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길/윤제림-
파마머리 여자 하나가
커다란 여행용 가방을 끌고 대합실을 나온다
끌리는 가방 뒤에
서너 살짜리도 하나 끌려나온다.
아이가 징징거린다
"멀었어?"
여자가 소리친다
"다 왔어."
아이가 퍼질러 앉는다
"다리 아파."
둘둘 말린 주간지가 아이의 머리를
후리치고 어깨를 내려친다,
등짝을 갈긴다.
"조금만 참아, 다 왔으니까."
거짓말이다, 집은 멀다
바닥이라 해야 하나, 꼭지라 해야 하나
저 가을 하늘만큼
멀다.
-앵두의 길/이경림-
그 때 나도 터질 듯 붉었을까
온몸에 빽빽이 그걸 매달고
미친 듯 역류하고 있었을까
생각날 듯, 생각날 듯 앵두꽃 떨어지고
어디 꽃자리만한 영혼이 문득 앵두로 익어갈 때
누군가 간절히
─얘들아, 그만 내려와, 너희들은 지금 너무 빨갛구나
타이르는 저편 하나 없이 막무가내
땡볕인 척 타올랐을까 부지불식의
속을 짓물리고 있었을까
가지마다 아이들을 다닥다닥 매단 그 나무는
왜 어째서 어떻게
그렇게 한 자리를 전속력으로 달아났을까
달아나면서, 갈피마다 빨갛게 죽은 아이를 숨긴 채
마침내 가장 여린 가지에 깊이 찔린 것일까
그것이 앵두일까
앵두의 꿈일까
가령, 천지간에 가득한 앵두 하나 있어
희고도 붉고 깊고도 휘둥그런 앵두 하나 있어
아득하고 모호하고 번개 같고 굼벵이 같은 앵두 하나 있어
아침보다 저녁보다 자욱하고 텅 빈 앵두 하나가 있어
마침내, 수미산보다 크고 눈곱보다 작은
새빨간 장롱 같은
앵두 하나 까무러칠 듯 익는 동안
나는 피비린내를 과육 향으로 읽으며
무슨 유구한 영혼처럼 어른거리던 그 나비들을 다 버려야 할까
그러나 나무 위로 올라간 앵두들은 끝내 내려오지 않고
볼이 터져라 달아나기만 하는데
어쩌자고 참
앵두는 앵두
앵두나무는 앵두나무
-상쾌해진 뒤에 길을 떠나라/고진하-
그대가 불행의 기억에 사로 잡혀있을 때,
그대의 삶이
타인에 대한 불평과 원망으로 가득할 때
아직 길을 떠나지 말라.
그대의 존재가
이루지 못한 욕망의 진흙탕일 때,
불면으로 잠 못 이루는
그대의 밤이 사랑의 그믐일 때
아직 길을 떠나지 말라.
쓰디쓴 기억에서 벗어나
까닭 없는 기쁨이 속에서 샘솟을 때,
불평과 원망이 마른풀처럼 잠들었을 때,
신발끈을 매고
길 떠날 준비를 하라.
