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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문화의 장

젊음은 아름답고 늙음은 추하다/ 반경환

작성자반경환|작성시간11.02.08|조회수208 목록 댓글 0

젊음은 아름답고 늙음은 추하다

반 경 환

1.

오늘날 전세계적인 경제 위기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예견된 것이었는데, 왜냐하면 자연과학의 발달로 말미암아 인간의 수명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의식주의 문제가 해결되고, 모든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의학이 발달함에 따라서 인간의 평균 수명이 80세에 가까운 고령사회로 진입하게 된 것이다. 세계는 넓고 할 일도 많다. 이 ‘세계는 넓고 할 일도 많다’라는 어느 재벌 총수의 좌우명은 17~ 8세기의 서양의 자본가들의 도전적이고 야심만만한 콧노래일 수밖에 없었는데, 왜냐하면 이 지구에는 너무나도 많은 미개척 지대와 온갖 천연자원이 넘쳐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자본가들의 콧노래는 문명과 문화의 발달로 이어지고, 그 결과, 18세기에는 5억 명이었던 인간의 숫자가 19세기에는 10억 명으로, 20세기에는 20억 명으로, 그리고 이 21세기 초에는 67억 명으로 증가를 하게 되었고, 이제는 ‘세계는 좁고 할 일도 없게 된 것’이다. 전쟁과 가난은 자연의 인구법칙이라는 맬서스주의자들의 말이 생각난다.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원자폭탄이 등장했고, 이 핵무기의 효과에 의하여 대부분의 전쟁은 억제되었고, 따라서, 기아와 질병의 반대방향에서, 너무나도 이상하고 야릇한 ‘비만과의 전쟁’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 ‘비만과의 전쟁’의 기원에는 첫 번째는 전쟁의 억제가, 두 번째는 가난의 극복----문화선진국과 중진국의 현실이기는 하지만----이라는 문제가 내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모든 인간들은 먹고, 또, 먹는 탐식주의자들이며, 이 탐식의 결과가 ‘비만과의 전쟁’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나는 이 비만의 문제가 언제부터 나타난 것인지는 잘 모르지만, 양차 대전 이후, 선진산업국가에서 나타났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고 있다. 아무튼 이 비만의 문제는 풍요로운 사회의 문제이며, 또한,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와 함께, 정비례한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세계는 좁고 할 일도 없다. 모든 동물들은 생식능력이 끝나면 이 생식능력과 함께 이 세상을 떠나가게 되어 있다. 그토록 오랜 사투 끝에 자기가 태어난 모천으로 돌아와서 죽어가는 연어가 그렇고, 기껏해야 10년 내외를 사는 사자가 그렇다. 또한, 기껏해아 20년 내외를 살다가 가는 소와 개들의 일생이 그렇다. 인간의 나이가 60이면 대부분의 성적 기능이 쇠퇴하고 그는 어느덧 이 세상을 떠나가야 할 나이가 된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 즉, 1960년대와 1970년대 초만 하더라도 한 사람의 회갑잔치는 가문의 영광이었으며, 온 마을의 최고의 잔치였던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사람이며, 민인들의 존경과 경탄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나, 오늘날의 회갑잔치는 조롱거리이며, 묵살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는 칠순 잔치도 하지 않고, 팔순 잔치도 하지를 않는다. 10년이 지나도, 20년이 지나도 신생아들의 울음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 마을에서도 노인들이 득시글거리고, 승차요금을 받지 않는 지하철역에도 노인들이 득시글거린다. 파고다 공원에도 노인들이 득시글거리고, 무료급식이 이어지고 있는 서울역 광장에도 노인들이 득시글 거린다. 젊은이들에게는 미래의 희망과 삶의 활기가 있지만, 노인들에게는 미래의 희망도 없고, 더 더군다나 삶의 활기같은 것은 손톱만큼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들은 아들 딸도 낳았고, 손주도 보았으며, 따라서 이 세상의 임무는 60세 이전에 다 끝났는데도, 너무나도 이상하고 야릇한 의학의 성과에 의해서, 마치 하루살이와도 같은 삶을 2~30년 동안이나 더 연장하고 있는 것이다. 살아 있어도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더 이상 살아 있어 보았자 아무런 희망도 없는 삶이 오늘날 우리 늙은이들의 삶인 것이다.

