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암잡록(雲巖雜錄)
발췌: 장달수
해제(解題)
《운암잡록》의 저자는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이다.
서애 류성룡을 여기에 새삼스럽게 소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이 글을 이해하는 데 배경이 될 수 있는 중요한 몇 가지만을 소개하기로 한다.
류성룡(1547~1604)의 자는 이현(而見)으로 경상도 의성현(義城縣) 사촌리(沙村里)에서 출생하였다. 일찍이 퇴계 선생에게서 수학하였으며, 26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그의 벼슬은 승문원 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를 출발로 하여 이조 좌랑ㆍ승지ㆍ도승지ㆍ상주 목사(尙州牧使)ㆍ대사간ㆍ대사헌ㆍ경상도 관찰사ㆍ홍문관 부제학ㆍ형조 판서ㆍ예조 판서ㆍ병조 판서ㆍ이조 판서ㆍ홍문관 대제학ㆍ우의정ㆍ좌의정ㆍ영의정을 역임하였으며, 사도 도체찰사(四道都體察使)도 역임하였다.
그러나 서애의 관직 생활 기간은 다난하였다. 특히 그 후반기에 더욱 그러하였다. 우리가 잊을 수 없는 엄청난 민족의 수난이며, 국가의 위기였던 임진왜란이 바로 그때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서애는 임진왜란 동안 처음부터 끝까지 정승으로, 체찰사로, 몸소 국난(國難)의 대처에 헌신하였다. 뼈저린 체험과 피눈물나는 노력과 탁월한 능력이 남긴 선생의 공적을 우리는 민족의 이름으로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한편 이러한 국가의 존망의 위기를 겪으면서도 소위 당쟁이란 것은 반성은커녕 도리어 날로 격심하여 갔다. 임금과 조정이 쫓겨 피난길을 헤매고 있는 동안에도 반대당 사람을 헐뜯고 조정에서 몰아내곤 하였다.
서애도 임진왜란 도중에 벼슬을 파면당한 일이 있고, 뒤에는 관직을 삭탈당하고 낙향하기도 하였다.
그러니 그때의 나라 형편과 세도 인심(世道人心)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운암잡록》은 바로 그러한 일들에 대한 것을 소재로 하고 있다.
물론 서애 유성룡도 당파의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는 소위 동서 분당에 있어서 동인(東人)의 남인(南人)에 속한다. 그러므로 그의 주장이 모두 공정한 것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그 점은 독자 각자의 견해에 맡기거니와, 적어도 우리는 이 《운암잡록》을 읽어가는 동안 그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불타는 그의 애국정신과 세도 인심을 개탄하는 비분해하는 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이하에 《운암잡록》의 내용을 간결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제1장은 첫머리에 우리 나라에 붕당이 일어난 원인을 말하고, 다음으로 붕당의 색채가 농후하게 되는 것을 보고 이준경(李浚慶)이 붕당의 조짐이 있다고 말한 것을 배격하였다. 그러나 실지로 붕당은 엄연히 있었으며 마침내 격화되었다는 것을 개탄하고 있다. 특히 저자는 이때 이이(李珥)와 정철(鄭澈) 등이 일어남으로써 분열이 더욱 격화되고 당화(黨禍)가 시작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제2장에서는 동서 분당이 심의겸(沈義謙)과 김효원(金孝元)의 알력에서 시작되고 심의겸과 김효원에게 부화뇌동하여 동서 분당이 되었다는 유래와 그 두 사람 및 그 주변의 인물들을 논하였다.
다음은 이이ㆍ성혼(成渾)ㆍ정철ㆍ최영경(崔永慶) 등의 인물평과 그와 그의 주변의 인물들에 얽힌 일련의 상황 등을 말하고 있다.
그 다음 장은 왜적에 의하여 선릉(宣陵)ㆍ정릉(靖陵)이 도굴된 사건과 그것을 실지 탐사하게 한 경위와 그 사후 처리에 대한 사실을 적었다.
이처럼 적의 악랄한 야만 행위를 직접 보면서도 그것을 기화로 하여 남을 해치는 자료로 삼던 것을 보면 그때의 세도와 인심을 추측할 수 있다.
다음 두 장은 정철의 행적과 그의 영고 성쇠와 이산해(李山海)와의 관계 등을 기록하고, 또 이산해의 사람됨을 말하고 있다.
다음은 정여립(鄭汝立)의 역옥 사건으로, 소위 기축역옥(己丑逆獄)의 일을 기록하였다.
다음은 세자를 책봉한 경위를 기록하였다. 그 아래에는 정언신(鄭彦信)ㆍ홍진(洪進)ㆍ이준경(李浚慶) 등의 인물과 그들에 얽힌 이야기의 단편을 기술하였다. 남만성(南晩星)
붕당(朋黨)
아, 우리 나라가 쇠약해진 조짐은 그렇게 된 유래가 있다. 명종(明宗) 때에 권신(權臣) 윤원형(尹元衡)ㆍ이량(李樑)의 무리가 20여 년 동안 서로 이어 정권을 잡으니, 충성스럽고 어진 이는 억눌려 등용되지 못하고, 기강은 무너져 어지럽고 탐관오리가 풍조를 이루어 이미 쇠약해져 떨치지 못할 조짐이 있었다.
을묘년(1555, 명종 10)의 왜구(倭寇)는 개나 쥐 같은 좀도둑에 불과하였는데도 원근이 모두 놀라고 벌벌 떨어 호남 지방이 거의 보전되지 못할 뻔하였다. 만약 적이 스스로 물러가지 않았다면 그 형세가 또한 지탱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 뒤에도 군정(軍政)이 예전처럼 문란하여 백 가지 중에 하나도 바로잡힌 것이 없었다.
명종 말년에 이르러 권력 부리던 간신들이 제거되니 자못 정치를 새롭게 하려 하였다. 이에 산림에 숨어 있던 선비들을 불러들여 조정에 벼슬하는 이가 많게 되니, 사림들이 즐거워하여 태평 성대를 기대할 수 있다 하였다. 명종이 승하하고 금상(今上)이 즉위하게 되어서는 더욱더 인재의 등용에 유념하게 되니, 그 당시 건의하는 자들은 어진 이를 좋아하고 선을 즐겨서 초야에 버려진 현사(賢士)가 없게 하는 아름다운 일로써 임금에게 권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등용된 사람들은 대체로 말과 행동이 서로 맞지 않는 이가 많으며, 그중에는 혹 선비라는 이름을 가탁하여 시속의 좋아하는 것만 따르는 자가 있기도 하였다. 그래서 공도(公道)를 저버리고 당파를 위해서 죽는 폐습이 점차로 이루어지고, 직분을 지키고 임금을 받드는 의리는 점점 쇠퇴해져서 서로서로 부추기고 추천하여 당(黨)이 성한 자는 중요한 지위에 오르고 형세가 고립된 자는 낮은 벼슬에 억눌려 있게 되었다.
고(故) 상공 이준경(李浚慶)이 이것을 근심하여 고치고자 하였는데, 당시 사류라고 이름하는 자들이 떼지어 일어나 공격하여 착한 이를 미워하는 것이라 하였다. 이준경은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죽었다.
이때부터 조정은 둘로 나뉘어 당파의 화가 비로소 일어나더니, 이이(李珥)와 정철(鄭澈) 등이 일어나게 되어서는 더욱 분열되었다. 사대부들이 나와서는 조정에서 논의하고, 들어가서는 집에서 꾀하는 짓이 오직 피차간에 이기고 지는 것, 같은 당파끼리는 두둔하고 다른 당파는 공격하는 것으로 일삼아 번갈아 승부가 갈리더니, 계미년(1583, 선조 16)ㆍ기축년(1589, 선조 22)에 이르러서는 극도에 달했다.
시험삼아 여기에서 논평한다면, 명종 때에는 권신이 정권을 잡았으므로 폐단이 권력을 독점하는 데에 있었고, 금상 때에는 조신(朝臣)들이 당파를 만들었기 때문에 폐단이 권력의 분산에 있었다. 권력을 독점하게 되면 정사에 옳고 그름을 논하지 못하되 그래도 한군데로 귀착되는 것이 있지만, 분산되게 되면 시끄럽고 어지러워서 모양도 이룰 수가 없다. 그 밖에 또 틈을 타서 부정한 방법을 통하고, 어두운 곳을 의지하여 몰래 자기의 사욕을 이루는 무리가 세월이 갈수록 불어나 기강과 풍속이 크게 무너지게 된 것이다.
옛 사람이 말하길, ‘평숙(平叔)은 부탄(浮誕)하기만 하고, 이보(夷甫)는 앉아서 공(空)만을 논하고 있으니 소양전(昭陽殿)이 선우(禪于)의 궁궐로 변할 줄 어찌 알랴.’하였다. 사물(事物)이 본래 서로 의논하지 않되 서로 이루어지는 것이 있으니, 진(晉) 나라 때의 오호(五胡)의 변란은 사대부들의 청담(淸談)이 나라를 그르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화가 어찌 원인이 없이 이루어진 것이겠는가.
옛날 소동파(蘇東坡)는 일찍이 화(和)와 동(同) 두 글자를 논하기를,
“동은 물에 물을 탄 것 같고, 화는 국에 양념을 한 것과 같다.”
하였다. 그러므로 신하들의 습성에 조화롭게 지내는 것은 좋으나, 부화 뇌동하는 것은 옳지 않다. 사람마다 진실로 부화 뇌동하는 것을 숭상한다면 천하는 또한 위태하다고 하겠다.
천하의 사리(事理)는 옳고 그름을 가리는 일보다 더 큰 것은 없다. 옳고 그름을 가린 뒤에야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을 밝힐 수 있고,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을 밝힌 뒤에야 취할 것과 버릴 것을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자신에게 행한다면 나쁜 냄새를 미워하고 미인을 좋아하는 것처럼 자신이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이 바르게 될 것이며, 이것을 남에게 행한다면 선(善)을 보고는 따라잡지 못할 것처럼 하고 악(惡)을 보면 끓는 물에 손을 대는 것처럼 겁내어 온 세상의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이 바르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고 간사하고 사심을 품어 이(利)와 녹(祿)을 구하여 한 번 이름을 사림에 붙이면 비록 죄악이 낭자하여 직분을 망가뜨려서 온갖 못된 짓을 하더라도 남으로 하여금 감히 말하지 못하게 하고, 한 번이라도 그 잘못을 논하는 자가 있으면 당장에 그를 시기하고 질투한다는 명목으로 공격하니, 옛 사람의 이른바, 선은 작은 것이라도 기록하지 않는 것이 없고, 악은 미세한 것이라도 비평하지 않는 것이 없으며, 모든 일은 정밀하게 다루어지고 사물은 그 근본을 다스려서 이름에 따라 실적(實績)을 책임지우며 허위가 끼어들지 못하게 하는 정치라는 것이 장차 어떻게 시행되겠는가.
아, 시속(時俗)의 병폐가 이미 오래되었구나! 정치를 아는 신하와 기미를 아는 선비가 아니라면 누가 이것을 알 수 있겠는가. 홍범(洪範)에 이르기를,
“모든 백성들이 당파를 지음이 없고 사람들이 비덕(比德)함이 없는 것은 임금이 극(極)이 되기 때문이다.”
하였으며, 극을 세우는 길을 논하는 데에 이르러서는,
“치우침이 없고 기욺이 없어 왕의 도를 따르며, 뜻에 사사로이 좋아함을 일으키지 말아 왕의 의(義)를 따르며, 뜻에 사사로이 미워함을 일으키지 말아 왕의 길을 따르라. 치우침이 없고 편당함이 없으면 왕의 도가 넓고 크며, 편당함이 없고 치우침이 없으면 왕의 도가 평탄할 것이고, 상도(常道)에 위배됨이 없고 기욺이 없으면 왕의 도가 바르고 곧을 것이니, 그 극에 모여서 그 극에 돌아올 것이다.”
하였다. 임금이 격물 치지(格物致知)와 성의 정심(誠意正心)의 도를 다하여 거울처럼 맑고 저울처럼 평형을 이루어 위에서 내리 비추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러한 것을 이룰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각각 자기의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으로 현란시키고 번복하여 형상이 만 가지일 것이니, 임금이 그것에 좇아 옳고 그름을 살피고자 한다면 틈 사이로 싸움을 보는 것과 같을 것이니, 또 어떻게 승부의 있는 바를 알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옳은 것을 그르다 하고, 그른 것을 옳다 하게 되어 온 세상의 인심이 점점 더 퇴폐해져서 어찌할 수 없게 될 것이니, 환란이 어찌 생기지 않으랴. 슬픈 일이다.
○ 예전부터 붕당(朋黨)의 화는 반드시 말세에 일어나는 것으로, 아직까지 조정이 당파로 나뉘어 서로 공격하고도 나라가 위태하고 어지럽지 않은 적은 없었다. 예를 든다면, 당(唐) 나라는 우ㆍ가(牛李)의 당파가 일어나 승부를 다툰 지 40여 년 만에 당 나라 왕실이 드디어 떨치지 못하였다. 송(宋) 나라는 희령(熙寧), 원풍(元豐), 원우(元祐) 이후로 간사한 무리와 바른 사람들이 나뉘어 서로 공격하다가 그 말기에는 바른 사람들은 다 떠나고 간사한 무리들만이 남아 있게 되어 마침내 정강(靖康)의 화를 초래하였으니, 조금 징계해야 할 것 같은데, 남도(南渡)한 뒤에도 위학(僞學)의 금(禁)이 있었으며, 점점 전락(轉落)하여 정대전(丁大全)ㆍ사미원(史彌遠)의 무리가 서로 바뀌어가며 정권을 잡기에 이르러 송 나라는 다시 구할 수 없었다.
아, 슬프다. 대개 일찍이 살펴보니, 신하가 조정에 벼슬할 적에 언론(言論)의 차이나 소견의 옳고 그름이 없을 수 없는 것인데, 세상이 잘 다스려지는 때에는 소위 옳고 그른 것과 다르고 같은 것이 모두 공정한 마음으로 나라를 위하는 데에서 나와 사심(私心)이 그 사이에 섞여 있지 않다.
그러므로 옳다 하는 것이 반드시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며, 그르다고 하는 것이 자기가 미워하는 사람이기 때문은 아니다. 의견이 다르더라도 동의해야 할 것을 동의하는 데에는 주저하지 않으며, 의견이 같더라도 일찍이 아부하는 의사는 없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물고기는 강호(江湖)에서 서로 개인 감정을 잊고, 사람은 도의(道義)에서 서로 잊는다.”는 것이다. 밤낮으로 힘쓰는 것은 오직 그 근심되는 것을 생각하여 국가 일에 마음을 다하는 데에 달린 것뿐이다. 조금이라도 그 사이에 사심을 써서 속임수를 쓰는 자가 있으면 큰 경우는 형벌을 주고 작은 경우는 내쫓으니, 마치 태양이 중천에 떠 있으면 도깨비가 저절로 날뛰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홍범에 이르기를,
“모든 백성들이 당파를 지음이 없고 사람들이 사사로이 아첨함이 없는 것은 오직 임금이 표준을 세우기 때문이다.”
하였다. 표준이 서지 않으면 사람들이 각각 좋아하고 미워하는 사람끼리 서로 찬성하고 반대하여 자기와 같은 편이면 비록 그른 것이라도 옳다 하고, 자기와 다른 편이면 비록 옳은 것이라도 그르다 한다. 그 처음에는 한두 사람으로 시작하여 거기에 좇는 자가 더욱 많아지면 그 틈을 타서 시세가 어디로 향하는가를 보아서 달려가 붙어 이익을 추구하는 자들이 세월이 갈수록 날로 많아진다. 이에 온 나라 안이 둘로 나뉘어 각기 자기가 옳게 여기는 것을 옳다고 주장하여 참으로 옳은 것을 가리지 못하고, 각기 자기가 그르게 여기는 것을 그르다 하여 참으로 그른 자도 할 말이 있을 수 있다.
임금이 그 정상을 살펴 버리고 취하는 조처를 두려 하면 말들이 조정에 가득하여 어지럽게 떠들어 현란시키고 번복하여 마치 틈 사이로 싸움을 보는 것 같다. 그러니 어느 겨를에 그 승부와 득실의 있는 바를 알 수 있겠는가. 이때에 아부를 잘하는 자가 있어서 혹은 궁인(宮人)들과 결탁하고, 외척에게 연줄을 놓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몰래 임금의 뜻을 변동시키고, 밖으로는 눈치보며 달려가 붙는 무리들로 하여금 사론(士論)이라 칭탁하여 남을 모함하는 술책을 쓰게 하여 대간(臺諫)과 시종(侍從)들로 하여금 깡그리 자기네를 따르게 하여 안과 밖에 꽉 차게 했으니, 임금이 비록 보고 듣는 것을 바꿔서 바로잡을 계획을 하고자 하여도 소용이 없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면 또한 어찌할 수 없을 뿐이니, 위태롭도다.
