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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제 시 모음

'길'을 주제로한 시 모음 (35)

작성자돌샘이길옥|작성시간26.06.17|조회수64 목록 댓글 0

-사이프러스가 있는 길/윤 선-


만년설을 품은 능선과 달의 경계에 마을이 있다
달무리를 인 산꼭대기는 아직 밤이다


지난밤 몇 그루 과실수가 발을 빼어
마당 바깥으로 나가는 것을 보았다
낮은 새벽을 넘어오는 빵 굽는 냄새
새소리가 느리게 흐르는 새벽 공기에 섞이고


빛을 받자 사이프러스가 총총하다


멀리 있는 신들과 죽은 자들이 접선한다는
하늘을 찌르고 올라선 숨은 꼭대기
공중 어디쯤 새소리와 부딪치는 곳


나무는 몸 밖으로 솟은 말들을 쏘아 올리는지
더 높아진 달을 꾹꾹 찌르는지
어설픈 바벨은 큰 나무 같아서
흔들리면서도 하늘로 뻗어 오르기에 바쁘다


당신과 나의 달은 그림자로 쏟아지고
사이프러스의 날카로운 숨소리가
피 끓는 몸을 관통하는 시간


검은 바벨의 흔적이 고요히 흘러내리는
여기 플로렌스의 작은 마을


들리니?
내 몸이 짙푸르게 커져 가는 소리
만년설이 창가로 미끄러져온다
똑똑, 들리니?
나를 노크하는 소리

 

 

