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조선조 정승(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이야기

작성자낙민(장달수)|작성시간14.05.28|조회수611 목록 댓글 0

조선조 정승(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이야기

 

                                                                     장달수 집록

 

*삼대에 걸쳐 정승이 된 사람들

 

심덕부(沈德符)와 그의 아들 온(溫), 심온의 아들 회(澮)이다.

서종태(徐宗泰)와 그의 아들 명균(命均), 서명균의 아들 지수(志修)이다.

김구(金構)와 그의 아들 김재로(金在魯), 김재로의 아들 치인(致仁)이다.

 

*조손(祖孫)이 정승이 된 사람들

 

남재(南在)와 손자 지(智),

신숙주(申叔舟)와 손자 용개(用漑),

박은(朴訔)과 손자 숭질(崇質),

노한(盧閈)과 손자 사신(思愼),

정광필(鄭光弼)과 손자 유길(惟吉),

정창연(鄭昌衍)과 손자 태화(太和)ㆍ치화(致和)ㆍ지화(知和),

심정(沈貞)과 손자 수경(守慶),

김상헌(金尙憲)과 손자 수흥(壽興)ㆍ수항(壽恒),

최명길(崔鳴吉)과 손자 석정(錫鼎)ㆍ석항(錫恒),

서경우(徐景雨)와 손자 문중(文重),

김육(金堉)과 손자 석주(錫胄),

이경여(李敬輿)와 손자 이명(頤命)ㆍ건명(健命)ㆍ관명(觀命),

홍중보(洪重普)와 손자 치중(致中),

민진원(閔鎭遠)과 손자 백상(百祥),

이집(李㙫)과 손자 은(溵),

이천보(李天輔)와 손자 존수(存秀)이다.

 

*외조손(外祖孫)이 정승이 된 사람들

 

심온(沈溫)과 외손 노사신(盧思愼),

이원(李原)과 외손 윤호(尹壕),

박은(朴訔)과 외손 어세겸(魚世謙),

송일(宋軼)과 외손 홍섬(洪暹),

정유길(鄭惟吉)과 외손 김상용(金尙容)ㆍ김상헌(金尙憲),

유홍(兪泓)과 외손 김자점(金自點),

신흠(申欽)과 외손 조사석(趙師錫)ㆍ박세채(朴世采),

한효순(韓孝純)과 외손 여성제(呂聖齊),

여성제(呂聖齊),와 외손 오명항(吳命恒),

김육(金堉)과 외손 서문중(徐文重),

원두표(元斗杓)와 외손 이건명(李健命)ㆍ이관명(李觀命),

심지원(沈之源)과 외손 이집(李㙫),

이행원(李行遠)과 외손 유봉휘(柳鳳輝),

민정중(閔鼎重)과 외손 홍치중(洪致中),

이집(李㙫)과 외손 서명선(徐命善),

김구(金構)와 외손 서지수(徐志修),

민진원(閔鎭遠)과 외손 이은(李溵),

김약로(金若魯)와 외손 박종악(朴宗岳),

박종악(朴宗岳)과 외손 조두순(趙斗淳)이다.

 

*부자(父子)가 정승이 된 사람들

 

황희(黃喜)와 아들 수신(守身),

정창손(鄭昌孫)과 아들 괄(佸),

이인손(李仁孫)과 아들 극배(克培)ㆍ극균(克均),

신승선(愼承善)과 아들 수근(守勤),

홍언필(洪彦弼)과 아들 섬(暹),

정유길(鄭惟吉)과 아들 창연(昌衍),

윤두수(尹斗壽)와 아들 방(昉),

정태화(鄭太和)와 아들 재숭(載嵩),

민정중(閔鼎重)과 아들 진장(鎭長),

김수항(金壽恒)과 아들 창집(昌集),

조사석(趙師錫)과 아들 태구(泰耈),

유상운(柳尙運)과 아들 봉휘(鳳輝),

이세백(李世白)과 아들 의현(宜顯),

이태좌(李台佐)와 아들 종성(宗城),

조문명(趙文命)과 아들 재호(載浩),

이관명(李觀命)과 아들 휘지(徽之),

이복원(李福源)과 아들 시수(時秀),

김익(金熤)과 아들 재찬(載纉)이다.

 

*형제가 정승이 된 사람들

 

윤사분(尹士昐)과 동생 사흔(士昕),

이극배(李克培)와 동생 극균(克均),

허종(許琮)과 동생 침(琛),

이포(李苞)와 동생 행(荇),

심연원(沈連源)과 동생 통원(通源),

김상용(金尙容)과 동생 상헌(尙憲),

정태화(鄭太和)와 동생 치화(致和),

김수흥(金壽興)과 동생 수항(壽恒),

민희(閔煕)와 동생 암(黯),

윤지선(尹趾善)과 동생 지완(趾完),

최석정(崔錫鼎)과 동생 석항(錫恒),

이관명(李觀命)과 동생 건명(健命),

조문명(趙文命)과 동생 현명(顯命),

김약로(金若魯)와 동생 상로(尙魯),

정우량(鄭羽良)과 동생 휘량(翬良),

신만(申晩)과 동생 회(晦),

홍봉한(洪鳳漢)과 동생 인한(麟漢),

김홍근(金弘根)과 동생 흥근(興根)이다.

 

*숙질(叔侄)이 정승이 된 사람들

 

한확(韓確)과 조카 치형(致亨),

성봉조(成奉祖)와 조카 준(俊),

김질(金礩)과 조카 수동(壽童),

김전(金詮)과 조카 안로(安老),

유순정(柳順汀)과 조카 부(溥),

정치화(鄭致和)와 조카 재숭(載嵩),

이단하(李端夏)와 조카 여(畬),

서문중(徐文重)과 조카 종태(宗泰),

조사석(趙師錫)과 조카 태억(泰億)ㆍ태채(泰采),

조태채와 조카 도빈(道彬),

민정중(閔鼎重)과 조카 진원(鎭遠),

김구(金構)와 조카 약로(若魯)ㆍ상로(尙魯),

이건명(李健命)과 조카 휘지(徽之),

조현명(趙顯命)과 조카 재호(載浩)이다.

 

*구생(舅甥: 외숙과 생질)이 정승이 된 사람들

 

유전(柳琠)과 생질 이덕형(李德馨),

김수흥(金壽興)ㆍ김수항(金壽恒)과 생질 이유(李濡)ㆍ권상하(權尙夏)ㆍ이세백(李世白),

홍치중(洪致中)과 생질 이종성(李宗城),

김재로(金在魯)와 생질 서지수(徐志修),

신만(申晩)ㆍ신회(申晦)와 생질 원인손(元仁孫)이다.

