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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제 시 모음

'길'을 주제로한 시 모음 (31)

작성자돌샘이길옥|작성시간26.06.13|조회수59 목록 댓글 0

-두 개의 길/권행은-

짙은 꽃그늘 속으로

스피치 한 마리가 주인을 따라 걷고 있다

주인이 서면 따라 서고 주인이 앉으면 따라 앉으며

주인이 밟은 자리를 골라 디디며

꼬리를 흔들며 가고 있다

 

주인의 목소리가 끌고 가는

낯익은 발자국을 따라가던 스피치

꽃그늘 속 풀꽃들의 말에 취해

주인의 그림자는 잃어버리고

또 다른 주인을 따라 어디론가 가고 있다

 

처음에 걸을 땐 한 개의 길,

걷다가 보니 또 한 개의 길이 된

주인의 길과 꽃그늘의 길,

 

주인을 따라 걷던 길이 어느새

꽃그늘 길이 된,

두 개이면서 하나인

겹의 길

 

 

위험한 틈새에 거꾸로 매달린 매미의

뜨겁고 불온한 탈피의 시간이 풀꽃으로 자라나는

바람 냄새 가득한 꽃그늘을 따라

스피치 한마리가 소풍을 가고 있다

 

한 개의 길인 듯 두 개의 길을 걸어

풀꽃의 내면에 든 매미 울음소리 따라

그늘 흐드러진 중음의 시간을 건너고 있다

 

 

-검은 바다로 가는 길/문 신-

 

오래전 나는 이렇게 들었다 

 

―검은 구름의 들판을 지나 검은 강물이 흐르는 협곡을 거슬러 오르면 거기 비석처럼 검게 탄

고사목이 서 있을 것이고 고사목 뿌리로부터 흘러나가는 검은 바다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형이 그랬던 것처럼

검은 바다로 가기 위해 밤의 어둠 속으로 붉은 발가락들을 밀어 넣었다

어떤 기미에 닿듯

검은 자갈들을 밟으며 몽골리안의 계보를 써내려갈 때

 

길의 거푸집은 일흔세 개였다

형이 쓰다 만 칠십삼 일 간의 일기처럼

길은

접힌 페이지마다 검은 잉크로 출렁거렸다

나는 왜 검은 바다로 가는가

이런 생각들이 떠오를 때마다 형을 생각했다

형이라면 어땠을까?

 

일흔세 번의 밤을 뜬눈으로 보낸 형이 마침내 검은 바다로 떠나던 날

이른 봄꽃이 번개처럼 터졌고

봄,

나는 그렇게 시작하는 형의 일기를 읽었다

형이 보고 싶어 한 것은 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형은, 그래 형은, 아무 것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형이 그랬던 것처럼

나 또한 아무 것도 보고 싶지 않았다

검은 바다로 가기 위해서는 그래야만 했다

눈을 감고

검은 구름의 들판을 지나 검은 강물이 흐르는 협곡을 거슬러 오르  기만 하면 되었다

그 끝에

검게 죽은 형이 고사목처럼 우뚝 서 있을지 모르겠지만

형의 시선이 묵비(默祕)처럼 타버린 그 끝에 서면

 

뒷면까지 까맣게 젖어든 형의 스물일곱 생애가 검은 바다로 흘러가고 있을지도 몰랐다

 

 

-파란도 길이다/감태준-

 

까마득히 높은 절벽과 처음 맞닥뜨렸을 때

파도는 얼마나 끔찍했을까

백사장 놓치고

유채밭 옆 갯고랑도 놓친 파도가

애 터지게 절벽을 밀어붙인다.

 

절벽을 넘지 않으면

물살 드센 바다밖에 돌아갈 데 없는 생이라.

절망하고 절망하면서도 남은 절망으로

몸을 세우는 억척.

 

길지 않은 천명에

머뭇댈 틈 있는가.

다치고 부서지고 짐승처럼 우는

파란도 길이다.

 

절벽 너머 세상은

못 가는 곳이 아니라 안 가본 곳이라고,

백사장에 행장 풀 순서 아니라면

살아내는 것이 먼저라고,

한 번 더, 한 번 더 절벽을 밀어붙인다.

 

옆에서 폐지 리어카 끄는 꼬부랑 노파도

기를 쓰고 절벽을 밀어붙인다.

