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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베를린소망교회 2026.06.14. 주일예배 설교 전문: 크신 하나님을 닮은 교회(행13:1-3)

작성자박성병|작성시간26.06.20|조회수34 목록 댓글 0

여러분 교회가 어떤 곳일까요?

 

교회는 하나님을 닮아가는 곳입니다. 에베소서 5장 1절에서 바울 사도는 에베소 교인들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은 사랑을 받는 자녀답게 하나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하나님을 본받으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본받는 곳입니다. 이어서 에베소서 5장 2절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예물과 재물로 자기 몸을 내어주신 것과 같이, 여러분도 사랑으로 살아가십시오. 하나님을 본받는 것이 어떤 것인가 구체적으로 예수님을 본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랑으로 사셨으니까 교인들도 사랑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가르침은 신약 성경에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레위기 19장 2절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하나님은 구약의 교회인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을 닮아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처럼 교회는 하나님을 닮아가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닮아가야 할 하나님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여러 가지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크심입니다. 시편 95편 3절에서 5절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주님은 크신 하나님이요. 모든 신들 위에 뛰어나신 왕이시다.

땅의 깊은 곳도 그 손 안에 있고, 산의 높은 꼭대기도 그의 것이다.

바다도 그의 것이며 그가 지으신 것이다. 마른 땅도 그가 손으로 빚으신 것이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사는 천지만물보다 더 크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좀 더 보편적으로 말하면 우주보다도 더 크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이 크시다는 말은 키가 크다, 몸집이 크다.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크시다는 말은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그런 뜻입니다.

 

하나님은 위대하십니다. 그리고 이런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 속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구원 역사를 펼쳐가면서 한 사람 아브라함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이삭을 선택했습니다. 이스마엘도 하나님의 아들이었지만,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의 아들이었지만 하나님은 그를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삭의 아들 중에도 야곱만 선택했습니다. 에서는 택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은 구원 역사를 펼쳐감에 있어서 여러 가지 구원의 가능성이 있는데 그 가능성 중에 다른 가능성은 배제하는 방식으로 구원 역사를 진행하는 걸 봅니다. 그렇게 배제하는 가운데 마침내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 구원 역사가 수렴됩니다. 나머지는 다 배제돼요.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구원 역사를 완성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반전이 일어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계속해서 배제의 방식으로 진행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그 구원 역사가 예수님 안에서 이제 확장의 방식으로 바뀝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교회를 세우시고 그 교회를 통해 세상 모든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십니다. 이방인도 구원하시기를 원하시고요. 원수도 구원하시기를 원하시고요. 죄인도 구원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이런 구원 역사를 보다 보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사람의 생각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 사람들은 계속해서 이렇게 배제의 방식으로 하나님이 선택하시니까 자기들만 구원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편만 구원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너무 크신 분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 하나님을 몰랐던 겁니다.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로마서 11장 3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은 어찌 그리 깊고 깊으십니까?

그 어느 누가 하나님의 판단을 헤아려 알 수 있으며, 그 어느 누가 하나님의 길을 더듬어 찾아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크신 분입니다. 교회는 이런 크신 하나님을 닮아가는 곳입니다. 사도행전에는 두 개의 중요한 교회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예루살렘 교회이고 다른 하나는 안디옥 교회입니다. 이 교회들은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 받은 교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복음이 땅 끝까지 전해지는데 쓰임 받은 교회는 안디옥 교회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행전의 안디옥 교회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소개해 주시는 이유는 오늘의 교회들도 이 안디옥 교회를 보고 안디옥 교회처럼 하나님께 쓰임 받으라는 겁니다.

 

그러면 안디옥 교회가 어떤 교회입니까?

 

오늘 본문이 증언하는 안디옥 교회는 크신 하나님을 닮은 교회입니다. 어떤 면에서 하나님의 크심을 닮았습니까? 오늘은 이 문제를 우리 함께 생각해 봅시다.

 

오늘 본문은 안디옥 교회를 소개하면서 교회를 이끈 지도자들의 이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지도자들은 바나바와 시문, 루기오와 마나엔, 그리고 사울이라 불렸던 바울입니다. 성경이 이들을 소개하는 이유는 안디옥 교회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교회였지만 주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 하나가 되었던 교회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공동체의 크기는 그 교회에 모인 사람들의 스펙트럼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스펙트럼이 크면 클수록 그 교회는 큰 교회입니다. 공동체의 크기는 이 공동체의 다양성을 통해 나타납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빛에 비유합니다. 빛은 언뜻 보기에는 한 가지의 색깔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빛이 프리즘을 통과하면 얼마나 다양한 색깔들이 그 안에 있습니까?