생(生)에 대한 온갖 바람이 바람인 듯 사라지고
욕망을 여윈 순결한 사랑이
아침노을처럼 곱게 피어 오를 때
단 한 벌의 신발과 지팡이만 지니고도
새처럼 몸이 가벼울 때,
맑은 하늘이 내리시는
상쾌한 기운이 그대의 온몸을 감쌀 때,
그대, 그대의 길을 떠나라
-눈물이 저 길로 간다/김사인-
눈물이 저 길로 간다
슬픔 하나 저 길로 굴러간다
물 아래 물 아래 울음이 간다
찔레꽃 한 잎 물 위에 흘러간다
오늘 못 가고 내일
내일 못 가고 모레 글피
글피 아니고 아득한 훗날
그 훗날 고요한 그대 낮잠의 머리맡
수줍은 채송화꽃 한 무더리로
저 길로 저 길로 돌아
내 눈물 하나 그대 보러 가리
그대 긴 머리칼 만나러 가리
서늘한 눈매 만나러 가리
오늘 아니고 어제
어제도 훨씬 아닌 전생의 어느 날
눈물은 별이 되어 멀리로 지고
손발 없는 내 설움 흰 눈 위로
피울음 울며 굴러서 간다
-한유성길/한창옥-
사차선 사백 미터 아버지의 넋,
잠실 '한유성길'을 자동차로 달린다
- 죄송해요, 죄송해요
석촌호수에 청동흉상이 되신 아버지
- 허, 괜찮다 괜찮다, 차 조심해라
정치와 예술이 절대적이던 아버지에게 손님 초대는 일상이었다
아버지가 부르시는 호칭대로 민주당 윤보선 박사, 장면 박사, 박순천 여
사, 조병옥 박사… 손님 오신 날은 수동전화기 벨이 요란했고 바쁘게 손잡
이 돌려진다
교환원이 연결해준 중국집에서 십리를 트럭에 실려와 모락모락 김나는
자장면은 최고로 신났다
자장면을 싣고 온 트럭도 으쓱대는 날이다
신익희 선생은 대통령 후보였으나 갑작스런 급서로 아쉬워하던 아버지,
최초 여성 제1야당 당수였다는 박순천 여사의 남성적인 언변에 나도 저
런 여성이 돼야지 하던 어린 꿈은… 어쩌다 시인이 되었다
해방은 송파산대놀이의 재기의 기회였고
해방과 함께 대한 청년단 감찰부장을 맡아 반공전선에 헌신하던 아버지
는 6 · 25동란이 일어나 피난을 가지 못해 지옥 같은 석 달 열흘을 지하에
숨어 굶주림과 생명의 위협을 겪은 가장 어려웠던 시절로 기억한다
일제 때 말살된 송파산대놀이와 답교놀이의 긴 복원은 중요무형문화재
49호로 문화적 소산이다
인간문화재로 불같이 사시다 유언 없이 가신 아버지,
몹시도 그리운 날은 서울놀이마당 한유성길을 건너 주래등에서 모락모
락 김나는 자장면을 먹는다
-길을 잃다/이영춘-
밤새 철석이는 파도의 발자국
길을 찾아가는 모든 것들은 길 없는 길을 간다
허공을 날아가는 새들의 길과
파도 갈피에 날개를 젓는 갈매기 떼의 길과
밤하늘에서 제 빛으로 길을 내고 있는 달빛의 길,
어둠 이쪽에서 길을 잃고 있는 내 늑골의 길은
어느 암갈색의 암벽을 오르고 있는가
어느 고생대에서 화석이 된 화석의 뼈로
길을 묻고 있는가
누구를 저주했거나 원망했다면
그 죄의 피 한 방울 내 몸으로 흘러들어
길을 잃고 길을 찾는 것일까
암벽 저 쪽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저 어둠의 날개
펄럭이는 어둠의 날개에 걸린
새 한 마리
허공에서 운다
-새의 길/구재기-
새는 부리로
길을 만들며 날아간다
하늘을 날아갈 때나
땅 위에서나 물 위에서나
앞으로 나아갈 때면
목부터 먼저 앞으로 쭈욱 뻗는다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두 눈을 번뜩이며
무엇인가를 찾아 나선다는 것
바로 선 자리에서
오직 앞으로만
지나온 자취가 새겨질 때
지상에 새겨진 자취가
사실은 얼마나 큰 죄인가를 안다
그래서 먹이를 찾을 때에도
고개 숙여 속죄를 거듭하다가
날갯죽지 확 펼쳐 몸을 털어내다가
먼 하늘을 우러르다가
마침내 새는