 

 

-같이 살고 싶은 길/조정권

1
일 년 중 한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 혼자 단풍 드는 길
더디더디 들지만 찬비 떨어지면 붉은빛 지워지는 길
아니 지워버리는 길
그런 길 하나 저녁나절 데리고 살고 싶다

늦가을 청평쯤에서 가평으로 차 몰고 가다 바람 세워놓고
물어본 길
목적지 없이 들어가 본 외길
땅에 흘러 다니는 단풍잎들만 길 쓸고 있는 길

일년 내내 숨어 있다가 한 열흘쯤 사람들한테 들키는 길
그런 길 하나 늘그막에 데리고 같이 살아주고 싶다

2
이 겨울 흰 붓을 쥐고 청평으로 가서 마을도 지우고 길들도 지우고
북한강의 나무들도 지우고
김 나는 연통 서너 개만 남겨놓고
온종일
마을과
언 강과
낙엽 쌓인 숲을 지운다.
그러나 내내 지우지 못하는 길이 있다.

약간은 구형인 승용차 바큇자국과
이제 어느 정도 마음이 늙어버린
남자와 여자가 걷다가 걷다가 더 가지 않고 온 길이다

 

 

-바다로 가는 길/송연숙-

 

1.

한 줄이다

모텔의 창을 열면

해송의 우듬지에 수평선이 걸려 있다

 

 위험 도로 끝, 이라고 쓴 이정표 아래

입을 벌린 물고기

바다로 가는 길을 묻고 있다

 

2.

바닷가 소나무

거친 바람을 맞는 것이 타고난 업이다

파도소리 밀려와 앉을 틈 없이

벗겨져 나가는 소나무의 살 허물,

맨살 위로 짠 바람 빛나게 몰려온다

검은 눈물이 된 솔방울

긴 속눈썹이 젖는다

누가 저 눈물을 호리병에 담아 위로해 줄 것인가

 

3.

솔잎이 뭉쳐진 줄 알았다

죽어 누운 새 한 마리

솔잎 깃털 사이로 하얀 뼈 몇 개 삐죽 올라와 있다

눈을 감싸던 동그란 뼈

허공을 굴리며 먼 바다로 눈길을 보내고 있다

이제 바람은 그의 날개를 가볍게 들어 올릴 것이다

망망대해를 날아

한 점, 찾을 수 없는 마음 지나는 동안

어쩌면 아침 햇살이 될 지도 모르지

  

4.

위험 도로 끝, 그 앞에 다시 선다

끝이라는 말은 얼마나 많은 칼날을 품고 있는가

부드러운 혀가 입천장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무너질 것 같지 않은 침묵, 그 기둥에 매달려

얼마나 많은 거리를 헤매어 다녔는지

옥상으로 향하는 젖은 발걸음에 놀라

축축해진 꿈을 깨면서도 알지 못했다

호흡하는 매 순간이

끝의 끝, 시작의 시작인 것을

길의 끝이라 한들 무엇이 그리 위험하겠는가

가속도를 붙이며 달려 온 이 곳

 

5.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바다와 마주 앉는다

허공을 지우며 가는 갈매기 한 마리

바다의 발톱 한 끝이 가슴을 치고 달아난다

 

 

-/송영숙- 
 
외암 민속마을 돌담길
보라색 도라지꽃 외돌아져 피어있는 길
 
이천 년 전쯤이었을까
가난이 몸에 잘 맞는 옷처럼 어울렸을
한 남자와 이 길을 걸으며
어렵게 이별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 같은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쓸쓸할 수가
 
그때
녹슨 사조구*라도 힘껏 던져둘 걸
다시 만나면 같이 살아보자 할 걸 그랬나
생각하면서
 
그리움 없어도 한자리에 마음을 묻고
육백년을 서 있는 느티나무 사뭇 흘겨보다가
손가락으로 옆구리 쿡 찔러보았다

*이 병기는 충무공께서 창안하신 것으로
근접전에서 적선을 잡아당기는데 필요한 무기이다.

