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브르 가는 길/장선희-
유리 피라미드는 미래로 가는 건축물
기하학무늬는 고대 도시에서 문명화를 이끈 최대의 무기였지
별자리와 망망대해의 모래 도시
그곳으로 간다고 할 때 과거로 가느냐 미래로 가느냐 궁금해 했다
천칭자리와 사자자리의 꼬리뼈를 길 삼아
낙타도 없이 방울 소리로 걸어갔지
스스로도 모르는 엄청난 힘이 두 다리에서
가슴까지 차오르면 모래 위에서도 수영을 할 수 있을 것 같았지
나의 가쁜 숨소리가 한 줄 얹어지는 순간
비파소리가 바람의 언덕을 넘어왔지
분수처럼 과거의 말이 몸으로 솟구치고
미라를 만들던 햇빛이 쏟아지면
지친 얼굴엔 마른 빵조각 같은 고달픔이 되살아났지
목소리에 감도는
바람 소리 같기도 짐승 소리 같기도 한
그러면서도 떨쳐내고 싶지 않은 소리
유리 피라미드로 가기까지 고대의 숨소리가 나를 잡아챘지
뱀의 껍질,
아름다운 무늬가 내 앞에 깔려있었지
돌아서야하나 망설일 때
모래바람이 불어댔지
하늘을 날고 있었지
정지화면으로 모든 순간을 돌려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 땐
오른 손가락으로 맛있는 음식을 올려주듯
머릿속 어지러운 기억을 별자리로 지우는 거야
비파 소리가 찾아가는 무릉도원처럼
가끔 구전 속에서 진실을 캐내는 사람이 되어보는 거지
피라미드는 유리와 금속으로 되어 있었어
그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긴 줄을 서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아
햇살 긴 줄이 낙타의 행렬처럼 지친 오후
분수가 발을 적시라 하여 발을 적시고
유리 피라미드가 사자의 눈으로
스스로를 확인해 보는 그때
루브르의 오래된 건물엔 시간의 이끼가 끼어있었지
아무도 그걸 발견하지 못한 채
과거와 미래가 한 곳에 있는 지하로 지하로
길게 내려가고 있었어
그때 방울 소리가 세모로 꺾이는 걸 보았지
-천왕사 가는 길/이우디-
아기 말 눈 속에서 수평선을 본 기분이 들어
풍경으로 지나가는 차창 밖
한 줌의 빛
너라는 아름다운 단어가 지나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끔벅끔벅
흔들리는 고요 속
아기 말의 기분을 본 것 같아
바다를 읽는 내 눈 안쪽에서 새들과 하나 된 넌 파랑
갯바람 뭍바람 사이 춤추는 편백 숲처럼
그저 그리운 노래처럼
뜻밖의 다음을 기도하려 해
시작과 끝은 너라서
-문헌서원 가는 길/조순희-
푸른 바람 회화나무 잎을 분다
태양이 그림자를 받아 적고 있고
기와집 몇 채
그림처럼 앉아있다
낮달의 시선 따라
오래된 인연을 만나러 가는 오후
홍살문을 들어서자
솔향 한 움큼 훅- 스쳐 온다
사위어 가는 나라의 명운 앞에서
지절의 삶을 살다 간 목은,
영당 앞 매화나무로 서 있다
담자색 햇살이 서원의 어깨 감싸고 있는 담장 아래
시간을 껴입은 배롱나무가
내 다가가는 발소리에 귀 쫑긋하다
장판각 문살 스치며 불어오는
푸른 바람 몇 점, 더운 이마 식혀주는데
초록을 밀며 돌아 나오는 길목 어디쯤에서
피안의 언덕 같은 당신 만났으면 좋겠다
-길을 비추다/강정이-
등대는 맹인의 지팡이다
웅덩이에 빠질세라 돌부리에 걸릴세라
두손 마주잡은 불빛은 따스하다
마음을 뒤흔들어 놓은 길목에서
가로등처럼 구석구석 길을 비춘다
물결과 물결의 틈새를 읽어주는 저 먼 불빛이
여긴 늪이고 여긴 불바다라고 외친다
길을 세운 나루공원 팽나무가
삼백년 지나온 사연들을 비춘다
산등성이에 누운 주지스님이
외딴 바다에 뿌리박은 독도의 마음이
또 하나의 불빛이다
