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분석학 *프로이트,융,아들러

작성자이은진|작성시간03.08.07|조회수1,474 목록 댓글 0
정신분석
(1)프로이드
①생애
프로이드는 1856년 5월 6일에 모라비아의 프라이베르크(현재는 체코)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모피상으로 2번의 결혼경력이 있었다. 전처 소생으로 남자아이 2명을 두었고, 재혼 후 프로이드와 여동생 5명, 남동생 2명을 더 낳았다. 프로이드의 친어머니는 활달하고 지적인 여성이었으며 그녀의 이런 기질은 95세에 죽을 때까지 계속 지속되었다.
프로이드가 4살이 되었을 때 전가족이 비엔나로 이사했다. 가족의 생활은 어려웠지만 이 사실이 프로이드가 교육을 받는데 장애가 되지는 않았으며, 그의 학교성적은 매우 뛰어났다. 프로이드는 비엔나 종합병원에서 신경계의 기질성 질환을 공부하면서 의사실습을 마친 후 1881년 비엔나대학에서 의사학위를 받았다. 1886년에 4년간 사귀어 오던 베르냐스와 결혼했다. 그들 부부는 6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 중 막내인 안나는 1895년에 태어났으며, 성장한 후 정신분석학 분야에 지대한 공헌을 하기도 했다.
또 1886년에 프로이드는 신경성 질병을 전문으로 다루는 개인병원을 열었다. 그의 관심사는 신경계의 생리적 측면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점차 신경성 질환의 심리적 원인을 탐구하는 방향으로 바뀌어 갔다. 이러한 변화는 그 후 수년간 더욱 계속되어 그는 신경증의 심리적 원인을 탐구하는데 완전히 몰두하게 되었다. 1939년 83세의 나이로 영국 런던에서 죽을 때까지 그는 이러한 입장을 계속 견지하면서 자신의 관심사를 "정상적"인 행동과 사회적인 문제로까지 확대시켜 갔다. 그가 영국으로 이주한 것은 나치의 박해를 모면하기 위한 것으로 사망하기 1년전에 비엔나를 떠났다.
프로이드의 중요한 저서들 가운데는 "꿈의 해석"(1900), "일상생활에서의 정신병리학"(1901), "쾌락의 원리를 초월하여"(1920), "자아와 이드"(1923), "문명과 문명에 대한 불만"(1930) 등이 있다. 그의 저서 중 널리 알려진 책들은 프로이드가 60∼70대였을 때 출판되었다. 그는 일생동안 왕성한 창작욕을 보였으며, 33번이나 수술을 하게 만든 턱의 암으로 인한 고통도 인간의 정신을 탐구하려는 그의 의욕을 방해하지는 못했다.
②업적
정신분석학은 오늘날 미국에서 가장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다. 미국에는 최소한 10,000명 이상의 정신분석가들이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들은 주로 보스톤, 뉴욕, 시카고, 로스엔젤레스 등 대도시에서 활동하고 있다. 정신분석학이 미국에서 발흥하게 된 이유는 세계 제2차 대전으로 인해 유럽의 학자들이 대거 미국으로 이주해 왔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들의 훈련과정은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 문제이다. 프로이드 자신은 비록 의학학위를 받았지만, 정신분석학에 관련된 서적과 분석기법에 대한 철저한 연구, 심도있는 자기분석과 세심한 감독 하에서의 환자의 치료 등 기본적인 준비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의학 수업이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정신분석자가 되려면 의학박사학위를 받을 것을 필수조건으로 하는 경향성이 강하게 지속되어 왔다. 따라서 평범한 분석자들(즉 의학박사학위가 없는 사람들)은 정신분석학자 집단에게서 완전한 인정을 받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어 왔다. 약 2,600명의 회원을 거느리고 있는 권위있는 미국정신분석학회(American Psychoanalytic Association)도 의사직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국한되어 왔다.
