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평 가는 길/권천학-
무이계곡 지나면서
다문다문 메밀밭 눈에 띄어
옛정취 맥 이어 그나마 다행이다싶은데
시골 막국수집 유리문 한 귀퉁이에
막국수보다 헐값으로 치인
'효석의생각터'라고 쓴 어눌한 쪽지
낡은 위패만큼이나 초라한 모습으로 붙어있다
막국수 집을 나와서
가산공원을 지나
어설프기 짝이 없는 안내판 하나
버려진 듯 부끄럽게 서있는 낯선 다리목
설레던 마음은 쓴 입맛만 다신다
손질 안 된 채 잡초 우거진 시골길
허술한 다리 건너 콩밭 길 사이로
팻말도 없는 길을 찾아갔더니
물레방아도 멎어있고 시비도 덧없이 쓸쓸하다
-열매의 길/김왕노-
재미없는 이야기가 여기 저기 짐승처럼 도사리고 있다.
재미있었던 날이 너무 빨리 저물어버린 것이 아닐까.
발아래 낭자하게 떨어진 꽃잎을 무자비하게 밟고서
오늘 찾아 나서려는 네게 내가 어떤 봉변을 당할지
도리어 내가 굴복의 자세로 내 영혼을 바칠지 모른다.
항상 알 수 없는 일이 일어나거나 변수가 작용하므로
내가 즐겨 사용하던 문장은 나의 상투적 어법은
고립의 세월 질타의 세월 속으로 나를 내팽개쳤으므로
완성되지 못한 미완의 시에 매달리기에 시간이 빠듯하다.
저녁이면 습관적으로 갈팡질팡하는 나의 위로로
저렇게 분분이 휘날리며 절명하는 저녁 꽃들
오늘은 꽃에게 허공이 절망이지만 내일은 열매가 맺는
열매의 길이 선로처럼 뻗은 허공이라 하고
떨어진 꽃잎을 사체로 비유하면 꽃의 유언은 향기인가.
너무 미화된 꽃의 낙화는 꽃을 참수한 바람의 죄를
눈감아주고 은닉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도 열매의 길을 걷는다면서 꽃잎처럼 버린
무수한 이름 앞에서 복받쳐 운적이 있었던 것이다.
-투르 가는 길/임희숙-
노르망디 해변을 지나
투르 가는 길에 어린 왕자를 만났다
한적한 시골의 작은 휴게소였는데
등 뒤에 달라붙은 가시 하나를 떼어주려다가
덜컥 가시가 들어왔다
컵을 주세요 내 양에게 물을 줘야 해요
립스틱 자국을 문지르고 컵을 건넸다
가시는 기도 쪽으로 파고들었고
풀을 뜯다 지친 양이 유리문을 열고 들어와
컵 속으로 혓바닥을 밀어 넣어 핥기 시작했다
양은 배불뚝이가 되어 휴게소 바닥에 드러누웠다
어린왕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주머니 속에 내 컵을 구겨넣었다
가시는 이미 허파꽈리를 뚫고 혈관을 타고 떠다니기 시작했다
어린왕자의 때 절은 주머니 속에서 삐죽이 꽃의 뿌리가 보여
발효한 두엄 냄새와 꽃의 향기가 묘했다
찢어진 뿔처럼 내 몸 여기저기를 찔러대는
가시를 토해내려고 깊은 혈관을 헐었다
프랑스 투르로 가는 고속버스를 타 보시라
휴게소 앞에서 풀을 뜯는 흰 양을 만난다면
주머니에 컵을 넣고 기다리시라
노란 스카프를 목에 두른 남자가
기막히게 묘한 냄새로 곁에 서 있을지 모른다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만나고 아무렇지 않게 헤어진 것처럼
왕자는 늙어갈 것이고 양은 여전히 목마를 것이니
당신의 주머니에서 컵을 건네주시라
아메리카노도 에스프레소도 담기지 않은
우물처럼 깊은 컵
-숲길 11/최서림-
정글을 누비던 혁명가들이 사라진 지금
시인들이 말로써 싸운다.
시퍼렇게 벼린 말이 아니라
말랑말랑한 말로써 싸운다.
