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길/김행숙-
나는 가방을 싸고 있습니다
엄마를 버려야
진짜 삶이 시작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호주머니에서 호두알을 굴리며
머리를 숙이고
강바닥에서 자갈 굴러가는 소리를 듣습니다
천장을 뚫고
깊은 밤하늘에서 지구가 굴러가는 굉장한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온통
호두알과 호두알이 굴러가는 소리에 깔려 있었습니다
엄마는 그늘이었습니다
잠자리 날개처럼 얇은 어둠이었습니다
어디선가 파 냄새 마늘 냄새가 났습니다
엄마가 항상 네 곁에 있으니
나아가라! 딸아!
우리가 함께 불행을 나누면
어둠 속의 귓속말처럼 단맛이 퍼지니
어서 와서 가족처럼 낡은 불행을 핥고 내 원한을 빌려 가라!
어서 와, 나의 두 번째 인생!
토끼의 귀를 버려야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항상 짐을 싸고 있습니다
선인장처럼
낙타처럼 혹을 키웠습니다
혹처럼 단단하게 마음을 먹고
고향을 떠났습니다
먼 길을 떠났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무거울 수가!
무릎이 꺾였습니다
함부로 의심을 하고
길 위에서 무심코 가방을 열어봐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젊은 엄마와
늙은 엄마와 죽은 엄마가 마구 구겨져 있었습니다
이를 갈며
불편하게 잠들어 있었습니다
길 위에 가방을 버려야 나는 일어날 수 있습니다
가방이 내가 가진 전부였기 때문에
-길은 살아있다/홍해리-
길이 방긋방긋 웃으며 걸어가고 있다
보이지 않는 길에도
날개와 지느러미가 있어 날고 기고 헤엄친다
길이 흐느끼며 절름절름 기어가고 있다
길이 바람을 불러 오고 물을 흐르게 한다
꽃도 길이 되어 곤충을 불러 모은다
길은 긴 이야기를 엮어 역사를 짓는다
길에는 길길이 날뛰던 말의 발자국이 잠들어 있다
길이길이 남을 길든 짐승의 한이 서리서리 서려 있다
살아 있는 것들은 모두 몸에 길이 있다
영혼도 가벼운 발자국으로 길을 낸다
태양과 별이 지구를 향해 환한 길을 만든다
시간은 영원으로 이어지는 끝없는 길이다
기다리는 길이 끊어지고 사라지기도 한다
발바닥 아래 생각이 발딱거리며 가고 있다
사랑도 이별도 길이 되어 멀리 뻗어나간다
사람도 길이 들고 길이 나면 반짝이게 된다
눈길 손길 발길 맘길로 세상을 밝힌다
가장 큰 길은 허공과 적막이다
발자국은 앞서 가지 못한다
길은 따뜻하다.
-길/황규관-
가자고 간 건 아니었지만
간 자리마다 허무 가득한 심연이다
떠나자고 떠난 건 아니었지만
두고 온 자리마다 가시덤불 무성한 통곡이다
지금껏 품은 뜻은 내 것이 아니었고
꾸었던 꿈도 내 소유가 아니었는데
지나온 길 위에 남긴 흔적에
왜 가슴은 식을 줄 모르는가
멈추자 해도 가야 하고
머물자 해도 떠나야 하는데
왜 설렘이고 번민인가
바람이고 생명인가
-궁동 34번길/유승영-
자다 말고 우린 주인집으로 갔다
꿈을 꾸다 말고 우린 비를 피해야 했다
주섬주섬 주인집으로 옮겨갔다
윤이 나는 청마루를 지나 모르는 이불을 덮고
꾸던 꿈을 마저 꾸기로 했다
월남치마를 입은 몸매가 좋은 주인집 아주머니
가끔씩 노란 바나나를 주었던
비가 새서 웃어주었던 아주머니
비가 새는 집에서 소꼽놀이처럼 살았다
오래된 나무를 한 번씩 오르내리면서
같은 공간 속 다른 꿈을 꾸었던 집
피워놓은 연탄불이 꺼지지 않도록 엄마는 자주 말했다
연탄불이 꺼질까 봐 언니는 조마조마했지만 나는 안 그랬다
절 밑의 문간방에서 몇 번의 여름을 지냈고
그 여자는 내가 봐 왔던 여자 중에 가장 빛났다
비가 새서 많이 웃어주었던 그 여자
우리는 가난하고 심심했고
심심해서 아름다웠던 집
날마다 비가 내리는 집
-백년손님이 끌고 온 길/서영택-
서울 이야기로 길이 열리자
달빛이 모여들었고
어느새 집 안은
일가친척이 가져온 길로 가득해졌다
매형이 끌고 온 길이 제일 넓고 길었다
김서방이 왔다고 떠들던 별들도 잠이 들고
어둠도 숨죽이며 뒤꿈치를 들고 다녔다
하룻밤 지나 매형이 떠난다
모든 길은 갑자기 꿈처럼 사라지고
집안은 절간처럼 고요해졌다
길 끝에 풀을 베어 짐을 지고 마당에 들어오는 어린 내가 보인다 땀범벅이 되어
들어온 나를 보고 집에 일꾼이 있는데 어린애에게 저런 일을 왜 시키느냐고 하는
사람이 옆에 서 있다 그때 충고를 귀담아들었다면 내 인생은 지금과 달라졌을까?