젊음은 아름답지만 늙음은 추하다. 이 늙은이들의 삶은 디룩디룩 살찐 군더더기의 삶이며,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반예술적인 삶이 된다. 하지만, 그러나, 늙은이들에게는 선거권이 있지만, 아직 태어나지 않았거나 어린 청소년들에게는 선거권이 없다. 민주정치는 우중정치이고, 민주정치는 소수지배의 법칙에 어긋나는 타락한 정치제도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선진산업국가들의 딜레마가 바로 여기에 있고, 따라서, 모든 선진산업국가들은 출산장려정책을 펼치지 못하고 노인복지정책만을 펼쳐 나가고 있는 것이다. 살아 있는 송장이 새로 태어날 미래의 신생아들의 알집을 다 파먹고 있는 것이다. 이 늙은이들의 삶은 반자연적이며, 반휴머니즘적인 삶에 지나지 않는다. 노인들의 의식주에는 엄청난 시간과 인건비와 천문학적인 자원의 낭비가 들어가게 되어 있다. 노인들의 옷도 자연의 파괴의 댓가이며, 그들의 음식물도 자연의 파괴의 댓가이다. 그들의 의약품도 자연의 파괴의 댓가이며, 그들이 소모하는 생활필수품도 자연의 파괴의 댓가이다. 왜냐하면 젊은이들의 삶은 자연스러운 삶이지만 늙은이들의 삶은 너무나도 부자연스러운 삶이기 때문이다. 노인들은 더 이상의 생식능력이 없으며, 또한, 그들의 후손을 위하여 생산적인 노동도 할 수가 없다. 그들의 인생은 잉여 인생이 아닌, 그들의 자손들과 미래의 삶을 좀먹는 기생충적인 삶에 불과하다. 이 고령화 현상은 우리 인간들의 미래의 본보기 아니라, 인문주의의 최후의 종착역이 될 것이다. 생태환경과 자연의 파괴, 엘리뇨와 라니냐에 의한 천재지변, 그리고 이상고온현상에 의한 북극권과 남극권의 해빙과 육지의 침수현상은 인구의 증가의 문제, 그 중에서도 고령화의 문제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니체의 {우상의 황혼}의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역설한 적이 있었다.

나는 죽음의 부정적 기능과 부자연사는 자연사가 아닌, 그밖의 다른 어떤 것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다. 자연의 법칙에 따르자면, 자기 자신의 발로 설 수 없고, 날지 못하는 새와 걷지 못하는 짐승들은 도태되게 되어 있으며, 그 자연스러운 순리의 흐름에 거역하는 어떤 움직임도 있을 수가 없다. 그러나 과연, 오늘날의 우리 인간들의 실정은 어떠한가? 두 발로 걸어다닐 수도 없고 더 이상의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하지 않은 인간들마저도 ‘휴머니즘’의 이름으로 부양을 하고, 이미, 그 수명을 다하여 더 이상 살아 있는 것이 그처럼 욕되고 부끄러운 식물 인간들마저도 산소호흡기와 알부민과 진통제와 항암제에 의지하여 그 수명만을 연장시켜 나가고 있지 않은가? 더 이상 인간일 수도 없고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인간이 아닌, 그 식물 인간들과 노인들을 위해서, 그처럼 엄청난 인력과 시간과 자원낭비를 하고 있는 것이 휴머니즘이라면, 그것은 자연에 대한 최악의 테러 행위이며, 파렴치한 범죄 행위가 아닐 수가 없다. 오늘날의 의학과 유전자 공학에 의한 휴머니즘은 반휴머니즘이며, 그것은 우리 인간들의 휴머니즘을 더럽고 추하게 오염시키는 암적인 종양에 지나지 않는다. 니체는, 몽테뉴의 뒤를 이어서, 우리 인간들의 자연사마저도 부자연사로 끌어 내리며 이렇게 역설한 바가 있다.

