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 인간의 본성은 선(善)한가, 악(惡)한가
목차
인간의 본성은 선(善)하다
인간의 본성은 악(惡)하다
법(法)으로 인간의 악한 본성을 다스린다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라는 문제는 과거와 현재,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사람들이 가장 오랜 기간에 걸쳐 제기해 온 질문이다. 특히 인간은 선(善)한 존재인가 아니면 악(惡)한 존재인가 하는 질문과 논쟁은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후 철학, 정치,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다.
선(善)과 악(惡)을 둘러싼 인간 본성론(本性論)에 관한 논쟁은 수많은 학파(學派)를 탄생시켰다. 또한 그 논쟁은 학자들이 각기 다른 정치와 사회, 도덕과 윤리에 대한 원칙과 해법(解法)을 내놓게 했다.
여기에서는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한 맹자와 성악설(性惡說)을 주장한 순자를 중심으로 '인간 본성'에 대한 춘추전국시대의 논쟁에 대해 살펴보았다. 또 성악설(性惡說)을 주장한 학자들 중 예(禮)를 통한 교화를 중시한 순자와 법치(法治)를 중시한 한비자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해 알아보았다.
인간의 본성은 선(善)하다
고대 중국의 사상가들에게 인간의 본성이 선(善)한가 아니면 악(惡)한가 하는 문제는,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진 '화두'였다. 또한 각 학파들의 인간관과 인간 본성론에 따라 주창한 정치 철학과 정치적 행동 역시 크게 달라졌다.
예를 들어 인간 본성은 선(善)하다고 본 맹자와 같은 정통 유가(儒家)들은 욕망과 이익을 좇는 행동이 외부의 사물로부터 자극받아 형성된, 인간 본성을 흐트러뜨린 행동이므로, 인간의 선(善)한 본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욕망과 이익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겼다. 반면 인간 본성이 악(惡)하다고 본 순자는 욕망과 이익을 좇는 행동이 외부로부터 자극받아 형성된 것이 아니라 인간이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주장 때문에 순자는 정통 유가(儒家)들로부터 이단으로 배척받고 있지만, 그가 예(禮)의 교육과 실천을 통해 인간의 욕망과 이익을 좇는 마음을 통제·교화하고자 했다는 점에서는 유가(儒家)의 입장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정통 유가(儒家)의 인간 본성론이라고 할 수 있는 성선설(性善說)을 논리적으로 주창한 최초의 인물은 맹자(孟子)이다. 맹자는 중국 전국시대 중기(中期)의 인물로서, 당시 유가(儒家)의 세력은 매우 약화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맹자는 자신의 필생의 과제를, 약화될 대로 약화되어 있는 공자의 권위와 유가의 학문을 복권시키는 것으로 삼았다. 맹자가 다른 유가(儒家)들에 비해 수많은 논적(論敵)들과 논쟁을 벌였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즉, 맹자는 당시 공자와 유가(儒家)의 학설을 크게 훼손시키는 주장이나 또 유가가 아니면서 크게 명성을 얻고 있던 타 학파(學派)의 이론에 대해 논리적으로 비판하여 그 권위를 강화시키는 것을 자신이 해야 할 주요한 역할로 보았다.
맹자는 '인간 본성론'에 대한 문제를 놓고서도 고불해(告不害 : 고자)라는 철학자와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고불해는 맹자와는 다르게 "인간의 본성이란 선(善)한 것도 아니고 선(善)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럼 맹자와 고불해가 논쟁을 벌인 2,000여 년 전의 현장으로 가보도록 하자. 먼저 논쟁의 포문을 연 사람은 고불해였다.
고불해 : "성(性)이란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한 자리를 빙빙 돌고 도는 물과 같은 것입니다. 그 물길을 동쪽으로 터놓으면 물은 동쪽을 향해 흐르고, 서쪽으로 터놓으면 서쪽을 향해 흐르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이 선(善)한 것도 아니고 선(善)하지 않은 것도 아닌 것은 마치 물이 동쪽과 서쪽으로 흐를 수도 있고 흐르지 않을 수도 있는 이치와 같습니다."
