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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이문 통혼 인물

귀암공의 외조부 하당 김시양 공의 자해필담(紫海筆談)

작성자낙민(장달수)|작성시간14.05.22|조회수355 목록 댓글 0

자해필담(紫海筆談)

 

                                                                      발췌 인동 장달수

 

하담(荷潭) 김시양(金時讓)의 수필집(隨筆集)이다.

하담 선생은 돌밭 이필주 형의 선조인 귀암 이원정 선생의 외조부이며 장달수의 13대 조모(낙촌 따님)의 외조부이다.

 

발췌자가 단락 별로 원문을 부기하였다.

 

저자 김시양(1581~1643)은 인조(仁祖) 때의 명신이다. 자는 자중(子中), 호는 하담(荷潭), 초명(初名)은 시언(時言), 시호(諡號)는 충익(忠翼),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문장이 뛰어나고 학식이 해박하여 높은 이름이 있었으며 인격이 청렴결백하고 엄정강직하였다. 인조 때에 사도관찰사(四道觀察使)ㆍ병조 판서ㆍ이조 판서를 역임하고 청백리로 선정되었다.

《자해필담(紫海筆談)》은 어느 신변잡사(身邊雜事)나 만담쇄언(漫談瑣言)을 적은 수필집과는 다르다. 국가와 정치ㆍ정치인ㆍ현인ㆍ달사ㆍ악인 등에 대한 충격적인 사건과 범상하지 않은 일, 적어도 기담(奇譚)ㆍ이사(異事)에 속하는 일들을 채록하고 있다.

《자해필담》은 거기에 수록된 사건 그 자체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같은 저자의 수필집인 《부계기문(涪溪記聞)》이 인물과 인물평에 주안점을 둔 것과는 대조적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자해필담》에 수록된 이야기들은 중요한 것, 진기한 것으로서 정사(正史)에서 볼 수 없는 것이 많다.

《자해필담》에는 임진왜란 때의 이야기를 가장 많이 기술하고 있다. 이것을 제외하면 거의 전편이 조각조각의 이야기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이 단편적인 조각조각의 이야기들을 읽어가는 동안에 우리는 거기에서 일관되고도 거리낌없는 예리한 비평과 나라를 근심하고 세상을 개탄하는 정열과 권선징악의 염원이 담겨 있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또 사물을 정확하게 파악하려는 예리한 관찰력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한서(漢書)》 무제기(武帝紀)와 지리지(地理志)에서 우리 나라에 대한 기록의 잘못을 지적한 것이나, 조선 태조 때에 조반(趙胖)이 명 나라의 고제(高帝)를 탈탈의 진중에서 만난 일이 있다고 한 이야기의 근거 없음을 반박한 것이나, 중국 고대의 진시황(秦始皇)을 여불위(呂不韋)의 아들이라고 한 것이 거짓말이라고 갈파한 것이나, 고려의 우왕ㆍ창왕을 신돈(辛旽)의 아들이라고 한 것이 모함이라고 은연 중 시사한 점 등이 그러하다.

어쨌든 이 《자해필담》이 역사의 이면을 증언하는 중요한 문헌(文獻)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해제: 남만성(南晩星)

 

자해필담(紫海筆談)

 

김시양(金時讓) 찬

 

만력(萬曆) 임자년(1612, 광해군 4)에 내가 과거의 시제(試題)로 죄를 짓고 종성(鐘城)으로 귀양가게 되었다. 10월에 배소(配所)에 이르러 한 달 남짓 되었을 때에 꿈을 꾸니, 배소를 남쪽 지방으로 옮겼는데 고을 이름이 아래에 해(海)자가 있어, 평해(平海)나 흥해(興海)인 것 같으나 자세히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러한 시를 지었다.

 

외로운 신하 죄를 범했으니 마땅히 죽어야 할 것을 / 孤臣觸犯罪當誅

천지처럼 포용하시니 성상의 은혜 특별하구나 / 天地包容聖渥殊

새북의 풍사를 떠나야만 되겠으니 / 塞北風沙可去矣

영남의 매죽에 아니 가고 어쩌리 / 嶺南梅竹盍歸乎

임금의 은혜 산처럼 무거우시니 / 御恩爲有丘山重

산 넘고 물 건너기에 길 멀다 말하소냐 / 跋涉寧論道路迂

인간의 온갖 일 모두가 꿈이라오 / 萬事人間都是夢

좋은 소식 꿈과 서로 맞기를 서서 기다리네 / 好音佇待夢相孚

 

그 뒤 7년 만인 무오년에 오랑캐의 변란이 있어서 서북 지방에 귀양간 사람들을 남쪽으로 옮기라는 명령이 내렸다. 나는 영해(寧海)로 배소를 옮기게 되었으니, 이때에 이르러 그 꿈이 비로소 맞은 것이다. 길흉과 영욕은 미리 정해져 있지 않은 것이 없는데, 저 세력과 이익을 얻기 위하여 악착스럽게 도모하고 힘쓰는 자들은 너무나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萬曆壬子。余以試題得罪竄鍾城。以十月到配所。月餘夢移配南方。邑名下有海字。似平海興海兩邑。而不可詳也。因作拙詩記之曰。孤臣觸犯罪當誅。天地包容聖渥殊。塞北風沙可去矣。嶺南梅竹盍歸乎。御恩爲有丘山重。跋涉寧論道路迂。萬事人間都是夢。好音佇待夢相孚。後七年戊午。有奴胡之變。命移西北竄者於南方。余配得寧海。至是其夢始驗。吉凶榮辱莫非前定。彼營營圖而力者。其不思之甚也。

 

가정(稼亭) 이공 곡(李公糓)이 영해부(寧海府) 사람 김택(金澤)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그런 까닭에 목은(牧隱)이 외가에서 자랐으므로 소위 관어대(觀魚臺)니 유사정(流沙亭)이니 하는 곳이 다 그 구적(舊跡)이다. 고을 사람들이 그의 유풍(遺風)을 아름답게 일컫기를 지금에 이르기까지 감쇠(減衰)하지 않아서 자기네의 고장을 장식하고 있다. 근간에 고을 안의 유사들이 서원(書院)을 짓고 쇄주(祭酒) 우탁(禹倬)을 향사하게 되었는데, 그가 일찍이 이 고을의 관원을 지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목은은 그 문집 속에 불가(佛家)의 문자가 많다고 하여 배척하고 서원에 모시지 않았는데, 이 논의는 한강(寒岡) 정구(鄭逑)에게서 나왔다고 한다. 소위 학문이란 것은 충ㆍ효 두 글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목은의 충효대절(忠孝大節)이 해와 별처럼 빛나니 학문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하겠다. 그를 서원에 향사한들 누가 옳지 않다고 말하겠는가? 그런데 문자 사이의 조그만 흠을, 털을 불어 헤치며 찾아내듯 함이 이에 이르는 것은 어떠한가 알지 못하겠다.

 

稼亭李公穀。娶府人金澤女。故牧隱長于外家府。所謂觀魚流沙亭。皆舊跡也。府人艶稱遺風至今不衰。以侈其鄕。近者府中儒士作書院。祀禹祭酒倬。以曾爲郡官。故牧隱集中多佛家文字。擯不與。此論出於鄭寒岡逑云。所謂學者不過忠孝二字耳。牧隱大節如日星。可謂不負所學矣。之祀于院。誰曰不可。而以文字間小疵。吹毛至此。未知如何。

 

한윤명(韓胤明)의 자는 사형(士泂)으로 당시에 명망이 있어 생도들을 교수(敎授)하였는데, 선조(宣祖)도 잠저(潛邸) 때에 또한 그에게 수업하였다. 한윤명이 경서의 뜻을 강론할 때면 노소재(盧蘇齋)의 논리를 칭찬하였다. 선조가 그는 어떤 사람인가를 물으니, 한윤명이 말하기를,

“지금 시대의 큰 유학자인데 죄 아닌 죄로써 바다속의 섬에 귀양가 있습니다.”

고 하였다. 선조가 그에게 마음을 기울인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왕위에 오르자 사적(仕籍)에 있던 옛사람을 등용하였다. 소재는 전적(典籍)으로 조정에 돌아온 지 7년 만에 정승이 되었으니, 한윤명이 먼저 그를 포용한 힘이 많았다. 임금과 신하가 서로 만나는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韓胤明字士泂。有時名。敎授生徒。宣廟潛邸亦受業焉。胤明因論經義。每稱盧蘇齋之論。宣廟問是何人。胤明言當今大儒。以非罪放海中。宣廟傾心已久。及卽位錄用舊人之在籍者。蘇齋以典籍還朝七年。而入內閤。胤明先容之力居多。君臣相遇豈偶然哉。

 

명종이 종실(宗室) 자제 3사람을 골라 사유(師儒)를 특별히 선정하여 글을 가르치게 하였다. 그때 정승 정지연(鄭芝衍)이 교관으로 있었는데, 얼마 있다가 선조(宣祖)가 즉위하였다. 다음해에 이르러 정지연이 비로소 벼슬을 하였는데, 차례에 의하지 않고 특진되어 13년 만에 급작스럽게 정승이 되었다. 정지연의 숙부인 임당(林塘) 유길(惟吉)이 찬성(贊成)으로서 문형을 맡고 곧 정승을 하게 되었을 때에, 정지연이 바야흐로 과장에 있었는데, 정지연이 정승이 되었을 때에도 임당은 아직 경(卿)의 반열에 있었다. 정 정승이 2년 동안 재직하고 이미 졸(卒)한 뒤에야 임당이 비로소 의정부(議政府)에 들어갔다.

 

明廟擇宗室子三人。特選師儒授書。鄭政丞芝衍爲敎官。未久宣廟卽祚。越明年鄭始釋褐。不次超陞。十三年驟秉鈞軸。鄭叔父林塘惟吉。以贊成主文衡。朝夕入相。而鄭方在場屋。及鄭大拜。林塘猶在卿列。鄭相二年旣卒。而林塘始入政府。

 

안세우(安世遇)는 총명하여 숙성하여, 중종(中宗)이 친히 부마(駙馬)를 간택하는데 세우가 열네 살의 나이로 피선되었다. 세우는 뜻이 공명(功名)에 있어서 공경(公卿)의 벼슬을 쉽게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아조(我朝)의 부마들은 녹(祿)만을 받는 서추(西樞)와 같아서, 조정에는 참여하지 못하므로 출세할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안세우는 소를 올려 굳이 사양했다. 중종은 그 뜻을 어기기가 어려워서 그의 뜻을 좇았다. 안세우는 과장에서 실패를 거듭하다가 늦게서야 진사에 합격하였다. 오래된 뜻이 허사로 돌아가자 항상 통탄하면서 스스로를 책망했다. 그러던 중 을사년(1545, 인종 1 명종 즉위년)에 이기(李芑) 등이 유관(柳灌)ㆍ윤임(尹任)을 반역죄로, 안세우는 사적(士籍)을 취득하려고 윤임의 어린 여종 모린(毛麟)을 교사하여 증인이 되게 한 뒤, 드디어 대궐에 나아가 고변(告變)하였다. 이는 안세우가 윤임의 아내와 재종(재종)간의 친척이 되기 때문이었다. 반역의 옥사가 이미 성립되어 그는 상직(賞職)을 받았는데, 역시 현달하지 못하고 죽었다. 전일에 안세우가 공명에 뜻을 두지 않아 공주에게 장가드는 것을 사양하지 않았다면, 일생동안 부귀를 누렸을 것이니, 어찌 남을 무고하여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겠는가?

 

安世遇聰銳夙成。中廟親選駙馬。世遇年十四被選。世遇意在功名。以爲靑紫可立取。而我朝駙馬類以西樞受祿。不預朝廷。無所芬華。故世遇上疏固辭。中廟重違其意從之。世遇蹉跎場屋晩成進士。宿志歸虛。常痛恨自咎。至乙巳李芑等。構柳灌尹任叛逆之罪。世遇欲取士籍。乃敎誘尹任童婢毛麟。使爲證左。遂詣闕告變。蓋世遇與任妻再從親故也。獄旣成受賞職。亦不顯而死。向使世遇不志功名。不辭尙主則一生富貴矣。何至誣告爲惡至此哉。

 

사문(斯文) 이경중(李敬中)이 전랑(銓郞)이 되었을 때에, 정여립(鄭汝立)을 배척하여 화현(華顯)한 자리에는 의망하지 않았다. 정승 정인홍(鄭仁弘)이 그때 장령(掌令)으로 있었는데, 어진이를 가로막는다고 탄핵하여 이경중이 마침내 파면되었다.

기축옥사(己丑獄事)가 일어나자, 정여립과 서로 서신(書信)을 왕래한 사람은 다 추궁을 받게 되었다. 유서애(柳西厓)가 일찍이 이조 판서로 있을 때에 백공 유양(白公惟讓)이 편지로써 정여립을 서애에게 추천하여, 서애가 회답한 일이 있으므로 스스로 불안하게 여겨 상소하기를,

“그 때 정여립이 한때의 중한 명망이 있었으니, 누군들 속지 않았겠습니까? 그를 알고 미워한 사람은 오직 이모(李某) 한 사람뿐이온데, 도리어 그는 어진 선비를 미워한다고 탄핵을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하였다. 상은 명하여 이경중에게 벼슬을 주고 그를 탄핵한 대간(臺諫)에게 죄를 주어, 정인홍이 파면을 당했다. 그러자 정인홍은 서애를 뼈에 사무치게 원망하였는데, 그가 신임을 받게 되자, 유서애의 무리를 배척하되, 어진 사람이거나 아니거나 가리지 않고 오직 배척함이 혹시 가벼울까 두려워하였다. 그 화가 점점 퍼져서 지금에 이르러 더욱 깊었으니, 어찌 국가의 깊은 근심거리가 아니겠는가?

