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재의 목소리, 타자를 향한 환대
임 봄
죽은 사람의 말을 대신 전하는 무녀를 본 적이 있다. 그 말은 분명 무녀에게서 나오는 소리인데 입에서 나오는 어투는 여성이나 남성, 심지어 아이의 목소리까지 빙의한 대상에 따라 달라졌다. 대신 전하는 것이라는 설명도 없이 직설적으로 전해진 그 목소리에 누군가가 울음을 터뜨렸다. 또 누군가는 그 목소리에 응대하며 현재 자신의 슬픈 마음을 전하기도 했다. 그것은 더 이상 무녀가 전하는 소리가 아니라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서 전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예술의 임무가 무규정의 존재들, 부재하는 것들의 세계를 창조하는데 있다면 예술가는 빛을 통해 그러한 존재들을 불러 모아 새로운 가능성을 실험하는 자이다. 예술이라는 틀 안에서 무규정의 존재들은 서로 접속하며 부재의 자리를 메우고 새로운 고원을 만들어 낸다. 그것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세계, 새로운 리얼리즘의 세계이다.
고독, 얼굴을 마주한 타자
박준의 시집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에는 이러한 무규정의 존재들이 가득 차 있다.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가득 차 보이는, 머뭇거리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시를 읽은 후에는 새로운 층위에서 전혀 다른 방식의 의미를 전하는 방식의 코드가 작동한다. 편하고 쉬운 언어들로 구성 된 박준의 시들은 그래서 무섭다. 쉽게 읽히는 시들이 규정되지 않은 신체에 접속해 전혀 다른 모양으로 변형되고 기다렸다는 듯이 접속하면서 기다렸다는 듯이 다른 의미를 만들어 낸다.
박준에게 있어 시는 곧 생명을 가진 존재들의 삶이요, 언어요, 행위이다. 그래서 그것들을 소환해내는데 있어 별다른 의식이나 특별한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 평범하던 날것의 언어가 시의 몸을 빌려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일찍이 이런 언어들을 사용한 백석 같은 시인들이 있었고 그 시인들 역시 이러한 언어들을 통해 시적 성공을 거둔 바 있다. 박준 역시 그들의 영향을 받았을 수 있다. 그러나 박준의 시에서 눈에 띄는 것은 시간의 주체가 홀로 외롭게 경험하는 세계가 아닌 타자와의 관계를 중시한다는 점이며 타자에 대한 개념을 넘어서는 초월적 타자성이 엿보인다는 점이다. 그것은 달리 말하면 레비나스가 말한 것처럼 고독한 존재들이 서로 “얼굴과 얼굴을 마주한 상황”이라고 볼 수 있며 “전 타자를 자신 안으로 흡수하는 인식의 빛 안에서의 고독”(『시간과 타자』)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박준의 시에서 보게 되는 단순하고 평범한 언어들은 새로운 생명을 갖게 되며 타자를 통해 미래의 현존과 마주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무규정의 존재가 전하는 언어의 방식
그가 타자를 사유하는 방식 가운데 특이한 것은 읊조림의 형식을 통해 마치 제의처럼 타자와 교감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번 시집에서 자주 보게 되는 특징 중 하나인 “~했습니다”, “~일 것입니다” 등의 경어체와 “있었다”, “말했다” 등의 과거형 어투 역시 시적 주체와 객체의 거리를 멀게 만들어 읊조리는 효과를 배가시킨다.
내가 처음 적은 답장에는
갱도에서 죽은 광부들의
이야기가 적혀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로
질식사나 아사가 아니라
터져 나온 수맥에 익사를 합니다
하지만 나는 곧
그 종이를 구겨버리고는
이 글이 당신에게 닿을 때쯤이면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라고
시작하는 편지를 새로 적었습니다
-「장마」 부분-
‘태백에서 보내는 편지’라는 부제를 가진 이 시에는 그곳에 살고 있는 아이들의 울음, 술에 취한 사내들, 검게 이어진 길, 그리고 삶을 영위하는 수단인 갱도에서 죽은 광부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부재하는 자들이 “터져 나온 수맥에 익사”하는 죽음의 비밀에 대해 전하려 했던 시적주체는 돌연 그 이야기를 접고 “함께 장마를 볼 수 있겠”다는 일상의 이야기를 대신 전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죽음이라는 어둡고 무거운 이야기 대신 평범한 이야기로 돌리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현재의 나와 결코 유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부각시키고 있다.