- 『맹자』 「고자 상」편
고불해는 인간의 본성이란 태어날 때부터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형성되는 것이므로, 선(善)해질 수도 있고 또 악(惡)해질 수도 있다는 주장을 물에 비유하여 설명한 것이다. 이에 맹자는 "물은 동쪽과 서쪽을 가리지 않지만, 그렇다고 위와 아래까지 가리지 않는 것은 아니다"면서 고불해의 주장을 궤변이라고 일축했다.
맹자 : "물은 진실로 동쪽과 서쪽의 구분이 없지만, 위와 아래의 구분이 없겠습니까? 인간의 본성이 선(善)하다는 것은 마치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물이 아래로 흐르지 않는 것이 없듯이, 사람은 선(善)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이제 누군가 물을 쳐서 뛰어오르게 하면 그 물방울은 이마를 넘어갈 것이고, 아래를 막아 물을 거꾸로 흐르게 하면 산에도 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어찌 물의 본성이라고 하겠습니까? 그것은 외부의 힘과 자극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사람을 선(善)하지 않게 만드는 이유 역시 물과 마찬가지로 외부의 영향 때문일 뿐입니다."
-『맹자』 「고자 상」편
맹자는 고불해의 주장을 설명해달라고 요청한 제자 공도자(公都子)와의 대화에서도, 인간의 본성은 선(善)하다는 성선설(性善說)을 되풀이하여 주장한다.
공도자 : "고자(고불해)는 '인간의 본성은 선(善)한 것도 없고 선(善)하지 않은 것도 없다'고 말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인간의 본성은 선(善)해질 수도 있고 악(惡)해질 수도 있다. 그러므로 주(周)나라의 성군(聖君)인 문왕과 무왕이 일어나자 백성들은 선(善)을 좋아했고, 후대에 폭군(暴君)인 주(周)나라의 유왕(幽王)과 여왕(厲王)이 일어나자 백성들은 포악한 것을 좋아하였다'고 했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은 '본성이 선(善)한 사람도 있고, 본성이 악(惡)한 사람도 있다. 그러므로 어진 요(堯)임금을 세웠으나 나쁜 상(象)이 있었고, 어진 순(舜)임금이 있었으나 그 아비인 고수(瞽瞍)는 완고하고 잔악했다. 주(周)나라의 마지막 왕인 폭군(暴君) 주왕(紂王)이 있었으나 또한 현인(賢人)인 미자계(微子啓)와 비간(比干)이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인간의 본성은 선(善)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니, 그렇다면 그들이 말한 것이 모두 틀렸다는 것입니까?"
맹자 : "인간의 선(善)한 본성을 따라 움직이는 정(情 : 욕망)은 선(善)을 할 수 있는 것이므로, 이것을 이른바 성선(性善)이라고 한다. 사람이 악(惡)한 행동을 하는 것은 그 타고난 자질이 그렇기 때문이 아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측은한 마음(측은지심 : 惻隱之心)을 갖고 있으며, 자신의 잘못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다른 사람의 옳지 못한 행동을 미워하는 마음(수오지심 : 羞惡之心)을 갖고 있다. 또 윗사람과 어른을 받들고 존경하는 마음(공경지심 : 恭敬之心)을 누구나 다 가지고 있고, 옳고 그릇된 것을 가려낼 줄 아는 마음(시비지심 : 是非之心)을 지니고 있다.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측은한 마음(측은지심 : 惻隱之心)이 곧 인(仁 : 사랑)이고, 자신의 잘못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다른 사람의 옳지 못한 행동을 미워하는 마음(수오지심 : 羞惡之心)이 곧 의(義 : 올바름)이고, 윗사람을 받들고 존경하는 마음(공경지심 : 恭敬之心)이 곧 예(禮 : 예절)이며, 옳고 그릇된 것을 가려낼 줄 아는 마음(시비지심 : 是非之心)이 곧 지(智 : 지혜)이다. 따라서 구하면 얻고 구하지 않으면 잃어버린다는 말처럼, 혹시 악(惡)을 행하면서 선(善)과 악(惡)의 차이를 알지 못할 만큼 악(惡)에 물든 사람은 그 타고난 자질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시경(詩經)』에서는 '하늘이 온 백성을 낳으시니 사물이 있으면 반드시 법칙이 있네. 백성들은 착한 본성을 지녀 이 아름다운 덕(德)을 좋아하네.'라고 했다. 공자께서도 '이 시(詩)를 지은 사람은 도(道 : 도리)를 아는 사람이다. 진실로 사물이 있으면 반드시 법칙이 있게 마련이니, 백성들은 착한 본성을 지녔으므로 아름다운 덕(德)을 좋아하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 『맹자』 「고자 상」편
맹자를 비롯한 유가(儒家)들은 인간의 선(善)한 본성에 따라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인(仁)과 덕(德) 그리고 의(義)에 따라 세상은 다스려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만 인간의 선(善)한 본성을 -외부로부터- 자극하여 다치게 하는 정(情 : 욕망)을 통제하여 억압하고, 그 선(善)한 본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교육과 교화 그리고 수행과 실천이 따라야 한다고 여겼다.