프로이드가 죽은 후, 정신분석학에서 일어난 중요한 변화 중의 하나는 자아의 자율적인 기능을 강조하는 경향성이 증대되었다는 점이다. 이런 경향성은 "자아심리학"(ego psychology)이라는 용어에도 반영되고 있다. 이러한 방향으로의 발달을 주도한 사람은 하트만(Heinz Hartmann)이었다. 프로이드는 기본적으로 자아가 이드의 요구에 공헌하는 것으로 보았지만(비록 자아가 통제력을 갖기도 하지만), 하트만 등은 자아의 자율서를 크게 강조했다. 사실 이들은 이들 뿐만 아니라 자아도 인간의 기본적인 유전성 속에 그 기원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들이 견해 따르면 자아는 그 자신의 발달 과정을 갖고 있으며 중립적인 에너지로 작용한다. 이는 무의식적인 성적, 공격적 충동과 관련되지 않는 대상이나 활동에 대한 관심을 가지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프로이드도 때로는 그러한 관심이 가능하다고 주장하기는 하지만, 그 내용은 다르다. 즉 대상이나 활동은 성과 공격성이라는 성격의 기본적인 요인과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된다고 주장했다).
만약 프로이드가 더 오래 살았다면, 자아의 자율적인 기능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변화했을 것이다. 1937년의 논문(Analysis Terminable and Interminable)에서 프로이드는 자아의 발달과 특성은 자아가 나타나기 전에 이미 존재하는 유전적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일반적으로 프로이드 이론에 대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이드보다 자아를 더 많이 강조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프로이드 자신은 이런 생각을 더 발전시킬 시간적 여유가 없었지만, 하트만과 다른 학자들은 자아의 자율성이라는 가정을 발전시켜 왔다.
독립적인 자아에 대한 관심이 증대한 이유는 부분적으로 정신분석학자들이 치료했던 환자들의 유형의 변화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의 세계는 프로이드와 정신분석학의 선구자들이 그들의 임상적 경험을 통해 이론을 개발했던
세기 전환기와는 크게 달라졌다. 최근에는 환자들이 복잡한 사회적 문제(모호한 불안, 위험감, 불만 등)로 인해 더 많은 고통을 받는 경향이 있으며, 가정, 직장, 사회적 역할 등에서 의미와 가치를 찾으려는 경향이 더 증대되었다. 자아는 외부 세계의 문제를 합리적인 방식으로 처리해야 하는 성격의 일부이기 때문에, 자아를 더 강조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오늘날의 환자들에게는 의식적인 사고과정과 대처 방법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 것이 중요하게 된 것 같다. 즉 현대의 환자들은 자아로 하여금 실존적 문제를 처리하도록 하는 현대사회의 불확실성에 의한 고통이 무의식적인 죄의식이나 억압된 성욕에 의해 받게 되는 고통보다 더 커졌다.
형식적인 학파나 접근 방식으로서의 정신분석학이 사라지거나 아니면 계속 존재하거나 간에, 정신분석학이 현대 사회에 미친 영향력은 인정되고 있으며, 그런 영향력은 당분간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다음과 같은 사실들이 끊임없이 증명되고 있다. 1)프로이드 심리학의 여러 측면을 검토하려는 연구들이 계속 이루어지고 있으며 정신분석학에 대한 새로운 저서들도 많이 출판되고 있다. 2)형식적으로 정신분석학의 훈련을 받지 않은 정신건강훈련자들(정신과 의사, 상담자, 사회사업가 등)도 자신의 환자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프로이드의 이론이나 기법들을 사용하고 있다. 3)사회과학이나 인문과학 분야의 대학강좌에서는 프로이드의 사상을 역사적인 관심사 뿐만 아니라 현대사회와의 관련성이라는 측면에서 토론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4)프로이드 이론의 임상적 시사점이나 적용과는 관계없이 프로이드의 이론을 사회 철학적 측면에서 연구하는 학자들도 있다. 5)고전문학이나 대중문학에서도 아동기 초기의 외상적 경험, 무의식적 갈등, 억압된 욕망 등의 영향력과 같은 프로이드의 이론이 자주 주제로 등장하고 있다. 6)사람들의 일상적인 언어에서도 프로이드의 용어들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이나 타인의 억압, 방어, 숨겨진 원망, 자아 강도 등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하면서도, 프로이드가 우리 문화에 미친 영향 때문에 이런 개념들이 일상적인 것이 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프로이드의 사상은 여러 가지 형태로 우리들의 곁에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이 바람직한 것이냐는 질문은 프로이드의 가정과 이론들의 유용성과 타당성을 직접 평가해 보아야만 대답할 수 있다.

