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6장은 이삭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삭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아들이고요. 그다음에 쌍둥이인 야곱과에서의 아버지죠. 근데 생각보다 이삭은 성경에 분량이 별로 이렇게 없어요. 아버지보다도 분량이 훨씬 적고, 아들인 야곱보다도 분량이 훨씬 적고, 손자인 요셉보다도 분량이 훨씬 더 적습니다.
중요한 인물이 아니어서 그럴까요?
우리가 그냥 이성적으로 곰곰이 생각해 봐도 이삭 하면 떠오르는 사건이 별로 없어요. 아내인 리브가를 들에서 맞이하는 장면이 있고, 또 무리와 산에서 제물로 바쳐지는 장면이 있는데, 이 장면은 솔직히 말하면 이삭의 이야기보다는 아버지의 이야기인 거죠. 아버지 아브라함의 믿음의 이야기지 이삭의 이야기라고 보기는 좀 어려움이 있습니다.
또한 성경에는 이삭에 대해서 오히려 부정적으로 기록해 놓은 것도 있어요. 물론 아브라함의 불신앙도 기록이 됐고 야곱의 불신앙도 다 기록됐지만 그 짧은 이야기 중에 오히려 이 이삭에 대한 부정적인 표현이 있습니다.
27장 1절 전반절에 보면 이삭이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느니 성경에서 눈이 어둡다는 표현은 이렇게 좋은 표현은 아니에요. 대부분의 이런 표현은 영적인 것과 연관지어져서 영적인 눈이 어두워진 것을 의미할 때가 많아요.
그렇게 해석한다면 이삭의 노년은 이삭이 영적으로 어두워져 있었을 수도 있다는 그런 의미이기도 하잖아요. 그러니까 그렇게 보면 이삭의 이야기가 많지도 않은데 그 많지 않은 이야기 중에도 부정적인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이삭의 삶을 그냥 불량적으로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런 마음이 들더라고요. 두드러지지 않는 인생도 있고 드러나지 않는 인생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중에 그 누구도 중요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거예요. 근데 유난히 이상만은 존재감이 없어 보여요. 아버지보다도 존재감이 없고 아들 그리고 손자보다도 존재감이 없습니다.
그런데 성도들은 생각보다 이 점을 잘 이기지 못하더라고요. 성도만 그런 게 아니라 목회자도 그래요. 그러니까 이걸 잘 이겨내지 못하는 거죠. 두드러지지 않는 자기의 삶, 수고하고 애썼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몰라주는 자기의 삶, 땀 흘렸음에도 불구하고 별 열매가 없는 자기의 삶을 생각보다 사람들이 잘 이겨내지 못해요. 그래서 어떤 경우는 이 상태가 심각해지면 예배가 엉망이 되기도 하고요. 어떤 경우는 인생의 황혼기에 믿음에서 멀어지는 성도들과 목회자들도 있어요.
불행한 건 완전히 자기의 생애를 엉망으로 만드는 사람도 있어요. 여러분 인생이 늘 같은 모습일 수는 없잖아요. 그러니까 두드러지지 않는 인생도 있어요. 잘 드러나지 않는 인생도 있고, 노력한 만큼 평가받지 못하는 결과가 없는 인생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데 문제는 우리가 이 일들을 잘 견뎌내지 못한다는 겁니다.
근데 알아야 할 것은 성경에 이삭,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과 요셉 그 누구도 중요하지 않다고 기록된 건 없다는 거예요. 다른 분량으로 기록은 됐지만 어떤 면에서는 더 부정적으로 기록은 됐지만 이삭의 삶이 다른 믿음의 4명의 조상들에 비해서 더 못하다고 평가하는 공간은 없다는 거예요.
어떻든 이삭의 순종이 없었으면 야곱과 요셉도 없었을 것이고, 이삭의 순종이 없었으면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못 됐을 거예요. 그러니까 이삭이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순종했기 때문에 아버지인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거예요.