발 맞추어 걷는 길동무
나는 너의 길잡이 너는 나의 별자리라고
환한 빛으로 검은 바다 위에 새기고 있다
-인간의 길/황규관-
고래의 길과
갯지렁이의 길과
너구리의 길과
딱정벌레의 길과
제비꽃의 길과
굴참나무의 길과
북방개개비의 길이 있고
드디어 인간의 길이 생겼다
그리고 인간의 길옆에
피투성이가 된 고양이가 버려져 있다
북방개개비의 길과
굴참나무의 길과
제비꽃의 길과
딱정벌레의 길과
너구리의 길과
갯지렁이의 길과
고래의 길이 사라지고
드디어 인간의 길만 남았다
그리고 인간의 길옆에
길 잃은 인간이 버려져 있다
-모듬내 길* 1/이성자-
가만히 좋아해야 하는 길
모듬내 길
어느 날 갑자기
자작나무 숲으로 날아온
가슴 붉은 딱새처럼
풀빛 맑은 물로 출렁이는 보를 타고
너는 나에게로 왔다
산 높지 않아도 평안하고
물 깊지 않아도 시원하여 안온한 오솔길
달맞이꽃은 달빛에 젖어야 핀다던가
밤에는 슬픔이었던 것들이
낮이 되자 뭉근한 기쁨이 되어
물 위에 떠가던 종이배처럼 뒤집힌다
길이 끊긴 절벽에서
세상이 주는 고통을 보았다면
소멸을 생각하는 소로 가야지
보를 타고 넘는 여울물 소리도
콸콸콸 힘차게 흐르는
내 마음 보듬는 회천강 모듬내 길
* 모듬내 길은 고령의 회천강변 길 이름.
-가왕도 가는 길/최삼용-
간혹 삶이 부담스러워
한 번쯤 길을 잃고 싶은 날 있다면
별발이 바다로 마구 쏟아지는 가왕도로 가자
드러누운 묘혈 자리에서 별 헤는 망자의 삭은 가슴 닮아
언제나 침묵한 채 바다를 지키는 작은 섬
은둔이나 칩거를 핑계 삼지 않더라도
인적 떠나 시간까지 멈춘 그 섬에 들면
온통 코발트 빛 눈부심만 낭자하게 춤을 추리
끝이 또 다른 시작이라면
오늘의 곤궁 또한 풍요의 척도가 되겠지만
겨울이 창창한 햇살 발라 추위를 말리는 갯가에
빨간 입술을 벌린 채 동백꽃이 바다와 살고
최신형 네비게이션을 켜도 뭍에서 끝난 지도에서는
그곳으로 가는 길을 찾을수 없어
말품 발품 다 팔아야 하네
그래서 적당히 두고 온 걱정 삭혀 두고
오늘은 나 여기서 이만 길을 잃으려 하네
-꽃길/이중동-
할머니와 증손녀가 볕 좋은 창가에 앉아 있다
창밖은 정월 바람이 매서운데
손녀 얼굴에 울긋불긋 꽃이 피어난다
눈썹 위 이마는 채송화밭이고
볼살에 드문드문 백목련 꽃망울 달았다
할머니 오물오물 바람처럼 중얼거린다
꽃가마 타고 시집오던 열일곱 살 봄날,
다섯 남매 숨소리로 모란 같은 꽃잎 피우며
살던 시절 읊조리는 것이다
초가삼간 숭숭한 사립문으로 숱한 사연들
뼈마디 마디 가시 박히던 날들
창밖은 정월 바람이 매서운데
할머니 얼굴에 거뭇거뭇 꽃이 피어난다
눈썹 위 이마는 검붉은 작약밭이고
볼살에 드문드문 자목련 꽃망울 달았다
머지않아 볕 좋은 날
할머니는 흰 버선을 신고
아장아장 꽃길 걸어갈 것이다
-길없음/신두호-
투명한 것들은 바깥에 산다
끝에서 이어지는
장소를
다른 지점으로 물고 가는 새가 우리를 우리 없는 변방으로 안내한다
한계 없는 세계에 지어진 한계의 무리
춤은
태양을 가리키는 한 번의 춤은
무한한 날개의 벗들을 온몸의 빛으로 불러 모으고
속삭임을 반복한다
영원처럼
죽음으로 보상 받는 것은 자연의 유일한 권리이지만
자연은
너머의 생태를 함부로 보여주기에는 언제나 너무 젊거나
늙었다
믿음 없는 잔해가
잔해 없는 믿음이
떨어져
바닥을 이루는 때에도
죽음을 수거하지 않는 것은 자연만의 고유한 방식
도시라는 이름의 자연에 관하여
우리는
우거진 수풀에 관여하지 않는 시민들의
의식으로서
어둠으로
통행할 길 없는 너머의 길들을 넘나드는 새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한다
없음으로 존재하는 길에
없음을 의식하는 정신 하나를 열어놓는다
투명한 것들이 바깥에 자신의 투명함을 흘리고 다니는 동안