 

그처럼 하나님은 크신 분입니다. 안디옥 교회도 그러했다는 겁니다. 하나의 교회였지만 그 안에 다양성이 있습니다. 첫 번째로 소개되는 바나바는 레위 지파 출신의 정통 유대인입니다. 그리고 그는 일찍 예수님을 믿고 자신의 소유를 팔아 어려운 성도들을 위해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는 곁길로 가지 않고 오롯이 신앙의 길을 걸어간 모범적인 사람입니다.

 

두 번째 인물은 리게르라고 불렸던 시모입니다. 니게르는 라틴어로 검다는 뜻입니다. 아마 이분은 아프리카 출신 흑인이었던 것 같아요. 2천년 전 로마 제국에서 흑인은 대부분 노예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안디옥에 있는 이 시무온도 노예 출신일 가능성이 큽니다.

 

세 번째 인물은 구레네 출신 루기입니다. 이 사람은 구레네 출신이라는 것 외에 다른 정보가 없습니다. 구레네는 지금의 리비아인데 이 사람은 북아프리카 출신으로 무명의 이방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무명의 이방인이 특별히 내세울 것도 없는 평범한 사람이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가 된 겁니다.

 

네 번째 인물은 분봉왕 헤롯과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만화인입니다. 이 본문을 헬라어로 보면 쉰트로포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요. 이 단어는 같은 어머니의 젖을 먹고 자란 사람을 가리킬 때 사용합니다. 그러니까 만화에는 헤롯 안티파스의 친동생이거나 아니면 어릴 때부터 그와 함께 자란 아주 가까운 그의 집안 사람일 가능성이 큽니다. 이렇게 보면 이 만화에는 유대 왕족 혹은 귀족입니다.

 

다섯 번째 인물은 사울이라 불렸던 바울입니다. 바울은 잘 아는 대로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입니다. 교회의 원수였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고 사도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안디옥 교회를 이끌고 있는 지도자는 다양합니다. 신분적으로 노예 출신도 있고요. 평민도 있고 귀족도 있습니다. 그리고 인종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아주 다양합니다. 신앙의 배경도 다양합니다. 예수님을 일찍 믿은 사람이 있고, 원수처럼 지내다가 믿게 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다양한 사람들이 신앙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겁니다. 세상에서 이들이 만났다면 이들은 절대로 하나가 되지 않았을 겁니다. 유대인들은 유대인의 정결법을 주장하면서 이방인들을 더럽다고 멀리했을 것입니다. 귀족들은 신분 질서를 내세우면서 천민들과 함께할 수 없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교회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들의 신앙은 세상의 여러 여건을 초월하는 그런 신앙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닮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들을 하나님의 선교에 사용하셨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선교는 교회사에서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지 모릅니다. 기독교가 유대인의 종교로 남느냐 아니면 세계에 있는 종교로 확장되느냐 그 기로에 서 있었습니다. 만미를 품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새로운 신앙의 길을 개척했던 교회가 바로 안디옥 교회였습니다.

 

우리는 이들이 하나님께 쓰임 받은 이유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크심을 닮았습니다. 하나님의 크심을 닮았기 때문에 다양한 신앙들을 교회 안에서 녹여냈던 겁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크심을 삼위일체라는 방식으로 나타냅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각각의 하나님이십니다. 성부와 성자가 다르고, 성자와 성령이 다릅니다. 각각의 인격을 가지고 있고 각자의 사역을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랑 안에서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삼신이 아닙니다. 한 분 하나님으로서 함께 구원 역사를 완성해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실 때도 이런 방식으로 세웠습니다.

 

예수님은 12 제자를 통해 교회를 세우셨는데 그들의 면면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굉장히 다양합니다. 나다 나일이라 불렸던 바돌로메는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혼자 기도하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수의 제자들은 안식일에도 배가 고프면 미리 이삭을 비벼서 먹는 경건치 않은 자들이었습니다. 경건한 자와 경건치 않은 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세리 마태는 친 로마적인 정치 성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로마의 부역하는 세리라는 직업을 받아들인 겁니다.

 

하지만 열신당 출신 시모는 반 로마 성향이 강한 민족주의자였습니다.이 둘이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면서 대화를 나눈다고 한번 생각해 봅시다. 늘 싸웠을 것입니다. 서로를 원수로 대했을 것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우뢰의 아들이었던 야고보와 요한은 성격이 급하고 감정적이었습니다. 반면 도마는 이성적이고 신중했습니다. 둘이 서로 잘 맞지가 않습니다. 이런 12명의 각각의 다른 성향을 가진 사람을 한 그룹으로 주님께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새로운 공동체 교회를 세우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왜 이런 사람들을 부르셨을까요?

비슷한 사람을 부르면 좀 낫지 않습니까?

