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제자들을 위해 중보 기도하신 예수님 1,2 / 하용조 목사

작성자생각하는어부|작성시간06.12.18|조회수274 목록 댓글 0

제자들을 위해 중보 기도하신 예수님
 
하용조 목사
 
 
요한복음 17:6~11
 
 
예수님께서 중보 기도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곧 제자들이나 유대 민족 등 어느 것들보다 먼저 자신을 위해 중보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중보 기도에서 자신을 위해 먼저 기도하신 것이 가장 큰 특징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힘들고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지게 하심으로써 아들을 영화롭게 해 달라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영화롭게 하심으로써 아버지를 영화롭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중보 기도입니다.
창세 전에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누렸던 영화로써 아들을 영화롭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고, 그 권세를 가지신 아들은 자신의 유익을 위하는 일에 아니라 십자가를 지시는 일에 사용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기도의 모범을 보이신 예수님 

우리는 종종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기 싫어해 멀리 도망가려고 합니다. 처음엔 은혜를 받고 믿음이 생겨 주님의 일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이라는 게 그리 쉽고 간단한 게 아닙니다. 주님의 사역은 좁은 길이고 욕먹는 것이며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길입니다. 안락한 생활을 접고 선교사가 되어 고통스러운 미지의 세계로 떠나가는 것입니다. 특히 부모는 자식이 외지에 나가 고생하는 것을 결코 좋아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일을 시작할 때 심하게 반대하고 나서는 사람이 바로 당사자의 부모임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10년 전에 의사였던 분이 선교사로 헌신하셔서 모 처로 떠나셨습니다. 그때 주변의 사람들은 ‘왜 하필이면 당신이 가야 하나, 장로로서 교회를 잘 섬기면 되지 꼭 가야 하나, 반드시 그런 식으로 예수를 믿어야 하느냐, 예수 믿지 말자는 게 아니라 폼 좀 나게 믿자는 거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분이 선교사로 나가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은 ‘하나님도 내 입장이 돼 보면 알 겁니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십자가를 피해 가려고 하고, 십자가를 내려놓고 가려고 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앞에 두고 기도하시던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려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신다고 기도하신 후, 가능하면 그 십자가를 지나가게 해 달라고 간구하신 주님의 그 마음을요. 그 기도가 얼마나 힘드셨던지 땀이 피가 되었다는 그 마음을요. 마지막 기도에서 ‘나의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말씀하신 그 마음을요. 그래서 힘들고 고통스러운 그 길을 계속 가게 해 달라는 마음을요.
예수님의 자신을 위한 중보 기도는 고난의 십자가를 필하지 않고 많은 유혹과 시험에서 벗어나 가던 길을 계속 가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할 때, 많은 시험과 유혹들이 찾아옴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좀더 쉽고 편한 길을 가면서 주님을 믿었으면 하는 유혹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모든 시험과 유혹을 물리치시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면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와 순종에서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위한 중보 기도를 하신 후, 이제 사랑하는 제자들을 위해 중보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에게 제자들은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준에 따라오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영적 깨달음이 미숙했고 실수투성이에 허점투성이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시며 승천하실 때까지도 시쳇말로 철이 덜 들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 때 힘들게 하는 것이 바로 철 안난 사람들과 같이 사는 일입니다. 부부 사이에도 철 안난 남편과, 아내와 사는 것만큼 어려운 일은 없습니다. 철 안난 자녀들과 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족이기 때문에, 사랑하기 때문에 버릴 수도 그만둘 수도 없어 난처하게 되고 맙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영적으로 미숙하고 철 안난 제자들을 옆에 끼고 사셨습니다. 그들을 포기하시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알아듣고 깨닫도록 끝임 없이 가르치고 훈련하셨습니다. 당시 제자들의 상태가 어떠했는지 예수님의 중보 기도에서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6절 말씀입니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예수님께서 소위 철이 덜 들고 신통치도 않은 제자들에 대해 어떻게 여기셨는지 참 궁급합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제자들에 대해 ‘세상 중에서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주신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별 볼 일 없는 제자들이지만, 그들이 자기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도 때로 마음에 들지 않는 자식들로 인해 눈물을 흘리고 고통을 겪지만, 자기 속으로 낳았기 때문에 절대 포기 못하고 사랑합니다. 
둘째, 예수님께서 제자들에 대해 자신에게 속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아버지를 위해 살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원래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고, 아버지께서 그들을 아들에게 보내주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제자들을 선택하시고 예수님께로 보내주셨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결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함께 살고 있는 남편, 아내도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각자에게 보내셔서 서로 만난 것이 결혼입니다. 자녀도 하나님의 것으로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우리의 정체성을 스스로 깨달을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떤 어려움도 너끈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우치시고 그분의 뜻대로 행하도록 계속 훈련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제자 훈련’입니다. 제자 훈련이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람을 가르치고 양육하는 것입니다. 7절 말씀을 봅니다.
“지금 저희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께로서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시는 동안 한 번도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신 적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하나님 아버지께만 초점을 맞추시고 그분께만 모든 영광을 돌리셨습니다. 우리가 사복음서나 신약 성경 전체를 통해 예수님께 대해 깊이 연구해 보더라도, 자신을 위한 말씀이 한 번도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능력, 기적, 기도 등 모든 것들이 오로지 하나님 아버지께로 모아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모든 것을 자신에게로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나의 생각, 주장, 의견, 비전 등이 곧 자신을 위한 것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갈등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보내주신 제자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는 것은 옛사람인 자아가 죽고 새로 태어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죽긴 죽었는데 아직 덜 죽어서 문제가 됩니다. 본인은 죽었다고 생각하지만 잠시 기절한 상태입니다. 그러다 깨어나면 옛사람인 자아가 다시 살아나는 겁니다. 자아가 자꾸 살아나게 됨으로써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느낀 것은 자기 안에 있던 옛사람이 죽은 것과 대신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자신이 육체 중에 사는 것은 자신의 힘으로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자존심이나 자의식 같은 것을 전혀 발견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상, 주장, 철학, 생각 등은 철저히 아버지와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것들에 대해 오직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럼, 내가 없다면 도대체 나는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곧 ‘나’는 변화되고 거듭난 자아를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예수님을 잘 믿고 싶습니까? 자존심(自尊心, 자아를 존중하는 마음)을 버리십시오. 우리가 예수님을 잘 믿는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자의식의 세계에서 벗어나면 됩니다. 그렇다면 자의식도 없이 어떻게 문학이나 예술을 할 수 있느냐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자존심으로 쌓아 올린 것들은 예술을 무론하고 모두 썩은 것들입니다. 우리는 옛사람의 자아로 이룬 것을 붙잡고 미련을 떨며 몸부림을 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불필요한 자존심을 지키느라 너무 많은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습니다. 부부 싸움이란 것도 곧 자존심 싸움입니다. 서로 무시하고 무시당했다고 생각한 끝에 자존심을 찾으려 싸우는 것입니다. 그 자존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일입니다.
 