근일에 동인(東人)이니 서인(西人)이니 하는 설은 금상 초년 심의겸(沈義謙)과 김효원(金孝元)에게서 시작되고, 이이(李珥)와 정철(鄭澈)에 이르러 성해졌으며, 이산해(李山海)에 이르러 극도에 달하였다. 나라를 망치고 집안을 망친 전례가 한 수레바퀴의 자국과 같은데, 시간이 갈수록 더욱 치열해져서 마침내 그칠 때가 없으니, 아, 슬픈 일이로다.
朋黨
嗚呼國家陵替之漸。有自來矣。明廟朝。權臣相繼秉政。二十年間。尹元衡李樑之徒。與之終始。忠賢鬱抑而不用。紀綱壞亂。貪濁成風。已有衰。微不振之象矣。乙卯之倭。不過狗鼠之偸。而遠近震駭。湖南一方。幾不能保。倘非賊自退。則其勢亦難支矣。其後兵政。仍舊紊亂。百不一擧。及明廟末年。權奸已去。頗欲改紀。於是收召山林之士。多仕于朝。而士林欣欣。以爲太平可期。及明廟昇遐。今上卽位。尤益留意於人才。而一時建言者。無不以好賢樂善野無遺賢之美。勸上矣。然收用之人。率多言行不相副。其或有假托士名。以趨時好者。於是背公死黨之習。駸駸而成。守職奉上之議。漸漸而廢。互相吹噓。黨盛者。立登要路。勢孤者。沈抑下僚。故李相公浚慶憂之。欲有所改。而一時名爲士類者。群起而攻之。以爲嫉善。浚慶怏怏而卒。自是朝廷分而爲二。而黨禍始起。至李珥鄭澈等起。尤分裂。士夫之出議於朝。入謀於室。惟以彼此勝否黨同伐異爲事。迭爲消長。以及乎癸未己丑而極矣。嘗卽是而論之。明廟朝。權臣主柄。故患在於專。今上朝。朝臣立黨。故患在於散。專則政事不論是非。而猶有所歸宿。散則紛紛擾擾。而不成貌樣。其他又有乘巇抵隙。連通邪逕。倚負幽陰。潛濟己私之徒。日滋月盛。而紀綱風俗大毀矣。古人云。平叔任散誕。夷甫坐論空。豈悟昭陽殿。變作單于宮。物固有不相謀而相致者。晉室五胡之亂。士夫之淸談誤之。然則今日之禍。豈無自而致之哉。昔東坡嘗論和同二字云。同如濟水。和如和羹。故人臣之習。和則可。同則不可。人人苟皆尙同。天下亦曰殆哉。夫天下之理。莫大於辨是非。然後可以明好惡。明好惡。然後可以定取舍。故以此軆之於身。則如惡惡臭。如好好色。而一身之好惡正矣。以此行之於人。則見善如不及。見惡如探湯。而一世之好惡正矣。不然而懷姦挾私。以徼利祿。一托於士林之名。則雖罪惡狼藉。敗官僨事。無所不至。而使人不敢言。一有議之者。輒以媢嫉之目加之。所謂善無微而不錄。惡無纖而不貶。庶事精練。物理其本。循名責實。虛僞不齒之政。將安施耶。嗚呼俗之弊也久矣。非識治之佐。通微之士。其孰能知之。洪範曰。凡厥庶民。無有淫朋。人無有比德。惟皇作極。至論建極之道。則曰。無偏無陂。遵王之道。無有作好。遵王之義。無有作惡。遵王之路。無偏無黨。王道蕩蕩。無黨無偏。王道平平。無反無側。王道正直。會其有極。歸其有極。除非人君。盡格致誠正之道。而鑑空衡平。以之照臨於上。則何以致此。不然。人各以己之好惡。眩亂反覆。形象萬端。人君從而欲察之。如隙中之觀鬪。又烏知勝負之所在耶。於是以是爲非。以非爲是。一世人心。愈敗而不可爲。亂何由不生。悲夫。
自古朋黨之禍。必起於季世。未有朝廷分黨相攻。而國不危亂者。如唐牛李之黨起。迭爲勝負。四十餘年。而唐室因以不振。宋自煕豐元祐以後。邪正相攻。其末也。正人盡去。而奸邪獨留。卒致靖康之禍。若可少懲。而南渡以後。又有僞學之禁。陵夷至於丁大全史彌遠之類。迭爲主權。而宋不可復救。嗚呼痛哉。蓋嘗觀之。人臣立朝。言論異同。所見是非。不可無。世治則所謂是非異同者。皆出於公心。爲國無私意雜於其間。故是之而非其所好。非之而非其所惡。異而不害其爲同。同而未嘗有阿附之意。所謂魚相忘於江湖。人相忘於道義。夙夜所勉者。惟在於職思其憂而盡心於公家之事。一有行私欺罔於其間者。則大則刑。小則黜。如白日中天。而魑魅魍魎。自不得聘迹。洪範曰。凡厥庶民。無有淫朋。人無有比德。惟皇作極。極之不建。而人各以好惡相從違。同乎己者。雖非以爲是。異乎己者。雖是以爲非。其初一二人倡之。及乎從者益衆。其乘間抵隙。視其時勢之向背。而欲趨附求利者。日滋月盛。於是擧國中分。各是其所是。而眞是者不可辨矣。各非其所非。而眞非者得以爲辭。人君欲察情形。有所去取。而辭說滿朝。紛挐喧豗。眩亂反覆。如隙中之觀鬪。何暇知其勝負得失之所在。乃有小人之巧於低仰者。或交結宮掖。攀緣戚里。以潛移人主之意於冥冥之中。而外令承望趍附之徒。託士論以濟其傾陷之術。使臺諫侍從。靡然而從己。允塞內外。人主雖欲改視易聽。以爲圖回之計。亦無及矣。事至於此。則亦末如之何也已。其亦危矣。近日東西之說。起於今上初年。始於沈義謙金孝元。盛於李珥鄭澈。而極於李山海。亡國敗家。如出一轍。而火烈水深。了無已時。嗚呼可悲也夫。
심의겸(沈義謙)
심의겸은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아우이다. 명종 때에 그의 고모부(고모부는 잘못, 외삼촌임) 이량(李樑)이 권력을 독차지하고 이감(李戡) 등과 서로 결탁하여 기대승(奇大升)ㆍ이문형(李文馨)ㆍ박소립(朴素立)ㆍ허엽(許曄) 등 5~6인을 모함하여 관직을 빼앗고 내쫓으니, 이들은 모두 사류(士類)였으므로 조정과 민간의 인심이 흉흉하였다. 의겸이 은밀히 대궐 안에 들어가 이량이 정치를 문란시키고 사람을 해치니 제거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드디어 부제학 기대항(奇大恒)으로 하여금 논핵하게 하였는데, 한 번 아뢰자 곧 윤허하였다. 이량과 그 도당은 모두 멀리 귀양을 가고, 문형 등은 다시 서용(敍用)되었다. 이 일이 있은 뒤부터 의겸은 사림에 명성이 나서 자못 일을 독단할 조짐이 있었다. 급제한 지 5년도 못 되어 당상이 되었으며, 박순(朴淳)ㆍ이이(李珥) 등과 가장 친밀하였다.
김효원(金孝元)은 보다 늦게 나왔으나 나이가 젊고 기백이 날카로워 의론에 피하는 바가 없어서 의겸은 외척이므로 등용할 수 없다 하였고, 의겸도 효원이 소년 시절에 일찍이 윤원형(尹元衡)의 사위 안덕대(安德大)와 교유하여 원형의 집에 기식(寄食)하였다 하며 서로 헐뜯었다.
그래서 의겸이 옳다고 하는 사람을 서인, 효원이 옳다고 하는 사람을 동인이라 하였으니, 이것은 의겸의 집은 도성 서쪽에 있고 효원의 집은 도성 동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이가 여러 번 소를 올려 관원들이 분열할 염려를 말하고, 화협시켜 진정하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그의 말은 항상 서인을 위주로 하였다.
또 정철이란 자가 있었는데, 편협하여 의논을 주장함이 더욱 어긋나서 한쪽을 다 배척하고자 하여 효원을 공격함이 너무 심하여 소인이라고까지 하니, 이에 선비들의 여론이 더욱 격해졌다.
얼마 안 가서 종실(宗室) 경안령(慶安令) 요(瑤)가 임금께 면대하기를 청하여 유성룡(柳成龍)ㆍ김응남(金應南)ㆍ이발(李潑)ㆍ김효원이 서로 붕당을 만들었다고 논하였으므로 나는 부제학으로서 벼슬을 버리고 영남으로 돌아갔다.
이때 이이가 병조 판서로 있으면서 바야흐로 때를 만나 정권을 잡으니, 경망스럽고 붙기 좋아하는 무리들이 날마다 그의 집에 가득하여 논의가 바람이 일듯 하였다. 사람들은 모두가 그의 눈치를 보고 이런 말을 한 것이라고 의심하여 선비들의 의론이 이이와 서로 충돌함이날로 심해졌다.
그때 마침 북쪽 변방에 일이 생겼는데, 이이가 말을 바친 군사들의 수자리 사는 것을 면제해 주면서 임금께 아뢰지 않았다. 또 하루는 임금의 부름을 받고 궐내에 도착하였다가 병을 핑계대고 나가버렸다. 이에 대간이, 이이가 국정을 전단(專斷)하고 임금을 업신여긴다고 탄핵하였으며, 홍문관에서도 차자를 올려 이이를 왕안석(王安石)에 비유하였으니, 그 차자는 바로 허봉(許篈)이 기초(起草)한 것이었다. 상이 매우 성내어 대신 박순(朴淳)ㆍ김귀영(金貴榮)ㆍ정지연(鄭芝衍) 등을 불러 물으니, 박순은 이이가 잘못이 없는데 남에게 모함을 받았다고 역설하고, 지연은 이이의 일처리가 잘못되었으니 사람들의 말이 반드시 다 그르다고는 할 수 없다고 하였으며, 귀영은 이이를 침해하는 말이 많았다.
상이 성내어 묻기를,
“이이는 과연 소인인가? 바로 말하라.”
하니, 귀영이 대답하기를,
“사람을 아는 것이 실로 어려운 것이니, 신이 어찌 그가 반드시 소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그들이 물러간 뒤에 상은 귀영이 당파에 아첨하고 정직하지 않다고 하였다. 귀영이 드디어 갈렸다.
이이의 문하생 몇 사람이 성균관과 사학(四學)에서 글을 올려 이이를 변명하고, 왕자의 사부 하낙(河洛), 황해도 유생 박추(朴樞), 유학(幼學) 신급(申礏)ㆍ박제(朴濟), 전라도 유생 변사정(邊士貞), 호군(護軍) 성혼(成渾) 등이 서로 잇달아 상소하여 이이는 충성스러운 사람인데 간사한 자들에게 모함을 받았다 하니, 상이 곧 그들을 칭찬하였다. 또 동인쪽 선비들 수십 명이 상소하여 이이를 논핵하여 전일의 유생들의 말은 공론이 아니라고 하니, 조정이 매우 소란하여 송사하는 사람들이 모인 것 같았다.
대사간 송응개(宋應漑)가 독계(獨啓)하여, 이이가 젊었을 때에 아버지를 버리고 중이 되었던 일과 토지를 다투어 탐욕을 부린 일 등을 말하고 나라를 파는 소인이라고까지 하니, 상이 성내어 그를 체직시켰다. 도승지 박근원(朴謹元)이 그의 동료 김제갑(金悌甲)ㆍ이원익(李元翼)ㆍ성낙(成洛) 등을 거느리고 유생들이 이이를 구원한 것은 공론이 아니라고 아뢰니, 상이 직위장(直衛將) 정복시(鄭復始)ㆍ권벽(權擘)을 불러들여 가승지(假承旨)를 삼고, 근원 등을 해임하여 내쫓으라고 명하였다.
얼마 뒤에 근원은 강계(江界)로, 응개는 회령(會寧)으로, 허봉은 갑산(甲山)으로 귀양 보내고, 김응남을 제주 목사(濟州牧使)로, 이이를 이조 판서로, 성혼을 참판으로, 정철을 대사헌으로 삼았으며, 그 밖에 대각(臺閣)에 있으면서 이이를 공격한 사람은 모두 지방관으로 내보냈으며, 지연은 등창이 나서 죽었다.
다음 해 갑신년(1584, 선조 17) 봄에 이이가 병으로 죽었다. 이해 여름에 큰 가뭄이 드니, 말하는 자가 혹은 세 사람(박근원, 송응개, 허봉)을 귀양 보냄이 너무 지나쳤다고 말하였으나, 임금은 여전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6월에 노수신(盧守愼) 공이 좌상으로서 조정에 돌아오고, 나는 경상 감사로서 특명으로 부제학이 되어 소환되었다가 곧 예조 판서에 승진되었다. 사류들도 조금씩 다시 등용되었다.
그 뒤에 근원은 유배지에서 죽고, 응개와 허봉은 편의대로 거주하게 하였으나 오래지 않아 모두 죽었다. 허봉의 자(字)는 미숙(美叔)으로 허엽(許曄)의 아들이다. 뛰어난 재주가 있었으나 성질이 경망하였다. 경서와 사기(史記)에 폭넓은 지식이 있었으며 문장도 잘 지었다. 관동 지방의 산수를 유람하다가 객지에서 병을 얻어 영평(永平) 수령 서인원(徐仁元)이 지우(知友)라 하여 들러서 묵고 가기를 요구하였으나 문지기에게 거절당하고 여관에서 죽으니, 이 소문을 듣는 이들이 슬퍼하였다. 저서로 《이산잡술(伊山雜述)》이 있고, 《해동야언(海東野言)》과 《조천록(朝天錄)》을 편차(編次)하였다.
沈義謙
沈義謙。仁順王后之弟也。明宗朝。其姑夫李樑專權。與李戡等相結構奇大升李文馨朴素立許曄等五六人。削職貶黜。皆士類也。朝野洶洶。義謙密通於內。言樑亂政害人。不可不去。遂令副提學奇大恒論之。一啓卽允。樑及其黨。悉遠竄。而文馨等還敍。自是義謙有名於士林。而頗有專擅之漸。登第不五年爲堂上。朴淳珥等尤親厚。金孝元晩起。年少氣銳。議論無所避。以爲義謙外戚。不可柄用。義謙亦言。孝元幼時。嘗與尹元衡婿安德大交遊。寄食於元衡家。互相訾謗。其右義謙者謂之西。其右孝元者謂之東。蓋義謙居在城西。孝元居在城東故也。珥累上疏。言朝臣分裂之患。請協和鎭定。而其言常主於西。又有鄭澈者。剛偏主論尤乖。欲盡斥一邊。而攻孝元太峻。以爲小人。於是士論益激矣。未幾。有宗室慶安令瑤請對。論柳成龍金應南李潑金孝元朋比。余以副提學。棄官南歸。時李珥爲兵曹判書。方得時用事。輕躁附會之徒。日滿其門。論議風生。人皆疑瑤承望爲此。士論與珥相激日甚。會北邊有事。珥令軍士納馬者免防。不啓稟。又一日承召到闕內。稱病出去。於是臺諫劾珥專擅慢上。弘文館又上箚。比珥於王安石。箚乃許篈所草。上大怒。命召大臣朴淳金貴榮鄭芝衍問之。淳力言珥無失。爲人所構。芝衍言珥處事疏謬。人言未必皆非。貴榮語多侵珥。上怒問曰。珥果小人否。其直言之。貴榮對。知人實難。臣何以必其爲小人。旣退。上以貴榮。阿黨不直。貴榮遂遞。珥門徒數人。從館學上書。以訟珥。王子師傅河洛。黃海道儒生朴樞。幼學申礏朴濟。全羅道儒生邊士禎。護軍成渾等。相繼上疏。言珥忠誠。爲奸邪所陷。上輒褒奬。又有東邊士人數十人。上疏論珥言。前日儒士非公論。朝廷大擾如聚訟矣。大司諫宋應漑。獨啓發珥少時棄父爲僧。及爭田貪汙等事。至以爲賣國小人。上怒遞其職。都承旨朴謹元。率其僚金悌甲李元翼成洛等。啓儒生之救珥者非公論。上招入直衛將鄭復始權擘。爲假承旨。命遞謹元等。駈出之。旣而竄謹元于江界。應漑于會寧。許篈于甲山。以金應南。爲濟州牧使。拜珥爲吏曹判書。渾爲參判。澈爲大司憲。其他在臺閣攻珥者。皆出補外。芝衍疽發背卒。明年甲申春。珥病卒。是年夏大旱。言者或謂三竄過中。上猶不納。六月盧公守愼。以左相還朝。余以慶尙監司。特旨爲副提學召還。卽陞禮曹判書。而士類稍復進用。其後謹元死於謫所。應漑篈任便居住。未久皆死。篈字美叔。曄之子也。有俊才。而性輕脫。博洽書史能文章。遊關東山水。道得病。以永平守徐仁元爲知友。歷投求宿。爲閽者所拒。死於逆旅。聞者哀之。所著有伊山雜述。編次海東野言朝天錄。
이숙헌(李叔獻)
이이(李珥)의 자는 숙헌(叔獻)이다.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 원수(元秀)에게 애첩이 있었는데, 그를 대우함이 좋지 못하므로 이이가 분이 나서 달아나 산으로 들어가 중이 되어 의암(義庵)이라 이름하고, 풍악산(楓岳山), 오대산(五臺山) 등 여러 산을 유람하였다.