 

의사들을 위한 도덕율----병약자는 사회의 기생충이다. 어떤 경우에는 삶을 부지해 가는 것이 남부끄러운 일일 수 있다. 사는 의미, 살 권리를 잃고 난 다음인데도 비겁하게 의사와 약에 의존함으로써 식물 인간의 삶을 부지한다는 것은 사회로부터 심한 경멸을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의사들은 의사들대로 이 경멸을 전하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약을 처방할 것이 아니라 환자들에게 날이면 날마다 새로운 혐오감을 내비쳐야 할 것이다. ......삶의, 상승하는 삶의 최선의 이익을 위해 퇴락하는 삶을 가장 무자비하게 억압하고 몰수해야 하는 모든 경우들에 있어서----이를테면, 생식의 권리, 태어날 수 있는 권리, 살 권리를 정함에 있어서, 하나의 새로운 책임, 즉 의사가 가져야 할 책임을 창출해 낸다는 것----더 이상 자랑스럽게 살 수 없을 때 자랑스럽게 죽는 것,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한 죽음, 제때에 명료한 의식과 즐거움을 가지고 자식들과 다른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죽음, 그리하여 떠날 사람이 아직 살아 있는 동안에 진짜 이별이 가능한 죽음, 또한 생전에 소망했던 것과 성취한 것에 대한 진짜 평가와 삶에 대한 총결산이 가능한 죽음----이 모든 것이 지금까지 죽음의 시간에 대해 기독교가 연출해 온 애처롭고 무시무시한 그 코메디와는 상반된다. 기독교에 관해서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기독교가 죽어가는 사람의 약점을 악용해서 양심을 능욕하고 심지어는 죽는 방법을 악용해서 인간과 과거에 대해 가치 판단을 내려왔다는 사실이다.----여기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온갖 비겁한 편견에 대항하여 이른바 자연사에 대한 올바른, 즉 생리학적인 평가를 내리는 일이다. 따지고 보면 자연사도 결국 ‘부자연사’의 하나이며 일종의 자살에 불과하다. 사람이란 자기 자신 외의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죽지 않는 것이다. 다만 자연사는 가장 경멸한 만한 이유로 죽는 죽음이며, 부자연한 죽음, 제때가 아닌 죽음, 비겁자의 죽음이다. 삶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와는 달리 죽기를 바라야 할 것이다. 자유롭게, 의식을 가지고, 우연히가 아니고, 돌연히 들이닥쳐서가 아니고 말이다......---니체, {우상의 황혼}에서

옛날에는 종교가 자연과학을 그처럼 가혹하게 탄압을 한 바가 있지만, 오늘날에는 거꾸로, 자연과학이 무신론의 칼날을 들이대며, 그 숨통을 조여대고 있는 실정이다. 자연과학에 의한 생태 환경의 파괴가 신의 창작품에 대한 무차별적인 테러 행위이라면, 의학과 유전자 공학에 의한 복제 인간의 탄생은 종교의 주체자들에 대한 더없이 잔인한 살인행위가 아닐 수가 없다. 전자는 모든 만물들의 터전의 훼손으로 이어지고, 후자는 그 종교 속의 인간의 죽음으로 이어진다. 불치병과 난치병의 치료가 의학과 유전자 공학의 목적인 것처럼 떠들어 대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허울좋은 가면일 뿐, 그 근본적인 목적은 더 많은 부의 축적이라는 자본의 논리일 뿐인 것이다. ----반경환, {행복의 깊이} 제1권에서

 

2.

예수는 기독교 사상을 창시하고 33세 때 이 세상을 떠났고, 알렉산더 대왕은 세계를 정복하고 33세 때 이 세상을 떠났다. 보들레르는 46세 때, 랭보는 37세 때, 반고호는 37세 때, 이 세상을 떠났고, 칸트는 80세 때, 쇼펜하우어는 72세 때, 니체는 56세 때, 모차르트는 35세 때 이 세상을 떠났다. 에너지 보존법칙에 의하면, 에너지는 그 형체만 바꿀 뿐 그 총량에는 변함이 없다고 한다. 대부분의 천재들은 어느 누구보다도 뜨거운 열정으로 자기 자신의 에너지를 소진시키는 낭비가이며, 천재들의 장수는 예외 중의 예외----칸트와 쇼펜하우어 등이 바로 그것이다----라고 할 수가 있다. 아니, 천재의 장수는 그가 ‘가짜 천재’라는 사실만을 환기시켜 줄 뿐, 그 어떠한 유쾌한 증거도 되지 못한다.