-방 구하러 가는 길/박노해-


결혼하면서 400짜리 신방을 꾸려

그녀는 작은 쪽창에 고운 커텐을 달고

싱싱한 화분 몇개 걸어놓고 아침마다 물을 주며

예쁜 그릇 살림살이 사 모아가며

없지만 오손도손 즐거웠는데

처녀 때 하청공장 미싱사로

밥먹듯 해치우던 철야로 골병이 났는지

첫 유산에 앓아누워 전셋돈 날리고

100에 5만원짜리 월세로 떨어져

아내는 반찬값 50원 100원 깎아가면서

신 귤 하나 군것질 한푼 없이 절약을 하고

나 역시 동료들 눈치보며 술자리를 피해다니며

잔업 특근 늘려가며 바둥쳤는데

주인네는 월세를 2만원은 더 올려달라 한다


모처럼의 휴일날 아침부터

아내와 복덕방을 찾아다니며

100에 5만원짜리 월세를 뒤진다

허리 굽정한 복덕방 노인네 뒤를 따라가보면

침침한 지하방이거나 공동부엌

화장실도 없는 습습한 쪽방이 아니면

수도시설 없는 바깥부엌

5만원짜리 이런 방도 잘 나오지 않는다며

복덕방 영감님은 계약하라고 재촉하는데

아내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든다


동네마다 즐비한 복덕방을 거쳐가며

골목 골목 내논 방들 다 돌아봐도

그래도 부엌에 수도 있고 창문이 있는

지금 살고 있는 방만은 한참 못해

땀흘리며 싸다녀도 오후가 되도록

두 몸 뉘일 방 한칸 구하질 못해

복덕방 낡은 소파 위에 털썩 주저앉는다

이틀째 돌아다닌다는 아주머니는 한숨지으며

집 가진 년놈들은 애새끼도 안 퍼지르나

애가 둘이라서 방 얻기가 어렵다며 마른 입술이 타고

해마다 연례행사로 싼 방 찾아 이사를 다닐 때마다

점점 작아지는 방 안에 누운 첫날밤이면

눈물이 절로 나고 세상 살맛 안 난다는 야채장수 아저씨

올라가는 방값이 날강도라는 할머니의 한탄을 들으며

답답한 가슴으로 깊숙한 담배연기 내어뿜는다


비좁은 방이라고 부엌은 있어야 하고

기름먼지 땀투성이로 공장에서 돌아오면

부엌에 쪼그려 앉아 물은 끼얹을 수 있는 방 한칸을 원하건만

죽어라고 진 빠져라 잔업철야 휴일특근

안 먹고 안 쓰고 안 놀고 정말 최대한 노력을 해도

갈수록 방은 좁아지고 씨팔, 이러다간

토굴 같은 지하실로 변두리 산동네로 밀리고 밀리다가

우리 두 몸뚱어리는 끝내 이 땅에서 추방당하는 게 아닌지 몰라


돈많은 놈들이야

고층 호화아파트에 아담한 단독주택에다

콘도미니엄 별장에 빌딩에 노른자위 땅이란 땅은 다 거머쥐고

풍요에 넘쳐 무드 잡고 살아가는데

잔업에 지쳐 절뚝이며 닭장셋방으로 기어들어가

냄새나는 변소 앞에 종종거리며 줄을 서고

하수구도 없는 부엌에서 수건에 물 적셔 몸을 닦고

소음 매연에 콜록이고 좀도둑에 시달리며

여름이면 장마 걱정 겨울이면 연탄가스 걱정

해마다 오르는 방값에 쫓겨다니고

허허 이것도 사람 사는 거라고

인간으로 짜낼 수 있는 최선으로 노동한 대가라고

첨단 과학문명의 시대, 선진조국의 노동자 사는 꼬라지라고


저 많은 고층아파트 저 좋은 주택

저 아찔하도록 으리으리한 빌딩들은 다 어느 놈들 건지

무슨 용빼는 재주로 도깨비 방망이로

땀흘리며 노동하지 않고도 신선처럼

저 좋은 집들에 들어앉아 사는지

일당 5,300원짜리 15년 기능공 내 인생은

어지러워 어지러워 날이 갈수록 어지러워

먼지 쓴 얼굴로 글썽이는 유난히 초라해 뵈는 아내에게

화풀이로 짜증내다 다시 등을 토닥이고

돌덩이처럼 무거운 발걸음으로

비탈진 산동네 골목길을 기어오르며

찾아서 찾아서

우리 두 몸 뉘일 단칸셋방 찾아서

100에 5만원짜리 방을 뒤진다

부릅뜬 눈동자로 숨찬 분노로

검붉은 핏빛 노을 비탈진 산동네

찾아서 찾아서

어두운 골목 골목 찾아 헤맨다

 

 

-증도 가는 길/김은아-

 

태평염전에 시화(詩畵) 보러 가는 길
아카시꽃과 찔레향이 오월을 수놓았다


하얗게 일렁이는 삘기의 군무 속에로
시화는 군데군데 데크 위에서 읽어줄
눈길을 기다린다


태평염전에서는 새들도 시를 읽는다
시화 위에 앉아 시원하게 배설도 하고
노래를 부르고 제 날개를 추스른다


바람은 손님으로 초대되어
허공에 은빛 색을 띄워 놓고 붓질을 한다
출렁거리는 하루를 위해
태평염전에서는 삘기꽃도 시를 노래한다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며 시를 게송한다


행복한 고독의 시간이 증도에 흐른다
증도에서는
시들이 바람을 부르고
사람들이 삘기꽃을 날린다.

 

 

-폐허의 길/박재분- 

 

오래 전

폐광이 된 채석장으로

길 하나가 꿈틀거리며 오르고 있다

산모퉁이 돌 때마다 몸

감추다 드러내다

이리저리 오르고 있다

 

한 때는 저 길을 통해

대량으로 학살된 나무들이

끌려 내려오고

다이너마이트를 터트릴 때마다

산들이 가슴으로 토해 낸

무수한 암석들을 실어나르던 길

 

그 기억을 지우느라

잡목들 자라 군데군데

길을 막고 있는데

 

길에서 이우러지는 모든

흥망성쇠가 떠도는 바람 같은 것이라고

폐허가 된 길이 중얼거리듯

길고 긴 허무를 끌고 산 속으로 숨어든다

 

 

-가지 않은 길/프로스트- 

 

노란 숲 속에 길이 두갈래 갈라져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나는 두 길을 갈 수 없는
한 사람의 나그네라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덤불 속으로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 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풀이 더 우거지고 사람 걸은 자취가 적었습니다.
하지만 그 길을 걸으므로 해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입니다,


그 날 아침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 적어
아무에게도 더럽혀지지 않은 채 묻혀 있었습니다.
아, 나는 뒷날을 위해 한 길은 남겨 두었습니다.
길은 다른 길에 이어져 끝이 없으므로
내가 다시 여기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에선가
한숨을 쉬며 이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갈라져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것으로 해서 모든 것이 달라졌더니라고.

