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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이 선조

광주이씨 선현 시호 (11) 정헌공 이윤경(李潤慶)

작성자낙민(장달수)|작성시간14.05.01|조회수122 목록 댓글 0

*이윤경(李潤慶) 1498년(연산군 4)∼1562년(명종 17). .

시호: 정헌(正獻)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중길(重吉), 호는 숭덕재(崇德齋).

 

세좌(世佐)의 손자로, 수찬 수정(守貞)의 아들이며, 준경(浚慶)의 형이다.

1504년 갑자사화에 아버지가 화를 입자 연루되어 전 가족이 충청도 괴산에 유배되었다가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났다. 유배 중에 어머니로부터 《효경》‧《대학》의 가르침을 받았다.

어려서부터 지략이 많고 학문이 깊어 1531년(중종 26)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534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이 되고, 이어서 홍문관으로 옮겨 부수찬‧수찬‧부교리‧교리를 역임하고, 사간원‧사헌부로 옮겨 정언‧사간‧지평을 지냈다.

1543년 의주부윤이 되어 국방을 강화하였고, 인종의 즉위와 더불어 다시 내직으로 옮겨 대사간이 되어 현량과(賢良科)를 다시 실시할 것을 청하였다. 이어 승정원동부승지가 되어 대윤을 제거하는 데에 가담, 추성위사보익공신(推誠衛社保翼功臣)3등에 책록되고 광산군(廣山君)에 봉하여졌으며, 성균관대사성으로 승진하였다.

그러나 이기(李芑)의 품성이 거칠고 위험함을 논박하다가 쫓겨나서 성주목사가 되어 고을을 잘 다스리니, 성주고을의 선비와 백성들이 감복하여 〈운간이사군(雲間李使君)〉이라는 노래로 치하하였다.

이때 아들 이중열(李中悅)이 이덕응사건(李德應事件)에 몰려 사사(賜死)되었는데, 이로 인하여 1550년(명종 5) 공훈과 관직이 삭탈되었다가 1553년 용서되어 다시 승지를 지냈다.

1555년 을묘왜변이 일어나자 전주부윤으로서 영암성에서 왜구의 침입을 방어하고, 그 공으로 전라도관찰사로 승진하였다.

그뒤 경기도관찰사‧함경도관찰사‧도승지를 거쳐 1560년 병조판서에 이르렀다.

이때 여진족이 자주 국경을 노략질하자 국왕이 “평안도가 더욱 중하니, 반드시 최적임자를 선택하여야겠다.”고 하여 수망(首望)으로 천거되었다. 오래 앓던 끝이라 몸이 허약하였으나, “숨이 끊어지지 않는 한 어찌 평안하기를 바라겠는가!” 하고 평안도관찰사에 부임하여 국방을 강화하다가 마침내 공관(公館)에서 병사하였다. 문집으로 숭덕재유고가 있다.

 

평안도 관찰사 이윤경의 졸기

 

평안도 관찰사 이윤경(李潤慶)이 죽었다. 사람됨이 강유(剛柔)를 겸하고 덕행(德行)과 기국(器局)이 숙성(夙成)하였으며, 또 청렴 검소한 행실과 선을 좋아하는 마음이 있었다. 아우 이준경과 이웃하여 살면서 우애를 극진히 하였다. 을묘년 전주 부윤(全州府尹)으로 있을 때 영암(靈巖)에 외적이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 즉시 달려가 싸웠다. 이때 이준경이 원수(元帥)가 되었는데 통제(統制)하기 어렵다고 여겨 영암에서 나오게 하였으나 ‘국가의 후한 은총을 입었으니 죽음으로 보답해야 한다.’고 하고 끝내 기이한 계책을 내어 많은 적의 목을 베었으므로 성이 완전할 수 있었다.