다다른 막다른 곳에서
정신은 자신이 의식하는 것 속에 없음의 내용 하나를 들여다 놓는다
길에는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것들도 있다
그것을 우리는 자연적 대상들 간의 일치라고 부른다
없음으로 나아가는 충만함이 거리에 버려져 있는 것을 본다
과정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대면하는 것들을 살리거나 죽일 것이다
아니라면 과정은
생과 사를 건너뛴 자연의 면면에 다름 아닐 것이다
없음이 없음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배회하는 정신 하나가
의식하는 바를
스스로 섭렵한다는 뜻이고
그로 인해 장작과 같은 마른 나무들에 불이 붙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직 더 살아야 하는 나무들만이 가지치기를 당한다
앙상함이란 없음 너머의 풍경 전부일 것이다
-바람의 길에서/이현경-
붉은 잠자리 하나
구름 밑에 물가를 선회하네
바람을 읽고 풀잎을 읽고
수초에 내려앉아 수초에 입술을 찍고 있네
수변의 풍경에 제 전율을 문지르고 싶었을까
위아래로 몸서리치는 꽁지의 떨림이
가을을 건드리네
눈망울에 잡힌 두 날개를 따라가면
끊어진 안부에 도착할까
설렘을 놓쳐버린 바람의 길에서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떠나간 사람처럼
풀잎 끝에서 무심하게 날아가네
지우지 못한 이별을 휘감고
훨훨 가네
-라싸로 가는 길/이중동-
자벌레 한 마리 허공에서 뚝 떨어지네
낭창한 걸음으로 어깨선을 따라 내 몸을 더듬고 있네
꽁무니를 치켜들자 몸이 활처럼 휘어지네
조준 없는 화살을 숲속으로 쏘아대네
과육을 도려내던 날카로운 손이 화살을 피해 가네
상처 입은 성체는 아프고 칼을 잡은 손은 화려하네
비명이 죽비처럼 소리치네
주둥이를 치켜들자 몸은 천 길 사슬로 뻗어나네
눈금 없는 사슬이 내 그림자를 친친 휘감네
심장을 쿡쿡 찔러대던 세 치 혀가 사슬을 끊고 있네
혀는 장검처럼 길고 선혈은 잉크처럼 검푸르네
욕망의 비계 층을 핥으며 주둥이가 지나가네
한 겹씩 구워대던 열판이 범종처럼 식어가네
눈알의 깊이를 가늠하며 꽁무니가 뒤따르네
쇠못을 박으며 눈알들이 무간지옥으로 떨어지네
계(戒)를 받듯 두 손을 합장하네
오목한 자궁 속으로 묵은 청춘이 들어가 눕네
라싸로 가는 길은 멀고 광배는 산안개 속에 흐릿하네
-위례둘레길 강가를 거닐다/한문석-
두 어깨를 나란히 마주하며
손 모아 기도하는 여인
사랑하리라 바라보고만 있어도
눈과 생각이 맑아진다
소나무 연리목이 한껏 푸르다
도미나루의 옛 거문고
애달픈 가락이 파도로 출렁인다
바위 틈새 솟아난 물푸레나무
강바람이 새 날개를 달고
가지마다 빚어내는 얼굴들
두물머리 내리는 물소리 따라
옷깃을 하나로 여민다
오로지 안으로만 차오르는 가슴
끝없는 눈물을 길러낸다
보라 나 하늘이리라
천년 긴 세월 홀로 살아가리라
착하고 아름다운 마음씨
둘레길 꽃잎보다 향긋하다
문득 커피 한잔 나누고 싶다
-석남사* 가는 길/강익수-
달빛이 참 곱습니다
가로등과 길은 하나가 되어 다정합니다
그날 우리는 각자 집으로 갔을 터이지만
그대 떠난 일이 화두가 될 줄은 차마 몰랐습니다
가득 채우면 밀려날까 수학책을 꺼내었지요
사는 것도 수학 같았으면 했습니다
세면대 앞에서 사무실 상사 앞에서 배를 올리듯
산사에서도 수행의 나날입니다
소시민의 생활이 생산적이라면
산사의 벽은 얼마나 소모적인가요
웃어도 웃는 것이 아니거늘
산을 보아도 산이 아닌 참화두의 경지인가요
풍경도 소리도 두고 오는 길
