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는 길 2/박창기-
생애라니 내게는 가당찮은 어휘다
본향으로 가는 그 길리 분명 하나인데
나는 어찌하여 낯선 길을 기웃거려 지각인지
아직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나’라는 종교를 맹신하여 잘못 든 길에서
수없이 넘어지기를 밥 먹듯이 했다
차마 부끄러워 말할 수 없음에도
나는 또 시를 빌려 고백하고 있다
시는 구원의 언어라고 내 입으로 떠들었는데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하고 나는 오늘도 아프다
본향으로 가는 길엔 천천히 들어서도 된다고
‘나’라는 종교에 포섭되어 상처투성이가 되었으니
교주인 ‘나’를 처벌해야 이 싸움은 끝날 것 같다
날이면 날마다 나를 지키던 임이 보시기에
내 꼬락서니가 얼마나 우스웠을까
‘그래, 니 맘대로 놀고 더 놀 게 없으면 그때 연락하거라.’
다시 돌아갈 일이 까마득하고 부끄러워 머뭇거린다
이런 것마저도 용서해 주실 임이 계셔 나는 행복하지만
똑바로 볼 수가 없다
빛이신 그분을
-꽃길/천금순-
황사로 뿌옇던 하늘이
오랜만에 맑습니다
산 능선 위로
몇 송이의 구름이
하얀 목련인 양
피었다 집니다
진달래도 피었습니다
분홍빛 능선을 따라
군인들이 행진을 합니다
바람에 활짝 핀
벚꽃이 춤을 춥니다
꽃대궐 속
예쁜 마을이 보입니다
꽃비가 온 어제
오늘 꽃동산 아래
길들이 점점 멀어집니다
-라플란드 가는 길/김 늘-
열대야의 밤이야
박제된 열기가 도마뱀의 발을 하고
부글부글 사방을 타고 오르는 시절이야
끝없이 고이는 땀의 얼룩을 헤엄쳐
라플란드의 지지 않는 낮을 보러 갈 생각이야
아니, 순록의 까만 눈동자에 담긴 긴긴 밤의 심연에 도착해 보려 해
영원히 손에 닿지 않을 꿈의 윤곽처럼
아른대며 번지는 오로라의 춤 아래
눈 폭풍을 지나 길게 침묵하는 숲 아래
이끼로 키운 순록의 고독한 뿔이 더 단단해지는
흑야의 겨울을 작은 등을 켜고 지켜볼 거야
눈썹이 하얗게 얼어붙는 냉혹한 추위를 견디며
차갑고 고요한 이야기를 써 볼 거야
하지만 지금은 열대야에 갇힌 밤이야
뻘처럼 단단하게 온몸을 붙든 열기에
끝없이 뒤척이는 밤이야
갤리포니아의 연어 떼가 더운 강물을
힘겹게 저어가는
혹독한 이상기후의 날들이야
-익산 가는 길/정우신-
약 먹고 물 먹고
거울을 보며 우린 더 살아야지 하지 웃고 울어
봐
날벌레는 아니었지만
돌고 돌아 겨우 여기까지 도착했겠지 아이가
무심코 엎지른 컵에 붙어 허둥거리겠지
나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삶은 절차 없는 긴 장례식이었지 우리가 걷는
다는 것은 먹어야 한다는 것 계속 자야 한다는
것
동정과 비난과 환희 속에서 숲과 하천과 산책
길 그리고 울음 속에서
죽음이 나를 이미 다 파먹어서 줄 수가 없네
약 먹고 물 먹고
아직 첼로는 켜지 말고 자화상을 그려봐 자유
로워지는 순간, 열리는 시간 속에서
물은 자신의 맛을 알고 싶어 할까
물의 속성
불을 마시려는
나의 사랑에게
아무 할 말이 없어서 끄적여보는 밤
교육시켜주세요 더욱 커다란 용기와 확신을
주세요 기도하는 밤