성품이 총명하고 민첩하며 시를 잘 짓고, 문장에 더욱 뛰어났다.
전신은 분명 김시습이요 / 前身定是金時習
이 세상에선 도로 가낭선이 되었구나 / 今世還爲賈浪仙
라는 시가 있다. 20세가 넘어서 머리를 기르고 집에 돌아와서 사류들 가운데에 유명해졌다.
갑자년(1564, 명종 19)에 생원과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문묘에 가서 배알하고자 하니, 성균관 유생들이 이이가 일찍이 중이었다 하여 막고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그래서 이이가 함께 급제한 사람들과 벽송정(碧松亭)에 앉아서 날이 늦도록 들어가지 못하였으나, 이야기하고 웃는 것이 태연하여 부끄러워하는 빛이 없었다. 성균관 박사 권문해(權文海)가 여러 유생들에게 강권하여 풀어 주어 드디어 들어가 배알의 예를 행하고 나왔다. 그 해에 대과(大科)에 장원 급제하니 명망이 더욱 높아졌다. 이조 좌랑, 홍문관 교리를 역임하였다. 그때에 삼사에서 을사위훈(乙巳僞勳)을 삭제하기를 청하느라 1년이 다 가도록 논계하여 차자를 날마다 올렸다. 이이가 올 때마다 동료들은 붓을 놓지 않았는데, 이이가 종이와 붓을 청하여 물 흐르듯 문장을 써서 조금도 막히거나 주저하는 일이 없었다.
조금 있다가 벼슬을 버리고 해주(海州)로 돌아갔다. 더러는 파주(坡州)의 임진강(臨津江) 가에 살기도 하였다.
성혼과 교분이 두터워 서로 존중하였다. 여러 번 소를 올려 시사(時事)를 논하니, 상이 그에게 포부가 있다고 생각하여 크게 등용하려 하였다. 그래서 신사년(1581, 선조 14) 간에 부제학과 대사헌에서 차례를 뛰어넘어 호조 판서에 배명(拜命)되고, 병조 판서를 거쳐 우찬성에 이르렀다. 만년에 사람들의 공격을 받았는데, 어떤 이는 그를 왕안석에게 비유하였다 한다. 갑신년 봄에 병으로 죽었다.
李叔獻
李珥字叔獻。少喪母。父元秀有愛妾。遇之不善。珥發憤逃去。入山爲僧。名義庵。遍遊楓岳五臺諸山。性穎敏能詩。尤長於文。有前身定是金時習。今世還爲賈浪仙之句。二十後。長髮還家。有名於士類中。甲子生員壯元。欲謁聖。館中諸生。以珥曾爲僧。拒不納。珥與同榜坐碧松亭。日晩不得入。談笑自若。無怍色館博士權文海。强諸生力解之。遂得行禮而出。是年壯元及第。名益重。歷吏曹佐郞弘文館校理。時三司請削乙巳僞勛。終年論啓。章箚日上。珥每至。同僚束筆。不辭。呼紙筆。文翰如流。略無碍滯。旣已棄官歸海州。或在坡州臨津上。與成渾交厚。互相引重。屢上疏論時事。上意有抱負。欲大用之。辛巳間。從副提學大司憲。超拜戶曹判書。由兵曹判書。至右贊成。晩年爲人所攻。或比之王安石云。甲申春。病卒。
성호원(成浩原)
성혼(成渾)의 자는 호원(浩原)이다. 그의 아버지 수침(守琛)은 숨어 살고 벼슬하지 않았다. 훌륭한 덕(德)과 높은 명망이 있었으며, 호를 청송(聽松)이라 하였다. 70여 세에 집에서 사망했다.
성혼은 이름난 현인의 아들로 일찍부터 당시의 명예가 있었으나 과거를 일삼지 않았다. 이이등이 적극 추천하여 조정에서 불렀으나 나오지 않았다. 이이가 조정에 있을 적에 성혼의 명성이 더욱 성해지니, 상의 기대가 날로 높아져서 여러 번 불렀다. 성혼이 부름을 받고 도성에 들어오던 날에는 성중의 명예를 좋아하는 선비들이 모두 나가서 맞이하였다. 상이 인견(引見)하고 대도(大道)의 요점을 물으니, 성혼의 대답에 그다지 특이한 것은 없었다. 통정대부로 올리고, 또 가선대부로 승진시켜 이조 참판을 삼으니, 포의(布衣)로서 재상의 반열에 이른 경우는 근세에 없던 일이었다.
뒤에 고향으로 돌아가 있었다. 임진왜란 때에 왕의 피난 행차가 파주(坡州)를 지나므로, 왕의 생각에는 성혼이 나와서 어가를 호종(扈從)하리라고 여겼는데, 나오지 않자 매우 섭섭하게 여겼다. 그 해 겨울에 성혼이 성천(成川)에 가서 세자를 호종하니, 우의정 유홍(兪泓)이 좌상 윤두수(尹斗壽)에게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성혼은 어진 사람이니 마땅히 벼슬의 품계를 올려 주어야 할 것이다.”
하였으니, 이것은 유홍은 성천에 있고, 두수는 행재(行在)에 있었기 때문이다. 두수가 유홍의 말대로 청하였으나, 상께서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이조에서 곧장 참찬으로 추천하였더니, 낙점하여 드디어 자헌대부가 되었다. 성혼이 성천에서 처자를 거느리고 의주로 달려가서 사은하고, 당시 의론을 주도하여 홍여순(洪汝諄)ㆍ송언신(宋言愼)ㆍ이홍로(李弘老) 등을 귀양 보내니, 이들은 모두 이산해(李山海)의 당파였다.
평양이 수복되자 상이 의주에서 수레를 되돌렸다. 성혼이 그 뒤로는 어가에 호종하지 않다가 상을 정주(定州)로 뒤쫓아와서 병 때문에 호종하지 못하였다고 하고 대죄(待罪)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이 의병장이 되었으니 수복되기를 기대할 수 있다. 한때의 일이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대죄하지 말라.”
하였다. 이것은 성혼이 파주에 있을 적에 고을 사람들을 거느리고 의병이라고 일컬었으므로 상이 그것을 기롱한 것이다.
계사년(1593, 선조 26) 여름에 왕명을 받들고 가서 왜적에게 도굴된 정릉(靖陵)에서 나온 시신의 진위(眞僞)를 살펴보게 되었는데, 진짜가 아니라고 주장하여 드디어 그것을 버리고, 빈 능을 다시 옛 모습대로 만들었다. 돌아오는 길에 병을 핑계대고 재령(載寧)에 머물면서 비밀리에 승지 구성(具宬)에게 부탁하기를,
“정릉의 시신은 다른 시체를 가져다 놓고 공(功)을 요구한 것이다.”
하고, 임금께 그 일을 아뢰게 하였으니, 그 뜻은 나를 모함하려는 데에 있었다. 구성이 돌아와 성혼의 말대로 아뢰자 옥사(獄事)가 일어나서 이홍국(李弘國) 등과 그와 같이 갔던 10 인을 체포하여 삼성(三省)이 같이 추국하였는데, 체포된 자의 전후의 진술이 한결같고 틀린 것이 없었으므로 일이 잘 풀렸다. 그러나 이로부터 정릉에 관한 논의가 드디어 그치고 다시 말하는 자가 없었다.
상이 환도하자 성혼이 뒤쫓아 도성에 들어와 등대(登對)하여 아뢰기를,
“왜적과 화친해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성내어 그 그름을 배척하니, 성혼이 두려워하며 궐문 밖에 나와서 명을 기다리다가 벼슬이 해임되어 돌아갔다.
무술년(1598, 선조 31)에 병으로 집에서 죽었다. 임종할 때에 큰 범이 그의 집 지붕에 올라가서 이엉을 걷어 차내며 크게 으르렁거려 소리가 산골짜기에 진동하였다. 이와 같이 하기를 여러 날 밤을 계속하므로 집안 사람들이 무기와 몽둥이를 가지고 호위하여 겨우 화를 면하였는데, 수일 만에 죽었다.
成浩原
成渾字浩原。父守琛。隱居不仕。有厚德重望。號聽松。年七十餘。終於家。渾以名賢子。早得時譽。不事科擧。李珥等極推之。朝廷徵不起。及珥在朝。渾名稱益盛。上傾佇日隆。屢召之。渾赴召入城之日。城中士子好名者。悉出迎之。上引見。問大道之要。渾對無甚異者。陞通政嘉善。爲吏曹參判。以布衣至宰列。近世所未有也。後還鄕。壬辰車駕播遷。過坡州。意渾出扈駕。旣而不至。上甚歉之。是冬渾從世子于成川。右議政兪泓。以書與左相尹斗壽。言渾賢者當增秩。蓋泓在成川。而斗壽在行在故也。斗壽啓請如泓言。上無可否。吏曹直擬參贊望點出。遂爲資憲。渾自成川。率妻子趨義州謝恩。主時論竄洪汝諄宋言愼李弘老等。皆李山海黨也。平壤旣復。上自義州旋軫。渾後不扈駕。追及上於定州。托病待罪。上答之曰。卿爲義兵將。恢復可期。一時事何關。勿待罪。渾在坡州。曾率鄕人稱義兵。故上譏之。癸巳夏。承命往審靖陵。所得尸軀眞僞。倡言非眞。遂棄之。虛復其陵。還道稱病留載寧。密囑承旨具宬。言靖陵尸軀。假他尸以邀功。使白其事。意在陷余。宬還啓如渾言。起獄逮捕李弘國等。及同往者十人。三省同鞫。被逮者前後至。供辭如一。無違端。事得解。然自是陵議遂寢。無敢復言者。及上還都。渾從入城登對。言賊可和。上怒斥其非。渾惶恐出門待命。解職而歸。戊戌病卒於家。臨死有大虎登其屋。撤蓋茨大吼。聲振山谷。如此連夜。家中人持兵杖自衛僅免。數日乃死。
정계함(鄭季涵)
정철(鄭澈)의 자는 계함(季涵)이다. 이이ㆍ성혼과 가장 친하였으며, 또 심의겸(沈義謙)을 시켜서 김효원(金孝元)을 적극 공격하게 하였다. 계미년(1583, 선조 16)에 허봉(許篈) 등이 죄를 받은 데에는 정철의 힘이 있었다.
기축년(1589, 선조 22)에 역옥(逆獄)이 일어났을 때에는 추관(推官)이 되어 기회를 타서 자기와 당파가 다른 사람을 많이 모함하였다. 사람들이 그를 소인이라 지목하여 강계(江界)로 귀양갔다. 임진년에 행재(行在)에 불려 갔는데, 또 상의 뜻에 거슬려 죽은 뒤에 관작(官爵)이 삭탈되었다.
鄭季涵
鄭澈字季涵。與李珥成渾最親。又敎沈義謙。力攻金孝元。癸未許篈等得罪。澈有力焉。己丑逆獄起。爲推官。乘時多陷異己。人目爲小人。竄江界。壬辰召赴行在。又忤旨。死後追奪官爵。
최효원(崔孝元)
최영경(崔永慶)의 자는 효원(孝元)이다. 처음에는 한양(漢陽)의 원동리(院洞里)에 살았는데, 어버이 상을 당하였을 때에 애훼(哀毁 부모의 상에 매우 슬퍼하여 몸이 쇠약해짐)로 소문이 났다. 재산을 다 털어 장사를 후하게 하여 석곽(石槨)을 썼다. 조금 뒤에 집안이 더욱 궁핍하게 되어 생활할 수 없으므로 처자를 데리고 진주(晉州)로 내려가서 그의 아우 여경(餘慶)의 처가에 의지하였다. 모든 일을 영경이 주관하고 여경은 그의 앞에서 공손히 명령을 받으니, 보는 이가 그곳이 여경의 집인 줄 몰랐다. 세상 사람들은 이 두 사람을 다 어질게 여겼다.
영경은 사람됨이 구애됨이 없이 기개를 숭상하였으며, 글을 읽을 때에는 깊이 캐기를 추구하지 않았으며 언론(言論)을 좋아하였다. 조남명(曺南冥 식(植))을 보고 좋아하여 스승으로 섬겼다. 조정에서는 유일(遺逸)로 불러 전후에 사축(司畜)과 지평(持平)으로 삼았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높은 관리가 문 밖에 와서 만나기를 원하더라도 그가 좋지 않게 여기는 사람이면 즉각 거절하고 만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남에게 원망을 많이 샀다.
갑신년에 내가 경상 감사가 되어 관내(管內)를 순행하다가 진주에 이르러 오래 전부터 영경의 이름을 들어 그 집에 찾아갔더니, 집이 우거진 대밭 속에 있었는데, 영경이 베옷을 입고 학 한 마리와 함께 그 안에 살고 있었다. 훤칠한 키에 수염이 아름답고 풍채가 훌륭하였다. 술자리를 베풀어 마주앉아 서로 권하였는데, 술이 거나해지자 말이 당대의 일에 미쳐 나를 놀라게 하였다.
기축년에 정여립(鄭汝立)의 역옥 사건이 일어나자 사류 중에 연루된 자가 많았다. 전라도 유생 홍천경(洪千璟) 등이 권신의 뜻을 받들어 영경이 역적의 도당이라고 모함하여 감사 홍여순(洪汝諄)에게 말하니, 여순이 즉시 경상 감사 김수(金睟)에게 공문을 보냈다. 영경을 체포하여 한편으로 조정에 급히 보고하여 알리고, 드디어 그의 아우 여경과 함께 서울 감옥에서 국문(鞠問)을 받게 되었다. 바야흐로 서울 감옥에서의 일이 급하게 되었으나 감히 그의 원통함을 말하는 이가 없었다. 다만 안음(安陰) 유생 김경근(金景謹)이 소를 올려 말하였으나, 비답이 없었다. 조금 뒤에 여경이 먼저 고문을 당하여 옥중에서 죽었다. 그때에 좌상 정철(鄭澈)이 당시 의론을 주장하여 옥사를 맡고 있었다. 하루는 내가 대궐에서 정철을 만나,
“영경의 옥사가 어떻게 되었소?”
하고 묻고, 또 말하기를,
“이 사람은 뛰어난 선비로 중망(重望)이 있으니, 옥사를 자세히 살피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오.”
하니, 정철이 평소부터 경솔하고 또 술에 취하여 갑자기 자기 왼손으로 자기의 목을 잡고 오른손으로 찌르는 형상을 하면서 연달아 말하기를,
“이 사람이 평소에 나에게 이렇게 이렇게 하고자 하였소.”
하였다. 판부사 심수경(沈守慶)이 옆에 있다가 해명하기를,
“남의 말을 어찌 다 믿을 수 있소. 원컨대, 대감은 남의 말을 믿지 마시오.”
하였다. 내가 정색하며 말하기를,
“가령 그 사람이 실지로 그런 생각이 있었다 하더라도 공이 지금 옥관(獄官)으로 있으니, 마땅히 그 생각은 잊어야 할 것인데, 어찌 이러시오?”
하니, 정철이 웃으며 말하기를,
“내가 어찌 그것을 생각하겠소. 이미 추안(推案)에 극구 해명하였기 때문에 오랫동안 고문하지 않고 그냥 가두고만 있소.”
하고, 또 나에게 말하기를,
“공이 이미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면 어째서 말하지 않았소?”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이것은 큰 옥사이니 외부인이 말하는 것은 무익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 화를 더하게 할 것이오. 오직 옥사를 다스리는 사람만이 사리(事理)를 바르게 펼 수 있는 것이오.”
하니, 정철이,
“내가 진실로 이미 마음을 다하고 있으니 다른 일이 없도록 보증하겠소.”
하였다. 수일 뒤에 영경이 과연 옥에서 풀려 나왔다. 사헌부에서 도로 수감(收監)하여 다시 국문하기를 청하였는데, 이때 윤두수(尹斗壽)가 대사헌이고, 발의(發議)한 자는 실로 장령 구성(具宬)이었다. 사람들은 정철이 비록 겉으로는 공론을 보고서 석방해 주는 체하면서 은밀히 자기의 당파를 시켜 논핵하게 한 것이라고 의심하였다. 영경이 전에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이미 폐병을 앓고 있었으므로 친구 이조춘(李遭春)에게 부탁하여 나에게 약을 구하였다. 두 번째 옥에 갇히자 병이 더욱 심해져서 오래지 않아 죽었다. 사헌부에서 또 아뢰기를,
“영경이 스스로 자기 죄를 알고 독약을 먹고 자살하였습니다.”
하고, 당직 도사(當直都事)를 파면하니, 사람들이 그의 죄가 심했다 하여 정철이 죄를 받게 되었는데, 여러 신하들이 영경이 억울하게 죽은 것을 말하는 자가 많았다. 이에 영경에게 대사헌을 추증하고, 그 당시 대관(臺官)이었던 구성 등은 귀양보냈다. 정철은 죽은 뒤에 또한 이 일 때문에 관작이 추탈(追奪)되었다.