인간의 본성은 악(惡)하다
맹자와 고불해의 논쟁이 어떻게 마무리되었는가에 대한 기록은 없다. 다만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에 대해서는 그 이후에도 무수한 비판과 반박이 있었던 듯하다. 맹자의 성선설에 대한 비판의 최고 논객은 순자(荀子)라고 할 수 있다. 순자(荀子)는 맹자의 인간 본성론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순자는 맹자보다 60여 년 후에 태어난 인물로서, 맹자가 세상을 떠났을 때 순자는 불과 20대 초반의 젊은이였다. 순자가 맹자의 '성선설'에 대해 극히 비판적인 시각을 갖게 된 이유는 시대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순자는 기원전 298년에 태어나 기원전 238년에 사망했는데, 이 시기는 진시황의 천하 통일을 눈앞에 둔 전국시대 말기였다. 550여 년간 지속된 춘추전국시대의 막바지에 접어든 만큼 침략과 정복 전쟁, 사회적 분열과 혼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시대적 모순과 혼란을 바로잡는 것을 철학의 실천적 과제로 삼고자 한 순자에게 맹자의 '성선설'은 지독히도 관념적인 주장이었던 듯하다. 그래서 순자는 '인간의 본성은 악(惡)하고, 선(善)은 인위적인 것'이라고 했다. 선(善)이란 태어날 때부터 인간이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인위적인 교육과 교화로서만 가질 수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순자는 인간의 본성이 악(惡)하다면, 전국시대를 휩쓸고 있는 침략과 정복 전쟁, 사회적 쟁탈과 혼란은 피할 수 없으며, 전쟁과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교육이라는 인위적 훈련과 예(禮)라는 사회 제도에 따라 인간의 악(惡)한 본성을 교정·교화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본래 악(惡)한 것이다. 선(善)이란 인위적(人爲的)으로 바로잡은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태어나면서부터 이익을 좋아하는 마음이 있다. 이 때문에 서로 다투고 빼앗는 마음이 생겨나고 사양하는 마음이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태어나면서도 시기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있어 잔악하고 해치는 마음이 생겨나고, 충성과 믿음이 없어지게 된다. 또한 태어나면서부터 눈과 귀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어 음악이나 여색(女色)을 좋아한다. 이 때문에 음탕하고 혼란스러운 일이 일어나고 예의와 문채(文彩) 그리고 도리가 없어지게 된다.
이렇듯 인간의 본성은 방종하므로 정(情)에 따르면 반드시 서로 다투고 빼앗게 되고, 문채를 어지럽히고 도리를 문란하게 한다. 따라서 반드시 스승을 본받는 교화나 예의로 이끌어야 사양하는 마음이 생겨나고 문채와 도리가 일치하여 다스려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으로 살펴보면, 인간의 본성은 악(惡)한 것이 분명하며, 그 선(善)한 행동은 인위적(人爲的)으로 바로잡은 것이다.