 

李斯文敬中爲銓郞。排抑鄭汝立不擬華顯。鄭政丞仁弘時爲掌令。劾以蔽賢。李竟罷。己丑獄起。與鄭通書者。皆被究。柳西厓嘗秉東銓。白公惟讓以書薦汝立於西厓。西厓有答書。故不自安。上疏曰當時汝立負一時重望。孰不爲所欺。知而惡之者惟李某一人而已。至以媢疾被彈。上命贈敬中爵。而罪彈論臺諫。仁弘坐罷。遂怨西厓入骨。及其遭遇。排斥柳黨。勿論賢否。惟恐或輕。其禍展轉至今愈深。豈非國家之憂也。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죽고 나자, 명종(明宗)은 윤원형(尹元衡)을 죽이고자 하였고, 조정의 논의도 또한 흉흉(洶洶)하였다. 그러나 상의 뜻을 헤아릴 수 없어서 또한 드러내 말하여 공격하는 이가 없었다. 상이 이 광경을 보고, 하루는 강연(講筵)에서 한 문제(漢文帝)가 외숙인 박소(薄昭)를 벤 일에 대하여 그 시비를 물었다. 여러 신하들은 비로소 상의 뜻을 알고, 드디어 그가 정권을 멋대로 하여 나라를 그르친 죄를 논핵하였다. 그리하여 윤원형은 성문 밖으로 내쫓기어 독약을 마시고 죽었다.

 

文定旣薨。明廟欲誅尹元衡。而朝議亦洶洶。未測上意亦無誦言攻之者。上見之。一日於講筵。問漢文誅薄昭是非。羣臣始知天意。遂論其專權誤國之罪。黜之門外飮藥死。

 

윤원형이 상처(喪妻)한 뒤에, 그의 총애하는 첩으로 계실(繼室)을 삼고 부인을 봉했는데, 조정 재신으로서 이익만을 탐내고 부끄러움이 없는 자들이 그와 더불어 혼인을 맺었다. 윤원형이 패망하자 첩도 독약을 먹고 죽었는데, 명하여 그를 천인(賤人)으로 되돌렸다. 을사의 난에 윤임(尹任)이 ‘종사를 위태롭게 했다’는 죄목으로 사형을 당하였다. 그러나 윤임의 아비 윤여필(尹汝弼)은 비록 벼슬만은 빼앗았지만 그의 봉록은 죽을 때까지 주도록 명령하였으며, 인성왕후(仁聖王后)의 옥체에는 하등의 영향이 끼치지 않았으니, 이것이야말로 명묘(明廟)의 지극한 덕인 것이다.

 

尹元衡喪其室。繼室以其寵妾封夫人。朝宰之嗜利無恥。皆與之婚嫁。元衡敗。妾亦飮藥死。命還其賤。

乙巳之亂。尹任以謀危宗社誅。而任之父汝弼。雖褫爵名。命給其祿以終身。仁聖王后玉度不玷。斯固明廟之至德也。

 

원공 천석(元公天錫)은 원주(原州) 사람으로 문장에 능하고 절조가 있었다. 세상의 어지러운 때를 만나 숨어 살면서 벼슬하지 않고 글을 지어 자신의 생각을 나타내었다. 그가 혁제간(革除間)의 일을 쓴 것이 미묘하고 완곡하여 사필(史筆)의 바른 법을 얻었다. 자손이 그의 저서를 대대로 비밀히 간직하고 남에게 보이지 않았는데, 유계(遺戒)가 있어서라고 한다. 금년 12월에 나는 부형을 따라 임진의 병화를 피하여 치악산(雉岳山) 대승암(大乘庵)으로 갔는데, 사문(斯文) 원경명(元警鳴)도 거기에 와서 있었으니, 바로 원공의 후손이었다. 때로 그 유고(遺稿)를 내놓아서, 나도 일찍이 그 일단을 대략 엿볼 수 있었는데, 상세히 보지는 못하였다. 다만 그가 우(禑)ㆍ창(昌)의 일을 기록하기를, ‘전왕(前王)의 부자(父子)를 신돈(辛旽)의 자손이라고 하였다[以前王父子爲辛旽子孫]’고 하였다. 지금 뒤미쳐 생각하니 ‘라고 하였다’[以爲]라는 두 글자가 말 밖에 깊은 뜻이 있었다.

원공(元公)이 권양촌(權陽村)을 두고 읊은 절구(絶句) 하나가 있는데, 한 구는 기억하지 못하겠다.

 

각상에서 몸을 던진 양웅은 《태현경》을 초하였다 / 投閣揚雄草太玄

요사이 양촌이 의리를 말하누나 / 近有陽村談義理

세상 어느 때인들 어진 이가 나지 않으랴 / 世間何代不生賢

하였으니, 이 시는 양촌의 심사를 그려냈다고 말할 수 있겠다.

 

元公天錫原州人。能文章有節操。遭世亂隱居不仕。著書以自見。其書革除間事微婉得史法。子孫世秘藏不以示人。有遺戒云。今年十二。隨父兄避壬辰兵于雉岳山之大乘庵。元斯文警鳴亦在焉。卽公之後也。時出其藁。余嘗少畧窺一班。而不能細也。其記禑昌事曰。以前王父子。爲辛吨子孫云云。今追思之以爲二字。有深意在於言表。

元公有咏陽村一絶。一句則記不得。曰投閣揚雄草太玄。近有陽村談義理。世間何代不生賢。可謂畫出陽村心事。

 

이율곡(李栗谷)이 졸한 지 한 해가 넘었는데도 박근원(朴謹元)ㆍ송응개(宋應漑)ㆍ허봉(許篈)은 오히려 적소(謫所)에 있었다. 을유년 6월 조강(朝講)이 끝나자, 영상 노수신(盧守愼)이 말하기를,

 

“세 신하가 귀양갔을 때에 그를 아는 사람이나 알지 못하는 사람이나, 그를 사랑하는 사람이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나 다 지나친 처사라고 하였습니다. 뇌성 벽력도 밤새도록 계속하지는 않사오니, 세 신하를 관대하게 용서하시기 원하옵니다. 만약 세 신하가 혹시라도 상로병(霜露病)에라도 걸린다면 후회됨이 있을 것이옵니다.”

 

하였다. 상이 대사헌 구봉령(具鳳齡)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세 신하가 이이(李珥)를 거간(巨奸)이라고 하는데, 이가 과연 거간이오? 바른대로 말하오.”

하니, 대답하기를,

 

“이이가 비록 간사하지는 않사오나 본래 경솔한 사람입니다. 스스로 자신의 의견만을 옳다 하고 남의 말을 듣지 않으니, 본심은 비록 나라를 그르치려고 하지 않더라도 그로 하여금 나라를 다스리게 했다면 결국은 그르치는 데 이르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문장은 있었습니다.”

 

고 하였다. 그러자 노수신은 말하기를,

 

“이이는 남이 자기에게 아첨하는 것을 좋아하였고 문장에는 또한 힘을 다하지 않았는데, 다만 대책(對策)에 있어서는 이어(俚語)를 섞어가면서 넓고 커서 다함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얼마 있다가 세 귀양간 사람은 다 사면되었다. 율곡이 선조(宣祖)와 군신간으로 만난 것은 천 년에 한 번 있을 만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李栗谷卒逾年。而朴謹元宋應漑許篈猶在謫。乙酉六月朝講旣畢。領相盧守愼曰。三臣旣竄。知與不知愛與不愛皆以爲過當。雷霆無竟夕之怒。願賜寬宥。三臣若或罹霜露。則恐有後悔。上顧謂大司憲具鳳齡曰。三臣言珥巨奸。珥果巨奸乎。其直言之。對曰珥雖不爲奸。固輕率人也。自是己見。不聽人言。本心雖不誤國。使之爲國。則終至於誤矣。文章則有之。守愼曰珥喜人佞己。至於文章亦不致力。但於對策雜以俚語。浩汗不竭矣。未久三竄皆蒙赦。

栗谷於宣廟。君臣際會亦可謂千載一時。

 

계미년(1583, 선조 16)에 이호(尼胡)의 변란이 일어났을 때에 병조 판서로서 자신의 말이면 상이 다 들으며 자신의 계책이면 상이 다 시행한다고 여겨, 사세가 창졸간에 있었으므로 일을 이룩하여 밝힌 것이 많았으니, 말을 바치고 부방(赴防)을 면제하는 등의 일까지 다 먼저 시행하고 사후에 아뢰었다. 그러자 조정의 논의가 일어나 그가 국정을 맘대로 한다고 삼사(三司)가 함께 공격하였는데, 전한(典翰) 허봉(許篈)ㆍ대사간 송응개(宋應漑)ㆍ도승지 박근원(朴謹元) 등의 공격이 더욱 심했다. 상은 매우 성내어 박근원은 강계(江界)로, 허봉은 갑산(甲山)으로, 송응개는 회령(會寧)으로 귀양보내도록 명하였다. 이에 조정의 논의는 둘로 나뉘어지고, 성균관ㆍ사학(四學)의 유생에 이르기까지 다 패를 나누어 소(疏)를 올려 서로 옳다 그르다 하였는데, 박사 한연(韓戭)도 또한 그르다는 논의를 하였기 때문에 경흥(慶興)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癸未尼胡之變。爲兵判。自以言聽計行。而事在蒼卒。多有建明。至於納馬免防等事。皆先行後聞。朝論鬨然以爲專擅。三司共攻。而典翰許篈。大司諫宋應漑。都承旨朴謹元等。攻之尤力。上大怒。命竄朴謹元于江界。許篈于甲山。宋應漑于會寧。於是朝論携貳。至於館學皆分明呈疏互相是非。博士韓戭亦以異議竄于慶興。李夢鶴者。京口賤孼也。落拓無行。爲其父所黜。往來兩湖間。韓絢之爲選鋒將也。隷其軍與絢作亂。宣廟二十九年七月。

 

이몽학(李夢鶴)이란 자는 서울의 천한 서얼인데, 몹시 방자하고 건방져서 그의 아비에게 내쫓기었다. 호서와 호남 사이를 왔다 갔다 하다가 한현(韓絢)이 선봉장이 되자 그의 군대에 예속되어 한현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선조 29년 7월에 이몽학이 먼저 홍산(鴻山)에서 군사를 일으켜 그 고을의 수령 윤영현(尹英賢)을 사로잡고 또 임천 군수(林川郡守) 박진국(朴振國)을 사로잡으니, 인심이 무너지고 흩어져서 감히 항거하는 자가 없었다. 잇따라 6ㆍ7개의 고을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한현은 일이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알고 호응하지 않았다. 이몽학이 진군하여 홍주(洪州)를 핍박하니, 목사 홍가신(洪可臣)은 일이 뜻밖에 일어났으므로 손을 써볼 계책이 없이 다만 성문을 닫을 뿐이었다. 도원수의 종사관 신경행(辛景行)이 마침 왔다가 격문(檄文)을 보내어 수사 최호(崔湖)를 불렀다. 최호가 군대를 거느리고 성안으로 들어오니, 인심이 비로소 진정되었다. 무장 박명현(朴命賢)은 날래고 꾀가 있는 사람인데, 상주노릇을 하느라고 고을 안에 있었다. 홍가신이 부르자, 박명현은 즉시 융복(戎服)을 갖추고 성안으로 들어왔다. 그리하여 성의 수비는 더욱 견고하게 되었다. 이몽학이 처음 군사를 일으킬 때에 그의 무리들에게 속여 말하기를,

 

“김덕령(金德齡)이 나와 약속이 있고, 도원수ㆍ병사ㆍ수사도 다 내통되어 있으므로 반드시 호응할 것이다.”

 

하여, 여러 무리들이 그렇게 여겼는데, 홍주에 군사를 내어 주둔하게 되었을 때, 여러 무리들은 수사가 군사를 거느리고 성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비로소 그가 속였음을 알았다. 그리하여 군사의 사기가 떨어져서 밤중도 안 되어 반군(叛軍)은 무너지고 말았다. 윤영현이 뛰어나와 성 아래에 이르러 부르짖기를,

 

“적병이 무너져 흩어졌으니 나와서 뒤쫓아 치소서.”

 

하였으나, 성중에서는 믿지 않고 명하여 윤영현을 묶어서 잡아 오게 하였다. 그러나 새벽이 되어서 살펴보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성중은 비로소 후회하고 군사를 내보내어 추격해서 많은 포로와 수급(首級)을 얻었다. 그의 부하 임억명(林億明)이란 자가 이몽학의 머리를 베어 바치었다. 한현도 일이 발각되어 베임을 당하였다.