영경은 평시에 성혼(成渾)과 교분이 두터웠는데, 성혼이 이이와 함께 정철과 결탁하자 영경이 매양 정철은 형편 없는 소인이라고 드러내놓고 말하고, 술을 마신 뒤에 술이 매우 취하면 두 무릎을 내놓고 손으로 스스로를 만지면서,
“이 무릎은 마침내 정철에게 고문당하게 될 것이지만, 내 어찌 두려워하겠는가.”
하고, 이어 큰소리 치기를 그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성혼과의 교분이 끝까지 가지 못하였다.
임진년에 내가 안주(安州)에 있을 때에 정철이 행재소로부터 체찰사에 임명되어 남쪽으로 가다가 나를 백상루(百祥樓)에서 만났다. 술이 반쯤 취하였을 때에 갑자기 말하기를,
“공이 내가 최영경을 모함하여 죽였다고 말하였다는데, 과연 그런 말을 하였소?”
하기에, 내가 천천히 대답하기를,
“공의 마음은 알 수 없으나 형적(形跡)으로 본다면 그런 것 같았기 때문에 과연 그런 말을 한 일이 있소.”
하니, 정철이 성내어 술잔을 땅에 던지고 일어나 두어 걸음 가다가 도로 앉아서 말하기를,
“공은 어째서 그런 말을 하시오? 그를 구원하려 한 성호원(成浩原)의 편지가 아직도 나에게 있는데, 내가 어찌 감히 그렇게 할 수 있었겠소?”
하였다. 나는 옆에 있는 사람들과 서로 돌아보면서 한 번 웃고 말았다.
무술년(1598, 선조 31) 겨울에 내가 동성(東城) 밖에 있을 때에 이귀(李貴)가 종이 한 장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였으니, 곧 정철이 옥사를 맡았을 때에 영경을 구원하고자 하다가 올리지 못한 계사의 초고(草稿)였다. 이귀가 말하기를,
“정승 정철의 본심은 이러하였는데 세상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너무 지나치게 의심하므로 그의 자제가 사람을 시켜서 가져와 보인 것입니다.”
하였다. 그 뒤에 논하는 사람들이, “성혼이 정철을 사주하여 영경을 죽이게 하였다.’고 추후에 말하자 성혼의 관직도 삭탈하였다. 이쪽 저쪽의 논의가 지금까지도 그치지 않는다.
崔孝元
崔永慶字孝元。始居漢陽之院洞里。居親喪。以毀聞。傾財厚葬用石槨。旣而家益窮乏。不能自存。挈妻子下晉州。依其弟餘慶妻家。凡事永慶主之。餘慶趨走承稟於前。見之不知爲餘慶之家人。兩賢之爲人。倜儻尙氣。讀書不求深解。好言論。見曺南冥而悅之。因師事焉。朝廷以遺逸徵。前後爲司畜爲持平。皆不起。達官有到門求見者。其所不善。輒排而不見。以此多怨於人。甲申余爲慶尙監司。行部至晉。久聞永慶名。爲造其廬。廬在萬竹間。永慶布衣。與一鶴處其中。長身美鬚髥。風神偉如也。設酒相待。酒酣。語及當世事驚人。己丑鄭汝立逆獄起。士類多連累者。全羅道儒生洪千璟等。承權臣風旨。誣永慶黨逆。言於監司洪汝諄。汝諄卽移文慶尙監司金睟。捕永慶。一邊馳啓朝廷。遂與其弟餘慶。逮鞫於京獄。方京獄事急。無敢言其冤者。獨安陰儒生金景謹。上疏言之。不報。旣已餘慶先被拷掠死獄中。時左相鄭澈主時論按獄。一日余遇澈於闕下。問永慶獄事如何。且言。此人有高士重望。獄事不可不詳審。澈素輕。又被酒。忽以左手自執其項。右手爲衝刺狀。連聲言。此人平日向我欲如此如此。判府事沈守慶。在傍解之曰。人言何可盡信。願大監毋信人之言。余正色曰。假使其人實有是。公今爲獄官。當忘此懷。何故乃爾。澈笑曰。吾豈念此。已於推案。極力解之。故久不加刑訊。惟仍囚耳。且謂余曰。公旣有此懷。何不言之。余曰。此乃大獄。外人言之。非徒無益。反益其禍。惟莅獄之人。乃可伸理。澈曰。吾固已盡心。保無他也。數日永慶果赦出獄。司憲府啓請。還收更鞫。時尹斗壽爲大司憲。而發議則掌令具宬實爲之。人疑澈雖外示公議。陽爲解釋。而陰使其黨論之。永慶前在獄。已患肺痿。托友人李遭春。求藥於余。及再入獄。病增劇。未久卒。司憲府又啓。永慶自知其罪。飮毒死。罷當直都事。人甚之其罪澈得罪。而群臣多言永慶枉死者。於是贈永慶大司憲。當時臺官具宬等竄逐。澈死後。亦以此追奪官爵云。永慶平時。與成渾交厚。及渾與珥相結。而永慶每誦言澈爲無狀小人。酒後醉甚。則出兩膝。以手自撫曰。此膝終當爲鄭澈所拷掠。然吾何畏焉。因大言不已。以此與渾交道不終。壬辰余在安州。澈自行朝爲軆察使南去。見余於百祥樓上。酒半。忽曰。公請我搆殺崔永慶云。果然否。余徐答曰。公心不可知。以形迹觀之。似然。故果有是言矣。澈怒擲盃於地。起行數步。還坐曰。公何爲此言。成浩原救解書尙在於我。我何敢如此。余與傍人相顧一笑而罷。戊戌冬。余在東城外。李貴持一紙來示余。乃澈按獄時。欲救解永慶。未上啓草也。貴言鄭相本心如此。世人不知。而疑之太甚。故其子弟使人來示云。其後論者追言。渾嗾澈殺永慶。並奪渾官職。彼此論議。至今未已云。
정릉(靖陵)에 관한 일을 기록함
계사년(1593, 선조 26) 4월 초순에 선릉(宣陵)과 정릉이 왜적에게 도굴되었다. 그때 나는 동파(東坡)에 있었는데 이 제독(李提督 이여송(李如松))이 평양에서 개성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듣고, 원수(元帥) 김명원(金命元)과 함께 가서 문후(問候)하였다. 접반사 이덕형(李德馨), 유수(留守) 노직(盧稷), 호조 판서 이성중(李誠中) 등 5~6인이 접대청(接待廳)에 모여 앉아 있는데, 경기 좌감사(京畿左監司) 성영(成泳)의 급보가 왔다. 그때는 캄캄한 밤중이었으므로 불을 켜고 그 글을 펴 보니, 바로 능침(陵寢)에 변고가 생겼다는 보고였다. 즉시 울부짖으며 슬퍼하니, 제독이 듣고 그 보고를 가져다 보았다. 나는 여러 공들과 함께 만월대(滿月臺) 앞 남쪽 산기슭에 가서 능쪽을 바라보면서 곡하였다. 이튿날 새벽에 김 원수(金元帥)와 함께 동파로 돌아와서 사람을 모집하여 가서 두 능의 상황을 알아보고자 하니, 군관 이홍국(李弘國)이라는 자가 나와 꿇어앉아 말하기를,
“소인은 바로 양녕대군(讓寧大君)의 후예입니다.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어찌 보통 사람들과 같을 수 있겠습니까? 비록 죽을지라도 가겠습니다.”
하였다. 나는 원수와 함께 그의 충성을 칭찬하고, 또 말하기를,
“그대가 혼자 갈 수는 없으니, 다시 가기를 원하는 군사 10인을 모집하여 함께 가도록 하라.”
하였다. 그때에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이 강화에 있었는데 거느리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경성(京城) 사람들이었다. 그 중에서 내가 일찍이 2백 명을 뽑아서 동파에 두고 심부름을 시키고 있었다. 홍국에게 그들 중에서 모집하게 하였더니, 과연 10인이 응모하였는데, 모두 각 사(各司)의 관노(官奴)로 봉상시(奉常寺) 사람이 절반이었다. 내가 모두 앞에 불러 놓고 울며 타이르니, 모두 감격하여 힘을 다하겠다고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식량과 물품을 갖추어 보냈다. 떠나갈 때에 내가 타이르기를,
“너희들은 이미 각 사의 사람들이니 두 능으로 가는 길에 본래부터 익숙할 것이지만, 근래에는 오래도록 강화에 있었기 때문에 동쪽 적의 진영이 있는 곳은 자세히 알지 못할 것이다. 분방어사(分防禦使) 고언백(高彦伯)이 양주(楊州)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해유령(蟹踰嶺)에 주둔하고 있으니, 너희들이 언백에게 가서 다시 한두 명의 길잡이를 얻는다면 거의 차질이 없을 것이다.”
하고, 즉시 언백에게 보내는 비밀 공문을 홍국에게 주었다. 그때는 4월 9일이었다.
홍국이 떠난 며칠 뒤에 돌아와 보고하기를,
“장군의 명령을 듣고 방어사의 진중에 가서 길을 잘 아는 한 사람을 뽑아서 독임리(禿任里)에 가니, 날이 이미 저물었습니다. 작은 고기잡이 배 한 척을 구하여 12명이 같이 타고 흐름을 따라 내려가 밤중에 삼전도(三田渡)를 거쳐서 정릉 아래에 정박하였습니다. 두어 사람은 배를 지키고 8명이 능에 올라가서 보니, 능은 이미 파헤쳐져 있었습니다.
그때 달은 떨어지고 어두운 밤이었으므로 도굴한 곳의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었습니다. 같이 간 사람들의 베로 만든 띠를 풀어 연결하여 차례로 매달려 내려가니, 구멍 안이 어두워서 보이는 것이 없었습니다. 손으로 더듬으니, 누워 있는 시신이 있었으므로 모두 놀라서 손을 움츠렸다가 한참 뒤에 정신을 차려서 손으로 다시 더듬어보니, 시신은 덮은 것이 없이 알몸으로 재와 흙 속에 누워 있는데, 약간 습기가 있어서 손가락에 끈적끈적 묻어 모든 사람들이 굴 밖으로 도로 나왔습니다. 구멍 곁에서 찢어진 옷과 범(梵) 자가 쓰인 두어 장의 종이와 검게 칠을 한 손바닥만한 나무 조각을 주워서 증거품으로 가져왔습니다.
또 선릉에 도착하니 능이 비록 도굴되었으나 얕아서 겨우 한 사람 들어갈 정도였는데 비어서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드디어 배에 돌아와서 거슬러 올라와 삼전도에 이르니, 하늘이 밝아졌습니다. 독임리를 거쳐서 배에서 내려왔습니다. 그 상황은 이러합니다.”
하였다. 내가 김 원수와 순찰사 권율(權慄)과 모여서 의논하였으나 계책이 서지 않았다.
“내가 그들의 보고에 의거해 보면 옥체(玉體)가 광중(壙中)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고 하니, 정리상 애통하여 참을 수가 없다. 또 만일 적이 우리 사람들이 가서 탐지했다는 것을 알고 다시 불측한 짓을 한다면 어찌하겠는가? 만 번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몰래 업고 나와서 다른 곳에 안치(安置)하였다가, 적이 평정되기를 기다려서 능을 복구하게 하는 것만 못하다.”
하니, 모두들,
“그렇다.”
고 하였다.
그때에 원수의 진중에 관은(官銀) 백 냥이 있었으므로 즉시 덜어 내어서 당흑포(唐黑布) 두어 자를 사서 겹이불을 만들고, 또 솜 수십 근을 구하였으며, 권 순찰사가 유둔(油芚)을 내고, 또 대목수를 구하여 남여(藍輿)를 만들되 그 체제를 간편하게 해서 가벼워 쉽게 운반할 수 있게 하였다. 내가 종사관 신경진(辛慶晉)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후일에 반드시 이것을 가지고 나를 모함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오직 군친(君親)의 천양의 화[泉壤之禍]를 구하는 일을 알 뿐이다.”
하였다. 다시 군중에 영을 내려 누구 갈 사람 없느냐고 하니, 창의사 중군(中軍) 박유인(朴惟仁), 전 부장(部長) 김극충(金克忠)과 가기를 원하는 군인이 50인이었다. 이홍국으로 하여금 길을 인도하게 하며 경계하기를,
“이것은 큰일이므로, 나도 멀리서 추측할 수는 없다. 너희들이 거기에 가서 형세를 살펴보고 만약 묻을 만하면 묻고, 그렇지 않으면 다른 곳에 봉안(奉安)하라.”
하니, 유인 등이 응낙하고 갔다. 또 독임리를 거쳐서 배를 타고 밤에 내려가서 시신을 남여 속에 싣고 도로 나와서 물을 거슬러 올라왔으나, 경성의 수십 리 밖까지는 적이 항상 출몰하고 있어서 봉안할 만한 곳이 없으므로 부득이 양주(楊州) 송산리(松山里)로 가서 파괴된 민가 두어 칸을 찾아서 봉안하고, 김극충이 50인을 거느리고서 지키고, 유인은 와서 보고하였다. 나는 즉시 장계를 올려 상황을 보고하였다.
그 달 20일에 적병이 남쪽으로 내려갔으므로 내가 그날로 대군을 따라 서울에 들어갔다. 23일에 송산으로 달려가서 봉심(奉審)하였는데, 감히 열어 보지는 못하고 다만 향하여 곡만 하고 돌아와서 나는 병으로 누웠다. 5월에 들으니, 영의정 최흥원(崔興源), 예조 판서 김응남(金應南), 좌참찬 성혼(成渾), 예조 참판 이관(李灌) 등 5~6인이 행재소에서 차례로 명을 받들고 두 능을 봉심하려 한다고 하였다. 또 들으니, 성혼은 도중에서 사람을 보고 정릉에서 발견된 시신의 진위가 어떠냐고 많이 물어 그의 말이 의심할 만한 것이 많이 있었다 한다. 도착하고 나서 또 들으니, 여러 재상들은 먼저 정릉에 가서 봉심하였다고 한다. 최후에 여러 재상들은 비로소 송산에 가면서 나와 같이 가기를 청하였다. 나는 그때에 병에서 막 일어났으나 일이 중대하기 때문에 병을 참고 가서 모였다.
그때 조신(朝臣) 중에는 중종(中宗)을 섬겼던 사람이 없었고, 오직 동지(同知) 송찬(宋贊)이 나이 84세로 중종 때에 한림(翰林)을 지냈는데, 피난하여 충청도에 있다는 말을 듣고 역마(驛馬)로 불러 왔다. 6월 18일에 여러 신하들이 모두 송산에 모였다. 대신 심수경(沈守慶)ㆍ최흥원(崔興源) 및 유홍(兪泓)은 나와 1열(列)이 되고, 재신 김응남ㆍ성혼ㆍ이관ㆍ권징(權徵)과 종실(宗室) 부안 도정 수산(扶安都正壽山) 등이 1열이 되었으며, 낭청 서인원(徐仁元) 등은 밖에 있었다. 또 예양부인(豫陽夫人)이 평양에서 왔다. 예양은 바로 중종의 왕자인데, 그 부인이 궁중에 있어서 일찍이 중종의 용안을 알고 있기 때문에 온 것이다. 환관 두어 사람도 같이 와서 딴 곳에 있었다. 조금 뒤에 재신들이 들어가 살펴보려고 하는데, 어떤 이가 말하기를,
“다른 사람들은 중종을 섬긴 적이 없으니, 비록 들어가 살필지라도 진짜인지 가짜인지 어떻게 알겠는가? 마땅히 먼저 평소 모습의 대강을 물어 가지고 살펴보아야 그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하니, 모두들 옳다고 하였다. 이에 송 동지와 중종의 용안을 뵈었던 나인[內人]에게 물어서 각각 키가 크고 작은 것과 살지고 수척한 모습을 기록하였다.
첫째로 중종의 체구는 보통 사람 정도인데 조금 크고,
둘째로 중종은 상체(上體)는 풍만하고 하체는 말랐기 때문에 어의(御衣)는 홑치마를 여러 벌 입혀서 하체가 풍성하도록 하였다. 조신들이 그것을 본받아 드디어 등나무 고리를 써서 하의가 풍성하게 하였다.
셋째로 수염은 매우 적고 자줏빛이었으며
넷째로 턱은 밖으로 약간 튀어나왔다.
다섯째로 중종의 뒤통수는 약간 움푹하게 들어갔다. 그런 까닭에 평소에 쓰신 갓이 밖으로 비스듬할 때가 많아서 매양 손으로 바로잡았다고 했다.