잎사귀 황홀히 벗어던지는 느티나무를 처음인 듯 보았지요
난 기껏 마른 비늘 몇 조각 떨어뜨릴 뿐
잊어달라는 말 모로 누워도 흘러내리지 않아요
기억의 형벌은 시간보다 가혹한 것인지도 모르지요
달빛이 멀리 있습니다
*울산 가지산에 있는 사찰로 비구니 스님만 있다
-길을 걷다/김종해-
아침 산책길에
혼자서 지팡이를 짚고 힘겹게 걸어가는
꼬부랑 노인을 보았다
그 사람 걸어가는 뒷모습 보는 동안
어느새 그 사람은 내 안에 들어와 있다
아직 걸어가야 할 길이
나에게 얼마 남아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내겐 병들지 않은 몸과
지팡이 없이 걸어 갈 수 있는
두 다리가 있음을
고맙다, 고맙다고
하늘에 기도하듯 입속말 하며
나는 천천히 걷는다
어제까지 세상속의 허상(虛像)을 좇아온
나의 보법(步法)은 너무 단순하다
걷는 길 어디에서나 허방이 따라 오고
사는 곳 어디에서나 참회가 필요했다
아침 산책길 위에
-자산(玆山)-검정의 길/안차애-
홍어가 홍어의 길을 알고
가오리가 가오리의 길을 알듯
바다가 검정의 색을 알고
검정이 바다의 농도가 되는 것일까
흑백 앵글 가득히 검정이 밀려올 때
바다의 발걸음은 우선과 멈춤 사이에 있다
순간의 산맥처럼 굳어지거나
찢어진 돌의 자세로 숨을 죽인다
검정은 출렁거려도 액체가 아니라서
자산에 묻는다
약용과 약전의 차이처럼
검정을 밭으로 삼는 자의 어족(魚族)들이 쏟아지고,
비린내가 검정의 표면을 찢듯
물컹한 방향에서 지느러미가 돋아나듯
가오리는 가오리의 길을 연다
청어는 청어의 노래를 부른다
섬의 뼈가 물결문양으로 촘촘해지고
지극과 지독 사이에서
길을 묻지 않는 자의 길이 탄생한다
처음 보는 검정이다
-길의 묵시록/강성은-
길은 길이를 늘이며 서행 중이다
일찌감치 그는 건기의 끝에서 출발했고
나는 곧 우기의 처음에 당도할 것이다
길은 바닥보다 공중에 더 가까워서
그러므로, 낮과 밤은 일방통행
율리우스력과 그레고리력의 간격에 화절기가 개입되었다
안개와 기압과 황사와 풍향의 파동을 짚는
신호등 아래로,
초록 빨강의 악대행렬이 지나가고
우리 사이의 반나절만 붙잡혀 있다
봄의 홀에 구름무늬를 덧장식한 유리구슬을 넣고
허공에 이마를 기대고 있는 전봇대
가로수들은 가던 길을 잃지 않으려고
수많은 위족을 내어 땅 밑을 더듬는데,
여전히
길을 기르는 건 발소리들이고
바퀴들은 사방에서 모여들어 경사면을 밀어올린다
가파르게
그리운 날들에
끼익끼익_, 울음이 끼어들어
몸이 마음의 둔치로부터 견인되는 지점이다
-길은 언제나 허공으로 뻗어 있다/이현서-
나무는 새의 울음으로 자란다
수피에 새겨진 새들의 울음으로 나이테가 자라고
몸속 깊이 감았던 환한 숨 풀어내면
붉은 공명음으로 잎맥이 천천히 아가미를 닫는 둥근 시간
소리의 길을 따라가면 새의 연한 부리가 있다
처음 소리가 시작된 곳, 어미의 심장 소리가 만져진다
지난밤 저온의 온도를 매단 가지마다
낮은 시간 쪽으로 풀어낸 행간 속에는
길 밖으로 걸어 나간 자의 영혼이 오롯이 새겨져 있다
무성한 소문처럼 기울어진 어깨 위로 쏟아지는 음계들 사이
발치에는 수북이 엎질러진 난해한 물음들
언젠가 새가 되어 날아갈 꿈을 꾸는
혹한의 거리, 모퉁이를 돌아온 종종걸음의 사람들
붉은 노을을 등에 업고
꿈과 공허가 밀착된 하루를 건너고 있다
우두커니 골목 끝 어깨를 내어주는 나무
조금씩 불안을 파먹으며 매달린 어제가 휘청거린다
그래도 길을 잃으면 안 된다고 일찍 나온 개밥바라기별이
끝없이 밀려오는 뿌연 미세먼지를 헤치고 수신호를 보내고 있다
길은 언제나 허공으로 뻗어 있다
<돌샘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