 

夢鶴先起兵于鴻山。擄其倅尹英賢。又擄林川郡守朴振國。人心瓦解無敢拒者。連陷六七邑。韓絢知事不成不應。夢鶴進逼洪州。牧使洪可臣事出不意。束手無策。但閉城而已。都元帥從事官辛景行適至。檄召水使崔湖。湖領兵入城。人心始定。武將朴命賢驍勇有謀。守制在州境。可臣召之。命賢卽戎服入城。城守益堅。夢鶴之初起也。誑其衆曰金德齡。與我有約。都元帥兵水使亦皆通謀必響應。衆爲然。及頓兵洪州。衆見水使領兵入城。始知其誣。兵氣沮喪。夜未半軍潰。英賢跳出至城下呼曰賊兵潰散。願出逐。城中不信。命縛英賢以入。曉而視之。則無所見矣。城中始悔。縱兵追擊多俘馘。其下林億明者。斬夢鶴以獻。韓絢亦事覺而誅。

 

김덕령(金德齡)이란 사람은 광주(光州)의 교생(校生)인데, 용맹과 힘이 있었으며 스스로 둔갑술을 안다고 하였다. 이귀(李貴)가 그를 믿고 무군사(撫軍司)에 추천하기를,

 

“용과 범을 쫓아 잡고 공중을 날아다니며, 지혜는 제갈공명(諸葛孔明) 같고 용맹은 관우(關羽)보다 더하다.”

 

하니, 세자가 불러서 보고 장려하여 익호장군(翼虎將軍)을 임명하였는데, 선묘가 그 칭호를 초승장군(超乘將軍)이라고 고쳤다. 이때 온 나라가 두려워 떨며 그를 신장(神將)이라고 하였으며, 김덕령 자신도 또한 그렇게 스스로 믿어 사양하지 않았다. 그러나 실상은 술에 취하여 기세를 부리고 법을 어겨 쓸 만한 사람이 못되어, 적진과 3년을 마주 대했지만 한 치의 공도 없었다. 마침내 헛이름 때문에 이몽학이 무리에게 이끌려 이용되었다가 고문을 받고 죽었으니, 이 또한 스스로 화를 부른 것이다.

 

적당이 김덕령의 이름을 인용하자, 상은 매우 놀라 즉시 좌우를 물리치고 여러 대신들과 의논하기를,

“김덕령은 용맹이 삼군(三軍)에 으뜸이고 또 친히 거느린 군사가 있으니, 만일 포박에 응하지 않는다면 어찌할 것인가?”

 

하니, 유서애(柳西厓)가 대답하기를,

 

“반드시 명령을 감히 거역하지 못할 것입니다. 서성(徐渻)이 새로 영남에서 왔으므로 반드시 사정을 알 것이오니, 청컨대 그에게 물어보소서.”

 

하였다. 서성이 대답하기를,

 

“신이 오랫동안 남쪽 고을에 있으면서 그의 하는 바를 보니, 망령되고 범상한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용맹과 힘이 있다고 하지만 또한 남보다 썩 뛰어난 것은 아니오며, 크게 민심을 잃어서 친히 거느린 군사들도 다 다른 마음을 품고 있으므로 비록 명령을 거역하고자 하여도 또한 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네가 잡아올 수 있겠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만약 도망해 숨었다면 신이 잡아올 수 없으나 그렇지 않다면 그를 체포하는 것은 손바닥을 뒤집듯 쉽습니다.”

 

하였다. 상이 위태롭게 여기니, 서애가 아뢰기를,

 

“서성이 어찌 감히 성상의 위엄있는 지척의 거리에서 감당할 수 없는 일을 큰소리 치겠습니까? 그 말이 꼭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신이 보장하겠습니다.”

 

하였다. 서성이 말하기를,

 

“한명련(韓明璉)이 지금 영남에 있는데, 또한 용감하옵니다. 그를 시켜서 도모하게 하고, 김응서(金應瑞)로서 항복한 왜병(倭兵) 50인을 이끌고 조력하게 한다면 김덕령이 어찌 감히 맞서 버틸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신의 계산으로는, 김덕령이 반드시 손을 모아 포박을 받을 것이므로 반드시 이러한 사태에까지 이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상이 서성에게 명하여 급전(急傳)을 타고 가서 잡아오게 하였다. 서성이 가다가 전주(全州)에 이르니, 도원수 권율(權慄)이 이미 김덕령을 진주(晉州)에 감금하고 있었다.

권율도 그가 명령에 거역할 것을 염려하여 은밀히 성윤문(成潤文)을 시켜서 도모하게 하였다. 성윤문이 은밀히 김덕령에게 군무(軍務)를 의논하자고 청하니, 김덕령이 알아차리지 못하고 단기(單騎)로 왔다. 좌정한 뒤에 성윤문이 그의 손을 잡으며 말하기를,

 

“조정에서 자네를 잡으라고 명하였네.”

 

하니, 김덕령이 즉시 꿇어앉아 말하기를,

 

“상의 명령이 있었다면 어찌 이렇게까지 하오? 원컨대 나의 손을 뒤로 돌려 묶으시오.”

하였다. 성윤문은 그의 원통함을 가엾게 여겨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고, 다만 그의 두 손에 수갑만을 채워서 옥(獄)으로 보냈다. 서성은 김덕령이 이미 갇혔다는 말을 듣고, 조정에 장계를 올리기를,

 

“권율이 김덕령에게 이몽학을 치게 했는데, 김덕령이 4일 동안 머뭇거리며 성패를 관망하므로 가두었습니다.”

 

하였다. 그 여덟 글자가 드디어 김덕령의 단안(斷案)이 되어 사죄를 면치 못하게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서성의 잘못이라고 했다.

 

金德齡者。光州校生也。有勇力自稱遁甲。李貴信之薦于撫軍司曰。解捕逐龍虎。飛走空中。智如孔明勇過關羽。世子召見奬勵。拜翼虎將軍。宣廟命改其號曰超乘將軍。於是一國聳動以爲神將。德齡亦自信不讓。其實使酒枉法不可用也。對賊壘三年無寸功。卒以虛名爲夢鶴之黨所引考死。亦自取之禍也。

賊黨引德齡也。上大驚。卽辟左右與諸大臣議曰德齡勇冠三軍。且有親兵。如不就捕則奈何。柳西厓對曰必不敢拒命。徐渻新自嶺南來。必知事情。請問之。渻對曰臣久在南州。視其所爲。妄庸人也。雖有勇力亦非絶人。大失物情。親兵皆懷異心。雖欲拒命亦不能也。上曰爾能捕之耶。對曰如使逃匿。臣不能捕。不然捕之易如反掌也。上危之。西厓曰渻何敢於天威咫尺之下。大言無當乎。臣保其言可必用也。渻曰韓明璉方在嶺南。亦驍果。使明璉圖之。而以金應瑞降倭五十人助之。德齡何敢枝梧。以臣計之。德齡必拱手就擒。必不至此。於是上命渻乘急傳往捕之。行到全州。則都元帥權慄已囚于晉州矣。慄亦慮其拒命。密使成潤文圖之。潤文密請德齡議軍務。德齡不覺。以單騎來。坐旣定。潤文就執其手曰。朝命捕君。德齡卽跪曰上有命。何至如是願反接我。潤文哀其冤不忍。但鎻其兩手送于獄。渻聞德齡已就囚。狀聞于朝曰權慄使德齡討夢鶴。則四日遲留觀望成敗。故囚之。其八字遂爲德齡之斷案而不得免。人皆咎之。

 

평수길(平秀吉)이란 자는 일본 사람의 종인데, 산에서 땔나무를 하다가 관백(關白)을 길에서 만났다. 좌우에 있던 호위병들이 죽이고자 하니, 관백이 그의 얼굴 모양을 기이하게 여겨서 놓아주고 죽이지 않았다. 관백에게 총행(寵幸)을 얻어 장수가 되었는데, 문득 공로가 있었다. 드디어 정권을 잡고 그의 주인을 죽인 다음 스스로 관백이 되었다. 싸우면 잘 이기고 공격하면 잘 빼앗았다. 마침내 여러 나라를 통합하여 하나로 만들었으며, 나라는 부유하고 군대는 강성하였다. 드디어 발호(跋扈)의 계책을 내어 우리 나라에 전쟁을 일으키고자 하였으나 구실로 삼을 단서가 없으므로, 장차 중국에 침입하겠다 칭탁하고 우리 나라에게 길을 빌려달라고 하였으나, 우리 선조(宣祖)는 대의(大義)로써 그 요구를 거절하였다.

수길이 그것을 전쟁의 꼬투리로 잡아, 임진년에 그의 장수 평수가(平秀家) 등을 보내어 군사 약 20만 명을 거느리고 4월 13일에 바다를 건너왔다. 부산ㆍ동래를 함락시키고 첨사(僉使) 정발(鄭撥)과 수사(水使) 박홍(朴泓)을 죽였다. 부사(府使) 송상현(宋象賢)은 조복(朝服)을 갖추어 입은 채 굴하지 않고 죽었다.

그때는 2백 년 동안 나라가 태평하여 백성들이 싸움을 알지 못하였으므로, 소문만 들으면 무너지고 흩어져서 감히 그들의 칼날에 맞서지 못하였다. 적이 길게 달려 무인지경에까지 이르니,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은 상주(尙州)에서 패하여 겨우 몸만 빠져나와 죽음을 면하였으며, 신립(申砬)은 충주(忠州)에서 패하여 전군이 몰살하였다. 상이 여러 신하들을 모아 의논하니, 이산해(李山海)가 제일 먼저 서쪽으로 피난할 계책을 건의하여 상이 그대로 좇았다. 유홍(兪泓)이 대궐에 나아가 극력 간쟁하였으나, 상은 듣지 않았다. 사람들이 다 서울을 지킬 수 없음을 알았으므로 유홍도 먼저 자기집 사람들은 피난가도록 시켜놓고, 겉으로 이런 말을 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의 간사함을 많이 미워하였다. 이양원(李陽元)을 검찰사로 김명원(金命元)을 도원수로 삼아 경성을 지키게 하였다.

30일에 상이 비를 무릅쓰고 서쪽으로 거둥하는데, 중궁 이하가 다 말을 타니, 보는 사람들이 얼굴을 가리고 울었다. 모든 관원들은 새떼가 흩어지듯 도망가고 호종(扈從)하는 사람은 겨우 1백여 명 뿐이었다.

5월 초 3일에 개성부(開城府)에 이르러, 이산해를 나라를 그르쳤다는 죄로 평해(平海)에 귀양보내게 되니, 상이 유성룡(柳成龍)도 아울러 내쫓으라고 명하였다. 조정의 논의는 그렇게 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하였으나, 상도 또한 듣지 않았다. 아마 상이 이산해의 죄를 덜어주고자 하여 일부러 유성룡을 내쳐서 그 죄를 나누게 한 것으로써, 조정의 논의를 누르기 위한 처사였을 것이다.

이날 적이 서울에 들어왔는데, 서울의 백성들은 창고의 물품을 훔치고자 하여 먼저 궁궐을 불태워 버렸다.

거가(車駕)가 평양에 거둥하였다가, 적병이 뒤에 있다는 말을 듣고 더 가서 의주(義州)에 머물렀다.

6월 1일에 적이 우리 나라에 침입하고 대가가 서쪽으로 피난하였다는 사실을 곧 중국의 병부 상서 석성(石星)에게 호소하였다. 석성이 황제에게 말하여, 황제는 요동 총병(遼東摠兵) 조승훈(祖承訓)과 유격장군(遊擊將軍) 사유(史儒) 등으로 하여금 군사 7천을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게 하고, 은 3만 냥을 지정하여 우리의 행조(行朝)에 내려주었다.

8일에 조승훈이 진군하여 평양을 포위하였다. 성은 이미 함락하였으나, 사유가 화살에 맞아 죽어 드디어 크게 패하고 돌아갔다. 황제가 다시 영하 도독(寧夏都督) 이여송(李如松)을 보내어 군사 4만을 거느리고 치게 하였다. 이여매(李如梅)ㆍ장세작(張世爵)ㆍ양원(楊元)의 군사도 다 여기에 예속시켜 섣달에 압록강을 건너왔다.

계사년 정월에 평양을 포위하여 이기고, 길게 군사를 몰아 벽제(碧蹄)에 이르렀을 때에, 적을 얕보고 방비를 하지 않았다가 적이 갑자기 이르니, 이여송이 크게 패하여 겨우 몸만 빠져 나왔다. 그러나 적은 대적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드디어 군대를 거두어 퇴각하였다.

4월에 이여송이 서울에 들어왔다. 군사를 파견하여 남쪽으로 적을 추격하니, 적은 동래(東萊)ㆍ울산(蔚山)ㆍ사천(泗川) 등지에 머물러 보루를 쌓고 스스로 굳게 지키면서 나오지 않았다.

8월에 거가(車駕)가 해주(海州)로 돌아와서 먼저 유성룡과 여러 관원들을 보내고 9월에 환도하여 잿더미가 되어버린 종묘 자리에서 오래도록 통곡하였다. 이해 겨울에 이여송이 군사를 인솔하고 돌아갔다.