하늘을 난다 하늘을 날며
부리가 만들어 놓은 길을
끊임없이 지워댄다 그걸 알고
하늘을 지나는 구름은
지상에 짙은 그림자를 만들어
새의 발자국을 자꾸만 덮어준다
-고장 난 길/김명희-
제주 김녕의 '고장 난 길'* 활자를 따라
벽 속 골목으로 스며든다
벽화 작업하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매화와 이른 벚꽃이 한통속
으로 피어나고 있다 그냥 꽃이라 하면 안 되나 저토록 잘 어우러졌
는데 매화 벚꽃 매화 부르는 사이 잡다한 풀과 꽃이 쳐들어오는 봄,
화장실 변기 물을 내릴 때도 빌린 돈의 이자처럼 불어나는 세상사
이 끔찍한 것을 봐야하는 봄! 본다는 것은 살아낸다는 것이다 온몸
던져 벽과 싸우는 것이다
허리 굽은 나무를 보면 안다
하늘도 나무에 기댈 때가 있다는 것을
누군가 쇠를 구부려뜨려서 꽃을 만들자
손아귀와 손목 힘줄 사이로 바다의 지느러미가 움직인다
*'꽃이 핀 길'의 제주 말
-잘못 든 새가 길을 낸다/강경호-
한 줄의 시도 못 쓰고 있을 때
길을 잘못 든
지금까지 보지 못한 새 한 마리 날아들었다
놀란 새는 내 관념의 이마를 쪼다가
출구를 찾으려 발버둥 쳤다
책에 부딪혀 깃이 빠지고 상처를 입은
새를 바라보는 동안 고통스러웠다
새는, 이 따위 답답한 서재에서는 못 살아 하며
푸른 하늘과 숲을 그리워하면서도 쉽게 나가지 못했다
두렵고 궁금하고 불량하고 불온하고 전투적인
피투성이가 된 새를 바라보는 동안
나도 피투성이가 되었다
새가 소설집에 부딪치고, 시집에 부딪치고
진화론에 부딪치고, 창조론에 부딪치는 동안
산탄처럼 무수히 많은 새끼를 낳았다
새는 겨우 출구를 찾아 날아가 버렸지만
새가 낳은 수많은 새끼들
내 마음의 서재에 살게 되었다
또다시 잘못 든 새가 그립다
-파로마 그릴 찾아가는 길/강인한-
오전의 햇살이 동쪽에서 새들어온다.
꽝꽝나무 아래 숙취의 부스러기
참새들 금빛에 홀려 토독토독 쪼아댄다.
입춘을 넘긴 후쿠오카
파로마 그릴 찾아가는 이면도로
꽝꽝나무들 줄줄이 표어를 달고 행진한다.
제국 군대처럼
—음주운전을 박멸하자!
—음주운전을 박멸하자!
확성기 소리로 울부짖는 까마귀
신사 근처에 숨어 있다가 언제 날아왔나.
꽝꽝나무들 머리 깎고 반성하고 있다.
꽝꽝나무 속 생쥐 한 마리
참새들에게 물어보고 싶은 까만 눈빛으로
(스물여덟 윤동주가 죽어간 형무소가 어디쯤인지)
그늘 한 장 빼내려다 움츠린다.
꽝꽝나무 속 스크럼은 검은 초록빛,
악몽처럼 무섭다.
소름 돋는 후쿠오카 까마귀.
-숲길/최서림-
1
안으로 빗장 걸고 제 속에 갇혀있는 사람들,
참새 한 마리 숨 쉴 산소라도 남아 있을런지,
뉴기니 정글보다 더 깊고 눅눅한
내면 속으로 빠져들고 싶지 않다.
다이달로스 미궁보다 더 복잡한
내 속에서 길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다.
편백나무 숲속 비박은 말기 암도 고치지만
사람의 숲 속에서는
더 짙은 피톤치드가 뿜어져 나온다.
그 숲을 가꾸며 늙어가는 시인이 되고 싶다.
2
참기름 장사하며 갈참나무로 서 있는 친구.
국수집 하며 국수나무같이 꾸부정하게 휜 친구.
퇴직하고 이끼 낀 바위처럼 여기저기서
엎드려 숨만 쉬고 사는 친구들.
‘데리다’, ‘라캉’이라곤 들어본 적도 없는,
몰라서 더 잘 살아내는 동무들로
가리봉동 왕족발 집에 숲이 가득 들어찼다.
그 숲에 들어서자 막사발 같은 사투리가
동해바다 고래 등 분수처럼 솟아올랐다.
마음속 암 덩어리가 다 녹았다.
3
내 마음 깊은 곳에 숨어있는 고향에는
살구나무 숲 성벽이 둘러 처져있다.
그 안으로는 시간도 뚫고 들어가지 못한다.