(2)칼 융(Carl Jung, 1875∼1961)
칼 융은 스위스의 Kesswil에서 목사인 아버지와 가정주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모두 아들과 가까이 지내지 않았다고 한다. 청년시절에 그는 종교의 문제에 깊이 빠져 들었으나 그의 아버지와 논쟁을 오래 해보면서도 명확한 결론을 얻을 수가 없었다. 프로이드와 마찬가지로 그는 Goethe, Schopenhauer, Nietszche의 책을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또한 심령술의 주제에 매혹되어 영매와 실험을 해보기도 하였다.
융은 정신의학에 주로 관심을 가지고 있으면서 1901년 Basel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프로이드의『꿈의 해석』(The Interpretation of Dreams, 1900)은 융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키게 되어 그는 프로이드의 헌신적인 제자가 되었다. 융의 프로이드에 대한 찬양과 존경은 상호적인 것이어서, 프로이드도 융이 그의 정신분석학의 후계자가 될 만한 제자라고 보았다. 그들은 서로를 잘못 보았던 것이다. 프로이드는 자신의 주요 이론에 헌신적인 제자를 원하였다. 융은 무의식적 과정에 대한 그 자신의 생각을 전개시킬 기회를 바랬다. 프로이드가 융이 처음 제자로 들어왔던 시절에 그에게 했던 말을 나중에 융이 다음과 같이 기억해 내었다. "내 귀여운 제자 융, 내게 성(性)이론을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해 다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야. 알고 있듯이 우리는 이 이론에 권위를 부여해서 흔들리지 않는 요새로 만들어야 해!". 프로이드는 분명히 융이 무의식적 정신과정의 강력한 힘과 정신건강을 지키기 위해 의식과 무의식의 균형을 유지하려는 정신과정과 그 중요성에 깊이 관여하고는 있어도 성의 중요성에 대한 생각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융에 의하면, 리비도의 에너지는 내성성(introversion)과 외향성(extroversion)의 양극에서 나온다. 내성성은 내적인 삶, 곧 의식적인 경험에 주의를 기울이게 하고, 외향성은 외부의 삶, 곧 의식적인 경험에 주의를 기울이게 하고, 외향성은 외부의 삶, 곧 사회와 다른 사람들에게로 주의를 기울이게 한다. 이러한 갈등적인 힘들은 건강한 심리적 기능에 합리적인 균형을 유지하게 한다. 꿈이란 프로이드가 생각하였던 것처럼 원망충족기제라기 보다는 이러한 균형을 얻기 위한 기제이다.
사람이 성숙해감에 따라서 리비도의 에너지는 서로 다른 목적을 향하게 된다 어린 아기시절에는 리비도는 영양 보충으로 향하여 있다. 어린이 시절에는 놀이로 향하고, 사춘기 이후에는 이성(異性)과의 관계에 향하게 된다. 그리고 나서 정신적 가치에 향하게 된다. 정신성을 강조하였다는 점에서 보면, 신비적인 의미에서나 종교적인 의미에서 융이 프로이드의 생물학적-사회적 방향성이나 아들러의 사회성에 대한 강조와는 구별되는 견해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융은 무의식의 영역을 넓혀 무의식은 두 가지 서로 다른체계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았다. 개인적 무의식(personal unconscious)은 프로이드의 무의식 개념과 비슷한데, 어떤 주제에 대한 감정과 태도가 한덩어리로 된 감정 복합체(complex)이다. 예를 들어, 자기 아버지에 대해 적대감을 가진 여자는 아버지에 대한 컴플렉스(father complex)를 가지고 있어 남편과의 원만한 관계를 이루는 데에 방해를 받는다. 용 이론의 정신분석가들은 프로이드 이론의 정신분석가들과 마찬가지로, 환자를 쇠약하게 만드는 기억들을 무의식에서 근절해 버려 이 파괴적인 영향력을 없애거나 줄이는 일을 한다. 거기에다가 융은 탄생, 죽음, 권위, 신(神) 또는 다른 중요한 문화적 관념들과 연합된 고고학적 심상의 원초적인 형태의 원형(archetypes)을 포함하는 집단적 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을 가정하였다. 집단적 무의식은 한 개인이 자기의 조상들이 많은 세대 동안에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해 온 방식으로 기울어지게 만든다. 융에 의하면 한 개인의 심성은 인류의 역사와 자아실현을 향한 그 노력에 근거하고 있으며, 또한 서로 반대되는 정신력들, 예컨대 내성성과 외향성이 조화되는 자아성(selfhood)에 근거하고 있다.
