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지식}의 서문
프리드리히 니체/ 권영숙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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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한 개 이상의 서문이 필요할 수도 있다. 그리고 결국은 비슷한 체험을 하지 않은 사람이 서문을 통해서 이 책의 경험이 가까워 질 수 있는지에 대한 여부는 계속 남아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얼음과 눈을 녹이는 바람의 언어로 씌인 것이 분명하다. 즉, 신념과 긍지, 방황, 모순, 그리고 산뜻하고 포근한 봄햇살이 이 책 속에 있다. 겨울의 근접을 상기시키는가 하면 동시에 겨울을 이겨내고, 다가올, 아니 어쩌면 이미 와버린 공리를 상기시켜 준다.
전혀 예기치 않았던 일이 금방 일어난 것처럼 끊임없는 감사가 흘러나온다. 회복을 전혀 예기치 않았던 환자의 감사함이다. {즐거운 지식}은 긴 억압을 끈질기게, 혹독하게, 냉정하게, 굴욕하지 않고, 하지만 희망 없이 저항해 온 자의 영혼의 축제임을 뜻한다. 이제 이 영혼은 희망, 건강에 대한 희망과 회복의 도취로부터 한꺼번에 공격을 받게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여러 가지 고집스럽고 어리석은 것들이 밝혀진다는 것도, 가시가 너무 많아서 도저히 껴안을 수도 부둥켜 안을 수도 없는 문제들에게까지도 장난기 어린 애정이 베풀어졌다는 것도 과히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이 책을 통틀어 말할 것 같으면, 오랜 기간의 궁핍과 무기력 후에 가지는 조그만 잔치놀이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되돌아오는 활력과 내일, 또 그 훗날들에 대한 다시 깨어난 믿음, 갑자기 생겨난 미래에 대한 감각과 기다림, 임박한 모험, 다시 열려진 바다, 그리고 다시 허락되고 믿어지는 삶의 목표들, 이러한 것들을 기뻐하기 위한 것이다. 그때 내가 이미 겪지 않았던 것이 무엇이 있었나! 한줄기 사막, 소모, 불신, 얼어붙은 청년기, 엉뚱한 시간에 흘러나온 노년기의 간주곡, 고통의 종말을 거부하는 자존심의 독재보다 더 강한 고통의 독재, 병적으로 비상해진 인간에 대한 증오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고독 속의 완전한 은신, 주의스럽지 못하고 모든 어리광을 다 받아 주는 영혼의 식이요법, 낭만주의로부터 서서히 발달된 구토증이 처방해 준, 생각해 보면 잔인하고 모질고 가슴 아픈 것들에게 자신을 제한시키려 했던 굳은 고집----아, 누가 이 모든 것들을 다시 경험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이런 것들을 경험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히 약간의 어리석음도, 약간의 감정의 풍만함도 용서해 줄 것이다. 또한 약간의 {즐거운 지식}----예를 들어 이제 이 책에 추가된 몇 편의 노래들, 즉, 한 시인이 모든 시인을 어쩌면 용서해 줄 수 없을 정도로 우스개거리로 만들어 버리는 노래들----도 용서해 줄 것이다. 아차차, 그러나 부활한 저자의 풍자의 대상은 시인과 그들의 ‘서정적 감정’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 그가 어떠한 희생물을 찾는지, 어느 소재의 괴물이 풍자를 위한 그의 호기심을 끌 것인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이 굉장하게 보잘 것 없는 책, 마지막에 [비극이 시작되다]라고 씌어진 것을 우리는 읽을 수 있다. 사악하고 얄궂은 것이 발표됐음을 경고한다. 풍자가 시작되었음이 분명하다.
2
하지만 이제 니체 씨를 떠나자. 니체 씨가 다시 좋아진 것하고 우리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가?