 

 

-달이 걸어오는 길/허수경- 

 

저 달이 걸어오는 밤이 있다

달은 아스피린 같다

꿀꺽 삼키면 속이 다 환해질 것 같다

내 속이 전구 알이 달린

크리스마스 무렵의 전나무같이 환해지고

그 전나무 밑에는

암소 한 마리

나는 암소를 이끌고 해변으로 간다

그 해변에 전구를 단 전나무처럼 앉아

다시 달을 바라보면

오 오, 달은 내 속에 든 통증을 다 삼키고

저 혼자 붉어져 있는데.

통증도 없이 살 수는 없잖아,

다시 그 달을 꿀꺽 삼키면

암소는 달과 함께 내 속으로 들어간다

 
온 세상을 다 먹일 젖을 생산할 것처럼

통증이 오고 통증은 빛 같다 그 빛은 아스피린 가루 같다

이렇게 기쁜 적이 없었다

 

 

-먼 길/이기철-

길 떠나면 집들은 부호로 남는다

내 일찍 선도(仙道)를 버리고 지상의 길 걸었으니

내 발은 웃자란 갈대와 부토의 먼지가 편안하지만

마음이 불타 올라 등뒤의 천년이 인화지처럼 환하다

어떤 5세기가 이 산에 머물렀을까

나대(羅代) 사람들은 어떤 말로 사랑을 전했을까

햇볕에 들켜버린 내 속마음을

동풍이 비웃으며 지나간다

발은 구름을 향하지만

운문이 내 발을 받아주지 않아 나는 구름 바깥에 머문다

이 순금의 햇빛 아래서는 발에 밟힌 풀꽃 이름을 잊기로 한다

핏줄 없이도 능히 천년을 견디는 돌들은

그렇다, 영원의 모습은 피의 빛깔이 아니다

뿌리들이 불끈불끈 힘줄 때마다

나무의 키가 하늘로 솟는다

나무는 얼마나 많은 말을 풀어놓아

바람이 일 때마다 노래를 잉태하는가

올려다보는 산은 숭엄하지만

내려다보는 산은 아우 같다

이제 다 왔느냐 물으면

길 없는 길가 비옷나무가 손 흔들어 대답한다

아직도 오름길만 고집하는 내 신발을

나는 꾸짖을 수가 없다

 

 

-부석사 가는 길/정호승- 

 

부석사 가는 길로 펼쳐진 사과밭에

아직 덜 익은 사과 한 알 툭 떨어지면

나는 또 하나의 사랑을 잃고 울었다

부석여관 이모집 골방에서

젊은 수배자의 이름으로 보내던 그해 여름

왜 어린 사과가 땅에 떨어져야 하는지

왜 어린 사과를 벌레가 먹어야 하는지

벌레도 살아야 한다고

벌레도 살아야 벌레가 된다고

어린 사과의 마음을 애써 달래며

이모님과 사과 나뭇가지를 받혀주고 잠들던 여름밤

벌레가 파먹은 자리는

간밤에 배고픈 별들이 한입 베어 먹고 간 자리라고

살아갈수록 상처는 별빛처럼 빛나는 것이라고

내 야윈 어깨를 껴안아주시던 이모님

그 뜨거운 수배자의 여름 사과밭에

아직 덜 익은 푸른 사과 한 알 또 떨어지면

나는 부검실 정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 울던

너의 사랑을 잃고 또 울었다

 

 

-길 위의 生/이학성- 

 

세상 구석구석 그가 안 다녀본 곳은 없다.

여섯 달쯤 그는 머물고 나머지는 떠나가 있다.

그러려고 여기서 미친 듯이 돈을 벌고 지갑에 돈이 떨어져서야 돌아온다.

아직 그가 못 가본 곳은 달 표면의 분화구 정도.

몇 번인가 그가 외지로 끌고 나가려 했지만 거절했다.

생의 환희를 길에서 얻는 부류가 아니며 그럴 시간도 모자랐다.

아쉬움을 달래려는 듯 그는 매번 무언가를 현지에서 부쳐온다.

보풀이 일지 않는 핀란드산 협탁 깔개

알제리의 양털 무릎담요가 그래서 거실의 소유가 되었다.