또 다른 길에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으로 서울 누님 집으로 어머니와 간 내
얼굴이 보인다 남산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대한극장에서 의미도 모르는 만화영화
를 보았다 나는 버스를 몇 번밖에 타보지 않아서 그날 죽을 힘을 다하여 참으려고
했지만 결국멀미를 했다 나를 찾아 불러준 그 마음이 지금도 사라진 길 위에 선명
히 보이는 듯하다
-길/오세환-
뜬금없는 마음이 창가에 어룽대며 헤메입니다
길속에서 길을 찾습니다
길 위에 서서 길을 찾습니다
보이는 듯 보이지를 않습니다
얼마나 가야 미망의 끝자락에 닿을 수 있을까
썪지 않는 눈부심은 없듯이
가진 것 다 비울 즈음 길은 강을 이루고
강물은 도도히 흘러가리니
모난 돌들은 서로 만나 몸을 부비며
물길 속에서 길을 내고 거듭납니다
강 같은 유장한 평화에 도달하기까지
수많은 사유를 씻으며 또 얼마를 흘러가야할까요
수없는 길이 열리고 닫힘에서
스쳐간 아름다운 인연의 깃들도
고단한 삶의 생멸에 그림자
진부한 들숨과 날숨으로
깊고 그윽하던 강물도
떠나고 이르는 바람의 숨결입니다
-사막으로 가는 길/민창홍-
별을 만나러 간다
사막이 되어가는 내가 사막으로 가는 길
쐐기풀 먹으며 멍때리는 낙타
별을 기다리다 보면
염소와 말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는 초원
가벼운 발걸음으로 노을이 다가와서
지친 영혼을 어둠이 꼭 안아 주고
전쟁영화의 한 장면 같이 대포의 불빛으로
때론 공장 굴뚝의 연기에 덮여 사라졌던 별들
언젠가는 촛불처럼 잠시 빛났다가
잠들지 못하는 도시의 불빛에 쫓겨
건조한 아픔을 빨아먹고 일시에 뿌려놓아
사막의 심장은 팝콘처럼 터진다
가슴마다 벅차게 쏟아져 내리는 별
빛의 물결이 되고
별이 진다는 것은
태양과 즐겁게 임무를 교대하는 것
애써 위안하며
푸른 눈의 상인을 따라
등짐을 지고 오물거리는 낙타의 입가 거품
하늘에 뿜으면 쌍무지개 떠오르고
커다랗게 뜬 눈동자 아련한
지평선 너머에는 실크로드가 보인다
나무 대신
사람 대신
별들이 살아가는 사막
차도를 가로지르는 양떼들
목동이 없어도 그들이 가는 길
사막이 되어가는 내가 사막으로 간다
-경이로운 길-작용 반작용/명서영-
먼지는 털자 돈은 쌓자 확실한 반응과 화끈한 싸움까지 사사건건 부딪치는 그와
나는 판크라티온 다른 갈비뼈에서 왔을 힘겨루기 선수
길과 길이 같은 곳에서 파생되었다는 이론체계는 신뢰가 빨갛다 어불성설이다
잠깐 싸움이 멈춘 휴식 시간 우리 고깃집으로 간다
승자만 기억하는 재활 안 된 길이 길을 틀 때
식당은 2라운드 싸움 한 상을 잘 차려냈다
둥근 식탁 한가운데 숙성된 나체의 장작불이 빙빙 분위기를 빨갛게 달군다
안줏발 잘 받는 소주가 탐욕 한 잔을 꿀꺽 삼킨다
탐색 시간이 노릇노릇 구워지는 동안 훅 날아오는 불꽃, 순식간이 까맣게 탄다
육식동물인 뼈들이 서로 살점을 물어뜯고 더 포식자인 나는 숨도 쉬지 않고 이
빠지도록 할퀸다, 고집 센 심줄은 끝내 뼈에 붙어 억울하다