 

*옹서(翁婿: 장인과 사위)가 정승이 된 사람들

 

민제(閔霽)와 사위 노한(盧閈),

이원(李原)과 사위 권람(權擥),

권람과 사위 신수근(愼守勤),

한백륜(韓伯倫)과 사위 구성군(龜城君) 이준(李浚),

정창손(鄭昌孫)과 사위 김질(金礩),

송일(宋軼)과 사위 홍언필(洪彦弼),

이산해(李山海)와 사위 이덕형(李德馨),

김상용(金尙容)과 사위 장유(張維),

윤승훈(尹承勳)과 사위 이경여(李敬輿),

한효원(韓効元)과 사위 김명원(金命元),

이후원(李厚源)과 사위 김석주(金錫胄),

이행원(李行遠)과 사위 유상운(柳尙運),

이경억(李慶億)과 사위 최석정(崔錫鼎),

윤지선(尹趾善)과 사위 민진원(閔鎭遠),

김구(金構)와 사위 서명균(徐命均),

이관명(李觀命)과 사위 김치인(金致仁),

정우량(鄭羽良)과 사위 김상철(金尙喆),

이천보(李天輔)와 사위 조경(趙璥),

유척기(兪拓基)와 사위 윤시동(尹蓍東)이다.

 

*처남과 매부가 정승이 된 사람들

 

윤사분(尹士昐)ㆍ윤사흔(尹士昕)과 매부 성봉조(成奉祖),

구성군(龜城君) 이준(李浚)과 매부 신승선(愼承善),

이산해(李山海)와 매부 김응남(金應南),

홍치중(洪致中)과 매부 이태좌(李台佐),

이유(李濡)와 매부 권상하(權尙夏),

김재로(金在魯)와 매부 서명균(徐命均),

정우량(鄭羽良)과 매부 이창의(李昌誼)이다.

 

*동서끼리 정승이 된 사람들

 

서종태(徐宗泰), 최규서(崔奎瑞), 이집(李㙫), 이광좌(李光佐), 이건명(李健命), 이집(李㙫)ㆍ이유(李濡)ㆍ이의현(李宜顯)이다.

 

*사돈끼리 정승이 된 사람들

 

신승선(愼承善)과 권남(權擥),

홍섬(洪暹)과 심수경(沈守慶),

이시백(李時白)과 김자점(金自點),

조익(趙翼)과 김구(金構),

서종태(徐宗泰)와 이세백(李世白),

민진원(閔鎭遠)과 이집(李㙫),

김재로(金在魯)와 이관명(李觀命),

홍낙성(洪樂性)과 김상로(金尙魯),

정존겸(鄭存謙)과 이복원(李福源),

김상철(金尙喆)과 서명선(徐命善),

김양택(金陽澤)과 이휘지(李徽之),

정홍순(鄭弘淳)과 이재협(李在協),

김상철과 이성원(李性源)이다.

 

*여러 대에 걸쳐 정승이 된 사람들

 

심덕부(沈德符)와 아들 온(溫), 손자 회(澮), 증손 연원(連源)ㆍ통원(通源), 연원의 종손 희수(喜壽), 증손 열종(悅從), 현손 기원(器遠), 8대손 수현(壽賢)이 모두 정승이 되었다. 심지원(沈之源) 또한 심덕부의 10대손이 되니, 한 가문에서 정승에 제수된 사람이 열 명이다. -청송 심씨-

정광필(鄭光弼)과 손자 유길(惟吉), 유길의 아들 창연(昌衍), 조카 지연(芝衍), 창연의 손자 태화(太和)ㆍ치화(致和)ㆍ지화(知和), 태화의 아들 재숭(載嵩), 재숭의 조카 홍순(弘淳), 손자 석오(錫五)가 정승이 되었으니, 7대에 걸쳐 열 명의 정승이 나왔다. -동래 정씨-

김상용(金尙容)과 동생 상헌(尙憲), 손자 수흥(壽興)ㆍ수항(壽恒), 증손 창집(昌集)이 정승이 되었으니, 3대에 걸쳐 다섯 명의 정승이 나왔다.

 

순조 이후 신안동김씨 세도 때 인물은 다 못세어 보았다.

서경우(徐景雨)와 아들 문중(文重), 문중의 조카 종태(宗泰), 종태의 아들 명균(命均), 손자 지수(志修), 지수의 재종숙 명선(命善)이 정승이 되었으니, 5대에 걸쳐 여섯 명의 정승이 나왔다. -달성서씨-

민정중(閔鼎重)과 아들 진장(鎭長), 진장의 종제 진원(鎭遠), 종질 응수(應洙), 진원의 손자 백상(百祥)이 정승이 되었으니, 3대에 걸쳐 다섯 명의 정승이 나왔다. -여흥 민씨-

 

*은일(隱逸)로서 정승이 된 사람들

 

정인홍(鄭仁弘), 송시열(宋時烈), 허목(許穆), 박세채(朴世采), 윤증(尹拯), 권상하(權尙夏)이다.

 

*남행(南行)으로서 정승이 된 사람들

 

(주) 남행: 공신 또는 현직 당상관(堂上官)의 자손을 과거에 의하지 않고 관리로 등용하는 일을 이르던 말. 즉 음서. 조상 덕에 벼슬에 나가는 것

 

배극렴(裵克廉), 김사형(金士衡), 심덕부(沈德符), 이거이(李居易), 이무(李茂), 권중화(權仲和), 조영무(趙英茂), 유정현(柳廷顯), 심온(沈溫), 강서(姜筮), 조연(趙涓), 노한(盧閈), 이귀령(李貴齡), 남지(南智), 한확(韓確), 한명회(韓明澮), 황수신(黃守身), 심회(沈澮), 강순(康純), 윤사분(尹士昐), 한백륜(韓伯倫), 성봉조(成奉祖), 윤사흔(尹士昕), 한치형(韓致亨), 신수근(愼守勤), 심기원(沈器遠), 김자점(金自點), 이시백(李時白), 원두표(元斗杓)이다.

 

*무신으로서 정승이 된 사람들

 

최윤덕(崔潤德), 홍달손(洪達孫), 박원종(朴元宗), 신경진(申景禛), 구인후(具仁垕), 이완(李浣)이다.

