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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제 시 모음

'길'을 주제로한 시 모음 (36)

작성자돌샘이길옥|작성시간26.06.18|조회수36 목록 댓글 0

-처음 가는 길은 연애 같은 것/백향옥-

 

빈 들판을 걷다가 알았다

떠나고 싶은 지독한 열망들이

단지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가고 싶었던 것임을

 

들에서 맨몸으로 대지와 허공을 받아들인다

자연이라는 만식전* 앞에서 춤을 추듯

무녀들

초록의 무녀들

비끼는 햇살에 몸을 떨며 신탁을 받아 적던 나뭇잎이라는

무녀들처럼

 

수풀 속에선 새 소리

새들의 소리가 들불처럼 타오른다

소리의 소나기로 들어가는 너

 

어떤 소리를 듣고 나면 지독하게 앓는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고 입술도 달싹일 수 없어

풍경이 약이 되지만 치명의 독이 되기도 한다

 

새들이 떠날 준비를 한다

곧 들판이 비워질 것이다

 

파란 하늘이 너무 파랗다.

 

 

-눈 나린 길/박남수-

겨울 밤, 눈 나리는 밤

하아얀 눈을 밟으며 밟으며 가신 이가 누구일까

머얼리 발자최 조고만 발자최 건넌 마을로 건너갔고나

한 줄기 입김에도 흐려지는 유리창 앞에

호올로 호올로 금붕어처럼 직히며

흰 눈 나려, 나려서 쌓이는

이 아츰 우편배달부가 지날 상한 아츰

행여 돌아올 리 없을 이

그이를 그리 그리며

내 마음은 자릿자릿 설였다

태고 적 서름이 서린 이 아츰에

알지도 보지도 못한 이 가신 길에

어찌하여 조고만 발자최에 슬픈 전설을 맺으려는 걸까

 

 

-그대 안의 백단향 숲길/조정인-

 

말로는 다 못할 자비에 잠겨 그가 제자들을 건너다보았다

 

- 아난다, 내 주홍빛 가사 위로 빗방울처럼 꽃잎이 떨어지누나.*

 

​ 그는 저에게로 뛰어든 꽃들의 울음을 온몸으로 받아

어루만지던 사람 나무 아래 소매 끝을 놓아야 하는

결별의 시간이 와있다

 

꽃비에 씻긴 망자의 감은 눈꺼풀 안쪽,

 

중음(中陰) 초입에 백단향 우거진 숲길이 보인다 망자는

잠잠한 눈빛으로 숲길을 내다본다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가는 자의 저문 어깨를 스치고 이마가 환한 자가 오고 있다

둘은 무심히 가던 길을 가지만 실은, 둘로 나뉘어 사라지는

하나, 하나 안에 깃든 둘이다

 

세상의 모든 싯다르타, 싯다르타, 싯다르타......는

하나의 싯다르타, 하나의 싯다르타는 끝없는 싯다르타

 

망자의 주홍빛 가사 위로 하염없이 백단향나무 꽃잎이 진다

생전의 그가 말했듯 꽃잎은 그 자신이다

 

이를테면

망자는 망자의 전송을 받으며 이승을 떠난다네

 

*드라마(인도) <붓다> 중에서.

 

 

-길/박우담-

 

그늘이 밟힌다

자전거가 지나가고 낡은 운동화가 지나가고 부조리한 흔적만 남긴 길

 

지친 햇살이 흐느끼고 있다

 

너의 어깨가 내 가슴에 기대있고 내 팔이 네 목덜미를 스치듯

가지와 가지가 잎과 잎이 서로 맞닿아 있다

 

은행잎과 홍시가 뒤섞인 길에는 수채화의 물감처럼 그림자와 햇살이 엉켜있다

원근법이 무시된 채 밟고 밟히는 것들

터진 홍시의 그림자가 나의 아픔

 

빛은 그냥 지지 않는다

노을이라는 징후를 남기지

 

노을이 이파리를 더욱더 선명하게 덧칠한다

 

나는 부조리한 흔적만 남긴 길을 지나간다

노을을 등 뒤로 밀어내면서

 

 