 

 

-하산 길/김예진-

 

가장 높은 곳에서의

두근거림

그 꿈으로 몇 번이나 감격에 물들었던가요

 

눈앞에 꽃밭을 지나치고

선뜻 돌아보지 못해

아바타의 몸짓으로 직진만 고집한 길

멀고 먼 곳으로

 

발돋움을 끝낸

산이 눕고 비가 내리고

꽃의 각도가 사라진 내리막

그 옆에 함부로 선 비탈

미처 몰랐던 어둠이 산으로 내린 탓일까

 

바람의 순간에도

지우지 못한 구석이 있어

부주의한 길이 넘어지는 헛헛한 오후

 

그 안으로 든 가을

내내 놓아주지 않던

꽃의 잔해가 발끝에 떨어져

무게를 더는 시간

자고로 웃고 떠들던 악수를 청한다

 

 

-질문이 쌓인 길/돈-

 

붉은 잎들이 눈을 뜬다

도시의 벽과 창은 캄캄한데

도시와 바닥은 질문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바닥에 떨어진 도시들

지나간 길들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기다림이 누워있는 자세는 우울인가 남자인가 걸어가는 감정은 풀잎이 되고 황량한 들판이 움직이

는 자세는 바람인가 여자인가 불안이 자란 흔적들

 

지나간 발자국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저녁이 벗어놓은 광기들

 

나무가 지나간 길이 있는 것이다

 

길이 고개를 돌리면

도시의 벽과 창은 캄캄해지는 것이다

질문이 끊어진 바닥들

 

모든 기억은 오늘로 돌아가고

어제의 감정이 스쳐간

새가 휩쓸고 간

 

흔적은 탁본처럼 허공에 선명하다

 

-고향 길/신경림- 

  

아무도 찾지 않으려네
내 살던 집 툇마루에 앉으면
벽에는 아직도 쥐오줌 얼룩져 있으리
담 너머로 늙은 수유나뭇잎 날리거든
두레박으로 우물물 한 모금 떠 마시고
가위소리 요란한 엿장수 되어
고추잠자리 새빨간 노을길 서성이려네
감석 깔린 장길은 피하려네
내 좋아하던 고무신집 딸아이가
수틀 끼고 앉았던 가겟방도 피하려네
두엄더비 수북한 쇠전마당을
금줄기 찾는 허망한 금전꾼되어
초저녁 하얀 달 보며 거닐려네
장국밥으로 깊은 허기 채우고
읍내로 가는 버스에 오르려네
쫓기듯 도망치듯 살아온 이에게만
삶은 때로 애닯기만 하리
긴 능선 검은 하늘에 박힌 별 보며
길 잘못 든 나그네 되어 떠나려네

 

 

-꽃이 끄는 길/나영애-


동아리 모임
그곳에 탐스러운 꽃이 있었다
단숨에 내 마음 휘어잡는
근육질의 꽃


등산복 착용한 두 다리는
신전을 떠받고 있는 기둥처럼 탄탄해
땅! 망치가 머리에 떨어지는 것 같이
관능적이었다
허스키한 목소리로 몇 마디
호감과 정감의 말을 건네주었다


천 볼트 전기에 감전된 듯
들썩거리는 발걸음,
벌렁거리는 콧구멍
그러나 꽃에게 가는 길은


천길 아래 악어가 들끓는 외다리
마파람이 정신차려!
따귀를 때리는 길


그럼에도
더러 꽃을 소유하기도 한다는데
이상하게도 바로 시들어
살아도 폐허로 남는다 했다


못간다, 갈 수 없다. 버틸 때
꽃은 더욱 황홀하게 빛났다
만 볼트의 자석을 가진
페로몬 향의 끌림이
코끝에 되살아 올 때면
지금도 아득해진다.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강제윤- 

 

바람뿐이랴

냄비 속 떡국 끓는 소리에도 세월이 간다

군불을 지피면

장작 불꽃 너머로 푸른 물결 일렁인다

 

부황리에 사람의 저녁이 깃든다

이 저녁

평화가 무엇이겠느냐

눈 덮인 오두막 위로 늙은 새들이 난다

저녁연기는 대숲의 뒤안까지 가득하다

 

이제 밤이 되면

시간의 물살에 무엇이 온전하다 하겠느냐

밤은 소리 없이 깊고

 

사람만이 아니다

어둠 속에서 먼지며 풀씨,

눈꽃 송이들 떠돌고

어린 닭과 고라니, 사려깊은 염소도

길을 잃고 헤맨다

 