한 계절 창가에서
잘 지내다 보면
잃어버린 귀 한쪽을 찾아 떠도는 바람이 온다
우린 더 살아야 하지 병원비와 공과금이 밀리
는 방식으로 인생을 늘려야 하지 아이의 미래
가 나의 과거가 되지 않도록 울고 웃어봐
다 끝마치고 싶은데 어떤 노래를 틀어야 할까
눈송이를 간직하고 싶어서 나무를 들였지
길을 걷다가 먹고 자다가 언뜻 들리는 다정한
목소리와 움푹 팬 상처가 난 자리로 내려앉는
눈보라
양쪽을 번갈아 밟고 가야지
-새의 길/위선환-
새가 어떻게 날아오르는지 어떻게
눈 덮인 들녘을 건너가는지 놀빛 속으로
뚫고 들어가는지
짐작했겠지만
공중에서 거침이 없는 새는 오직 날 뿐 따로
길을 내지 않는다
엉뚱하게도
인적 끊긴 들길을 오래 걸은
눈자위가 마른 사람이 손가락을 세워서
저만치
빈 공중의 너머에 걸려 있는
날갯깃도 몇 개 떨어져 있는 새의 길을
가리켜 보이지만
-여덟 개의 모퉁이가 있는 길/김경윤-
오늘도 해를 등에 지고
여덟 개의 모퉁이를 돌아 만물 슈퍼에 술 사러 간다
퉁명스러워도 정 깊은 슈퍼아저씨 얼굴에 노을이 물들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오가는 길이지만 길모퉁이 돌 때마다
마음이 먼저 울퉁불퉁 요동치는 그 길
어느 봄날엔 겅중겅중 길 위로 뛰어드는 고라니를 만나기도 하고
또 어떤 날에는 로드킬 당한 길고양이를 보내기도 했지만
구불거리는 모퉁이마다 팡팡 팝콘처럼 벚꽃이 터지는 날엔
가던 길 멈추고 한참을 꽃비에 젖어 마음이 다 환해지는 그 길
여름에서 가을까지 모퉁이마다 붉은 배롱꽃 피고 지면
백일몽 같은 몽롱한 해무(海霧) 속에서 지척의 백일도가 가물거리고
눈이라도 내리는 날이면 엉금엉금 게걸음으로 고갯길을 넘지만
밤길 오다 보면 어느 모퉁이엔 가로등 가족처럼 반기는 그 길
돌아보면 내 살아온 생애도 수많은 모퉁이를 돌고 돌아
이제 한 모퉁이를 돌고 있다는 생각이 드니
부처는 여덟 개의 바른 길을 가라고 했지만
나는 모퉁이 많은 이 길이 사람의 길만 같아
매번 같은 날이지만 날마다 내일이 궁금해지듯
모퉁이를 돌 때마다 마음이 그저 통통거린다
나는 오늘도 여덟 개의 모퉁이를 돌아
만물 슈퍼에 술 사러 간다
-뫼비우스의 길/이승주-
아침인 것 같기도 저녁인 것 같기도
이미 학교 늦은 것 같기도
아득한 것 같기도 어제인 것 같기도
새로 한 살, 한순간인 것 같기도 영영 오지 않을 것 같기도
바닥인 것 같기도 천장인 것 같기도 우물인 것 같기도 하늘인 것 같기도 앞인 것
같기도 뒤인 것 같기도 안인 것 같기도 밖인 것같기도 스친 것 같기도 철석(鐵石)인
것 같기도 가득인 것 같기도 빈손인 것 같기도
인형극인 것 같기도 그림자극인 것 같기도 이 한 편(篇)인 것 같기도 누가 다녀간
것 같기도
내가 사는 것 같기도 남이 사는 것 같기도
내가, 사는 것 같기도
영 말도 아닌 것 같기도 되는 말 같기도
잠시 혜성으로 지구에 왔다가
다시 점점 멀어지는
-길 밖의 길/백무산-
뻔한 길을 잘못 든 남산에서
발 닿는 곳마다 벼랑이다
이 작은 산에서 길 찾는 일은 쉬운 일이다
그래, 저 아래 세상 길도
알고 보면 모두 폐쇄회로다
나는 길을 가려던 것이 아니라
산으로 왔던 것이다
길이 끊긴 곳에서 산이 아닌가
그러나 산은 또 무엇하랴