 

○ 근세 유명한 경상(卿相) 중에 우애로 칭찬받는 이는 오직 상공 안현(安玹 상공은 재상의 높임말)과 이준경(李浚慶) 두 집뿐이다. 안현은 공경하는 것을 주로 하여, 그의 형 판서 안위(安瑋)를 엄부(嚴父)같이 섬겼다. 형이 말을 탔으면 자기는 말에서 내려서 가고, 형이 앉았으면 반드시 평상 앞에 나아가서 절하여, 응답(應答)하기를 매우 조심하였다.

이 정승은 사랑하는 것을 중시하여, 그의 형 판서 이윤경(李潤慶)과 친구처럼 지내며 우애하였다. 앉으면 무릎을 맞대고, 누우면 베개를 가지런하게 하였다. 말하며 웃을 적에는 너나 하며 장난치기도 하였다. 두 정승의 가풍은 비록 같지 않았으나 모두 당시 진신(搢紳)들의 흠모(欽慕)하는 바 되었다. 그러나 이윤경이 죽자 상공은 제복(制服)을 입고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슬퍼하였고, 안 정승의 죽음에 안위는 조문(吊問)받고 곡하는 것이 보통 사람과 다름이 없어, 상공 평생의 두텁던 우애를 저버린 듯하였다. 안위는 이것으로써 식자들의 나무람을 면치 못하였다. -송와잡설-

 

을사전문록(乙巳傳聞錄)

 

이윤경 전(李潤慶傳)

 

이윤경의 자는 중길(重吉)이며 본관은 광주(廣州)다. 신묘년에 진사과(進士科)에 장원하고 갑오년 문과에 올랐다. 을사 사화가 일어나자, 처음에 승지(承旨)로서 녹공(錄功)되었다가, 아들 이중열(李中悅)이 죄를 입은 뒤에 공훈을 깎고 벼슬을 낮추었다. 공이 뒤에 승지가 되었을 때에, 김령(金鈴)이란 사람의 상소가 있었는데, 그 말이 사리에 어긋난 점이 많고 또 자전(慈殿)을 직접 지적하기 때문에, 동료들과 상의하기를, “상소에 망령된 말이 많으니, 이대로 주상께 보일 수 없으므로, 아직 원중(院中)에 그대로 두었다가 다시 의논하기를 기다리자.” 하였다. 그때 진복창(陳復昌)이 공을 꺼렸으므로, 동렬(同列) 중에 진복창의 이목(耳目)이 되는 이가 있어서, 어지러운 말로 상소를 덮어두고 곧 올려 아뢰지 않았다고 공을 무고해서 대간을 부추겨서 공을 공박하였고, 경술년에 집정한 이기들이 밀계(密啓)하여 벼슬을 깎고 성문 밖으로 내쳤다. 진복창이 죄를 얻자 조정에서 비로소 공의 무죄함을 깨달았으나, 서명(敍命)이 오랫동안 내리지 않아서 황폐한 촌락에서 떠돌이 생활한 것이 모두 3년이었다. 계축년에 대신 심연원(沈連源) 등이 그 억울함을 아뢴 일이 있어서, 서명(敍命)이 비로소 내려 형조 참의에 임명되고, 나중에는 병조 판서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정헌공(正獻公)이다.

 

유명조선국자헌대부병조판서이공신도비명 병서

有明朝鮮國資憲大夫兵曹判書李公神道碑銘幷序 [左議政盧守愼]

 