누가 저 무심한 시간의 길을 알겠느냐

더러 길 잃은 별들이

눈 먼 나에게도 길을 묻고 간다

 

 

-상처가 길을 만든다/진해령- 

 

길이란 헤매라고 있는 것

날 궂으면 욱신거리는 마음은 벌써 육체를 떠나

세상 구석구석을 떠돈다

—마음이 안 가본 길도 있을까

저 눈보라 자욱한 길 한 귀퉁이에

네가 우두커니 서 있을 것 같은 막막한 기대는

검문소 앞에서 종종 수신호에 걸리곤 했지

 

얼어붙은 세월에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바람조차 모로 부는 경춘 국도

서둘러 어두워지는 산비탈 아래

희미하게 엎드린 막국수 집에서 시장기를 부린다

 

구차한 내력이 있는 대로 너덜대는 행주로

그나마 식욕을 이리저리 쫓으며

구부정하게 묻는 사내도

그저 하나의 풍경일 뿐

방하리 쪽에서 떠내려 온 불빛 몇 개

다리에 걸려 잠시 주춤대지만

결국 하류로 흘러갈 것이다

 

상처도 쌓이면 길이 된다

아니 상처가 길을 만든다

 

 

-인도로 가는 길/이헤순-

 

인도로 가는 길은 멀지 않아요

공사장 입구 막힌 길 앞에

표지판이 서 있어요

좁은 좌석의 짧은 잠 뒤척거릴 시간이면 도착하는

낯선 풍경처럼 활주로가 있고 탑승게이트가 있을 것 같은

화살 표시의 끝 인도 혹은, 인도

 

여행을 간다는 건

며칠 혹은 몇 달의 시간을 돌아간다는 것

가설의 모퉁이 하나를 돌면 나타나는

인도로 가는 길

그곳에는 릭샤를 끄는 청년도 있고

이발 노점을 하는 노인도 있고

맨발로 구걸하는 여인도 있어요

기내식도 승무원도 없이

비좁은 좌석 같은 통로를 따라 도착한 인도

급조된 길 위에서는 온갖 풍경을 만날 수 있죠

 

간밤 내린 폭우가 갠지스처럼 수로를 만들며 흐르고 있어요

곳곳에 파헤쳐진 흙더미 사이 뒤엉킨 도시를

수도승같이 깡마른 사내가 주황색 봉으로 풀고 있어요

누구도 예상 못한 지난밤이 흙탕물 위로 둥둥 떠내려가요

길 위에 묶여 있는 수많은 바퀴들

속도를 되찾으려 눈빛을 번득여요

 

인도가 나를 인도하고 있어요

어떤 상황에서도 답은 모두 그 안에 있는 법이죠

돌아가고 싶다면 언제든 방향만 바꾸면 되죠

하지만 불편하고 힘겨운 이 길을 끝까지 걸어가 보면

생각지도 못한 풍경들과 만나게 될 거예요

하리잔*처럼 맹지 위에 무리를 이루고 살아가는 망초들과

그들이 만들어내는 눈부신 질척을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수드라보다 더 낮은 계급의 불가촉천민

 

 

-눈사람의 길/최승호

눈사람이 녹는다는 것은 
눈사람이 불탄다는 것, 
불탄다는 것은 
눈사람이 재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 

재가 물이다 
하얀 재 
더 희어질 수 없는 재가 물이다 
시냇물 
하얀 재 흐른다 
눈사람들이 둥둥둥 물북을 치며 
강으로 바다로 은하수로 흘러간다 

흘러간다는 것은 
돌아간다는 것, 

돌아간다는 것은 그 어디에도 
오래 머물 수 없다는 것, 

 

 

-적멸보궁 가는 길/이상국 

 

저 벌거숭이 나한 나무보살들
겹겹이 에워싼 중대(中臺) 한나절 올라가면
이승의 클리토리스 같은 궁(宮)이 있다니
이를테면 천원에 두 편씩 하는 비디오를
새벽까지 보다가 잠들면
그게 요즘 나의 적멸인데

