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소의 난
신라의 최치원이 당나라에서 명성을 크게 떨친 것은 황소의 난에 일어나자 황소에게 보낸 격문을 지었기 때문이다.
황소에게 보낸 격서〔檄黃巢書〕
광명(廣明) 2년(881) 7월 8일에 제도도통 검교태위(諸道都統檢校太尉) 모(某)는 황소(黃巢)에게 고하노라.
대저 바름을 지키면서 떳떳함을 닦는 것을 도(道)라고 하고, 위기를 당하여 변통하는 것을 권(權)이라고 한다. 지혜로운 자는 시기에 순응해서 공을 이루고, 어리석은 자는 이치를 거슬러서 패망하고 만다. 그렇다면 백 년의 인생 동안 생사(生死)를 기약하기는 어렵다 하더라도, 만사(萬事)를 마음으로 판단하여 시비(是非)를 분별할 줄은 알아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 왕사(王師)는 정벌하면 싸우지 않고도 이기며, 군정(軍政)은 은혜를 앞세우고 처벌은 뒤로 미룬다. 장차 상경(上京)을 수복하려는 이때에 우선 큰 신의(信義)를 보여 주려고 하니, 타이르는 말을 공경히 듣고서 간악한 꾀를 거두도록 하라.
너는 본시 변방의 백성으로 갑자기 사나운 도적이 되어 우연히 시세(時勢)를 타고는 감히 강상(綱常)을 어지럽혔다. 그리고 마침내 화심(禍心)을 품고서 신기(神器)를 농락하는가 하면, 도성을 침범하고 궁궐을 더럽혔다. 너의 죄가 이미 하늘에까지 닿았으니, 반드시 패망하여 간과 뇌가 땅바닥에 으깨어질 것이다.
아, 당우(唐虞 요순(堯舜)) 이래로 묘호(苗扈)가 복종하지 않은 것을 시작으로 하여 불량(不良)한 무뢰배(無賴輩)와 불의(不義) 불충(不忠)한 무리가 계속 나왔다. 너희들이 지금 보이는 작태가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는가. 멀리로는 유요(劉曜)와 왕돈(王敦)이 진(晉)나라 왕실을 엿보았고, 가까이로는 녹산(祿山)과 주자(朱泚)가 개처럼 황가(皇家)에 짖어 대었다.
그들은 모두 손에 강병(强兵)을 쥐기도 했고, 몸이 중임(重任)에 처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한 번 성내어 부르짖으면 우레와 번개가 치달리듯 하였고, 시끄럽게 떠들어 대면 안개와 연기가 자욱이 끼듯 하였다. 하지만 잠깐 동안 간악한 짓을 자행하다가 끝내는 남김없이 멸망을 당하였다. 태양이 밝게 빛나는데 어찌 요망한 기운을 그냥 놔두겠는가. 하늘의 그물이 높이 걸렸으니 흉악한 족속이 제거되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다.
그런데 더군다나 너는 평민 출신으로 농촌에서 일어나 분탕질하는 것을 능사로 알고, 살상(殺傷)하는 것을 급무로 삼고 있다. 너에게는 셀 수 없이 많은 큰 죄만 있을 뿐, 용서받을 만한 선행(善行)은 조금도 없다. 그래서 천하 사람들이 모두 너를 죽여서 시체를 전시하려고 생각할 뿐만이 아니요, 땅속의 귀신들도 남몰래 죽일 의논을 이미 마쳤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잠시 목숨이 붙어 있다 하더라도 조만간 혼이 달아나고 넋을 뺏기게 될 것은 뻔한 일이다.
무릇 어떤 일이고 간에 스스로 깨닫는 것이 중요한 법이다. 내가 아무렇게나 말하는 것이 아니니, 너는 잘 알아듣도록 하라.