나는 산에서도 내려서라고 하였다
가파른 벼랑 끝에 다다라
나는 멈추었다
길과 산은 다하였고
나는 탑이 되었다
한 발 더 내딛지 못하고
탑은 다시 길이 되어
산을 내려간다
걸어가는 이 몸이 길이 되었다
-길-어떤 집/윤이산-
집은 산비탈에 겨우 얹혀 있었다
오래 비워둔 집인데 괜찮겠냐며
주인은 내부를 보여주었다
입성이 허름했다
나는 그믐이 되면 떠나겠다고 했다
저만치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집
낯선 사람과의 첫 대면처럼 서름서름했지만
더듬더듬 컴컴한 안으로 들어서니
오래 묵은 나무 냄새가 좋았다
짐을 내려놓고 목장갑을 끼고
아궁이에 군불부터 지폈다
먼지를 털고 걸레질을 하고
밥을 안치고 주전자에 둥글레를 끓이는 동안
달빛이 툇마루 안쪽까지 밀물져 들어오고 있었다
내가 집에 편입되는 것도 같았다
맞은편에 수저 한 벌을 더 놓고
허출한 듯 저녁을 먹고
앉은자리 객수(客愁)를 베고 누웠다
달빛이 몸 안으로 들이차는 소리를 들으며
돌아갈 길을 생각했다
이 집에서 한 일이라곤
쓸고 닦고 밥과 차를 끓이고
이따금 언덕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는 일
마치 그 일을 하러 온 사람처럼
그러는 동안 집은 조금씩 온화해지고
달빛은 점점 짧아져 갔다
한사리가 드높아지는 때
목장갑을 빨아 널어두고
옷 한 벌 벗듯 집을 빠져나오는데
정든 어떤 사람을 두고 떠나는 것 같았다
아니, 내가 나에게 손 흔들고 서있는 것 같았다
생시처럼 환했다
나는 돌아가는 중이었다
달이 빛을 다 비우는 동안 집 한 채를 쓸고 닦다
바다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사는 동안 세 든 집 한 채를 쓸고 닦다 돌아가는 것이
한평생의 일이라 들은 것도 같은데
꿈이 끝나는 길에
삐끗, 문을 열어 둔 집 한 채가
저기, 저어기,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입성이 허름한 내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꿈처럼 아득했다
얼핏, 시계를 보니
바늘이 미생전(未生前)에 멈춰 있었다
-장미 찾아오시는 길/이은심-
재건축반대 현수막이 장마에 지워지는 쪽문 근처입니다
잔가지를 치려다 서로의 목을 칠까 가시를 안아주는 곳입니다
붉음의 머리맡을 넘어가면 누가 죽는다는데 방금이 작아지면서 철조망을
넘어갔습니다 그런다 해도 장미는 또 장미
잘 놀던 꽃망울이 무더기무더기 감염되면 아무도 심지 않은 눈꺼풀이 초
대될 차례입니다
꺾어야 꽃인 걸
붉다고 다 마음이 아닌 걸
무얼까 넝쿨 다음 불어닥치는 이것은
첫 화장을 시작하는 눈시울은 피고 지고 뜨거웠고 일정대로 후줄근했고
자그마한 채소와 하얀 뿌리와 일요일 같은 꽃그늘을 버스 두 대가 나란히
달리는 이쪽과 저쪽
세상을 건드린 건 가시가 먼저였습니다
담장과 담장의 간격이 속은 것처럼 붉다고 말했던가요
욱신거리고 후끈거리느냐고 물었던가요
천박이 없어서 나는 겨우 붉다 하겠습니다
자세만으로 만발하고 숨어있을 때 반반하다 하겠습니다
절반은 하늘에 절반은 땅에
위독만이 온전한 꽃망울이겠습니다
-길에 대한 편견/박남희-