왜 나는 자꾸 집을 나서는지
월정사 들머리 바다횟집 가자미더러 어디서 왔냐니까
헛소리 하지 말고 밥이나 먹고 가라고 무안을 준다
저것도 뭘 아는 것 같다
다들 손님으로 다녀간 곳,
세상은 유곽 같은 곳이어서
날마다 색정으로 밤을 밝히고도
또다른 궁을 찾아
오늘은 얼굴을 가리고 산 들어서는데
사천왕 같은 전나무들이 길을 막고
기어이 마음두껑을 열어본다

누가 산꼭대기에 궁을 갖다놓았을까
이 추위를 뚫고 올라가면
정말 생(生)이 환하게 섹스를 할 수 있을까
아니면 수족관 가자미처럼
나는 너무 깊이 들어온 건 아닌지
아침에 먹으면 저녁에 싸는 것을 데리고
겨울 안개 속 산을 오른다

 

 

-계수로 5번길/강성남-

932-3번지 3층 사내가 창을 열면

맞은편,

931-10번지 2층 거실 유리창 안에

분홍스웨터를 걸친 여자가 뜨개질을 한다

 

서쪽으로 난 창과 동쪽으로 난 창이 서로를 비출 때

2만 2천9백 볼트 고압이 흐르는 단풍나무

나무속에서 귀가 두근거리는 새

나무속에서 뺨이 화끈거리는 새

골목이 무수한 그림자를 길어 올린다

 

'김치'라는 이름을 가진 베트남에서 온 금티엔

위장 결혼한 중국교포 부부

밤중에도 새들이 이삿짐을 풀고 싼다

헌옷수거함과 음식물수거함 사이

길이 침묵을 풀어 내리면

커튼 뒤 컴컴한 가난을 훔쳐보던 별들

골목 밖으로 걸음을 옮긴다

 

하느님이 이따금 문을 두드리고

떠돌이별이 소문 한 됫박 퍼다 놓고

오늘은 통계청 고용조사원이 다녀간다

골목은 얼마나 많은 비밀을 키우는지

달이 자주 흐느껴 운다

 

계양산 허리춤에 한 타래로 매달린

해피 하우스, 석정빌라, 안남 드림빌

서로 가슴 연결된 지붕들

같은 문장을 물고 ……

 

한 짐 가득 생각을 짊어진 전봇대 아래

도둑고양이가 담을 넘고 개들이 엉켰다가 사라진다

 

고압단자함 같은 심장을 안고 담장에 기댄 사내

산동네 불면을 우두커니 밝히고 있다

 

 

-길/정희성-

 

아버지는 내가 법관이 되기를 원하셨고

가난으로 평생을 찌드신 어머니는

아들이 돈을 잘 벌기를 바라셨다

그러나 어쩌다 시에 눈이 뜨고

애들에게 국어를 가르치는 선생이 되어

나는 부모의 뜻과는 먼 길을 걸어왔다

나이 사십에도 궁티를 못 벗은 나를

살 붙이고 살아온 당신마저 비웃지만

서러운 것은 가난만이 아니다

우리들의 시대는 없는 사람이 없는 대로

맘 편하게 살도록 가만두지 않는다

세상사는 일에 길들지 않은

나에게는 그것이 그렇게도 노엽다

 

내 사람아, 울지 말고 고개 들어 하늘을 보아라

평생에 죄나 짓지 않고 살면 좋으련만

그렇게 살기가 죽기보다 어렵구나

어쩌랴, 바람이 딴 데서 불어와도

마음 단단히 먹고

한치도 얼굴을 돌리지 말아야지 

 

 

-불일암 가는 길/유 진-
암호처럼 새겨진 'ㅂ'자를 따라 가

산의 침묵 속에 앉아본다

 

옹종옹종 징검돌을 딛고

채마밭, 장독대, 정갈하게 쌓인 장작, 하사당 디딤판,

통나무 의자, 기와 두른 작은 연못, 망울진 매화...


시누대(山竹)끝에서 바람은

얼마나 많은 깨달음을 건져낼까

 

상여도 만장도 목관도 없이

사리탑도 다비식도 뿌리치고 훨훨 승복을 태운

선승의 무소유를 생각하는 겨울 밤

 

사락거리는 시누대 사이에서

스스로를 알아차린 바람처럼

 

어디서 와서 또 어디로 가는지

 

 

<돌샘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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