스트레이트, 그가 뻗은 주먹이 순식간 내 입술에 정통으로 꽂힌다
불꽃같은 고기 한 점이 입술에 엉겨 붙는다
수시로 짙은 연기가 그와 나를 떼어놓을 때 주체할 수 없는 눈물 콧물
다급한 그가 항복 사과한다, 길을 잃은 소통이 줄줄 샌다
대낮이 캄캄하게 저물듯 비를 맞는 것과 비를 받는 것처럼 불꽃이 시든 기분
내 뼈가 그의 갈비뼈로 형성되었다는 학설은 신앙을 잃었다
갈비뼈가 부러지도록 방언이 줄줄 쏟아내도록 연애를 할 때는 믿음이었으나
-길의 길/신순말-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려 했는지
뭉그러져 알 수 없는,
고양이인지 개인지 고라니인지
좋은 데로 가거라,
그 주검에 혼잣말 흘린 이후 나흘째
날쌔게 스쳐가는 철덩어리들이
고산(高山) 독수리떼처럼 남은 몸을 핥고
독수리의 심장을 지니지 못한 이도
어쩔 수 없이 한 점 쪼고 간다
살아있는 동안 길에서는 아무도 멈추지 않는다
좋은 데는 지상이었을 텐데,
미처 사라지지 못한 시간을 기다리며
영혼이 떠나 흔적만 남을 즈음이면
바람은 길 위의 혼을 아주 데려갈 것이다
누군가의 삶이 정지하여도
길은 멈출 수 없는 곳
바람마저도 길이 있다
-따라오는 길/김은정-
1
미안해 너의 평화보다 더 큰 나의 혼란
미안해 너의 사랑보다 더 큰 나의 의심
미안해 너의 용기보다 더 큰 나의 두려움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마워,
집으로 가는 길
먼 길 함께해 주어서
내 사랑
외로움과 아픔 사이로
손을 내밀어 주어서
2
전일빌딩 카페 245에서
차를 마시고 나왔는데
가로수 길 여린 풀 한 포기 한 포기
만물이 생명이
눈이 부시고 소중해
이미 그때
그 사랑, 너로 말미암아
-보길도 가는 길/박병두-
가슴쓰린 날이면 보길도를 향해
바위각시 포구를 가야한다.
대답없는 배 한척
물끄러미 응시한 동공은 노을에 갇히고
내 가난한 추억을 꺼내었다.
바람도 잠을 자는 날,
연무대 청사 그늘은 다시 갈 수 없다
내 어깨에 심문을 받는 무궁화들이
뚝뚝 떨어지는 거리를 봤다
무거운 훈장을 여기에 내려놓고
세상 속으로 들어가려 한다
익숙한 복도를 골조로 막힌 사람들의 전언은
다시는 더 볼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저만치 거리를 두었다는 소식들이
끊어질, 회상의 방벽을
소문의 벽들이 등불을 타고 온 것일까
새벽을,
내일 다시 새벽을 맞이할 수 있을까
꽁꽁 얼었던 심장들이,
먹물로 짧은 편지를 쓴다.
레일을 타고 달려들었던 냉엄한 질문이
어두웠던 소식들이 때론 영광이었다.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때쯤
이정표는 직선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배신의 계절들, 심장 하나를 남겨주고 보니
남은 인연설에 기억한 좁은 방
마귀의 별들이 이별을 물을 때,
명분을 잃어가던 사람들은 이내 잊혀져 갔다.
