕거린다
유리창 안에 어른거리던 노래의 한쪽 문이
열리고 파도치듯 흘러나온
세바스찬 바하의 무반주 첼로곡이
가을비에 떨어진 은행잎의 속살 속으로
아득히 젖어 든다
생의 한 줄이 끊어진 사람들의
잃어버린 음표가
굵어지는 빗소리에 떠나려간다
부르튼 손가락으로 슬픔을 짚어가는
얼굴들은 매달 낡은 악상 한 대
신호등에 걸려 주춤거리다
마지막 한 소절을 향해 달려간다
누군가 가슴줄을 뜯고 있을 때
소리를 잃은 관악기들이 목쉰 울음을 꺾어
삼키며 지하에 웅크려 선잠을 잔다
-길에게 묻다/박소영-
온몸 내어주고 나를 받아주는 길을 간다
먼 산 바라보고 걸었던
무심히 내딛는 발에 밟힌 생명들에 대한 생각
봄싹 움트듯 돋아나더니 개미처럼 분주하다
잎과 열매 다 내어준 채
묵언수행에 든 은행나무에 기대어 하늘을 본다
유리창처럼 투명한 하늘, 마음속까지 들여다 보는 듯한데
저처럼 맑아질 수 있는가
나는,
은행나무와 이 땅의 모든 것들, 하늘도 길 위에서
살고 있었음을 오늘에야 알게 된
나는,
누군가에게 길이 되어준 적이 있는가
-먼 산, 아주 오래된 길/이영춘-
어둠 속을 걸어가는 한 스님을 보았다
달빛이 그의 발목에 감겼다
산 그림자가 그의 어깨에서 출렁거렸다
먼 산동네에서 개 짖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어둠이 그를 지웠다
어제 떠나온 길
오늘 떠나갈 길
내일 돌아가야 할 길
길 위에서 지워지고 있었다
그의 그림자가 없다
발자국이 없다
텅 빈 길 위에
눈이 내렸다
-둘레길에서/김종철-
아내와 함께
둘레길을 산책하다 보면
잔디로 잘 다듬어진 묫자리를 본다
아주 편안해 보인다
따라 눕고 싶어진다
이러면 안 되는데 싶다가
자주 뒤돌아서는 눈길
나도 때가 됐음인가
지상에서 받은 축복과
은혜도 갚지 못하고
이 풍진 세상
작은 봉분 하나로 우리를 챙기는 생애
먼 뻐꾸기 울음이 지나온 길을 끊는다
-솔밭 길 핀, 핀, 핀,/서 하-
화장대 서랍 정리를 했습니다
올림머리 할 때 꽂았던 머리핀, 소복한데요
서랍은 아직도 스물 넷, 나보다 훨씬 젊습니다
솔밭 길 함께 걷다가 사내가 계집의 등 뒤에서
껴안아주던 두 팔도 알고 보면
계집이 달아날 수 없게 한 하나의 핀이었을 터
손 놓지 않겠다는 언약 돌돌 말아
덜컥 머리부터 올렸던 까만 핀, 핀, 핀,
계곡 물소리가 계곡 붙잡고 있듯
불룩한 올림머리 뒤에는
아직도 팔 뽑지 않은 당신이 있습니다
“아니요” 라고 말하고 싶은데 “예”라고 말할 때 있듯이
나무가 그 산을 떠나지 못하는
정말 떠나고 싶지 않아서일까요
물소리, 새소리 베고 누운 저 길 위
소나무 작심한 듯 또 핀, 핀, 핀, 쏟아내는데요
손닿지 않는 나무위에서도
메마른 땅위에서도
일심으로 피어줄 수 있을까요 핀, 핀, 핀,
저렇게 피울 수 있다는 것은 아직 젊다는 뜻,
솔밭 길 두 팔 뻗어 소나무를 쓰윽 껴안네요
그 날의 당신처럼
성당의 종소리 끝없이 울려 퍼진다
저 소리 뒤편에는
무수한 기도문이 박혀 있을 것이다
-길을 찾다/조삼현-
가까운 것들이 가뭇없다
시집을 읽는데 부옇게 낀 안개가
행간을 덮는다, 눈을 비벼
장막을 걷어내도 좀체 돌아오지 않는 길
잔뜩 미간 찌푸려 실눈을 뜨자 잠깐
피었다 사라지는 길
눈감고도 다니던 길이 지워져 버렸다
눈길 가는 곳이 마음 닿는 곳이라면
이제 길은 안경점에 있다
안경점에서 길을 묻는다
가까운 것은 어디에 있나요?
