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여행자 외 4편
김군길
고흐의 밤도 그랬을까
압셍트가 불러낸 세상이 발작을 일으켰을 때 그는 어떤 영혼의 빛깔로 화폭을 붙잡으려 했을까 위장을 긁어대는 궁핍의 속 쓰림을 어떤 기대로 달래었을까
숨 쉬는 제 순간들이 어떤 무늬로 빛나야한다고 믿었을까
나는 지구의 시간을 빌린 시간여행자, 운명처럼 가족과 함께 올라탄 여행이 어떤 경쾌한 무늬들로 채워져야 하는지 어떤 음악이 생을 탄주하는 악보를 만나야 하는지
그가 헤매던 노란 해바라기 속에서, 별이 빛나는 밤 사이프러스길 위에서, 까마귀가 날던 밀밭에서, 어떤 전율의 뿌리를 찾아냈을까
그가 만난 압셍트의 밤은 하늘이 내린 축복이었음을 알았을까
어느 시간이 바람보다 가벼워진 날 그대와 마주앉은 찻잔이 좀 더 향기롭기를 시간 내내 유쾌한 얼굴을 가진 여행과 담소하기를
그때 노호怒號하던 슬픔은 느꼈을까 제가 끊임없이 덧칠하던 붓 끝에서 어떤 환상의 빛들이 쏟아지고 있었는지
커피향이 나를 마실 때
김군길
내가 '이런 생'이라는 말을 세 번쯤 더듬을 때 허공이 곤한 아내처럼 고개를 가로로 눕히거나 몇몇 낙엽의 맥없는 귓속말을 삼켜야할 때
나는 커피향의 숲으로 간다
한때 통음痛飮으로 떠나보낸 흔적을 만난다 사람 글썽이는 시절 허기를 만난다 무소유의 체향을 만난다
풀린 나사를 다시 조이듯 도달되지 않는 목적지를 향해 참새 같은 햇살은 까마득한 고개를 넘어보려 안달하지만
지금은 멈출 때. 잠시 숨 쉴 때, 더 이상 네 것이 아닌 것은 놓아 버려야할 때
無가 전부인 갈증의 시간을 적멸寂滅처럼 주저앉혀 커피향의 고향인 오솔길로 가만히 들어설 때
허공인 네 손이 내 손을 꼭 쥐어올 때
아모레*(amore)
김군길
그대 밤새 명주실 봄비로 닦은
목련꽃 트럼펫 소리를 듣고 있나요
너무 외로워 고막마저 녹아버렸거나
너무 서러워 푸른 한탄으로 담을 쌓아버린
모질게 사노라 놓아버렸다고
삼세번 영혼을 더듬어야
비로소 가슴 속 핏물로 번져오는,
겹겹이 저민 눈빛 속
앓고, 닳은 뿌리마다 실핏줄 같은
봄 트럼펫 소리를, 그댄
끅끅, 삼키고 있나요
* 아모레 : 악보에서 사랑을 가지고 부드럽게
연주하라는 말
고독
김군길
내 어깨 어딘가에 알 수 없는 통증의 문이 있다 어머니의 어머니 때부터 물려받은 30년을 같이한 아내도 열어보지 못한 문이다 누구도 어찌할 수 없는 환상통의 문이다
그 곳에는 유리잔 같은 몸으로 천년을 사는 여인이 있다 가끔 철썩이는 갈매기 울음 뒤에 숨어있거나 골 깊은 계곡 휘파람으로 스며있는 침묵은 늘 도도하여 이슬처럼 투명한 여인
365일 부대껴도 열리지 않는 질긴 문 안에서 탄식을 삼키고 연민을 쓰다듬어 지금까지 나를 키워준 여인
내가 가장 비참해지는 순간에야 울음 같은 품을 내미는 여인
아내에게 미안하지만 지금도 동거 중인 아내보다 조강지처인 그녀 무릎에 얼굴을 묻고 내 실패는 자꾸 푸르러진다
옆구리
김군길
꼭두새벽 폭주하던 과음이 그 녀석을 해부하는 동안
반듯한 옆구리가 사라졌다
언제 잃어버렸을까 나의 옆구리
먼 섬 백사장 같던
그 녀석 너덜너덜한 눈물을 거실 소파로 배달하기까지
빈 옆구리끼리 비틀비틀 우주선을 탄다
폭탄주가 해일처럼 지구를 짓밟고 떠난
평면의 아침
간신히 돌아온 옆구리에
불룩한 나이테만 복어처럼
엎드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