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울의 생질이▣(행23:12-30)
2002년 3월 3일
주일예배(사순절 셋째 주일)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나기 때문에 우리의 삶은 죄 쪽에 가깝습니다. 특별히 누구에게 배워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죄를 짓습니다. 그래서 우리 속에는 악함과 잔인함이 죄와 함께 공존하고 있습니다.
94년에 한국의 성수대교가 무너지고, 95년에 삼풍 백화점이 무너졌습니다. 그 때에 사람들이 충격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한국에서는 '액션영화'가 잘 흥행되지 않았습니다. 영화에서는 건물이 무너지고, 사람이 많이 죽는 장면이 많이 나와도 아무렇지도 않지만,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을 때의 상황은 생각보다 더 참담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잠시동안의 일이고 조금 지나고 나면 사람들은 처참했던 상황을 다 잊어버립니다.
작년에 미국의 World Trade Center가 무너졌습니다. 그 이후로 '액션 대작'이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한국과 동일하다고 여겨집니다. 그와는 반대로 '해리 포터'와 '반지의 제왕'같은 판타지 류의 영화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현실을 생각하기가 싫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 지나고 나면 WTC가 무너지는 것을 다루는, 소위 액션대작들이 나올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속에 있는 잔인함이 그것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악행과 그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하심'은 성경의 큰 주제 중의 하나입니다. 형들이 요셉을 팔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는 도구로 삼았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통해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우물을 덮은 여인(삼하17)
사무엘하 15장에서 19장은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에 대한 반란을 일으킨 사실에 대해서 증거해 줍니다. 그 중에서 17장은 굉장히 극적인 장면을 우리에게 전해 줍니다. 다윗이 왕이 되고 난 뒤, 다윗 왕국은 천년만년 평안할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밧세바 사건이후로 다윗 왕국은 곪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압살롬의 반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다윗의 부인들은 대부분 평범한 여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압살롬의 어머니 마아가(Maacah)는 조금 달랐습니다. 그녀는 그술 왕(king of Geshur) 달매(Talmai)의 딸이었는데, 다윗이 정략적으로 결혼해서 왕비가 되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어려서부터 압살롬은 다른 형제들과는 조금 다르게 자랐을 것입니다. 다른 왕자들과는 품위가 달랐는지 모릅니다.
압살롬은 백성들의 후원을 입고, 다윗 성을 차지했습니다. 거기에서 만족하지 않고 명실상부한 왕이 되고 싶었기 때문에 아버지 다윗이 없어져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압살롬에게는 아히도벨이라는 신하가 있었습니다. 이 아히도벨은 뛰어난 전략가였습니다. 그는 원래 다윗의 신하였지만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키자 압살롬에게 붙었습니다. 그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는 다윗이 범한 밧세바의 할아버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아히도벨은 압살롬에게 군사 일만 이천명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자신이 그들을 데리고 다윗이 있는 곳으로 가서 겁을 주면, 다윗과 함께 있던 사람들은 다 도망을 갈 테니까 그 때에 다윗만 죽이겠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압살롬에게는 명실상부한 왕이 될 수 있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될 것이고, 아히도벨에게는 개인의 복수도 하게되니까 기가 막힌 작전이었습니다. 압살롬과 대부분의 신하들이 그 작전을 좋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압살롬이 후새의 이야기도 들어보자고 했습니다. 후새는 다윗의 신하 중에 피난가지 않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후새는 그 작전이 좋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로 세 가지를 들었습니다. 첫째는 다윗이 지금 몹시 화가 나있기 때문에 무슨 짓을 할지 모르고, 둘째는 다윗 곁에 있는 사람들이 다 용사라서 섣불리 접근 할 수가 없고, 마지막 셋째는 다윗은 병법에 능한 사람이기 때문에 만약 압살롬의 사람 중에서 몇 명만 죽여도 "압살롬이 완전히 패했다"고 소문을 내어 전세를 뒤집어엎을 수 있는 인물이라고 했습니다.
압살롬은 아히도벨의 전략이 더 나음에도 불구하고 후새의 말을 따랐습니다. 그 이유를 삼하 17:14절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르되 아렉 사람 후새의 모략은 아히도벨의 모략보다 낫다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모략을 파하기로 작정하셨음이더라”
하나님께서는 압살롬의 손을 들어주신 것이 아니라 다윗의 손을 들어주셨던 것입니다. 이 때에 후새는 제사장인 사독과 아비아달에게 가서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알려주고, 사람을 보내어 다윗 왕에게 강을 건너 피신하게 하라고 말을 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사독과 아비아달은 자신의 아들인 요나단과 아히마아스를 보냈습니다.