왜 다양한 사람을 불렀을까요?

 

그것은 이후 복음을 전할 때 다양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성격이 급한 사람, 이성적인 사람, 친로마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 반 로마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 주님은 그들 다를 품기를 원하셨던 겁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안디옥 교회 지도자들이 다양하다는 것은 안디옥 교회 성도들도 다양했다는 의미입니다. 성도들이 다양하면 교회는 하나 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 되기 위해서 함께 금식하고 함께 기도했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런 그들을 하나님의 선교의 도구로 사용하신 겁니다.

 

오늘 이 말씀을 우리 현실에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 교회는 이민 교회입니다. 이민교회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교회입니다. 한국에서라면 자기의 선호도에 따라서 교회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민 사회에서는 그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한 교회에 모였지만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우리의 세대가 다양합니다. 60~70년대에 오신 이민 1세대가 있고 90년대 이후에 오신 2세대, 3세대가 있습니다. 세대에 따라서 직업도 다릅니다. 직업이 다르면은 사물을 보는 방식이나 생각하는 방식도 다릅니다. 생각이 달라요. 그리고 신앙적 배경도 다릅니다.

 

어떤 분들은 한국에서부터 신앙했고 또 어떤 분들은 이곳 독일에 와서 신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어떤 분들은 장로교회에 다녔고 어떤 분들은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순복음 다양한 교회 다녔던 분들이 여기에 모여 있습니다. 이렇게 교인들이 다양하다는 말은 공동체가 하나 되기 쉽지 않다는 뜻입니다.

 

미국이나 독일의 이민 교회들을 보면 분열이 심합니다. 그 이유는 교인 구성이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서 보듯이 다양해야 더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생각하지 못한 것도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다양하다는 것은 단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양하기만 하고 하나가 되지 못하면 우리가 성경에서 보듯이 고린도 교회처럼 서로 분열하고 심각하게 싸우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 있는 이런 다양성들을 하나로 묶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선 우리의 신앙이 달라져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을 닮은 통전적인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한국교회를 보면 다수가 장로교회입니다. 이 장로교회도 교단마다 특징이 있는데 어떤 교단은 보수적인 깔뱅주의 신앙을 따르면서 하나님 주권을 강조하고 성경의 가르침대로 경건하게 사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경건이 목표입니다. 금욕적으로 살기도 합니다. 예배를 엄숙하게 드립니다. 화려한 복장을 하지 않습니다. 늘 하나님의 영광만 생각합니다. 그리고 어떤 교단은 사회 참여를 원합니다. 장점이 있어요. 인권운동, 통일운동, 사회운동에서 실천적으로 신앙을 드러냅니다.

 

또 어떤 교단은 개인 구원에 관심이 많습니다. 회심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하나님을 만나는 게 필요하다는 겁니다. 성령 운동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런 신앙을 가진 신분들은 거듭난 이후에 자기 신앙에 대한 확신이 뚜렷한 장점이 있습니다.

 

이처럼 교회는 다양하고 각각의 교회마다 장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각각의 장점을 가진 다양성 그 다양성을 제거해버리고 만약에 신앙을 획일화해버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 교회는 장로교회입니다. 장로교회 말고는 다 버리십시오. 장로교회의 특징 말고는 다 버리십시오. 만약에 이렇게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께 손해입니다. 하나님이 각각의 교회에 주셨던 그 장점들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님들의 신앙이 통전적인 신앙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통전적인 신앙이란 각각의 장점을 받아들여서 융합하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성경이 말합니다. 우리 모두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신앙합니다. 우리는 부분적인 것밖에 보지를 못해요. 그래서 그 부분 부분 부분을 모아서 융합을 하면 좀 더 크게 하나님을 볼 수 있고 하나님을 신앙할 수 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우리가 통전적으로 신앙에서 하나님의 크심을 좀 더 잘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신앙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현실적으로는 다양성이 있습니다. 다 다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의 생각과 우리 사역의 차원을 계속해서 넓은 차원에서 보려고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지난주부터 월드컵이 시작되었습니다. 월드컵을 보다 보면은 평소에 서로 으르렁거리던 사람들이 함께 응원하며 하나가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를 들어 영국 런던에는 유명한 라이벌 팀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손흥민 선수가 뛰었던 토트넘과 아스널입니다. 이 둘은 같은 런던을 연고지로 하기 때문에 둘이 서로 철천지원수처럼 생각합니다. 라이벌이에요. 그래서 평소에는 상대방 선수를 욕하고 공격하고 그렇게 합니다. 옷을 태우고 찢어버리고 그럽니다. 그러나 월드컵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아요.

 

왜 그렇습니까?