문화선진국들, 예컨대 미국, 영국,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스위스 등의 가장 심각한 난제는 고령화 사회이며, 이 ‘고령화 사회’라는 대재앙을 맞이하여 그 어떠한 정책도 쓸 수가 없게 되어 있는 것이다. 65세에 정년퇴직을 하고, 평균 2~30년을 자기 자신의 연봉의 6~70%를 국민연금으로 수령해 가고 있기 때문에, 그 어떤 나라의 재정도 파탄을 맞이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 극단적인 예를 프랑스가 보여주었는데, 왜냐하면 사르코지 대통령이 프랑스인의 정년을 65세에서 67세로 늘려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국민연금의 수혜자를 65세에서 67세로 늦춰버린 미봉책일 뿐, 그 근본적인 대책은 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첫 번째는 인간의 수명의 연장이 그 효과를 순식간에 무력화시킬 것이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수많은 젊은이들의 취업을 그만큼 더욱더 어렵고 힘들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고등학생들과 대학생을 포함한 수많은 젊은이들의 폭동은, 그러나 그것은, 이제----비록, 그것이 잠정적으로 진정되기는 했지만----새발의 피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나는 이 고령화 사회의 근본 대책은 ‘인간수명제’를 채택하고, 각자 그 나라의 실정에 맞게끔 안락사를 합법적으로 장려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수명제는 70세나 80세를 기본으로 정하고, 그 나이가 되어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은 정부가 그 소원을 성취시켜 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70세 이상을 살고 싶은 사람은 두 발로 설 수 있고, 스스로 활동을 하면서, 그 어느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을 때까지만 허용해야 한다. 또한, 60세 이상이 되어 두 발로 설 수 없고, 살아 있는 것이 더 이상 희망이 없고, 오직, 치욕이 될 뿐인 환자들은 그 환자와 가족들의 동의 아래, 모든 치료행위를 중단하는 것이 마땅하다. 유전자 공학과 생명공학에 의존하여 인간 수명을 연장시키는 행위는 너무나도 반자연적이며, 반인간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욕망이 욕망을 부르고, 또다른 욕망이 또다른 욕망을 부른다. 더 큰 욕망이 더 큰 욕망을 부르고, 더 큰 욕망이 더 큰 욕망을 부른다. 따라서, ‘욕망의 광기’와 ‘광기의 욕망’에 사로잡힌 우리 인간들은 자기 자신과 타인들을 살해하고,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 인간들의 생존의 터전인 이 세계마저도 파괴시키게 된다. 우리 인간들은 자기 자신의 욕망을 사랑하지, 그 욕망의 대상을 사랑하지는 않는다. 아버지의 자식 사랑도 가짜이고, 어머니의 자식 사랑도 가짜이다. 아들의 아버지 사랑도 가짜이고, 딸아이의 아버지 사랑도 가짜이다. 너에 대한 나의 사랑도 가짜이고, 나에 대한 너의 사랑도 가짜이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애인도 그 주체자의 욕망 위에 투영된 환영에 지나지 않으며, 적도, 친구도, 선후배도 그 주체자의 욕망 위에 투영된 환영에 지나지 않는다. 개인주의는 이기주의이고, 이기주의는 개인주의이다. 자본주의는 개인주의의 토대이며, 이 개인주의의 정점은 돈과 명예와 권력이라고 할 수가 있다. 욕망의 중독자는 모든 인간들 위에 군림하고, 모든 인간들의 존경을 받으면서, 언제, 어느 때나 산해진미의 진수성찬을 즐기고자 한다. 그의 욕망은 중독된 욕망이며, 그는 언제, 어느 때나 욕망의 절제와 욕망의 최후 따위는 아예 생각조차도 하지를 않는다. 자동차, 비행기, 인공위성은 인간의 문명의 정점이고, 대포, 전차, 미사일, 원자폭탄도 인간의 문명의 정점이다. 이종교배와 컴퓨터도 인간의 문명의 정점이고, 로버트와 사이보그도 인간의 문명의 정점이다. 정점이란 최정상이며,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는 곳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따라서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는 정점은 이제 최고의 영광의 무대가 아니라, 끊임없는 추락만이 있는 비극의 무대가 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고령화 사회는 ‘너도 죽고 나도 죽자’라는 막가파들의 사회이며, 그 모든 동식물들의 공멸을 뜻한다. 고령화는 의학의 성과도 아니며, 문명의 진보도 아니다. 그것은 비이성적이며, 기괴한 사회가 만들어낸 암적인 종양일 뿐이다.