다 기록한 뒤에, 방안이 좁아서 여러 사람이 들어갈 수 없으므로 나누어서 들어가기로 하였다. 대신이 먼저 들어가면서 송 동지를 청하여 같이 들어갔다. 이불을 들치고 시신을 보니, 체구는 보통 사람 정도이고, 머리카락은 적고, 콧대는 꺾였으며, 수염은 약간 그 흔적이 보였는데, 자세히 보니 자줏빛이었다. 양쪽 어깨는 밖으로 펴졌으며, 가슴은 매우 높고 정강이에는 뼈만 있고 살은 없었으며, 힘줄이 서로 이어져 있었다. 가슴과 배에 칼 자국이 두 군데 있었으니, 아마 왜적이 찌른 것인 듯하다. 온몸 전체는 말라서 마른 나무와 같았다. 4월부터 꺼내다 안치하였고, 그전에 노출되어 있던 것이 또 며칠이나 되는지 알 수 없는데, 벌레나 구더기가 없고 또한 냄새도 없는 것이 매우 이상하여 여러 사람들이 이리 저리 살펴보았다. 송 동지가 또 말하기를,
“중종은 일찍이 등에 종기(瘇氣)를 앓아서 처음에는 의원 김응곤(金應崐)을 시켜서 침을 놓게 하였으나 매우 아프기 때문에 또 박세거(朴世擧)를 시켜서 침을 놓게 하였으니 아마 흔적이 있을 것입니다. 마땅히 이것도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그래서 박유인으로 하여금 시신을 돌려 놓게 하니, 등 뒤에 재와 숯가루가 들러붙어서 두께가 몇 치나 되어 살빛이 보이지 않았다. 명주 수건을 물에 적셔서 여러 번 씻으니, 차츰 가죽과 살이 보이는데 홀연히 왼쪽 어깨뼈 아래에 흔적이 두 군데 드러났다. 거리는 1~2푼[分]인데 하나는 크고 하나는 작으며, 사면에 검은 무리가 있어 둥글기가 큰 엽전만하고 그 가운데가 뚫려 있었다. 보는 자들이 크게 놀랐다. 나온 뒤에 김응남ㆍ성혼ㆍ권징 등이 다음에 들어가게 되자 송공에게 앞을 다투어 묻기를,
“어떻소?”
하니, 송공이 말하기를,
“매우 놀랄 만합니다. 신장은 보통 사람 정도이고, 상체는 풍만하고, 하체는 말랐으며, 턱은 약간 나왔고, 뒤통수는 들어갔으며, 또 종기의 흔적이 있습니다.”
하니, 성혼이 침묵한 채 대답하지 않았다. 들어갔다가 오래지 않아 곧 나와서 도로 앉았다. 여러 재상들이 서로 돌아보면서 말을 꺼내지 않았다. 성혼이 정중히 일어나 홀로 대신 앞에 나아가 화를 내며 말하기를,
“들어가 살펴보니, 비록 체구는 보통 사람 정도라고는 하나, 나의 소견은 이러합니다. 비록 상체가 풍만하고 하체는 말랐다고 하나, 이러한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고, 송공이 말한 바를 하나하나 열거하며 반박해 나가는데 다른 말을 할 겨를도 없이 다만 ‘그러한 것을 보지 못했다[不見如是].’는 넉 자만으로 그 말을 다 혼란하게 만들고, 마친 뒤에는 유유히 물러가 버리니, 같이 있던 사람들은 서로서로 얼굴만 바라볼 뿐이었다.
내가 말하기를,
“다른 일은 알 수 없다고 치더라도 등 뒤의 종기 흔적은 어찌 의심스럽지 않은가?”
하니, 부안 도정이 즉시 성혼의 말에 덩달아 큰소리로 말하기를,
“등 뒤의 종기가 비록 의심할 만은 하나 여섯 군데나 흉터가 있으니 어찌 그렇게 많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이미 여러 사람들과 같이 살펴보았는데 분명 두 군데가 있었습니다. 지금 여섯 군데라고 말하니 이는 큰일이므로 말이 이렇게 서로 어긋나서는 안 됩니다. 모름지기 즉시 다시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고, 드디어 다른 재상으로 하여금 수산과 같이 다시 들어가 살피게 하였더니, 과연 두 군데였다. 수산이 말이 궁하여,
“앞에서 말한 여섯 군데라는 것은 대강 말한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나 좌중에 있는 사람들이 성혼을 겁내어 다시 어떻다고 변론하지 않았다. 날이 저물어 파하고 성중으로 돌아왔다.
이튿날 또 남학동(南學洞)의 빈 집에 모여 장계를 올리려 하였다. 내가 늦게 달려가서 보니, 여러 사람들의 논의가 이미 성혼에게 휩쓸려 따라가고 있었다. 내가 최 영상에게 말하기를,
“제공(諸公)의 소견이 이미 그렇다면 딴 논의를 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정릉의 옥체는 장차 어디로 갔다고 합디까?”
하니, 최 영상이 말하기를,
“능 앞에서 작은 재를 발견하였는데, 여럿이 그것으로 해당시켜서 적이 태운 것이라 합니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근일에 적이 시체를 태운 곳을 많이 보았는데, 사람의 형체는 비록 재가 되었더라도 여전히 뚜렷이 알아볼 수는 있었습니다. 지금 이 능 앞에서 발견된 재의 흔적은 길었습니까? 짧았습니까?”
하니, 최 영상이,
“길지 않았으며, 그 흔적은 둥근데 겨우 방석만하였습니다.”
하였다. 예조 참판 이관이 즉시 말하기를,
“매우 길었습니다.”
하니, 최공이 멍한 기색으로 말하기를,
“그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길이는 길지 않았고 또 그것이 옥체의 재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의론에는 여러 사람을 어길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나도 감히 그 말에 단정짓지 못하고, 다만 말하기를,
“등 뒤의 종기 흔적은 오래된 일이므로 분명히 알 수는 없으나, 근처 산의 옛 무덤을 발굴한 곳이 있고 없는지를 마땅히 아울러 살펴보아야 할 것이고, 대충대충 결정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라고, 의견을 올리고 물러나왔다. 대개 사람의 시체는 가장 잘 썩는 것이어서 막 죽은 시체도 수일이 지나지 않아 모두 부패하는 것인데, 지금 이 시체는 바깥에 둔 지가 몇 개월이나 되었고, 한창 더운 여름인데도 냄새도 없고 벌레도 없으니, 깊이 장사하였거나 지극히 오래된 것이 아니면 이럴 수 없다. 그러나 왜적이 어디서 이런 시체를 가져다가 광중(壙中)에 두었겠는가. 이것은 변명할 수 있는 명확한 증거이다. 그때에 이 제독(李提督)이 성중에 있다가 이 소문을 듣고, 또한 말하기를,
“이것은 변별하기 어렵지 않다. 마땅히 오래된 시체인지 근자에 죽은 시체인가를 가지고 결정할 것이니, 오래된 시체라면 필시 다른 사람의 시체는 아닐 것이다.”
하였다. 모임이 있은 하루 뒤에 나는 남쪽으로 경상도에 내려갔다. 경안역(慶安驛)에 이르러 냇가에서 말을 쉬게 하고 있을 때에 종사관 신경진이 나에게 말하기를,
“들으니, 제공의 논의가 송산의 시체는 진짜가 아니라 하여 버리고자 한다는데 천하에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진짜를 가짜라 하는 것이나 가짜를 진짜라 하는 것은 똑같이 지극히 중대한 일이다. 이미 우리가 직접 허실을 알지 못하니 어찌 감히 그 옳고 그름을 단정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얼마 뒤에 내가 남쪽에 있으면서 들으니, 선릉(宣陵)과 정릉(靖陵)에 모두 능 옆에 있던 잡회(雜灰) 조금씩을 관에 넣어서 비어 있는 채로 장사지내고, 송산의 시체는 진짜가 아니라 하여 버렸다. 그러나 임금의 뜻은 여전히 의심하여 후하게 장사지내되 도감이 역사를 감독하게 하였더니, 강우(姜䨞)가 당상에게 말하기를,
“후하게 장사지내면 더욱 사람들의 의심을 살 것입니다.”
하고, 드디어 대충 다른 곳에 묻고 말았다 한다. 박유인(朴惟仁)이 말하기를,
“서소문 밖에 늙은 사약(司鑰) 한 사람이 있어 나이 80여 세이다. 일찍이 중종을 섬겼는데 그 일을 듣고 가슴을 치며 슬퍼하기를, “이것은 실로 중종의 옥체인데 어째서 버렸단 말이오?”하고, 또 말하기를, “모든 사람이란 썩기 쉬운 봄, 여름에 죽은 자는 비록 깊이 매장하여도 썩지 않는 것이 없고, 겨울에 죽은 자는 비록 세월이 오래되어도 썩지 않고, 나뭇조각처럼 마릅니다. 소인이 일찍이 조부의 무덤을 옮겼는데, 겨울에 죽었기 때문에 60년 뒤에도 전혀 썩지 않았습니다. 지금 들으니, 능의 시신도 그렇다 하니, 중종이 승하하신 때가 11월 15일이었으므로 매우 추울 때입니다. 이것도 명백한 증거가 될 수 있는데 어째서 버린단 말입니까?”하였다.”
한다.
능의 역사를 마치고 성혼이 장차 해주(海州)의 행재소에 복명(復命)하려고 가다가, 재령(載寧)에 이르러서 아프다는 핑계로 나아가지 않았다. 그때에 승지 구성(具宬)도 능소(陵所)에서 행재소로 향하는 길에 성혼을 찾아보니, 성혼이 비밀히 말하기를,
“이홍국(李弘國)이 다른 사람의 시체를 빌려 가지고 옥체라 하면서 공을 세우고자 하였으니, 마땅히 임금께 아뢰어 국문해야 할 것이다.”
하니, 구성이 그 말대로 하였다. 이에 옥사가 크게 일어나 삼성(三省)이 함께 국문하였다. 이홍국과 먼저 능소에 갔던 자 10인을 체포해다 국문하였다. 그 사람들이 옥사에 먼저 오기도 하고 뒤에 오기도 하였는데, 진술한 것이 한결같아서 다시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상이 무고(誣告)임을 살피고 석방하도록 하였다.
이는 성혼이 처음부터 이 일로 인하여 나를 모함하고자 하여 이렇게 날조한 것이니, 그 역시 잔인한 사람이다. 바야흐로 능을 개축하는 데 묘소의 양쪽 언덕이 까닭 없이 갑자기 무너져서 일꾼 세 명이 압사되었다.
이해 9월에 거가(車駕)가 도성에 돌아오려고 막 출발하는데, 크게 천둥치고 비가 쏟아지고, 왕자가 머물던 집의 사람과 가축이 벼락을 맞았다. 병신년(1596, 선조 29) 3월 그믐에 여러 능의 삭제(朔祭)의 헌관(獻官)들이 궐내에서 향촉을 받는데, 갑자기 천둥치고, 문 밖에 있던 향촉을 실은 말 3필과 역졸이 벼락을 맞았다. 며칠 뒤에 부제학 이호민(李好閔)이 아뢰기를,
“정릉의 일은 그때의 처리가 옳지 못하였기 때문에 천변이 이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큰일이다.”
하고, 대신에게 문의하라고 명하였다. 좌상 김응남(金應南)이 성내어 말하기를,
“이 말은 나를 모함하기 위한 것이다.”
하였다. 그것은 응남이 봉심할 때에 예조 판서였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세월이 이미 오래되었으며, 또 증명할 길도 없었다. 그러므로 나는 의견을 아뢰되 다만,
“성상의 하교를 받자오니, 신은 차마 들을 수도 없습니다. 큰일이 이미 정해졌으니, 아마 다시 처리할 방도가 없을 것입니다.”
하여, 일이 드디어 그만두게 되었다.
대체로 처음에 변별하지 못한 것은 이설(異說)이 사람을 혼란시킨 것인데, 지금 수년 뒤에 형체가 더욱 사그라져 남은 것이 없을 것이니, 비록 추후에 변별하고자 해도 될 수 없고, 한갓 끝없는 아픔만 더할 뿐 다시 선처할 길이 없으니, 어찌할꼬, 어찌할꼬. 천고에 한을 남겼다고 할 수 있다. 지금 생각하여도 마음을 가눌 수가 없다.
그 뒤 무술년 가을에 내가 당시 사람들의 공격을 받게 되었는데, 이이첨(李爾瞻)이 이산해(李山海)와 모의하기를,
“만약 정릉의 일을 들추어 죄목을 삼는다면 함정에 빠뜨릴 수 있을 것이다.”
하니, 산해가 말하기를,
“이것은 김중숙(金重叔)에게도 관계될까 두려우니, 부디 꺼내지 말라.”
하였다 한다. 중숙은 응남의 자(字)로, 응남은 산해의 매부이니, 옥사가 일어나면 그에게까지 파급될까 두려워하여 그렇게 말한 것이다. 가소로운 일이다.
갑진년 봄에 예안(禮安) 사람 생원 아무개가 정릉 참봉(靖陵參奉)이 되었는데, 이 사람은 정릉의 시말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고향에 돌아와 그의 친구에게 말하기를,
“능에서 밤중이면 매양 울음소리가 끊어지지 않자 늙은 수호군(守護軍)들이 모두 말하기를, “전에 옥체를 버리고 장사지내지 않고 잡회(雜灰)를 넣어서 빈 채로 장사지냈기 때문에 그때부터 지금까지 밤마다 곡성(哭聲)이 이렇게 나는 것이오. 오늘 밤만이 그런 것이 아니다.”하므로, 슬픈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하였다. 나는 이 말을 듣고 골수에 사무쳤다. 그때의 일을 자세히 적어서 신하의 지극한 원통함을 표시한다.