 

*국구(國舅: 임금의 장인)로서 정승이 된 사람들

 

민제(閔霽), 심온(沈溫), 한명회(韓明澮), 한백륜(韓伯倫), 윤호(尹壕), 신승선(愼承善), 한확(韓確), 장유(張維), 조문명(趙文命)이다.

 

*종신(宗臣: 왕의 아들이나 손자 등)으로서 정승이 된 사람들

 

구성군(龜城君) 이준(李浚)이다.

 

*정승에 제수되었으나 응하지 않은 사람들

 

장유(張維), 송시열(宋時烈), 윤증(尹拯), 권상하(權尙夏), 최규서(崔奎瑞), 민진장(閔鎭長), 조경(趙璥)이다.

 

*정승으로서 판서를 겸한 사람들

 

이조 판서를 겸한 사람은 류성룡(柳成龍)과 한계미(韓繼美)이고,

병조 판서를 겸한 사람은 한명회(韓明澮)ㆍ박순(朴淳)ㆍ김석주(金錫胄)ㆍ이광좌(李光佐)이고,

호조 판서를 겸한 사람은 심열(沈悅)이고,

예조 판서를 겸한 사람은 신숙주(申叔舟)이다.

 

*정승으로서 군직(軍職)에 제수된 사람들

 

도원수(都元帥)는 허종(許琮)ㆍ이극균(李克均)ㆍ윤필상(尹弼商)ㆍ유순정(柳順汀)ㆍ김명원(金命元)ㆍ김자점(金自點)ㆍ이홍주(李弘胄)ㆍ오명항(吳命恒)ㆍ성준(成俊)이고,

도체찰사(都體察使)는 유정현(柳廷顯)ㆍ구치관(具致寬)ㆍ류성룡(柳成龍)ㆍ이항복(李恒福)ㆍ윤두수(尹斗壽)ㆍ이원익(李元翼)ㆍ김류(金瑬)이고,

도순찰사(都巡察使)는 한응인(韓應寅)이다.

 

*정승으로서 문형(文衡: 대제학)이 된 사람들

 

신숙주(申叔舟), 신용개(申用漑), 성세창(成世昌), 어세겸(魚世謙), 김안로(金安老), 이산해(李山海), 유성룡(柳成龍), 이행(李荇), 김류(金瑬), 김수항(金壽恒), 조태억(趙泰億), 정휘량(鄭彙良), 남구만(南九萬), 최석정(崔錫鼎), 김종수(金鍾秀)이다.

치사(致仕)하고 정승이 된 사람들

이서(李舒), 권중화(權仲和), 이광좌(李光佐), 김치인(金致仁)이다.

 

*상중(喪中)에 정승이 된 사람들

 

황희(黃喜), 정창손(鄭昌孫), 박승종(朴承宗), 장유(張維), 정태화(鄭太和), 김수동(金壽童)이다.

 

*정승으로서 공신이 된 사람들

 

개국 공신(開國功臣)은 배극렴(裵克廉), 조준(趙浚), 김사형(金士衡), 남재(南在), 정탁(鄭擢), 이직(李稷), 이서(李舒), 조영무(趙英茂), 한상경(韓尙敬)이다.

 

정사 공신(定社功臣)은 하륜(河崙)이다.

(주)1398년(태조 7)에 왕위계승권을 둘러싸고 일어난 제1차 왕자의 난 때 공을 세운 사람에게 내린 훈호(勳號).

그해 태조의 세자책봉이 있었는데, 왕자 가운데 조선개국에 가장 공을 세운 이방원(李芳遠)이 정도전(鄭道傳)의 견제를 받아 세자에 책봉되지 못하고 계비 강씨(康氏) 소생의 방석(芳碩)이 책봉되었다. 그러자 방원은 이숙번(李叔蕃)의 사병을 동원하여 난을 일으켜 개국공신이었던 정도전과 남은(南誾)·심효생(沈孝生)·박위(朴威)·유만수(柳蔓殊)·장지화(張至和)·이근(李懃) 등 핵심인물을 제거하고, 강씨 소생의 세자 방석과 방번을 죽임으로써 세력기반을 마련했다. 그리하여 왕자의 난을 승리로 이끈 이방원 일파는 정사공신으로 책록되었다. 1등공신은 이화(李和)·이방의(李芳毅)·이방간(李芳幹)·이방원·이백경(李伯卿)·조준(趙浚)·김사형(金士衡)·이무(李茂)·조박(趙璞)·이거이(李居易)·조영무(趙英茂)·하륜(河崙) 등 12명이며, 2등공신은 이양우(李良祐)·이숙번·조온(趙溫) 등 17명이었다. 이들에게 모두 공적을 기록한 비를 세워주었으며, 여러 가지 포상과 정치적·사회적 특권을 주었다. 1등공신은 공신전 200결(結)과 노비 25구(口)를 주고, 부모·처에게 3등을 올려 봉증하며 자식에게는 3등을 올려 음직(蔭職)을 제수하도록 했다. 2등공신은 공신전 150결과 노비 15구를 주었고, 부모·처에게 2등을 올려 봉증하며 자식들은 2등을 올려 음직을 제수하도록 했다.

 

좌명 공신(佐命功臣)은 성석린(成石璘), 박은(朴誾), 이원(李原), 유량(柳亮), 조연(趙涓)이다.

(주) 태종이 즉위한 직후인 1401년(태종 1) 1월에 책봉한 공신.