그렇군요, 돋보기 속에서 찾아보세요
순간 안갯속 길이 피어난다 사라진 길이 돋는다
모든 가까운 것들은 멀어져 가는데
아직 먼 곳이 잘 보인다면
나와 주변만 살피지 말고
먼 별들의 슬픈 사연도 눈여겨보라는,
가까운 곳보다 먼 곳이 가깝다
-달팽이의 길/김세영-
삭지 않는 기억들로 배앓이하다가
꼬인 장을 백팩 속에 쓸어 담고
길을 나선다
온몸을 비틀고 꼬며 넘어가는
시간의 눈금이 성글어
길 위의 여행이 멀고 힘겹다
언제나 혼자라는 것을 잊기 위해
자기최면의 자위행위를 하다
점차 중독이 되어갔다
오르가슴의 궤적은 느리지만
둑길처럼 두텁고 끈적하여
폭우에도 몸을 붙인다
밤이슬 서늘한
길 위의 노숙자에겐
슬리핑백은 몸에 꼭 맞는 집이 된다
혼자만의 체온으로 침실의 불을 켜고
여린 잎사귀의 꿈을 먹는다
길 위의 여행이 끝나는 곳에서
문을 잠그면
먼 시간의 여행길 위에서
돌멩이처럼
굴러가는 무덤이 된다.
-신의 시간, 인간의 길/이승하-
밤이 만들어졌다 신은 지금 피곤하다
밤에 깨어 있는 자를 위하여 별을 만들었다
신이 역사하지 않아도 제 몸을 태워 빛을 내는 별들
빛이 어디에서 시작되어 어디로 가는지를
신은 알고 있으나 말하지 않는다
신은 지상에 나타나지 않고
매일 밤 천공에다
자신의 초상을 다르게 그릴 뿐
신이 지금 밤하늘에서
시간을 빚어내고 있다
별과 별 사이의 거리를
떨어뜨리고 있다
멀어지는 별과 별 사이에서
나의 나날은 죽고 죽고
나 또한 죽어서 별과 멀어질 것이다
저 마디마디 아파서 빛나는 별마다에서
살아있는 것들의 고통을 느낄 수 없다면
인간으로 태어났으되 나, 인간이 아닌 것을
밤에는
신도 쉬어야 한다
인간의 길은 아침이 오기까지
언제나
너무 길었다, 힘들었다.
-달의 뒷면을 보다-바래길 연가 섬노래길/고두현-
송정 솔바람해변 지나 설리 해안 구비 도는데
벌써 해가 저물었다
어두운 바다 너울거리는 물결 위로
별이 하나 떨어지고
돌이 홀로 빛나고
그 속에서 또 한 별이 떴다 지는 동안
반짝이는 삼단 머리 빗으며
네가 저녁 수평선 위로 돛배를 띄우는구나
밤의 문을 여는 건 등불만이 아니네
별에서 왔다가 별로 돌아간 사람들이
그토록 머물고 싶어 했던 이곳
처음부터 우리 귀 기울이고
함께 듣고 싶었던 그 말
한때 밤이었던 꽃의 씨앗들이
드디어 문 밖에서 열쇠를 꺼내 드는 풍경
목이 긴 호리병 속에서 수천 년 기다린 것이
지붕 위로 잠깐 솟았다 사라지던 것이
푸른 밤 별똥별 무리처럼 빛나는 것이
오, 은하의 물결에서 막 솟아오르는
너의 눈부신 뒷모습이라니!
-하늘길/함민복-
비행기를 타고 날며
마음이 착해지는 것이었다
저 아랜
구름도 멈춰 얌전
손을 쓰윽 새 가슴에 들이밀며
이렇게 말해보고 싶었다
놀랄 것 없어 늘 하늘 날아 순할
너의 마음 한번 만져보고 싶어
새들도 먹이를 먹지 않는 하늘길에서
음식을 먹으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가까운 나라 가는 길이라
차마, 하늘에서, 불경스러워, 소변이나 참아 보았다
<돌샘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