엘리아데는 물이 가진 이미지를 가능성과 생명, 창조, 정화를 상징한다고 해석했다. 또한 그 물에는 전혀 반대로 죽음이나 파괴의 상징도 담겨 있다. 이 시에서 물은 죽음과 파괴의 이미지가 담겨 있다. 그리고 현재의 내가 몇날 며칠 기약도 없이 쏟아지는 장마를 앞두고 있다는 것은 현재의 주체 역시 죽음과 파괴에 직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생명과 죽음, 오도 가도 못하고 현재의 삶을 수긍해야 하는 존재의 비극은 이처럼 이전의 죽음과 서로 맞물려 현존재의 비극적 정서를 끌어올리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시인이 미처 편지에 써서 부치지 못하고 접어 둔 이야기는 단순히 잊어버린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삶이 주체의 삶 안으로 녹아들어 재현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시인은 그러한 관계에 대한 인정을 낮은 목소리로 읊조린다. 그 읊조림은 마치 제의처럼 시에 무게를 드리운다.
밥 먹고 가. 도라지 무쳐놓은 것도 좀 있는데 금방 차려줄게. 도라지 먹고 트림 안하면 인삼보다 좋다고 하더라. 아니 그건 겨울 무였나. 하여간 내가 조금 전 깜빡 잠이 들었다 가 꿈을 꿨는데 안개 자욱한 해변이야.
(중략)
뭐? 바로 간다고? 밥 안 먹고? 그럼 이거라도 가져가. 나중에 네가 갚으면 되지. 괜히 잃어버리지 말고 지금 주머니에 넣어. 그럼 가. 멀리 안 나간다. 가. 그냥 가지 말고 잘 가.
-「사월의 잠」 부분-
박준의 시에는 화자의 목소리를 날것 그대로 전하는 시들이 많이 등장한다. 「마음이 기우는 곳」, 「아,」, 「사월의 잠」, 「목소리」, 「가을의 말」, 「겨울의 말」 등이 그렇다. 일상의 언어를 가감 없이 담아 더 친근하게 느껴지는 이 시들은 시인의 간섭을 최소화함으로써 상황의 재현을 현실감 있게 그려낸다.
“밥 먹고 가”라는 권유는 우리의 삶에서 자주 듣게 되는 말 중 하나로 친근함을 전하는 일상의 언어이다. 그것은 “밥”이 삶의 근원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것이 타자로부터 권유된다는 점에서 더욱 친근감을 느끼게 된다. 이 시는 현실에서 시작해 꿈 이야기를 거쳐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형식을 갖는데 그것은 마치 장자의 호접지몽을 보는 것처럼 우리의 삶을 재현하고 있다. 그처럼 꿈과 다르지 않은 우리의 삶이지만 마지막에 이르러 밥도 먹지 못하고 급히 떠나려는 이의 모습에 이르면 감당해야 하는 현실의 무게감에 자못 숙연해진다. 밥도 먹지 못하고 떠날 만큼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는 화자의 모습에서 현실을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 겹쳐지기 때문이다.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 삶의 근원이 되는 밥조차 넘기지 못하는 이를 불러 세워 따뜻한 마음을 전하는 것은 일말의 희망일 수 있다. 그런 희망을 전하는 이의 목소리에서 독자들이 두고 온 고향을 떠올리거나 부모님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시인이 개입하지 않고 타자의 목소리를 그대로 전하는 이런 방식은 하나의 콩트처럼 던져져 독자들과 직접 대면함으로써 오히려 더 깊은 울림을 전한다.