 
아버지의 모든 말씀들을 제자들에게 주심

자아의 생각, 주장, 철학 등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혈기, 오만, 분냄 등이 됩니다. 어떤 사람은 가만히 있다가도 벌컥 화를 내기도 합니다. 그것은 자기 안에 상처가 있다는 증거입니다. 사람에게 이런 것들이 빠진다면 약간 바보처럼 보이겠지만, 한 편으로 거듭난 것에 대한 증거가 되기도 합니다. 8절 말씀을 읽습니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중보 기도하시면서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해달라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다만 아버지와 아들과 제자들과의 관계만을 기도하십니다. 즉 서로 일은 없고 관계만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 내용은 아버지께서 주신 말씀을 아버지께서 보내주신 제자들에게 그대로 전하셨다는 것입니다.
제자 훈련은 사람들에게 ‘나’라는 개인의 뜻, 생각, 경험을 말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 뜻, 사랑을 말하며 가르치는 것입니다. 즉 말씀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것을, 예수님도 아버지께로부터 오신 것을 알게 하는 일입니다. 온누리교회 성도님들은 ‘하용조’라는 사람을 보지 않기를 바랍니다. 인간 하용조는 껍데기에 불과하고 아무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예수님입니다. 제가 설교하는 것은 저의 철학, 비전을 말하는 게 아니라 예수님의 생명, 진리, 비전을 그대로 전하는 것입니다. 하용조, 온누리교회라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고, 그 안에 계시는 주님의 말씀, 사랑, 능력이 중요합니다. 그것으로 하여금 감추지 않고 막히지 않으며 마냥 흘러갈 수 있도록 만드는 일이 중요합니다.
 