그들의 늘 하던 연락방법은 그들이 성 안에 있는 여자아이에게 전해주면 그 소녀가 다윗에게로 가서 알려주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소식을 전하기 전에 탄로가 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은 바후림 지역으로 도망가서 그 마을의 어떤 집의 우물 속에 숨었습니다. 그러자 그 집 여인은 그 우물 위에다가 덮개로 덮고, 위에 곡식을 깔아 두었습니다. 잠시 후 들이닥친 압살롬의 군사들이 물었습니다. "아히마아스와 요나단이 어디에 있느냐?" 그러자 그 여인은 그들이 시내를 건너갔다고 거짓말했습니다.
압살롬의 군사들이 돌아간 후, 거기에서 나온 두 사람은 다윗에게로 가서 모든 사실을 이야기했고, 다윗과 다윗의 사람들은 모두 무사히 요단강을 건널 수 있었습니다.
후에 아히도벨은 자신의 작전이 실패한 것을 알고, 목을 매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우물을 덮은 이 여인이 행한 행동은 지극히 작은 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만약 이 여인의 행동이 없었다면, 그리고 정말 다윗이 망하고 압살롬이 승리를 했다면 메시아의 왕가는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원대한 하나님의 구속사는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물론 하나님의 계획은 실패하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메시아의 왕가인 다윗 왕가를 보호하실 때, 정말 이름도 없는 한 무명의 여인을 통해서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여인의 믿음의 행동이 두 사람의 생명을 살렸고, 한 나라의 왕인 다윗 왕의 생명을 살렸고, 메시아 왕국의 정통을 잇게 했습니다. 단지 우물 덮은 그 사실이 말입니다.
그렇지만 사실 이 여인의 이러한 행동이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만약 발각이 되면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 친척들까지 생명에 위협을 줄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 감당해 내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은 아무리 작게 보이더라도 그것이 작지 않다는 것과 소중한 일이란 것을 알게 됩니다. 남자들은 늘 반복되는 출퇴근의 일상사, 여자들은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밥하는 일, 빨래하고 청소하는 일 등이 모두 하나님의 일이란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압살롬과 아히도벨은 자기의 야망과 복수를 붙들고 있는 사람입니다.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덤벼듭니다. 반면에 우물을 덮은 여인은 지극히 작은 일처럼 보이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앞의 이야기와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허망한 인간의 욕망을 붙들고 사는 사람들과 하나님의 역사의 통로가 되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사도바울을 죽이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있던 유대인들은 바울을 성전에서 끌어내어 천부장에게까지 끌고가는데는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나는 로마시민입니다"는 말에 자신들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예루살렘 공회까지 끌고 갔습니다. 하지만 또 바울이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입니다"라고 말하자,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서 자신들의 뜻을 또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모의했던 일을 오늘 본문 12-13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날이 새매 유대인들이 당을 지어 맹세하되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 하고 이같이 동맹한 자가 사십 여명이더라”
소위 '바울을 죽이기 위한 암살단' 회원이 40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40이라는 숫자는 '많다', '충분하다'의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뒤에 40년동안 광야 생활을 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때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에서 40일동안 금식을 하셨습니다. 이것 역시 인간의 최고의 한계까지 가셨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모세가 정탐꾼들을 보냈는데 40일 동안 정탐을 했습니다. 이것 역시 충분히 조사를 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다"고 고백합니다. 이것 역시 태형에 있어서 인간이 맞은 수 있는 한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악인에게 태형이 합당하거든 재판장은 그를 엎드리게 하고 그 죄의 경중대로 여수이 자기 앞에서 때리게 하라 사십까지는 때리려니와 그것을 넘기지는 못할지니 만일 그것을 넘겨 과다히 때리면 네가 네 형제로 천히 여김을 받게 할까 하노라” (신 25:2-3)
아무리 맞을 짓을 했더라도 40대 이상은 때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40대까지 때렸는데 세다가 잘못해서 한 대씩 더 때리는 경우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아예 39대 만 때렸습니다. 혹시 한 대를 더 때리게 되더라도 40대를 넘지 않으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지 않는 것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맞았다고 하는 것은 인간이 맞을 수 있는 최고의 매를 맞았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을 죽이기 위한 암살단원들은 단순히 의지를 모은 정도가 아니라 바울을 죽일 때까지 금식을 하겠다고 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예루살렘 공회를 찾아가서 자신들의 암살 계획을 설명했습니다.