임진란에 적병이 가득 차서 사람을 죽이고 무찌른 것이 끝이 없었다. 심산 궁곡에서도 또한 모면할 수 없어서 한 치의 편안한 땅이 없었는데, 목사 김공 시민(金公時敏)은 진주(晉州)를 굳게 지키면서 여러 번 적병을 쳐서 우뚝히 강회(江淮)의 보장(保障)이 되자, 호남ㆍ호서의 연안 일대가 그를 힘입어 완전하였고, 국가가 중흥할 때에 병량(兵糧)과 기계(器械)를 모두 양호(兩湖)에서 마련해 왔다고 한다.

임진년에 각도에 명하여 근왕병(勤王兵)을 일으키게 하였다. 호남의 관찰사 이광(李洸)이 군사 8만을 거느리고 공주(公州)에 도착하여, 상이 서도로 피난하였다는 말을 듣고 군중(軍中)에 명을 내리기를,

 

“대가(大駕)가 서도로 나가서 존몰(存沒)을 알 수 없으니, 이미 어떻게 해 볼 방법이 없다.”

 

하고 드디어 군사들을 이끌고 물러가 자신의 안전만을 꾀하더니, 행궁(行宮)이 무사하고 의병이 사방에서 일어난다는 말을 듣고 스스로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였다. 드디어 호서의 관찰사 윤국형(尹國馨)과 함께 군사 12만 명을 연합하여 나아가 용인(龍仁)에 주둔하였는데, 적병 10여 기를 보고는 싸우지 않고 무너져, 사졸들이 서로 짓밟아 죽고, 살아서 돌아간 자가 몇 사람 없었으며, 군량과 기계는 다 적에게 빼앗겼다. 일이 조정에 알려지니, 명하여 이광을 귀양보내고 권율(權慄)로서 대신하게했다. 그리고 윤국형도 또한 같은 혐의로 파면되었다.

권율이 명나라 군사가 압록강을 건너왔다는 말을 듣고 호남의 군사를 거느리고 이에 호응하여 나아가 행주(幸州)에 진을 치고 성원(聲援)하니, 적장 평수가(平秀家)가 서울에서 전 병력을 이끌고 와서 포위하였다. 권율이 죽음을 각오하고 싸웠다. 적은 온종일 크게 싸웠으나 죽은 자와 부상한 자만이 산처럼 쌓이다가, 해질 무렵에 평수가가 유시(流矢)에 맞고, 드디어 군사를 거두어 달아났는데, 행주에서 서울까지 쓰러져 죽은 시체가 줄을 이었다.

그리하여 임진 전공(壬辰戰功)의 제일이 되었고 차례를 뛰어 넘어 도원수를 제수받았다.

지사(知事) 이정암(李廷馣)이 임진년에 이조 참의로서 난리를 피하여 연안(延安)에 이르니, 부사(府使) 이모(李某)는 성을 버리고 달아났으며 적장 장정(長政)은 3천 명의 병력으로써 갑자기 쳐들어 왔다. 공이 일찍이 이곳의 부사를 지냈는데, 남긴 사랑이 백성들에게 있어서 아전들과 백성들이 공이 왔다는 말을 듣고 모두가 사수하기를 원하였다. 공이 드디어 부서(部署)와 항오(行伍)를 짜고 성을 나누어 지키기로 하였다. 돌쇠뇌포를 벌려 놓고 성루(城樓)와 망대(望臺)의 수리를 겨우 마쳤을 때에 적이 포위하였다. 공이 자기의 가속을 공청의 청사에 몰아넣고 그 문을 막은 뒤에 마른 마초(馬草)를 그 곁에 쌓았다. 그리고 성문에 땔나무를 높이 쌓은 다음, 그 위에 앉아서 군중에 명하기를,

 

“적이 만약 성에 올라오면 즉시 불을 놓아라. 나와 나의 가속은 맹세코 적의 칼날에 더럽혀지지 않을 것이다.”

 

하니, 사람들이 다 감격하였다. 이윽고 적이 개미처럼 성벽에 붙어 올라오므로, 공이 천 개의 솥에 뜨거운 물을 끓이게 하여 내리 부었다. 그러자 적은 섶을 짊어지고 진격했다. 공이 불을 묶어서 던지게 하니, 적이 빈 관(棺)을 이고 올라왔다. 공이 돌로써 내리치게 하니, 돌을 던지는 대로 떨어지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는 적이 힘을 다하여 관을 이고 있으므로 조금만 부딪치면 관이 문득 저절로 움직여서 힘을 쓸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크게 싸운 지 사흘 만에 적은 해볼 방법이 없어서 달아났다.

일이 조정에 알려지니 그 공을 논하여 공을 초토사(招討使)로 승진시켰다.

선조 신묘년(1591). 정승 윤승훈(尹承勳)이 강릉 부사(江陵府使)가 되었는데, 흰 개미와 검정 개미가 바다에서 와서 부(府)의 땅에서 싸우다가 언덕처럼 쌓였다. 그때는 바야흐로 왜가 우리의 틈새를 노릴까 걱정하여 드디어 무신을 임용하여 윤공(尹公)을 대신하게 하였다. 다음 해에 왜병이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와서 모든 고을이 다 도륙을 당하였는데, 강릉 일대만이 병화가 조금 덜하였으니, 또한 알 수 없는 이치다.

정유년에 왜적이 전 국력을 경주하여 바다를 건너오니 장차 다시 준동(蠢動)할 징조가 있었다.

선조가 사신을 보내어 명 나라의 조정에 급한 사태를 보고하였다. 황제는 경리(經理) 양호(楊鎬)를 보내어 제독(提督) 마귀(麻貴)ㆍ유정(劉綎)의 군사 10여 만을 거느리고 동정(東征)하게 하고, 도독 진인(陳璘)은 수군을 이끌고 바닷길을 경유하여 나오게 하였다. 그때는 8월이었다.

적이 호남을 경유하여 길게 몰아 진격하는데 그들이 지나는 곳은 잔인하기가 임진년보다도 심하여, 사람을 만나면 죽이고 그 코를 베었으며, 마을을 만나면 불질러서 숲과 나무도 남기지 않았다. 진격하여 남원(南原)을 포위하니, 명나라의 장수 양원(楊元)이 포위를 무너뜨리고 달아났고, 절도사 이복남(李福男)ㆍ부사 임현(任鉉)ㆍ접반사 정기원(鄭期遠)이 다 죽었다.

적이 승세를 몰고 올라와 직산(稷山)의 홍경원(弘慶院)에 이르렀다. 명나라 장수 혜생(嵇生)이 용감한 기병(騎兵) 3천 명으로써 적의 선봉을 쳐서 깨뜨리니, 적이 대적할 수 없음을 알고 군사를 거두어 밤에 길을 영남(嶺南)으로 잡아 달아났다. 이에 호서ㆍ호남의 완전하던 고을들이 다 잔인한 파괴를 당하였다.

적장 평 행장(平行長)은 순천(順天)을 점거하고, 청정(淸正)은 울산을 점거하고, 심안도(沈安都)는 사천(泗川)을 점거하였다. 이해 겨울 12월에 양호(楊鎬)가 마귀(麻貴)의 군대를 거느리고 나아가 청정을 포위하고 그 외성(外城)을 무찌르니, 청정이 물러나 그 내성(內城)을 지켰는데, 땔나무와 식수의 길이 끊어지자, 거짓 항복을 약속하고 명나라 군사의 포위를 약간 늦추게 하였다. 장차 열흘이 되는 동안에 큰비가 와서 적의 군사와 말들이 얼고 굶어서 죽는 자가 많았는데, 사천ㆍ부산의 적이 와서 후원하니, 양호는 앞뒤로 적의 공격을 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군사를 이끌고 물러나왔다.

명나라 조정은 양호를 소환하고 다시 만세덕(萬世德)을 경리(經理)로 보내고 병부 시랑(兵部侍郞) 형개(邢玠)를 보내어 서울에 군문(軍門)을 개설하게 하였다.

무술년에 유정(劉綎)이 나아가 순천을 포위하고 진인(陳璘)은 수군으로써 이에 호응하였다. 마귀는 울산에 주둔하여 신중을 기하고 싸우지 않았으며, 동일원(董一元)은 사천(泗川)에서 크게 패배하였다.

그때 마침 적은 수길(秀吉)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모든 진영을 다 거두어 도로 바다를 건너갔다. 이에 명 나라의 군사도 모두 환군하고 정병 만여 명만 머물러두어 진수하다가 3년 뒤에 철수하였다.

행장(行長)이 달아나는 것을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이 수군으로 추격하여 크게 승리를 거두었는데, 싸움이 한창 무르익었을 때에 이순신이 유탄(流彈)에 맞았다. 편장(褊將) 손문욱(孫文稶)이 그의 죽음을 숨기고 북을 쳐서 싸움을 독려하기를 평상시와 같이 하였다. 명나라 장수 진인은 평소에 이순신의 지략에 감복하여 형제처럼 대우하였는데, 이날 이순신의 배에서 수급(首級)을 서로 다투는 것을 바라보고 깜짝 놀라면서 말하기를,

 

“통제사가 죽었다.”

 

하였다. 좌우의 사람들이 어떻게 아느냐고 하니, 진인은 말하기를,

 

“내가 보니, 통제사는 군율이 매우 엄하였다. 지금 그 배에서 수급을 다투어 문란하니, 이것은 호령이 없기 때문이다.”

 

하였다. 싸움이 이미 끝난 뒤에 물으니, 과연 그러하였다.

명나라에서 왜적을 치자는 논의는 병부 상서(兵部尙書) 석성(石星)에게서 나왔다.

석성이 여러 장수들이 적을 구경만 하고 있어서 적을 섬멸할 수 없음을 보고 있는데, 그 때 마침 변사(辯士) 심유경(沈惟敬)이란 사람이 강화(講和)할 계책을 헌의(獻議)하니, 석성이 옳게 여겼다. 적도 또한 거짓 강화를 청하므로, 석성이 그의 조정에 건의하여 임회후(臨淮侯) 이종성(李宗誠)ㆍ도지휘 양방형(楊邦亨)을 책봉사(冊封使)로 삼아 평수길을 동왕(東王)으로 봉하였다. 이종성 등이 이미 행장(行長)의 진중에 들어가니, 수길은 봉왕(封王)을 받지 않고 꽤 능욕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이종성은 틈을 타서 밤에 달아났다. 적이 군사를 보내어 뒤쫓았으나 잡지 못하고 돌아갔다.

정유년에 왜병이 다시 준동을 하자, 과도관(科道官)은 석성이 강화를 주장하여 나라일을 그르쳤다고 논핵(論劾)하였다. 황제는 매우 성이 나서 석성을 옥에 가두고, 심유경을 거리에서 참형하였다. 석성도 마침내 옥중에서 병들어 죽으니, 사람들은 원통하게 여기는 이가 많았다.

 

平秀吉者。日本人奴也。采薪于山。遇關白于途。左右欲兵之。關白奇其狀貌釋不誅。得幸於關白。以爲將輒有功。遂秉權弑其主。自立爲關白戰克勝攻克取。遂統合諸國爲一。國富兵强。遂生跋扈之計。欲加兵於我。而無其釁。託言將入寇中國。假途於我。我宣廟以大義却之。秀吉執爲兵端。壬辰遣其將平秀家等。勒兵約二十萬。以四月十三日渡海。陷釜山東萊。殺僉使鄭撥及水使朴泓。府使宋象賢朝服不屈死之。時昇平二百年。民不識兵。望風瓦解。無敢嬰其鋒。賊長駈而進如入無人之境。巡邊使李鎰敗于尙州。僅以身免。申砬敗于忠州全軍覆沒。上會羣臣議之。李山海首建西狩之策。上從之。兪泓詣闕極諫。上不從。人皆知京城不可守。泓先令家人避兵。而外爲此言。人多疾其詐。以李陽元爲檢察使。金命元爲都元帥。使守京城。三十日上冒雨西幸。中宮以下皆乘馬。見者掩淚。百官鳥竄。從者僅百餘人。五月初三日到開城府。治山海誤國之罪。竄平海。上命幷黜柳成龍。朝論不可。上亦不從。蓋上欲薄山海之罪。故黜成龍以分其罪。所以抑朝議也。是日賊入京城。京城之民欲盜弊藏者。已先焚宮闕矣。車駕幸平壤。聞賊兵在後。進駐義州。六月初一日賊入國。大駕西幸。卽訴于兵部尙書石星。言于帝。使遼東總兵祖承訓。遊擊將軍史儒等。將兵七千救之。以銀三萬兩付點賜行朝。八日承訓進圍平壤。城旣陷。而史儒中矢死。遂大敗而還。皇帝更遣寧夏都督李如松。將兵四萬以討之。李如梅張世爵楊元兵皆屬。以臘月渡江。癸巳正月圍平壤克之。長驅而進至碧蹄。易賊不設備。賊猝至。如松大敗僅以身免。然賊度不可敵。遂捲兵而退。四月如松入京。遣兵南追。賊留屯于東萊蔚山泗川等地。築壘自固不出。八月。車駕還至海州。先遣柳成龍諸官。九月還都哭廟灰燼中久之。是冬如松引兵還。

壬辰之亂賊兵彌漫。殺戮不可紀極。深山窮谷亦不得免。無一寸乾凈地。而牧使金公時敏。固守晉州屢敗賊兵。屹爲江淮保障。湖南湖西內浦賴以完。國家中興。兵粮器械皆取辦于兩湖云。