시인에게 있어 “밥”이 주는 이미지는 조금 특별해 보인다. 다음의 시에 등장하는 밥에서 그 의미를 더 잘 확인할 수 있다.
묵은해의 끝, 지금 내리는 이 눈도
머지않아 낡음을 내보이겠지만
영아가 오면 뜨거운 밥을
새로 지어 먹일 것입니다
언 손이 녹기도 전에
문득 서럽거나
무서운 마음이 들기도 전에
우리는 밥에 숨을 불어가며
세상모르고 먹을 것입니다
- 「좋은 세상」 부분
이 시에서 느껴지는 “밥”의 이미지 역시 고통으로부터, 혹은 아픔으로부터 대상을 보호하고 위로해주는 고향이나 어머님의 품속처럼 따뜻하게 그려진다. 시적화자는 직접 쌀을 씻고 밥을 하는 행위를 통해 대상을 위로해주고자 하는 마음을 전한다. “눈”이 주는 차가운 이미지는 이어지는 “뜨거운 밥”을 통해 상쇄되고, “묵은” 것이 주는 낡은 이미지는 위로를 통해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숨”을 불어넣는다. 그것은 모두 시적주체의 따뜻한 보살핌을 통해 이뤄지고 있다. “언 손이 녹기도 전에”, “문득 서럽거나/ 무서운 마음이 들기도 전에” 밥을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은 세상 속에서 받은 상처와 대면하지 않도록, 그것을 생각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를 주지 않겠다는 화자의 배려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시는 타자를 향한 환대이며 그것을 통해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시라고 볼 수 있다.
삶과 죽음, 타자를 향한 환대
시인은 화자가 전하는 날것의 언어를 그대로 차용하거나 타자를 향한 환대를 통해 시에서 생명의 이미지를 담아낸다. 타자의 언어를 가감 없이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타자의 있는 그대로의 삶을 고스란히 시로 승화시키려는 시인의 의도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이 곧 “詩”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밥 먹고 가라고 권유하는 지인(「사월의 잠」), 다리가 불편한 상철이가 뛰던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목소리), 시부모님의 임종을 맞았던 병원에서 딸의 출산을 맞게 된 아주머니(「마음이 기우는 곳」) 등 각각의 시적주체들이 전하는 평범한 이야기는 시인의 기억에서 소환되는 순간 곧 시가 된다.
외롭지? 그런데 그건 외로운 게 아니야 가만 보면 너를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 도 외로운 거야 혼자가 둘이지 그러면 외로운 게 아니다
(중략)
큰 비 지나, 물길과 흙길 지나, 자라난 풀과 떨어진 돌 우산과 오토바이 지나, 오늘은 노인 셋에 아이 둘 어젯밤에는 웬 젊은 사람 하나 지나, 여름보다 이르게 가는 것들 지나, 저녁보다 늦게 오는 마음 지나, 노래 몇 자락 지나, 과원 지나, 넘어짐과 일어섬 그마저도 지나서 한 이틀 후에 오는 반가운 것들
- 「가을의 말」 부분
내가 원래 이렇게 울어, 어려서부터 그랬어, 청계천 양복점에서 일할 때 손에 기름은 늘 묻어 있지, 슬픈 생각은 자꾸 나지, 무엇으로 닦냐, 팔뚝으로 문질러가며 우는 거지, 이렇 게 울면 우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아, 그때부터 버릇이 됐어, 하는 말 흘러
(중략)
무주와 구천동 그리고 장계 흘러, 큰 바람과 높은 고개 흘러, 낯을 가리는 오랜 버릇 흘 러, 불타 죽는 사람이 없던 새벽 흘러, 끼니를 거르고 맞이하는 오후 흘러, 담아 둔 생각과 하지 않아도 좋을 생각 흘러, 눈을 감으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온 이의 얼굴이 성큼 다가와 있고, 그마저도 흐르르 흐르고 흘러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가지런히 발을 모으 고 있는 말들.