라이우스왕도 자기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하고 그의 아들인 외디프스에게 살해되었다. 외디프스왕도 그의 아버지(라이우스)를 살해하고 그의 아들들에게 살해되었다. 젊은이는 미래의 희망이고, 늙은이는 미래의 암영이다. 젊은이는 떠오르는 태양이고, 늙은이는 그 빛을 상실해 가고 있는 낙조의 운명이다.

우리 인간들은 이성적인 동물이며,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동물이다.

지구는 더욱더 젊어져야 하고, 수많은 젊은이들의 미래의 터전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젊음은 아름답지만 늙음은 추하다. 이 추함은 전염력이 강하고, 이 추함이 고령화사회의 대세를 이루고 있다.

앞으로 인간의 수명이 120세는 될 것이라고 한다. 인간의 수명, 120세는 기껏해야 3~40년을 일하고 8~90년을 공짜로, 또는 기생충과도 같은 삶을 살아가야 할 운명일는지도 모른다.

우리 대한민국은 ‘高麗葬’이라는 옛 풍습을 지니고 있는 나라이며, 이 고려장은 수많은 나라들의 ‘제의적 왕살해’와 너무나도 닮아 있다. 왕(아버지)이 병들었거나 너무 늙었는데도 죽지 않으면 그 왕(아버지)을 매장(안락사)해 버리는 풍습이 바로 그것을 말해 준다.

너무 오래 사는 것은 국가와 민족에게 죄를 짓는 것이며, 우리 젊은이들에게도 죄를 짓는 것이다. 이제는 일찍 죽는 것이 자기 자신의 아들 딸들을 효자로 만들고, 민족과 국가에게 애국하는 일이 되고 있는 것이다.

오오, 언젠가, 어느 때는 자살자 협회나 암살자 협회, 또는 안락사 협회가 이 고령화 사회의 대안으로서 그 존재를 부각시키게 될는지도 모른다.

 

3.

