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드온 찬양대 귀한 찬양 감사합니다.
예수님 앞에 한 여인이 끌려왔습니다. 군중의 손에는 돌이 들려 있었습니다. 이 여자는 죄인입니다. 율법대로 돌로 쳐 죽여야 합니다. 사방에서 정죄의 함성이 들려올 때 예수님은 묵묵히 땅에 무언가를 쓰시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 한마디 앞에서 광장이 일순간 조용해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둘 손에 쥐었던 돌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떠났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의 시선을 여인의 죄 앞에서 자기 자신의 영혼 앞으로 데려갔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들이 남을 정제하던 돌을 내려놓고 자기 자신을 비추는 거울 앞에 서게 하셨습니다.
홀로 남은 여인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주님은 그녀의 죄를 그냥 덮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의 은혜는 죄를 대충 덮는 값싼 위로가 아닙니다. 죄인을 살리시고 다시 그 죄의 자리로 돌아가지 않게 하시는 거룩한 은혜입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질문합니다.
지금 내 손에 들린 돌은 무엇이냐
그리고 더 깊이 묻습니다.
너는 지금 하나님 앞에서 내 자신을 정직하게 비추는 거울을 보고 있느냐?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울 왕은 말씀의 거울 앞에 서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기 죄를 정직하게 보지 못했고, 남을 탓하며 변명하다가 결국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오늘 선포되는 말씀 앞에서 남의 죄가 아닌 우리 자신의 영혼을 정직하게 대면하는 거룩한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째, 책임 전가와 종교적 포장은 회개를 막습니다. 오늘 본문인 사무엘상 15장은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 사울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명확한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사울은 그 말씀에 온전히 순종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방식대로 교묘하게 바꾸었습니다. 아말렉 왕 아각을 살려두었고, 눈에 보기에 좋은 양과 소를 남겨두었습니다. 온전한 순종이 아닌 부분적인 순종이었습니다. 즉 순종의 이름으로 불순종을 감행한 것입니다.
그때 사무엘 선지자가 사울을 찾아왔습니다. 사울은 뻔뻔하게도 이렇게 외칩니다. 사무엘상 15장 13절입니다.
원하건데, 당신은 여호와께 복을 받으소서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나이다.
사울은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다 행했습니다고 말합니다. 입으로는 완벽한 순종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사울의 등 뒤에서 숨길 수 없는 증거들이 터져 나옵니다.
사무엘이 묻습니다.
그러면 내 귀에 들려오는 이 양의 소리와 소의 울음소리는 어찌 됨입니까?
사울은 입으로 순종을 말했지만 그가 남겨둔 양과 소의 울음소리가 그의 가짜 순종을 폭로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입으로는 저는 주님의 말씀대로 살았습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내 삶의 구석구석에서 불순종의 울음소리가 들려옵니다. 깨어진 관계의 신음소리, 가정과 일터에서 반복되는 분노의 소리, 차갑게 무너진 실내의 소리가 들립니다.
내가 속한 공동체의 아픔이 말합니다.
당신은 순종한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지금 불순종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소와 양의 울음소리가 들렸을 때 즉시 멈추어야 했습니다. 사실 그 울음소리는 지금이라도 돌이키라고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안타까운 부르심이었습니다. 사울은 맞습니다. 제가 불순종했습니다. 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겼습니다고 인정하며 엎드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백성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심지어 그것을 아주 거룩하고 종교적인 말로 포장하기 시작합니다. 다 같이 사무엘상 15장 15절을 읽겠습니다.
사울이 이르되
죄를 직면하지 않는 사람의 전형적인 특징이 여기 다 있습니다. 첫째는 책임 전가입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닙니다. 백성들이 한 것입니다. 그들이 원해서 저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내 안의 죄를 보지 않으면 반드시 누군가를 탓하게 됩니다. 남을 탓하고, 공동체를 탓하고, 환경을 탓합니다.
