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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산

조철제(1895년~1958년 , 태극도주)

작성자사오정|작성시간08.06.12|조회수2,344 목록 댓글 0

조철제(1895년~1958년 , 태극도주)

경남 함안군 칠서면 회문리 출생(을미년 1895년 12월 4일생),본관은 함안 호는 정산 4남매중 장남

어려서 부친 조용모를 따라 만주 유하현(지금의봉천지방)에 이주하여 17세에 만주에서 결혼

(정사년1917년) 당시 이치복 계열의 보천교 신자 김혁에게 증산진리를 처음접함

 

귀국하여 안면도에 증산에관한 체계적인 소식을 접하려고 부단히 노력 , 1917년 고부 선돌에 살고있는

상제님의 친 누이동생인 20 여년 연상의 선돌부인을 모종의 뜻을 펼치고자 천생연분 이라고 속여 

마침내 선돌부인은 본남편 박창국괴 이연하고 동거를 시작하였다.1918년 김형렬 교단에 가입하여

김형렬 성도를 모심,기미년(1919년)여름을 기회로 김형열을 배도하고 따로이 교단을 창설코자 획책,

 

이때 유의경이 조철제에게 일러 말하기를 " 증산께서 천지공사를 행하시되 운수를 뭉쳐서 "약장과 궤"

에다 감아 두셨으므로 차경석도 이 신기를 얻은 후에야 운수가 열려서 650만의 교단 창설에 성공하였나니

그대도 교단을 창설코자하면 먼저 계획을 세워 이 신기를 도취 하도록 하라" 하므로 약장궤를 도둑질

하였으며 , 1921년 도통과 도판을 석권할 욕심이 발동하여 강증산의 초빈을 헤치고 증산의 유골을 도굴하여

이준세 재실에모셔두고 도통을 꿈꾸며 수도를 하다가 문공신 성도의 공격을 받아 배전으로 도망쳤다.

 

1925년 4월 전북 구태인에서 독자적으로 선돌부인과 부친 조용모,삼촌조용서 및 궤 탈취에 가담한 권태로 일당과

함께 무극대도교를 설립 , 1955년 4월 조철제의 측근 박중하가 꾼 꿈 사건이 조철제를 지존(옥황상제)으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조철제는 사망하기 1년전인 1957년 스스로 옥황상제라 칭하였다.(조정산전기/태극도통감)

그가 태어난 함안 회문리의 이곳은 " 도둑골을 옆에 끼고 있는...."그러나 실제는 회문리 부근 도둑골임이 입증되었다.

 

 

[ 1 ] 조철제의 약장 탈취사건

 

약장궤는 증산께서 기유년(1909년)어천하신 이춯 고수부가 성령을 받아 도통하였다 한다 1911년 경석에게 사인교를

빌려오라 하여 원평의 송찬오의 집에 머물면서 경석에게 일러 구릿골 약방에 가서 약장과 궤와 기타 약방기구 일체와

부벽서와 벽바른 종이까지 떼고 방바닥의 먼지까지 모조리 실어오라 한후 대흥리 본소에 가져다 둔것이었다.

송찬오의 집에 있던 상제님의 목침이 1916년 보천교 평신도였던 박중빈의 손으로 흘러 들어가 기 기운을 타고

원불교가 오늘날 흥행하게 되었다.(증산께서 쓰시던 물건에 큰기운이 있음을 상징한다)

 

조철제 측에서 밝히고 있는 바(태극도,진경전서)에 의하면 약장과 궤 탈취사건이 있던 기미년(1919년)팔월 초순에

조철제는 탈취사건의 음모를 꾸미고 자신의 부친 조용모로 하여금 백두산에 은거하는 장사 최승오 , 김계철을 한달만에

데려오게 하고(한달이상 계획했음을 암시)통사동에 데려다 놓고 10일 이상 잘 먹이기만 했다.