페루의 코카나뭇잎 몇 묶음과 침보라소 인디오들이

공들여 새긴 알렉산더 폰 훔볼트의 조각상도 탁자 구석을 차지했다.

받는 이의 기쁨을 아노라는 듯 양질의 인쇄술을 자랑하는

마인츠의 명화엽서 시리즈며 소년시절 모차르트의 얼굴이 인각된

잘츠부르크산 다크초콜릿도 어김없이 전달되었다.

쉬지 않고 그는 발로 세상을 훑고 다닌다.

떠도는 바람 같은 그를 주저앉힐 순 없다.

석 달 전쯤 이스탄불에서 간행된 신문지로 돌돌 감싼

꾸러미가 도착하며 별안간 소식이 끊겼다.

포장을 끄르자 유리잔 세트와 애플티 상자가 나왔는데

파손되지 않도록 애쓴 배려는 유효했고

온수에 풀어 마시면 농밀한 향에 기분 좋게 감전되리라는

휘갈겨 쓴 쪽지가 동봉되어 있었다.

부드러운 사과차의 향을 음미하며 살펴보니

유리잔 표면에 세 줄기 올리브가지가 상감되어 있다.

그것들은 파르테논 신전의 대리석 기둥을

휘감고 올라갈 기세로 힘차면서도 우아하게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저 올리브가지를 부리에 물고

두 마리 비둘기가 돌아가야 할 그의 방주(方舟)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당장 비극적인 대홍수가 들이닥친다 해도 그는 떠날 것이다.

여전히 그를 나무라거나 두둔할 일은 없으며

길은 바깥에 있고 그를 조금씩 철들게 한다.

 

 

-길/김혜천-

 

소가 있다기에

 

소를 찾아 길을 떠나네

 

허기 넘치는 시장 바닥에도

 

가부좌 튼 방석 위에도

 

소는 보이지 않네

 

검은 물방울이 자라는 습한 동굴에

 

환한 빛 들 때까지의 거리가

 

가끔씩 나를 흔들어 깨우네

 

밖으로 찾아 헤맬 수록  멀어지는 거리

 

노을이 하루를 달래는 기진한 저물녘

 

살아오면서 쌓아 온 퇴적물 속에

 

소가 뒹굴고 있네, 마침내

 

소의 고삐를 끌고

 

가보지 않은 길을 힘차게 걸어가네

 

 

-휘어진 길 저쪽/권대웅-

 

세월도 이사를 하는가보다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할 시간과 공간을 챙겨

기쁨과 슬픔, 떠나기 싫은 사랑마저도 챙겨

거대한 바퀴를 끌고

어디론가 세월도 이사를 하는가보다

어릴 적 내가 살던 동네

기억 속에는 아직도 솜틀집이며 그 옆 이발소며

이를 뽑아 던지던 지붕과

아장아장 마당을 걸어오던 햇빛까지 눈에 선한데

몇 번씩 부서졌다 새로 지은 신흥 주택 창문으로

엄마가 저녁밥 먹으라고 부르는 소리가

초승달처럼 걸려있다.

어디로 갔을까 그 세월의 바퀴는

장독대와 툇마루와 굴뚝을 싣고

아버지의 문패와 배호가 살던 흑백텔레비전을 싣고

초저녁별 지나 달의 뒤편 저 너머

어디쯤 살림을 풀어놓은 것일까

낯설어 그리운 골목길을 나오는데

문득 어디선가 등불 하나가 켜지고 있었다

희미한 호박 등처럼 어른거리는

내 마음속 깊은 골목 맨 끝 집

등불 속에 살고 있는 것들

오, 어느새 그 속으로 이사와

아프고 아름답게 반짝이며 자라고 있는

세월들

 

 

-길/정온유- 


길을 떠나도 길이 내게 다시 옵니다.

길은 말이 없습니다.

다만 보여 줄 뿐입니다.

길은 언제나 길에서 만나 길로 흐르기에

길을 잃어도 무섭거나 두렵지 않습니다.

 

길이 길을 만들어 갑니다.

 

길은 내 안으로 들어와 당신에게로 흐르고

다시 길 속으로 이어집니다.

나는 길 위에 있고 길은 내 위에 있습니다.

내 안에서 뿌리를 내리며 고요한 길을 만들어 갑니다.