-대척지로 가는 길-이성자 그림/정선희-


처음에는 잘 읽히지 않았다


그 벽화에는 떡살 무늬가 새겨져 있고 무지개 파편 위로 열기구가

떠다니고 별 가루가 쏟아져 내리고 옛날이야기처럼 구리동전이 보인다


오목한 것과 볼록한 것의 차이를 음양이라고
동서양의 결합을 음양의 조화라는 인위적인 해석은 보지 않았다


시간이 날 때마다 말을 걸었다
침묵 속에서 천 개의 문장들이 떠다녔다


저 열기구는 어디로 가고 싶은 걸까
퍼즐이 완성되면 무지개가 되는 걸까


그림이 질문을 던진다
언제나 떠나고 싶은 건 네가 아니니


이윽고 소용돌이가 일면서
그림 속 동그라미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동그라미는 점점 더 크게 원을 그리며 나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나는 커다란 동그라미가 되고 있었다


발이 땅에 닿지 않았다
무수한 동그라미들이 나를 떠받치고 있었다

 

 

-산책길/김혜천-

 

아름드리 느티나무 가로수 길

저마다 깊숙하고 뒤틀린 옹이 몇 개 씻 품고 잇다

 

굴곡진 마디를 안으로 품어

단단하고 고집센 무늬를 새겨 놓고

어두운 터널을 달려 나왔어도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의연한 나무들

 

구멍을 들여다본다

들여다본다고

그 속내 가늠이나 하겠는가

 

거칠수록 융숭한 속살

가지마다 푸르게 푸르게 그늘을 달아

잉태한 여린 숨결 받아내고

행인의 지친 어깨를 다독이고 있다

 

시간은

상처와 희열을 포함한 정동(精動)의 기록

 

살아오면서 품은 옹이들이

누군가 디딜 수 있는 언덕이라면

지친 몸 쉬어가는 그늘이라면

그 사유만으로도 가슴이 벅차

옹이 박힌 거친 손, 내밀 수 있겟다

 

생의 터널을 빠져나오는 모서리가 빛난다

 

 

-못의 길/박무웅- 

 

못의 길이란

결집(結集)이다

 

그 견고한 집 한 채를 지으려고

수없이 많은 망치소리를

이음새 마다 박아 넣는다

그리고 세월을 견딘다

 

묵묵히 문들을 관리하거나

사람의 들고 나거나

죽고 태어나는 그 수를 센다

 

하나의 못이

나무속에서 오래 박혀 있는 것은

못의 끊이지 않는 설득력이 있기 때문이다

오랜 불화는 삐거덕거리지만

못은 나무를 물고

무너지지 않는다

 

박혀 있는 못들이란

꽝꽝 망치에 맞은 존재들

곰곰이 맞은 이유를

오래오래 캐고 있는 중이다

 

그러므로 못들의 대답들이란

헐렁한 소리들이 전부겠지만

그 헐렁한 소리들이 얽히고 설키면

그 또한 결집이 된다

 

 

-사막의 길/명재신- 
 
어떤 길은 가도 가도 사막일 때가 있다
저 나름 높이로 혹은 깊이로
살아온 길이 산이 되고 골이 되어 있다
 
가도 가도 그 길이 그 길이라서
가는 건지 멈춰 서 있는 지가 어림되지 않을 땐
나무 한 그루 낙타 한 마리라도 만나면
아직 살아있다고 위안이 되리라
 
마디낫자이드로 가는 길
이제야 절반을 넘어온 모래 언덕에서
저기 머언 유혹들 가령 신기루 같은 거
농염한 곡선의 모래 능선들 같은 거
 
만지면 하염없이 빠져들 거 같은
모래 그 느낌 같은 거 촉감 같은 거
아직 절반의 이정을 건너야한다
지평이 가까워지도록 석양이 다 하도록
 
내 지나온 길이 지루해지면
지글거리던 태양조차도
오른쪽으로 내려와 친구가 되고
문득 지나온 길들이 눈물이 된다
 
그대여 아직 절반의 길이다

 

 

-무슨 심부름을 가는 길이니?/김행숙- 

   

잘 아는 길이었지만……

우리가 아는 그 사람처럼

알다가도 모를 미소처럼

 

안개가 자욱하게 낀 날이었어요.

눈을 감고도 갈 수 있는 길이었지만

눈을 감지 못하는 마음이었어요.

나는 전달책 k입니다.

소문자 k입니다.

