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잔운동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안녕하세요.
평소 '복음과 상황'을 보면서 궁금하던 점인데요, 복상 홈페이지에서는 로잔운동에 대한 자료를 못 찾겠더군요.
검색을 하니 자료가 많지 않은데요, 그나마 읽어보니 뭐랄까 제가 생각하던 것과는 좀 다른 것 같아요. 복상은 꽤 진보적이라고 생각했는데, 로잔운동은 근본주의적인 입장이고, 오순절과 같은 쫌 성격이 달라보이는 종파도 속한다고 되어 있더군요. 그러니까 제가 알고 싶은 것은 로잔운동의 근본 정신은 뭐고 복상에서 그 정신을 따른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성격의 잡지임을 표방하는 것인지 그런거요. 로잔운동에 대한 이해가 있으면 쉬울 수도 있는 문제이겠지만 저같은 문외한이 보기엔 좀 헷갈리기도 하는 듯해서요. 제 궁금증을 잘 설명했는지 모르겠네요.
즐거운 딥딕~ ^_-
안녕하세요! bthebest님! 오랜만입니다. 아래에 제가 정리해서 발표했던 내용과 출처를 게재합니다. "복음과 상황"이라는 제목 자체가 로잔언약의 중요한 두 가지 틀이 됩니다. 복음+상황 혹은 전도+사회참여의 문제를 정리한 복음주의 입장에서 가장 진보적인 성향으로 평가되는 것으로 보시면 됩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의 글을 참고하시고, 더 궁금해 하시면 아는 데까지 추가로 답변하겠습니다. 읽으실 때 배경 부분은 펜으로 계보를 그려보시면 쉽게 이해가 됩니다. 다소 길어도 복잡한 신학용어는 많지 않기에 인내하시고 읽으시면 윤곽이 잡힐 것입니다. 웬만큼 궁금증이 해소되실 거라고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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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선교대회의 흐름
독일의 선교신학자 바이에르하우스는 복음주의자를 여섯 그룹으로 분류하고 있다. 첫째, 빌리 그래함으로 대표되는 ‘신복음주의자들’, 둘째, 칼 맥킨타이어를 중심으로 하는 분리주의적인 ‘근본주의자들’, 셋째, 바이에르하우스 자신을 포함하여 프랑크푸르트 선언(1970)과 베를린 에큐메니칼 선언을 주도한 ‘고백적 복음주의자들’, 넷째, 성령 운동과 은사 운동을 주도하는 ‘오순절파’, 다섯째, 로잔 세계 복음화 대회 때 새롭게 등장한 사무엘 에스코바, 르네 파딜라, 올란도 코스타스 등으로 대표되는 ‘진보적 복음주의자들’, 여섯째, WCC 회원 교회에 소속하며 에큐메니칼 운동에 찬성하는 웨스토 케방가로 대표되는 ‘에큐메니칼 복음주의자들’이다.1)
현대 선교 운동에 있어서 ‘에큐메니칼’ 선교와 관련하여 사용되는 ‘복음주의자’의 어원은 1846년 영국에서 결성된 ‘복음주의 연맹’(EA)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2) 이들의 근본주의적 성서관은 1917년 결성된 IFMA에 그대로 이어졌다. IFMA는 1910년의 에딘버러의 에큐메니칼적 신학 성향에 반대했다. 복음주의자들 가운데 에딘버러대회(1910)에 이어 1921년에 결성된 IMC에 남은 자들이 있었으나 교회 중심적 선교를 선언한 인도의 탐바람 IMC대회(1938)를 계기로 교파 중심의 단체들은 제3의 단체 창립의 필요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 결과 ‘미국 복음주의협의회’(NAE)가 1943년 시카고에서 결성되었다. NAE는 그들에게 찬동하는 선교단체들과의 연합을 목적으로 1945년 12월 29일 ‘복음주의 해외선교협회’(EFMA)를 결성하고 오순절 계통까지 수용하였다.2차대전이 끝난 뒤 복음주의 선교는 강한 활기를 띠고 세계연맹의 결성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NAE는 런던의 EA와 접촉을 가진 후 1951년에 ‘세계복음주의협회’(WEF)를 결성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복음주의자들이 다함께 뭉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주어졌는데, 그것은 뉴델리 WCC총회(1961)에서 IMC가 WCC와 통합되어 CWME로 개편된 사건이었다. IMC내의 많은 복음주의자들의 복음화에 대한 선교적 관심은 WCC에서는 2차적인 것으로 여겨져 복음주의자들은 위기의식을 갖게 되었다.3)