 
‘인생은 하나님께 속한 것’

우리가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에서 배워야 할 점은 하나님의 사랑, 뜻, 진리가 흐르게 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보도록 하는 것입니다. 9절 말씀입니다.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같은 말씀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중보 기도하시는데, 그들은 모두 아버지의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나의 인생은 모든 게 하나님의 것’이 됩니다. 부모도, 자식도 하나님의 것이고 남편도, 아내도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가진 돈, 명예, 직업 등도 하나님 아버지의 것이 됩니다. 이에 대해 우리가 잘 깨닫는다면 모든 일에 하나님의 복이 임하실 것입니다. 10절 말씀을 봅니다.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사랑의 시금석(試金石)은 정말로 사랑하느냐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열정적으로 사랑한다고 말을 하지만, 자세히 알고 보면 집착에 불과합니다. 다만 자신이 사랑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대부분의 사랑은 그 대상을 위한 것이 아니고 자신을 위한 것일 뿐입니다.
따라서 사랑의 대상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화를 내고 맙니다. 이유는 그로 인해 기분 나쁘다는 것입니다. 왜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느냐는 것입니다. 모두 자기 집착이고 자기애(自己愛)입니다.
 
 
사랑은 중보 기도의 힘

따라서 사랑의 시금석은 사랑의 대상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진짜 사랑한다면 그 대상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 대상이 눈에 보이지 않아도 항상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중보 기도하십니다. 비록 미숙하고 실수가 많아 마음에 들지 않은 제자들이지만, 예수님께서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도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진짜 사랑한다면 그 사랑의 대상을 위해 기도하게 됩니다. ‘하나님, 그 사람을 보호해 주십시오. 그 사람이 잘못되지 않게 해 주십시오’라고 끝임없이 중보 기도하게 됩니다. 11절 말씀을 읽습니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께서 미숙하고 실수가 많은 제자들을 너무나 사랑하십니다. 원래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고,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그들을 맡기셨으며, 예수님께서 사랑하셔서 그들을 위해 아버지께 중보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께서 곧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면서 그들의 곁을 떠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홀로 남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제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을 위해 중보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아버지, 제가 없더라도 그들을 보호하시고 지키시며 복을 주십시오.’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을 하나님 아버지께 위탁하십니다. 우리가 돈이 있으면 얼마나 있고, 없으면 얼마나 없겠습니까! 우리가 일을 잘하면 얼마나 잘하고, 못하면 얼마나 못하겠습니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가져야 할 것은 진정한 사랑의 마음입니다.
 
 
주님 안에서 하나 되기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얼마나 많은 일들을 시키셨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랑을 베푸셨느냐는 겁니다. 이것이 제자 훈련의 핵심입니다. 제자 훈련은 어떤 훈련 프로그램을 말하는 게 아니라 진정한 마음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버지, 제가 떠나더라도 이 땅에서 제자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옵소서. 마치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 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삼위일체 관계가 회복되고, 예수님의 사랑이 싹 트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이 자리에 모이신 모든 성도님들을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들로 알고 제 개인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중보 기도하신 것처럼, 저는 그런 제자 훈련을 하고 그런 목회를 합니다. 이것은 제 개인의 임무일 뿐 아니라, 모든 성도님들이 다같이 동참해야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도 모르게 오랫동안
익숙하게 생각했던
‘모든 것이 나의 것’이라고
당연하게 여겼던 것을
이제,
하나님의 것임을 알게 하옵소서.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것임을
우리는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제자들을 위해 중보기도하신 예수님 2
 
하용조 목사
 
요한복음 17:12~19
 
 
예수님의 중보 기도는 가장 먼저 자신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기도의 내용은 힘들고 어려운 고통의 십자가를 피하지 말고 짊어지게 하심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중보 기도하십니다. 그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원래 하나님께 속한 제자들을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보내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보통 우리는 ‘제자’라 하면, 흔히 훈련을 시키거나 전문 지식을 전수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제자는 사랑의 대상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선 많이 부족하고 여러 모로 미숙한 제자들을 품으시고 그들이 성숙할 때까지 끊임없이 사랑으로 훈련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좀더 구체이고 실제적으로 중보 기도하십니다. 11절 말씀을 다시 확인해 봅시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하나가 되게 하소서
 