記靖陵事
癸巳四月初。宣陵靖陵。爲賊所拔。時余在東坡。聞李提督自平壤還開城。同金元帥命元往候。接伴使李德馨。留守盧稷。戶曹判書李誠中等五六人。會坐接待廳。京畿左監司成泳急報至。時夜黑。以火發其書。乃陵寢變報也。卽號痛。提督聞之。取其報見之。余與諸公往滿月臺前南麓。望擧哀。明曉與元帥還東坡。欲募人往探二陵形止。有軍官李弘國者。出跪曰。小人乃讓寧大君後裔也。向國之心。豈同凡人。雖死願往。余與元帥奬其忠。且曰。汝不可獨往。更募軍之願往者十人。與俱。時倡義使金千鎰在江華。所率皆京城人。余曾調二百名。在東坡聽用。令弘國就其中募之。果得十人。皆各司奴子。而奉常寺人居半。余悉呼至前。泣諭之。莫不感激。請盡力。於是具粮資以送。臨行余曉之曰。汝輩旣各司人。固熟兩陵路。但近日久在江華。東邊賊屯所在。亦未諳悉。分防禦使高彥伯。率楊州軍。駐蟹踰嶺。汝至彥伯處。更得一二人向導。庶無蹉跌也。卽爲密關於彥伯。付弘國。時四月初九日也。弘國旣去。數日還報云。蒙將令往防禦使陣。發取詳知道路者一人。前引禿任里。日旣暮。得小漁艇。十二人同載。順流而下。夜半經三田渡。泊靖陵下。數人守船。八人上陵。見陵已掘。時月落。天色正黑。掘處深淺不可測。解從人布帶連結之。以次縋下。穴中沈沈無所見。以手捫之。有僵屍軀。皆震愕縮手。良久定神。以手更探之。尸無所覆。赤體偃灰土中。微有濕氣。粘襯手指。諸人還出穴。穴傍得破裂衣裳梵字書數紙。黑漆木片掌樣大。持以爲驗。又至宣陵。穴中雖掘而淺。僅一身許。空無物。遂還舟泝流上。至三田渡。天色明。由禿任下舟來。其狀如此。余會金元帥及權巡察慄議之。計無所出。余據來報。玉體暴露壙中。情理痛不可忍。且萬一賊知我人往探。更加不測則奈何。不如冒萬死。竊負而出。安厝他處。以待賊平後復陵。衆曰然。時元帥陣中。有官銀百兩。卽除出貿唐黑布數尺。製複衾。又得去核木花數十斤。權巡察出油芚。又得匠造藍輿。便利其制。使輕可易運。余顧辛從事慶晉曰。後日必有以此搆余者。然余惟知救君親泉壤之禍而已。更下令軍中。誰可去者。於是倡義使中軍朴惟仁。前部將金克忠。竝軍人願從者五十人。令李弘國引路。戒之曰。此大事也。吾亦不能懸度。汝輩可到彼觀勢。若掩覆則掩覆。不然則奉安于他處。惟仁等應諾而去。又由禿任里。乘舟夜下。載屍軀于輿中。還出泝流而上。以京城數十里外。賊常衝斥。無可安處。不得已到楊州松山里。得民破屋數間奉安。金克忠率五十人守之。惟仁來報。余卽狀啓言狀。是月二十日。賊南去。余於其日。䥦大軍入城。二十三日馳往松山奉審。不敢開視。但向之號哭而還。二十三日余病臥矣。五月聞領議政崔興源禮曹判書金應南左參贊成渾禮曹參判李灌等五六人。自行在。次第承命。將奉審二陵云。又聞成渾道中見人。頗問靖陵所得屍軀眞假如何。其言多有可疑者云。旣至。又聞諸宰先往靖陵奉審云。最後諸宰始往松山。邀余同往。余時病新起。以其事重。力疾往會。時朝臣中無逮事中廟者。惟同知宋贊年八十四。中廟時爲翰林。聞避亂在忠淸道。驛召以來。六月十八日諸臣俱會松山。大臣沈守慶崔興源及兪泓。與余爲一列。宰臣金應南成渾李灌權徵。宗室扶安都正壽山等爲一列。郞廳徐仁元等在外。又有豫陽夫人自西都來。豫陽乃中廟王子。以夫人在宮中。嘗知中廟龍顏故來。而宦官數人偕至在他處。旣而宰臣將入審。或曰。他人旣不能逮事中廟。雖入審。安知眞贗。當先問平日聖體大槪而審之。然後乃可定其虛實耳。衆曰然。於是問於宋同知及內人逮見靖陵者。各記脩短肥瘠之狀。其一。中廟聖體如中人而差長。其二。中廟豐上而殺下。故御衣多用單裳。使下體張大。朝臣化之。遂用藤環撑起衣下。其三。龍髥甚少而赤紫。其四。龍頣向外微張。其五。中廟腦微凹。故平日所御笠子。多外後側。每以手正之云。旣畢。以室中狹窄。不可容衆。分運而入。大臣先入。請宋同知。同入開衾。見屍體如中人。髮童童。鼻樑摧倒。髥微見其迹。細視有紫色。兩肩外張。胸甚高。而脛至存。骨無肉。有筋絡相連。胷腹有二劍迹。蓋賊所加。全體乾燥如枯木。自四月出置。其前暴露。又不知幾日。而無蟲蛆。亦無臭氣。甚可怪也。諸人反覆審視。宋同知又曰。中廟嘗患背瘇。初使醫金應崐針之。甚痛楚。又使朴世擧針之。此恐有痕。當幷審之。於是令朴惟仁展尸。背後灰炭屑襯澁。厚幾寸。不見皮色。以紬巾沾水。洗之累次。而漸見皮肉。忽左肩胛下。露出痕迹二處。相去一二分。一大一小。四面有黑暈。團團如大錢。而其中穿破。見者大駭。旣出。金應南成渾權徵等。次當入。爭問於宋公曰如何。宋公甚可駭。尸長如中人樣。豐上而殺下。頣微張。腦後凹。且有瘇痕矣。成渾默然不應。旣入。未久卽出還坐。諸宰相顧未發。渾循循而起。獨詣大臣前。作色曰。卽入審。雖曰軆似中人。以某所見如是。雖曰豐上殺下。不見如是。歷擧宋公之言。而段段攻破。不假他辭。但以不見如是四字。盡亂其說。旣畢。悠然而退。同坐者面面相視而已。余曰。他事不可知。背後瘇痕。豈非可疑耶。扶安都正。卽附會成渾。揚言曰。背後瘇雖可疑。有六處瘡痕。安得若是多也。余曰。旣與諸人同審。明有二處。今言六處。此大事。言不可如是參差。須卽更審。遂令他宰同壽山再入審之。果二處也。壽山言窮。乃曰。前言六處。乃大綱說耳。然座中㤼於成渾。不復辨其如何。日夕。罷還城中。明日又會於南學洞空屋。欲狀啓。余晩赴。觀諸論已靡然於成渾矣。余謂崔領相曰。諸公所見旣然。無容別議。然則靖陵玉體。將爲何往。崔曰。陵前所得小灰。衆以此當之。以爲之賊所焚。余曰。近日多見賊焚尸處。人形雖成灰燼。猶歷歷可辨。今此陵前所得灰痕。長乎短乎。崔曰不長。其痕團圓。僅如方席樣。禮曹參判李灌應聲曰。甚長。崔公憮然曰。不可如此說。長則不長。又不可定其爲玉灰也。然議則不能違衆。余亦不敢身質其語。但曰。背後有瘇痕。而年久之事。不可灼知。近山古塚發掘處有無。當並審。不可草草以定。以此獻議而退。蓋人之尸體。最易腐爛。新死之屍。不出數日皆敗。今此尸停外處數月。方當盛暑。無臭氣。無蟲蛆。除非厚葬而極久者不當。然倭人何處得如此尸。置諸壙中耶。此可辨之明驗也。時李堤督在城中聞此。亦曰。此不難辨。當以久近定之。久則必非他人之尸也。會後一日。余南下慶尙道。到慶安驛。川邊歇馬。辛從事慶晉謂余曰。聞諸公之議。以松山之屍軆爲非眞。而欲棄之。天下安有此事。余曰。以眞爲假。以假爲眞。同是至大至重之事。旣不能親知虛實。安敢身質其是非。旣而余在南中。聞宣陵靖陵。皆以陵。傍雜灰小許。納諸梓宮虛葬。而以松山屍體。爲非眞棄之。然上意猶致疑。命厚葬。都監監役姜䨞言於堂上曰。厚葬則益起人疑。遂草草埋他處而已。朴惟仁言。見西小門外有老司鑰一人。年八十餘。曾事靖陵。聞其事。叩心痛曰。此實聖人也。何爲棄之。且曰。凡人死。皆在春夏易爛之時者。雖厚葬。無有不腐。死在冬間者。雖年久不朽。枯燥如木片。小人曾遷祖父葬。死在冬月。六十年後。全不腐爛。今聞陵尸亦然。靖陵昇遐。在十一月十五日。當極寒。此又足爲明驗。何爲棄之。旣畢陵役。成渾將復命於海州行在所。至載寧。稱病不進。時承旨具宬。亦自陵所向行在。歷見成渾。渾密謂曰。李弘國假得他人屍。稱玉體。欲以邀功。當啓上鞫問。宬如其言。於是獄事大起。三省同鞫。逮捕李弘國及先往陵所者十人鞫之。其人先後至獄。而所招如一。無復疑端。上察其誣。命釋之。蓋渾自初欲因此陷余。構捏如此。其亦忍矣。方改築陵時。壙兩岸無故忽崩。壓殺役夫三人。是年九月。車駕將還都城。將發大雷雨。震王子所寓家人畜。丙申三月晦。諸陵朔祭。獻官受香燭於闕內。忽雷震香燭馬三匹。及驛卒於門外。數日後。副提學李好閔因對言。靖陵事。其時處得非宜。天變未必不由於此。上曰。此大事也。命問於大臣。左相金應南怒曰。是欲陷我而發也。蓋應南於奉審時。爲禮曹判書。故云然也。然其時日月已久。又無憑驗之路。故余獻議。但曰。伏承上敎。臣不忍聞。大事已定。恐無更處之道。事遂寢。蓋始不能辨者。異說亂人。今於數年後。形益澌滅無餘。雖欲追辨。有不可得。而徒增罔極之痛。更無善處之路。奈何奈何。可爲千古遺恨。至今思之。無以爲心。其後當戊戌秋。余爲時輩所攻。李爾瞻謀於李山海曰。若發靖陵事爲罪目。則可以陷之。山海曰。此則恐涉於金重叔。愼勿提起。蓋重叔應南之字。而應南爲山海妹夫。恐獄起而延及云然。可笑。甲辰春。禮安人生員某。爲靖陵參奉。此人不知復陵始末者。還鄕爲其友言。陵中夜間。每聞哭聲不絶。有守護軍年老者。皆言。前時棄玉體不葬。而虛葬雜灰。故自其時至今。夜夜哭聲如此。不但今日。爲之痛嗟不已云。余聞而不覺切骨。詳記其時之事。以寓臣子之至冤云。
잡기(雜記)
좌의정 정철(鄭澈)을 강계(江界)로 귀양보내어 위리 안치(圍籬安置)하고, 그의 죄를 써서 조정에 걸어 놓았다.
정철의 자는 계함(季涵)이다. 어릴 때에 기대승(奇大升)에게 수업하였다. 현달하고 나서도 여전히 제자로서의 예를 지켰다. 그러나 대승은 일찍이 말하기를,
“계함이 득세하면 반드시 나라를 그르칠 것이다.”
하였다. 사람됨이 강하고 편협하며, 남의 허물을 말하기 좋아하고 은혜와 원수를 분명히 하여 자기 마음에 언짢은 사람이 있으면 끝내 잊지 못하였기 때문에 패하였다.
처음에 심의겸(沈義謙)과 김효원(金孝元)이 서로 미워하여 당파로 나뉘었는데 이이(李珥)가 의론을 주장하기를 자못 공평히 하였다. 정철은 깊이 효원을 배척하려고 하여 의론이 맞지 않자, 정철이 시를 짓기를,
그대 뜻은 산 같아 굳게 움직이지 않고 / 君意如山堅不動
내 마음은 물 같아 가서 돌아오기 어렵네 / 我心如水去難回
물 같고 산 같음이 모두 운명이라 / 如水似山俱是命
서쪽 바람에 머리를 돌리며 홀로 배회하네 / 西風回首獨徘徊
하고, 드디어 벼슬을 버리고 호남으로 돌아가서 경박하고 언론(言論)을 좋아하는 놀고 먹는 선비들을 많이 모아 밤낮으로 술을 마시며 시사(時事)를 조롱하였는데, 그것이 원근에 전파되어 더욱 화단(禍端)이 되었다.
계미 연간에 이이가 조정에 있고 정철이 대사헌이 되어 논의를 주고 받으매 동서(東西)의 설이 성행하여 그칠 수 없었다. 허봉(許篈)ㆍ박근원(朴謹元)ㆍ송응개(宋應漑) 등은 모두 이이를 공격한 죄로 귀양갔는데, 그렇게 된 데에는 정철의 힘이 있었다. 김우옹(金宇顒)이 소를 올려 정철을 공격하였는데, 말이 매우 격렬하였다. 이이가 죽자 성혼은 산으로 돌아가고, 정철은 세력을 잃어 또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서 음성(陰城)ㆍ죽산(竹山)ㆍ여주(驪州)ㆍ고양(高陽) 사이를 일정한 처소도 없이 출몰하면서 불만이 더욱 심하여 주색에 빠져 지낼 뿐이더니, 기축년에 정여립(鄭汝立)의 옥사가 일어나자 정철이 지방에서 와서 승정원에 나아가 소를 올리니 듣는 자가 크게 두려워하였다.
이산해는 젊을 때에는 정철과 교분이 좋았는데 뒤에 정철이 사람들에게 공격을 받자, 산해는 정철을 배반하고 이발(李潑) 등과 함께 정철을 공격하였다. 이때에 와서 이발 등이 패하고 정철이 다시 들어오니, 산해가 매우 두려워하여 다시 그와 결탁하여 화를 면하고자 하였다. 그때에 정언신(鄭彦信)이 정승에서 파면되었는데 산해가 정철을 추천하여 언신 대신으로 정승이 되게 하고, 정철과 함께 옥사를 다스리게 되었다. 그런데 정철을 섬기기를 매우 삼가 그의 아들 경전(慶全)을 보내어 밤낮으로 정철의 집에 있게 하니 노예와 같았다. 또 말하기를,
“전날 그대를 공격한 것은 모두 김응남과 유모(柳某 유성룡) 등의 소행이지 내가 한 것이 아니오.”
라고 하여 화를 타인에게 전가시켜 자신은 모면하려 하였다.
그러나 정철은 산해와 묵은 원한이 이미 깊었으며, 또 산해가 배신함이 심한 것을 알기 때문에 끝내 감정을 풀지 않았다. 그때에 정철의 당파가 대각(臺閣)에 가득차 있어서 날마다 남을 얽어 넣는 것을 일삼아 평소에 좋아하지 않던 모든 사람을 역도(逆徒)로 몰아넣으니, 상도 자못 싫어하였다.
산해가 궁인(宮人)들과 결탁하여 성상의 뜻을 탐지하고, 또 홍여순(洪汝諄) 등과 함께 정철을 넘어뜨릴 것을 비밀히 꾀하였다. 먼저 이경전을 시켜서 놀고 먹는 선비 홍봉선(洪奉先)ㆍ이성경(李晟慶) 등 6인과 결탁하여 대궐에 나아가 청대(請對)하게 하니, 상이 즉시 인견하고 물었다. 봉선이 정철이 권력을 제멋대로 휘둘러 정치를 문란시킨다고 말하니, 상이 그의 충성을 칭찬하였다.
산해가 즉시 대간으로 하여금 정철을 논핵하게 하니, 처음에는 대간이 그 일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의심하고 두려워서 1~2일을 머뭇거렸다. 산해가 잇달아 사람을 시켜 속히 발론하기를 재촉하고, 또 말하기를,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조금 늦은 것이 한스럽다.”
하였으니, 이는 상의 성냄이 한창 대단함을 알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정철을 탄핵하는 계본(啓本)이 들어가자 즉시 윤허하였다.
그때 여순이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윤두수(尹斗壽)ㆍ윤근수(尹根壽)ㆍ이해수(李海壽) 등 6~7인도 아울러 논핵하여 북도(北道)에 나누어 귀양 보냈으니, 이들은 모두 정철의 당파였다. 이성중(李誠中)과 우성전(禹性傳)은 정철의 당파가 아니었으나, 산해가 미워하였으므로 여순 등을 시켜서 같이 논핵하여 파면시켰다. 상이 정철의 죄를 써서 조정에 게시하고 또 위리 안치시키라고 명하였는데도 산해는 여전히 정철과 서로 문안을 끊지 않았으며, 또 약(藥)도 부쳐 보냈다 한다.
정철을 삼도 관찰사(三道觀察使)로 삼았으니 정철이 신묘년에 강계로 귀양갔다가 이때에 와서 석방된 것이다. 도중에서 불리어 행재소로 달려가서 평양에서 임금을 뵙고, 의주(義州)까지 호종하였다. 하루는 빈청에 여러 재상들이 모여 앉았다. 귀빈(貴嬪) 김씨(金氏)가 안에서 퇴선(退膳 임금이나 왕후의 남은 음식을 물려 주는 것)을 내보내 별감이 상을 받들고 와서 대신들 앞에 놓았다. 정철이 제일 위에 앉아서 어디에서 가져 왔느냐고 물었다. 별감이 대답하기를,
“김숙의(金淑儀)에게서 왔습니다.”
하니, 정철은 성난 소리로,
“내가 비록 못났으나 어찌 김숙의가 먹다 남은 음식을 먹겠느냐? 구 지사(具知事)에게나 갖다 드려라.”
하였다.
이는 왕자 정원군(定遠君)은 김씨의 소생이며, 지사 구사맹(具思孟)의 딸이 정원군의 부인이기 때문이다. 사맹이 좌석에 있다가 상이 오자 부끄러워서 얼굴을 숙이고 일어나지 못하였다.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서로 돌아보며 말이 없었다.
고사(故事)에, 조정에서 퇴선을 내리는 것은 오직 임금과 중전만이 하는 것이고 후궁은 감히 하지 못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김씨는 임금의 총애가 후궁 중에 으뜸이고 한 아들 신성군(信城君)은 또 신립(申砬)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며, 구사맹은 또 신립의 매부였으므로 한 집안의 세력이 대단하였다.
신묘년에 신립의 어머니가 금천(衿川) 별장에 가는데 두 왕자와 구사맹 등이 강가에 모여 영접하는데 높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도로에 가득차니, 구경하는 사람들이 길을 메웠다. 김씨의 동생 공량(公亮)은 조신(朝臣)들과 사귀어 안팎의 말을 전달하니, 뇌물이 사방에서 모여 들었다. 영의정 이산해가 가장 그에게 아부하여 밤중에 나귀를 타고 왕래하는데 사람들이 마주친 자가 많았다. 공량은 천한 사람이었는데, 이산해가 영의정으로 아첨해 붙으니, 듣는 자가 더럽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때 아직 동궁(東宮)을 세우지 않았는데 신성군이 상에게 가장 총애를 받고 있었다. 산해는 또 신립과 결탁하여 매양 계집종을 시켜 왕래하여 문안하고 선물을 보냈는데, 편지를 고리버들로 만든 그릇에 담은 떡 속에 넣어 남이 알지 못하게 하여, 종적이 매우 비밀스러워 그 말한 바가 무엇인지 아는 이는 없었다.
얼마 안 가서 신성군이 요절하였다. 산해는 또 임금의 생각이 자못 광해(光海)에게 있다는 것을 염탐해 알고는 다시 유자신(柳自新)과 결탁하였으니, 자신의 딸이 바로 광해의 부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자신은 광주 목사(廣州牧使)로 있었다. 산해가 그의 아들 경신(慶伸)을 위하여 자신에게 혼사를 청하려고 정부의(政府醫) 고기(高麒)를 시켜 가서 청해도 자신이 허락하지 않으므로, 고기가 여러 번 가기를 그치지 않았다. 자신의 사위 조국필(趙國弼)이 도성에 있었는데, 산해가 매양 친히 국필을 찾아가서 은근한 호의를 표하였으니, 그가 세력에 빌붙어 부끄러움 없음이 이와 같았다. 산해는 또 그의 딸을 안황(安滉)의 아들 응형(應亨)에게 시집보냈으니, 안황은 성상의 매부이다. 이때에 임금이 파천하는 화를 만났으므로 중론이 들끓어 산해에게 죄를 돌렸다. 그런데도 김씨는 여전히 자숙(自肅)하지 않고 의주에 있으면서 산해에게 선물을 줌이 끊이지 않으므로 또한 남들의 말이 많았다. 정철은 성격이 강하고 편협해서 산해가 후궁에게 아부하는 것을 분하게 여겼기 때문에 이 일에 격분함이 이러하였다 한다.