굽은 나무는 반드시 굽은 것을 바로잡는 도구를 사용하고 수증기에 쪄서 바로잡은 다음에 곧게 된다. 또 무딘 연장은 반드시 연마하는 과정을 거친 다음에 날카로워진다. 같은 이치로 인간의 본성이 악(惡)한 것은 반드시 스승을 본받은 다음에 바르게 되고, 예의를 얻은 후에 다스려지는 것이다. 사람들이 스승을 본받지 않게 되면 편벽되고 험악해지며, 예의가 없으면 흐트러지고 어지러워져서 다스려지지 않는다.
옛 성왕(聖王)들은 인간의 악한 본성으로 그 행동이 편벽되고 험악해져 올바르지 않고 세상이 어지러워져 다스려지지 않게 되자, 예의(禮儀)를 일으켜 세우고 제도(制度)를 만들어 인간의 성정(性情)을 바로잡고 교화시켰다. 이에 비로소 인간 세상은 다스려지고 또한 도리와 이치에 맞게 되었다.
현재 스승을 본받아 교화되고 학문을 쌓아 예의를 행동으로 보이는 사람은 군자(君子)가 되고, 성정(性情)을 방종하게 하고 그 행동을 제멋대로 하며 편안함을 추구하고 예의를 범하는 자는 소인이 된다. 이러한 것들로 살펴 관찰해보면, 인간의 본성이 악(惡)하다는 것은 명백하며 그 선(善)하다고 하는 것은 인위적(人爲的)으로 교정한 것이다.
맹자는 "사람들이 학문을 하는 이유는 그 본성이 선(善)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맹자의 말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맹자의 말은 인간의 본성을 알지 못한 것이며, 인위적인 분수를 살피지 못한 것이다. 무릇 본성이란 하늘로부터 받은 것으로 배워서 되는 것도 아니고 맡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예의(禮儀)는 성인이 만든 것으로 사람들이 배워서 익숙하게 된 것이다.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있는 것을 본성(本性)이라 하고, 배워서 익숙하게 되어 인간이 지니게 되는 것을 인위(人爲)라고 한다. 이것이 본성과 인위를 구분하는 기준이다.
눈으로 볼 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는 것은 인간의 본성(本性)이다. 사물을 밝게 볼 수 있는 것은 눈이 있기 때문이고 소리를 또렷하게 들을 수 있는 것은 귀가 있기 때문이다. 눈이 사물을 밝게 볼 수 있고 귀가 또렷하게 들을 수 있는 것은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맹자는 "인간의 본성은 원래 선(善)한데, 장차 모두 그 선(善)한 본성을 상실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맹자의 말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본성은 태어나면서 그 본질과 재질을 떠나므로 반드시 잃어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본성은 악(惡)하다는 것이 명백하다.
소위 '본성이 선(善)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그 순수한 자질을 잃지 않아 아름답고 그 재질을 잃지 않아 이로운 것이라고 말한다. 본질과 재질의 아름다움과 마음이 선(善)하다는 것은 사물을 밝게 볼 수 있는 눈이 있고 소리를 또렷하게 들을 수 있는 귀가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인간의 본성은 굶주리면 배부르게 먹고 싶고, 추우면 따뜻하게 하고 싶고, 피곤하면 쉬고 싶어 한다. 이것은 인간의 정(情 : 욕망)과 성(性 : 본성)이다. 그러나 굶주린 사람이 어른을 보고서 감히 먼저 먹지 않는 것은 사양함이 있기 때문이고 피곤한데도 감히 쉬지 않는 것은 대신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사양하고 아우는 형에게 사양하고 아들은 아버지를 대신하고 아우는 형을 대신하는 행동들은 모두 인간의 본성에 반대되고 욕망에 어긋나는 것들이다. 그러나 이것은 효자의 도(道)이며 예의의 문채와 도리이다.
그러므로 성정(性情)에 따르면 사양하지 않게 되고, 사양하는 것은 성정(性情)을 거슬러 행동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보더라도, 인간의 성(性)이 악하다는 것은 명백하며 그 선(善)하다고 하는 것은 인위적으로 교정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순자, 『순자』 「성악(性惡)」편
순자의 '성악설(性惡說)'은 제자백가 중 하나인 법가(法家)의 '인간관(人間觀)'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순자는 인간의 악(惡)한 본성을 예(禮)의 실천과 교육을 통해 인위적으로 교정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순자의 제자이면서 법가(法家) 사상을 집대성한 한비자는, 순자가 주장한 예(禮)란 곧 법(法)을 말하는 것이라면서 법치(法治)를 통해 인간 세상을 다스리고자 했다.