둘째는 종교적인 포장입니다. 자신의 탐욕을 채우려고 소와 양을 남겨두었으면서도 하나님께 제사하려고 남겨둔 것입니다고 거룩한 명분을 덧 씌웁니다. 사울의 종교적 변명 앞에 사무엘은 다음과 같이 선포합니다. 우리 다 같이 사무엘상 15장 22절을 읽겠습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아멘, 하나님은 우리가 불순종을 신앙적인 언어로 포장하는 것을 매우 가증스럽게 여기십니다.
여러분 내 고집을 믿음으로 포장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 사리 사역과 인정받고 싶은 욕망을 사명처럼 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는 교회를 사랑해서 비판한 거야. 나는 가정을 지키려고 소리를 지른 거야.
나는 직장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타협한 거야.
정말 그렇습니까?
그 그럴듯한 명분 뒤에 나의 교만과 분노 꺾이지 않는 자존심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닙니까?
책임 전가와 종교적 포장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회개할 기회를 빼앗아버립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물어야 합니다.
주님 이것이 정말 사명입니까?
아니면 제 고집과 욕심입니까?
오늘 우리 모두 책임 전가와 종교적 포장을 내려놓고 정직하게 회개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바랍니다.
둘째, 자기 연민도 회개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회계를 맡는 회개를 막는 또 하나의 거대한 장벽은 바로 자기 연민입니다. 자기 연민은 영적으로 아주 교묘해서 겉으로 보면 대단히 겸손해 보입니다. 아파하는 고백처럼 보이고 눈물 뒤에 숨어서 정당해 보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자기 연민은 결코 회개가 아닙니다. 자기 연민은 끊임없이 내 상처와 억울함에 주목합니다.
나는 너무 불쌍해. 나는 피해자야. 사람들은 나를 몰라줘.
내 상황이 이토록 비참한데 내가 어떻게 제대로 된 삶을 살겠어?
나는 어쩔 수가 없었어.
그러나 진짜 회개는 나의 아픔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서진 마음과 그분의 훼손된 말씀 앞에 서는 것입니다. 자기 연민은 자신을 언제나 피해자의 자리에 앉혀두지만, 회개는 하나님 앞에서 내 죄의 책임을 인정하는 자리로 나아가게 합니다. 자기 연민은 사람들의 동정과 눈물을 구하지만, 회개는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구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상처가 가짜라는 뜻이 아닙니다. 인생의 고단함, 관계의 억울함, 남 모르는 눈물을 하나님이 모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의 아픔을 다 아십니다. 그러나 인생의 아픔과 상처가 있다고 해서 내가 지은 죄가 의로움으로 바뀌지는 않습니다. 상황이 아무리 힘들었어도 내가 뱉은 날카로운 말, 내가 행한 악한 행동, 내 마음 중심에 품었던 탐욕과 미움이 정당한 순종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비유를 들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운전을 하다가 신호를 무시하고 달려서 대형 사고를 냈습니다. 피해자가 피를 흘리면서 쓰러져 있는데, 가해자가 차에서 내리더니 가슴을 치면서 통곡합니다.
요즘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십니까? 아내와 불화가 있었고, 회사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마음이 너무 외롭고 서글퍼서 앞을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그 눈물의 고백이 다 진짜일 수 있습니다. 정말 슬프고 외로웠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피를 흘리는 피해자 앞에서 가해자가 가장 먼저 해야 할 말은 자기 삶의 신세 한탄이 아닙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말은 진심 어린 사과입니다.
제가 신호를 어겼습니다. 제 잘못입니다. 죄송합니다.
책임을 완전히 인정하고 고개를 숙인 다음에야 자신의 사정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고단한 사정과 아픔을 주님 앞에 쏟아놓기 전에 거울 앞에 서서 죄를 죄라고 불러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기 연민의 눈물로 회개를 대신하려 하지 마십시오. 아픔 뒤에 숨어서 회개를 미루는 잘못된 습관을 반드시 깨뜨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바랍니다.