守愼以半子。學于李徵君灘叟先生。見其與二堂弟。道義相敬重。心竊偉之。今之稱兵曹判書公諱潤慶。字重吉。乃其長也。廣李上世。有諱集。號遁村。登第。官至判典校寺事。倜儻慷慨。有詩名。最善牧,圃,陶三隱。曾忤辛旽。去之嶺海間。旽誅。乃出尋歿。有三子。諱之直。直道事我太宗。嘗被譴退。太宗晩以屬英廟。英廟立。徵爲刑曹右參議。未至卒。亦有三子。諱仁孫。右議政。生五子。克堪能文章。刑曹判書。佐翼功臣。廣城君。生三子。諱世佐。判中樞府事。廣陽君。生諱守貞。副修撰。贈領議政。是公皇考。比五世。宗支無不由正科。相躡爲宰相達官。簪組盈朝。妣平山申氏。高麗太師崇謙後。判官承演出也。弘治戊午。生公蓮花坊。夙有異質。與羣兒嬉戲。口不出惡語。方七歲。家覆。配遠郡。咸謂鳳雛騏子。及靖國歸洛。育于其外翁。嘗拊其頭。語大夫人曰。此兒有器局。當遠到。必謹護之。大夫人親授孝經,大學。常與勅曰。寡婦之子。非有見焉。不與爲友。汝輩不振惕勤謹。不名爲人。公入則奉敎訓。出則愼交遊。德行日進。識趣漸高。不屑爲擧子。專意讀書。務以爲己。探索而涵養之。勉勉焉不覺歲月流邁。至年廿五六。爲家貧親老。始屈跡塲屋。嘉靖甲申春。宅憂粥。疏食不怠。終制凡俗。必新製衣冠。以易淡服。公只因舊服之。深墨之容。久而不改。觀者異之。辛卯。中進士第一。生員第四。甲午。釋褐。薦補檢閱。遷注書說書。選爲弘文館著作。陞博士副修撰。轉正言。薦授天曹員外。己亥冬。上御思政殿。視銓注。御筆題公名。爲校理。一時榮之。論者服其明。庚子。拜持平。以言事。左遷起部郞。俄陞弼善。時邊圉有釁。特遣武班重臣廵警。以公有名望文武才識。欲令諳委邊務。拔充從事。辛丑。拜司諫。秋。超牧義州。淸白自保。恩威幷流。無名盡罷。封彊益嚴。暇日率軍射獵。以習戎事。其下樂爲之用。壬寅冬。有報使臣回自燕。爲胡騎邀截。公遽領兵直進。旣而知其妄。乃還。上聞而嘉之曰。聞變騰赴。眞邊將也。甲辰春。考滿。入爲民部。明年。拜大司諫。務從平恕。多所匡益。夏由僉樞。爲承宣。秋。除大司成。丙午三月。差誥命謝恩副使。朝京還。嘗駁李芑麤險。至是自危。丐爲星州。州號難治。推誠任眞。士民心服。有雲間李使君之謠。戊申。病辭。己酉。復爲丞旨。庚戌。有上疏指斥慈殿。僚議留院覆議。同列爲陳復昌耳目者。誣以掩抑。嗾臺諫攻。黜之門外。癸丑。大臣言其冤滯。遂敍秋臺。甲寅。出尹完山。地多士族。好譏訕。公不煩刑罰。一出悃愊。橫議帖息。其後訃至。相弔以爲善人亡矣。有墜淚者。乙卯夏。倭奴入邊。相次陷沒。將薄靈巖。觀察使牒公爲守城將。蓋欲假其威名以鎭之也。公急調精銳入據之。旣部署號令。季公爲都廵察。住牙錦城。檄公曰。防禦使旣入城。假將必還守本境。則軍中聲言。公朝出。吾等夕散。防禦愕眙失措。公私與書曰。將卒皆保我爲固。我動且不測。正所謂秋毫皆帝力。常恐不得死所之日也。吾不可去。已而賊拘提俘虜。直抵城下。斬斫擲首。踊躍吹脣。爲登陴狀。闔城氣奪。人思奔潰。公自廵視。厲以忠義曰。我固世受國恩。我非此城主。必與此城同存亡。若等亦太平民。盍亦念我國恩。一乃心力殺賊。以取勳賞。士卒激勸。無反意。猶偃旗息鼓。戒觸賊怒。公之麾下。