壬辰令諸道勤王。湖南方伯李洸。率兵八萬到公州。聞上西狩。令軍中曰大駕西出。不知存沒。已無可爲。遂以軍退措身安地。聞行宮無恙而義兵四起。不自安。遂與湖西方伯尹國馨連兵十二萬。進駐龍仁。見賊十餘騎。不戰而潰。士卒相蹂躪死。還者無幾。軍粮器械。皆沒于賊。事聞命竄洸。而以權慄代之。國馨亦坐罷。

權慄聞天兵渡江。領湖南兵以應之。進屯幸州爲聲援。賊將平秀家自京城悉兵來圍。慄殊死戰。賊大戰終日死傷山積。日將沒。秀家中流矢。遂捲甲而遁。自幸州至京城。僵屍相屬。爲壬辰戰功第一。超授都元帥。

李知事廷馣。壬辰以吏曹參議避兵至延安。府使李某棄城遁。賊將長政以三千兵猝至。公曾爲府使。遺愛在民。吏民聞公至皆願死守。公遂部署行伍。分城而守。列礮具治樓櫓僅畢。而賊圍之。公駈家屬納於公廨。塞其門積蒭其傍。峙薪于城門。而坐其上。令軍中曰賊如登城。卽火之。我與家屬誓不汙賊刃。人皆感激。賊蟻附而登。公命沸湯千鼎以灌之。賊負薪而進。公命束火以投之。賊戴空棺而上。公命以石擊之。無不應手而墜。蓋賊盡其力以戴之。小有所觸。棺輒自動。不能爲力故也。大戰三日賊技窮而遁。事聞論其功。進公招討使。

宣廟辛卯。尹政丞承勳爲江陵府使。有白黑蟻自海而戰于府地。積如丘垤。時方憂倭釁。遂用武臣代尹公。明年倭大擧入寇。郡邑皆被屠滅。而獨江陵一帶兵禍稍歇。亦不可知之理也。

丁酉賊傾國渡海。將有再動之端。宣廟遣使告急於天朝。皇帝遣經理楊鎬。率提督麻貴劉綎兵十餘萬東征。而都督陳璘以舟師。由海道以出。時八月也。賊由湖南長驅而進。所過殘滅甚於壬長。逢人則殺皆取其鼻。遇村則焚不遺林木。進圍南原。天將楊元潰圍而走。節度使李福男。府使任鉉。接伴使鄭期遠皆死之。賊勝乘而上至稷山弘慶院。天將嵇生。以鐵騎三千擊敗前鋒。賊知不可敵。捲甲夜遁。取路嶺南以還。於是兩湖完邑皆被殘破矣。賊將平行長據順天。淸正據蔚山。沈安都據泗川。是冬十二月楊鎬以麻貴兵。進圍淸正克其外城。淸正退守內城。樵汲道絶。詐約降以緩師。將十日大雨士馬凍餒多死。泗川釜山之賊來援。鎬恐腹背受敵。引兵而退。天朝招楊鎬還。而更遣萬世德經理。又遣兵部侍郞郉玠。開軍門于京城。戊戌歲劉綎進圍順天。陳璘以舟師應之。麻貴駐蔚山持重不戰。董一元大敗於泗川。會賊聞秀吉死皆撤壘而還渡海。於是天兵皆班師。而留精兵萬餘以鎭之。三年而罷。

行長之遁也。統制使李舜臣以舟師追之大捷。戰方酣。舜臣中流丸。褊將孫文稢秘其死。擊鼓督戰如常時。天朝陳璘素服舜臣智畧。待爲兄弟。是日望見舜臣船爭首級。大驚曰統制使死矣。左右曰何以知之。璘曰吾觀統制使軍律甚嚴。今其船爭首級而亂。是無號令也。戰旣罷問之。則果然矣。

東征之議出於兵書石星。星見諸將翫寇賊未可殲。而會有辯士沈惟敬者。獻講和之策。星以爲然。賊亦詐請和。星建議。遣臨淮侯李宗誠。都指揮楊邦享爲冊封使。封平秀吉爲東王。宗誠等旣入行長之壘。而秀吉不受封頗侵辱。宗誠乘隙夜遁。賊縱兵追之不及而還。丁酉倭再動。科道官論星主和誤國。帝震怒。下星于獄。斬惟敬于市。星竟瘐死獄中。人多冤之。

慵齋叢話記太祖開國。以趙宰臣胖生長中原。爲使而遣之。高帝引見詰責。胖曰歷代創業之主。類皆應天順人。非獨我國也。微指大明之事。帝曰汝何知中國語。胖曰臣生長中原。曾見陛下於脫脫軍中。帝問以當時之事。胖一一言之。帝下榻執其手曰脫脫若在。朕不至此。卿實朕之故人。仍以客禮待之。書朝鮮二字而送之。余嘗考高皇帝少喪父母。投皇覺寺。及郭子興等起。高皇帝隷其軍。至子興據滁稱王。然後脫脫始伐張士誠。安有在脫脫軍中之理。設使高皇帝浮遊無定。或在其軍中。乃是微末行伍中人也。胖安得物色而知之。是不過齊東野人之語。而叢話信筆書之何歟。余視徐四佳所撰筆苑雜記。太平閑話等書。其記國家之事。必鄭重而書之。未有扺牾不合如此者。是知慵齋雖號博洽。不及四佳公遠矣。

 

《용재총화(慵齋叢話)》에 이런 기록이 있다. 태조(太祖)가 나라를 세우고 재신(宰臣) 조반(趙胖)을 중원에서 생장하였다고 하여 사신으로 삼아 중국에 보내니, 고제(高帝)가 인견하고 태조의 건국한 일을 힐책하였다. 조반이 말하기를,

 

“역대의 왕업을 창건한 임금은 거의 다 천명에 응하고 인심에 순종하였으며 홀로 우리 나라만은 아닙니다.”

 

하고, 넌지시 명나라의 일을 지적하니, 황제는 이르기를,

 

“네가 어떻게 중국말을 아느냐?”

 

하였다. 조반이 말하기를,

 

“신이 중원에서 생장하였습니다. 일찍이 폐하를 탈탈(脫脫 원나라 말기의 승상)의 군중에서 뵈었습니다.”

하니, 황제가 당시의 일을 물었다. 조반이 일일이 말하니, 황제는 자리에서 내려와 그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탈탈이 만일 있었다면 짐이 이렇게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경은 실로 짐의 옛 친구이다.”

 

하고, 이어 빈객을 대하는 예절로써 대우하고 ‘조선(朝鮮)’이라는 두 글자를 써서 보내었다는 것이다.

내가 일찍이 고증해 보니, 명나라의 고황제가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황각사(皇覺寺)에 붙여 있다가, 곽자흥(郭子興) 등이 일어났을 때 고황제는 그의 군에 예속되어 있었고, 곽자흥이 저(滁) 땅에 웅거하여 왕이라고 일컬은 뒤에 이르러 탈탈(脫脫)이 처음으로 장사성(張士誠)을 쳤다. 그런데 어떻게 고황제가 탈탈의 군중에 있었을 리가 있겠는가? 설령 고황제가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다가 혹시 그의 군중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다만 미미한 항오(行伍) 속에 있는 사람이었을 것이니, 조반이 어떻게 물색해 낼 수가 있겠는가? 이것은 다 제나라 동쪽 야인(野人)의 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용재총화》에서 붓 가는 대로 써놓았으니 어찌된 일인가? 내가 서사가(徐四佳)가 지은 《필원잡기(筆苑雜記)》ㆍ《태평한화(太平閒話)》등의 글을 보니, 그 국가의 일을 기록하는데는 반드시 정중하게 써서 서로 어긋나고 맞지 않음이 이와 같은 것은 없었다. 이것으로 용재(慵齋)가 비록 널리 배웠다고는 하지만, 사가공(四佳公)에게 훨씬 미치지 못하다는 것을 알겠다.

 

慵齋叢話記太祖開國。以趙宰臣胖生長中原。爲使而遣之。高帝引見詰責。胖曰歷代創業之主。類皆應天順人。非獨我國也。微指大明之事。帝曰汝何知中國語。胖曰臣生長中原。曾見陛下於脫脫軍中。帝問以當時之事。胖一一言之。帝下榻執其手曰脫脫若在。朕不至此。卿實朕之故人。仍以客禮待之。書朝鮮二字而送之。余嘗考高皇帝少喪父母。投皇覺寺。及郭子興等起。高皇帝隷其軍。至子興據滁稱王。然後脫脫始伐張士誠。安有在脫脫軍中之理。設使高皇帝浮遊無定。或在其軍中。乃是微末行伍中人也。胖安得物色而知之。是不過齊東野人之語。而叢話信筆書之何歟。余視徐四佳所撰筆苑雜記。太平閑話等書。其記國家之事。必鄭重而書之。未有扺牾不合如此者。是知慵齋雖號博洽。不及四佳公遠矣。

 

《용재총화》에 또 이런 기록이 있다. 태조(太祖)가 시중(侍中)이 되었을 때에 일찍이 글 한 연을 짓기를,

석자의 칼머리로 사직을 평안히 한다 / 三尺劍頭安社稷

라고 하니, 한때의 문사들이 다 대구를 맞추지 못하였는데, 철성(鐵城) 최영(崔瑩)이 곧 맞추기를,

한 가지 채찍으로 건곤을 정한다 / 一條鞭末定乾坤

하니, 사람들이 다 탄복하였다는 것이다.

 

내가 일찍이 상고하여 보니, 태조가 시중이 된 것은 위화도 회군(威化島回軍)의 뒤였고, 최영이 죽은 것은 바로 위화도 회군이 있던 때였으니, 어떻게 그들이 수창(酬唱)할 수가 있었겠는가? 설혹 이러한 일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마땅히 태조가 시중(侍中)이 되기 전에 있어야 할 것이다.

 

叢話又記太祖爲侍中。嘗占一聯云。三尺劍頭安社稷。一時文士皆未對。崔鐵城瑩遽曰一條鞭末定乾坤。人皆歎服。余嘗考太祖之爲侍中。在威化回軍之後。而瑩之死正在回軍之時。安有酬唱之理。設有此事。當在太祖未爲侍中之前矣。

 

양녕대군 제(讓寧大君禔)가 세자로 있을 때에, 태종(太宗)의 뜻이 세종(世宗)에게 있는 것을 알고 곧 거짓 미치광이가 되어 사양하니, 태종이 드디어 그를 폐하고 세종을 세워 왕위를 전하였다. 양녕이 능히 재능을 숨기고 시세의 변천에 따라서 행동을 하므로 내외ㆍ상하에게 모두 환심을 샀으며, 세종도 또한 양녕을 존경하고 사랑하여 매양 금중(禁中)에 맞아들여서 술을 마시며 서로 즐기기를 거의 없는 날이 없었다. 그리고 여러 번 연회(宴會)의 음식을 걷어서 그에게 주곤 하였다.

양녕이 사냥을 좋아했는데, 세종이 여러 번 수레를 타고 성밖에 나가서 맞아 형제간의 지극한 정이 틈이 없었다. 광묘(光廟)가 즉위한 뒤에 왕자(王子)ㆍ대신(大臣) 등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당하였으나, 양녕은 지혜로써 스스로 보전할 수 있었으며 광묘(光廟)도 또 높이 예우하고 혐의나 간극이 없었다. 사람들은 그가 임금의 지위를 양보하여 어진 이에게 미룬 것을 어려운 일이라고 하지 않고, 능히 처음이나 끝이나 안전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을 더욱 어려운 일이라고 한다.

양녕은 소년 시절부터 문장에 능숙하였다. 그러나 세종이 성인의 덕이 있는 것을 보고 겉으로 글을 모르는 것처럼 하였으며, 미치광이가 되어 스스로 방자하니, 비록 태종이라도 그가 글을 잘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만년에 중의 시축(詩軸)에 시를 쓰기를,

 

산 노을로 아침에 밥을 짓고 / 山霞朝作飯

여라(女蘿)에 걸린 달로 밤의 등불을 삼는다 / 蘿月夜爲燈

홀로 외로운 바위 앞에 자니 / 獨宿孤巖下

오직 한 층의 탑이 있구나 / 惟存塔一層

 

라고 하였으니, 비록 문인이라고 불리는 이라도 반드시 이보다 멀리 뛰어나지는 못할 것이다.