슬픈일들은 그대로 화살이되어 비장한 속도로
미로를 인내해야 했던
한 장의 편지를 기억해 낸다.
고난을 벗삼아 살아온 날들
그림자 속을 밟는 시간이 길어졌다.
이정표 한장을 책상에 내려놓자
웃는 젊음의 미소보다는
그늘진 성실한 젊은이가 되었다.
제복에 흐느껴 울었던 밤
눈물로 적신 어둠을 꺼내
맑은 햇볕에 말리려 했다.
이제 더 버틸 수 없었던 날들
정신을 내놓지 않으면 길이 없었다
이름없는 사람들을 지켜야 했던 가난한 일들이
아픈 정신에 함몰되는 순간,
삶의 파편들은
가난한 자의 선행이 독약이 되었다.
인연설이 참혹한 여름을 넘기는 마지막 날,
호흡들은 정지되고 더딘 새벽이 더 늦었다.
해가 저문 송종마을 포구
강철같은 이야기를
여기에 내려놓고
이별을 노래한 보길도 섬을
응시한 채로 노을을 삼키고 있었다.
-달의 끝에서 길을 잃다/백명희-
악어 떼처럼 몰려든 압류 청구서들을 들고
체념하듯 찾은 현금인출기 앞
어둡고 좁은 현실의 늪 속으로
궁색하기만 한 월급 통장을 밀어 넣는다
치열했던 한 달 간의 사투가
세상의 언어들로 재배열되는 시간,
이제 곧 잔고 0의 지뢰가 터질 텐데
건조한 목소리로 종료를 알리는
인출기의 화면은 표정이 없다
무참하게 물어뜯긴 월급 통장과
또다시 이월시켜야 하는 아이들과의 약속,
습기를 머금지 못하는 바람들을
영수증과 함께 버리는 월말은
건기의 초원처럼 목마르다
새로울 거 없는 달의 끝
거리는 온통 무중력 상태
비는 언제쯤 오는 것일까
연체된 꿈에 이자를 붙여 본다
-하늘 가는 길/이위발-
구불구불 굽어져 있는 소나무
볼품없어 보인다.
얼핏 보면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팔을 제대로 뻗지
못해 구불구불하다.
바위틈에 떨어져 자란 생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부족한 양식과 세찬 바람에
몸 던져 버틴 소나무
꿈은 그들만의 하늘을 갖는 것
생을 수용하지 않고
열 수 있는 하늘 없듯이
시작하지 않고 넘을 수 있는
벽이 없듯이
소나무는 햇빛을 보기 위해
스스로 팔을 자르며 올라간다
-길위에서 길을 묻다/진 란-
길 위에 서 있을 때, 나 또 하나의 길이었다
꽃을 바라보고 그를 불러줄 때, 나 또한 꽃이었다
바람 밖으로 가열찬 마음 밀어낼 때에도 난 바람이었다
햇살 받쳐주던 푸른 잎새들이 내 머리에 머물 때
그 잎새 밖으로 난 길을 따라올라 구름으로 가벼워지고
먹장구름 기대어 무거워질 때에는
함께 둥둥거리며 뜨거운 불볕, 그 하늘에서 시렁거렸다
한낮 반짝, 한번씩 소나기로 쏟아지기도 했다
비워지고 가벼워지고 길 위에 다시 서 있으면
어김없이 꽃들은 꽃 속으로 나를 숨어있게도 하였다
치렁거리는 이 기억이 한때는 설레임이었고
구석으로 우우우 몰리던 때 이른 나뭇잎들은
꽃잎과 함께 바스락거리며 길 위의 바퀴처럼 눈부시다
어쩌다 나는 길이 되어 있는지, 다시 누군가의
길과 맞닿아야 하는 수레의 흔적을 굴러가는지
길 위에서 길을 꿈꾸는 길치, 그 부림의 날을 바라노니
가멸한 마음으로 길을 가고 또 오고 또 가겠구나
-물안실 가는 길/이성자-
싱그러운 연둣빛 출렁거리는 길을 따라
고향 가는 길 물안실로 접어든다.