철학자의 고령----저녁으로 하여금 낮을 판결케 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때 피로가 힘과 성공, 선한 의지 등의 판사가 되는 일이 너무 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주 똑같이 고령과 그 인생의 판단을 노리는 최고의 신중한 태도가 필요할 것이다. 특히 고령은 저녁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매혹적인 도덕으로 변장하기를 좋아하고 저녁 노을, 황혼, 평화로운 고요, 또는 동경으로 가득 찬 고요함에 의하여 낮의 얼굴을 붉히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노인에게 보이는 존경은 특히 그것이 고령의 사상가나 현자일 때, 자칫하면 그의 정신의 노쇠에 대한 우리의 눈을 멀게 한다. 그래서 그러한 노쇠와 피로의 징후를 그 감추인 곳으로부터 끌어내는 것, 즉 도덕적인 찬성의견과 편견의 배후의 생리학적 현상을 끌어내는 것이 존경에 눈 먼 자와 인식의 가해자로 되지 않기 위하여 항상 필요하다. 즉 노인이 위대한 도덕적 갱신과 재생이라는 망상에 빠지고, 이 감각으로부터 마치 바로 지금 겨우 그의 시력이 선명하게 된 것처럼 그 생애의 업적과 발걸음의 판결을 내리는 일이 드물지 않다. 더구나 이 쾌감과 이 확신이 있는 판결을 후견으로서 원조하는것은 현명함이 아니라 피로이다. 이 피로의 가장 위험한 특징으로서 아마 천재신앙이 나타날지도 모른다. 천재신앙은 이 생애의 마지막이 되어서야 겨우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들과 반쯤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들을 덮치는 것이 상례이다. 즉 예외적 권리에 대한 신앙이다. 이 신앙에 의하여 습격당한 사상가는 홀가분해 지는 것, 또 천재로서 증명하는 것보다 오히려 결정하는 것이 앞으로는 허용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마 안심을 구하는 정신의 피로가 느끼는 충동이야 말로 저 신앙의가장 강한 원천일 것이다. 이 충동은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나타나든 시간 위에서 저 신앙에 선행한다. 그 다음. 사람들은 이때 모든 피로한 사람들과 노인들의 향락욕에 따라, 자기의 사색의 결과를 다시 음미하고 씨뿌리는 대신에 향락하려 하고, 그 때문에 그 결과를 자기의 입에 맞고 또 맛이 있을 수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과 그 건조, 차가움, 맛없음을 없애는 것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노사상가는 자기의 생애의 업적을 넘어서 높아지는 외견을 드러내는 데, 실제로는 그 업적을 뒤섞인 열광, 단맛, 약맛, 시적인 안개, 신비적인 빛으로 쓸모없게 만드는 일이 일어난다. 플라톤이 결국 그러한 식으로 되었고, 엄밀한 여러 학문을 뒤얽히게 하고 길들이는 사람으로서 금세기의 독일인과 영국인 어느 누구도 필적할 수 없는 저 위대하고 정직한 프랑스인 오귀스트 꽁트가 결국 그런 식으로 되었다. 피로의 세 번째 징후. 젊었을 때, 위대한 사상가의 가슴 속을 돌진하고 당시 어떤 것에서도 만족을 발견하지 못했던 저 명예심은 현재 역시 늙고 말았다. 그는 더 이상 잠시도 지체할 수 없는 사람처럼 거칠고 폭넓은 만족의 수단으로, 즉 활동적이고 지배적이고 폭력적이고 정복적인 성격의 사람들이 가진 수단으로 손을 뻗친다. 앞으로 그는 그의 이름으로 등록하는 시설을 창설하려 하지, 더 이상 사상의 건축물을 설립하려 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증명과 반박의 나라의 에테르 같은 승리와 존경은 지금 무엇인가! 그에게는 책 속에서의 불멸, 독자의 혼 속에서 전율하는 환희가 무엇인가! 이에 반하여 이 시설은 하나의 사원이다.----이 점을 그는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석조이고 영속하는 사원은, 부서지기 쉽고 보기 드문 혼의 제물보다도 그의 신의 생명을 보다 확실히 유지한다. 아마 그는 이때 역시 처음으로 인간보다 신에 더 많이 돌려지는 저 사랑을 발견하리라. 그래서 그의 인품 전체는 그러한 태양 밑에서 가을의 과일처럼 부드러워지고 단맛이 들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는 더 한층 장엄하고 아름다워진다. 이 위대한 노인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처럼 성숙하고, 조용해 지고, 여성의 찬란한 우상숭배 속에서 휴식하는 것을 허용하는 것은 고령과 피로이다. 참된 제자들, 즉, 참된 사상의 후계자들, 말하자면 참된 적대자들을 찾는 그의 이전의 반항적인 자신의 자아를 능가하는 열망은 이제는 지나갔다. 저 열망은 약해지지 않은 힘으로부터, 언제나 역시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의 학설의 반대자, 불구대천의 적이 될 수 있다고 하는 의식적인 긍지로부터 발생했다.----지금 그는굳건한 당원, 위험 없는 동지, 장군, 전령, 사람의 눈을 끄는 종자이기를 원한다. 그는 지금, 앞으로 먼저 날아가는 모든 정신이 그 속에서 생활하는 무서운 고립에 더 이상 전혀 견디지 못한다. 그는 앞으로 존경, 공동체, 감동, 사랑 등의 여러 대상으로 자신을 둘러싼다. 그는 결국 모든 종교가들처럼 역시 언젠가 유쾌해 지려고 하고, 자기가 존중하는 것을 단체 속에서 축하하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단지 단체를 가지기 위하여 그는 종교를 안출할 것이다. 이와 같이 현명한 노인은 산다. 그리고 동시에, 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슬픈 일이지만 사제나 시인 같은 일탈에 접근하게 된다. 우리는 그때 그의 현명하고 엄격한 청춘, 당시의 그의 두뇌의 엄격한 도덕, 착상과 열광에 대한 참으로 남자다운 그의 수치를 거의 생각해낼 필요가 없을 정도다. 이전에 그가 다른 좀 더 나이 많은 사상가들과 자신을 비교한 것은, 자기의 약점을 진지하게 그들의 힘과 비교하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보다 냉정하고 보다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한 일이었다. 지금 그가 그것을 하는 것은, 비교함으로써 자신의 망상에 감격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이전에 그는 확실한 기대를 품고, 앞으로 올 사상가들을 생각했다. 그뿐 아니라 언젠가 자기가 그들의 더욱 풍부한 광채 속에서 몰락하는 것을 무한한 기쁨을 품고 바라보았다. 지금 그를 괴롭히는 것은 최후의 사람일 수 없다고 하는 점이다. 그는 인간에게 증여하는 그 유산으로 인간에게 최고의 사색을 제한하는 것도 부과하기 위한 수단을 숙고한다. 그는 정신을 가진 개개인의 긍지와 자유에의 갈망을 무서워하고 또 중상한다.----그의 뒤는, 어떤 사람도 더 이상 그 지성을 완전히 자유롭게 생각하는 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 그는 스스로 사색 일반의 파도가 밀어닥쳐서 깨뜨리는 방파제로서 영구히 선채로 있으려고 한다. ----이것들이 그의 은밀한, 어쩌면 반드시 은밀하지는 않을지도 모르는 원망願望이다! 그러나 그러한 원망의 배후에 있는 가혹한 사실은 그 자신이 자신의 학설 앞에서 정지하고, 그 학설 안에 자기의 경계석을, 자기의 ‘여기서부터 더 이상 나가지 않음’을 세웠다고 하는 것이다. 그가 자기 자신을 성도의 반열에 넣음으로써 그는 자기의 사망증명서도 교부했다. 앞으로 그의 정신은 이 이상의 발전이 허용되지 않는다. 그의 시대는 끝났다. 시계바늘이 떨어진다. 위대한 사상가가 자기를 미래의 인류에 대한 의무적인 시설로 하려 할 때, 그는 그 힘의 정점을 넘고 몹시 피로하고 그 황혼에 대단히 가깝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확실히 상상해도 상관없다.