이에 대한 도전이 복음주의자들의 세계선교대회를 중심으로 일어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그들은 자신들의 신학을 정립해가며 선교운동을 펼치게 되었다. 그 첫 번째 모임인 휘튼 교회세계선교대회가 1966년 미국의 일리노이 주 휘튼대학에서 IFMA와 EFMA의 후원으로 개최되었으며 두 번째 모임은 같은 해에 베를린 세계복음화회의로 개최되었다.4) 휘튼대회는 지배적으로 미국 선교 모임이었다. 복음주의자들은 1968년 웁살라에서 열린 WCC대회에 영향을 끼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한 노력을 한 대표자들로 존 스토트와 도날드 맥가브란을 들 수 있다. 웁살라 대회 이후에는 피터 바이에르하우스가 특히 복음주의적 동기의 투사로 등장하여 1970년에 발표된 프랑크푸르트 선언서를 작성하였다. 프랑크푸르트 선언서를 작성한 사람들의 문제 중 하나는 자기들에게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이들을 그리스도의 일에 대한 원수로 낙인을 찍는 것이었다.5)
로잔대회와 로잔언약
로잔대회는 그때까지 가장 큰 규모의 복음주의 세계선교대회로서 방콕대회(1973)에 대한 가장 큰 도전임과 동시에 여기에서 채택된 소위 로잔언약은 복음주의 선교신학의 가장 핵심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로잔대회의 공식명칭은 ‘세계복음화국제대회’이며, 1974년 7월 16일에서 25일까지 148개국 2,473명의 개인 대표들이 모인 가운데 스위스의 로잔에서 개최되었다. 로잔대회가 개최되도록 이끌었던 빌리 그래함 목사는 이 대회의 목적을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명령을 가능한 빨리 그리고 근본적으로 완성”할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이에 근거하여 그는 개회 연설에서 1910년 에딘버러 선교대회와의 연관성을 강조하였다. 로잔대회는 방콕 CWME대회의 복음에 사회적인 성격이 포함된 구원 이해에 도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견지에서 빌리 그래함은 로잔대회의 목적 중의 하나가 방콕대회에 대한 도전임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나 그의 의도와는 다르게 대회가 진행될수록 방콕대회가 도리어 로잔대회에 큰 도전이 되어 방콕에서 강조된 복음의 사회적 성격과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이 대폭 반영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 흐름은 로잔대회의 신학적 작업에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영국의 존 스토트 목사로부터 왔다. 스토트가 이해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적 모델에 따른 교회의 참여에 있다. 이것은 에큐메니칼 선교에서 발전된 사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데, 그의 신학은 복음주의자들이 그리스도의 파송에 근거한 사회적 책임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입장은 르네 파딜라와 사무엘 에스코바에 의해서 강하게 뒷받침되었다. 파딜라는 복음 선포와 사회 정의 사이의 우선권에 대한 논의를 거부하였다. 페루에서 온 에스코바도 이 문제를 전면에 부각시키며 복음주의자들의 전통적인 정치적 무관심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대회가 진행 중이던 어느 날 저녁 파딜라와 에스코바 등이 주축이 되어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에 관한 주제를 가지고 따로 모임을 가지게 되었다. 이들은 이것을 성명서로 발표하였는데, 때때로 인간의 전체성에 대한 성서적 이해가 무시되고 비성서적인 이원론이 수용되고 있다고 밝히면서 복된 소식의 전체적 차원을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로잔대회의 흐름은 복음주의자들로 하여금 선교신학에 있어서 사회적 윤리 확립의 필요성에 대한 각성을 불러 일으켰고 이것은 그들이 채택한 15개항의 “로잔언약”에 반영되었다.6)
에큐메니칼적 평가
이 로잔언약은 여러 가지 면에서 그 동안의 복음주의 선교신학에서 볼 수 없었던 많은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가장 주목할 만한 사실은 타종교와의 대화에 대한 언급이다. 물론 혼합주의나 그리스도께서 다른 종교나 이데올로기를 통해서도 똑같이 말씀하신다는 뜻에서의 대화는 거부하고 있으나(3항), 세계 속의 그리스도인의 현존은 불가결한 것이며 타자를 이해하기 위하여 주의 깊게 귀를 기울이는 선교를 목적으로 하는 대화는 받아들이고 있다(4항). 이것은 어떠한 형태의 대화도 거부하던 종전의 입장과는 큰 차이를 보인 것이다.