아직도 체 게바라처럼
먼 저편을 꿈꾸는 시인들이 남아 있다.
깊은 계곡 산천어처럼 숨어 지내고 있다.
혁명가와 시인은 일란성 쌍둥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 집을 세우기 위해 싸우는
혁명가의 몸 안에도 시인의 피가 흐른다.
총으로 세운 집은 금방 무너질 수 있지만,
아기 엉덩이 같은 말로 지은 집은
탱크로 밀어 붙어도 쉬이 무너지지 않는다.
네루다가 지은 말의 숲 속에서
체가 총을 닦으며 쉬고 있다.
시 속으로 난 길이
체가 더듬어서 가야 할 길이다.
-그대에게 가는 모든 길/백무산-
그대에게 가는 길은 봄날 꽃이 아니어도 좋다
그대에게 가는 길은 새하얀 눈길이 아니어도 좋다
여름날 타는 자갈길이어도 좋다
비바람 폭풍 벼랑길이어도 좋다
그대는 하나의 얼굴이 아니다
그대는 그곳에서 그렇게 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는 일렁이는 바다의 얼굴이다
잔잔한 수면 위 비단길이어도 좋다
고요한 적요의 새벽길이어도 좋다
왁자한 저작거리 진흙길이어도 좋다
나를 통과하는 길이어도 좋다
나를 지우고 가는 길이어도 좋다
나를 베어버리고 가는 길이어도 좋다
꽃을 들고 가겠다
창검을 들고 가겠다
피흘리는 무릎 기어서라도 가겠다
모든 길을 열어 두겠다
그대에게 가는 길은 하나일 수 없다
길 밖 허공의 길도 마저 열어두겠다
그대는 출렁이는 저 바다의 얼굴이다
-실버사원 가는 길/이윤훈-
시클로에 몸을 싣는다
페달을 밟는 늙은 운전수 종아리에
굵게 도드라진 푸른 자벌레들
먹는 일은 숭고하다 힘차게 꿈틀거린다
살아가는 일과 사라지는 일이 서로 맞이어진
양 바퀴 사이 나는 신기루처럼 흔들린다
목이 마르다 잠시 길가 그늘에 몸을 들인다
드럼통 같은 사내가 야자열매 가죽을 벗기어
그 정수리를 싹둑 쳐내고
우윳빛 두개골에 빨대를 꽂아 건낸다
태양은 이글거리고 줄지어 나란히 밀려오는 모토택시들
기름진 사냥감을 찾아 거리를 이 잡듯 빗질한다
다시 시클로 몸을 싣는다
아름답다는 실버사원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말없이 같이 흘러가는 얼굴들
보석처럼 박힌 흰 이와 눈알이 유난히 반짝인다
그래 설음도 시름도 단단해져 빛이 나면
낱낱이 모두 다 사원이 아니고 무엇이랴
머리 위로 뚝뚝 떨어지는 하얀 꽃들
그 가는 길 무겁고도 가볍다
-숲길/송과니-
누가 왜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졌던 것인가.
한껏 호흡 짙어진
공기가 폐 속을 곰곰이 들락거리는 사이
지워지지 않는 파문이 많은
한 사내 나이는
고요로 가는 길 찾다가 깊어진 숲
나무속으로 이주하여 나이테가 되었지요.
참으로 별난 저 은신법,
어떤 비둘기가
구구구 파발을 이는 바람 편에 띄웠습니다.
그러나 잎들은 풍향의 화살 쏘지 않았고
오솔길은 동서남북을 저버렸습니다.
그런 오랜 숲의 충고 끝에
겨누는 짓
과녁적 화살표 둘둘 말아버림으로 말미암아
둥글어질 수 있음에 도달한 나이테.
이제 그대 파문 열어주오,
향하고 또 향하는 구애의 딱따구리가
여기 이르게 된
나무의 마음 연일 두드리고 있을 때
간직한 아픔의 어떤 무늬도 들키지 않으려는
숲 공기는 내
까만 그림자를 햇빛으로 표백하고 있었구요.
-시골길/이준관-
소가 천천히 구름을 되새김질하고 있는 시골길.
