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길/김자현-
소나기 멎은 샛강에 서면
길을 내는 바람 모습이 가득하다
는실는실 애기똥풀 달맞이꽃 흐드러진 들판사이로
깨끗이 닦인 자색 자전거 도로를 따라 걷는다
노란 꽃 매단 달개비 양 옆에
발 묶인 망초대 흔들어 몸을 숨기는 바람
작은 팔을 휘저으며 걷는
아기 발밑으로 기어들었다간
머리에 쓱 손을 넣어 나풀거리게 하고는
은빛 바퀴 살 헤집고 나와 다시 강변을 달려간다
제 몸을 베어 길을 내주고
망초로 억새로 다시 태어나는 바람의 소원
먼 산 속에
시베리아 호랑이 한 마리 들어있는 늦여름
우르릉대는 하늘 아래 바람이 낸 길 따라가면
여기저기 기우뚱 생의 등짐 진 달팽이들
-길을 세우다/ 김용언-
갔던 길과 가야 할 길이 모두 누워 있다
길에서 만난 사람들도 누워 있고
그 사람들과 나눈 끈적거리는
대화들도 누워 있다
왜 사는지 모르겠다는 생각 때문에
끊어 버렸던 길, 그 길도 누워 있다
지금 나는 누워 있는 길을 세우기 위해
세상을 사랑하기로 했다
햇살 위에 빛나는 길
한때는 내가 나를 사랑했기에
빛나던 길이다
금가루 뿌리듯 조심스럽게
누워 있는 길
곧게 세우고
먼지를 쓸어낸다
-휘굽은 길/김범렬-
1.
햇귀 베문 아버지가 밥 한 술 떠먹인다.
발걸음 소리 들어야 한 뼘씩 자란다고
풍요는 그렇게 오는가, 부챗살을 움켜쥔다.
2.
거듭된 굴곡진 길 걷다보면 구름바다
등 푸른 먼 산마루 들쭉날쭉 골짜기에
언젠가, 날려 보냈던 앵무새가 울었다.
3.
해마다 판화 속에 새겨 넣은 그루터기
가려움증 도진 날은 몽고반점 낙관 자국
신열이 온몸 감싼다, 욱신대는 그날처럼.
4.
등 기댈 언덕은 없다, 번갯불 스치 자리
뜬금없고 계면쩍게 가자미눈 흘겨 볼 뿐
말로만 듣던 눈칫밥 배불리 먹는 육십 줄.
-추락하는 길엔 정거장이 없다/김혜천-
고층 유리창에 머리를 쳐박고
콘크리트 바닥으로 곤두박질 치는
새
한차례 소낙비 긋고
지렁이 한 마리 길게 누웠다
지하 계단을 쏟아져 나온 개미떼가
새카맣게 몰려들어
아직 꿈틀대는 먹잇감을 물고
빌딩과 빌딩 사이 그늘 속으로 사라진다
틈 사이로 가끔씩
부식대는 햇살을 먹고 자란
산같은 짐을 걺어진 비루한 허리가
힘없이 꺽인다
도시는 매캐한 스모그에 점령당하고
안구건조증이 심한 왕개미가
큰 눈을 껌벅 거리는 막다른 골목
방향 잃은 바람에
휴지조각들이 이리저리 몰려다닌다
별 하나 수직으로 떨어지고
-폐기물 집하장 가는 길/박은영-
새벽 구로공단,
폐기물 쓰레기차가 녹슨 어둠을 수거한다
늙고 병들고 무능한 고철덩이들
며칠 전 신발공장 구 기계도 저 차에 올랐는데
가오리* 등에 업혀 날아오르려는 꿈이 있었다지
나는 법을 잊어버린 가오리와 함께
오랜 세월 바닥을 기었다지
그 딱딱한 등에서
길잡이 새벽별을 보며 또 하루를 견뎌냈었다지
쓸모없는 이름이 되어 후미진 곳에 버려진 것들
집으로 가기엔 너무 먼 밤이면
가오리와 제2공단 사이 여인숙에서 쇳소리를 내며
제 살 깊숙이 기름칠을 하던 폐기물들
치워낸 바닥에서
이젠 낯선 기계음이 들린다
제 자리를 내어준 고철들이
녹물을 떨어뜨리며 공단을 빠져나가는 겨울
모든 길은 한곳으로 모여 매립 처리되고
다시 재생된 길은
새별별을 따라 구로공단으로 향하는 것이다
하얀 기물器物이 쏟아져 내려 오그라드는 시간
아버지와 오빠와 형과 누이를 만나도
녹이 슬어 서로 알아볼 수 없는 길
가오리가 눈을 뜬다
*가리봉 오거리
-깡마른 신발 속의 길/이길상-
내가 알제리를 떠올렸다는 것
알제리의 거리를 알아차렸다는 것
다음 순간을 염두에 두지 않자
눈에 담지 않아도 풍경이 잡혔다
제 생채기를 아무렇지 않게 헤집고 사막으로 돌아간 이는
그 이유로 잊혀졌다
지금 시간은 마지막 물기를 간직한 사막을 지나고 있는지 모른다
길이 길이 될 때까지 풍경이 풍경이 될 때까지
난 새로 눈을 뜨는 사람
내 안으로 수 세기가 지나갔다
비로소 불어오는 바람 천지사방에서 부는 바람
온몸이 시려왔다