또한 로잔대회의 핵심적 토론 주제가 되었던 것은 전도의 사회적 연관성이다. 로잔언약은 먼저 정의와 화해를 구현하시고 인간을 모든 압박에서 해방시키시는 하나님의 활동에 참여하지 못하고 등한시하며 때때로 전도와 사회 참여가 서로 상반되는 것으로 잘못 생각한 데 대하여 참회하고, 사람의 화해가 곧 하나님과의 화해가 아니며, 사회 행동이 곧 전도는 아니며, 정치적 해방이 곧 구원은 아닐지라도 전도와 사회 및 정치적 참여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의무라는 것을 확신한다고 밝히고 있다(5항). 이는 전도와 사회적 책임을 따로 보거나 사회적 책임은 개인의 변화에 자연적으로 뒤따르는 결과로서만 보아오던 그 동안의 태도와는 전혀 다른 큰 진전으로 평가된다.
그리고 전도와 교회의 관계도 이미 1961년 뉴델리 총회의 구호로 채택되었으며, 1975년의 나이로비 총회의 모토로서 1973년 방콕선교대회에서 확정된 “전체 교회가 전체 복음을 전 세계에 전파”(6항)하는 것을 로잔언약은 분명히 하고 있다.7)
의견 : 앞에서 내용 계속 이어서... (trusthim@d 님이 2001-08-27 00:11 작성)
복음주의의 평가
로잔 국제위원회 부회장인 조종남 박사는 로잔 운동의 공헌을 네 가지로 요약한다. 첫째, 이 대회는 복음주의적 선교 단체와 개인 및 지도자들을 한 자리에 모아 함께 기도하고 의논하며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둘째, 서방 선교회가 모라토리움을 제창하여 등한시하고 있던 해외 선교, 특히 복음을 듣지 못하고 있는 27억의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선교의 중요과제를 인식케 하였다. 셋째, 로잔운동은 기도운동을 일으켰다. 넷째, 세계 복음화에 대한 신학적 근거를 정리하였다.8)
아더 글라서는 로잔언약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로잔언약은 일치된 견해를 가진 탁월한 선언문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것은 복음주의자들에게 역사적이고 성서적인 기독교의 틀 안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전 세계적으로 부여하고 있다… 마닐라 선언문은 제3세계 대표자들(40%)의 강력한 요청을 반영하였다. 더욱이, 전통적 복음주의자들은 복음주의적 은사주의자들에 의해 압도되었다… 구원의 유일한 근거인 그리스도의 사역이나 복음 증거의 신뢰성 확보를 위한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의 필요성 뿐 아니라, 물리적 환경 책임을 포함한 사회적 책임, 에이즈 전염, 청소년 사역, 그리고 여성 문제 등이 포함되었다…마닐라 선언문은 세계교회협의회에 대해서도 매우 분명하게 요청하기를 ‘우리 모두는 세계교회협의회에게 철저하게 성서적인 전도 이해를 채택해주기를 바란다.’고 했다.”9) 그리고 “슬프게도, 사려 깊은 복음주의자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제7차 WCC총회(캔버라, 1991)에서는 그리스도론이 거론되지 않았고…WCC의 신학적인 입장을 흩트려 놓았다. 그 결과 앞으로 복음주의자들의 WCC탈퇴가 예상되고 있다.”10) 결국, 에큐메니칼 입장에서 로잔언약은 매우 호의적인 진전으로 평가되고 있으면서도 기독론에 대해서는 신학적으로 입장차이의 골이 계속해서 넓어지고 깊어갈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11)
이러한 사실은 의구심을 남긴다. 첫째로 로잔과 제네바(WCC)가 과연 가까워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둘째로 로잔Ⅲ가 가능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로잔운동은 미국의 돈과 영국의 머리가 만났기 때문에 전 세계적 영향력을 끼치게 되었다고 본다. 빌리 그래함과 레이튼 포드로 상징되는 미국 그리스도인의 재정 및 조직 능력과 존 스토트로 상징되는 영국의 신학적 역량은 유감없이 발휘되었으나 이것이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 하는 것이다.12)