조선 건국 이후 정도전의 세력이 부상하고 태조의 8번째 아들 이방석(李芳碩)이 세자로 책봉되자, 이방원(李芳遠)을 중심으로 하는 훈신과 왕실세력은 왕자의 난을 일으켜 반대파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태조를 대신하여 그의 2번째 아들 이방과(李芳果)가 정종으로 즉위했으나, 실질적으로 권력을 양분하고 있었던 이방원과 이방간(李芳幹) 사이에 왕위계승을 둘러싼 무력충돌이 벌어졌으며, 이방원이 승리했다. 이에 정종이 양위(讓位)하여 이방원이 태종이 되었다(방간의 난). 이때 태종의 집권에 공이 컸던 인물들을 좌명공신으로 봉했다. 1등에 이저·이거이·하륜·이무·조영무·이숙번·민무구·신극례·민무질 등 9명, 2등에 이래·이화·이천우 등 3명, 3등에 성석린·이숙·이지란·황거정·김영렬·윤곤 등 12명, 4등에 조온·권근·이직·조박·김우·이원 등 22명으로 모두 46명을 봉했다. 1등공신에는 전지 150결과 노비 13구, 2등에는 전지 100결과 노비 10구, 3등에는 전지 80결과 노비 8구, 4등에는 전지 60결과 노비 6명을 지급했다. 이들의 성분을 살펴보면 고려말에 과거를 통해 새롭게 대두한 문신들, 종친이나 외척, 무장(武將)의 세 부류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 태종은 스스로 집권하기 위해 종친·무장 등 사병(私兵)소지자와 결탁했지만, 자신의 집권이 확실해지자 국가의 통치질서를 위협하는 사병을 혁파하고 이에 반대하는 종친이나 무장들을 처벌했으므로, 제1차 왕자의 난 직후 책봉된 정사공신(定社功臣)과 비교하면 좌명공신에서는 종친·외척·무장 세력이 크게 퇴조하고, 문신들의 중용이 많아졌다. 이후 태종은 왕권강화책에 따라 이들 세력의 약화를 시도하여 민무구·민무질 등의 외척세력과 좌명공신 일부가 제거되었다. 특히 사병을 거느렸던 무인세력들은 조영무·이숙번을 제외하고 정부의 요직에 기용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들은 태종 일대를 통해 중요한 정치세력으로 존재하면서, 태종이 양위하는 1418년까지 중요한 정치적 역할을 담당했다.

 

정난 공신(靖難功臣)은 정인지(鄭麟趾), 한확(韓確), 이사철(李思哲), 권남(權擥), 홍달손(洪達孫), 최항(崔恒), 한명회(韓明澮), 신숙주(申叔舟), 홍윤성(洪允成)이다.

(주) 단종 때 수양대군 등이 자신의 측근세력과 함께 반대세력인 김종서·황보인·안평대군 등을 제거하고 받은 훈호이다. 1453년(단종 1) 단종이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숙부인 수양대군은 측근세력과 모의하여, 단종의 보좌세력인 김종서 등이 안평대군을 중심으로 역모를 꾸몄다는 이유로 이들을 살해·제거한 뒤 이 사실을 왕에게 알려 자신들에게 공신의 훈호를 내려 표창하도록 강요했다(계유정난). 1등은 수양대군·정인지·한확(韓確)·홍달손·한명회·권람 등 12명, 2등은 신숙주·양정(楊汀)·홍윤성 등 11명, 3등 성삼문·이흥상(李興商)·강곤(康袞) 등 20명으로 모두 43명이었다. 이 가운데 성삼문은 1456년(세조 2) 단종복위사건으로 죽은 뒤에 훈호가 삭탈되었다

좌익 공신(佐翼功臣)은 정창손(鄭昌孫), 강맹경(姜孟卿), 홍달손(洪達孫), 황수신(黃守身), 박원형(朴元亨), 구치관(具致寬), 조석문(曺錫文), 윤자운(尹子雲), 김질(金礩), 이극배(李克培)이다.

 

적개 공신(敵愾功臣)은 허종(許琮), 윤필상(尹弼商), 김국광(金國光)이다.

(주)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로를 세운 사람들에게 내린 훈호.

1467년(세조 13) 5월 함길도 토호의 한 사람으로 회령 부사를 지낸 이시애가 도내 각지의 토호·농민 등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8월 진압군이 홍원(洪原)·북청(北靑)·이원(利原) 등지의 싸움에서 이기고 이시애가 잡혀 죽게 되면서 난이 진압되었다. 반란군 토벌에 공을 세운 45명을 적개공신에 책봉하고, 80~150결에 이르는 공신전을 내렸다. 3등급으로 나누어 포상했는데, 1등은 정충출기포의적개공신(精忠出氣布義敵愾功臣)으로 귀성군 준(浚), 조석문(曺錫文), 강순(康純), 남이(南怡) 등 10명, 2등은 정충포의적개공신(精忠布義敵愾功臣)으로 김국광(金國光)·정말손(鄭末孫) 등 23명, 3등은 정충적개공신(精忠敵愾功臣)으로 최유림(崔有臨)·정준(鄭俊) 등 12명에게 주었다. 이들에게는 등급에 따라 노비와 토지 등을 차등 지급했다. 그리고 반란의 재발을 막기 위해 함길도를 남·북 2도로 나누어 중앙정부의 행정적·군사적 통제를 강화했다

 

익대 공신(翊戴功臣)은 심회(沈澮), 한백륜(韓伯倫), 노사신(盧思愼), 홍응(洪應), 신승선(愼承善), 어세겸(魚世謙)이다.

(주) 1468년(예종 1) 10월 남이(南怡)의 옥(獄)을 다스린 공으로 내린 공신호(功臣號).

세조 때 큰 세력을 가지고 있던 유자광, 신숙주, 정인지, 한명회, 구치관, 구성군 준(浚) 등의 구신들은 예종 즉위 초에 원상(院相)에 올라 의정부를 초월하는 정치적 지위를 획득했다. 그런데 이들과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우고 적개공신(敵愾功臣)에 봉해져 지위가 갑자기 상승한 강순(康純)·남이 등이 세조대 후반기부터 대립하고 있었는데, 세조가 죽고 어린 예종이 즉위하자 권력 다툼이 점차 노골화되기 시작했다. 결국 유자광은 남이 일파가 반역을 꾀한다고 무고(誣告)하여 그들을 처형했는데, 이를 남이의 옥이라고 한다. 이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원상세력들은 익대공신에 봉해졌으며, 80~150결에 이르는 공신전(功臣田)을 받았다. 1등은 유자광·신숙주·한명회·신운(申雲)·한계순(韓繼純) 등 5명, 2등은 밀성군 침(琛), 구성군 준, 덕원군 서(曙) 등 10명, 3등은 정인지·정창손(鄭昌孫) 등 22명이었다. 처음 공신으로 봉해진 이는 37명이었으나, 다음해 강희맹·이존·윤흠이 추가로 봉해져 40명이 되었다. 이로써 원상세력의 정치적 지위는 더욱 확고해져 성종대에 훈구파(勳舊派)를 형성하게 되었다

 

좌리 공신(佐理功臣)은 윤사흔(尹士昕), 성봉조(成奉祖), 한치형(韓致亨)이다.

(주) 성종이 즉위한 후 1471년(성종 2) 3월에 왕을 잘 보필했다는 공으로 봉해진 공신.