단단하고 견고한 길은 내 몸 속으로 심어져

마음과 생각과 시간 속으로 길을 냅니다.

 

당신이 나를 만들어 갑니다.

 

 

-저문 길/조동례-


밤낮 환한 백야 지나고
밤낮 캄캄한 알래스카 십이월
세상이 어두워지자
자동차들 쌍불 켜고 다니는데
불 켜는 걸 깜빡 잊은 차 한 대
티눈처럼 박혀 있다
앞차 따라가는 동안 길 잃지 않겠지만
속도가 느려 앞차와 멀어지면
뒤차가 힘껏 불빛을 보내도
제 몸에 가려 어두운 길
앞이 캄캄해서야 비로소 불을 켠다

 
나도 내 눈 볼 수 없어
눈에 보이는 세상에 이끌려 살았다
어쩌다 거울 속 나를 착각하고
나 아닌 나를 흉내내며
세상 보는 눈 세상에 맞췄으니
세상 모든 불빛 꺼져야
본래 나를 보는 눈 뜰까

 

 

-길/심창만-


지렁이 한 마리가
비 그친
직지사 극락교를 건너간다

 
한쪽 발을
시멘트 바닥에 고정시키고

 
나머지 한쪽 발을
오래오래
절 밖으로 들어올린다

 
그 사이로
해와 달이 지나가고
진입로가 서너 번 굽었다 펴진다

 
더럽고 먼 길,

 
내려놓을 수도
떠내려 보낼 수도 없는
다리 위
길 하나가

 
허공에
철사처럼 구부러져
녹슨다

 

 

-가지 않은 길*/김추인- 

 

한 생(生)이 노을 들도록 걸었다 세상의 길이란 길 다 걸었다 싶게

 

윗뜸 아랫뜸 소롯길부터

산허리 감아 돌다 문득 멈추어 하염없이

산노을 내다보던 자드락길이며

너덜겅 비탈길도

전라도 황토길, 사하라 모랫길 구분 없이

홀로도 잘 걸었다 싶은데

 

나, 가지 않은 길이 있었네

 

내 안의 먹점 만 같은 얼룩 하나

“친구야-”

불러보는 지워지지 않는 이름 하나,

보리문둥이 피울음 잦아들 소록도는

뭍이 사무치는 곳

눈썹 문신한 아낙이

수수 천 번 서러이

어매- 어매- 불러댔을 쉰 목소리 들리는 곳

 

녹동에 갔으나 친구 이름을 찾지 않았네 팔랑거리던 소녀의 시간들이며 꿈 쪼가리들 흩어두고 수업 중

영문도 모른 체 엠블런스에 실려 간 생벼락 맞은 천형天刑 앞에 화장하고 뻗쳐 입은 나의 도시를 무슨 용

기로 보이랴 뙤약볕 아래 맨드라미 부용꽃이 눈이 부시어

 

고개 떨구던 거기

나, 뜨락 한 켠 숱한 울음길 언저리에 섰다만 온

천리를 달려와 몸 씻기고 파마 말아주던 서울 아저씨 부산 아지 매, 그 낯모를 천사들의 뜨거운 손

창밖에서 훔쳐만 보고 돌아서던 길

손 포개지 못한 길

 

나, 가지 않은 길이 있었네

   

*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 ’제목 차용

 

 

-싱그러운 퇴근 길/박숙이-

 

싱그러운 유월을 밟고 돌아가는 나의 집엔

새끼 올망졸망 매단 살구나무 한 그루가  단 냄새를 솔솔 풍기며

날 기다리고 있습니다

 

등대처럼 늘 켜져 있어야 된다는 압박감 하나로  온몸이 굳었다가도

집으로 향하는 길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재촉합니다

밝은 집으로 퇴근할 축복이 씨눈처럼 파랗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수평선처럼, 경계에 견고히 머물다가도, 파도처럼 자신을 가라앉히며

집에 도착했을 때, 아 그랬구나, 마음 추스러줄, 떫음을 조금은 물고 있는

중년의 감나무도 귀찮도록 기다리고 있습니다

 

차 한 잔의 유혹이 퇴근길을 어이어이 부르며 뒤따라 올 때마다

그 값이면 국수가  몇 그릇인데 싶어, 순박하게도 몸 묶여 있는

국수 두어 다발 사 들고 탈래탈래 들어가는 저녁입니다

 