거사 당일이 되자 조철제 일행은 해질 무렵 대흥리에 도착하여 송림속에 숨어 있다가 자정이 되자 백두산 장사 최승오가

연목크기 의 소나무 한그루를 뽑아 곤봉을 만들어 앞장서니 일행이 뒤따랐다.

 

보천교 본부의 대문이 잠겨 있으므로 백두산 장사 김계철이 담을 넘어 자물쇠를 부숴 연다음 대소문을 차례로 열고

안채로 들어가 약장과 궤를 탈취하였다. 탈취 과정에서 차윤칠이 조철제의 발을 잡음으로 최승오 김계철이 몽둥이를

휘둘러 차윤칠을 난타하여 혼절시키고 최승오로 하여금 궤를 짊어지게 하고 김계철로 하여금 후방을 지켜 보천교

간부의 추적을 막게 하였다.조철제는 후일 이렇게 탈취한 궤를 자신의 도지와 도통을 숨긴 둔궤라 선전함과 동시에

천보라 하여 증산의 도통과 진리의 연원을 속여 기센농민 하게 되었다.

 

 

[ 2 ]조철제의 증산상제님의 성묘 도굴사건

 

조철제는 증산의 성골을 몸에 지니고 수련하면 쉽게 도통한다는 말을 유포하던중 신유년(1921년)2월에 심복인

권태로,손진방 등 장정 18명을 심야에 보내 구릿골 뒷산 창탯날에 모셔둔 성골을 도굴하여 정읍 통사동 이씨 사당에

숨겨두고 심복들로 하여금 지키게했다.이 사실을 알아냄 김형렬이 김제 경찰서에 고발 함으로써 성묘도굴 사건에

대한 수사가 비로써 시작되었고 상제님 제세시에 성골문제로 부촉을 받은 문공신은 수하인 김정우를 조철제 밑에

들어가게 하여 신임을 얻게한후 마침내 임술년(1922년)정월에 정우에게 목검을 지닌 장정 20명을 거느리고 통사동

사당을 쳐들어 가게해 성골을 되찾아다가 자기방 천반자위에 감추어 두었다.

 

이때에 조철제는 증산의 성골 왼손 손목뼈를 가지고 측근 두명과 함께 도망쳤는데 도보로 대전을 거쳐서 안동으로

향하다가 서대전에서 김정우를 만나자 신속히 손목뼈를 동행 측근 김윤자에게 주어 도망가게 하고 현금만 빼앗겼다.

이에 조철제는 태전 경찰서에 정우를 강도로 고소한바 이로써 모든 사건 내막이 들어나자 문공신을 비롯한 20여명이

구속되어 문공신은 7년형에 처해졌고 ,정우는 고문치사 당했으며 철제는 뇌물을 주고 풀려 나왔다.정읍 경찰서에서

성골을 찾아다가 대흥리 앞 냇가에 빈실을 지어 위장하던 중 소송에 승소했다.소송후 10년뒤인 정축년에 문정삼이

친족과 함께 장례를 거행하려 하는데 관이 비어 있으므로 다시 경찰에 호소하니 경찰은 보천교 간부들을 추궁해

빈실로 위장한 사실과 성골을 은닉한 모든 전후 사정을 알아냈다.

 

그뒤 해방후 무자년(1948년)봄에 강순임(증산의딸,증산 법종교창립)이 대흥리에 가서 차윤경과 한인희의 안내로

성골을 찾아 기축년(1949년)3월 보름날에 김제 금산리 오리알 터에 장사했으나 성골의 진위를 아는 사람은 전혀

없고 그나마 조철제가 훔쳐간 왼손 손목뼈도 아는바 없이 되었다.이에대해 일찍이 동곡에 계실때 증산께서는

오리알 터를 가리키며 " 세인이 나의 묘지라고 한다네,그러나 개뼈가 묻혔는지 소뼈가 묻혔는지 누가 아느냐?