1등에 신숙주·한명회·최항·홍윤성·조석문·정현조·윤자운·김국광·권감 등 9명, 2등에 정인지·정창손·심회·한백륜 등 11명, 3등에 성봉조·노사신·강희맹·박중선·서거정·양성지 등 18명, 4등에 김수온·이석형·윤필상·황효원 등 35명이 책봉되었으며, 같은 해 9월에 구치관이 2등에 추록(追錄)되어, 모두 75명을 책봉했다. 1등에 반당(伴) 10명, 노비 5명, 구사(丘史) 5명, 전지(田地) 40결, 2등에 반당 8명, 노비 4명, 구사 4명, 전지 30결, 3등에 반당 6명, 노비 3명, 구사 3명, 전지 20결, 4등에 반당 4명, 노비 2명, 구사 2명, 전지 10결이 주어졌다. 좌리공신에는 형제·부자·숙질 간에 있는 인물들이 많이 포함되어 몇몇 특정가문 인사들이 공신책봉의 특권을 독점적으로 누렸음을 보여주며, 이들 중 절반 이상이 기존의 공신이었다. 즉 공신책봉은 훈구 대신들의 정치적·경제적인 특권을 더욱 확대시키기 위해 마련된 조치이므로 이러한 좌리공신의 책봉에 대해 김수손·유문통·김수녕·성준·손순효 등 당시의 대간(臺諫)들을 중심으로 비판이 제기되었으나, 철회되지 못했다. 그후 좌리공신들을 중심으로 한 훈구세력들은 정치권력을 독점, 16세기에 새로 등장하는 사림파(士林派)와 대결하게 되었다

 

정국 공신(靖國功臣)은 박원종(朴元宗), 성희안(成希顔), 유순정(柳順汀), 유순(柳洵), 김수동(金壽童), 송일(宋軼), 심정(沈貞), 김극성(金克成), 권균(權鈞)이다.

(주) 1506년(연산군 12) 9월 1일에 일어난 중종반정에 공을 세운 박원종(朴元宗)·성희안(成希顔)·유순정(柳順汀)·신윤무(辛允武)·박영문(朴永文) 등에게 내린 훈호이다. 1등 '병충분의결책익운정국공신'에는 유자광(柳子光)·신윤무·박영문·장정(張珽)·홍경주(洪景舟) 등 5명, 2등 '병충분의익운정국공신'에는 윤형로(尹衡老)·최한홍(崔漢洪)·심순경(沈順徑) 등 13명, 3등 '병충분의정국공신'에는 심정(沈貞)·고수겸(高守謙) 등 83명으로 총101명이 책록되었다. 뒤에 박원종·유순정·성희안 등이 1등공신으로 봉해지면서 모두 104명으로 늘었다. 이후 3등 30명을 뺀 53명을 4등 '분의정국공신'으로 봉하고 4등에 12명을 추가로 봉했으며 그뒤에 3등으로 1명을 더 봉하면서 1등 8명, 2등 13명, 3등 31명, 4등 65명이 되어 모두 117명이 되었다. 공신의 수가 조선 전기 역대 공신 수에 비해 상당히 많고 친척·인척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특히 성희안의 친척·인척이 많았다. 이는 거사에 참여하지 않은 많은 인물들에게 친척·인척의 혈연관계 등으로 공신호를 내린 때문이다. 이것은 그후 정국공신들이 수차례의 수난과 공격을 받게 되는 요인이 되었다. 이 때문에 여러 옥사를 거쳐 많은 인물이 삭훈되었다. 특히 1519년의 삭훈은 뒤에 기묘사화가 일어나는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정변에 성공한 이들은 한 시대를 움직이는 정치적 주도세력으로서의 지위를 누렸다. 특히 공신의 중추세력은 반정 직후인 1506년부터 그들의 구심점이 약화되면서 집단 자체의 분해상태에 이른 1513년(중종 8)까지 의정부를 장악하고 정치계를 이끌었다.

 

광국 공신(光國功臣)은 유홍(兪泓), 윤두수(尹斗壽), 한응인(韓應寅), 이양원(李陽元), 정철(鄭澈), 이산해(李山海), 류성룡(柳成龍)이다.

(주) 조선은 명나라 〈대명회전 大明會典〉에 태조의 세계(世系)가 이인임(李仁任)의 후손으로 잘못 기록된 것을 발견하고, 여러 번 사신을 보내 그 개정을 요구하다가 마침내 선조 때 종계를 개정하는 데 성공하였다. 1590년(선조 23) 공로가 뚜렷한 사람 19명을 선정하여, 이들을 3등급으로 분류해 공신으로 책봉했다. 1등 윤근수(尹根壽)·황정욱(黃廷彧)·유홍(兪泓)을 수충공성익모수기광국공신(輸忠貢誠翼謨修紀光國功臣)으로, 2등 이후백(李後白)·홍순언(洪純彦)·홍성민(洪聖民)·윤두수(尹斗壽)·한응인(韓應寅)·윤섬(尹暹)·윤형(尹泂) 등 7명을 수충공성익모광국공신(輸忠貢誠翼謨光國功臣)으로 하고, 3등 기대승(奇大升)·김주(金澍)·이양원(李陽元) 등 9명을 수충공성광국공신(輸忠貢誠光國功臣)으로 삼았다.→ 종계변무

 

평난 공신(平難功臣)은 김귀영(金貴榮), 유전(柳琠), 이헌국(李憲國), 김명원(金命元)이다.

(주) 1589년(선조 22)에 발생한 정여립(鄭汝立)의 난(기축옥사라고도 함)을 평정한 공로자에게 내린 훈호(勳號).

처음에는 난을 고발한 재령군수 박충간(朴忠侃)을 형조판서, 안악군수 이축(李軸)을 공조참판, 신천군수 한응인(韓應寅)을 호조참판으로 삼고, 이수(李綏)·강응기(姜應箕)는 당상관으로 승진시키고, 조구(趙球)는 정(正), 민인백(閔仁伯)은 예조참의를 제수하고 이들에게만 공신호를 내렸다. 그러자 박충간은 국청(鞫廳)에 참여한 사람들도 모두 녹훈할 것을 청했는데, 이때 공신책봉자가 지나치게 많다는 대간의 반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선조가 박충간의 청을 받아들였다. 정여립의 난은 당시 수세에 몰려 있던 서인이 동인을 축출하고 정권을 다시 장악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사건으로, 공신으로 책봉된 사람들은 대부분 서인이다. 총 22명으로 1등은 박충간·이축·한응인 등 3명, 2등은 민인백·한준(韓準)·이수·조구·남절(南截)·김귀영(金貴榮)·유전(柳琠)·유홍(兪泓)·정철(鄭澈)·이산해(李山海)·홍성민(洪聖民)·이준(李準) 등 12명, 3등은 이헌국(李憲國)·최황(崔滉)·김명원(金命元)·이증(李增)·이항복(李恒福)·강신(姜紳)·이정립(李廷立) 등 7명이다. 1590년 8월 15일에 교서를 내리고, 공신회맹제(功臣會盟祭)를 열었다.