첫 번째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한 중보 기도에서 그들을 하나 되게 해 달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인 인간의 본질이 분열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사람은 두셋만 모이면 서로 비판하고 싸우며 편 가르기를 합니다. 사랑하고 협동하는 게 아니라, 갈등하고 반목하며 헤어지게 됩니다.
사람들이 모이면 처음에 서로 사랑할 것 같고 함께 나눌 것 같으며 모두 평화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부패한 면을 드러내고 맙니다. 사람이 서로 미워하고 헤어지는 이유는 그 속에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겉으로 도덕과 교양과 체면으로 무장하고 있을 뿐, 세월이 지나면 그 죄성의 뿌리를 드러내고 맙니다. 인간은 누구나 소유, 권력, 의심 등에 대한 본능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잘 믿다가도 의심하고 갈등하게 됩니다. 따라서 사회생활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동업(同業)인 것 같습니다. 주님의 사역에서 동역자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탄은 분열의 영이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 싸움을 만들뿐 아니라 교회마저 다투게 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해서 헤어지고 ‘파송’으로 헤어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그렇지 못한 현실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반면, 성령님은 연합과 일치의 영이십니다. 성령님께서 임하시면 우리에게 회복과 치유가 있고 변화가 일어납니다. 틀린 것을 옳게 하시고 그른 것을 바르게 하시며 나뉜 것을 하나로 만드십니다.
예수님께서 화해자로 세상에 오셔서 친히 화목 제물로 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부탁하신 말씀도 세상을 화목케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일은 천사도 감당할 수 없는 직분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언제 어떤 곳에 있든지 화해자로 존재해야 합니다. ‘트러블 메이커’(trouble maker)가 아닌 ‘피이스 메이커’(peace maker)가 돼야 합니다.
화해자의 특징은 한마디로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과 인간을 화해시키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화해자로서 치러야 할 대가는 반드시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12절 말씀입니다.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보호하시고 지켜주소서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한 중보 기도에서 그들을 보호하시고 지켜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11절 말씀에서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12절 말씀에서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라고 기도하십니다. 성도의 안전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절대로 안전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발견한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성’(城)입니다. 인간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성을 쌓습니다. 곧 바벨탑인 것입니다. 크고 단단한 성을 높이 쌓다 보면, 저절로 타인과 단절 됩니다. 인간이 느끼는 외로움은 누가 만들어 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 사람, 저 사람과의 교제를 모두 끊고 혼자 골방에 들어가 이불 뒤집어쓰고 있다면 외롭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외로운 사람은 이불을 걷고 골방에서 박차고 나와 사람들을 만나야 합니다. 그러면 모든 외로움을 떨쳐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온전히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의 노력만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없는 법입니다. 개인적으로 성실하게 처신한다고 모든 문제들이 저절로 해결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거기엔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있어야 합니다. 시편 23편 1절에서 4절까지 말씀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찬송하고 있습니다. 곧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항상 우리를 지켜 주시고 우리의 자녀들도 지켜주십니다. 품안의 자식이지 그들이 성장해 가면 부모는 자식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보호해 주시도록 우리는 중보 기도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남편이나 아내도 지켜주시도록 중보 기도해야 합니다. 13절 말씀을 봅니다.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저희로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기쁨으로 충만케 하소서
 
세 번째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한 중보 기도는 그들을 기쁨으로 충만케 해 달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교리 중에 독특한 것은 기쁨입니다. 기독교는 단적으로 말해 슬픔이 아니라 기쁨이며, 좌절이 아니라 희망입니다. 빌립보서 4장 4~5절에서 사도 바울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감옥 안에 갇혀 있는 사람이 감옥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기뻐하라고 권면할 수 있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서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기쁨은 세상의 기쁨과 전혀 다른 것입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기쁨은 쾌락, 명예, 물질 등을 말합니다. 집 한 채 샀다고, 좋은 자동차를 구입했다고, 원하는 옷을 샀다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하루도 채 가지 못하는 기쁨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기쁨은 천국, 거듭남, 부활 등을 가리킵니다. 외면적인 기쁨이 아니라 내면적인 기쁨을 말합니다. 어느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기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기쁨이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세상의 어떤 불행이나 슬픔도 능히 이겨낼 수 있는 기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14, 15절 말씀을 읽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악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네 번째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한 중보 기도에서 그들을 악에 빠지지 않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에서도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마지막 심판을 행하실 때까지 사탄은 제한적으로 활동하기 때문에 악은 항상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기를 ‘내가 십자가에서 사탄을 완전히 패배시켰으나 다시 와서 마지막 심판을 행할 때까지 믿는 자들을 악에서 보호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는 내면적인 면을 말하는 것이고, 악에서 보호해 달라는 기도는 외면적인 면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공격하는 것은 악이고, 시험을 받는 것도 우리입니다. 우리는 양면에서 취약한 존재입니다. 믿는 자들에게 가장 쉽게 찾아오는 시험이 바로 ‘섭섭이’입니다. 교회에서 봉사하고 사역할 때 괜히 섭섭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사람, 물질, 상황으로 인해 시험에 빠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자신이 스스로 만들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시험에 들게 되면 곧 마귀의 공격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그런 시험에 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지금도 사탄은 믿는 자들을 집어삼키려고 울부짖는 사자처럼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은혜를 받고 기뻐하며 돌아서는 순간, 바로 마귀가 기다리고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예배 중에 충만했던 은혜를 주차장에서 쏟게 만들기도 합니다. 시험은 가까운 사람들에 의해 비롯되기도 합니다. 시편 말씀에서 마귀가 우리를 공격하는 방법은 나무 뒤에 숨어서 화살을 겨냥하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의 심장을 향해 화살을 쏘는 격입니다. 마귀는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을 저지시키려고 줄기차게 따라 다니며 방해하기도 했습니다.  
세상은 사탄의 음모들이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지뢰밭과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을 사는 동안 절대적으로 주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16절에서 19절까지 말씀입니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거룩하게 하소서
 