<용화전경>하신바 있으며 묘각에 불을 밝히고 오는 신도들에게 고수부께서는 " 누구의 해골인지도 모르거늘

헛되이 수고 하였다 " 라고 하였다.

 

 

[ 3 ]대순진리회에서 만든 전경?<조철제가 임의로 조작한구절>

 

*어느날 공부중에 한 신인이 나타나 글이 쓰인 종이를 보이며 " 이것을 보이면 구세제민 하리라 " 그것은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 였다 <전경191>

*시천주(기도주)는 1860년 경주 용담정에서 수운선생이 한울님으로부터 받은 글인데 조철제는 시천주를

자기가 받았다고 하였다. 하늘에서 이미 수운에게 내린 시천주를 다시 또 조철제를 통해 세상에 낼 이유가

있겠는가~? 증산의 상제강서에도 많이 인용하였다.

*어느날 대사모님(고수부)과 상제의 누이동생 선돌부인과 따님 강순임을 만났다.

선돌부인은 특히 반겨 맞아들이면서 상제께서 재세시에 늘 을미생이 정월 보름에 찾을것이다 라고 말했다.

부인은 봉서를 조철제에게 주면서 " 이제 내가 맡은바를 다 하였다 " 하며 안심하였다 <전경193>

 

*선돌부인이 조철제에게 주었던 봉서를 대순진리회(태극도포함)에서는 도맥(종통)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조철제는 봉서의 내용은 밝히지 않았다.그 봉서의 내용이 진짜 도맥(종통)에 관한 것이었다면

왜 밝히지 않았겠는가~?그리고 " 천하에 종사하는 사람은 문서로 전하지 않고 말로써 전하노니

부득이하여 글로 전할때에는 읽은 다음에 곧 불에 사르나니라 "<천지개벽경54>는 상제님의 말과 맞추어 보면

봉서를 받았다는 것은 거짓임을 알수있다.그 봉서 한장으로 선돌부인은 나중에 철제와 눈이 맞아서

남편(박창국)을 버리고  철제와 동거 생활에 들어간다.어찌 하늘의 사명을 받은자가 인륜을 어기고

남의 부인을 빼앗는단 말인가~?

<대순진리회와 태극도 도인들은 이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

 

*조철제는 증산 상제를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강성상제]라 칭하고 본인은 옥황상제라 하였다.

그런데 증산께서는 자신이 옥황상제라 했으며<천지개벽경19>,고수부도 상제께서 재세시에 자신이 옥황상제라

했으므로 증산화천시 관에다가 옥황상제지위라 쓴 명정을 그 위에 덮고 묻었다.

이상과 같이 상제님의 뜻과는 다른 호칭을 임의로 조작하였다.

 

 

[ 4 ]조철제가 조작한 채지가 내용및 조철제 약력

 

*찾아가세 찾아가세 회문촌(回文村)을 찾아가세--(원문)-->" " ....회문촌(會文村)을..." 로 고쳤다...

 조철제의 고향이 회문리(會文理)여서 회(回)를 회(會)로 바꾸었다.

*섣달(12)이라 초나흘날(4)반달보고 절을하네--(원문)--> 조철제의 생일이 12월 4일일다.

증산께서 현무경에 12월26일 재생신 한다고 하는 구절을 이용 , 12+12=24 , 4=26=30  이렇게 더해서

4+26=30 을 만도수(꽉 채운다는 뜻)라 해서 자신이 사명자라 주장하였다.

 

***조철제약력***

1909년(15세) : 만주 봉천으로 이주

1918년(23세) : 김형렬 밑에 입도

1919년(26세) : 증산의 구릿골 뒷산 장택날에 모셔진 증산의 성묘를 파헤치고 성골을 탈취(나이조작)

1925년(31세) : 무극도 창도

1948년(54세) : 부산 보수동 도장마련(태극도로 개칭)

1955년(61세) : 부산 감천으로 이주(지금의 본부)

1958년(64세) : 감천 태극도 도장에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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