당시의 유대인의 법은 '만일 어떤 사람이 공공 생활이나 도덕을 위협하는 존재라면 죽여도 된다'고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바울이 자신들의 신앙을 방해하는 존재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그를 제거하는 일은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앞에서도 영화 이야기를 말씀드렸지만, 과거의 서부영화의 주인공들은 총을 쏴도 의를 위해서 쏘고, 연약한 부녀자들을 위해 총을 들었습니다. 그것도 마지막에 악당두목과 최후의 일전을 벌이기 위해 총을 들었고, 단 한번으로 끝냈습니다. 그러나 요즘 영화는 사람을 너무 쉽게 그리고 잔인하게 죽입니다. 영화 "친구"에서도 보시지 않았습니까? 총을 쏴도 한 두 번 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완전히 만신창이가 될 정도로 쏩니다. 총을 쏘는 이유도 자기 기분이 나빠서 쏘고, 아니면 마약밀매를 하기 위해서 무죄한 시민들을 쏘거나 경찰과 대치합니다. 이렇게 영화를 만드는 것은 관람객들이 자기에게 쇼킹하게 다가오지 않으면 잘 보지 않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인간 속에 있는 잔인함이 영화를 통해 나타나는 것입니다.
렘 17:9에 보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이라고 합니다.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 인간의 본성이 부패해 버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었고, 날마다 예배를 드리는 삶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심성은 전혀 바뀌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 사십여 명의 사람들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을 찾아가 그들과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범죄한 백성들의 죄를 대신해서 눈물과 사랑으로 하나님께 제물을 드려야 하는 사명을 받은 대제사장이 지금 의인의 피를 흘리기 위해 자객들과 공모를 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영적인 지도자의 자리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조명을 받지 않자 불의의 병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 자객들은 결국 바울을 죽이지 못했는데 정말 굶어죽었는지 궁금합니다.
이러한 음모가 꾸며지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16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바울의 생질이 그들이 매복하여 있다 함을 듣고 와서 영문에 들어가 바울에게 고한지라”
바울을 죽이려는 음모는 바울의 생질(조카)을 통해 알려집니다. 우리는 바울의 조카가 왜 예루살렘에 있었고, 또 어떻게 이 계획을 알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조카가 예루살렘에 살고 있었는지, 아니면 유학차 와 있었는지, 그가 바리새파 사람인지, 관직에 있었는지 성경은 아무런 말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물을 덮은 이름 없는 여인을 통해서 다윗의 생명을 구해주셨듯이, 바울의 조카를 통해서 바울의 목숨을 건져주셨습니다.
바울의 조카를 통해서 유대인들의 음모를 알게된 천부장은 이런 명령을 내렸습니다. 23-24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백부장 둘을 불러 이르되 밤 제 삼 시에 가이사랴까지 갈 보병 이 백 명과 마병 칠 십 명과 창군 이 백 명을 준비하라 하고 또 바울을 태워 총독 벨릭스에게로 무사히 보내기 위하여 짐승을 준비하라 명하며”
천부장은 바울을 가이사랴로 보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가이사랴에 로마의 총독청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예루살렘은 가이사랴 관할 하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 천부장은 이 사건이 자기의 권한을 넘어서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고 바울을 가이사랴로 보내어 총독이 이 사건을 취급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천부장이 군사를 동원하는데, 보병 200명, 기병 70명, 창병 200명입니다. 한 죄수를 보호하기 위해 470명의 병사와 70마리의 말과 또 바울을 태울 짐승까지 준비하게 했습니다. 또한 제 3시-밤 9시에 떠나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죄수 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서 이렇게 많은 병사를 동원하는 것은 요즈음도 흔히 있는 일이 아닙니다. 만약 Osma bin Laden이 잡혀서 호송되어 간다고 하면 이정도로 동원할지 모르겠습니다. 이 명령을 내린 사람은 천부장이었습니다. 천부장은 1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당시 예루살렘 수비대의 병력이 1000명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들 중에 바울 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서 거의 절반에 가까운 470명을 동원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에게 그가 "예루살렘에서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할 것이라"고 약속하신 뒤에, 그의 조카를 통해서 그 음모를 알게 하시고,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는 병력을 동원하게 하셨습니다. 그 470명의 군인들은 영문도 모르고 바울을 호위해서 총독에게로 데려가지만 바울에게는 얼마나 감격스럽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분이신 것을 체험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의 조카는 이름도 나오지 않고 성경에도 여기밖에 등장하지 않지만 훌륭한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들이 모두 우리를 세우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사람들이란 것을 안다면 또, 우리 자신이 다른 사람들을 바로 세우기 위해 예비된 하나님의 사람이란 것을 안다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감격스럽겠습니까? 그래서 그리스도인에게는 우연히 없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벌어지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예비하심 속에 있습니다.