감자밭 감자가 시골 소년의 알통처럼
소리 없이 굵어가고,
명태 꼬리 두어 개 삐죽이 내민 짐 보퉁이를
시골 여인이 머리에 이고 가는 길.
길가 풀섶 둥지에서는 들새가
제 체온으로 데울 만큼의 알을 낳아
따스히 품고 있다.
달콤한 햇볕 아래서
보리앵두는 빨갛게 익어간다.
일부러 해찰을 하듯 날아다니며
나비는 풀꽃마다 꽃가루를 옮기고,
소나기를 머금은 구름은 머얼리서
느리게 천둥소리 피워 올린다.
신발을 벗어버린 내 맨발은
붉은 황토흙이다.
맨발 아래서 질긴 질경이풀처럼
생명 있는 것들이 꿈틀거린다.
내 뜨거운 손을 저무는 해에 얹으면
해 그림자 길게 깔리는 시골길
길 따라 내 삶도 천천히 익어간다.
-멀리, 끝없는 길 위에/윤희상-
멀리, 끝없는 길 위에 발이 잠긴다
이어서 종아리가 잠긴다 연이어
무릎과 허벅지가 잠긴다
새가 울면서부터 여자가 잠긴다
남자가 잠긴다
따라서 허리가 잠긴다
얼마쯤 후에
가슴과 목이 잠긴다
웃다가 웃다가 얼굴이 잠기고
또 얼마쯤 후에
머리가 잠긴다
또다시 얼마쯤 후에
멀리, 끝없는 길 위에
가장 권위적인 모자가 하나
유품인 듯,
잠기지 않고 놓여 있다
-다산초당 가는 길/정 양-
여유당(與猶堂)이라는 당호(堂號)는
목숨걸고 살얼음판 건너가는 짐승처럼
꼭 해야 되는 일만 하면서 살자는
하지 않고는 도저히 못 견딜
그런 일만 하면서 살자는 뜻이라지요
다산초당 찾아가는 가파른 길이
눈보라에 파묻힙니다
해서는 안 되는, 그러나
꼭 저지르고 싶은 일
하지 않고는 못 견딜
살얼음 건너가던 그리움이
오늘은 눈보라로 쏟아지나요
쏟아지지 않고 못 배길
수백 년 묵은 그리움처럼
산마루에는 휘날리는 눈
골짜기에 대숲에는 처박히는 눈
살얼음 건너듯 눈보라 속
묵은 그리움을 찾아갑니다
-장에 가는 길/김순진-
엄마를 따라 오일장에 갑니다
악수하는 그림의 미군 구호품 밀가루 자루에
붉은 팥 두 말을 담아 머리에 이신
엄마를 따라 십리길 장에 갑니다
가을걷이가 끝난 들판엔 볏그루 움튼 싹 파랗고
비포장 신작로가 깡마른 코스모스 대공 까
입에 넣고 쫀득이하며 따라가는 길
나무 전봇대 성큼성큼 따라옵니다
엄마 제가 메고 갈게요
엄마가 안쓰러워 몇 번이나 졸랐더니
그래라, 우리 아들 얼마나 자랐나 보자
팥자루를 넘겨주십니다
우쭐한 마음으로 팥자루를 어깨에 얼러메는데
병기 수입포 누덕누덕 덧꿰맨 자리
무명실이 양잿물 빨래에 삭아
그만 터지고 말았지 뭐에요
붉은 팥 한 알에 종기 붉은 팥 한 알에 부스럼
붉은 팥 한 알에 허기 붉은 팥 한 알에 허깨비
붉은 팥 한 알에 가난…
그 나머지는 모두 사랑이지요
어머니와 나는 내 다우다 잠바를 벗어
모래밭 신작로에 흩어진 팥을 주워 담습니다
그때 주운 붉은 팥으로 액땜으로
이만큼의 언어들을 줍고 삽니다
-담벼락의 금은 모두 길이 된다/백현국-
키가 훌쩍 큰 담벼락을 사이에 두고
눈물 곱게 찍어내던 내 누님과
억수로 운 없는 사내가 잠시 기댔던 자리에
나는 등을 붙이고 눈을 감았네
좁은 골목길 걸어오는 소리
흐느끼는 소리, 떠나가는 소리