 

경쟁하는 상대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차원이 달라졌어요. 월드컵은 너가 아스나리냐 너가 토트넘이냐 그걸 따지는 대회가 아닙니다. 너가 영국 사람이냐 아니냐 그걸 따지는 거예요. 그래서 평소에 욕하던 그 선수도 우리 영국을 위해서 뛴다면 월드컵에서는 응원합니다.

 

이것은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사역의 차원을 좀 넓혀가면 교회는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요 차원에서는 서로 라이벌일 수 있어도 이 차원에서는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궁극적인 하나님 뜻을 찾는 그런 신앙을 하게 되면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적인 문제가 있어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각각 자기의 입장에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이해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고 나와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잘못 이해했다고 생각합니다. 진짜 내가 이해한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는다면 저 사람도 하나님의 뜻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과 생각을 조율하는 지혜가 요청됩니다. 다른 의견을 어떻게 조율할까요? 언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합리성을 이용해야 합니다. 합리적으로 따져봐야 돼요. 함께 대화해 봐야 됩니다. 그렇게 하는 가운데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찾아야 합니다.

 

그래도 그런데 그렇게 해도 조율이 안 되는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성경에 나오는 이 안디옥 교회처럼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많은 경우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찾기보다는 성급하게 다수결로 하나님의 뜻을 정해버립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 안디옥 교회가 자신들의 미래, 자신들의 미래 사역을 위해 함께 금식하며 기도했다는 말이 나오는데 그 미래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하면서 쉽게 합의에 도달했다면 금식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검식하면서까지 하나님 뜻을 찾을 필요가 있었을까요?

 

뜻이 안 맞았던 겁니다. 그래서 진짜 하나님 뜻이 무엇인지 그걸 물었던 겁니다. 우리가 뭔가를 조율할 때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가운데 너와 나의 생각을 묶을 수 있는 좀 더 큰 하나님의 뜻이 뭔가 하나님의 차원이 뭔가 그것을 봐야 합니다.

 

사도행전 15장에 바울과 바나바가 2차 선교 여행을 떠나면서 요한 마가 때문에 싸운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가를 데려갈 것인가 말 것인가 그 문제로 바울과 바나바가 서로 갈등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서로의 생각이 너무 달랐습니다. 그리고 그 각자의 생각은 하나님의 뜻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바울 나름대로 하나님의 선교는 장난이 아니다. 누구 한 사람을 살리고 죽이고 그런 문제가 아니라 그곳에 영혼을 세우느냐 교회를 세우느냐 그 문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호하게 가야 된다. 준비된 자가 가야 된다 그런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바나바대로 하나님의 방식은 실패한 자에게도 또다시 기회를 주는 것이다.

마가가 지난번에는 실패했지만 이번에는 성공할 수 있다. 기회를 줘야 된다. 그렇게 주장했습니다. 나름 일리가 있었어요. 일리가 있기 때문에 서로 자기 주장을 내세웁니다. 합의가 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이들은 기도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조율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조율되지 않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각자 영역을 나누고 자기 영역을 담당하기로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이방의 교회를 세우셨다. 1차 선교 여행에서 그게 확인이 되었다.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거슬러서는 안 된다. 이방 선교를 해야 된다. 그러나 방법론에 있어서 너와 나는 다르다. 그것을 합의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 방향으로 갔고, 바나바는 키프로스로 가기로 했습니다. 서로 의견이 맞지 않다고 해서 하나님의 선교 그 자체를 파토내지는 않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각자가 각자에게 주어진 영역대로 일하기로 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안에 대해 생각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해도 해결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주신 것도 정답이고 나에게 주신 것도 정답이다. 우리는 서로를 인정하면서 공존하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그럴 때 바나바도 하나님의 일꾼이고 바울도 하나님께 쓰임 받는 그런 일꾼이 되는 겁니다.

 

설교를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 쓰임 받은 안디옥 교회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가 쓰임 받은 이유는 하나님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라 불렸지만 하나님에게서 멀어졌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그들을 버렸습니다. 하나님을 닮은 모습으로 살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수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역시도 하나님을 닮은 모습으로 살아갈 때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우리 각자와 우리 교회를 사용하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 쓰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크신 하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다양성을 하나로 묶으셔서 하나의 공동체로 사용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닮아야 합니다. 그 하나님을 담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포용성이 요구됩니다. 나의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차원에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서로 다름을 발견했을 때는 조율할 줄 아는 지혜도 우리는 가져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교회 이런 성도가 되기를 우리가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안디옥 교회는 이 부분에서 성숙한 교회였습니다. 우리 모두도 성숙하기를 바랍니다. 다양성의 문제 앞에서 성숙해 갈 때 그때 우리는 크신 하나님을 닮을 수 있습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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