새 차로 달리며 내 고향으로 가는 길에는
붉은 단풍이 어서 오라 손짓하고
청단풍은 반갑다고 머리 풀어 배꼽 인사 한다
오래 되어도 변하지 않는 그곳
흰 구름이 소등에 걸린 듯 천마산에 걸리어 있고
옛 사람 가고 없는 빈집들이 널부러져 있어도
왈칵 반가움에 눈물 솟는
오래되어 돌 꽃 핀 너럭바위며
주저앉은 무덤이며 작고 초라한 교회 십자가며
아!
짧게 살다가 가면서도
여기저기 흔적들이 또 아픔으로 피어난다.
같이 살다가 먼저 간이를 그리는 일 이토록 뼈아픈 일이다
관절염이 뼛속까지 파고드는 일이다
물안실 안개가 내 발목을 삼킨다
-돌아오는 길에서/이사람-
너에게로 가는 길은
풀벌레 소리도 다정한 잔소리로 들렸지
빈 무밭에 버려진 무청은
잃어버린 이름표처럼 쓸쓸했네
눈을 감고 걸으면
밤 뻐꾸기 소리에서 살냄새가 났지
서로 쥐지 못하고 스치기만 했던,
손등과 손등의 기억이
시퍼런 달빛에 들켜 숨이 막힐 지경이었네
건너편 제재소 불빛에
두 입술은
들숨과 날숨의 속내를 자주 들키고 했었지
혼자 돌아오는 밤길은
끊어진 폐 노선처럼 불편한 위안임을
진작부터 예감했었지만
가지러 온 것이 아니라고,
다시 두고 가려 했다고 말하고 싶었지
저녁 그림자가 짙게 누울수록
혹시나 하는 마음은
긴 가뭄 뒤의 당도처럼 짙어져만 갔네
-사람 숲에서 길을 잃다/김해자-
너무 깊이 들어와 버린 걸까
갈수록 숲은 어둡고
나무와 나무 사이 너무 멀다
동그랗고 야트막한 언덕배기
천지사방 후려치는 바람에
뼛속까지 마르는 은빛 억새로
함께 흔들려본 지 오래
막막한 허공 아래
오는 비 다 맞으며 젖어본 지 참 오래
깊이 들어와서가 아니다
내 아직 어두운 숲길에서 헤매는 것은
헤매다 길을 잃기도 하는 것은
아직 더 깊이 들어가지 못한 탓이다
깊은 골짝 지나 산등성이 높은 그곳에
키 낮은 꽃들 기대고 포개지며 엎드려 있으리
더 깊이 들어가야 하리
깊은 골짝 지나 솟구치는 산등성이
그 부드러운 잔등을 만날 때까지
높은 데 있어 낮은, 능선의
그 환하디환한 잔꽃들 만날 때까지
-길 잃은 문장 위를 걷다/김향숙-
서점 주인은 매번
표지 없는 책들을 모아 주었다
누가 뭘 물으면
제목 없는 대답을 내놓는다
겉장이 없는 책은 부드럽고 말랑해서
염소에게 한 장씩 떼어주면
연한 줄거리부터 맛있게 먹어 치웠다
마치 이쪽저쪽도 없고
네 편 내 편도 없는 방향 같은 것
온순한 바람이 넘기기엔 더할 나위가 없었다
그 후론 누가 나를 물으면
앞도 뒤도 없는 사람이라고 대답하는데
중얼거리다 보면 어느새 안녕,
마지막 구절에 닿아 있었다
제목 없이 지구를 떠도는 나는
마침표를 굴리며 끝없이 헤매는 나는
오래전 길을 잃은 문장
거꾸로 읽어 뒤로 걸어야 했다
-4월-공단 가는 길/이복현-
4월이 산야 가득
만국기처럼 펄럭인다
4월은
누가 걸어 놓은 찬란한 슬픔인가?
무너진 돌담을 감쌌던
마른 담쟁이가 살아 돌아오고
닭장을 나온 암탉이 언 땅을 후빈다
새들이 금 간 하늘을 날며
위태롭게 울고
굴에서 나온 짐승들이
눈부신 태양을 보고 울부짖는다
삶은 울음으로 시작한다는 걸
4월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꽃이 피어도 웃지 않는 사람들이
미세먼지 속으로 지나간다
마스크를 하고
연기 자욱한 굴뚝 공단을 향해
힘차게 자전거 페달을 밟는다
<돌샘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