모래무지와 송사리가 놀고 있는
바닥까지 훤히 비치는 개울이 지금도 흐른다.
새마을운동 이전의 초가집과 돌담 아래서
초등생 동무들이 땅따먹기하고 있다.
농약 냄새 나지 않는 복숭아꽃 흐드러진 그곳에는
첫사랑도 들어와 여직 살고 있다.
운동권 시절 친구들도 슬며시 끼어들어와 산다.
늙지도 죽지도 않는 내 안의 고향이 보고 싶을 땐
용접공 친구 얼굴 보러 일산까지 간다.
4
몸도 마음도 아직 무덤 속인 사월,
둘레길이 있다는 것만으로
나무다리 밑 송사리 떼처럼 즐겁다.
동행이라도 있다면
새순 돋는 느릅나무처럼 재잘거리고 싶다.
황장목이라도 몇 그루 만나면
선비처럼 너울너울 학춤이라도 추고 싶다.
봄비에 막 꽃망울 터뜨리는
배나무, 살구나무, 앵두나무 어우러진 강의실,
뚫어져라 쳐다보는 제자 서너 명만으로도 족하다.
친구들과 목욕하고 봄볕 쬐고 시를 읊조리며
돌아오는 게 꿈이라던 증점(曾點)의 마음 알 듯하다.
공릉동에서 제자들과 국수 먹고
사람들 사이 숲길을 느릿느릿 밟아보는 것만으로도
아테네 철학자들만큼 들떠 오른다. 그 숲속에
시의 집을 지어놓고 향연을 벌이고 싶다.
5
불암산 자락 굴참나무 숲속에
부엉이 같은 시인들이면
누구나 들고 날 수 있는 집,
바람과 나뭇잎처럼 만났다 헤어질 수 있는
윌든 호숫가 오두막 같은
푸른 말의 집을 짓고 싶다.
들어오는 사람 숫자만큼 무한정
방이 늘어나는 집을 짓고 싶다.
-길 킬러/이순현-
어떻게
겨눌 수 있겠니 헐벗은 저 맨발을
일어서려 일어서 걸으려
뒤뚱거리다 넘어지다 겨우 얻은
왼발 오른 발
언제나 옳은 두 발바닥
초고속으로 회전하는 윤전기 지구
점․점․점 이어지는 선 하나를 그리며 쭉
나아가다 가다 다다르는 마침내
내릴 비 다 내린 구름처럼
빛도 어둠도 따라올 수 없는
제 눈꺼풀 속으로
흩어지며 스며드는 맨살 맨발바닥을
어떻게,
길 끝의 냄새에
히말라야를 배회하는 독수리처럼
촛불이 가장 먼저 달려들겠지
그리로 가는 걸음걸음
핏줄기로 엮은 소금호수에서 흘러나오는 그 걸음들이
완력으로 겨누어지겠니
그깟 총기로 흩어지기나 하겠니
너 또한 맨발인 믿음,
가엾은 믿음아
-바람들의 길/임 보-
언덕 위에 서면 바람들의 길이 보였다
바람들도 빛깔이 있었다
투명하지만 색유리처럼 맑고 깨끗한 빛깔이었다
감귤 밭을 넘어온 남풍은 노오란 빛
전나무 숲 속을 빠져나온 북풍은 청록빛
쪽빛 바다를 밟고 온 서풍은 남빛이었다
바람들은 들판에서 서로 만나 오색 실타래들이 꼬이듯 몸을
비비며 돌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떤 바람의 실가닥은 풀리어 초가집 사립문 틈으로
슬며시 스며들기도 하고
어떤 가닥은 잠자는 송아지 코 속으로 조용히 빨려들기도 했다
문득 꺽꺽꺽 장끼 한 마리 숲을 깨고 솟아오르자
황·록·청·백·홍 오색 바람들이 소용돌이치며 몰려와 눈부신
날개를 허공에 만들었다
주위를 가만히 살펴보았더니 이 어찌된 일인가
감귤 밭을 향해서는 다시 황색 바람이
쪽빛 바다쪽으론 다시 남색 바람이
전나무 숲으론 다시 청록색 바람들이
떼를 지어 달려가고 있었다.