- 「겨울의 말」 부분
위에 인용한 두 편의 시에는 다양한 주체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들의 목소리는 각각 한 연씩을 차지하며 제각기 다른 삶의 의미들을 전하고 있다. 장면 장면마다 질곡의 삶이 묻어나는 말들을 시인은 시라는 하나의 대지 위에 새롭게 융합해 낸다. 독자는 이러한 시인의 의도에 따라 각각의 나란한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며 그들의 삶을 반추하게 되는 것이다.
시인은 각각의 주체들의 목소리를 마지막에 하나로 결집시키고 있는데 그 역시 자신의 판단에 따라 하나로 결론짓는 형태가 아니라 “~를 지나” 또는 “~하는 말 흘러”라는 표현을 통해 시간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인정하고 있다. 즉, 각각의 삶을 시간이라는 절대적 선상위에 두고 그에 따른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인정하면서 그들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배치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각각의 모습을 담고 있지만 시의 끝에 이르면 그들은 하나의 주체적인 존재의 삶으로 치환되어 ‘삶’이라는 명제에 대해 생각할 수 있도록 만든다.
시간이라는 명제 앞에 모든 인간은 고독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각각의 유한한 삶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운명에 처해 있다. 죽음은 미래이며 미래는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에게 늘 불안을 안겨준다. 잡을 수도 없고 잡히지도 않는 미래,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우리를 위협하는 것이 바로 시간이다. 시인은 그러한 시간 위에 모든 것을 나란히 늘어놓음으로써 그들의 삶을 순응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타자의 존재에 대해 인정한다는 것이며 나아가 환대하고 있다는 점이다. 레비나스의 말처럼 타자의 존재는 결코 나와 같지 않은 시간을 살고 있으며 결코 잡히지도 않고 잡을 수도 없는 존재이고, 때문에 시인은 그 모든 존재들과 그들의 말을 “반가운 것들”이라고 표현한다. 즉, 모든 타자의 삶과 말은 시가 되고 시인은 그러한 타자들을 있는 그대로 환대하고 있는 것이다.
새벽의 오한은 어깨로 오고 인후와 편도에 농이 오고 눈두덩이가 부어오고 영은 내 목에 마른 손수건을 매어주고 옆에 눕고 다시 일어나 더운물을 가져와 머리맡에 두고 눕고 이상 하게 자신도 목이 아파오는 것 같다고 말하고 아픈 와중에도 그런 것이 어디 있느냐고 웃고 웃다보면 새벽이 가고 오한이 가고 흘린 땀도 날아갔던 것인데 영은 목이 점점 더 잠기는 것 같다고 하고 아아 목소리를 내어보고 이번에는 왼쪽 가슴께까지 따끔거린다고 하고 언제 한번 경주에 다시 가보았으면 좋겠다고 하고 몇해 전의 일을 영에게 묻는 대신 내가 목에 매어져 있던 손수건을 풀어 찬물에 헹구어 영의 이마에 올려두면 다시 아침이 오고 볕이 들 고 그제야 손긑을 맞대고 눈의 힘도 조금 풀고 마음의 핏빛 하나 나란히 내려두고
- 「나란히」 전문
시인에게 있어 타자는 단순히 분리된 주체가 아니다. 그것은 아픈 내게 수건을 매어주고 보살피며 곁에 누웠다가 자신도 옮게 되는 관계, 타자의 보살핌으로 병이 호전된 내가 나로 인해 아픈 상대에게 다시 수건을 올려주고 보살펴주는 그런 나란한 수평의 관계이다. 위아래를 구분하거나 강자와 약자를 구분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나란히 주고받는 그런 관계이다. 그렇다고 내가 해주었으니까 너도 해주어야 한다는 그런 상호적인 관계가 아니라 당신으로 인해 내가 아프고 나로 인해 그가 아플 수 있는, 내가 그를 보살피고 그가 다시 나를 보살피는 그런 관계인 것이다.