법(法)으로 인간의 악한 본성을 다스린다
한비자는 이익과 욕망을 좇는 것을 인간의 본성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한비자는 이익과 욕망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불공평하고 부당한 목적과 방법 및 수단을 통해 이익과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 문제라고 여겼다. 따라서 그는 상벌(賞罰)의 원칙과 기준을 법(法)으로 정하고, 신분의 높고 낮음을 따지지 않는 엄격한 법(法) 적용을 통해 인간과 사회를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형벌을 엄격하게 집행하지 않으면 사악(邪惡)을 억제할 수 없다. ……법이란 신분이 귀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봐주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굽은 모양에 따라 줄을 긋는 먹줄을 굽혀서 사용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법이 집행되면 아무리 말솜씨가 뛰어난 사람이라도 자신의 변술(辯術)을 이용해 벗어날 수 없고, 아무리 힘이 뛰어난 사람이라도 감히 싸워 이길 수 없는 것이다. 죄를 벌하는 데 있어서 고관대작(高官大爵)이라도 그 죄를 피하지 못하고, 착한 행동에 상을 주는 데 있어서는 아무리 미천한 사람이라도 빼놓지 않는다. 따라서 왕족과 대신들의 허물을 바로잡고, 일반 백성들의 사악(邪惡)을 꾸짖는다. 세상의 어지러움을 다스리고, 엉킨 매듭을 풀며, 지나치게 넘쳐나는 것은 깎아 줄이고, 틀린 것은 바로잡는다. 이렇듯 사람들이 지켜야 할 규범과 법도를 통일하는 방법으로 법(法)보다 더 나은 것은 없다. 관리들을 독려하고, 백성을 다스리며, 사악한 사람을 물리치고, 간사한 거짓을 막는 방법으로 형벌보다 더 나은 것은 없다.
- 한비자, 『한비자(韓非子)』 「유도(有度)」편
이렇듯 유가(儒家)의 맹자로 대표되는 성선설(性善說)의 반대편에는 순자와 한비자로 대표되는 성악설(性惡說)이 있다. 또 맹자와 순자는 인간 본성에 대한 정반대의 입장에 서 있으면서도, 교육과 교화를 통해 그 선(善)한 본성을 유지하거나 바로잡을 수 있다고 본 반면 한비자는 법(法)을 통한 상벌의 기준과 법의 엄격한 적용을 통해 인간의 악(惡)한 본성을 다스릴 수 있다고 보았다.
논쟁 다시보기 인간의 본성은 선한가 악한가
고불해
인간의 본성이 선(善)한 것도 아니고 선(善)하지 않은 것도 아닌 것은 마치 물이 동쪽과 서쪽으로 흐를 수도 있고 흐르지 않을 수도 있는 이치와 같다.
맹자
물이 아래로 흐르지 않는 것이 없듯이, 사람은 선(善)하지 않는 이가 없다. 이제 누군가 물을 쳐서 뛰어오르게 하면 그 물방울은 이마를 넘어갈 것이고, 아래를 막아 물을 거꾸로 흐르게 하면 산에도 오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외부의 힘과 자극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사람을 선(善)하지 않게 만드는 이유 역시 물과 마찬가지로 외부의 영향 때문일 뿐이다.
순자
인간의 본성은 본래 악(惡)한 것이다. 선(善)이란 인위적(人爲的)으로 바로잡은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태어나면서부터 이익을 좋아하는 마음이 있다. 이 때문에 서로 다투고 빼앗는 마음이 생겨나고 사양하는 마음이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한비자
이익과 욕망을 좇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문제는 불공평하고 부당한 목적과 방법 및 수단을 통해 이익과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상벌(賞罰)의 원칙과 기준을 법(法)으로 정하고, 신분의 높고 낮음을 따지지 않는 엄격한 법(法) 적용을 통해 인간과 사회를 다스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