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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제 시 모음

'길'을 주제로한 시 모음 (34)

작성자돌샘이길옥|작성시간26.06.16|조회수32 목록 댓글 0

-길에 대한 단상/윤석호-

 

1

맨 처음 길을 간 사람은 길이 아닌 길을 간 것이다

나그네가 외로운 것은 길 때문이다

길은 근원적인 고독

같은 길을 둘이 갈 수는 없다

꿈이란 몸부림치며 한밤에 혼자 꾸는 것이다

그는 그 길로 되돌아왔을까

 

2

길이 막혔다는 말은 있어도 끝났다는 말은 없다

길이 막히면 길은 그 자리에 잠복한다

비 오는 날 유리창에 떨어진 빗물

머뭇거리지만 스스로

길을 만들며 흘러내린다

길 안에는 또 다른 길들이 내장되어 있다

 

3

반복되는 길은 길이 아니다

벽에 묶여 평생을 맴도는 시계도

한번 지난 시간은 결코 반복하지 않는다

몸통을 타 태우고서야 지구를 벗어난 우주선처럼

문을 나선 나에게는 길 뿐이었다

꿈이 길을 만들어내겠지만 때로, 길에 맡기고 가다 보면

어느 날 꿈꾸는 별을 만나게 되리라

나는 지금 내 길의 어디쯤 서 있는가

 

4

물길을 따라 거슬러 온 연어

생이 빠져나가고 본능만 남아 헐떡거린다

그에게 길은 무엇이었나

도착한 곳이 목적지 인지 묻지도 않고

헐거워진 몸뚱이를 털어 다음 생을 쏟아 낸다

목적지가 처음부터 길의 일부였다는 것을

연어는 알고 있었을까 

 

 

-지나가는 길/김기홍-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가는 길에

작은 주유소 지나 이사 올 때부터 사람이 살지 않는

빈집을 지나 새벽 출근 때나 늦은 저녁 퇴근 때나

어느 영혼들 잠들어있는 공동묘지를 지나

새벽 찬송가 은은하게 들리는 십자가도 없는 교회를 지나

복지시설이라 이름 지어진 정 붙일 곳 없는

노인네 보이기도 하다 안 보이기도 한 사랑의 집 지나

스리랑카에서 온 블랑카 숨 죽이고 있는 공장 앞

유리 깨진 자판기 지나 새벽이나 늦은 밤이나

다리 절며 졸졸 따라오던 굶주린 흰색 털이 거뭇한

개의 집 지나 조는 듯 티브이를 보는 듯 연방

고개를 끄덕이는 이마 주름 깊은 경비실 아저씨를 지나

 

지나가고 오는 길은 늘 그 자리에 있는데

새벽을 시작하고 다시 끝내는 어두운 골목에서

버스는 덜 깬 잠 차곡차곡 채워 떠나가고

주유소는 신나는 음악으로

빈집은 아이들 놀이터로

공동묘지는 생긴 모양만큼이나 많은 사연들로

교회는 간절한 외침으로

사회 복지시설은 할아버지 할머니 담배연기로

자판기는 까만 손잡은 커피 열기로

다리 저는 개는 살랑거리는 꼬리로

경비아저씨는 어깨 매달린 호루라기로 시작하는 저 길로

 

 

-모천 가는 길/조영심-

 

  푸른 안개 더듬어 갑니다 한 겹의 안개를 열고 또 한 겹

 

  다시 겹겹의 안개를 헤치며 앞인지 옆인지 옆의 옆인지 앞의 앞인지 여긴지 거긴지 발치를

분간할 수 없는 길로 생의 물결이 맴도는 사이

 

  그것이 저것 같고 저것이 그것 같은 애매함을 품고

 

  짓무른 안개의 허리를 틀어 길을 내어 봅니다 안개는 저를 지웠다가 다시 저를 여미며 시작

과 끝을 지우고 맙니다 나는 안갯속 물 알갱이의 기억만으로 내 처음 숨결을 떠올릴 뿐 한 발

짝 디딘 발길에 다시 한 발을 얹어 한 걸음씩 나아갈 뿐

 

  더딘 숨, 젖을 대로 젖은 남루함 

 