모두 사랑을 놓친 소리였었네
누구나 한 번쯤 담벼락으로
근육질의 청춘을 밀어붙였겠지만
나를 견디지 못하고 떠난 여자는
쓸쓸한 웃음이 번지는 가로등 같았네
누구나 한 번쯤 사랑을 잃고
쓰라린 자서를 남기듯
오래 견딘 너의 사랑을 다시 쓰네
싱싱한 추억에 오래도록 등을 내주고 싶었네
쓸쓸한 체온이 빠져나간 골목길을 걸어와
잠시 담벼락에 기댈 누군가를 위하여
금 위에 나의 등을 포개보네
담벼락에 눌어붙은 금들이
네게로 가는 길이 되기 시작하네
나를 넘어 벽을 넘어 가냘픈 등이 슬픈 네게로
-미조리 가는 길/오인태-
생애의 절반은
멋모르고 살아왔고
나머지 절반은
부끄러워하며 살아갈 것이다
벌써 몇 번째인가
그곳에 다다르면 남는 건
늘 허망하게 돌아오는 일뿐이었다
노란 유채밭 너머, 벌써부터
남빛으로 잔잔하게 일렁이는
앵강만, 이어 언덕길을 따라
등나무들이 연보랏빛 꽃등을
밝힐 것이다
밝힌들, 늘 이렇게
그리움으로 몇 날의
몸살 끝에 달려가 만나는 건,
돌아오면서 주워야 할
내 사랑의 부끄러운 잔해들뿐이었다
생애의 절반을
멋모르고 사랑하며 다 보내고,
돌아보며 가슴 칠 줄 알면서
나는 또 오늘 미조리에 간다
-국수리 가는 길/박몽구-
4월의 끝 두물머리 정약용 생가에 들른 다음
남한강 건너 국수리를 찾았지만
출출한 속 달래줄 국수는 말지 못했다
춘천 가는 길 곧장 넓게 뚫리면서
빙빙 돌아가는 한강길 따라
느리게 걷는 소풍객들 줄어들고
오물을 수원지로 몰래 흘려보내느라 분주한
러브호텔들 가려운 뒤통수만 보았다
노른자위 땅 서울 사람들에게 팔아넘기고
빈 축사를 넘보는 마을길만
퍼진 국숫발처럼 더 길어졌다
그런 날에는 한줌이 아까운 봄볕을 따라
다시 강 건너 운길산 수종사로 발길을 돌린다
약사암 뒤편에 무성한
국수나무 그늘에 나른한 봄날을 맡긴다
민통선 지뢰밭도 너끈히 넘어온
북한강 터 없는 바람으로
막힌 속을 풀어 내리면서
한 입에 말 수 없도록
국수 가락이 길어진 뜻을 헤아린다
문득 깊어진 등창을 떠메고 올라와
두물머리 맑은 물에 씻었던
세조의 상처투성이 시간을 여며
국수나무에 둘둘 말린 그늘을 편다
서울로 돌아가는 길 다그치며
줄창 울어대는 휴대폰 벨소리
느리게 덮여오는 땅거미에 묻어 버린다
-바람아래 해수욕장*―그대에게 가는 길 11/임영조-
아무도 없이 고요만 눈부시다
추근대던 파도소리 멀리 내쫓고
흐벅진 누드로 길게 누운 해안선
하얗게 쓸린 둔부가 에로틱하다
방금 뒷산을 빗질하던 솜씨로
슬슬 모래톱을 더듬는 솔바람소리
건건하고 눅눅한 페로몬 내 진하다
저 건너 마주 뜬 장고섬이 취한 듯
어깨를 들먹들먹 장고를 치자
갈매기 몇 점이 수평선 감고 간다
나는 지금 바람 아래 해변에
내 몫의 외로움을 엎질러놓고
익명의 그림자와 함께 걷는다
허파 속 탱탱하던 바람도 빼고
걷다 보면 나도 한낱 모래가 된다
덧없는 멀미로 마모된 모래알
이런, 길을 잘못 들었나?
갑자기 신발 속 모래알이 발바닥을 찌른다
무작정 가지 말고 잠시 쉬라고?
안식 뒤에 걷는 몸이 더 가볍다고?