다섯 번째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한 중보 기도는 그들을 진리의 말씀으로 거룩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을 위한 예수님의 중보 기도에서 최고는 바로 ‘거룩’에 관한 것입니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라는 것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성경 말씀은 모든 것들의 기준이며 근본입니다. 세상에 진리가 있기 때문에 비진리도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사물이나 현상에 대해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기준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이 절대 진리이며 기준인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 그 기준을 갖지 않겠다는 것이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입니다. 이런 사상에 젖어 있는 사람들은 세상에 절대 기준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너는 네 좋은 것을 하고 나는 내 좋은 것을 하면 그만이지, 왜 네 좋은 것을 나에게 강요하느냐’는 것입니다. 세상에 기준이 있고 표준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싫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기준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특히 절대 기준이 되시는 하나님의 진리 말씀은 영원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제자들을 거룩하게 해 달라고 간구하십니다. 우리가 거룩해진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룩해진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이념, 사상, 훈련, 교육 등으로 결코 거룩해질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속성은 곧 ‘거룩’입니다. 거룩보다 더 높은 목표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거룩 안에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공의가 포함됩니다. 거룩은 순결을 만듭니다. 즉 하나님의 거룩과 인간의 순결인 것입니다. 현대인의 특징은 한마디로 순결을 잃어버리고 양심에 갈등을 느끼며 산다는 것입니다. 순결을 잃어버린 인간은 공허함에 빠져 있는 상태입니다.
 
 
거룩의 결과는 ‘순결’
 
순결에 세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 육체적 순결이 있습니다. 즉 성적 순결을 말합니다. 둘, 정신적 순결이 있습니다. 즉 도덕적 순결로 거짓을 행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저는 며칠 전에 황장엽 선생을 만났습니다. 그 분은 공산주의에 대해 한마디로 ‘거짓말의 집단’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거짓말을 하고도 아무런 갈등을 느끼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방금 한 말을 그 자리에서 뒤집으면서도 인민을 위한 것이라며 전혀 문제 삼지 않는 게 공산주의라고 했습니다.
우리 사회에 신용 불량자들이 많다는 것은 단순히 사회 문제로만 치부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곧 우리 사회에 ‘거짓의 영’이 횡행한다는 뜻입니다. 신용 사회와 불신 사회의 차이는 정신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순결하냐, 불결하냐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셋, 영적 순결이 있습니다. 즉 우상을 숭배하지 않음을 말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순결 서약 운동은 대학생들이 할 것이 아니라, 어른들이 해야 합니다. 거룩은 곧 순결로 돌아옵니다. 인간이 정신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순결할 때 허무와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달리 말해, 인생에서 허무함과 외로움을 느낀다는 것은 곧 순결함을 잃어버렸다는 증거입니다.  
인간은 그 영혼이 깨끗하고 거짓을 행하지 않으며 성적으로 타락하지 않았을 때, 가장 인간다운 면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인간은 본질상 죄인이기 때문에 스스로 거룩해질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고 희생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거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고 받아들일 때, 성령님께서 인간을 거룩하게 만드십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곧 파송은 거룩과 관계되는 것입니다. 거룩하지 않은 사람이 파송을 받게 되면 갈등이 많아집니다. 파송 받은 사람이 거룩하면 그 사명도 분명해집니다. 온누리교회는 ACTS 29 비전을 갖기 전에 거룩과 순결을 본질로 합니다. 따라서 순조로운 파송을 계속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중보 기도하신 다섯 가지 복이 우리 안에 풍성히 이뤄지길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복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삶이되길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을 위해
중보 기도하신 것처럼,
우리를 위해서도
중보 기도하실 줄 믿습니다.
예수님의 기도가
그대로 이뤄지길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