빼빼 마른 내 신발
신발을 팍 꺾어 신었다
신발을 몰래몰래 따라가면
세상의 벽들이 흘러내렸다
그 길이 보이는 건 신발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길을 파거나 길을 내면서
지나온 길을 알 것도 같다며 세상을 건너갔으리라
더 이상 내려앉을 수 없는 곳을 빠져나온 자는
말라버린 입술을 만지지 않았다
저물어가는 길을 물끄러미 쳐다보았고
꺾어 신은 신발은
사막의 노을빛을 닮아가고 있었다
-봄이 오면 사이프러스 숲길을 걷자/김찬옥-
딸아, 그 사이 엄마도 모르는 무슨 일이 벌어진 거니?
사이프러스 숲과도 같은 너의 왕관이
하루아침에 왜 민둥산이 되어버린 거니?
지금은 초록이 만발한 초여름이야
그 아름답던 숲을 어떻게 관리했기에
여자라는 이파리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리는 거니?
초록의 영원과도 같은 결 고운 잎새들이
왜 뭉텅뭉텅 쓰레기 통 속으로 들어가는 건지
혹시 넌 아니?
아가 춥지 않니?
너의 머리 위에 펼쳐진 민둥산만 바라보면
내 몸엔 한기가 도는구나
고사목 한그루 버틸 수 없도록
숲을 전멸시켜버린 악성 바이러스
딸아, 애쓰지 마라,
어긋난 미소 속에 더는 슬픔을 가두지 마라
눈물이란 흐를 줄 알아야 새로운 길도 찾는 법이란다
생각나니? 어렸을 때 하던 숨바꼭질
너는 식탁 밑에 꼭꼭 숨어도
엄마의 손가락 사이에 너를 감추며 놀았던 일,
한밤에도 베개 닢 속에 눈물을 꼭꼭 숨기지만
술래가 된 내 손가락 사이에 너의 눈물이 맺혀있다는 거,
절망도 다 때가 있단다
지금은 우리가 가던 길이 잠시 주저앉았을 뿐,
민둥산에도 봄은 꼭 올 테고
그땐 우리 봄, 봄, 봄 나팔을 불며
노을이 피어나는 파묵칼레*의 숲길을 걸어보면 어떨까
여자라서 쓸 수 있는, 여자이기에 꼭 써야만 하는
사이프러스 숲과도 같은 왕관을 다시 쓰고,
* 터키 히에라폴리스 파묵칼레(목화의 성)는 그리스 로마식 온천시설이다 평원 위로 솟은 절벽
의 샘에서 나오는 칼슘을 함유한 물로 인해 광물의 숲, 석화폭포, 계단형태의 분지들로 구성되었
다. 노을이 질 때의 풍경은 터키를 또 다시 꿈꾸게 했다
-몬세라트 가는 길/이명수-
절벽을 만들었다 한 무리의 목동들이
하늘에서 빛이 내려와 절벽을 덮는 것을
보았고 천사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곳 절벽에 몬세라트 수도원을 지었다
누군가 울었다
빛이 빛을 몰고오고 안개가 안개를 몰고 가는
서로의 속으로 사라지는
모든 경계를 지우고 경계를 뛰어넘어
절벽이 되는
절벽은 우리 몸의 어디에나 있다
몬세라트 수도원은 그곳에 가만히 있다
이곳에서 피카소와 달리와 가우디가
절벽의 경이로움을 보았고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한다*는 말을 되뇌이며
빛의 애인을 찾았을 것이다
누구나 절벽 앞에 선다 내 안의 까마득한 벼랑 아래
낮익은 슬픔 하나가
시간이 없는 짐승의 각질을 벗고 하강한다
살아있는 날들이 있어 수행이고 순례다
검은 성모마리아 상 앞에 경배하고
몬세라트를 내려오는 허공 속 길 하나
절벽을 뛰어넘는 하얀 눈표범
눈으로 보아도
절벽에는 하얀 발자국이 있구나
-미루나무에 가는 길/박은형-
이별의 질량이 압권인 그 곳에 가려고 매일 같은 시각에 모자를 쓴다
건반 발음을 교정하는 분홍대문집과 화분이 빗방울처럼 앉은 길가 늦더
위에 생활이 객식구로 눌어 있다 마주칠 수 있다면 우리, 이마를 맞대고
낮별처럼 총총 뜬 꽃댕강의 꽃말이나 궁리해 볼까 아무데고 번져가서 다
른 이름을 얻기도 하는 사랑이라는 의심들처럼
여름 꽁무니 미루나무 너머를 찾아간다
서쪽이라는, 식물이자 한 마리 동물이 출몰하는 거기
기침이나 정강이 아니면 몇 번의 파안 그 어디쯤
무심하게 걸터앉았다가 이내 물어뜯고 마는, 시간 붉은 송곳니 그 어디
잡식성 편견과 척지게 해 달라고 속엣말을 내지른다.