모래꽃 법문 하나 새로 깨친다
나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세상이 도대체 내 맘 같지 않은 날
무인지경 바람 아래 해변에 와서
바람 없이 넋 놓고 어슬렁거려 본다
또 무슨 몸짓으로 살아야 하나
어디서 날아온 바다오리 한 마리
여봐란 듯 갯물에 머리 처박고
열심히 발을 굴린다, 어느새 나도
마음속 물갈퀴를 흔들기 시작
그대에게 가는 길도 보이기 시작!
*바람아래 해수욕장 : 안면도 고남면 장곡리 서쪽에 위치한 해변
-태안 마애삼존불-그대에게 가는 길 14/임영조-
태안읍 병풍 백화산에 오르면
마애삼존 불상이 반갑게 맞아줘
마음이 저절로 편안해진다
아담한 키에 두 손 얌전히 모은
볼우물 예쁜 보살을 가운데 두고
우람한 체구의 두 부처가 얼굴 가득
미소를 띤 채 떠억 버티고 서 있는
표정 참 알듯 모를 듯 삼각관계다
보살은 아마 인근 고을에서 가장 심성이 착하고 얼굴 예쁜 처녀였겠지 두 부처는 용모가 걸출한 총각 동갑내기 절친한 친구
사이였겠지 한 총각은 핸섬하고 노래 잘하고 한 총각은 머리 좋고 투망 잘하는 둘 다 볼수록 매력적인 신랑감인데 두 총각은
내심 그녀를 사랑했는데 우정을 핑계로 기회만 엿보았겠지 그녀도 둘 다 좋아 번갈아 만나면서 누구를 고를까 고민고민하다
가 어느 달 밝은 밤 가위 바위 보로 이기는 신랑감을 택하기로 하고 두 총각을 백화산 마루로 불러냈겠지 두 총각은 막상 무
엇을 낼까 숙고를 거듭하다 그만 날 새고 날이 가고 달이 가고 세월이 흘러 두 총각은 손동작 야릇한 부처가 되고 처녀는 샌
드위치 보살이 된 모양인데 천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두 부처는 무엇을 낼까 골똘히 생각하고 보살은 행복하고 난처한 모양
인데
연포 앞바다 노을 젖는 물소리에
두 부처 잠시 넋 놓고 깜빡 졸 때쯤
저 작고 눈웃음 착한 보살만
슬그머니 빼돌려 옆자리 태우고
부르릉! 줄행랑을 쳐버려?
삼각이 사각관계로 안정된다면
나도 행여 부처가 될까?
-집으로 가는 길-치매행 致梅行 187/ 홍해리-
어쩌다 실수로 아내의 치매약을 먹었습니다
그날 밤 꿈속에서
하염없이 거리를 헤맸습니다
집으로 가는 방향을 찾지 못하고
걸어다니는 일도
차를 타는 것도 다 잊은 상태
아무것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허우적허우적거리다
때로는 허공을 날기도 했습니다
며칠 전 길을 잃고 헤맨 아내
그 뒤를 쫓아다녔는지도 모릅니다
여덟 시간 미아가 되었던 아내의 긴 세월을
하룻밤 꿈으로 대신했나 봅니다
아내의 치매약으로
다른 한세상을 구경한 내가
약도 없는 치매환자가 되어
환한 대낮에 길을 잃고 허청댑니다.
-보행 길/김길나-
창공을 닫아 잠군 새장의 새는 오늘도 무사하다
집을 나선 이 보행 길에는
햇빛의 고요와 바람의 소요가 어우러진다
걷는 다는 것은 소요를 뚫고 전진하는 거라고 너는 말하지만,
후진하는 생각의 파편들로 어제가 침범해 오늘이 제자리걸음이다
전진하는 다리와 후진하는 머리 사이로 금방 파열음이 끼어든다
이 보행로의 노면은 오늘의 발걸음이 어제의
발자국을 거스르는 다툼으로 울퉁불퉁하고
머리와 다리가 토설한 불화의
분비물로 어질러져 있다
하여, 오늘의 보행이 닿는 도달지점이
바로 오늘의 출발선상인 것을 나는 네게 고백한다
나는 집을 떠나지 못했다
<돌샘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