심리학자한테 있어서 건강과 철학의 관계에 대한 질문보다 더 흥미 있는 것은 거의 없다. 그리고 만약 그가 병이 나면 그는 가지고 있는 모든 과학적인 호기심을 동원시킬 것이다. 사람이라면 모든 경우 각자 가지고 있는 철학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어떤 사람들의 경우에는 그들의 박탈된 상태가 철학을 하고 또다른 경우에는 풍요와 활력이 철학을 할 수도 있다. 전자의 경우 그들은 버팀목으로든, 진정제, 약, 속죄양, 기분전환, 혹은 자신을 고립시키는 수단으로든, 어쨌든 철학을 필요로 하고 있다. 후자의 경우 철학은 아름다운 사치품에 지나지 않는다. 최선의 경우 그것은 승리감에 도취된 감사의 육감적인 풍만함이며 종국에는 아직도 그 자체 개념들의 천국 위에 있는 우주적 문자를 새겨야 한다. 하지만 후자보다 더 흔한 전자의 경우, 모든 병든 사색가의 경우가 그렇듯이----아마 철학 역사에는 병든 사색가가 더 많을 것이다----괴로움이 철학을 낳는다면 만약에 생각 자체가 병으로부터 압력을 받게 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 질문이야말로 심리학자들에게 관심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실험이 가능하다. 여행을 하는 사람이 조용히 잠들기 전에 특정한 시간에 일어나야겠다고 결심하는 것처럼, 우리 철학자들 역시 우리가 병이 났을 때는 우리의 몸과 영혼은 병에게 맡기고 우리 자신들로부터 눈을 감아 버린다. 여행자가 무엇인가가 잠들지 않고 시간을 재고 그를 깨울 것을 아는 것처럼, 우리 역시 결정적인 순간에 깨어 있는 것이며 그때에 그 무엇인가가 생동하는 영혼을 잡아줄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생동하는 영혼이란 곧 건강한 날에는 자존심 때문에 허용이 안 되는 허약함, 회개, 포기, 실망, 경직된 상태 등, 영혼의 병리학적인 상태의 다른 이름들이다(옛날 속담이 아직도 유효하다: 세상에서 가장 자존심이 강한 짐승들은 자존심 강한 영혼, 공작, 그리고 말(馬)이다).
이렇게 자신을 훑어보고 자신을 유혹해 본 사람은 지금까지 행해져온 철학에 대해 좀 더 섬세한 눈을 가질 수 있다. 병의 고통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우회, 옆길, 안락한 휴식처, 그리고 밝은 생각들로 인도되거나 혹은 잘못 인도되는 것들을 좀 더 쉽게 추적해낼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런 섬세한 눈을 가진 사람은 아픈 육체와 그 육체가 필요로 하는 것들이 영혼을 무의식적으로 태양을 향하여, 잔잔함과 온유함, 인내, 약, 어떤 뜻에서는, 위안을 향하여 재촉하고 몰아붙이고 구슬린다는 것을알고 있기 때문이다. 전쟁보다 평화를 더 중요시 하는 모든 철학, 행복을 부정적으로 규정짓는 모든 윤리, 어떤 형태이든 종말을 아는 모든 형이상학과 윤리학, 세상을 초월하고 극복한 상태, 분리되고, 넘어서고, 밖으로 나가고, 높이 오르는 것을 원하는 모든 지배적으로 예술적인 혹은 종교적인 열망, 이 모든 철학들이 각 철학자들의 병으로부터 영감을 받지 않았나 충분히 질문해 올 수 있다. 객관적인 것, 이상적인 것, 혹은 순수하게 영적인 것이라는 미명하에 무의식적으로 숨겨진 생리적인요구는 절박할 정도로 많다. 그래서 나는 가끔, 넓은 안목으로 봐서, 철학은 고작 신체의 해설과 신체에 대한 오해가 아닌가 하는 질문을 해본다. 지금까지 철학의 흐름을 장악해온 최고의 가치판단 뒤에는, 개인의, 계급의, 혹은 전체인종의 육체구성에 대한 오해가 숨겨져 있다. 형이상학의 모든 과감한 미친짓, 특히 존재의 가치에 대한 답변들은 무엇보다도 제일 먼저 특정한 육체의 증후로 간주될 수 있다. 이러한 확인이나 부정이 과학적으로 측정했을 때 눈꼽만큼의 의미가 없다 해도 그것들은 역사학자나 심리학자들 한테는 육체 증후의 힌트로서 뿐만 아니라 육체의 성공과 패배, 육체의 풍만함과 힘과 역사 속에서의 독재, 혹은 그것의 실망과 피로와 빈곤과 종말에 대한 경고, 종말에 대한 의지를 가름하는 힌트로 더욱더 중요한 것이다.
나는 아직도 철학적인 의사를 기다리고 있다. 아주 예리한 의사를. 사람과 시간과 인종과 인류의 총체적인 건강을 진단할 수 있는 의사, 다음과 같은 제안을 두려워하지 않고 나의 의혹을 끝까지 파헤치기 위하여 용기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의사를 기다리고 있다. 나의 제안이란, 지금까지 행해진 모든 철학의 목표는 ‘진리’가 아닌 다른 것----건강, 미래, 성장, 힘, 생명이라고 할까-----이었다.