-인연의 숲길을 함께 걸었기에/손희락-
서릿발 언어로
시퍼런 멍을 남기고
이별의 길을 떠나 갔어도
미워할 수 없는 것이 사랑입니다
평생에 단 한 번 일수도 있는
인연의 숲길을 함께 걸었기에
그대를 위해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대 그리울 때
추억의 나뭇잎태워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며
컴컴한 방안에 틀어박혀 있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사람을 만났으나
서툰 사랑으로
그 꽃이 시들어버린
슬픔이 너무 깊기 때문입니다
하루 세 번
기도의 창을 열고 무릎을 꿇습니다
그대는 떠나갔어도
영원한 내 사랑입니다
-외갓집 가는 길에 폐선이 있다/고석종-
내가 보기에 세상의 모든 폐선들은
지 몸 어디엔가 안락의 베개를 베고 누워 있다
끊임없이 방부제가 새어 나오고
뱃속엔 오갈 데 없는 물들이, 우울증 환자처럼
멍한 시간 속에 놓여 있다
즐겁지 않은가
폐선 같은 몸으로 외갓집에 들르면
형사 조카가 왔다며
유자꽃 같은 웃음으로 반겨주시던 외삼촌
이제 언덕을 넘어가시려는 걸까
덜거덕거리는 틀니 속에 안락의 베개가 보인다
애달픈 나는 숨 가쁜 생의 닻줄을 부여잡고
퍼내도, 퍼내도 쉼 없이 솟아나는 눈물을
외삼촌 손등에 쏟아 붓는다
외삼촌은 손으로 낡은 폐선을 가리킨다
나는 장독대 아래
오종종 피어 있는 봉숭아꽃으로 눈을 돌린다
마른 고구마 순처럼
곧 부서질 것 같은 외삼촌의 손끝이
내게 머물렀기 때문이다
다 닳은 빗자루처럼
허우대만 멀쩡한 말단 형사인 나는
폐선이다, 그러므로
내 몸 어디엔가 안락의 베개가 있을 것이다
오, 생의 막장에서부터 밀려오는 통증
나는 왜, 이 기쁨을 즐기지 않고
세파에 떠내려가지 않으려
입에다 진통제를 한 주먹씩 털어 넣고
긴 목을 빼내어 썰물 같은 신트림만 하는가
-길-탑리*에서/김이솝-
얼마나 걸어 들어가야
생면부지의 길들을 벗어날 수 있을까
길은 구부러진 운명을 갖고 태어나고
그 운명 위로 내 운명도 함께 구부러져 지금
탑리로 들어가는 중이다.
서로의 등을 맞대고 걷는 길과 나는 멀어진다.
시간의 굽은 골격 안으로 풍경 하나가 사라지고
낡은 괘종소리를 듣는 탱자나무 가시 속
울컥, 독주(毒酒)로 마시는 노을,
나는 한 사람을 용서하며 걷는다.
슬픔의 빛깔이 아닌
스스로의 품격으로 굽은 길을 돌아 나올 때
걸어온 길들의 모습은 슬프던가 아름답던가
내가 나를 용서한 것보다 더 크게
걸어온 길들이 인내해 준 그 품격만으로도
저토록 휘어져 돌아나가는
눈물겨운 길,
나는 지금 탑리로 들어가는 중이다.
* 탑리 : 경북 의성군 금성면에 있는 마을 이름.
-길/장석주-
너무 많은 귀들을 잘라 냈으므로
또하나의 귀를 자르지만
알 수 없는 것은 사방의 새소리들이
어두워진 들길에 떨어져 갈 바를 잃는 것,
어머니가 나를 버렸으므로
내 성년은 길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지만
즐거운 것은 사방의 새소리들이
바람 속에 푸른 깃털을 구르게 하는 것,
사라져 가는 것은 대낮의 빛만이 아니다.
저 숲으로 지는 노란 저녁별들이 끌고 가는 길들을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눈물이 나지,
저녁별이 지면, 아득히
젖내가 나지,
너무 많은 길들을 지웠으므로
또하나의 길을 지운다.
<돌샘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