 

讓寧大君禔爲世子。知太宗意在世宗。卽陽狂以讓之。太宗遂廢之。而立世宗卽傳位。讓寧能隨時韜晦浮沈取容。內外上下無不得其歡心。世宗亦尊愛讓寧。每迎入禁中。置酒相樂殆無虛日。屢撤宴具以賜之。讓寧喜獵。世宗屢命駕出迎于城外。至情無間。光廟卽位。王子大臣多被戮滅。而讓寧能以智自全。光廟亦尊禮無嫌間。人不以讓位推賢爲難。而以能全終始爲尤難也。

讓寧自少能文章。而見世宗有聖德。陽若不知書者。猖狂自恣。雖太宗亦不知其有文也。晩歲題僧軸曰山霞朝作飯。蘿月夜爲燈。獨宿孤岩下。惟存塔一層。雖號爲文人者。未必遠過之。

 

우리 나라에 아들 5형제가 다 과거에 급제한 것은 전혀 없다고 할 만큼 겨우 몇 사람뿐이다. 전조(前朝)에는 우홍수(禹洪壽)ㆍ홍부(洪富)ㆍ홍강(洪康)ㆍ홍덕(洪德)ㆍ홍명(洪命)이 있을 뿐이요, 아조(我朝)에 들어와서는, 이예장(李禮長)ㆍ지장(智長)ㆍ성장(誠長)ㆍ효장(孝長)ㆍ서장(恕長)이 있고, 안충후(安忠厚)ㆍ근후(謹厚)ㆍ관후(寬厚)ㆍ인후(仁厚)ㆍ돈후(敦厚)가 있다. 중묘조(中廟朝)에 박홍린(朴洪鱗)이 또한 형제 5인이 급제하였다. 그러나 김안로(金安老)에게 붙었기 때문에 남들이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이극배(李克培)ㆍ극감(克堪)ㆍ극증(克增)ㆍ극균(克均)ㆍ극돈(克墩)도 또 다섯 아들이 등과했다. 선묘조(宣廟朝)에 윤서(尹曙)ㆍ호(晧)ㆍ철(㬚)ㆍ구(昫)ㆍ탁(晫) 등이 4년 사이에 서로 이어 등과하였으나 10년이 못되어 다 요절하고 생존한 자가 없었으니, 어찌 복을 누릴 만하지 못해서였겠는가?

 

我國五子登科絶無而僅有。前朝有禹洪壽洪富洪康洪德洪命而已。入我朝有李禮長智長誠長孝長恕長。安忠厚謹厚寬厚仁厚敦厚。中廟朝有朴洪鱗亦兄弟五人登科。而附麗安老。人不貴之。李克培李克堪克增克均克墩亦五子登科。宣廟朝。尹曙尹晧㬚㫬晫。四年之間相繼登科。而未十年皆夭折無存者。豈福未足以將之歟。

 

조종조(祖宗朝)에는 생원ㆍ진사에 급제하거나 장원한 사람이 매우 많았다. 그리고 장원으로서 뒤에 정승이 된 사람도 대대로 끊어지지 않았다. 이는 《용재총화》를 상고하면 알 수 있다. 근래에는 매우 드물어, 오직 첨지 양응정(梁應鼎)이 생원과 중시(重試)에서 장원하고, 감사 정윤희(丁胤禧)가 급제와 중시에서 다 장원하고, 율곡 이이(李珥)가 생원과 급제에서 장원하고, 판서 강신(姜紳)이 진사와 급제에서 장원하였으며, 장원으로서 뒷날 정승이 된 사람은 오직 노소재(盧蘇齋)ㆍ박사암(朴思菴) 두 사람뿐이었으니, 어찌 인재가 세상과 함께 줄어들었단 말인가? 요즘에는 과거가 공평하지 못하여 인재는 더욱 낮으니, 비록 잇따라 장원에 뽑히더라도 귀하다고 할 만한 것이 못된다.

 

祖宗朝。生員進士及第幷壯元者甚多。而壯元入相亦代不乏人。慵齋叢話可考也。近來甚罕。惟有梁僉知應鼎生員重試壯元。丁監司胤禧及第重試皆壯元。李栗谷珥生員及第壯元。姜判書紳進士及第壯元。而壯元入相者。惟盧蘇齋朴思菴兩人而已。豈人材與世俱下耶。近日科擧不公。人才益卑。雖有連擢壯元。不足貴也。

 

청천(聽天) 심수경(沈守慶)이 젊었을 때에 평양의 기녀를 사랑하여 매우 정을 쏟았는데, 그가 병사(兵使)가 되었을 때에는 기녀는 이미 죽었다. 공이 그 죽음을 슬퍼하는 시를 짓기를,

 

사람이 나서 한 번 죽는 것은 끝내 면할 수 없는 법이니 / 人生一死終難免

원컨대 선연동 안의 혼이 되거라 / 願作嬋娟洞裡魂

하였다. 선연동(嬋娟洞)이란 것은 기녀들의 묘지인 것이다.

 

공이 뒤에 호서(湖西)의 관찰사가 되었을 때의 일이다. 송계(松溪) 권응인(權應仁)은 바로 참판 권응정(權應挺)의 서출 동생이었는데 문장에 능숙하였다. 홍주(洪州)의 기녀에게 지어준 시를 노래 부르기를,

인생이 뜻 얻으면 남북이 없나니 / 人生得意無南北

선연동의 혼일랑 되지 마소 / 莫作嬋娟洞裡魂

 

라고 하였다. 심공(沈公)이 듣고 크게 칭찬하며 누가 지었느냐고 물으니, 기녀는 권응인이라고 대답하였다.

공이 평소에 그의 이름을 들었으므로 맞아들여 서로 본 뒤에 술자리를 벌이고 시를 지었다. 권응인의 시에,

 

백설가(白雪歌) 전해 듣고 지음한 지 오래건만 / 歌傳白雪知音久

청운에 길이 막혀 서로 낯 알기 더디었네 / 路阻靑雲識面遲

라고 하니, 심공이 그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너의 재주가 이같이 높을 줄은 짐작하지 못하였다.”

하고, 드디어 포의(布衣)의 교우(交友)로 정하였다고 한다.

 

沈聽天守慶。少時眄平壤妓頗鍾情。及爲兵使。則妓已死。公作悼亡詩曰。人生一死終難免。願作嬋娟洞裡魂。嬋娟洞者。乃羣妓斜也。公後按湖西。權松溪應仁。乃參判應挺之庶弟也。能文章。作洪州妓歌謠詩曰。人生得意無南北。莫作嬋娟洞裡魂。公大加稱賞。問誰所作。妓以應仁對。公素聞其名。邀相見置酒賦詩。應仁詩曰。歌傳白雪知音久。路阻靑雲識面遲。公執其手曰。不料爾才至於此。遂定布衣交。

 

좌상(左相) 김명원(金命元)이 젊었을 때에 화류계에 정신을 잃고 있었다. 일찍이 한 창녀(娼女)를 귀여워했는데, 그 창녀가 모 종실의 첩실이 되었다. 공이 매번 담을 넘어가 상종하다가 어느 날 밤에 종실에게 붙잡혀 결박되었다. 일이 매우 위급하였는데, 공의 형 김경원(金慶元)이 그때 장령(掌令)으로 있었다. 공이 화를 만났다는 것을 듣고서 즉시 달려갔으나 대문이 닫혀 들어갈 수가 없었다. 장령은 큰소리로 외치며 문을 밀치고 들어가 말하기를,

 

“나는 김경원 입니다. 제 아우가 기가 호방하고 단속함이 없어서, 좌우(左右)께 죄를 지었으니, 죄는 진실로 죽어 마땅합니다만 그는 방금 식년초시(式年初試)에 합격하였으며 학문이 매우 정심하므로 반드시 대과(大科)에 급제할 것입니다. 좌우께서는 의기(義氣)가 높은 것으로 온 나라 안에 알려져 있는데, 어찌 차마 한 여자 때문에 한 사람의 재자(才子)를 죽인단 말입니까?”

 

하였다. 종실은 본래 호협(豪俠)하여 의기를 좋아하였다. 곧 섬돌을 내려와 맞이하여 말하기를,

 

“아름다운 수재(秀才)가 이러한 일이 있게 될 줄은 생각지 못하였소.”

하고, 즉시 결박을 풀어주고 술자리를 열어 취하게 마신 뒤에 말하기를,

 

“그대가 만약 이번 과거에 급제하면, 내 마땅히 이 첩을 공에게 보내겠소.”

 

하였는데, 과연 갑과(甲科)로 뽑히었다. 3일 유가(遊街) 때에 그 종실의 집에 가서 그의 의기에 감사드리니, 종실은 드디어 자신의 첩을 그에게 돌려주었다.

그 여자가 뒤에 영천위(靈川尉)의 보살핌을 받았는데, 죄를 짓고 의주(義州)로 유배가게 되었다. 공이 그때 홍문관(弘文館)에 숙직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나와서 교외에서 전송하였다. 그 때문에 대간의 탄핵을 받았다. 공은 정이 가는 대로 구속됨이 없이 이렇게 활달하였다.

 

金左相命元。少時落魄於花柳。嘗眄一娼。娼爲宗室某妾。公每踰墻相從。一日夜爲宗室所縛。事甚急。公兄慶元時爲掌令。聞知公遭禍。卽馳到。則門閉不可入。掌令大號排門而入曰。我乃金慶元也。吾弟氣豪無檢。得罪于左右。罪固當死。但方占式年初試。實學甚精。必捷大科。左右以義氣聞於一國。何忍以一女子。殺一才子耶。宗室素豪俠好義。卽下階迎之曰。吾不料佳秀才有是事也。卽令解縛置酒飮酣。謂曰君若登今科。我當以是妾奉公。果擢甲科。三日遊街之時。詣宗室家謝其義。宗室遂以其妾歸之。其女後爲靈川尉所眄。以罪流義州。公方鎖直弘文館。遽出餞于郊。爲臺諫所彈。公之任情放達如此。

 

만력(萬曆) 경술년(1580, 선조 13)에 내가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중국의 서울에 가게 되어, 오성(鰲城) 이상공(李相公)에게 출발 인사를 하려고 들렸다. 공이 말하기를,

 

“방예남(方禮男)은 나와 서로 아는 사람이니, 원컨대 그대는 그를 돌봐주오.”

 

하고, 이어서 이런 말을 하였다.

 

“나의 선고(先考) 판서공(判書公)이 아직 급제하기 전 포천(抱川)에 살고 있을 적에 예부시(禮部試)에 응시하게 되었지. 재종형 몽서(夢犀)가 청도 군수(淸道郡守)의 사위였는데, 청도는 종이의 산지이므로 판서공이 시지(試紙)를 요구했다네. 몽서는 허락을 하였는데, 시험 시기가 임박하자, 몽서는 종이를 권귀(權貴) 자제들의 요구에 모두 소비하고 약속을 실천할 뜻이 없었다오. 판서는 매우 분하게 여겨, 즉시 종이전에 가서 옷을 벗어주고 사니, 전의 노파가 말하기를, ‘공의 옥같은 얼굴을 보니 티끌 속에 오래 있을 사람이 아닌데, 어째서 이와 같이 스스로 괴롭게 지내오?’ 하였다네. 판서가 몽서의 약속을 저버린 것을 말하니, 노파는 옷을 돌려주고 말하기를, ‘종이는 공이 마음대로 가져가십시오. 어찌 감히 값을 받겠습니까? 공은 반드시 높은 성적으로 합격할 것이니, 회시(會試) 때의 종이 또한 내가 제공하겠습니다.’ 하였다네. 판서가 드디어 여러 선비들 중에서 제일로 합격하고, 회시에서 또한 높은 성적으로 합격하였으며, 얼마 있다가 과거에도 급제하였다네. 판서가 노파의 후의에 감사하여 극진한 예로써 대우하니, 노파는 은혜를 믿고 청촉하는 것이 뿔 없는 염소라도 내놓으라고 할 만큼 무리한 요구를 하였고. 판서가 어려워하는 빛을 보이자, 노파는 곧 탄식하고 물러앉으면서, ‘공이 이미 부귀하였으니, 나를 잊는 것은 당연하지요.’고 하자, 판서는 부득이 하여 애써 그의 뜻을 따라주었다네. 그의 자손이 번성하여 ☐☐☐한 자가 무려 수십 인이나 되는데, 방예남은 곧 그의 손자라네.”

 

萬曆庚戌。余以賀至書狀。將赴京師。過辭鰲城李相公曰。方禮男乃我相知之人也。願君護之。因言余先考判書公。未第時居抱川。時應禮部試。再從兄夢犀爲淸道郡守壻。淸道紙窟也。求試紙。夢犀許諾。至期夢犀盡以應權貴子弟。無意踐言。判書甚憤之。卽往紙肆脫衣買之。肆有老嫗曰。觀公玉貌。非久屈塵埃者也。何自苦如此。判書言夢犀負約。嫗以衣還之曰。紙則任公取去。何敢取價。公必高捷。會試試紙我亦供之。判書遂魁多士會試亦高中。未久登第。判書感嫗意待之盡禮。嫗恃恩請囑。俾出童羖。判書如色難。則嫗輒歎息却坐曰。公已富貴。宜忘我也。判書不得已勉從。其子孫蕃衍▣▣▣▣者。無慮數十人。禮男卽其孫也。

 

숭선부원군(嵩善府院君) 임백령(林百齡)이 젊었을 때에 강경과(講經科) 초시를 보는데, 꿈에 강석(講席)에 들어가서, 사서 오경을 닥치는 곳마다 환하게 통하여 최상의 성적으로 급제하니, 장중(帳中)의 한 고시관이 말하기를,

 

“괴마(槐馬)가 아니면 어찌 이렇게 잘 할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이미 꿈을 깬 뒤에도 분명히 기억할 수 있었다. 공은 마음 속으로 자부하고 드디어 그의 자(字)를 고쳐 괴마(槐馬)라고 하였으며 꿈속에서 강하던 장(章)에 대하여 무르익도록 외었다. 강석에 나아가니, 지적해 내는 장(章)이 다 꿈에서 강하던 것이었다. 공이 그에 수응(酬應)하여 외움이 막힘이 없고 문리도 겸하여 다 아니, 장중의 한 고시관이 놀라서 말하기를,

 

“이 사람은 반드시 괴마일 것이다. 어떻게 그 능숙함이 이와 같은가?”