시인은 이처럼 자신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나란한 관계에 있는 타자를 기다린다. 마치 오랜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면서까지 시 귀신(詩魔)을 맞이하려는 시인의 자세와도 같다. 시인이 타자를 기다리는 자세는 “입을 조금 벌리고 턱을 길게 밀고 사람을 기다리는 표정”을 짓고 “더 오래여도 좋다는 듯 눈빛도 제법 멀리 두고”(「메밀국수 부분」) 마치 먼 곳에 있는 사람을 애타게 기다리듯, 그렇다고 조급하게 상대를 닦달하지 않는 그런 자세이다. 그렇게 기다리는 타자는 때로 먼 기억을 거쳐 시인을 찾고 시인은 그들에게 빙의해 그들의 말을 그대로 전하는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좀처럼 외출을 하지 않는 아버지가
어느 날 내 집 앞에 와 계셨다
현관에 들어선 아버지는
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눈물부터 흘렸다
왜 우시냐고 물으니
사십년 전 종암동 개천가에서 홀로 살던
할아버지 냄새가 풍겨와 반가워서 그런다고 했다
아버지가 아버지, 하고 울었다
-「종암동」 전문
현재의 주체와 아버지, 그리고 그 아버지의 아버지, 이 시는 이러한 연기(緣起)의 관계를 잘 표현해내고 있다. 좀처럼 외출을 하지 않던 아버지가 문득 내 집 현관에서 풍겨오는 할아버지의 냄새를 맡고 반가움의 눈물을 흘린다는 이 단순한 문장에서 우리는 부재의 존재가 여전히 현재에도 머물러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시적주체는 그 단순한 냄새로부터 그러한 연기적 관계를 짚어내고 있으며 나아가 그것이 자신에게로 여전히 이르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아들을 찾은 아버지가 아들에게서 아버지의 냄새를 확인하는 것, 그 냄새는 어쩌면 홀로 살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전에 가졌던 외로움의 냄새일지 모른다. 그 냄새는 현재의 아들에게도 그대로 전이되어 홀로 살아가고 있는 아들에게로 이어졌을 것이다. 그리움과 반가움이 교차해서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게 되는 마음은 굳이 길게 설명하지 않더라도 독자들은 충분히 이해하게 된다. 그것은 모든 인간에게서 풍겨 나오는 고독의 냄새이자 혼자서라도 꿋꿋이 살아가야만 하는 우리네 삶의 냄새이기 때문이다.
박준의 시집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를 읽는다. 장마가 오려면 아직 멀었고 박준이라는 시인을 직접 만나본 일도 없다. 그러나 현실 속의 시인이 어쩌면 이 시집을 읽는 동안 그려낸 시인과 그리 다르지 않으리라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그건 아마도 관념어를 배제한 시에서 느낀 어떤 진솔함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또한 이번 시집을 성공하게 만든 요인이기도 할 것이다.
“밀어도 열리고/ 당겨도 열리는 문이/ 늘 반갑다”(「삼월의 나무」)고 말하는 시인을 잠시 떠올려 본다. 어떠한 방향에서도 삶의 출구를 만들어주는 것, 시인에게 있어 타자는 그런 존재일지도 모른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레비나스의 말처럼 타자를 향한 환대를 통해 존재의 고독과 죽음을 뛰어넘고자 하는 시인의 의도된 시도일 수 있다.
시집을 덮고 나니 “불을 피우기/ 미안한 저녁이/ 삼월에는 있다”(「삼월의 나무」)는 그 말이 오래 가슴에 남는다. 이 말 역시 시인이 타자를 대하는 자세를 가장 잘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주체의 이기보다 이제 막 생명이 돋아나는 삼월이라는 시간과 자연에 대한 경의, 그에 대해 낮아져야 하는 인간의 자세,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체를 가진 주체로서 생을 영위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인간의 모든 욕망들이 이 시에 쓰인 “미안”하다는 말에 모두 함축돼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