  안개가 안개를 삼키고 내가 안개를 삼키고 다시 안개가 나를 삼켜 이미 들어선 길 놓친다 할

지라도 햇살과 달그림자와 별빛으로 각인된 내 모천의 숨길 만은 지워지지 않는 생과 생의 일

방 통로   

          

  눈 뜬 채 눈 먼 내 모천은 아득하여 

 

  끝을 알 수 없는 강을 따라 거슬러 거슬러만 갑니다 그곳에 이르는 길이 하, 소삽한 꿈길일지

라도 기어이 내가 당도할 거기 

 

 

-청평사 가는 길/강재현-

 

하늘이 가까운 땅 한 평에 깨금발로 서면

그 곳에 슬픈 짐승의 눈물이 고여

강이 되어 살고 있다

 

품안 가득 거꾸로 선 산등성이를 부여안고

종일 쩔쩔매다가

낮달 한 덩이 소리 없이 잠기면

가슴을 녹여 달리는 뱃고동 소리

제 살점을 떼어 물고기 밥으로 울린다

 

세상 저편,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처럼

막막한 하늘이 보일 때까지

한동안 나귀처럼 풀만 먹다가

이슬만 먹다가

나귀처럼 우는 법을 배우고 나면

강을 다 가른 것이다

 

아쟁 켜듯 먼지 풀썩이는 길 위에

마음 자락을 풀어놓으면

멀리 산 그림자 속에 묻힌 청평사

그제서야, 물 속 고요에 잠긴

전설처럼 제 몸을 눕힌다

 

 

-달에게로 가는 길/이용헌- 

 

다리 위에 달이 있어요.

멀고 먼 달이에요.

눈물방울 속에서만 일렁이는 달빛이 있어요.

깊고도 깊은 수심이에요.

거스를 수도 떠내려갈 수도 없는 그림자가

다리 위에서 흔들리고 있어요.

 

미처 지우지 못한 얼굴들

난간과 난감 사이에서 출렁이고

내일을 믿지 않는 오늘의 바퀴들은

닳고 닳은 관성으로 다리 위를 달려가지요.

 

제아무리 내달려도 달에 다다를 수 없는 바퀴들

속도에 민감한 사람들은 옆을 보지 않아요.

별빛 얼어붙은 옹벽 아래 쪽잠으로 지샌 밤이

이 세상의 마지막 유랑이었다는 걸

바람벽에 감춰진 포클레인은 알까요.

 

무엇을 무너뜨려야만 새 세상이 온다는 건

달나라 같은 이야기죠.

벽만 보고 살아온 사람에게 퇴거명령이란

죽음의 안방밖에 더 있겠어요?

달콤하고 아름다운 추억 같은 건 없다 해도

언덕바지 마른 가지에 매달린 달은

강물이 없어도 황홀했지요.

 

다리 위에 달이 지고 있어요.

다리가 사라져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달

사라진 듯 사라졌다가도 다시 살아나는 달

지워지지도 떠오르지도 않을 검은 그림자 하나

귀소본능으로 달리는 바퀴 위에서 보았어요.

 

 

-숲길 3/최서림-

 

정글을 누비던 혁명가들이 사라진 지금

시인들이 말로써 싸운다

시퍼렇게 벼린 말이 아니라

말랑말랑한 말로써 싸운다.

아직도 체 게바라처럼

먼 저편을 꿈꾸는 시인들이 남아 있다.

깊은 계곡 산천어처럼 숨어 지내고 있다.

혁명가와 시인은 일란성 쌍둥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 집을 세우기 위해 싸우는

혁명가의 몸 안에도 시인의 피가 흐른다.

총으로 세운 집은 금방 무너질 수 있지만,

아기 엉덩이 같은 말로 지은 집은

탱크로 밀어붙여도 쉬이 무너지지 않는다.

네루다가 지은 말의 숲 속에서

체가 총을 닦으며 쉬고 있다.

시 속으로 난 길이

체가 더듬어서 가야할 길이다.

 

 

-숲길 2/최서림-

 

말랑말랑한 말은 힘이 세다.

시간에 녹슬지 않는다.

탱크에 깔려도 저글링 공처럼 통통 튀어 오른다.