그동안 우리 국가는 더러움도 포용하는 깊은 덕을 발휘하고, 결점도 눈감아 주는 중한 은혜를 베풀어, 너에게 절모(節旄)를 수여하고 방진(方鎭)을 위임하였다. 그런데 너는 가슴속에 짐새〔鴆〕의 독을 품고 올빼미 소리를 거두지 않은 채, 걸핏하면 사람을 물어뜯고 오직 주인에게 대들며 짖어 대는 일만 계속하였다. 그러고는 끝내 임금을 배반하는 몸이 되어 군대로 궁궐을 휘감은 나머지, 공후(公侯)는 위급하여 달아나 숨기에 바쁘고, 임금의 행차는 먼 지방으로 순유(巡遊)하기에 이르렀다.
너는 일찍이 덕의(德義)에 귀순할 줄은 알지 못하고, 단지 완악하고 흉측한 짓만 자행하였다. 이것은 곧 성상께서 너에게 죄를 용서해 주는 은혜를 베풀었는데, 너는 국가에 대해서 은혜를 저버린 죄만 지은 것이다. 그러니 네가 죽을 날이 눈앞에 닥쳐왔다고 할 것인데, 어찌하여 너는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는단 말인가. 더구나 주(周)나라 솥은 물어볼 성격의 것이 아니다. 한(漢)나라 궁궐이 어찌 구차하게 안일을 탐하는 장소가 될 수 있겠는가. 너의 생각을 알 수가 없다. 끝내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인가.
너는 듣지 못했느냐. 《도덕경(道德經)》에 이르기를 “폭풍은 아침을 넘기지 못하고, 소나기도 하루를 넘기지 못한다. 하늘과 땅의 현상도 오래갈 수가 없는데, 하물며 사람의 경우이겠는가.〔飄風不終朝 驟雨不終日 天地尙不能久 而況於人乎〕”라고 하였다. 또 듣지 못했느냐. 《춘추전(春秋傳)》에 이르기를 “하늘이 선하지 못한 자를 그냥 놔두면서 조장하는 것은 복을 주려 함이 아니고, 그의 흉악함을 더하게 하여 벌을 내리려 해서이다.〔天之假助不善 非祚之也 厚其凶惡 而降之罰〕”라고 하였다.
지금 너는 간사함과 포악함을 숨기고 죄악과 앙화(殃禍)를 계속 쌓아가면서, 위태로움을 편안히 여긴 채 미혹되어 돌아올 줄을 알지 못하고 있다. 이는 이른바 제비가 바람에 날리는 장막 위에다 둥지를 틀고서 제멋대로 날아다니는 것과 같고, 물고기가 끓는 솥 속에서 노닐다가 바로 삶겨 죽는 것과 같다고 할 것이다.
나는 웅대한 전략(戰略)을 구사하며 제군(諸軍)을 규합하고 있다. 맹장(猛將)은 구름처럼 날아들고 용사(勇士)는 빗발처럼 모여든다. 높고 큰 깃발들은 초(楚)나라 요새의 바람이 잦아들게 하고, 전함(戰艦)과 누선(樓船)은 오(吳)나라 장강(長江)의 물결이 끊어지게 한다. 손쉽게 적을 격파했던 도 태위(陶太尉)의 군략(軍略)이라 할 것이요, 귀신이라고 일컬어졌던 양 사공(楊司空)의 위의(威儀)라고 할 것이다. 사방팔방을 조망하며 만리 지역을 횡행하니, 이를 비유하자면 맹렬한 불길 속에 기러기 털을 태우는 것과 같고, 태산을 높이 들어 새알을 짓누르는 것과 다름이 없다.
지금 금신(金神)이 계절을 맡고 수백(水伯)이 군대를 환영하는 이때에, 가을바람은 숙살(肅殺)의 위엄을 북돋우고, 아침 이슬은 답답한 기분을 씻어 준다. 파도도 잠잠해지고 도로도 통하였으니, 석두성(石頭城)에서 닻줄을 올리면 손권(孫權)이 후미(後尾)를 담당할 것이요, 현수산(峴首山)에서 돛을 내리면 두예(杜預)가 선봉(先鋒)이 될 것이다. 그러니 경도(京都)를 수복(收復)하는 것은 열흘이나 한 달이면 충분할 것이다.