3
내가 심하게 아팠던 시절에 얻은 이득을 난 아직도 다 소모하지 못했다. 또한 아시다시피 난 그 시절을 배은망덕하게 떠나고 싶지도 않다. 나는 나의 변덕스러운 건강이 나를 건강한 사각형들보다 유리하게 만든다는 것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여러 종류의 건강상태 속을 횡단하고 또 계속 횡단하는 철학자는 똑같은 숫자의 철학을 지나갈 수밖에 없다. 건강상태가 바뀔 때마다 철학자는 자기 자신의 위치를 가장 영적인 형태와 거리로 바꾸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변모의 예술이 철학인 것이다. 우리 철학자들은 일반 사람들처럼 몸을 혼으로부터 갈라놓을 수 있는 자유가 없을 뿐만 아니라 혼을, 영혼으로부터 갈라놓을 자유는 더욱 없다. 우리는 생각하는 개구리가 아니며, 무조건 객관화하고 접수하는 내장이 빠진 기계도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고통을 통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생각을 낳아야만 하고, 또 어머니들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가진 모든 것들, 피, 가슴, 불, 쾌락, 정열, 고뇌, 양심, 운명, 그리고 돌연한 재해를 그것들에게 물려줘야만 하는 것이다. 삶----그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우리 자신의 모든 것들을 끊임없이 빛과 화염으로 변모시키는 것이다----이란 또한 우리에게 상처를 입히는 모든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란 이런 것이다. 병에 대해서, 우리는 오히려 병이 없이 어떻게 살 것인가 묻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 않는가? 오직 거대한 고통만이 영혼의 최종적인 해방자인 것이다. 그것은 또한 모든 U를 X로, 알파벳 마지막에서 두 번째인 진짜 X로, 바꾸는 거대한 의심의 스승이기도 하다.
오직 거대한 고통, 시간을 끌대로 끌면서 아주 천천히 그리고 길게 우리를 괴롭히는 고통, 마치 생나무 장작불 위에서 타는 것과 같은 고통, 오직 이러한 고통만이 우리 철학자들로 하여금 우리의 가장 깊은 곳으로 내려올 수 있게 강요할 것이며, 또한 모든 신뢰, 모든 안일한 것, 온유한 것, 적당한 것, 중간에 베일을 드리우는 모든 것들, 즉, 다시 말해, 우리가 지금까지 그 속에서 우리의 인간됨을 찾았던 것들을 저버릴 수 있게 할 것이다. 이러한 고통이 우리를 좀 더 ‘좋게’ 만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의 생각을 좀 더 심오하게 만든다는 것을 나는 안다.
수많은 고문을 당하고도 오직 저주로밖에 복수를 갚지 못하는 아메리칸 인디언들처럼 우리가 병에 대한 자존심, 경멸, 이기려고 하는 의지를 포기한다 해도, 혹은 우리가 열반이라고 하는 동양의 무無, 즉, 벙어리, 귀머거리와 같이 경직된 단념, 스스로 자기 자신을 잊고 스스로 자신을 소화消火하는 것, 이러한 상태로 병으로부터 도피한다 해도, 우리는 이러한 길고 위험한 자제훈련을 통해 새로운 사람으로 변모하게 된다. 새로운 질문들과 함께 지금까지의 그 어떤 질문보다 더 깊게, 심하게, 거칠게, 사악하게, 그리고 조용하게 더 많은 질문들을 할 새로운 의지가 생기는 것이다. 삶에 대한 신뢰는 없어지고 삶 자체가 문제가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상태가 굳이 사람을 우울하게 만들 것이라고 쉽게 판단해 버리면 곤란하다. 실은 삶에 대한 애정이 아직도 가능한 것이다. 다만 애정에 대한 표현이 달라질 뿐이다. 그것은 곧 여성에 대한 사랑이 우리들로 하여금 의심을 품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영적인, 영적화靈的化된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모든 문제성 있는 것들에 대한 호기심, 즉, X에 대한 환희는 이루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커서 문제성에 대한 모든 고민도, 불확실한 것에 대한 위험도, 심지어는 사랑하는 사람의 질투까지도 번뜩거리는 섬광과 같이 덮어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행복을 알게 된 것이다.