담배연기같이 사라질 것 같지만

한번 뱉어낸 말은 사람들 속에

온 우주 구석구석에 가득 차

세상 끝까지 간다.

샘물 같은 말은 힘이 세다.

영랑, 동주의 순결한 말은

이 땅 여기저기 박아놓은 쇠말뚝도 녹인다.

체 게바라의 유일한 재산 홀쭉한 배낭에 들어있는

푸릇푸릇한 시들 안에는

사막을 숲으로 바꿀 만한 피가 흐르고 있다.

이름도 없이 피었다 사라진

지구 위 수많은 시인들의 말이 이룬 숲에서

밤낮으로 산소가 뿜어져 나온다.

말을 무서워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뿜어낸 이산화탄소를

그들의 말이 엽록소가 되어 산소로 바꾸어낸다.

말은 힘이 세다.

씻긴 말로 지은 집들로 마을이 생기고

함부로 베어낼 수 없는 신성한 숲이 생기고 길이 생긴다.

우주에 가득 차 있는 그 말이 이끄는 대로

끝없는 행렬이 이어진다.

결코 죽지 않는 말로 지어진 마을과 숲은

들어오는 사람들 숫자만큼 커진다.

 

 

 

-길을 놓다/김경호-

 

출발역이어서
더 이상 갈 곳 없어서
콘크리트 침목을 깔고
레일을 얹는다


저 먼 정거장 분기점까지 오백 미터
압송관은 쉬지 않고
시멘트 반죽을 토하고
끝없는 소음과 삽질
욕설과 고함을 미장하는 하루


개잡다가, 씨름하다가
설거지하다가, 지게차 타다가
그물 걷다가, 고난의 행군하다가
길 없는 사선을 넘어 여기까지 떠밀려 온
한 때 길 없던 그들


빛이 들지 않는
거대한 원형 석실 고분 속
녹슨 손가락뼈와 먼지김밥을 으깨어
지구가 멸망해도 끄떡없을
길을 내며 오늘,
반죽 위에서 오체투지하던
먼지 한 덩이
풀썩 레일 위로 엎어진다


길을 놓는다
칭-, 칭-
레일이 운다

 

 

-먼 길/이채민-


여름이 아프게 왔다
나의 세상에서 가보지 못한 길
신발을 갈아 신고 달려가도
스스로는 갈 수 없는 길로
그녀가 나비처럼 날아갔다


마음만큼 손도 발도 커서 무슨 일이든
앞장서야 직성이 풀리는 그녀가
성격대로 형제들 중 맨 앞장서 그 길을 갔다


물결치는 슬픔을 팽개치고
시린 몸을 꽁꽁 싸매고
화장장 불가마 앞에서도 우리를
맨 먼저 불러 세웠다


우는 강을 남겨두고
끝 이라는 벌을 겹겹이 두른
남루한 내 시詩 한편 남겨놓고


먼 길
잘 찾아 갔을까
먼저 가신 아버지 어머니는 만났을까

 

웃음소리도 보름달처럼 크고 밝았던 올케가
여직껏 환한 답을 주지 않는다

 

 

-시의 길/최서림-

 

내가 걸어온 역사는 인화물질로 가득 찬

드럼통이 굴러 내리는 비탈길이다.

자갈과 바위가 깔린 울퉁불퉁한 길이다.

좌충우돌 부딪혀 먼지 자욱한 길이다.

뾰족한 바위에는 볼품없이 찌그러져서

전혀 엉뚱한 길로 튀기도 한다.

드럼통이 제 길 찾아 한 가운데로 느릿느릿 굴러가게,

이름도 없는 시인들이 비탈길에다

말로 잡목도 심고 숲도 가꾸어본다.

가난한 시인들이 사랑하는 역사는

괴물이 아닌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다.

개동지빠귀, 산까치가 집을 짓는 숲이 있고

모래무지, 뚝지가 납작 엎드려

지느러미만 살랑거리는 강이 있다.

논밭으로, 공장으로 가는 사람들의 길이 있고

호박꽃, 수세미꽃 피는 마을들이 있다.