그렇게 본다면 이 4명의 삶에서 이삭은 반드시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권면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비교하는데 인생의 에너지를 다 쏟아붓지 마십시오. 좀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서 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다고 해서 거기에 여러분의 인생의 에너지를 다 쏟아붓지 말라는 거예요. 이 일은 하나님은 좋아하는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일이 아니라 마귀가 좋아하는 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를 가치 없게 여기고 평가해서 거기에 온 생의 에너지를 다 빼앗겨 나는 왜 이렇게 가난하게 태어났을까 나는 왜 이렇게 못났을까 왜 나는 남들보다 더 환영받지 못할까? 나는 왜 남들에게 존경을 받지 못할까? 왜 내 인생엔 수가만큼 열매가 없을까?
여러분 말하자면 끝이 없는 비교의 대상이 우리의 삶에 있어요. 마귀는 어떤 걸 좋아하냐면 여기에 여러분과 저의 에너지를 다 빼앗기는 것을 마귀가 너무너무 좋아해요.
여러분 저는 열등감이 없을까요?
당연히 저에게도 열등감이 있죠. 저는 키가 좀 더 컸으면 좋겠어요. 몸도 좀 이렇게 날씬했으면 좋겠고 뭐 등등 저는 학벌에 대한 의외의 콤플렉스가 좀 있어요. 생각보다 있어요. 학벌도 좀 더 나은 데를 나왔으면 좋겠고 등등 온갖 것이 있어요.
여러분 저처럼 비교 대상이 없는 사람은 한 명도 없어요. 근데 문제는 많은 성도들이 또 많은 목회자들이 이 쓸모없는 이곳에 에너지를 다 빼앗겨서 하나님을 위해서 드릴 수 있는 온전한 에너지가 없는 거예요.
여러분 하루 종일 자기를 비교하고 그렇게 열등감에 빠져 있다가 오늘 주일 오전 예배가 예배를 온전히 하나님께 드릴 수 있을까요?
한 일주일 내내 자기의 삶을 막 욕하다가 하나님 앞에서 손 들고 하나님을 온전히 찬양할 수 있을까요?
일주일 내내 여러분을 남들보다 더 낮게 세워주지 않는 하나님의 원망을 퍼부으며 살다가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서 정말 합당한 예배를 여러분이 올려드릴 수 있을까요?
당연히 못합니다. 비교하는 것으로 여러분 자신을 괴롭히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에게 권면하고 싶은 게 있어요. 충성하셨으면 천국의 상급을 믿고 흔들리지 마십시오. 헌신하셨다면 천국의 상급을 믿고 무너지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흔들리면 여러분의 가정이 흔들리고 또 교회가 흔들리고 사역이 흔들리고 예배가 흔들려요. 사단은 이 일을 너무 좋아해요. 그래서 끊임없이 여러분을 누군가의 비교 대상에 올려놔요. 동창회를 가도 비교하게 만들고, 백화점을 가도 비교하게 만들고 길거리를 다녀도 비교하게 만들어요.
여러분 그렇게만 하면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이 기뻐하는 예배를 드릴 수 없기 때문에 사단은 이 일들을 정말 정말 부지런히 하고 돌아다녀요. 이게 사단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딱 맞잖아. 왜 누구나 가지고 있는 마음이니까 이 마음은 모든 사람이 다 가진 마음이라서 이것을 사단의 일이라고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애매한 아주 그런 상황이에요. 그래서 사단이 일하고 역사하기에 너무너무 좋은 상황인 거죠.
그런데 많은 목회자와 성도들이 사단에 속아서 천국이어야 될 자기의 삶을 지옥을 만들어 놓고 사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흔들리면 잘 익어가던 열매가 썩어 떨어지는 일들이 벌어지게 되고요. 도착해 항구를 향해 가던 배가 난파를 당하고 잘 짓던 집들이 무너지고 있어요.
여러분 힘들고 남들보다 더 가난하게 살았지만 그래도 여러분의 집을 잘 지어오고 있었어요.
근데 어느 날 이런 마음이 사단을 여러분의 삶에 딱 던져줘요. 그랬더니 목회도 무너지고 삶도 무너지고 신앙도 무너져요.
여러분 사단이 얼마나 좋아하는 거 사단이 한 일이 아닌 것처럼 잘 포장해서 한 영혼과 교회를 망치기에 너무 좋은 일인 거예요. 그래서 사단이 아마 지난주에도 여러분과 저의 삶에서 부지런히 일했을 것이고, 오늘 이 설교를 듣고 돌아가 한 주간의 삶을 살 때도 사단은 여전히 똑같은 모습으로 여러분을 그렇게 공격할 것입니다.