수일 뒤에 정철에게 삼도 체찰사(三道體察使)를 임명하여 남쪽으로 내려가게 하였다. 정철이 술을 좋아하여 종사관과 함께 항상 취하여 일을 보지 않으니, 여론이 또한 비난하였다.
갑술ㆍ을해년(1574~1575) 사이에 동인이니 서인이니 하는 당론(黨論)이 처음으로 일어났다. 율곡(栗谷) 이이(李珥) 숙헌(叔獻)은 비록 서인을 위주로 하였으나 의론이 자못 공평하였고, 또 양쪽을 조정시키려 하였다. 그런데 계함은 성격이 강하고 편협하여 전적으로 서인을 위주로 하여 동인을 공격하므로 숙헌과 의견이 맞지 않았다. 그래서 벼슬을 버리고 호남으로 돌아가면서 시를 지었다.
그대의 뜻은 산 같아 굳게 움직이지 않고 / 君意如山堅不動
내 마음은 물 같아 가서 돌아오기 어렵네 / 我心如水去難回
물 같고 산 같음이 모두 운명이라 / 如水似山俱是命
서쪽 바람에 머리를 돌리며 홀로 배회하네 / 西風回首獨徘徊
성낙(成洛) 사중(士重)은 동인인데도 계함과 사이좋게 지냈는데, 그의 시에 차운(次韻)하였다.
구름은 용을, 바람은 범을 따르는 것이 물의 성질인데 / 雲龍風虎物之性
어쩌다 그대 마음 홀로 돌아오지 않는가 / 胡乃君心獨不回
스스로 울타리를 헐어 치우니 정말 운명이로구나 / 自撤藩籬眞是命
천지에 배회할 곳 없으리 / 乾坤無處可徘徊
이로부터 당론이 날로 치열해져서 걷잡을 수 없었다. 뒤에 계함이 승지가 되었다. 그때 그의 무리로 대간(臺諫)이 된 자가 있었는데, 정철이 승정원에서 시를 지어 보냈으니, 이러하다.
늦가을 바람 기운 부드럽기 봄 같으니 / 季秋風力軟如春
추위를 타는 자는 좋다 하고 열이 많은 자는 찡그리네 / 寒者宜之熱者嚬
모름지기 오경 서리 뒤의 송골매가 / 須待五更霜後鶻
한 소리로 높이 치솟아 푸른 하늘에 오르기 기다려라 / 一聲高起上蒼旻
이것은 탄핵하기를 권한 시로 듣는 자들이 혀를 내둘렀다.
가정(嘉靖) 정묘년(1567, 명종 22) 6월에 퇴계 선생이 소명(召命)을 받고 도성에 들어왔는데, 사은도 하기 전에 명종이 승하하였다.
8월에 선생이 예조 판서의 임명을 사퇴하여 체임되자, 즉시 광나루에 나가서 배를 타고 경상도로 돌아가니, 당시 사대부들은 모두 섭섭하여 무엇을 잃은 것 같았다. 이조 정랑 정철이 광나루까지 뒤쫓아 갔으나 따라잡지 못하고, 시를 짓기를,
뒤쫓아 광나루에 이르니 / 追到廣津上
신선의 배는 이미 아득하네 / 仙舟已杳冥
가을 바람에 많은 생각으로 / 秋風滿腔思
석양에 홀로 정자에 오르네 / 斜日獨登亭
하였는데, 자못 사람들의 암송하는 시가 되었다.
雜記
竄左議政鄭澈于江界。圍籬安置。榜其罪于朝堂。澈字季涵。少時受業奇大升。旣顯。猶執弟子禮。然大升嘗曰。季涵得志。必誤國。爲人剛偏。喜言人過。恩讎分明。人有不平于心者。終不能忘。以此敗。初沈義謙與金孝元交惡分黨。李珥主論頗平。澈欲重斥孝元。議不合。澈作詩曰。君意如山堅不動。我心如水去難回。如水似山俱是命。西風回首獨徘徊。遂棄官歸湖南。多聚游士之輕浮好言論者。日夜飮酒。譏嘲時事。傳播遠近。益成厲階。癸未間珥在朝。澈爲大司憲。上下論議。東西之說盛行。而不可止。許篈朴謹元宋應漑等。皆以攻珥竄逐。澈有力焉。金宇顒上疏攻澈。語甚激。及珥卒。成渾還山。澈失勢。又棄官歸。出沒於陰竹驪州高陽之間。不定處所。怏怏益甚。沈冥酒色而已。己丑鄭汝立獄事起。澈自外來。詣政院陳疏。聞者大懼。李山海少與澈交好。後澈爲人所攻。山海背澈。與李潑等同攻澈。至是潑等敗。而澈復入。山海懼甚。欲更與相合以免禍。時鄭彥信罷相。山海薦澈代之。與澈同治獄事。澈甚謹。遣其子慶全。日夜在其門。如奴隷。且言前日攻君者。皆金應南柳某等所爲。非我也。欲以嫁禍他人而自免焉。澈與山海。宿怨旣深。而且知山海反覆甚。終不釋憾。時澈黨滿臺閣。日事羅織。凡平日所不悅。一切陷入逆類。上頗厭之。山海連結掖庭。探知上意。又與洪汝諄等。密謀傾之。先使李慶全。結游士洪奉先李晟慶等六人。詣闕請對。上卽引見問之。奉先言澈擅權亂政。上褒奬其忠。山海卽令臺諫論之。其始臺諫之不知其事者。疑懼遲徊一二日。山海連使人促令速發。且曰。機不可失。恨少遲耳。蓋知上怒方盛。故云然也。啓入。卽允。時汝諄爲大司憲。幷論尹斗壽尹根壽李海壽等六七人。分竄北道。皆澈之黨也。李誠中禹性傳非其類。而爲山海所惡。嗾汝諄等。同論罷之。上仍命榜澈罪。掛之朝堂。又命圍籬安置。山海猶與澈相問不絶。且寄藥封云。以鄭澈爲三道觀察使。澈辛卯竄江界。至是赦之。道召赴行在。謁見於平壤。扈從義州。一日在賓廳。諸宰會坐。貴嬪金氏自內出退膳。別監奉盤置大臣之前。澈首坐問何來。別監對曰。從金淑儀所來。澈厲聲曰。鄭澈雖駑。豈食金淑儀退膳。可送具知事。蓋王子定遠君金出。而知事具思孟女。爲定遠夫人。思孟在座。盤至。慙伏不能起。左右相顧無言。故事退膳於朝廷。惟上殿中殿爲之。後宮不敢爲。金氏寵冠後宮。一子信城。又娶申砬女爲夫人。具又砬妹夫也。以此一家聲勢赫然。辛卯間。砬母往衿川別墅。二王子及具思孟等。會迎於江上。車馬騈闐。連亘道路。觀者塞道。金氏弟公亮。交結朝士。傳通內外之言。賄賂輻輳。領議政李山海尤附之。夜中騎驢往從。人多相値者。公亮賤人。而李以首相諂附。聞者莫不唾鄙。方東宮未建。而信城最有寵於上。山海又結申砬。每以女奴。往來問遺。置書於柳器餠餤中。勿令人知。蹤跡甚祕。莫有知其所言者。不久信城夭卒。山海又廉知上頗屬意於光海。更結柳自新。自新女乃光海夫人也。時自新爲廣州牧使。山海爲其子慶伸。求婚於自新。使政府醫高麒往請之。自新不許。而麒屢往不已。自新一婿趙國弼在城中。山海每親詣國弼致慇懃。其觀望無恥如此。山海又以女妻安滉之子應亨。上妹夫也。時新遭播越之禍。衆論喧騰咎山海。而金氏猶不斂束。在義州。賄遺不絶。亦多人言。澈性剛檢。憤山海依附宮禁。故因事激發如此云。數旦命澈。爲三道體察使南下。澈嗜酒。與從事沈醉。不事事。物議亦非之。
甲戌乙亥間。東西之論始起。栗谷李珥叔獻。雖主西。而議論頗平。且欲調劑兩間。季涵剛褊。全主西攻東。與叔獻議不合。棄官歸湖南。作詩曰。君意如山堅不動。我心如水去難回。如水似山俱是命。西風回首獨徘徊。成洛士重東也。與季涵善。次其詩贈之曰。雲龍風虎物之性。胡乃君心獨不回。自撤藩籬眞是命。乾坤無處可徘徊。自是黨論日盛。而不可解。後季涵爲承旨。其類有爲臺諫者。從政院寄詩曰。季秋風力軟如春。寒者宜之熱者嚬。須待五更霜後鶻。一聲高起上蒼旻。蓋勸之擊搏也。聞者吐舌。
嘉靖丁卯六月。退溪先生赴召入都。未及謝恩。而明廟昇遐。八月先生辭宗伯之命。旣遞。卽出廣津。乘舟東還。一時士夫。皆悵然如失。吏曹正郞鄭澈。追至廣津。不及。作詩曰。追到廣津上。仙舟已杳冥。秋風滿腔思。斜日獨登亭。頗爲人所傳誦。
기축년의 역옥(逆獄)에 대해 기록함
기축년(1589, 선조 22) 10월에 황해 감사 한준(韓準)이 비밀 장계를 올리기를,
“안악 군수(安岳郡守) 이축(李軸)과 재령 군수(載寧郡守) 박충간(朴忠侃)의 고변(告變)에 의거하건대, 안악과 재령 사람 변사(邊泗) 등이 전주(全州)에 사는 전 수찬 정여립(鄭汝立)과 결탁하여 반역을 모반했다 합니다.”
하였다.
밤중에 상이 사정전(思政殿)에 납시어 대신 및 의금부 당상을 불러 장계를 보이고, 즉시 선전관과 금부 도사를 남대문으로 내보내어 체포하게 하니, 바깥 사람들은 모두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였다. 조금 뒤에 조금씩 전해 듣고 사람들은 다 믿지 않았으며, 상의 생각도 믿지 않았으나, 여립이 오면 절로 판명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수일 뒤에 도사가 장계하기를,
“여립이 이미 도망하였으므로 체포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이에 옥사가 갑자기 일어났다.
여립은 전주 사람으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성질이 거칠고 비루하였다. 일찍부터 도학(道學)을 담론하여 이이(李珥)ㆍ이발(李潑)ㆍ정철(鄭澈) 등과 어울려 매우 친밀하였다. 선비들 사이에 이름이 났으므로 모두들 그를 요직에 추천하려 하였으나, 이조 좌랑 이경중(李敬中)이 평소부터 여립의 사람됨을 싫어하여 중요한 지위에 추천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에 여립을 편드는 사람들은 경중이 어진 이를 시기한다고 하였다.
정인홍(鄭仁弘)이 장령으로 이이 등과 함께 경중이 훌륭한 인재의 앞길을 막는다고 탄핵하여 그를 파면시켰다. 여립을 비로소 정언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시골에 많이 있으면서 벼슬하지 않으니, 더욱 사람들에게서 추앙을 받았다.
계미년(1583, 선조 16)에 이조 판서 이이가 입대하여 여립이 쓸 만한 인물이라고 적극 추천하였다. 이에 여립이 수찬이 되었으나, 얼마 안 가서 사직하고 떠났다. 이이가 이발 등과 점점 사이가 틀어지고 이이가 죽자, 여립은 다시 이발에게 붙어서 이이를 매우 격렬하게 공격하였다. 사류로서 이이를 비난하는 자들은 모두 그와 사귀게 되었다. 백유양(白惟讓)이 여립과 함께 옥당에서 입직하다가 그의 언론을 듣고 매우 좋아하여 자기의 딸을 여립의 형의 아들에게 아내로 주었다.
처음에 임금이 그를 체포하러 가는 도사에게 비밀리에 교서를 내려 여립의 집에 간직된 편지들을 압수하여 궐내로 가져오게 하였다. 그래서 여립과 평소에 친근하게 지내며 편지를 주고 받은 자들은 다 연루됨을 면치 못하게 되어 사류 중에 죄를 얻게 된 자가 많았다.
그 중에 고문을 받다가 죽은 자는 전 대사간 이발, 이발의 아우 전 응교 이길(李洁), 이발의 형 전 별좌(別座) 이급(李汲), 병조 참지 백유양, 유양의 아들 생원 백진민(白振民), 전 도사(都事) 조대중(曺大中), 전 남원 부사(南原府使) 유몽정(柳夢井), 전 찰방 이황종(李黃鍾), 전 감역(監役) 최여경(崔餘慶), 선비 윤기신(尹起莘), 여립의 생질 이진길(李震吉), 기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그 중에서도 이발과 백유양의 집안이 가장 혹독하게 화를 입었다. 그리고 연루되어 귀양간 자는 우의정 정언신, 안동 부사 김우옹, 직제학 홍종록(洪宗祿), 지평 신식(申湜)ㆍ정숙남(鄭叔男), 선비 정개청(鄭介淸)이고, 옥에 갇혀 병이 나서 죽은 자는 처사(處士) 최영경(崔永慶)이었다. 옥사가 계속해서 얽히고 뻗어가서 3년이 지나도 끝장이 나지 않아 죽은 자가 몇천 명이었다.
군현(郡縣)에서 추격하여 체포하니, 여립이 죽음을 면할 수 없음을 알고 변사와 함께 중도에서 자결하여 두 사람의 시체가 한 곳에 있었다. 시체를 실어오게 하여 저자에서 사지(四肢)를 찢게 하였다. 백관들이 입회하여 보는 가운데에 형을 집행하여 머리를 베어 철물교(鐵物橋)에 효시(梟示)하였으며, 그의 처자식들을 죽이고, 그의 아비와 할아비의 무덤을 파버렸으며, 그의 집은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못을 팠으며, 그가 살던 금구군(金溝郡)을 혁파하여 전주에 소속시켰다.
10여 년 동안 재변(災變)과 사람과 소의 전염병이 5~6년간이나 연달았으며,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나서 하늘을 가로질러 뻗친 것이 무수하였고, 흰 무지개가 태양을 꿰뚫은 것이 한 해에 혹 6~7번씩이나 있었다. 도성 가운데에 검은 기운이 공중에 가득하고, 북악산과 인왕산(仁旺山) 사현(沙峴) 사이에는 연기도 안개도 아닌 이상한 기운이 위로 반공 중에 닿고 아래로는 땅에 서리어 그 빛이 새까매서 물체를 분변할 수 없더니, 오래지 않아서 큰 옥사가 일어났으며, 옥사가 겨우 끝나자, 또 임진년의 난이 있어서 도성이 전복되었다. 아, 어찌 천운(天運)이 아니겠는가.
記己丑逆獄
己丑十月。黃海監司韓準密狀。據安岳郡守李軸載寧郡守朴忠侃告。安岳載寧人邊泗等。連結全州居前修撰鄭汝立謀反。夜半上御思政殿。召大臣及義禁府堂上。示狀啓。卽發宣傳官禁府都事。由南大門出送捕之。外人皆莫知何事。旣而稍稍傳聞。人皆不信。上意亦未信。以爲汝立至。當自辨。數日後。都事狀啓。汝立已逃。未得捕。於是獄事遽起。汝立全州人。登文科。性麤鄙。夙談道學。與李珥李潑鄭澈等。相從甚密。有名於士類間。皆欲引置要路。吏曹佐郞李敬中。素惡汝立爲人。不肯擬顯地。於是右汝立者。以敬中爲嫉善。鄭仁弘爲掌令。與李珥等。劾敬中防塞佳人。罷之汝立始爲正言。然多在鄕村不仕。益見推於人。癸未吏曹判書李珥入對極薦汝立可用。於是汝立爲修撰。未久辭去。及李珥與李潑等漸相貳。珥卒。汝立更附潑。攻珥甚急。士類之非珥者。皆與之交。白惟讓與汝立。同直玉堂。聞其論甚喜。以其女妻汝立兄子。初上密敎往捕都事。令收汝立家藏書尺入內。於是凡與汝立素厚。而往來通書者。皆不得免。而士類多得罪。其被拷掠而死者。前大司諫李潑。潑弟前應敎李洁。潑兄前別坐李汲。兵曹參知白惟讓。惟讓子生員白振民。前都事曹大中。前南原府使柳夢井。前察訪李黃鍾。前監役崔餘慶。儒士尹起莘。汝立甥李震吉。其他不可盡記。而潑與惟讓家。得禍尤酷。其連累被竄。右議政鄭彥信。安東府使金宇顒。直提學洪宗祿。持平申湜鄭叔男。士人鄭介淸。其下獄瘦死者。處士崔永慶。獄事蔓延。歷三載而▣死者。幾千餘人。郡縣逐捕。汝立知不免。與邊泗自刎於路中。兩尸同在一處。命載尸而來。轘之於市。百官臨視行刑。梟首銕物橋。誅其妻子。掘其父祖塚。汙瀦其家。革其所居金溝郡。屬于全州。自十餘年來。災異人疫牛疫。連五六年。太白晝見。經天者無數。白虹貫日。歲或六七。都城中。黑氣滿空。白嶽仁王沙峴之間。有異氣。非烟非霧。上接半空。下盤於地。其色正黑。不可辨物。未久大獄起。獄事纔畢。又有壬辰之禍。都城蕩覆。嗚呼豈非天哉。
잡기(雜記)
병술년(1586, 선조 19) 봄에 나는 예조 판서로, 황정욱(黃廷彧)은 참판으로 있었다. 하루는 상이 왕자 의안군(義安君)으로 복성군(福城君)의 후사를 잇게 하라고 명하였다. 내가 회계하기를,
“예(禮)에 후사를 이을 사람은 마땅히 아들의 항렬(行列)에서 데려와야 하고, 손자 항렬에서 데려올 수는 없는 것입니다. 복성군은 중종의 왕자이니, 의안군에게는 종조부(從祖父)가 됩니다. 제후(諸侯)의 별자(別子)는 따로 한 종(宗)이 되니 후일 사당을 세우게 되면 조묘(祖廟)는 있고 예묘(禰廟 아버지를 제사하는 사당)는 없어서 예에 어긋나니, 시행할 수 없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복성군의 후사를 잇는 것은 종실 중에서 아들 항렬에 해당하는 자를 골라야 할 것이며, 왕자로서 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하였다. 내가 처음에 계본(啓本)을 기초(起草)할 때에는 집에서 단독으로 하였는데, 황정욱이 편지를 나에게 보내서 말하기를, “의안군으로 복성군의 후사를 잇게 하는 것은 예(禮)에 무방하다.’ 하기에, 내가 예문(禮文)을 인용하여 회답하였다.