 

호성 공신(扈聖功臣)은 이항복(李恒福), 이원익(李元翼), 김응남(金應南), 유영경(柳永慶), 최흥원(崔興源), 정탁(鄭琢)이다.

(주) 임진왜란 때 선조를 따라 의주(義州)까지 간 신하들에게 내린 공신호.

1604년(선조 37)에 3등급으로 나누어 녹훈했다. 1등은 충근정량갈성효절협책호성공신(忠勤貞亮竭誠效節協策扈聖功臣)으로 이항복(李恒福)·정곤수(鄭崐壽), 2등은 충근정량효절협책호성공신으로 신성군(信城君)·정원군(定遠君)·윤두수(尹斗壽)·이원익(李元翼)·유영경(柳永慶) 등 31명, 3등은 충근정량호성공신으로 정탁(鄭琢)·이헌국(李憲國)·유희림(柳希霖)·이유중(李有中) 등 86명이 녹훈되었다. 이들은 호종중 감사로 임명되어 평양까지만 호종한 유영경을 제외하고는 모두 의주까지 선조를 호종한 신하들이었다. 공신책봉 때 1등공신은 본인·부모·처자는 3계의 관계(官階)가 가자(加資)되며 반당(伴倘) 10명, 노비 13구(口), 구사(丘史) 7명, 전(田) 150결, 은자(銀子) 10냥, 내구마(內廐馬) 1필을 받았다. 또한 2등공신은 본인·부모·처자는 각 2계 가자되며 반당 6명, 노비 9구, 구사 4명, 전 80결, 은자 7냥, 내구마 1필을 받았고, 3등공신은 본인·부모·처자 각 1계 가자되며 반당 4명, 노비 7구, 구사 2명, 전 60결, 은자 5냥, 내구마 1필을 받았다.

 

정사 공신(靖社功臣)은 김류(金瑬), 신경진(申景禛), 최명길(崔鳴吉), 이시백(李時白), 장유(張維), 원두표(元斗杓), 구인후(具仁垕), 이후원(李厚源), 홍서봉(洪瑞鳳)이다.

(주) 광해군을 내쫓고 인조(능양군)를 옹립하는 데 공을 세워 공신에 책록된 사람.

1618년(광해군 10) 인목대비 유폐사건이 일어나자 지금껏 대북파에 눌려 지내던 서인 일파는 이 사건을 구실로 무력 정변을 꾀하였다. 1623년(광해군 15) 3월 장단으로부터 이서(李曙)의 군대가, 이천에서는 이중로(李重老)의 군대가 모여들어 홍제원에서 김유(金瑬)의 군대와 합류하고, 이괄(李适)을 대장으로 삼아 능양군의 지휘 아래 대궐을 점령함으로써 능양군이 왕위에 올랐다. 이들은 광해군을 강화로 귀양보내고, 대북파 수십 명을 참형에 처했으며 200여 명을 귀양보냄으로써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한편 반정에 공을 세운 이들 가운데 이귀(李貴)·김유 등 53명을 3등으로 나누어 정사공신(靖社功臣)의 훈호(勳號)를 주었다. 즉 김유·이귀·김자점(金自點) 등 10명은 1등, 이괄·김경징(金慶徵) 등 15명은 2등, 박유명(朴維明)·한교(韓嶠) 등 23명은 3등을 받았다. 그러나 이 논공행상이 공평하지 못하여 후일 서인 사이에 반목이 일어나고, 1년 뒤 이괄이 반란을 일으키는 요인이 되었다

 

진무 공신(振武功臣)은 남이웅(南以雄)이다.

(주) 인조 때 이괄(李适)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운 사람에게 내린 훈호(勳號).

1624년(인조 2) 1월에 이괄의 난을 평정하고, 그해 3월에 32명을 3등으로 나누어 책록했다. 1등공신은 갈성분위출기효력진무공신(竭誠奮威出氣效力振武功臣)이라 하고, 장만(張晩)·정충신(鄭忠信)·남이흥(南以興) 등 3명에게 책록했으며 3계씩 특승시켰다. 2등공신은 갈성분위효력진무공신이라 하고, 이수일(李守一)·김기종(金起宗)·변흡(邊潝)·유효걸(柳孝傑)·김경운(金慶雲)·이희건(李希健)·조시준(趙時俊)·박상(朴瑺)·성대훈(成大勳) 등 9명에게 내렸으며 2계씩 특승시켰다. 3등공신은 갈성분위진무공신이라 하고, 남이웅(南以雄)·신경원(申景瑗)·김완(金完) 등 20명에게 내려 1계씩 특승시켰다. 1628년에는 그 공신이나 적장(嫡長)에게 1계씩 더 올려주었다

 

보사 공신(保社功臣)은 김석주(金錫胄)이다.

(부) 1680년 복선군을 추대하고 반역을 도모하려던 허견을 제거하는 공을 세운 신하에게 숙종이 내린 훈(勳)이다. -경신옥사. 경신대출척-

 

분무 공신(奮武功臣)은 오명항(吳命恒), 조문명(趙文命), 조현명(趙顯命)이다.

(주)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운 이들에게 내린 훈호(勳號). 이해 3월에 이인좌란을 평정한 뒤, 이때 주도 역할을 한 15명에게 내린 훈호로 1·2·3등으로 분류했다. 1등은 수충갈성결기효력분무공신(輸忠竭誠決機效力奮武功臣)으로, 난 진압의 총지휘를 맡았던 오명항(吳命恒)이었다. 2등은 수충갈성효력분무공신으로, 직접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운 박찬신(朴纘新)·박문수(朴文秀)·이삼(李森)·조문명(趙文命)·박필건(朴弼健)·김중만(金重萬)·이만빈(李萬彬) 등 7명이었다. 3등은 수충갈성분무공신으로, 진압에 종사한 조현명(趙顯命)·이수량(李遂良)·이익필(李益馝)·김협(金浹)·이보혁(李普赫)·박동형(朴東亨)·권희학(權喜學) 등 7명이었다. 공신호를 받은 이들은 토지를 지급받지는 못했으나, 자품이 올라가고 공신녹권이 지급되어 후손의 녹봉이 보장되었다

 

*정승으로서 집을 하사받은 사람들

 

황희(黃喜), 이원익(李元翼), 허목(許穆)이다.