또 권면하고 싶습니다. 쓸데없는 일에 흔들리지 마십시오. 아무것도 아닌 일에 여러분의 은사도 낭비하지 마십시오. 마음이 상하면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진 않아요. 여러분 우리가 마음이 상하잖아요. 하나님 말씀이 안 들려요. 들려도 왜곡되게 들려요. 상해진 마음으로 섬기는 교회가 건강할 수 없고 상해진 마음으로 드린 예배가 온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조차도 정반대로 해석을 해요. 강단에 선포되는 말씀도 반대로 해석하지만 마음이 상하면 기록된 말씀조차도 읽으면서 정반대로 해석해요. 꼭 요즘 여러분에게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영원히 살게 될 천국 백성이에요.
이 천국 백성이 열등감이나 자격지심 피해 의식, 박탈감, 질투, 자기 비하에 빠져 있다면 과연 이것은 바른 모습일까요?
성령의 전인 여러분과 저의 삶에 이것이 머물도록 여러분이 방치하시면 안 돼요. 하나 이해해야 될 게 있어요. 잠깐 자리 잡을 수는 있지만 자리 잡기 하면 안 돼요. 잠깐 머물 수는 있지만 자리 잡지 못하도록 해야 돼요. 사람이 한계가 있어서 잠깐 동안은 그런 생각이 우리 삶에 머물 수는 있어요. 누구든지 그러나 이 생각이 내 삶에 오래 자리 잡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제 오늘 말씀을 잘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은 이삭에게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그랄에 머물러 있으라고 합니다. 그랄은 블레셋 지역이에요. 이게 어떻게 되냐면 그랄은 이 당시 지리적으로는 가나안의 남서부에 있는 땅이지만 그 당시 실질적인 통치는 블레셋이 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이삭이 블레셋에 머물고 있을 때 블레셋의 왕인 아비멜렉을 거기에서 볼 수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이 이삭에게 어떤 명령을 내리냐면 떠나지 말고 그곳에 머물러 있으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우리가 좀 이렇게 살펴야 될 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내린 명령과 이삭의 머리 명령과 야곱에게 내린 명령이 달라요. 그러니까 명령의 형태는 같아요. 문장의 구조는 같은데 그 명령의 실질적인 내용이 달라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는 갈대의 우르를 떠나라는 명령을 했고, 이 이삭에게는 그라에 머물러 있으라는 명령을 했고, 야곱에게는 베델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했어요.
같은 명령의 형태인데 하나님이 세 사람에게 한 명령의 내용은 대개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잘 들어야 돼요. 하나님이 나에게 머무르라고 명령하셨는데 내 마음이 왜곡되어져 있으면 이 명령을 듣지 못하는 거예요. 떠나라고 했는데 내 마음이 왜곡돼 있으면 이 떠나라는 음성을 다르게 해석을 하고 돌아가라는 명령 또한 얼마든지 그렇게 해석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 세 가지 명령에 특징이 하나 있어요. 그러니까 내용은 다른데 특징이 하나 있어 그 특징이 뭐냐 하면 순종하면 복을 받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순종할 때 얻게 되는 축복이 이 세 가지 명령에는 다 전제돼 있어요. 그걸 기점으로 한다면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에게 하시는 그 어떤 말씀이든 우리가 순종하면 그 순종에는 반드시 축복의 길을 따라온다는 거예요.
3절 4절 말씀을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3절 4절 시작
이 땅에 거류하면 내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내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내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내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내 자손에게 주리니 내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그러니까 모든 하나님의 명령에는 축복이 있습니다. 우리가 순종하게 되면 얻게 되는 은혜가 있어요. 그러기 위해서 첫 번째 해야 될 일은 하나님의 명령을 잘 분별해야 된다. 하나님이 지금 내게 하신 말씀이 어떤 말씀인지를 잘 분별을 해야 돼요. 그래서 엉뚱한 순종을 하지 않도록 여러분 생각보다 많은 목회자들이 엉뚱한 순종을 해요.