해맑은 웃음이  수돗물처럼 찰찰 쏟아지는 집으로

남촌의 해처럼 그럭저럭 돌아가는 저녁입니다

 

때론 한적한 골목길 가로등 밑에서, 터질듯 한 가슴으로

앵두의 반 익은 몸처럼 새콤달콤한 상상을 부풀리면

새들이 와락 달려들어 가려운 곳 뭉클뭉클 쪼아줍니다

 

 

-길/곽재구-

 

무신론자의 종교

가을의 꽃향기

종탑의 아기 종에게 하늘의 음계를 일러주는 초승달

호숫가의 나무의자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도스토옙스카야*

 

당신이 있어 세상이 참 좋았다

 

* 속기사. 열아홉 살에 도박 빚에 쫓긴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속기해주며 만나

스무 살에 결혼했다. 한 차례 이혼 경력이 있는 스물다섯 살 연상의 신랑은 결혼

식장, 신부의 가족 앞에서 뇌전증 발작을 일으켰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신혼집

월세가 50루블이었는데 빚은 2만 루블이었다. 아이 넷을 낳아 키우며 자신이 직

접 도스토옙스키의 책을 출간해 빚을 다 갚았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비

롯한 만년의 작품들은 이이가 마련한 경제적 안정 속에서 이루어졌다. 서른다섯

살에 혼자가 되었는데 왜 재혼하지 않느냐 물으면  내가 도스토옙스키와 살았는

데 다른 누구와 또 살 것인가?  라고 말하였다.  2017년 가을 상트페테르부르크

에서 처음 그의 사진을 보았는데 마음이 따뜻해졌다.

 

 

-폭설, 그 흐릿한 길/심재휘-

 

아주 떠나버리려는 듯
가다가 다시 돌아와 소리 없이 우는 듯이
눈이 내린다
어깨를 들썩거리다가 뛰어가다가 뒤돌아서서
폭설이 퍼붓는 길이다 그러면 이런 날은
붉은 신호등에도 길을 건너가버린 그 사랑이
겨우 보이도록 흐릿해져서
이런 날은 도무지 아프지가 않다

   
부풀어오른 습설이 거리에 온통 너무 흩날려
이편과 저편의 경계가 지워진 횡단보도는
건너지 않는 자들도 그냥 가슴에 품을 만하다
길 옆 나무가 내게 손을 내미는지
내게서 손을 거두어가는지 알 필요가 없고
휘청거리는 저녁은 어디쯤에 있는지
이별은 푸른 등을 켰는지
분간할 필요도 없어서
 

그저 떨어지는 빗금들이 뒤엉켜 서로의 빗금을 지울 때
흐릿한, 모든 것들, 사이에, 쓰다 만 글자처럼 서 있으면
그날의 윤곽은 악보 없이 부르는 나지막한 노래 같아서
눈코입이 뭉개어진 이런 날은 오래도록 아프지가 않다

 

 

-사려니 숲길을 가는/황학주-


사려니숲길을 가는
그 마음 다칠까 되부르지 못한 일이
사실은 단둘뿐인 먼길을 간 것인지

 
야윈 눈청에 빗금을 다는 저녁은
눈이 어는 길만 밟듯이 오고
사랑은 무엇과도 달라야 한다
이런 생각은 노루 혓바닥 같은 야생을 핥고
혀를 깨무는 소리를 돌아나오는 거기도 하지만

 
사랑은 살려달라고 하는 일 아니겠나
이젠 전화도 가지 않는 옛날에게
사려니숲길을 걷게 하는 건 아니지

 
막 숲을 벗어났다 돌아오는 메아리가
때죽나무 하나를 두르고
성냥불을 쬐며 쿨럭이는 뽀얀 영혼을 덧입는다

 
죽을 거 같은 채로 시작된
그런 그 사랑 지나갔나 싶은
길은 끝까지 촛농이 떨어진 얼굴색이라 여기고 마네

 
뽀삭뽀삭 눈에 밟히는
그 사람 오지 못한 길에서
그 한 사람, 마주치는 일

 
눈밭 한쪽에 볕이 들어 놀라고만 서 있는
쓸모없어 사랑은 신비롭다 우산도 없는 나

 

 

<돌샘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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