有請出少兵以嘗賊者。公知其可用。乃犒遣之。多所馘獻。無不立賞。見有被創者。必爲之垂泣。人益感奮。由是。他衛倚以爲重。踵而不挫。遂殲強寇。卒全孤城。一方解嚴。京師晏然。公之力也。上奬諭增秩。八月。拜爲監司。益修守禦。坐牢湖南之心。明年。加號廵察。專制諸將。是夏。倭寇上國而歸。邊將遮殪百級。幷獲唐人百餘解送。皇帝降勅。褒賚逮公。秋。以畿甸沿海。防虞實急。擧公遣之。戊午。上以關北豐沛接戎。命擇公。皆重之也。庚申。特除都丞旨。繼陟兵書。朝野喜得人。夏。因事遞。旋判臬司。壬戌。上曰。關西尤重。必以極選。公爲首薦。時久病羸悴。乃曰。一息尙存。何敢求安。旣至。一洗舊習。貪汙自遁。兼理宿枉。顚連相慶。世愈推爲鉅人長德。臨絶所言。皆忠孝義理。揮婦人退。命正身東首。終于公館。八月十日也。訃上。上震悼曰。儒將老宰。在外淪逝。心實疚焉。令護送。別賻甚厚。得十月二十日。葬楊根治西高要洞午向原。卽夫人域中。公宇量弘深。志業醇正。聞人善輒喜形于色。視公卿與僕隷無間。能使俗漢頑童。望之心醉。至論禍福死生。無幾微可見。斷大事。不以私見有所回互。獨常懷王裒之慟。未嘗過西市路。及貴顯。益傷養不及時。遇忌日。哭祭哀慕。若初喪然。兄弟間自爲知己。當季公贅居。必召與同處。如大夫人在家時。相向對坐。連日夜無倦。出而反。必相見。乃入私室。所在手錄橫渠訂頑。張思叔座右銘。與凡聖賢格言。粘諸壁。端斂而觀之。小學近思錄等書。不離几案曰。若此文字。寓諸心目。亦足以矯輕警惰。開益心智也。每讀至忠臣義士名賢事業。必擊節嘆賞。不以尋常記誦爲貴。家儲無甔石。田不備斗升。亦不以爲憂。隨遇而安。蓋其胷中恢恢。有容有守。有廟堂之姿。經濟之才。與世不遇。乃卷而懷之。顧其出入塞徼。練達軍旅。則人見其大也。遂以將才歸之。莫有知其存諸中者。而公亦不以求知於人也。夫人申氏。高靈世家縣監宗河之女。男三女四。男一中悅。吏曹正郞。死非命。娶郡守趙德壽女。生男士溫。參奉。二淑悅。監察。娶忠義衛李中女。生男士栗。縣監。士毅。生員。女縣監尹溶。三繼悅。娶參奉金達思女。生男士敏,士遜,士脩。女監役成格哲。參奉李慶曇。女一適縣令柳沂。生男惟寬。奉事。惟信。生員。惟敏。幼學。女幼學沈仁裕。二適幼學尹海。無後。三適判官宋應期。生男欽祚,承祚,天祚。餘幼。四適縣監宋應瑞。生男爾昌。女府使辛應時。側出一子庶悅。直長。何其盛歟。其未艾乎。士溫。友胤也。袖季公狀。來屬銘。噫。論德則吾薄。烏足記大人言行。以傳世行後。後三年。復來言。銘吾祖。微公其誰。遂次以爲序。而銘曰。裏剛而表柔。旣粹以周。天得也。言邇而慮遐。不耀而華。學力也。有虎豹之勢。鳳凰之儀。如海不可窮。山不可移。若其孝友慈仁而主忠信。恬淡持守而恥于進。德誼感人之風。籌畫服衆之功。皆古賢以爲難者。而吾公不自完焉。嗚呼。齡也不嬴。位也不盈。生之何期。奪之何爲。我心斯怛。最跡鑱珉。以訓萬世。尙見其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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