 

거기까지 가는 길은 아는데

왜 가는지는 모릅니다.

오늘 따라 울적합니다왜 그런지는 모르겠어요.

이럴 때 나는 내가 불편합니다.

 

만약 내가 길가에 떨어진 돌멩이라면

누군가가 나를 주워 주머니에 숨길 때의 그 마음을

누군가가…… 누군가를 쏘아보며 나를 집어 던질 때의 그 마음을

내가 어떻게 알겠어요?

내가 알면 뭐가 달라지나요?

 

평소에도 나는 나쁜 상상을 즐겨했습니다.

영화 같은

영화보다 더 진짜 같은

 

그러나 상상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라면

우리의 모든 상상이 비껴가는 곳에서

나는 나를 재촉했습니다.

한 명의 내가 채찍을 들고

한 명의 내가 등을 구부리고

 

잘 아는 길이었는데

눈을 감고도 훤히 보이는 길이었는데……

안개가 걷히자

거기에 시체가 있었습니다.

두 눈을 활짝 열어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있습니다.

 

 

-총리 가는 길/안지순-

 

봇짐 이고 걸어가는 할머니 뒤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철쭉이 따라가고

펄렁이는 옷깃에

청보리 물결치는 의총리

 

그만큼 떨어져서

조팝꽃 조르르 몰려들고

그만큼 떨어져서

진달래 꽃무덤 묻어가고

 

십리장등 빛 따라

바람 같은 걸음 따라

묻어놓은 서러움도

몸 풀고 쉬어 가는 길

 

그리움도 무더기 꽃무더기

양팔 벌려 모여드는 의총리

사람도 그만큼만 그리워해라

가만가만 꽃처럼 피고 지어라

 

 

-둥근 길/문귀숙-

 

허풍빌라에서 내린,
수백억 상속녀가 떨어뜨리고 간
셀 수 없는 동그라미의 말들
깔깔거리다 휘청거리며 사라졌다
꽃뱀의 뱃속 같은 골목을 후진으로
나오는 오늘 일진은 구부러진 끗발이다
금요일을 발광하는 네온사인을 비켜선
흐린 그림자 하나, 번쩍 손을 들었다
뒷자리에 앉자마자 웅얼거리는 목소리
백미러로 읽어야 하는 목적지가
번져 읽을 수 없다
붉은 신호등 하나를 넘으며 자정의 경계를 넘었다
어떤 넋두리도 용납되는 할증의 시간
갈림길마다 좌회전을 외치며 더 흐려진 그림자
젖은 넋두리에 수몰된 길을
재탐색하라고 내비*가 얼굴을 붉힌다
붉은 기운이 부족한 사납금만큼 미터를 올리고
대낮처럼 환한 불면의 광장을 지나
늙은 벚나무가 떨어뜨리는 흐린 시간을
지나 돌고 돌아도 이어지는 길
더 이상 택시로는 갈 수 없는 길
내비가 멈췄다

그림자의 손가락 끝에 만월이 걸렸다.


*내비게이션

 

 

-해파랑 길을 걷다/장옥근-


바다 쪽으로 몸을 기울인
바닷가 소나무들은
사철 귀가 시퍼렇다
살아보자
살아보자
기슭을 핥는 차가운 혓바닥에
파도는 늘 혓바늘이 돋고
이기대 해파랑 길을 걸으면서
내 몸도
바다 쪽으로 기울어진다


무슨 말을 하는지
농바위 앞에서
검은 가마우지 몇 마리
지는 해에 숨을 고르고
나도 잠시 숨을 고르고


물길처럼 쉽게 닫혀버린
그 사람과 나를 생각한다
생각이 다르다
받아들이는 것이 다르다
보는 것이 다르다
듣는 것이 다르다


다르다 다르다 다르다
파도는 쉬지않고
나를 핥고
내 귀도 시퍼래진다

 

 

-살갈퀴 만나러 가는 길/강인한-

 

이촌로 88길 30의 이른 아침에

똥아저씨네 애인이 졸업한 학교 골목

마광수가 살았던 빌라를 지나면 목련이

 

개나리 위에서 내려다보고 국제부동산 지나

평화부동산 연세부동산  소망약국 지나, 샤인부동산

산수유와 라일락을

 

지난다. 진입금지에 볼륨을 낮춘

저팬타운을 끼고 봄으로 가는 초록버스 3012와 

강변북로 옆구리를 뚫고 지나가는 굴다리 건너

이촌한강공원, 두 줄로 마중 나온

 

산책길의 미루나무  

초록초록 풀숲에는 살갈퀴, 아기 손톱만한 살갈퀴 

애잔한 분홍을 편다.