근데 목회자들의 실수는 가리기가 되게 쉽잖아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에게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하면 다 가려지잖아요. 근데 그거 내려놓고 정말 그냥 하나님과 나와 1대 1 상계 사이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해석하면 제가 바르게 해석하지 못한 상황도 되게 많아요.
만약에 하나님이 제게 하신 말씀을 제가 바르게만 해석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지금보다 훨씬 더 나은 모습으로 여러분 앞에 있었을 거예요. 그게 설교든 그게 아니면 목회하는 모습이든 아니면 뭐 그게 교회의 규모든 어떻든 등등 제가 만약에 하나님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했다면 훨씬 더 많은 모습으로 예배하고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잘 분별하지 못해요. 그 분별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이제 마음이 왜곡되어져 있는 거죠. 왜곡되어지는 거죠.
여러분 우리의 마음이 왜곡되어 있으면 하나님 음성을 듣기가 어려워요. 제대로 못 들으니까 결국 하나님의 음성이 아닌 다른 음성을 듣게 되는 거죠. 그리고 그 다른 음성을 하나님의 음성을 하고 얼마든지 오해할 수 있는 멋진 이렇게 것들이 포장할 수 있는 것들이 신앙 안에는 너무 많은 거예요.
여러분 제가 하나님 음성을 순종하지 못했어요. 이걸 믿음으로 포장하기에 얼마나 좋은 것들이 많아요. 그래서 목회자들도 정말 하나님의 마음에 온전히 순종한 일들이 생각보다는 많지 않을 수 있다.
성도도 마찬가지예요. 여러분도 과연 여러분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음성을 온전히 들으셨나요? 온전히 들으셨나요?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요지들이 이제 서서히 이렇게 좀 등장을 합니다. 우리 5절 말씀을 한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5절 시작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들을 지켰음이라 하시니라.
이게 어떤 의미냐 하면 하나님이 이삭에게 큰 복을 내리셔요. 근데 이삭이 복을 받는 원인이 아브라함의 순종 때문이예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바로 순종해서 그 복을 받은 대상이 누구냐 하면 이삭이라는 거예요. 이삭. 그러니까 이삭이 누렸던 복은 아브라함의 순종의 삶에서 나온 제가 이 이야기를 꼭 여러분에게 하고 싶었어요.
한번 따라 하겠습니다.
이삭의 복은 아브라함이다.
할렐루야 왜 이삭이 복을 누렸느냐? 이삭도 하나님께 순종했어요. 그런데 이삭이 복을 누린 건 아브라함의 순종 때문이라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고 계명과 율례와 율법을 법도를 지켰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삭에게 복을 주셨던 것입니다.
창세기 12장 2절을 보면 좀 더 선명해집니다. 같이 한번 읽습니다. 시작.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내게 복을 주어 내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이 되라고 복의 근원이 되라고 하셨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축복대로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이 된 거죠.
그런데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된 이유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기 때문인 거죠. 그 순종이 됐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이삭의 복이었던 거예요.
여러분 열심히 온전히 하나님께 순종하는 우리의 삶은 자녀들에게 복이 되는 삶이에요. 부모들로 인해서 앞길이 막히는 자녀들이 많죠.
저도 그게 가장 늘 부모로서 마음이 힘들어요. 혹 내가 목회자로서 하나님께 잘 순종하지 못해서 우리 아들과 딸의 길을 내가 막고 있는 건 아닐까 이게 가장 이제 부모로서 힘든 마음인 거예요. 내가 목회자로 힘든 마음은 내가 하나님의 음성에 온전히 순종하지 못해서 성도들의 복을 맞고 있는 자는 아닐까 저는 여러분에게 복이 되어야 될 사람이잖아요. 근데 내가 순종하지 않으면 저는 복이 되지 못하는 거죠.
여러분의 근심이 되고 여러분의 걱정이 되고 여러분의 괴로움도 얼마든지 될 수 있어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이 되라고 하셨고, 하나님의 축복대로 아브라함은 이삭의 복이 되었어요.