셋째, 자기 의인은 죄를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자기 연민이 나를 불쌍한 피해자라고 말한다면, 자기 의인은 나는 그래도 저 사람보다 옳다고 말합니다. 자기 의는 회개를 가장 교묘하게 가로막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리새인과 세리가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합니다.바리새인은 멀찍이 서서 아주 당당하게 신앙의 커리어를 자랑하면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우리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겉으로 보면 거룩한 기도의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감사하나이다는 신앙적인 고백도 잊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내세우는 자기 자랑에 불과합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서 있지만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오직 자기 자신이 쌓아올린 종교적 성취만을 바라봅니다. 나는 1회에 두 번씩 금식하고 소득의 11조를 바칩니다. 나는 저 세리처럼 살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이 행한 금식과 십일조 경건한 삶 자체는 매우 귀한 것입니다.
문제는 자신이 행한 경건과 수고가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과 회개로 이어지지 않고 타인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자기 의의 칼날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우리 안에도 이 바리새인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한 분들일수록 기도와 말씀으로 잘 살고 있다고 자부하는 분들일수록 이 자기 의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내가 이 직장을 위해, 이 교회를 위해 얼마나 헌신했는데, 내 가정을 지키려고 얼마나 많은 것을 참고 희생했는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이러한 생각이 마음에 들어오는 순간 우리는 세례를 정죄하던 바리새인의 자리에 서게 됩니다. 자기 의에 사로잡히면 내 죄가 보이지 않습니다. 내 잘못이 지적당해도 사소한 일로 흘려보냅니다. 남의 허물은 들보처럼 크게 보이고, 내 죄는 어쩔 수 없는 상황 설명과 정당 방위로 둔갑합니다. 자기 연민이 눈물로 회개를 가로막는다면, 자기 의는 의로움의 모양과 헌신의 이름으로 회개를 가로막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리새인이 아니라 감히 하늘을 울어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울었던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우리 다 같이 누가복음 18장 13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참된 회개의 본질이 여기 있습니다. 세리는 남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환경을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불쌍한 척 자기 연민에 빠지지도 않았고, 자기 의를 내세우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거울 앞에 단독자로 서서 자신의 죄를 정직하게 고백했습니다.
회개는 내가 얼마나 괜찮은 신앙인인지 증명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죄인임을 정직하게 인정하는 시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안에 있는 바리새인과 같은 자기 의를 뿌리 뽑고 세리처럼 가슴을 치며 주님 앞에 겸손히 회개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바랍니다.
넷째, 한 사람의 참된 회개가 나도 살리고 공동, 우리 다 같이 한번 읽어볼까요?
넷째,
할렐루야, 할렐루야, 사울 왕 한 사람의 불순종과 책임 회피는 개인의 비극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지도자 한 사람의 죄와 회개하지 않는 태도는 이스라엘 전체를 영적 패배와 깊은 혼란 속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죄는 절대로 개인적인 영역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내가 마음속에 고집스럽게 품고 있는 죄, 회개하지 않고 붙들고 있는 쓴 뿌리와 자기 의는 반드시 내가 속한 관계와 공동체를 전염시키고 병들게 만듭니다. 가정에서도 한 사람이 끝까지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가족 탓과 상환 탓만 하면 가정 전체가 영적으로 지치고 메마르게 됩니다. 직장에서도, 교회에서도 한 사람이 자기 연민에 빠져 원망하거나 자기 의를 내세워 사람들을 정죄하고 판단하면 공동체의 불신의 뿌리가 깊이 내립니다.
사탄은 우리의 귀에 끊임없이 속삭입니다.
니 잘못을 인정하지 마.
인정하는 순간 너만 바보 되는 거야. 니 체면과 자존심이 무너지면 끝장이야.