 

 

-적벽강 가는 길/이병초- 

 

산길인가 싶으면

바다가 가깝게 다가왔고

파도소리를 끼고 걷는다 싶으면

다시 산길이었다

 

잡목들 사이로 퀴퀴한 짐승털 냄새가 풍겨오기도 했다 사람 발자국을 물고 있는 풀이

허리를 펴면 새소리가 반짝일 것 같았다 칡넝쿨이 하늘을 가린 대숲을 지나다보면 군인

들이 철수한 초소가 있었고 소망을 적어 철조망에 매단 패들이 갈매기소리에 몸이 들리

기도 했다 느린 걸음을 재촉하듯 길은 앞을 툭 털어내며 바다를 보여주었고 이내 바다를

꼴깍 삼켜버렸다 

 

파도소리는 멧방석만 한 홍어가 잡혔다는 시절을

짭쪼롬하게 실어오고, 하섬까지

바닷길이 열린다는 오늘을

절벽에 바짝 붙였다

바위에 산산이 부서져 물러섰다가

순식간에 밀려와 다시 부서져 튀는 파도는

절벽 오목한 데마다 쏠릴 것이고

바위 그늘에서 놀래미 숭어 배를 따다

비린내 묻은 손으로

내 귓바퀴를 잡아당길 가시내가

맨발로 달려올 것 같았다

거대한 바위들이 몸을 눕히고

숨소리를 잇댄 십여 리

석양이면 바위가 붉게 빛난다는 얘기를 타고

파도는 선사시대에 감기고 있었다

수십만 년 씻어냈어도 되레

더 검어진, 사람다운 세상을 못 이루어

천근만근 검어진 역사가

내일이란 글씨를 뒤적거리며

석양을 파도소리처럼 구워먹을 것이었다

 

저녁놀이 바다를 빗질하기 시작했다 밀물인지 썰물인지도 르고 붉게 반짝이는 잔물결로

검붉은 바위를 쓸어댔다 바다는 몸을 자꾸 뒤집으며 주먹만 한 해를 품에 떨어뜨리고 저녁

놀에 피칠된 적벽강을 갈매기 둬 마리가 쪼아먹었다 집에 가기 싫은 잔물결소리가 반짝반짝

 종이배처럼 접히기도 했다

 

* ‘적벽강’은 전라북도 부안군 고사포 해수욕장과 격포항 사이에 있다

 

 

-산책길, 민낯을 보다/정 숙-

 

숲길은 넓고, 소나무 향 그윽하다

챙 넓은 검은 모자에 들꽃 하얗게 그려

우아하게 천천히 즐기면서 걷는다

핑크 뮬리가 구름처럼 모여 들며 서로 손 내민다

포근히 감싸 안아주며

뛰는 가슴 끝까지 같이 하자며 속삭이더니

 

순식간에 찬바람 분다

갈바람이 애잔하긴 하지만, 숲의 가을은

더 뜨겁게 타오르더라 까불대는 사이

금세 길은 좁아지고 굽어진다

탱자나무들이 가시를 세워 몸을 움츠리게 한다

 

평생 그의 가슴팍에서 산책이나 즐길 작정이었는데

이제 회오리의 눈알이 된

범어포구 귀신고래의 구불텅한 초겨울 숲길

난 아무 곳에나 방황의 뿔을 꽂아대고 있다

되돌아갈 길도, 나아갈 길도 보이지 않는다

늦었지만 내 가슴에 핑크 뮬리를 심을 수밖에

 

시간의 민낯 보러 간 가을 숲에서
사랑의 민낯까지 만나고, 돌아보니

우수수 나뭇잎들이 지고 있다

해는 서산마루 어깨 잡고 안간힘 쓰느라

낯이 점점 더 붉어지고 있다

 

 

-마트 가는 길/나영애-

 

초겨울 태양이

나를 내려다 봅니다


눈이 부십니다

벅차고 따듯합니다

맑은 공기 들숨 날숨

낙엽 향기에 폐가 웃습니다

오감이 동원되어 초겨울의

햇빛과 속삭이며

먹거리 사러 가는 길

귀한 겨울 햇빛 한 줌에

잿빛 마음도 뽀송 해졌습니다


어지럼증에 대 여섯 달

갇혔다 풀린 몸

자유로운 걷기

흥흥흥 마트 갑니다

 

 

<돌샘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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