길을 외롭다고 함부로 말하지 말라
길 위에는 하늘이 있고
바람이 있고
낙엽이 있다
더구나 그의 몸속에는
그를 사랑했던 것들이 다녀간
둥글고 아늑한 어둠이 있다
육체를 지나 마음으로 향해 있던 그 길은
살랑이던 낙엽의 언어와
출렁이던 바람의 춤과
하늘의 깊은 눈매까지를 잘 기억하고 있다
길이 외롭게 느껴지는 건
언젠가 그 길을 사랑하고 싶기 때문이다
-복지과 가는 길/이명윤-
복도를 걷는데 등 뒤에서
달그락달그락 운다
구두 뒷굽의 구멍이 돌을 삼킨 것
노인이 걸음을 뗄 때마다 어느 날
구두를 찾아온 슬픔이 말을 거는 것이다
이 건물엔 복지과가 없다는 말은
도무지 들은 체 않고 달그락달그락,
풀 한 포기 없는 복도를 따라오며
연신 중얼중얼거린다
먼나라 어느 부족의 주문 같은
중얼중얼, 바람이 볼 때마다
어디선가 노인의 가슴이 삼킨 돌들이
정신없이 말을 거는 것이다
달그락달그락 쯤이야 거꾸로 뒤집어
탁탁 치고 그래도 안되면
쿠폰 한 장으로 조용할 수 있겠지만
중얼중얼은 어떻게 하지
달그락달그락, 중얼중얼,
말을 탄 노인이
쉬지 않고 황야를 달린다
분명 이 세계 어디엔가
태양처럼 떠 있을,
복지과를 찾아서
-우리가 지나온 길/김유림-
우리가 지나온 길에 대해 묘사하려면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나는
말할 수 있다. 물소리가 들렸다고. 그것은 내게만 들렸다고. 물소리는 아니야 아니야
말할 것이다. 말을 할 수 있다면. 흰 저수조를 내가 이미 안다면. 놀라울 일이 아니다.
그러나
햇빛은 그대로였고
나무도 그대로였다
우리가 지나온 길은
대리석 난간과 면하고 있었고 대리석 난간은 나무들을 가두고 있었다.
나무들은 나무들이 만드는 빈 공간을 에워싸고 있다. 그래서 연인이라면 그곳에서 키
스를 한다.
내 말에 귀 기울이던 동행자는 놀란다. 그가 생각하기에 나는 이제 마술사다. 그러나
내가 말한 공터는 여기에 있고 공터를 에워싼 나무들도 여기에 있으며 나무들을 비집
고 선 거대한 흰 저수조가 여기 있는데. 고개를 들어야 할 차례지만 사람은 결과를 두
려워한다. 그렇다면 나는 이 장막을 내려 사람의 입을 부드럽게 막을 것이다.
-무명(無明) 길/이태수-
산 넘으면 산이,
강을 건너면 강이 기다린다
안개 마을 지나면 또 안개 마을이,
악몽 벗어나면 또 다른 악몽이
내 앞을 가로막는다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리듯이
잠자도 깨어나도 산 첩첩 물 중중,
아무리 가도 제자리걸음이다
눈을 들면 먼 허공,
그래도 산을 넘고 강을 건넌다
안개 헤치며 마을을 지나 마을로
악몽을 떨치면서 걸어간다
무명 길을 간다
-공중의 길/이두철-
늦가을 무렵
둥지를 떠난 어린 박새들이 떼로 죽었다
며칠 사이 하루에도
수십 마리, 수백 마리
낙엽처럼 도로에 떨어진 박새들
어디에 살다가 왜 이곳에 와서 죽었을까
집단자살, 타살, 누구의 소행일까
범인 잡는 올빼미들의 눈엔 섬광이 번뜩인다
길고양이를 잡으려 독극물을 놓았다는 김씨
비둘기를 없애려 좁쌀에 쥐약을 섞어 뿌렸다는 강씨
소문은 꼬리를 달고 퍼져나갔다
물길, 바람길
큰 새와 작은 새가 다니는 하늘길도 있다
눈 없는 바람은 잘도 피해 가는데