여러분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이 믿음으로 살았기 때문에 자녀들의 복이 되었어요. 그래서 다윗의 후손들은 죽어야 될 상황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다윗 때문에 다 살 수 있었어요. 그러니까 심판 중에도 아버지 다윗 때문에 긍휼을 얻었던 거예요. 결국 다윗의 순종으로 인해서 다윗의 자녀들이 복을 누렸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은 누군가의 복이 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삶은 이삭의 복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살았기 때문에 특별히 율례와 법도와 하나님의 말씀과 음성에 순종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이삭에게 복이 되었던 거죠.
반대로 생각하면 나의 삶은 누군가의 재앙도 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살지 않는 하나님 음성을 온전히 분별해서 온전히 순종하지 못한 것으로 인해서 내 삶은 얼마든지 누군가의 재앙도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왜 목회자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될까요?
제가 얼마든지 여러분에게 재앙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여러분 저희를 기도해서 제가 좀 더 잘 되고 우리 가정이 좀 부유해지는 것에 포인트가 진짜 진짜 포인트는 뭐냐 하면 즉 여러분이 저를 위한 기도를 멈추는 순간 저는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지 않고 거역하는 자가 되어서 교회나 여러분에게 얼마든지 재앙이 되는 사람도 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목회자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되는 거예요.
앞서 있는 분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돼요. 그분들이 공동체의 복을 빼앗아가는 자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분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라는 거예요.
이삭의 복은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우리 시대의 표현으로 바꾸면 여러분과 저의 믿음이 자녀들에게 복이 된다는 거예요. 자녀들의 복은 본인들이 열심히 살아서도 누릴 수도 있고요. 본인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의해서도 누릴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자녀들의 복은 부모의 순종의 결과일 수도 있다는 거죠.
복을 한 모양으로 다 규정할 수는 없어요. 그러나 말씀은 분명하게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나의 순종은 누군가에게 복이 된다. 우리는 대부분 부모들이잖아요. 여러분 내가 교회를 다녀서 자녀들에게 복이 되는 게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할 때 내 삶이 자녀들에게 복이 되는 삶이 생겨요.
목사라고 해서 자녀들이 다 복을 받는 게 아니에요. 목회자가 순종을 해야 자녀들이 복된 삶을 누려요. 물론 모든 인생을 단편적으로 그럼 뭐 우리 아버지가 순종하지 않아서 나는 이렇게 보기는 어려운 게 삶이 여러 모양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아 내 노력의 결과일 수도 있고요. 온갖 조합물이 삶이니까 그렇지만 확실한 것은 내 삶은 자녀들의 누군가의 복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오늘 마음에 잘 새겨야 됩니다. 5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과 계명과 율례와 법도를 지켰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이 말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을 지켰다는 의미입니다.
왜 우리는 누군가의 복이 되지 못할까요? 왜 우리는 누군가의 축복이 되지 못할까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인 거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부모가 자녀의 복이 될 수 있을까요?
아브라함의 순종이 이삭의 복이 되게 했던 것입니다.
왜 부모가 방해물이 되고 망하게 하는 장본인이고, 부모 때문에 가정이 깨지고 부모 때문에 인생이 불행해질까요?
부모가 크리찬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들이 왜 일어날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을 누군가의 잘못을 따지려고 준비한 게 아니에요. 이 말씀을 여러분이 막 지금은 잘못됐으니까 막 회개하십시오. 이렇게 준비한 것도 아니에요. 그냥 제가 무슨 말씀을 전할까 엄청난 고민이 있었어요. 그러다가 이 말씀이 이 메모도 해놓고 했던 말씀들이 정말 한 주간 동안 이렇게 고민이 되더라고요. 하나님 분명히 아브라함이 이삭의 복이라고 했는데, 나는 누군가의 복된 목회자일까 난 자녀들에게 복이 되는 아버지일까에 대한 질문을 참 오랫동안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여러분도 함께 고민해 보자고 한 거예요. 이전에 여러분의 삶을 막 책망을 하거나 그렇게 말씀을 들었다면 100% 잘못되는 건 아니지만 굳이 그것까지 생각하지 마세요. 그냥 오늘 주어진 말씀만 가지고 좀 생각을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불순종의 자리에서 재앙과 저주가 싹이 트고, 징계와 심판이 싹이 틉니다. 순종의 자리에서 축복과 은혜가 싹이 틉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의 복이라는 문장을 다른 관점에서 제가 좀 적용해 봤는데 그러면 남편도 아내의 복이 될 수 있고, 아내도 남편의 복이 될 수 있다는 거 옆 사람과 인사하겠습니다.