융이 성장하면서 그의 저작들은 더욱 신비적이 되었으며, 경험적인 주제들 보다는 철학적인 주제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아들러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이루고자하는 긍정적인 목표를 향한 노력을 강조하였으며, 그 결과로 다음에 나는 인본주의 심리학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3) Alfreld Adler
아들러는 비엔나의 외과의사였으며 프로이드의 초기 추종자 주의 하나인데, 성인의 성격에 대한 강력한 결정자로 유아성욕을 강조한 프로이드의 생각이 너무 과장되어 있으며 왜곡되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아마도 두 가지가 서로 얽혀 있겠지만, 두 가지의 개인적인 이유로 아들러는 프로이드 이론을 반대하였던 것이다. 어린시절에 아들러는 자주 앓았으며, 구루병으로 네 살이 될 때까지 걷지도 못하였다. 소년시절과 청년시절에 그는 그의 형보다 여러 가지 점에서 모자랐고, 따라서 부적합함을 느끼게 되었다. 나중에 아들러는 Marxist쪽으로 기울어진 사회 민주당 당원이 되었는데, 이 정당은 자본주의가 인간의 고통과 심리적 장애를 만들어낸다고 비난하였다. 이러한 초기의 경험과 정치적 태도로 아마도 아들러는 프로이드가 강조했던 생물학적인 요인들 대신에 사회적 요인들을 강조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아들러는 프로이드가 여자들은 남근이 없기 때문에 심리적 부적합감을 가진다고 생각한 점을 거부하였다. 아들러는 남근선망이란 남성의 지배성에 대한 여성들의 분노를 상징화한 것이라고 보았다.
아들러에 의하면 기본적인 심리적 추동력은 자기주장 추동인데, 이는 숙달과 완벽을 추구하려는 충동이다. 어린아기들은 약하고 부적합하기 때문에 자꾸만 좌절을 겪는다. 열등감을 극복하는 방법을 찾으면서, 아이들은 부모를 통제하고 지배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아이들은 이 목표를 위해 보상(compensation)이라는 방어기제를 사용한다. 그들은 한 가지 영역에서의 자신과 한계를 다른 점을 보강하여 상쇄하려 한다. 아들러는 개인의 성격은 실재적이든 상상의 것이든 부적합성의 특정한 감정과 이를 극복하는 방법, 그리고 여기서 얼마나 효율적인가 하는 요인들에 달려있다고 가정하였다. 그리스의 유명한 연설가였던 Demosthenes는 목소리가 약하였고 어눌하게 말하는 아이였다. 자신의 약점을 넘어서려는 그의 노력이 과보상이 되어 그는 유창한 연설가가 되었다. 때로는 보상의 노력이 역효과를 부르는 수도 있다. 수줍고 외로운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싶은 욕구에서 지나치게 공격적이 되면, 오히려 자기가 친하게 지내고 싶었던 사람들이 그를 멀리하게 된다. 아들러에 따르면 정신적 질병은 우월에의 노력을 보상하려는 방식이 부적절하고 비효율적일 때 생긴다.
아들러는 행동의 동기를 추동의 감소나 긴장완화로 보는 프로이드의 개념을 거부하였다. 그의 생각으로는 인간의 동기란 자기개선과 완벽으로 향하는 것이며, 그 궁극적인 목표는 개인과 사회사이로 조화로 얻는 것이다.
프로이드의 이론과는 달리 아들러의 이론은 경험적인 근거가 부족하고 이론적 정확성도 모자란다. 게다가 프로이드 이론은 심리적 발달을 자세히 서술해주지만 아들러의 이론은 이 점에서도 부족하다. 아마도 이 이론은 프로이드 이론이 성취한 만큼의 지지와 인기는 결코 얻지못할 것이지만, 몇 사람의 정신분석이론가들의 생각에 영향을 미쳤는데, 이들은 인간경험의 사회적이고 창조적인 힘을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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