눈 밝은 박새들은 왜 내비게이션을 읽지 못했을까
박새가 죽은 인도에는
통유리 빌딩이 길을 막고 서 있었다
저 허공은 새들의 것인데
-늑대의 길/강익수-
늑대 한 마리 하늘을 우러러 목소리 높이자 나머지 늑대들 일제히 목소리 높였다 주
먹을 내지르며 거리를 점령하였다 사냥감은 보이지 않았다 좌우가 모호한 참수리들과
씨름하다 허기에 지쳐 집으로 돌아왔다
여우를 닮아가던 마누라는 토끼의 하얀 두개골을 긁으며 저녁 식사 준비를 했다 귓속
으로 굴러다니는 선구자의 말을 가족에게 들려주었다 개구리처럼 눈만 껌벅였다
곳간이 바닥을 드러낼수록 함성은 거리를 흔들어 하늘을 향한 우레 같았다 새벽이면
삐걱대는 잠자리에 뒹굴던 초원의 붉은 냄새가 빠르게 숲속으로 사라졌다
자꾸만 길어져 가는 시소의 끝자락에 앉아 엉덩이에 힘을 주지만 발은 허공을 딛고 있
다 몇 번의 계절이 지났던가 불안이 불만으로 바뀔 즈음 거미가 오르내리던 곳간에 고
기가 쌓이기 시작하고 맛있는 소고기까지 식탁 위에 올라왔다 몇 마리 비둘기 고기 더
하면 우화등선이 부럽지 않겠다
아직 단단한 다리의 근력이 바닥을 구르기도 하였으나 만찬을 즐기는 미각과 후각의
제동에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어디든 살만한 태평성대에 늑대라고 취미가 없겠는
가 일상의 일탈을 즐기면서 시간과 취미는 정비례로 토끼와 초원은 반비례로 나아갔다
가득 찬 곳간을 두고도 꼬리를 흔들며 컹컹거리는 거대한 늑대, 바위엔 음각의 늑대 발
자국 선명하다
-라인 3 출근 길/조우숙-
같은 칸 지하철을 타면 낯 익은 얼굴 두어 사람
눈도장 몇 번 쌓이고 목례도 건넨다
나보다 몇 역을 늦게 타는 그녀를 만나면
통증에 자꾸 손이 가는 그녀의 아픈 허리
걱정 되어 먼저 내리는 나는 자리도 넘겨주고
도시락 가방도 받아주니
때로는 뒷모습만 보고도
내 등에 다정히 노크하며 아는 체한다
화정부터 구파발까지 더러는 지상 구간
호위병 나무와 하늘 봄날 흐드러진 벚꽃
차창을 긋는 비까지 그림이 되는
북한산 원효 의상봉 맑은 자태는
고요한 먼 눈길로 우리에게 악수를 청한다
오늘도 산처럼 의연하길 응원해 주는
녹번역으로 내려오고 올라가는 사람들
고사리손 잡은 은평초 보내는 보호자들
할아버지 때로는 엄마 아빠 누나들 저절로 알게 되고
패션이 늘 화려하며 단정한 아가씨
눈 화장 도드라지게 하는 중년 직장 여성
은평로 21길에서는 원치 않아도 집까지 알게 되는
개인정보 열리는 출근길
말 건네지 않아도 각자 분주한 발걸음은
엔진 같은 힘이 솟는 아침이다
-헌화 옹에게 길을 묻다/최종무-
바람 켜켜 풍화하는
수로부인 헌화 공원
십이지신상 사이를 빙빙 돌며
육십갑자 용띠 짚는 노인이여
수로 얼굴 한번 보지 말았어야
출렁출렁 먼 바다 이야기인 걸
고삐 놓지 말았어야
가슴속에 날마다 융기하는 절벽
꽃이었네
꽃이었지
그렁그렁 깊어지는 물빛
끈적한 포말 벌룸거리며 따라가
바다가 되어 지금껏
바다를 잉태하는 파란 암소
고삐 당기다 끌려간 해송 모래밭에서
광란의 울부짖음에 한끝마저 놓아 버리고
지나온 기억도 흔적도 없이
십이지신 빙빙 돌며
육십갑자 용띠 짚는 노인이여
파도 한 자락 당겨 앉은 수로부인 좌상
엉덩이에 이마도 안 닫는 사람아
고삐 놓듯 두타산
단풍머리 한바탕 흔드는