이튿날 주강(晝講) 때에 황정욱이 특진관(特進官)으로 나아가서 곧 아뢰기를,
“의안군이 복성군의 후사가 되는 것은 예에 무방합니다.”
하니, 상이 놀라서 이르기를,
“예조의 공문서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경은 듣지 못하였소?”
하였다. 이에 황정욱이 대답하기를,
“그 공문서는 신의 뜻이 아닙니다.”
하니, 상은 말이 없었다. 황정욱이 물러간 뒤에 그 일이 드디어 그대로 이루어져서 고칠 수 없게 되었다. 그가 일에 따라 상의 뜻에 아첨하여 영합(迎合)함이 이와 같았다.
또 부마(駙馬)를 간택(揀擇)하는 의론이 있을 때에 상이 이씨(李氏) 가운데에서도 선택하도록 명하되, 성자(姓字)는 비록 같더라도 본관이 다르면 무방하다 하였으니, 이것은 뜻 둔 곳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아뢰기를,
“예에 동성간에 혼인하지 않는 것은 혐의를 멀리하기 위해서입니다. 옛날 유총(劉聰)이 유은(劉殷)의 딸로 빈(嬪)을 삼았는데 그들의 본적이 아주 달랐으나 《강목(綱目)》에 이 일을 기록하기를, “개와 양처럼 문란하다.”하였습니다. 또 당 나라와 송 나라 이래로 공주(公主)에게 장가간 자를 고증해 보니, 모두 다른 성(姓)이었고, 이씨(李氏)나 조씨(趙氏)는 없었습니다. 소종(昭宗)만이 이무정(李茂貞)의 아들 계엄(繼儼)으로 부마를 삼았으나, 이는 난리 때에 강력한 신하에게 위협을 당하여 어쩔 수 없이 한 일이니, 본보기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이에 그 일이 마침내 중지되었다.
그 해 3월에 나는 해임되어 고향에 내려가서 여러 번 소명(召命)을 사양한 것이 3년이었다.
雜記
丙戌春。余爲禮曹判書。黃廷彧爲參判。一日上命以王子義安君。繼福城君後。余回啓曰。禮繼後。當取之子行。不可取諸孫行。福城中廟王子。於義安君爲從祖。諸侯別子爲宗。他日立廟。則爲有祖而無禰。違禮不可行。臣意。福城繼後。取諸宗室中子行。不當以王子爲之。始余爲啓草時。在家獨爲之。黃以書抵余言。義安君繼福城。於禮無妨。余援引禮文以答之。翌日晝講。黃以特進官進。乃啓曰。義安繼福城。於禮無妨。上駭曰。禮曹公事不然。卿不得聞耶。黃對曰。其公事非臣之意也。上默然。旣退。其事遂成。不可改。其因事媚悅如此。又議擇駙馬。上命於李氏中。並擇之。以爲姓字雖同。而籍異則無妨也。蓋意有所屬也。余啓以禮不娶同姓。所以遠嫌也。昔劉聰納劉殷女爲嬪。所出絶異。而綱目書之。以爲犬羊雜揉。且考唐宋以來尙公主者。皆異姓。無姓李姓趙者。獨昭宗取李茂貞之子繼儼爲駙馬。此則亂離之際。迫脅於强臣。不得已之事。非可爲法也。於是遂寢。是年三月。余解職下鄕。屢辭召命者三年。
세자를 세운 일을 기록함
금상이 즉위한 지 20여 년이 되었으나 세자가 없으므로 조정과 민간에서 세자의 자리가 오래 비어 있는 것을 근심하였다. 간혹 세자 세울 것을 아뢰는 이가 있으면 곧 견책(譴責)을 받게 되므로, 김성일(金誠一)이 한 번 떠나간 뒤로는 다시 말하는 이가 없더니, 이때에 와서는 적의 형세가 날로 급박해져서 임금이 바야흐로 파천(播遷)하려 하였다. 동지(同知) 이덕형(李德馨)이 나에게 말하기를,
“어찌 세자를 세워서 백성들이 기대를 걸게 할 것을 청하지 않는가?”
하였다. 내가 여러 대신들과 청대(請對)하였더니, 임금이 묻기를,
“하고자 하는 말은 무엇인가?”
하였다. 내가 세자를 세워서 인심이 붙일 데가 있게 하기를 계청하였더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어찌 그것을 모르겠소? 전부터 청하는 자가 있었으나 따르지 않은 것은 다만 중궁이 만약 원자(元子)를 낳는다면 처리가 지극히 어려우므로 끌어온 것이오. 경들은 한 번 말해 보시오. 만약 세자를 세운 뒤에 원자가 태어난다면 어떻게 처리하겠소?”
하고, 신하들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상이 이르기를,
“군신 사이는 부자간과 같은 것인데 어찌 말하기 어려운 일이 있겠소? 모름지기 경들의 평소의 생각과 조정에서 논의된 것을 속히 말하시오.”
하므로, 대답하기를,
“이것이 어떤 일인데, 신하들이 감히 스스로 사사로이 논의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전하께서 즉위하신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원자가 아직 탄생하지 않으시니, 신민들의 심정이 절망스러움을 면치 못하므로 속히 세자의 위호(位號)를 정하여 민심이 의지하게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그렇지 않소. 사람이 비록 늙어도 오히려 아들을 낳을 수 있는 것이니, 어찌 서둘러 절망이라고 말하시오? 만일 원자가 태어난다면 그 처리가 매우 곤란하지 않겠소? 다시 말해 보시오.”
하므로, 대답하기를,
“여러 신하들은 별로 다른 뜻은 없습니다. 다만 절망스럽기 때문에 이러할 뿐입니다. 옛날 송 인종(宋仁宗)은 춘추가 겨우 30여 세였을 때에 사마광(司馬光) 등 여러 사람들이 급히 태자 세울 것을 청하였으니, 그것은 어찌 본 바가 없어서 그러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윽고 이르기를,
“그렇다면 마땅히 누구로 세자를 삼아야 하겠는가?”
하기에, 우리들이 황공하여 대답하기를,
“이 일을 신하들이 어찌 감히 간여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전하의 마음에 달렸을 뿐입니다.”
하였다. 상이 여러 번 재촉하였으나, 여러 대신들은 모두 엎드린 채 대답하지 못하였다. 상이 비로소 하교하기를,
“광해군이 총명하고 학문도 좋아하니, 후사로 삼을 만하다.”
하고 또 이르기를,
“이것이 어떤가?”
하였다. 우리들은 머리를 조아리며 연거푸 종묘사직과 신민의 복이라고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는 본래 병이 많고, 또 나랏일을 이 지경에 이르도록 만들었으니, 가령 적이 물러간다 하더라도 장차 무슨 면목으로 조종(祖宗)을 뵈오며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소? 세자에게 전위(傳位)하고자 하니, 어떻겠소?”
하기에, 우리들이 똑같이 대답하기를,
“성상께서는 어찌 갑자기 이러한 말씀을 하십니까? 세자도 다만 전하 곁에 있으면서 여러 가지 일을 결정하는 데에 참여하게 하면 가할 것인데, 어찌 갑자기 이 일을 의론할 수 있겠습니까? 원하옵건대, 성상께서는 더욱 큰 복을 누리시어 어려운 일을 구제하옵소서.”
하고, 울며 물러나왔다.
記建儲事
上卽位二十餘年。無元良。朝野以儲位久虛爲憂。人或建請輒被譴。自金誠一去後。無復言者。至是賊勢日急。上方欲遷避。同知李德馨謂余曰。盍請建儲。以係人望。余與諸大臣請對。上問所欲言。余啓請建儲。使人心有所係屬。上曰。余豈不知此。從前有請者。而不從者。只以中宮若生元子。則處置極難。故遲遲耳。卿等試說。若建儲之後。有元子。則將何以處之。臣未及對。上曰。君臣之間。如父子。豈有難言之事。須速說卿等平日之意。及朝廷間論議。臣對曰。此何等事。而臣子敢自私議。但以上卽位已久。元良未誕。群下之情。未免絶望。故欲速建儲號。以係人心耳。上曰。此不然。人雖向老猶生子。何可遽言絶望耶。萬一有之。其處置無乃甚難乎。更言之。臣對曰。群下別無它意。只是絶望故然耳。昔宋仁宗。春秋僅三十餘。而司馬光諸人。亟請建儲。玆豈無所見而然耶。上良久曰。然則當以何人爲之。臣惶恐對曰。此事臣子豈敢干預。唯在上心耳。上屢促之。諸大臣皆俯伏不對。上始敎曰。光海君聰明好學。可以爲嗣。又曰此何如。臣等以首頓地。連稱宗社臣民之福。上曰。予本多病。且使國事至此。假使賊退。將何面目可以見祖宗治國家乎。欲傳位於世子何如。臣等同辭以對曰。上何遽出此敎。世子亦特在上側。參決庶事則可也。豈可遽議此事。願聖上益膺弘福。大濟艱難。因涕泣而出。
잡기(雜記)
상(선조대왕)께서는 세상에 장차 변란이 있을 것을 알고 우뚝이 뛰어나고 특출한 인재를 얻어서 위급한 상황에 대비하고자 하였으므로 용모가 웅장하고 객기(客氣)가 있고, 담론(談論)을 잘하는 자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등용된 자가 많았다. 이를테면 정언신(鄭彦信)ㆍ유영립(柳永立)ㆍ장운익(張雲翼) 같은 자들이 모두 차례를 밟지 않고 발탁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이르는 곳에 마침내 성과도 없었다.
오직 정언신만은 자못 충실하여 나랏일에 마음을 다하였지만, 견식이 없고 경솔한 점이 많음이 흠이었다. 병조 판서를 거쳐서 우상이 되었는데, 정여립(鄭汝立)의 옥사 때에 어떤 사람이 상소하기를,
“언신이 여립과 교분이 두터워 서로 왕래하였습니다.”
하니, 언신이 소를 올려 스스로를 변명하였다. 그때에 상이 여립의 집에서 압수해 온 편지들을 궐내에 가져오게 했는데, 언신의 편지도 그 속에 들어 있었다. 상은 언신이 임금을 속였다 하여 정승직을 파면시키고 죽이려고 하는 것을 대신이 구하였다. 궁궐에서 국문하도록 하니, 고문을 받아서 피와 살점이 낭자하고 울부짖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렸다. 북도로 귀양갔다가 오래지 않아 죽었다.
영립은 함경 감사가 되었다가 적에게 사로잡혀 머리가 깎인 채 도망쳐 나왔다. 그 밖의 사람들은 더욱 기록할 만한 것이 없다.
雜記
上知時將變。欲得卓犖奇偉之士。以擬緩急。故容貌壯盛。有客氣善談論者。多由而進。如鄭彥信柳永立張雲翼。皆不次超擢。然所至卒無成效。惟鄭彥信頗忠實盡心國事。所患無見識多麤率。由兵曹判書拜右相。鄭汝立之亂。人有上疏曰。彥信與汝立交厚往來。彥信上疏自辨。時上收汝立家書札入內。彥信書亦在其中。上以彥信爲欺罔。罷相欲賜死。大臣救之。命鞫於殿庭。受拷掠。血肉狼藉。呼痛徹外。竄北道。不久死。永立爲咸鏡監司。爲賊所擄。削髮而逃歸。其餘尤無可述者。
염철(鹽鐵)에 관한 일을 적음
홍진(洪進)을 염철사(鹽鐵使)로 삼았다가 조금 뒤에 파면하였다. 그때 나라의 재정이 고갈되어 국고(國庫)에는 한 달 먹을 식량도 없었다. 중국 군사들이 나라 안에 가득하여 황해도ㆍ충청도의 쌀을 배로 운반해오면 도착하기가 무섭게 없어져서 마치 타고 있는 가마솥에 물을 붓는 것 같았다. 백관들의 급료도 주지 못할 때가 가끔 있을 정도로 사세가 더욱 급박해지는데 어떻게 할 계책이 없었다.
내가 소금과 쇠를 전매하던 옛날의 법을 시행하여 국가의 선박을 이용하여 한강(漢江)ㆍ임진강(臨津江) 등으로 다니면서 강가에서 판매하면 여러 산촌의 백성들은 소금을 얻어 기근을 구제할 수 있고 나라에서는 반드시 곡식을 많이 얻을 수 있어서 국가와 백성들이 모두 편리할 것이라고 아뢰었다.
그래서 홍진으로 염철사(鹽鐵使)를 겸임시켰던 것인데, 홍진은 본래부터 용렬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종사관을 나누어 보내서 염전(鹽田)을 하는 집들을 검사하여 긁어 모으니, 말하는 이들이 그 소란스러움을 말하므로, 도로 파하였다.
記鹽鐵事
以洪進爲鹽鐵使。旣而罷之。時國用匱竭。太倉無一月之貯。天兵滿國。船運黃海忠淸道米。隨到隨竭。如沃焦釜。百官往往不給料。勢益凜凜。計無所出。余啓請修古鹽銕之法。以公船從漢江臨津等。賣諸江上。庶山郡之民。得鹽救飢。而得粟必多。公私兩便。於是以洪進兼鹽銕使。進素庸劣不知所措。分遣從事官。檢括鹽戶。言者言其騷擾。還罷之。
이 정승이 조남명을 대우한 일을 적음
정승 이준경(李浚慶)은 국량이 엄정하여 남에게 기뻐하는 말씨나 안색을 잘 보여주지 않았다. 젊어서 징사(徵士) 조식(曺植)과 벗이 되었다. 그 뒤에 이공은 조정에서 현달하였으나 조식은 벼슬하지 않고 지리산(智異山)에 살고 있었는데, 매우 높은 명망이 있어서 온 세상이 흠모하였다.
그가 일찍이 상서 판관(尙瑞判官)으로 불리어 서울에 오자, 사대부들이 그의 집에 가득찼다. 그러나 이공은 가 보지 않았다. 하루는 조식이 직접 이공의 집에 가서 문에 상당히 오래 서 있는데, 이공이 안에서 큰 신을 끌며 천천히 나왔다. 자리를 잡고 앉아서 대충 일상 생활을 말한 뒤에는 다른 말이 없었다. 조식이 말하기를,
“근간에 사직하고 돌아가려 하네.”
하니, 이공이 웃으며 큰소리로 말하기를,
“상서 판관이 좋은데, 어째서 봉직(奉職)하지 않으려는가? 그렇다면 지평이나 장령이 되고 싶은가?”
하니, 조식이 매우 불쾌하여 갔다.
이로부터 이공이 선비들에게서 비방을 많이 받게 되었다. 그런데 이공은 매양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조식은 도량이 좁다. 그의 그릇을 논한다면 참봉(參奉) 정도가 알맞을 것이다.”
하였으니, 이것은 그를 가볍게 여긴 말이다.
記李相待曹南溟事
李相浚慶。器局峻整。不假人辭色。少與曹徵士植爲友。其後李公顯於朝。曹不仕。居智異山。甚有重名。一世傾慕。嘗以尙瑞判官。徵至京師。士夫盈門。李公不往見。一日曹自詣李公家。立門良久。李公自內曳大履而徐出。坐定。畧敍平生。無他語。曹言近欲辭歸。李公嘻笑厲聲曰。尙瑞判官好矣。何不供職。然則欲爲持平掌令乎。曹甚不平而去。自是李公多謗於士類。李公每謂人曰。曹植量狹。議其任。參奉宜也。蓋輕之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