내가 당신의 복이 되겠습니다. 시작
할렐루야 우리가 그렇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러분 지금 복과 함께 여러분의 자리에 앉아 있는 거예요. 또 안 믿으시는 표정이신데 여러분 복과 함께 앉아있어 나는 누군가의 복이 될 수 있습니다. 언제예요?
내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때
다른 관점에서 적용해 보면 교회도 성도의 복이 될 수 있고 성도도 교회의 복이 될 수 있다는 거예요. 목회자도 성도의 복이 될 수 있고 성도도 목회자의 복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조건은 똑같아요. 교회도 하나님의 명령과 계명과 윤리와 법들을 순종할 때 누군가의 어떤 사람에게 복이 되는 것이고, 성도 또한 하나님의 겸묘과 말씀에 온전히 순종할 때 바르게 순종할 때 우리가 또 복이 될 수 있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반대로 내가 누군가의 복이 되려면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에 순종해야죠. 여러분 복된 삶을 누군가의 복이 된 삶을 사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인 것 같아요. 그러려면 그러니까 많이 빌어서 그런 복은 주어지지는 않는 거예요. 미시는 빌면 복이 온다고 생각하잖아요. 그게 미신과 복음과의 차이예요. 비로소 복이 오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 우리가 산에 가서 많이 빌고 막 2박 3일을 빌어서 복이 오는 게 아니에요. 내가 누군가의 복된 삶이 되는 게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음성과 말씀에 순종할 때 내가 누군가의 복이 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흔적들이 우리의 삶에 많기 때문이 여러분 한번 순종하지 않는 흔적들을 때로는 이렇게 여러분 과거 흡입하기 잘 아시잖아요. 한 번쯤 한 번쯤 끄집어내보세요.
내가 언제 순종하지 않았구나.
내가 이때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내가 순종하지 않았구나.
이게 하나님이 그때 뜻이었는데 내가 순종을 제대로 못해서라고 한 번쯤은 여러분의 과거의 흔적들을 한번 파내보십시오. 그런 시간도 좀 필요합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복을 바라고 빕니다. 세상 사람들은 복을 바라고 물질도 바칩니다. 기독교의 복은 그렇게 해서 주어지는 게 아니라 니가 하나님의 명령과 순종의 명령에 순종할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만약에 비로소 받는 복이었다면 대한민국은 엄청나게 복된 나라가 됐을 거예요. 비로서 받는 전 세계가 다 그래야 되죠. 왜요? 우상이 막 어깨가 너는 매력이 되는 나라들도 널렸으니까.
근데 그렇게 많은 우상을 섬겨도 그게 복이 되지는 않죠 우상이 복이라는 건 아니에요. 그러니까 빌어서 받는 게 복은 아니에요. 성경적인 복은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의 계명과 말씀에 순종하는 거죠.
여러분 우리 교회 안에 하나님이 기뻐하는 순종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순종을 할 때 자꾸 해석을 해요. 또 또 하나 목사님이 또 무슨 마음을 가지고 순종하 하게 이렇게 해석하지 마세요. 여러분 앞으로는 여러분이 말씀을 잘 들으려면 그 말씀에 누군가의 의도가 있다는 생각은 빼셔야 돼요. 빼고 정말 자기 마음에 순전하게 적용시켜야 돼요. 그리고 그 길을 따라가다 보다 보면 선포된 말씀이 어느 순간 내 삶에 고스란히 녹아 있는 순간이 올 거예요. 그럼 우리의 노년이 그래야 되지 않을까요? 선포된 말씀이 녹아 있는 삶이 정말 복된 삶이 아닐까요? 그때 공허가 그렇게 많을까요?
저는 공허가 크게 없을 거라 생각해요. 그때는 인생의 공허가 그렇게 많지 않을 거예요. 그런 삶의 흔적으로 산다면 여러분과 제가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교회가 각자가 하나님이 하신 음성을 잘 듣고 또 그 음성에 순종하고 그래서 누군가에게 복이 되는 그런 재단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