다만 살리기를 좋아하고 죽이기를 싫어하는 것은 상제(上帝)의 깊은 인덕이요, 법을 굽혀서라도 은혜를 펼치려 하는 것은 대조(大朝)의 훌륭한 전장(典章)이다. 공적(公賊)을 성토(聲討)할 때에는 사적인 분노를 개입시켜서는 안 되고, 길을 잃고 헤매는 자에게는 바른말로 일깨워 주어야 하는 법이다. 그래서 내가 한 장의 글월을 날려, 거꾸로 매달린 듯한 너의 급한 사정을 구해 주려 하니, 너는 고지식하게 굴지 말고 빨리 기미를 알아차려서, 자신을 위해 잘 도모하여 잘못된 길에서 돌아서도록 하라.
네가 만약 제후(諸侯)에 봉해져서 땅을 떼어 받고 국가를 세워서 계승하기를 원하기만 한다면, 몸과 머리가 두 동강 나는 화를 면할 수 있음은 물론이요, 공명(功名)을 우뚝하게 세울 수도 있을 것이다. 겉으로 친한 척하는 무리의 말을 믿지 말고 먼 후손에게까지 영화(榮華)를 전하도록 할 지어다. 이는 아녀자가 상관할 바가 아니요, 실로 대장부가 알아서 할 일이니, 속히 회보(回報)하고 결코 의심하지 말라. 내가 황천(皇天)의 명을 떠받들고 백수(白水)에 맹세를 한 이상, 한번 말을 하면 반드시 메아리처럼 응할 것이니, 은혜를 원망으로 갚으려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네가 만약 미쳐 날뛰는 무리에게 끌려다니며, 잠에 취해서 깨어나지 못한 채, 버마재비가 수레바퀴에 항거하듯 하고, 그루터기를 지키며 토끼를 기다리려고만 한다면, 곰과 범을 때려잡는 군사들을 한번 지휘하여 박멸(撲滅)할 것이니, 까마귀처럼 모여들어 솔개처럼 날뛰던 무리는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가기에 바쁠 것이다. 너의 몸뚱이는 도끼의 날을 기름칠하고, 너의 뼈다귀는 전차(戰車) 밑에서 가루가 될 것이요, 처자(妻子)는 잡혀 죽고 종족(宗族)은 처형될 것이니, 배꼽에 불이 켜질 때를 당하여서는 아무리 배꼽을 물어뜯어도 이미 때는 늦을 것이다.
너는 모름지기 진퇴를 참작하고 선악을 분별해야 할 것이다. 배반하여 멸망을 당하기보다는 귀순(歸順)하여 영화를 누리는 것이 훨씬 좋지 않겠는가. 네가 그렇게 바라기만 하면 반드시 이룰 수 있을 것이니, 부디 장사(壯士)의 나아갈 길을 찾아 곧바로 표범처럼 변할 것이요, 우부(愚夫)의 소견을 고집하여 여우처럼 의심만 하지 말지어다. 모(某)는 고하노라.
[ 黃巢起義 ]
당나라 말기에 이르러 번진들의 혼전과 환관들의 전횡 그리고 붕당지쟁 등으로 조정은 혼란하기 그지없었다. 비교적 현명한 황제였던 선종도 이 기울어진 조정을 바로잡지는 못했다. 선종이 죽은 후, 차례로 황제가 된 의종(懿宗) 이최(李凗)와 희종(僖宗) 이현(李儇)은 향락을 일삼으며 방탕한 나날을 보냈고, 조정의 부패는 극에 달하게 되었다. 더구나 황실과 관리, 지주들이 야합하여 농민들을 착취하니, 농민들은 가렴잡세에다 해마다 이어지는 자연재해에 시달리다 못해 살길을 찾아 떠돌아다니거나 아니면 산속으로 들어가 화적떼가 되었다.