----니체, {서광}, 262면

 

죽음을 미리 생각하는 것은 자유를 미리 생각하는 것이다. 죽음을 배운 자는 굴종을 모른다. 죽음의 도道는 모든 예속과 억압에서 우리를 해방시킨다. 목숨을 빼앗기는 것이 불행이 아닌 까닭을 깨닫는 자에게는 이 세상에 불행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몽테뉴, {수상록}, 56면

 

나는 고맙게도 이 죽음에 대하여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좋으실 때에 언제나 불러가셔도 아무 미련도 남기지 않고 이 세상을 떠날 수 있게 되어 있다. 물론 목숨에 대하여 전혀 미련이 없다는 것은 아니며, 그것을 잃는다는 것은 슬프지 않을 리가 만무하다. 그러나 나는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있다. 이 세상에 대한 나의 마지막 작별 인사는 주위 사람들에게 절반은 고한 셈이다. 이제 남아 있는 것은 나 자신과의 작별인사이다. 일찍이 아무도 나만큼 철저히 이 세상을 떠날 마음의 준비를 한 사람은 없으리라. ----몽테뉴, {수상록}, 58면

 

자선병원의 하얀 병실에서

아침 일찍 잠이 깨어

지빠귀의 노래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깨닫게 되었다. 벌써 오래 전부터 나에게서

죽음의 공포는 사라졌다. 나 자신이

없어지리라는 것만 빼놓으면, 다른 것은

하나도 달라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죽은 다음에도 들려 올 지빠귀의 온갖 노래소리를

이제야 비로소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자선병원의 하얀 병실에서] 전문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1956년 5월 독감으로 베를린 자선병원에 입원을 했었고, 1956년 8월 14일 58세의 나이로 그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했다고 한다.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의 시인으로서, 나치의 탄압과 압제에 맞서서 ‘신발보다도 더 자주 국적’을 바꾸면서도, 그러나 그 아름답고 뛰어난 서정시를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이 쓰고 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 나이 70이면 잡지편집자로서는 은퇴를 하고 이 세상을 떠날 준비를 해야 하는 나이이다.

나는 정도령에게, 이도령에게, 김도령에게 아름답고 멋진 죽음(은퇴)를 권한다.

오오, 너무나도 더럽고 너무나도 추악한 삶만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잡지 편집자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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