기도라고 들었는지 더욱 사무치는 기분을 내려 보내는 하늘
깜빡이지 않는 눈동자와 발원 같은 거
아직 만져보지도 못했는데 간절함이라는 부위를 다 털렸다
멀리서 개가 짖어주면 환희와 쓰라림이 동시에 뼈아프다 환절(換節)의
뒤편을 지나오면서 나는 기다려주었나 까마득하게 떨어지는 풀벌레 울음
에 손가락을 찔러본다 순식간에 뚝 신호가 멎고 커다란 미루나무 두 그루
그 초록의 공중 너머에 물어뜯긴다 시간 붉은 송곳니 서쪽의 미래질량이라
는 이름으로 나 무수한 의심들처럼
-고비, 길/이영혜-
끝이 없다 경계가 없다,
길이 없다
희미한 타이어 자국들은 과거의 흔적일 뿐이다
거리나 방향을 가늠할 수 없는 광대한 평원
지피에스나 구글맵 같은 문명은 한낮 무용지물
경험과 본능의 네비게이션 만이 길을 인도한다
속도도 안락도 의미를 상실한 모래의 땅
길은 태양과 별과 눈동자와 마음속에 있다
암흑 속 길을 잃고 헤매는 잠시
버려짐이란 본능적 두려움과 대면한다
어느 먼 곳의 희미한 불빛에서
오래된 안도를 만난다
내가 끌고 온 질문의 실타래, 그 엉킨 긴 길을
여기 길 아닌 길에 부려놓는다
가시풀들을 훑고 온 거침없는 바람의 길에
나를 맨몸으로 내려놓는다
대답은 길 어디에도 없고 어디라도 있다
길은 본디 존재하지 않았다
새로운 길을 만들며 나아가야 한다
가고자하는 마음이 길이다
-흐르는 길/강서완-
컵 속의 물이
넘어지려하고
먼저 떨어지는 물방울이
컵의 더 안쪽에 있었는지
놀란 숨소리의
긴 어둠
천 개의 달과 별들을 흔들고
한순간 불꽃 튀는
손,
컵의 허리를 들어 올린다
흐르려다
되돌아선 물방울
먼저,
밖이었는지
안이었는지
단지 컵은
물의 경험을 인식하고
물은
둥글게 편편이 신성해진다
원형의 바다가
원형의 하늘을 보는 것과
원형의 물이
원형의 지붕을 보는 것과
원형의 물방울이
원형의 하늘인 것에 대하여
스스로
천의 기호가 녹은
천의 해체
천의 감각이 섞인
천의 지각
목을 넘어 간다
비워지는
컵이 흐르는지
물이 흐르는지
끝내 소멸이 없다면
컵은
물을 기다리고
물이 돌아오고
돌아온
물의, 물방울들
결국 소멸이라면
결국,
아무런 사유가 없는
컵엔
한 송이 물
생각이 떠난
물속엔
한 겁 허공
-뿌리의 길/나영애-
깎아지른 바위에
몸 붙여 뿌리박고 서 있는
소나무 한 그루
가부좌 틀고
수도승처럼 정진하는 바위틈에
실뿌리를 내렸겠지
차가운 돌 두드리고
때로는 어루만져 한 눈금씩
길을 냈으리
천둥 번개에도 꿈쩍 않고
눈보라 바늘 바람에도
속눈썹 내리고 도도했을 바위에
솔은 몇 십년이나 사랑을 고백했을까
산 아래
부드럽고 풍요로운 흙
생각나지 않았을까
절벽에서의 동행
포기하고 싶진 않았을까
낮춘 키 옹이 박히도록
바위향한
올곧은 절개
비로소
사랑의 길 뚫고
한 몸이 되었구나
바위도 뿌리를 감싸 안고
달달하게 녹았나
한 알 한 알 모래가 되어 가고 있구나
-모르는 길/홍일표-
가끔 내가 보이지 않을 때
매일 죽는 마음이 자욱하여 숨이 막힐 때
문득 돌아보면 대답이 없는 아침
출렁이는 물결 사이로 희뜩희뜩 사라지는 것들
하늘 어디엔가 있을 거라는 평안과 자유
죽은 삭정이 같은 낱말들을 부러뜨리고
오직 여기
동백의 초경에 몸 떠는
황홀과 매혹의 어디쯤이거나