874년, 즉 희종이 즉위한 해에 복주(濮州, 하남성 범현) 지역의 소금장수들 우두머리인 왕선지(王仙之)가 농민 수천 명을 모아 장원(長垣, 하남성 일대)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왕선지는 천보평균대장군(天寶平均大將軍)으로 자칭하고 극심한 빈부 격차를 빚어낸 조정의 죄악을 폭로, 규탄하는 격문을 전국에 살포했다. 그러자 수많은 농민들이 왕선지의 봉기군에 가담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원구(寃句, 산동성 조현 북부) 지역의 소금장수 황소(黃巢)도 농민들을 모아 봉기를 일으켰다.
후에 황소와 왕선지 이 두 봉기군은 하나로 회합하여 산동과 하남 일대에서 관군들과 싸웠다. 그들은 군사를 두 갈래로 나누어 왕선지는 서쪽으로, 황소는 동쪽으로 진군했는데, 왕선지의 봉기군은 황매(黃梅, 호북 일대)에서 대패하고 왕선지는 전사하고 말았다. 왕선지의 패잔병들은 다시 황소의 봉기군과 합류한 다음, 황소를 왕으로 추대하고 충천대장군(沖天大將軍)이라고 불렀다.
그 당시만 해도 중원 지역의 관군은 힘이 막강했다. 황소의 봉기군이 하남으로 진격하려고 하자 당나라 조정은 즉시 낙양 부근에 수십만 대군을 집중하여 봉기군을 포위, 토벌하려고 시도했다. 이를 안 황소는 낙양을 공격하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관군의 힘이 미약한 곳부터 먼저 진격했다. 그들은 남쪽으로 광주까지 쳐내려 갔다. 광주를 점령하고 한동안 군사를 휴식시키고 있는데 영남 지역에서 전염병이 돌자 황소는 군대를 이끌고 북상했다. 880년, 황소는 60만 대군을 거느리고 동관을 공격했다. 황소의 봉기군이 동관을 점령하자 조정 사람들은 대경실색하여 도망치기에 바빴다. 희종과 환관 전영자(田令孜)는 후궁의 비빈들을 데리고 성도로 도망갔고, 미처 도망치지 못한 관리들은 성문을 열고 나와 투항했다.
며칠 후에 황소는 장안 대명궁에서 즉위하여 황제가 되고 국호를 대제(大齊)라고 했다. 7년 동안의 투쟁을 거쳐 황소의 봉기군은 전국의 정권을 탈취하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런데 문제는 7년이란 오랜 시간 동안 주로 유동 작전을 한 황소의 봉기군이 점령한 지역에다 군대를 남기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점령했다가는 떠나버리곤 했기 때문에 황소의 수십만 봉기군은 비록 일거에 장안을 점령했지만 그 주변은 여전히 관군 세상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당나라 조정은 각지의 군대를 급히 징발하여 장안을 포위했다. 장안성 안은 식량 사정이 갈수록 어려워져 가고 있었다. 황소는 대장 주온(朱溫)을 보내 동주(同州)를 지키게 했는데, 주온은 봉기군이 가장 어려운 이 시기에 봉기군을 배반하고 당나라 조정에 투항했다.
이때 조정에서는 사타(沙陀, 중국 서북부의 소수민족) 귀족이자 안문 절도사인 이극용(李克用)에게 명해 4만 기병을 거느리고 장안으로 진격하게 했다. 봉기군은 힘겨운 싸움을 했으나 결국에는 실패하고 장안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하남으로 물러난 황소의 봉기군은 주온과 이극용의 포위 공격을 받았다. 884년 황소의 군대는 진주(陳州, 하남 회양)를 치는 싸움에서 실패하고 관군에게 쫓기게 되었다. 결국 황소는 태산 낭호곡(狼虎谷)에서 자결하고 말았다.
황소의 난 [黃巢起義] (중국상하오천년사, 2008.4.25, (주)신원문화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