 

*정승을 지낸 청백리에 뽑힌 사람들

이원(李原), 황희(黃喜), 유관(柳寬), 맹사성(孟思誠), 정문형(鄭文炯), 허침(許琛), 구치관(具致寬), 김전(金銓), 안현(安玹), 이준경(李浚慶), 이원익(李元翼), 심수경(沈守慶), 이항복(李恒福), 유성룡(柳成龍), 김상헌(金尙憲), 이시백(李時白), 홍명하(洪命夏), 이상진(李尙眞)이다.

 

*정승으로서 궤장(几杖)을 하사받은 사람들

 

성석린(成石磷), 허조(許稠), 신개(申槩), 하연(河演), 한명회(韓明澮), 이극배(李克培), 노사신(盧思愼), 윤호(尹壕), 어세겸(魚世謙), 유순(柳洵), 정광필(鄭光弼), 홍언필(洪彦弼), 윤인경(尹仁鏡), 상진(尙震), 윤개(尹漑), 이준경(李浚慶), 이명(李蓂), 홍섬(洪暹), 노수신(盧守愼), 이원익(李元翼), 이경석(李景奭), 정인지(鄭麟趾), 김종서(金宗瑞), 정창손(鄭昌孫), 성봉조(成奉祖), 정유길(鄭惟吉), 권철(權轍), 허적(許積), 권대운(權大運), 허목(許穆), 홍낙성(洪樂性), 김사목(金思穆), 정원용(鄭元容)이다.

 

*정승으로서 치사한 사람들

 

이서(李舒), 권중화(權仲和), 유정현(柳廷顯), 유관(柳寬), 황희(黃喜), 맹사성(孟思誠), 하연(河演), 유순(柳洵), 심수경(沈守慶), 유성룡(柳成龍), 송시열(宋時烈), 남구만(南九萬), 최규서(崔奎瑞), 이광좌(李光佐), 민진원(閔鎭遠), 이의현(李宜顯), 이태좌(李台佐), 김흥경(金興慶), 김재로(金在魯), 유척기(兪拓基), 김상로(金尙魯), 정탁(鄭琢), 홍봉한(洪鳳漢), 김치인(金致仁), 정존겸(鄭存謙), 이경일(李敬一), 남공철(南公轍), 김도희(金道喜), 김흥근(金興根), 이경재(李景在), 조두순(趙斗淳)이다.

 

*일찍 등과(登科: 문과급제)한 정승

 

이직(李稷)과 김종서(金宗瑞)는 16세에 등과하였고,

이원(李原)ㆍ하연(河演)ㆍ이행(李荇)은 18세에 등과하였고,

민제(閔霽)ㆍ하륜(河崙)ㆍ정인지(鄭麟趾)는 19세에 등과하였고,

성석린(成石磷)ㆍ신개(申槩)ㆍ강맹경(姜孟卿)ㆍ이극균(李克均)ㆍ황헌(黃憲)ㆍ이덕형(李德馨)ㆍ최명길(崔鳴吉)ㆍ정치화(鄭致和)ㆍ정원용(鄭元容)은 20세에 등과하였다.

 

*일찍 정승에 제수된 사람들

 

구성군(龜城君) 이준(李浚)은 28세에 정승이 되었고,

이덕형(李德馨)은 38세,

이귀령(李貴齡)ㆍ남지(南智)ㆍ박원종(朴元宗)은 40세,

신숙주(申叔舟)는 41세,

기자헌(奇自獻)ㆍ이항복(李恒福)은 43세,

권람(權擥)ㆍ이직(李稷)ㆍ심온(沈溫)ㆍ한백륜(韓伯倫)ㆍ김수항(金壽恒)ㆍ서용보(徐龍輔)는 44세,

홍윤성(洪允成)ㆍ김병학(金炳學)은 45세,

박은(朴訔)ㆍ김질(金礩)ㆍ황헌(黃憲)ㆍ송연명(宋演明)은 47세,

조준(趙浚)ㆍ이무(李茂)ㆍ강맹경(姜孟卿)ㆍ한명회(韓明澮)ㆍ정태화(鄭太和)ㆍ김수흥(金壽興)ㆍ오시수(吳始壽)는 48세,

심회(沈澮)ㆍ유순정(柳順汀)ㆍ성희안(成希顔)ㆍ남곤(南袞)ㆍ유성룡(柳成龍)ㆍ김응남(金應南)ㆍ이원익(李元翼)ㆍ김석주(金錫胄)ㆍ이이명(李頤命)ㆍ유척기(兪拓基)ㆍ민백상(閔百祥)ㆍ홍봉한(洪鳳漢)은 49세에 정승이 되었다.

 

*만년에 정승에 제수된 사람들

 

권중화(權仲和)는 83세에 정승이 되었고,

허목(許穆)ㆍ윤증(尹拯)은 81세,

유관(柳寬)ㆍ강순(康純)은 79세,

장순손(張順孫)ㆍ정호(鄭澔)는 78세,

정인홍(鄭仁弘)ㆍ김상헌(金尙憲)ㆍ권상하(權尙夏)는 77세,

구인후(具仁垕)는 76세,

권진(權軫)ㆍ심수경(沈守慶)ㆍ이헌국(李憲國)ㆍ이홍주(李弘胄)는 75세,

한효순(韓孝純)ㆍ서매수(徐邁修)는 74세,

목내선(睦來善)ㆍ이완(李浣)은 73세,

김상용(金尙容)ㆍ서경우(徐景雨)ㆍ남이웅(南以雄)ㆍ조상우(趙相愚)ㆍ최규서(崔奎瑞)ㆍ정만석(鄭晩錫)은 72세,

조익(趙翼)ㆍ이경일(李敬一)ㆍ이서구(李書九)는 71세,

심덕부(沈德符)ㆍ허조(許稠)ㆍ하연(河演)ㆍ윤호(尹壕)ㆍ이기(李芑)ㆍ정탁(鄭琢)ㆍ심열(沈悅)ㆍ김육(金堉)ㆍ이시백(李時白)ㆍ윤지선(尹趾善)ㆍ임한호(林漢浩)는 70세에 정승이 되었다.