바람길 따라가시게
-발자국은 길을 묻지 않는다-우항리에서/정경이-
그곳에 가면 싱싱한 그리움의 지느러미를 달고 있는 발자국을 신어 볼 수 있다 따뜻한 햇살이 발등을 콕콕 쪼는 해변을 따라 달려가다 보면 손톱만한 꽃들이 까르르르 하얀 웃음 흩뿌리고 갈대들이 뒷걸음질치며 다정하게 손 흔드는 호숫가, 생기 넘치는 풍경들은 여러 장의 궁금증을 복사한다 궁금증을 살짝 들추면 잔물결이 발을 간지럽히는데도 웃음을 참고 발자국 걸어나온다 그런데 누가 저렇게 헐렁한 신발을 신고 다녔을까
바위에 박힌 발자국은 서로 부서지지 않기 위해 촘촘히 껴안고 있다 1억년이 넘도록 흐트러 지지 않은 발자국의 깊이만큼 두꺼운 사랑, 껴안고 돌이 된 채로 백열등 만한 심장을 찾아 환하게 불 밝히고 있을 심장을 찾아 헤맸는지도 모른다 때론 누울 곳 없는 정신 툭하면 집을 나갔을 것이고. 발자국은 그렇게 호수가 되고 바다가 되고 바위가 되고 다시 길이 되어 1억년 밖으로 나섰는데 생각해보면 나는 참 어수선한 길을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화석처럼 박힌 관습의 발자국들을 정신없이 좇아 다녔을 뿐
슬그머니 신발을 벗고 발자국 신어 본다 지금껏 내 발등을 밟고 있던 발자국 하나 얼른 벗어 놓고 도망치듯 빠져나오는데 깨금발로 따라오는 커다란 발자국 나도 깨금발로 걷고 있다 우항리를 벗어 날 때쯤 나의 걸음은 경쾌하고 길도 신발을 신고 내 팔짱을 낀다
*우항리:전남 해남군 황산면 우항리 공룡발자국화석지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김준현-
일본식 가옥을 보존해 만든 까페였다
죽은 사람의 일본어는 갈 데가 없어서 방황하는 개가 되었다
2층에 앉아서 보았다
그 개가 돌아다니는 모양을 보며 빨대의 내부에 대해 빨대의 허기에 대해
호흡이 많이 필요한 외국어에 대해 적었다 ‘창밖에는 밤비가 속살거려’로
시작하는 메모였다
윤동주의 귀를 천 원에 산 적이 있지
작은 종이에 사인펜으로 그려져 있었다 네 번 접었다
이 어지러운 굴곡을 수평선처럼 펴는 데 걸리는 시간은 몇 년이었을까?
문학을 많이 해서 수학이 낯설다
2층에서 1층으로 내려오면서 한 층을 빼기 위해 걷는 일이 전부라는 것
삐거덕거리는 나무 계단을 디디며 몸을 굽히며
창밖에는 밤비가 속살거려
창밖에는 밤비가 속살거려
타고난 라벤더 향기가 한평생인 비누처럼 오른손에만 익숙한 필기처럼 윤동주
이곳을 떠나야 했다 서둘러
바닥에 떨어뜨린 두루마리 휴지가 경사를 만날 때 귀신이 육체를 가지고 놀듯이
심心만 남을 때까지 아래로 아래로 계속되는
대代를 잇는 일
이곳에서 나는 햇빛이 가득한 창문과 아이스크림이 올라간 와플 사진을 남겼고
[횡단 내내 러시아인들은 해바라기 씨를 까먹는다, 해와 무관하게]라는 문장과 정신이 이어져 있었고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오징어 말리는 냄새를 느꼈다
어둠이 오면 수평선이 사라지고
오징어잡이 배들의 빛이 별빛의 어머니처럼 번뜩인다
죽은 후에도 계속되는 노동을 멈추고 싶었다
<돌샘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