4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말을 빠뜨리지 않기 위하여 쓴다. 이러한 한없이 깊은 굴 속으로부터, 심한 병으로부터, 또한 심한 의심으로 생기는 병으로부터 돌아올 때 사람은 새롭게 태어난다. 그리고 껍데기를 탈피한 상태에서 좀 더 간지럼을 잘 타고 심술궂은 사람으로 기쁨에 대한 좀 더 섬세한 미각을 가진, 좋은 것들에 대해서 좀 더 민감하게 감사할 줄 아는, 좀 더 명랑한 감각과 기쁨 속의 두 번째 위험한 순진함을 가진, 좀 더 어린애 같으면서도 그전보다도 백 번은 더 섬세해진 이런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쾌락이란 얼마나 구역질 나는 것인가----쾌락을 좋아하는 사람들, 즉 우리의 ‘교육받은’ 사람들, 부자들, 우리의 지배자들이 이해하는 그 미숙하고 곰팡이 냄새 나는 황누런 쾌락말이다! 요사이 소위 ‘교육받은’ 사람들, 도시인들이 축제다 뭐다 하는 떠들썩한 이름으로 미술, 책, 음악을 허용하면서 자신들을 강간하고 알코올의 도움으로 ‘영적인 쾌락’을 즐기는 것을 우리는 얼마나 더 지켜봐야 하는가! 정열을 부르짖는 연극과도 같은 비명이 이제는 얼마나 우리의 귀를 아프게 하는가, 교육받은 군중이 그토록 사랑하는 감각의 낭만적 대소동과 흥분, 또 그들이 밑도 끝도 없이 추구하는 치솟고, 부풀고, 과장된 것들이 우리의 미각에 이제는 얼마나 생소한가! 아니다, 우리 회복기의 환자가 아직도 예술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다른 종류의 예술이어야 한다. 조롱할 줄 알고, 가볍고, 지나치듯 머물지 않고, 신성하게 어지럽혀져 있지 않고, 신성하게 모조적인, 순수한 불꽃처럼, 구름 없는 하늘을 핥아 올라가는 예술이어야 한다. 그 무엇보다도 예술인을 위한, 예술인만을 위한 예술이어야 한다! 우리는 장차 이를 위해서 가장 필요시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다. 나의 동지들이여, 그것은 곧 쾌활함이며 아무 쾌활함이나 상관이 없다네, 예술인들이여 이것을 증명하도록 하지, 우리 알고 있는 자들은 이제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몇 가지가 있다. 아, 우리는 이제 얼마나 잊어버리기를 잘하고 알지 못하도록 길들여지는가, 예술인으로서 말이다!
이제 우리의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밤마다 신전을 위태롭게 만들며, 조상 彫像을 껴안고, 다 이유가 있어서 숨겨진 것들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베일을 벗기고, 파헤치고, 환한 불빛에 비추어 보고 싶어 하던 이집트 청년들이 걸었던 길을 우리는 또다시 걷지 않을 것이다. 이 세련되지 못한 미각, ‘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진리’를 찾겠다는 진리를 향한 의지, 진리와 사랑에 빠져 있는 젊은 열광, 이런 것들에 대해 우리는 더 이상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기에는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경험했고, 너무나 진지하고, 너무나 명랑하고, 너무나 지쳤고, 너무나 생각이 깊다. 우리는 이제 베일이 걷어진 후에도 진리는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으리라고 믿지 않는다. 그렇게 믿기에는 우리는 너무나 많이 살았다. 오늘날 우리는 모든 것을 발가벗긴 채 보고 싶어하지 않고, 모든 것을 체험하는 것을 원하지 않고, 모든 것을 이해하고 알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을 예의로 간주한다.
“하나님이 모든 곳에 존재한다는 것이 진실인가요?”하고 어린 소녀가 그녀의 어머니한테 물었다. “그건 점잖지 못해”----철학자들을 위한 힌트! 사람들은 진주빛 불확실함들과 수수께끼들 뒤에 자연이 숨겨 놓은 수줍음에 대해 좀 더 존경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어쩌면 진리란 그녀의 이유를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는 것에 대해 이유를 가지고 있는 여자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녀의 이름은 ----희랍어를 쓰자면----Baubo(원시적이고 음란한 여자 귀신으로 옥스퍼드 클래식 사전에는 원래 여성생식기를 인격화한 것이라고 함)가 아닐까?
아, 희랍인들! 그들은 정말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들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곁으로든, 속으로든, 직접으로든 현상숭배와, 형식, 조화, 단어, 즉, 현상의 올림퍼스에 대한 믿음을 과감하게 버리는 것이다. 희랍인들은 생각이 깊었기 때문에 오히려 더 피상적이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되돌아와야 할 점이 아닌가----현재 사상의 가장 높고 가장 위험한 고지에 오르고 그 위에서 주위를 둘러보고 그 밑을 내려다 본 우리 영혼의 곡예사들이 말이다? 정확하게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도 희랍인들이 아닌가? 형식과, 조화와 단어의 숭배자들? 그리고, 그러므로 예술인들?
----{애지} 2013년 가을호
*이 글은 권영숙 역의 {즐거운 지식}(청하, 1989년)의 서문이며, 독자 여러분들은 이 책을 꼭 구입해서 정독하기를 바란다. ----편집자 주.
* 자기 자신이 쓰고 싶어하던 글, 도전적이고 야심만만한 글을 쓰겠다고 약속해놓고, 그것을 쓰지 못한 젊은 비평가에게 이 즐거운 지식의 서문을 읽게 하고 싶다. 아아, 우리 추한 한국인들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