 

여든 살을 넘은 정승들

 

이귀령(李貴齡)은 향년 94세이고,

황희(黃喜)ㆍ김사목(金思穆)은 모두 90세,

정호(鄭澔)는 89세,

유관(柳寬)ㆍ정인홍(鄭仁弘)ㆍ이원익(李元翼)ㆍ권대운(權大運)ㆍ목내선(睦來善)ㆍ허목(許穆)은 모두 88세,

권중하(權仲夏)ㆍ이경일(李敬一)은 모두 87세,

성석린(成石磷)ㆍ정창손(鄭昌孫)ㆍ윤증(尹拯)ㆍ최규서(崔奎瑞)는 모두 86세, 정창연(鄭昌衍)은 85세,

심수경(沈守慶)ㆍ윤지완(尹趾完)은 모두 84세,

정인지(鄭麟趾)ㆍ김상헌(金尙憲)ㆍ남구만(南九萬)ㆍ송시열(宋時烈)은 모두 83세,

장순손(張順孫)ㆍ홍섬(洪暹)은 모두 82세,

정탁(鄭琢)ㆍ구인후(具仁垕)ㆍ권상하(權尙夏)ㆍ김상철(金尙喆)ㆍ홍낙성(洪樂性)은 모두 81세, 강순(康純)ㆍ이시백(李時白)ㆍ이태좌(李台佐)ㆍ채제공(蔡濟恭)ㆍ남공철(南公轍)은 모두 80세였다.

 

*열조(列朝)의 원상(院相)

 

태종조의 한상경(韓尙敬), 문종조의 황보인(皇甫仁), 세조조의 최항(崔恒), 예종조의 홍윤성(洪允成), 중종조의 홍언필(洪彦弼), 인종조의 윤인경(尹仁鏡), 명종조의 이준경(李浚慶), 인조조의 김자점(金自點), 효종조의 정태화(鄭太和), 현종조의 허적(許積), 경종조의 이광좌(李光佐), 영종조의 김상철(金尙喆), 정종조의 김종수(金鍾秀), 순조조의 심상규(沈象奎), 헌종조의 권돈인(權敦仁), 철종조의 정원용(鄭元容)이다.

 

*임금이 직접 조문한 정승들

 

배극렴(裵克廉), 조준(趙浚), 조영무(趙英茂), 남재(南在), 유정현(柳廷顯), 유관(柳寬), 황희(黃喜), 맹사성(孟思誠), 권진(權軫), 한확(韓確), 한명회(韓明澮), 김류(金瑬), 이정귀(李廷龜), 신흠(申欽) 등 여러 대신의 상사(喪事)에는 열성조(列聖朝)가 모두 직접 조문하였다.

 

묘정에 배향(配享)된 정승들

 

조준(趙浚), 남재(南在), 하륜(河崙), 조영무(趙英茂), 정탁(鄭琢), 황희(黃喜), 최윤덕(崔潤德), 허조(許稠), 신개(申槩), 하연(河演), 권남(權擥), 한확(韓確), 한명회(韓明澮), 박원형(朴元亨), 신숙주(申叔舟), 정창손(鄭昌孫), 홍응(洪應), 이복(李復), 박원종(朴元宗), 성희안(成希顔), 유순정(柳順汀), 정광필(鄭光弼), 홍언필(洪彦弼), 심연원(沈連源), 이준경(李浚慶), 이원익(李元翼), 신흠(申欽), 김류(金瑬), 신경진(申景禛), 김상헌(金尙憲), 정태화(鄭太和), 남구만(南九萬), 박세채(朴世采), 윤지완(尹趾完), 최석정(崔錫鼎), 이유(李濡), 송시열(宋時烈), 김창집(金昌集), 최규서(崔奎瑞), 조문명(趙文命), 김재로(金在魯), 민진원(閔鎭遠), 유언호(兪彦鎬), 김종수(金鍾秀), 이시수(李時秀), 김재찬(金載纉), 김이교(金履喬), 조인영(趙寅永), 이상황(李相璜), 이헌구(李憲球)이다.

 

*왕대별 정승의 수

 

태조조는 4인, 정종조는 5인, 태종조는 11인, 세종조는 15인, 문종조는 2인, 단종조는 3인, 세조조는 17인, 예종조는 3인, 성종조는 11인, 연산조는 11인, 중종조는 23인, 인종조는 2인, 명종조는 12인, 선조조는 32인, 광해조는 7인, 인조조는 23인, 효종조는 8인, 현종조는 11인, 숙종조는 38인, 경종조는 4인, 영종조는 45인, 정종조는 21인, 순조조는 18인, 헌종조는 7인, 철종조는 5인이다. 고종조는 세어 보지 못했다

 

왕대 별 봉조하(奉朝賀)의 수

 

태종조는 7인, 세종조는 14인, 문종조는 3인, 세조조는 3인, 성종조는 8인, 중종조는 3인, 명종조는 2인, 선조조는 3인, 광해조는 1인, 현종조는 1인, 숙종조는 3인, 영종조는 36인, 정종조는 10인, 순조조는 8인, 헌종조는 5인, 철종조는 2인이다.

기사(耆社: 기로소)에 들어간 수

태조부터 순조 경인년(1830)까지 모두 합하여 523명이다.

 

문형(文衡: 대제학)의 수

 

정종조는 1인, 태종조는 1인, 세종조는 4인, 세조조는 2인, 예종조는 1인, 성종조는 2인, 연산조는 4인, 중종조는 7인, 인종조는 1인, 명종조는 5인, 선조조는 16인, 광해조는 1인, 인조조는 12인, 효종조는 6인, 현종조는 3인, 숙종조는 21인, 경종조는 2인, 영종조는 20인, 정종조는 5인, 순조조는 9인, 헌종조는 2인, 철종조는 4인이다.

 

대장(大將)의 수

 

선조조의 조경(趙儆)으로부터 철종조까지 모두 157명이다. 문신 40인은 모두 훈척(勳戚)이거나 장천(將薦)을 받은 사람들이다.

 

청백리(淸白吏)의 수

 

태조조는 2인이고, 태종조는 8인, 세종조는 12인, 세조조는 5인, 성종조는 15인, 중종조는 14인, 명종조는 5인, 선조조는 11인, 인조조는 8인, 숙종조는 20인, 경종조는 6인, 영조조는 5인이고, 보유(補遺) 4인이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