고통과 아우성과 모멸이 뒤섞여 휘몰아치는 난장이거나
제 안의 푸른 피로
밤을 걸어가는 한 자루의 만년필
엎드려 머리 조아리지 않고
직립의 사제
그의 검은 벨벳 옷이 장렬한 최후처럼 눈부실 때
가지 끝 벼랑 위에서 단단하게 여무는 고백들
겁 없이 푸른 목청으로 태양과 맞서는 풋사과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며
옥수숫대 긴 이파리를 펄럭이며 하늘을 날 때
그렇게 어느 외진 산모퉁이를 서걱서걱 혼자 걸어갈 때
-달려가는 길/최연수-
놀란 헤드라이트가 커졌다
외마디 비명이 방지턱을 넘고
건너뛰던 바람이 밑에 깔렸다
찰나의 명중은 우연
누군가는 과녁이 되고 누군가는 그곳을 통과한다
롤리팝처럼
나뭇가지에 끼운 달을 아껴먹던 밤, 지붕에서 담으로 건너뛰던
나비수염에게
숨소리를 달아주고 싶어
바닥에 문신한 호흡이 굳는데
눈을 떠봐 어서,
갸르릉
발톱 세운 검은 공기가 검은 그림자를 흔든다
끈적한 아스팔트가 흐른다
길고양이처럼, 속도를 비껴간 방점을 버려둔
길이 달린다
톡톡 엉덩이를 두드려주면
한껏 기분을 올려 세우던 저 얼룩무늬 한 벌
활모양으로 등을 말아 올린 자정이
허공으로 제 꼬리를 직각으로 세운다
어둠이 빳빳하게 곤두선다
-우체국 가는 길/나영애-
정다운 님 체취가
녹아 있는 것 같은
우체국 가는 길
육차선 달리는 타이어 노래
가로수는 차양 치고
쉬어가란다
페츄니아, 색색이 빙그래 웃고
옷섶 안으로 든 살살이 바람
긴 나무 의자 빼준다
안개 낀 듯 아득한 젖빛 허공
꿀비 떨어질 것 같은
우체국 가는 길
밤낮 좋은 말 찾아 빚은
100 여편 연서로 채운
나의 고백 한 권 들고
우체국 가는 이길
다시걸어보았으면
받아 읽을 사람 있었으면
-가지 않을 수 없던 길/도종환-
가지 않을 수 있는 고난의 길은 없었다
몇몇 길은 거쳐오지 않았어야 했고
또 어떤 길은 정말 발 디디고 싶지 않았지만
돌이켜보면 그 모든 길을 지나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이다
한번쯤은 꼭 다시 걸어보고픈 길도 있고
아직도 해거름마다 따라와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길도 있다
그 길 때문에 눈시울 젖을 때 많으면서도
내가 걷는 이 길 나서는 새벽이면 남 모르게 외롭고
돌아오는 길마다 말하지 않은 쓸쓸한 그늘 짙게 있지만
내가 가지 않을 수 있는 길은 없었다
그 어떤 쓰라린 길도
내게 물어오지 않고 같이 온 길은 없었다
그 길이 내 앞에 운명처럼 파여 있는 길이라면
더욱 가슴 아리고
그것이 내 발길이 데려온 것이라면
발등을 찍고 싶을 때 있지만
내 앞에 있던 모든 길들이
나를 지나 지금 내 속에서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오늘 아침엔 안개 무더기로 내려 길을 뭉텅 자르더니
저녁엔 헤쳐온 길 가득 나를 혼자 버려둔다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돌샘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