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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이문 통혼 인물

최흥효 예문관 직제학 (최하 공의 조부)

작성자알타리김치|작성시간14.07.04|조회수972 목록 댓글 2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백원(百源), 호는 월곡(月谷). 판사 일(壹)의 아들이다. 1411년(태종 11) 식년문과에 급제하였고, 1414년 승문원교리로 있을 때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하륜(河崙)의 비위에 거슬려 파직당하였다.
이후 재등용되었으나 1420년(세종 2) 인녕부판관(仁寧府判官)에서 또다시 삭직되었다. 이듬해 우헌납으로 복직되고 이어 예문관직제학을 지냈다. 조선 초기 서예가 중에서 뛰어난 인물로 조맹부체(趙孟頫體)의 초서를 잘 썼다고 한다.
조신(曺伸)의 『소문쇄록(謏聞瑣錄)』에 “최흥효의 초서와 안평대군의 행서가 일세에 성행되었다.” 하였고, 『중종실록』 권83에서도 우리나라의 조맹부체로 안평대군과 함께 최흥효·박경(朴耕)을 대표로 든 것을 보면 그의 명성을 알 수 있다.
또한 『세종실록』 권33에도 태종이 죽자 선왕의 명복을 위하여 유계문(柳季聞)·안지(安止)·최흥효에게 「금자법화경(金字法華經)」을 쓰게 하였다 한다. 금석으로 강릉의 「최참판치운비(崔參判致雲碑)」가 있다.
『근묵(槿墨)』 등에 그의 전적이 약간 전하며, 『동국명필(東國名筆)』·『대동서법(大東書法)』 등에 필적이 모각되어 있다.

참조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조선 시대 최흥효(崔興孝)는 유명한 서예가였다. 그는 늘 중국의 서예가 왕희지(王羲之)의 글씨를 보고 수도 없이 연습을 하곤 하였다. 그가 과거 시험장에 가서 답안지를 쓰는데, 우연히 한 글자가 왕희지의 글씨와 꼭 같게 써졌다. 평소에는 아무리 연습해도 되지 않던 글씨였는데, 똑같이 써지자 그는 매우 기뻤다. 그래서 하루 종일 그 글씨만 바라보다가 차마 아까워 시험 답안지를 그대로 품에 넣어 돌아오고 말았다. 그는 글씨벽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열심히 글씨에 몰두한 끝에 그는 누구나 알아주는 훌륭한 서예가가 되었다.

《대동서법》에 실린 최홍효의 글씨 시판

《대동서법》에 실린 최홍효의 글씨 시판

[네이버 지식백과][한자와 문화5] 미치광이들 이야기 (살아있는 한자 교과서, 2011.5.23, 휴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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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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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saberio | 작성시간 17.02.25 안녕하세요. 영천 최씨 문중의 직제학 최흥효 공의 후손이면서, 성주군 수륜면 남은동(법산)에 입향하신 죽헌 최항경 공의 후손입니다. 최흥효 공의 부친이신 판군기시사 최일 공은 광주이 문중과 연분이 있으신 최원도 공의 차자로서, 재종형제인 좌윤 최흡(시중 최영 공의 장자)에게 입계하셨읍니다. (본 카페에서도 기록을 확인할 수 있었읍니다. 감사합니다.) 최흥효 공께서 과거에 급제할 때 기록("국조방목")에는 최원도 공이 조부로 기록되어 있읍니다. 광주이 문중과 영천최 문중이 역사에 남을 소중한 인연을 두 번씩이나 맺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희귀한 자료이고 본 카페에 많은 참고가 될 것 같아서 첨부합니다. 댓글 첨부 이미지 이미지 확대
  • 작성자알타리김치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7.02.25 네 선생님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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