 

하고, 드디어 자기의 꿈을 말하는데 공의 꿈과 서로 부합하였다. 공은 벼슬이 이미 높아진 뒤에 그의 자를 인순(仁順)이라고 고쳤다.

 

林嵩善百齡。少時取解治經。夢入講席。四書五經觸處洞然。遂得上第。帳中考官曰。非槐馬安得至此云。旣覺歷歷可紀。公心自負。遂改其字曰槐馬。取夢中所講章熟讀成誦。及就講。則拈出章皆夢講者也。公應誦無礙。詞理兼盡。帳中一考官驚曰。此必槐馬也。何其熟之至此也。遂言其夢。與公夢相符。公位旣高。改其字仁順。

 

조진(趙振)이 왕자사부(王子師傅)에서 예산(禮山) 고을 원으로 나갈 때에 선묘(宣廟)가 부채를 하사하였는데, 부채에 시 두 수가 씌여져 있었다.

 

칼을 한밤에 어루만지니 기운이 무지개를 토하니 / 撫劍中宵氣吐虹

장한 마음 일찍이 우리 나라를 안정하려 하였는데 / 壯心曾欲奠吾東

연래에 한단(邯鄲)의 걸음됨을 면치 못하니 / 年來未免邯鄲步

서풍에 머리를 돌리며 끝없이 한하노라 / 回首西風恨不窮

전주도 되기 전에 변설이 번다하니 / 箋注未成辨說煩

고금의 시속 선비 얼마나 지껄였던고 / 幾多今古俗儒喧

그대는 보라. 한 조각 마음속을 / 君看一片靈臺裡

다만 맑고 빈 데 있고 말에 있지 아니하네 / 只在澄空不在言

 

무술 연간에 사문(斯文) 조우인(曹友仁)이 상소하여 성학(聖學)이 선학(禪學)인 육상산(陸象山)에 가깝다고 논하고 이 시를 인용하여 증거를 삼았다가 크게 선조의 뜻을 거슬렸다. 대체로 신하로서 진언할 때에는 반드시 성실하고 간절해야만 임금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는 것인데, 조우인은 경솔하게 제 마음에 내키는대로 행동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그는 관(官)에서의 처사가 남의 비웃음을 면치 못하면서 앵무새 같이 말만 잘하여 경솔하게 임금의 학문의 깊고 얕음을 논평하였으니, 그가 믿음을 얻지 못한 것은 마땅하다 하겠다.

 

曺斯文友仁上疏。論聖學近於禪陸。引是詩爲證。大忤宣廟。大抵人臣進言。必誠實懇惻。可以感天。曺也輕率徑情。言不顧行。居官處事未免譏笑。而欲以鸚鵡之能言。輕論聖學之淺深。宜其不見信也。

 

목사 임형수(林亨秀)는 재주가 많고 호기가 있어, 곧게 향하고 앞에 거리낌이 없었다. 을사년에 윤원형(尹元衡)의 뜻을 거슬려 제주 목사(濟州牧使)로 나가게 되었는데, 윤원형이 술자리를 열어 전별하였다. 공이 평소에 술을 잘 마셨으므로 윤원형이 여러 잔을 권하자, 공이 잔을 들고 기세를 올리며 말하기를,

 

“공이 과연 나를 죽이지 않는다면 내 마땅히 양대로 마시겠소.”

 

하였다. 윤원형이 얼굴빛이 변하다가 그쳤는데, 공은 마침내 사사(賜死)되었다. 사람들은 그가 잔을 잡고 한 말이 윤원형을 격동시켰다고 하였다.

 

林牧使亨秀。多才好氣。直向無前。乙巳忤元衡。出牧耽羅。元衡置酒以餞。公素善飮。元衡勸之多酌。公持杯昂然曰。公果不殺我。我當盡量。元衡變色而止。公竟賜死。人謂執杯之言。激之也。

 

명나라의 태조황제가 한(韓)ㆍ촉(蜀)을 평정하고 그 위주(僞主) 진이(陳理)와 명승(明昇)을 우리 나라에 유배시켰다. 그리고 조서를 보내어 말하기를,

 

“관작도 주지 말고 백성으로 만들지도 말라.”

 

하였다. 우리 나라에서는 저택과 노비를 주어서 그의 생활을 편안하게 하였다. 명승의 어머니가 밤마다 하늘에 빌어 말하기를,

 

“하늘이여! 우리가 파천하게 된 것은 오로지 촉나라 대신의 죄입니다. 대신이 대명(大明)과 서로 내통하고서 우리 군사는 동쪽만 힘써 지키게 하고 서남쪽으로 명나라 군사를 끌어들였기 때문에 드디어 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였다.

지금 《통기(通紀)》를 고증해 보니, 촉장(蜀將)이 명나라 군사를 서남으로 끌어들였다는 기록이 없다. 명승의 어머니가 깊은 궁중에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일을 알 수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통기》의 기록에 누락됨이 있는 것일까?

명승의 후손은 지금까지 끊어지지 않고 간혹 과거에 급제한 자도 있다. 그러나 진이는 아들이 없어서 제사가 끊어졌으니, 이는 아마도 임금을 시해하고 나쁜 일을 쌓는 것이 때를 타서 몰래 점거(占據)하는 것과 더불어 재앙이나 경사가 저절로 같지 않기 때문인가 보다.

 

太祖皇帝平漢蜀。流僞主陳理明昇于我國。詔曰不做官不做民。我國給第舍臧獲。俾安其生。昇母每夜祝天曰。天乎使我播遷。專是蜀大臣之罪。大臣與大明相通。我兵專務拒東。而引兵從西南而入。故遂至於亡耳。今考通紀。無蜀將引明兵入西南之事。豈昇母在深宮。不能知當時事耶。抑通紀有所遺耶。昇後至今不絶。間有登第者。而理無子祀絶。豈弑君稔惡。與乘時竊據者。殃慶自不同歟。

 

사문(斯文) 심의(沈義)는 심정(沈貞)의 아우다. 문장은 풍부하나 성품이 세상일에 어두워 왕연(王椽)같다는 조롱을 받았다. 그러나 또한 어리석은 것으로 자처하여 능히 드러내지 않아 화를 면하였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그의 어리석음은 미칠 수 없다고 말한다. 일찍이 학관(學官)으로서 반궁(泮宮)에서 과시(課試)를 고사하였는데, ‘화이우(畵二牛)’라는 제목으로 부(賦)를 짓게 하였더니, 유생들이 지은 글은 모두 솜씨가 없었다. 심사문(沈斯文)은 잠깐 휴게소에 나가서 한 붓에 휘둘러 지었는데, 문장이 점 하나도 가할 것이 없었다. 그것을 서리(書吏)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네가 아는 유생이 있거든 이것을 주라.”

 

하였다. 유생이 써서 올리니, 여러 시관들이 무릎을 치고 찬미하면서 말하기를,

 

“이 과장에서 어떻게 이와 같은 글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하였다. 사문은 흔연히 말하기를,

 

“선생의 말씀이 옳습니다. 이것은 내가 지은 것입니다.”

 

하여, 여러 시관들이 다 매우 탄복하였다고 한다.

심정이 비록 남을 시기하고 해치는 버릇이 있으나, 그의 우애만은 천성에서 우러나왔다. 심정이 남곤(南袞)과 함께 작은 방에서 밀의를 하는데, 사문이 밖에서 들어오더니 창문을 열고 말하기를,

 

“둘은 일개 소인배들이다.”

 

라고 했다. 남곤이 매우 성내어 얼굴빛이 변하였다. 심정이 깨닫고 말하기를,

 

“나의 아우는 본래부터 천치이오니, 원컨대 상공께서는 용서하소서.”

 

라고 하여, 남곤의 노여움이 풀어졌다.

하루는 사문이 새벽에 깨서 울고 있으니, 심정이 말하기를,

 

“아우는 왜 우는가?”

 

하였다. 사문이 말하기를,

 

“꿈에 부모님을 뵈었는데 부모님 말씀이 ‘너는 작은 아들이므로 내가 매우 염려하여 어느 밭과 어느 종을 너에게 주고자 하였는데, 미처 그대로 하지 못하고 죽어서 마침내 잊을 수가 없다.’고 하시니, 내가 이 때문에 슬퍼합니다.”

 

하였다. 심정이 크게 감동하여 말하기를,

 

“부모님들께서 너를 생각함이 지극하신데, 내 어찌 그것을 아껴서 지하에 계시는 영혼을 위로하지 않겠느냐?”

 

하고, 즉석에서 문서를 만들어 주었다. 심정이 뒤에 그것이 거짓말인 것을 알고 사문(斯文)의 뜻을 시험하고자 하여 또한 새벽에 일어나 거짓 슬퍼하니, 사문이 말하기를,

 

“형님! 무엇 때문에 슬퍼합니까?”

 

하였다. 심정이 말하기를,

 

“꿈에 부모님을 뵈었더니 부모님의 말씀이 ‘어느 밭과 어느 종을 너에게 주려고 하였으나 미처 하지 못하고 죽었다.’고 하셨으므로, 내가 이 때문에 슬퍼한다.”

 

하니, 사문이 말하기를,

 

“봄꿈을 어떻게 다 믿겠습니까?”

 

하여, 심정이 크게 웃었다고 한다.

 

沈斯文義。貞之弟也。文章浩汗。性不曉事。有王椽之譏。然亦以癡自處。能沈晦以免禍。故人以爲其愚不可及。嘗以學官考課試于泮宮。賦以畫二牛爲題。儒生所製皆不工。斯文暫出歇幕。一揮而就。文不加點。付書吏曰。汝有相知儒生。以此與之。儒生書而呈之。諸考官擊節歎息美曰。此場屋安得有如此作。斯文欣然曰。先生之言是矣。此乃吾作也。考官皆絶倒。貞雖猜忌賊害。其友愛則天至。貞嘗與南衮密議于小齋。斯文自外至排窓而言曰。兩箇小人。衮大怒色變。貞悟然曰吾弟素癡。願相公恕之。衮釋然。一日斯文晨窹而泣。貞曰弟何爲而泣。斯文曰夢見父母。父母言汝是小子。吾甚念之。某田某奴吾欲與汝。未及而死。竟不能忘也。吾以是悲。貞大感父母念汝至矣。吾何愛是物。不慰地下之靈。卽於座上。作券而與之。貞後知其詐。欲試斯文之意。亦晨窹而佯悲。斯文曰兄何悲乎。貞曰夢見父母。父母言某田某奴欲以付汝。未及而終。吾爲是悲。斯文曰春夢何可盡信。貞大笑而已。

 

고려 때 둔촌(遁村) 이집(李集)이 공민왕의 조정에 벼슬하다가 역적 신돈(辛旽)의 뜻을 거슬리고, 몰래 그 아비를 업고 도망하여 영천(永川)에 사는 동년(同年)인 최원도(崔元道)의 집에 붙어 있었다. 신돈이 사형된 뒤에 비로소 돌아와서 벼슬이 판전교사(判典校事)가 되었는데, 얼마 안 있다 물러나 여주(驪州)에서 살다가 죽었다. 그런데 《여지승람(輿地勝覽)》에는 본조(本朝)의 아래에 오기(誤記)하여

“본조에 벼슬하였다……”

하였으며,《시림(詩林)》에주석을 달은 것도 그 잘못을 그대로 답습하였다. 선묘조에 경연관(經筵官) 홍적(洪廸)이 고치기를 청하니, 상은 다시 인간(印刊)해 낼 때까지 기다리라고 명령하였다. 금상(今上) 3년에 《여지지(輿地志)》를 개간(改刊)하게 되어 공의 8대손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이 그때 영상으로서 상께 글을 올려 선묘의 유교(遺敎)를 따라 개정하기를 청하였다. 상은 그 의견에 따라 유신들에게 명령하여 개찬(改撰)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이름 아래에 변오(辨誤)라 하고 부기(付記)하기를,

“이 집이 공양왕 정묘년에 죽자 정몽주(鄭夢周)ㆍ이숭인(李崇仁) 등이 모두 시를 지어 조문했다.”

하였다. 정묘년은 바로 신우(辛禑) 13년이며, 그 뒤 2년을 지나서 기사년에야 공민왕이 비로소 임금이 되었으니, 개찬한 것이 서로 맞지 않음이 전과 다름이 없다. 이른바 유신(儒臣)이란 자들은 그때 옥당의 신하들에 지나지 않았으니, 견문이 얕으므로 이러한 과오가 있는 것은 괴이할 것이 없다. 그러나 한음은 문단의 영수로서 조상을 위하여 잘못된 것을 씻어버리는 일이니, 진실로 마땅히 상세하고 신중해야 할 일인데, 또한 이와 같은 실수가 있었으니, 진실로 저술이 어려움을 알겠다.