 

 

-내소사 전나무 숲길에/김 완- 

 

내소사 전나무 숲길에 사람들 붐빈다

작은 물웅덩이에서 잠자리의 우화가 시작된다

성장통을 앓는 동안 물풀이 여러 번 흔들린다

겨드랑이가 가렵고 날개가 돋아난다

아이야 채근하지 말고 시간을 주렴

살랑이는 바람이 젖은 슬픔을 말리고 있다

수면 위로 고개 내민 물풀은 기막힌 인연이다

 

백오십 년 된 전나무 숲 여기저기에는

태풍 볼라벤의 흔적들 아직 남아 있다

넘어지고 부러진 전나무에도 생명이 산다

태풍이 준 선물에 기생하는 벌레들과 버섯들

어떤 상처는 더러 축복이 되기도 한다

부드러운 바람도 한 번씩 폭풍처럼 몰아쳐 분다

천살 먹은 군나무 한그루 절 마당 지키고 있다

 

가야 할 길은 늘 궤도에서 조금씩 비켜서 있다

그대를 향한 첫 마음도 전나무 숲길에서

벗어나 비스듬히 반대편 그늘에 앉아 있다

가야만 하는 길, 마음을 헐어내는 작은 꺾임들

일주문 밖 할머니 당산나무의 꿈과

짝을 이룬 할아버지 당산나무의 그늘에 서니

천년 넘은 절의 역사, 그 빛과 어둠이 깜빡인다

 

 

-피마 길을 보내다/곽효환-

 

21세기가 열리고 십년이 더 지났어도

개발의 꿈은 그칠 줄 몰라

가장 넓은 길을 뒤로 하고 광장이 된 광화문 세종로

길은 막히고 소통은 뒤엉켜 있어도 이벤트는 계속되지

끝없이 꼬리를 무는 자동차 밀려드는 사람, 사람들

그런데 이젠 모든 것 다 비우겠대

광장의 미래는 아무도 몰라

 

몇해 전 시작된 종로구청 앞 청진동 재개발은 아직도 진행 중이야

세종로와 종로가 만나 교보문고 앞길에서 시작되는

피마의 길은 이제 없어

아랫자리들의 허기와 목마름을 달래던

비린 생선 굽는 냄새, 빈대떡 부치는 고소한 돼지비계 기름내, 마늘과 생강으로 시뻘겋게 볶은 얼한얼 낙지볶음, 패이고

찌그러든 낡은 식탁, 손때 묻고 이빨 빠진 술잔과 그릇들, 수많은 사람들이 빼곡히 남긴 낙서 가득한 벽

 6백년 곰삭은 도심의 그 작은 골목이 어느 날 사라졌어 

유난히 춥고 눈비 많은 굿은 날이 계속되던 겨울도

잠시 숨을 돌린 봄날 같은 2월의 며칠

꿋꿋이 피마 길 초입을 지키던 청일옥마저 문 닫고

생선구이 집 대림식당이 '피맛골의 곡'이란 방문을 내건 날 

플라스틱 가설펜스가 가로막은

작은 뒷길의 역사는 그렇게 끝났어

더러는 거대한 르메이에르 종로타운으로

더러는 다른 곳을 찾아 뿔뿔이 흩어지고

더러는 길과 함께 사라지겠지

열차집 함흥집 남도식당 고바우집 삼원집……

이름만 남고 체온이 사라진 흔적과 형해들이

박물관으로 들어가겠지

 

3월 하순에도 연이어 내리는 폭설과 대설주의보

몽골 고원에서부터 한반도를 넘어 열도까지 뒤덮은

눈섞인 비와 추위가 부르는 황사 속에

안타깝고 아쉽고 서글프다고?

그래도 우리는 다시 꿈을 꾸지

무너뜨리고 부서뜨린 위에 세운

눈부신 재개발의 대역사가 반복해서 부르는

너무도 낯익은 그 이름

"'옛 모습 복원'

 

 

<돌샘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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