로잔언약과 마닐라선언의 입안자인 존 스토트는 마닐라 대회(로잔Ⅱ)의 가장 중요한 이슈는 ‘복음주의와 사회참여’로 보았다. 두 번째의 이슈는 ‘카리스마 운동’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복음주의내의 일치의 어려움을 말해준다. 잭 헤이포드가 모든 참석자들에게 오순절적인 방법으로 기도하고 찬송하자고 제의했었기 때문이다.13) 그래서 방선기 목사는 로잔대회에서의 불일치를 잭 헤이포드와 제임스 패커의 갈등구도로 보기도 하였다.14)
결론
중도주의적 입장을 가진 로잔 언약은 많은 긍정적인 가능성과 함께 모호함에 대한 비판이 공존하고 있다. 가장 큰 이슈로 남는 것은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중심으로 한 논의들일 것이다. 또한 신학적 선언에 그치지 않고 실제화해 나가는 것이 남겨진 과제라고 할 수 있다. 과연 로잔언약이 선포한 대로 복음주의는 사회참여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실천하고 있는가? 한국 교회는 로잔언약의 중요성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며 수용하더라도 보수적인 입장만을 편파적으로 굴절시키고 있다. 아직도 선교는 복음이고, 사회참여는 율법이요 윤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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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W. Künneth & P. Beyerhaus(Hrg.), Reich Gottes oder Weltgemeinschaft, Bad Liebenzell 1975, 307-308. 미국의 아서 글래서는 복음주의자들을 5가지 범주로 구분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첫째는 분파주의적 근본주의자들이고, 둘째는 세대주의적 복음주의자들, 셋째는 카리스마적 복음주의자들, 넷째는 에큐메니칼 복음주의자들, 다섯째로 비공의회적 정통 복음주의자들로 나누어진다. A. F. Glasser, "Mission in the 1990s.:Two Views", International Bulletin of Missionary Research, vol.13, No.1, January 1989, 4. 재인용: 김은수,『현대선교의 흐름과 주제』,2001, pp. 214-215.
2) Gehard Sauther, Heilsgeschichte und Mission, Zum Verständnis der Heilsgeschichte in der Missionstheologie, Diss., Gießen-Basel 1985, 217ff. 재인용: 김은수, ibid. p. 217.
3) 김은수, Ibid., pp. 218-221.
4) Ibid., pp.202-213.
5) 데이비드 보쉬, 전재옥 역『세계를 향한 증거』1993, pp. 228-229.
6) 김은수, pp. 268-272.
7) Ibid. pp. 272-274.
8) 조종남 편, 『로잔 세계 복음화 운동의 역사와 정신』pp.12-16.
9) Arthur F. Glasser, 노윤식 역 “복음주의 선교”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즘의 대화』pp. 158-159.
10) Ibid., p.162.
11) Ibid.
12) 고직한, “내가 보는 로잔 작지만 분명한 가능성으로” 『목회와 신학』1989년 10월호.
13) 카르 멜허스의 존스토트 인터뷰, “내가 보는 로잔 세 가지를 거부한 삶” 『목회와 신학』1989년 10월호.
14) 방선기, “2000년의 세계복음화, 로잔Ⅱ의 방향모색” 『목회와 신학』1989년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