 

高麗遁村李集。仕恭愍朝。忤賊旽。竊負其父而逃。投于永川同年崔元道家。旽誅。始還仕爲判典校事。未幾退居驪州卒。輿地勝覽誤載於本朝之下曰仕本朝云云。而註詩林者。亦踵其謬。宣廟朝。經筵官洪廸請改之。命待印出之日。今三年改刊輿地志。公八代孫李漢陰德馨。時爲領相。上書乞遵遺敎釐正。上從之。命儒臣改撰。付錄於其名下曰辨誤。而集以恭讓丁卯歲卒。鄭夢周李崇仁等。俱作詩哭之。丁卯歲乃辛禑十三年也。越二年己巳恭讓始立。改撰之牴牾不合。無異於前。所謂儒臣不過當時玉堂之臣。聞淺見謏。無怪乎有此誤。而漢陰以詞林領袖。爲祖先雪誣。固當詳愼。亦有此失。信乎撰述難也。

 

나는 일찍부터, 《사기(史記)》에 ‘여불위(呂不韋)가 일찍이 한단(邯鄲)의 미인을 데리고 살다가 그가 임신한 것을 알고 초(楚)에게 바쳐, 1년 만에 아들 정(政)을 낳았으므로 시황(始皇)을 여씨(呂氏)라고 한다.’는 것을 의심했다. 이것은 그때 사람들이 시황을 매우 미워하여 천하에 꾸짖는 분섞인 말이고 공론은 아니다. 임신하면 열 달 만에 낳는 것은 바꿀 수 없는 정해진 기한이다. 요(堯)가 14개월 만에 탄생한 일이 있으나 그것은 천만 년에 한두 사람 있을 뿐이다. 여불위가 어떻게 정(政)의 출생이 1년 뒤에 있을 것을 미리 알고 초에게 바쳤단 말인가? 이것으로써 시황이 장양왕(莊襄王)의 아들이라는 것은 의심할 게 없는 것이다. 상론(尙論)하는 군자들이 아직까지 그것을 설파한 이가 없어 마치 하류(下流)에 천하의 온갖 더러운 것이 저절로 다 모이는 것과도 같다. 근래에 진정(陳霆)의 《양산묵담(兩山墨談)》을 보니, 영씨(嬴氏)를 여씨(呂氏)로 바꾸고 마(馬)씨를 우(牛)씨로 바꾼 일을 논하여 말하기를,

 

“한단(邯鄲) 미희(美姬)의 일은 애매하고, 마우(馬牛)의 일은 의혹스럽다.”

 

하였다. 중국 문헌의 논의가 적은 나라의 좁은 소견과 같을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그런 까닭에 군자는 거슬러 올라가 옛날 어진이를 벗으로 삼는 것이다.

 

余嘗疑史記呂不韋嘗納邯鄲美姬。知其有娠獻于楚。期年而生子政。因以始皇爲呂氏。此乃時人深嫉始皇賤罵之忿辭。非公論也。懷妊十月而生。是不易之定期。有堯之十四月者。千萬年乃一二人而止耳。不韋何以逆知政之生。必在於期年之後。而獻楚乎。以是知始皇之爲莊襄子無疑也。尙論君子未有說破者。正爲其下流而天下之惡自歸焉耳。近見陳霆兩山墨談。論嬴易呂馬易牛之事曰。邯鄲曖昧。馬牛疑迷。孰謂中國文獻之論。乃與偏邦管見同乎。是以君子取尙友也。

 

《양산묵담(兩山墨談)》에, 사마공(司馬公)이 《통감(通鑑)》을 짓는데, 당태종(唐太宗)의 시대를 기술할 때가 되자 홀연히 누른빛 도포를 입은 사람이 앞에 나타나서 말하기를,

 

“바라건대 선생께서는 잘 써 주십시오.”

 

라고 하였다. 공이 그가 황제인 것을 알고 꿇어 앉아 말하기를,

“폐하께서는 악덕(惡德)이 많습니다. 신의 머리는 벨 수 있지만 붓은 빼앗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니, 드디어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제나라 동쪽 야인의 허황된 이야기이다.

방현령(房玄齡) 등이 고조(高祖) 금상(今上)의 실록(實錄)을 올렸는데, 6월 4일의 일에 대하여 쓴 말이 은미한 것이 많았으며, 척비(刺妃)를 세워 후(后)를 삼고자 하니 위징(魏徵)이 간하여 중지하고, 아들 명(明)으로 하여금 소봉(巢封)을 잇게 하였다는 것을 바로 쓰게 하였으니, 황제의 영달함으로 어찌 이 일이 후세에 전할 것을 알지 못하고, 후세의 온공(溫公)에게 부탁하여 고쳐 주기를 빌었겠는가? 과연 이와 같았다면 반드시 방현령으로 하여금 직서(直書)하는 것을 즐겨 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兩山墨談。司馬公作通鑑。至唐太宗之世。忽有穿黃袍人見於前曰。先生幸善書。公知其爲帝也。跪而言曰。陛下穢德多矣。臣頭可取。筆不可奪。遂不見。齊東野人之言也。房玄齡等。上高祖今上實錄。書六月四日事語多微隱。使之直書欲立刺妃爲后。魏徵諫而止。使子明紹巢封。帝之英達。豈不知此事之傳後。而托後世之溫公。祈改之耶。果若是。必不肯使玄齡直書也。

 

선묘(宣廟)가 일찍이 시신(侍臣)들에게 묻기를,

 

“나는 옛날의 어느 임금에게 비할 수 있는가?”

 

하니, 정이주(鄭以周)는 대답하기를,

 

“요순같은 임금이십니다.”

 

하고,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은 대답하기를,

 

“요순이 될 수도 있고, 걸주(桀紂)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요순과 걸주가 그렇게 대등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성상께서는 본바탕이이 고명하시니 요순같은 임금이 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성인인 체하시어 간언(諫言)을 거절하시는 병폐가 계시니, 간언을 거절하고 스스로 성인인 체 하는 것은 걸주가 망한 것이 옵니다.”

 

하였다. 상이 얼굴빛이 변하고 용상(龍床)에서 안절부절하니, 좌우에 모신 신하들이 매우 두려워하였다. 서애 유성룡이 앞에 나아가 아뢰기를,

 

“두 사람의 말이 다 옳습니다. 요순에 비한 것은 임금을 인도하는 말이고, 걸주를 들어서 말한 것은 경계하는 뜻이옵니다.”

 

하였다. 상이 성낸 빛을 걷고 술을 하사한 뒤에 파하였다.

 

宣廟嘗問侍臣。予可比古何主。鄭以周對曰堯舜之主也。金鶴峰誠一對曰。可以爲堯舜。可以爲桀紂。上曰堯舜桀紂若是班乎。對曰聖質高明。爲堯舜不難。而有自聖拒諫之病。拒諫自聖。桀紂之所以亡也。上色變徙倚龍床。左右震懼。柳西厓成龍進曰。二人之言皆是也。堯舜之比。引君之辭。桀紂之言。儆戒之意。上色霽。賜酒而罷。

 

나의 꿈이 기이하고 잘 들어맞는다는 것은 이미 책의 첫머리에 썼다.

정사년 (1017, 광해군 9) 2월, 부계(涪溪)에 있을 때의 일이다. 꿈에 참찬 유간(柳澗)이 그의 아들 여각(汝恪)을 보내어 나에게 시를 보였다. 꿈을 깬 뒤에도 그의 한 글귀는 기억하였다.

 

시론은 정히 세 칠묵 같고 / 時論正如三漆墨

돌아올 기약은 한 돛의 바람을 얻기 어렵다 / 歸期難得一帆風

 

그러나 그 뜻을 알 수 없어 일기에 적어 두었다. 그뒤 2년에 유간이 시의(時議)에 거슬려서 울산 부사(蔚山府使)로서 북경에 다녀오라는 특명을 받았다. 그때 오랑캐가 발호하여 그 기세가 매우 팽창하였으므로 북경에 가는 사람은 다 바다를 건너야 할 근심이 있었다. 유간이 연경(燕京)에 간 뒤에 적이 요양(遼陽)을 점거하였기 때문에 길이 끊어져서 바닷길로 돌아오다가 배가 깨져 익사하였으니, 또한 이상한 일이라고 하겠다. 유간이 처음 떠나려 할 때에 내가 동료 이창기(李昌期)ㆍ서상서(徐尙書)와 함께 꿈을 말하고 유간을 위하여 두려워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과연 맞으니, 듣는 사람들이 다 이상하다고 감탄하였다.

 

余夢奇而驗者。旣書之卷首矣。丁巳二月在涪溪。夢柳參贊澗遣其子汝恪。示汝詩。覺而記其一句曰。時論正如三漆墨。歸期難得一帆風。莫曉其意。載于日錄。後五年柳忤於時議。以蔚山府使特命朝京。時奴胡跋扈勢甚張。赴京者皆有泛海之憂。柳旣赴燕。而賊據遼陽路絶。取海路以還。船敗溺死。亦可謂奇矣。柳之將行。余與同僚李昌期徐尙書。言以夢。以爲柳懼。未幾果驗。聞者皆歎異。

 

목사 김홍도(金弘度)는 아이 때 이름이 귀갑(歸甲)인데, 갑산(甲山)에 귀양가서 죽었고, 김정홍(金正弘)은 젊을 때 자가 의경(宜慶)인데, 또한 경원(慶源)에 귀양갔으므로, 사람들이 다 이상하게 여긴다. 나의 벗 황석(黃奭)의 자는 존외(存畏)인데 임자의 화에 연좌되어 경흥(慶興)에 귀양갔다가, 7년 만에 배소를 순천(順天)으로 옮겨, 늙은 아전의 집에 붙어 있었는데, 그 집을 새로 짓고 경흥당(慶興堂)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존외가 마침내 그 경흥당에서 병으로 죽었으니, 이것도 또한 운명이 미리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金牧使弘度。兒名歸甲。而謫死甲山。金正弘少字宜慶。而亦謫慶源。人皆怪之。余友黃奭字存畏。坐壬子禍。謫慶興七年。而移配順天。寓老吏家。則其家新構。題曰慶興堂。存畏竟病終于其堂。斯亦數之前定者。

 

《한서(漢書)》〈무제기(武帝紀)〉를 살펴보니,

 

“조선을 격하시켜 진번(眞藩)ㆍ임둔(臨屯)ㆍ낙랑(樂浪)ㆍ현도군(玄菟郡)을 두었는데, 성제(成帝) 때에 석현(石顯)이 패하자, 그와 서로 교결(交結)한 자들이 모두 파직되고 오록 충종(五鹿充宗)이 현도군 태수(玄菟郡太守)로 좌천되었다.”

 

하였다.

《지리지(地理志)》에,

 

“현도군의 속현(屬縣)에 고구려가 있고 낙랑군의 속현에 조선(朝鮮)ㆍ패수(浿水)ㆍ대방(帶方) 등의 고을이 있다.”

 

하였다. 또 《강목(綱目)》을 살펴보니,

 

“송(宋) 나라 원가(元嘉) 9년 가을에, 위주(魏主) 도(燾)가 연(燕) 나라를 쳐서 깨뜨리고 군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돌아와서 영구(營丘)ㆍ성주(成周)ㆍ요동(遼東)ㆍ낙랑(樂浪)ㆍ현도(玄菟)ㆍ대방(帶方)의 여섯 고을, 백성 3만 호를 유주(幽州)에 옮겼다.”

 

하였다. 《동국사(東國史)》를 상고해 보니, 무제(武帝)가 4군을 두었다고 한 것은 근거가 있으나, 석현의 당이 나누어 배반하였다는 일은 성제(成帝) 때 고구려의 국토는 본래 아무런 변동이 없었고, 무제(武帝)가 4군을 둔 뒤에 곧 다시 우리 땅을 회복하였는데, 군읍(郡邑)이 붙어 사는 자의 다스리는 곳이 되었겠는가? 태무(太武) 때에 고구려가 한창 강성하여 풍홍암(馮弘庵)을 요동(遼東)에서 죽이고 그 땅을 소유하였으니, 연(燕) 나라에 들어가 옮겨질 리가 없었을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보면, 낙랑ㆍ현도ㆍ대방은 다 요동(遼東)에 있었던 땅이고, 처음부터 압록강 동쪽의 땅이 아닌 것이다. 또 고구려ㆍ조선은 나라의 이름인데, 《지리지(地理志)》에는 현도ㆍ낙랑의 속현(屬縣)이라고 하였다. 이로써 본다면, 중국 사람들이 외국의 일을 자세히 알지 못하고 듣는 대로 기록하였기 때문에, 일이 사실과 어긋남이 이와 같은 것이다.

 

按漢書武帝紀。朝鮮降置眞藩臨屯樂浪玄菟郡。成帝初石顯敗。諸所交結皆廢罷。五鹿充宗左遷玄菟郡太守。地理志云。玄菟郡屬縣有高句麗。樂浪郡屬縣有朝鮮浿水帶方等縣。又按綱目。宋元嘉九年秋。魏主燾伐燕破之。引兵西還。徙營丘成周遼東樂浪玄菟帶方六郡民三萬戶於幽州。考之東國史。武帝之建置有據。而若石顯黨分背之事。成帝時高句麗境土固自如。豈武帝建置之後。旋復爲東土。而郡邑爲僑寓寄治之所耶。太武時高句麗方盛。殺馮弘庵遼東而有之地。無入燕被徙之理。由是觀之。樂浪玄菟帶方皆在遼東。初非鴨綠江以東之地。且高句麗朝鮮乃國號。而地理志以爲玄菟樂浪屬縣。以此觀之。中國之人不能詳知外國事。隨所聞而記之。故事多失實如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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