그러나 성경은 전혀 다르게 선포합니다. 잠언 28장 13절 말씀을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다시 한 번 읽읍시다. 시작.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아멘, 죄를 숨기고 가면을 쓰는 자는 결코 형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죄를 자복하고 거울 앞에서 씻어버리는 자는 하나님의 긍휼을 입습니다.
예수님을 만났던 세리장 삭개오를 아시죠? 그는 평생 민족의 반역자라는 손가락질 속에 외로움과 자기 연민 속에 갇혀 살아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 앞에 섰을 때 삭개오는 자기 삶을 정직하게 대면했습니다. 변명하지 않았고, 자기 의를 내세우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삶을 돌이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선포하셨습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삭개오 한 사람의 회개가 온 집을 구원의 길로 인도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울 왕과 다윗 왕의 결정적인 차이가 무엇입니까?
두 사람 다 끔찍한 죄를 지었습니다. 사울의 죄만 크고 다윗의 죄는 작았던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충직한 부하를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은 다윗의 죄가 인간의 눈에는 훨씬 더 흉악해 보입니다.
그러나 죄가 드러났을 때 사울은 변명하고 백성을 탓했지만, 다윗은 그 자리에서 왕의 체면을 내려놓고 엎드렸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고 즉각 회개하였습니다.
회개한다고 해서 죄의 결과가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윗의 삶에도 뼈 아픈 징계가 따랐습니다. 그러나 회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열어줍니다. 하나님은 죄를 한 번도 짓지 않은 완벽한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넘어진 그 자리에서 말씀의 거울을 보고 정직하게 돌이키는 사람을 하나님은 찾으십니다. 그 사람이 바로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어떤 한 사람이 얼굴에 검은 숯가루를 잔뜩 묻히고 사람들 앞에 서 있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말합니다. 얼굴에 더러운 얼룩이 묻었습니다. 그때 그 사람이 소리를 지릅니다.
누가 나한테 이걸 묻혔습니까?
저 사람이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 이 척박한 환경이 나를 이렇게 더럽게 만든 것 아닙니까?
여러분 이것이 책임 전가입니다. 그 사람이 다시 눈물을 막 흘리면서 말합니다.
제가 요즘 너무 힘들어서 얼굴을 씻을 정신이 없었습니다. 아무도 내 사정을 몰라주니 참 서글픕니다.
이것이 자기 연민입니다. 그가 다시 고개를 쳐들고 말합니다.
그래도 내 얼굴은 저 사람의 얼굴보다 깨끗합니다.
이 정도면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낫지 않습니까?
이것이 자기 의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잘 생각해 보십시오. 얼룩을 묻힌 이 사람이 해야 할 일은 남을 향해 삿대질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서글픔에 빠지는 것도 아니고요. 남과 비교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입을 다물고 거울 앞에 서는 겁니다. 그리고 자기 얼굴을 비추어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흐르는 물에 묻은 얼굴을 깨끗이 씻어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혼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오늘 이 말씀 앞에 이건 누가 들었어야 되는 말씀인데, 이건 누가 들어야 하는 말씀인데라고 남에게 그 거울을 들이밀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남에게 던지는 돌일 뿐입니다. 그 돌을 내려놓으십시오. 그리고 주님 앞에 이렇게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이 거울 속에 비친 더러운 사울이 바로 접니다. 남 탓의 가면을 내려놓게 하여 주시옵소서 자기 연민과 의로움의 가면을 벗기시고, 저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오늘 우리 모두에게 이렇게 주님 앞에 정직하게 서는 용기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바랍니다.
여러분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해야 나도 살고, 내 가정도 살고, 우리 직장도 살고, 우리 교회도 삽니다. 한 사람이 책임 전가와 자기 연민, 그리고 지독한 자기 의를 깨뜨리고 거울 앞에 서서 통곡할 때 마침내 그 한 사람을 통해서 막혔던 은혜의 물줄기가 공동체 전체로 다시 흐르게 될 줄을 믿습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를 정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으로 살리시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시는 그 주님의 음성 앞에 정직한 회개로 응답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