우리 함께 이사야 43장을 찾아보시겠습니다. 구약성경으로 1018쪽입니다. 제가 1절에서 3절까지 봉독하겠습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의 대신으로 주었노라”
교회를 오래 다니신 분들은 이 구절을 모르시는 분이 없으실 것입니다. 자녀가 대입시험을 본다든지, 가족이 수술을 해야 할 때 등의 상황에서 이 말씀은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이 시간에 조금 더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다음 절인 4절입니다. 이렇게 증거합니다.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 백성들로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귀하게 여겨주시고, 사랑하여 주신 것은 앞의 1-3절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해 주셨느냐하면 많은 사람들의 생명과 우리를 맞바꾸셨다고 하십니다. 즉 하나님께서 '오늘의 우리'를 만드시기 위해서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을 사용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제가 여기까지 오는데도 수없이 많은 하나님의 손길들이 있었습니다. 제가 신대원에 합격한 후에 개인사정으로 1년 동안 휴학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말씀과 주위의 사람들을 통해서 신대원을 입학하게 만드셨습니다.
신대원에서도 한 목사님을 기숙사에서 만나게 해 주셨습니다. 그 분은 제가 여기에 오기 전 2000년 7월부터 2001년 7월까지 스위스에서 교회사 공부도 하시고, 우리 제네바한인교회에도 나오신 적이 있었던 분이십니다. 교인등록카드를 정리하다 보니 그분의 것도 있었습니다. 그분이 저를 주님의교회에 소개해 주었습니다.
제가 주님의교회 고등부를 92년 7월부터 섬겼습니다. 그 6개월 전, 제 앞에 고등부를 섬기던 전도사님이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후임으로 제 대학선배를 추천했습니다. 교회에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이유는 그 때 교육부장이신 집사님과 이재철 목사님과 추천된 사람이 모두 동향(同鄕)이었기 때문에 덕이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6개월이 지난 후 그 고등부 전도사님이 유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찾았습니다. 그 때에 제 동기 전도사 한 명이 추천되었습니다. 당시 고등부 전도사님은 서울대학 경제학과를 차석으로 졸업하고, 신대원도 차석으로 졸업했습니다. 제 동기 전도사도 서울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했고, 신대원을 수석으로 입학했습니다.
그런데 앞에서 말씀드린 그 목사님이 고등부 전도사님에게 저를 교회에 추천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 목사님 역시 서울 법대를 졸업하신 분이었습니다. 사실 그 분이 저를 추천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2년 6개월이 지난 후, 제가 신대원을 졸업하고 저는 다른 학교에서 좀더 신학을 공부하기로 되어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재철 목사님께서 저에게 주님의교회에서 전임사역을 하지 않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전임사역을 하게 되면 공부를 할 수 없고, 공부를 하면 전임사역을 할 수 없었습니다. 얼마간의 기도 후에 전임사역을 결정했고, 그래서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만약 그 중에 한가지라도 어긋났다면 저는 이 자리에 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성도님들의 삶을 돌이켜보십시오. 우리 중 그 누구도 나 혼자만의 힘으로 여기까지 온 사람은 없습니다. 가족들로부터 친구들, 동료, 이웃 등등의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우시기 위해 지금은 이름과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사용하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함께 있을 수 있게 된 것은 저를 향한 하나님의 역사와 성도님들을 향한 하나님의 역사가 일치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삶 전체가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은 사순절 셋째 주일이자 성찬 주일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붙들어 주시지 않았으면 그 누가 자기 욕망과 야망의 길로 가지 않았겠습니까? 또한 주님께서 인도해 주시지 않으셨으면 그 누가 주님께 항복하고 주님 앞에 엎드리는 삶을 살 수 있었겠습니까?
사순절은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절기입니다. 주님께서 고난의 길을 가신 것은 우리의 욕망을 따라 살아가던 삶에 종지부를 찍기 주시기 위함입니다. 또한 성찬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금까지 인도해 주심을 기억하며 감사하고, 우리도 하나님의 통로가 되겠다는 삶을 결단하는 시간입니다.
이 한주간동안 사순절과 성찬을 묵상하는 주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기도드리시겠습니다.
기 도
늘 우리를 신실하게 인도하시는 주님!
지나온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그 어느 것 하나 주님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음을 고백합니다. 환난 날에 피할 바위가 되어 주시고, 인생의 질곡을 걸어갈 때는 빛이 되어주심으로 그 어려움들을 이겨올 수 있었습니다.
또한 저희들이 형편없음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품고 달래어 주시며, 때로는 꾸짖으시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신실하게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을 붙여주심으로 우리를 세워오심도 감사합니다. 우리를 세우기 위해 하나님께 사용되어졌던 분들, 특히 악역을 잘 감당해 주셨던 분들에게도 주님의 은총을 덧입혀 주옵소서. 그런 분들을 통해서 우리가 우리 자신들을 바르게 세울 수 있었고, 더욱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도 이제 하나님의 손길이 되게 하옵소서. 비록 우리의 삶이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역할이라 할지라도 잘 감당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기억해 주심만으로도 만족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이 땅위가 아니라 영원한 나라에, 영원한 상급을 쌓는 인생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을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