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먼의 경고
김 대 현
모든 유물遺物에는 그리움의 흔적이 스며있다. 그것이 고상한 취미를 가진 수집가들의 괴벽에 의해 애지중지 보관된 것이든, 오랫동안 망각되어 거친 풍상을 견디다 우연히 현재에 드러난 것이든 간에 마찬가지다. 애초에 유물의 가치와 무관하게 남겨진 모든 것들은 자신의 자리에서 격리되어 어그러진 시간 축에 홀로 자리한 사물들이기 때문이다.
다른 것들과 함께 제때 사라지지 못한 죄 때문일까? 무심한 시간은 그들을 현세에 남겨놓은 대신 그들이 관계된 모든 맥락을 소거함으로써 그들이 소유했던 기능과 사연들을 철저히 무화시킨다. 그렇게 사물들은 자신이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시공간에서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 채 박제된 흔적으로 남아 가끔 타인의 시선이 멈추는 대상이 된다. 박물관에서 만나는 유물들의 모습은 그래서 더욱 쓸쓸하다.
그 옛날 음양의 조화가 일하던 때 호모 사피엔스라는 직립인간이 설계를 시작했다 가파른 절벽에 그 일대기를 병풍처럼 펼쳐놓았다 고래 늑대 토끼 호랑이 멧돼지 곰… 그가 사냥할 짐승들의 목록, 그물을 던지는 어부와 다산을 기원한 흔적들이 그곳에 살고 있어 위령제를 지내는 제사장의 염원은 아직 유효하다 (…) 절벽은 조금씩 제 몸을 허물어 세상을 기록하고 박물관이 가라앉는 암각화를 건져내어 악수를 한다 물에 잠겨도 찢어지지 않는 암각화의 판권은 아직 절벽이 가지고 있다
― 「고고학적인 악수 - 울산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부분
언젠가 읽었던 박종인 시인의 위 시편이 기억에 남았던 이유는 아마도 이런 까닭일 것이다. 아직 태초의 자연이 그 신성함을 잃지 않던 시절, “사냥할 짐승들의 목록, 그물을 던지는 어부와 다산을 기원”하는 행위는 단순한 예술적 표현이 아닌 실제로 자연이 그들에게 내린 축복이 된다. 성스러운 암벽 위에 그들의 사냥감과 고기 잡는 기술을 묘사하는 것은 효과적인 실전을 위한 매우 적절한 예행연습이 되며, 다산을 기원하는 과장된 생식기의 표현은 사람들의 성욕을 불러일으켜 다산을 촉진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시인에게 있어 ‘반구대 암각화’는 단순한 감상의 대상으로써 고유의 기능을 상실한 박제된 유물이 아니라, 실제로 생산력을 확장해주는 주술적 기능을 간직한 살아있는 생명이 된다. 현재의 시점에서 유물을 읽는 것이 아니라, 유물이 자리하던 당시의 맥락에서 대상을 읽어냄으로써 사물이 가진 의미를 복원하는 것이다.
이러한 독법은 “그곳에 살고 있어 위령제를 지내는 제사장의 염원은 아직 유효하”다는 것을 인정하며, 암각화에 각인된 사물들의 생명력 또한 현재에도 유효하게 한다. 후세의 사람들은 원시의 샤먼이 사물에 부여한 생명력을 탐내 박물관으로 그 생의 약동을 가져가려 하지만 완강한 절벽은 “암각화의 판권”을 결코 넘겨주지 않는다. 고유의 맥락에서 이탈한 사물은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않는 무기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시의 샤먼은 사물들에 영혼을 부여함으로써,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들이 공통된 친밀감을 바탕으로 영적인 교감을 나눌 수 있게 한다. ‘유년기의 인류는 낫에 베어지는 초목들의 절규를 들을 수 있었다’는 프레이저의 증언 또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요컨대 모든 인류가 샤먼이었던 시절, 자연이 인격을 가진다는 것은 단순한 은유가 아닌 명징한 현실이었다는 이야기다.
차츰 어머니의 미각이 변해간다
자식들은 스프레이를 뿌리고 무스를 바르고 매연을 뿜어대며 질주한다 과속에 길들여진 쇳덩이들 고속으로 빌딩이 치솟고 도시는 광란의 열기로 달아오른다 문명이라는 명목으로 흑자를 가장한 적자를 산출하고, 빙산이 녹고 유빙이 늘어난다 숲이 삭제되고 하늘은 구멍이 나고.
면역은 약화되어 혈압은 올라가고 맥박은 느리다 녹색식물 공장을 구해보려 적자를 흑자로 자신의 몸을 이중장부로 약 대신 쓰는 지구, 결국 목숨을 담보삼아 몸을 호루라기처럼 분다
― 「지구의 이중장부」 부분
인용한 시인의 최근 시 또한 이런 맥락에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아주 오래전 은유가 아직 현실과 명확히 구분이 되지 않았을 때 대지는 정말로 어머니였고 인간은 그녀의 자식들이었다. 고대 중국의 ‘여와女媧’로부터 중근동의 ‘티아마트Tiamat’, 그리스의 ‘가이아Gaia’에 이르기까지 지구는 여신의 몸 그 자체였고 그녀는 모든 사물의 탄생을 주관한 대지모신이었다. 때문에 인류는 어머니 대지를 존중하고 그녀를 칭송하는 제사를 지냈으며 대지는 자녀들의 생존을 위해 자신의 몸을 내어주는 것을 아끼지 않았다.
문제는 위대한 계몽의 시대에 있었다. 생산력을 증대시키려는 합리적 이성은 사물을 소통의 대상이 아닌 정복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사물들에게 부여된 영혼을 거두어간다. 매번 수확을 할 때마다 허리가 잘리는 대상으로부터 끔찍한 비명을 들어야 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리 기분 좋은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머니 대지 또한 이러한 비극적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더 많은 생산을 위해 어머니 대지의 고통은 무시되었고 그녀의 언어는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된 것이다. 아니 어쩌면 듣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문명이라는 명목으로 흑자를” 산출하기 위해 “자식들은 스프레이를 뿌리고 무스를 바르고 매연을 뿜어대며 질주”하는 한편, 그녀의 신체 곳곳에 “길들여진 쇳덩이들”이 달리고 “고속으로 빌딩”들이 세워진다. 덕분에 어머니의 신체는 “면역은 약화되어 혈압은 올라가고 맥박은 느리”게 된다. 자식들의 학대에도 불구하고 숭고한 모성은 자신을 괴롭히는 자녀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기 위해 “적자를 흑자로 자신의 몸을 이중장부로” 삼아 그녀가 겪고 있는 고통을 은폐하려 하지만 일그러진 그 신체에서는 마치 “몸을 호루라기”로 부는 것처럼 침묵의 절규가 간헐적으로 새어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현대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아이가 구겨져서 서류봉투에 들어간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끅끅 봉투에서 흘러나오고,
자꾸만 벌어지는 봉투의 출입구를 양복 입은 남자가 유리 테이프로 봉한다
아이는 풍선처럼 부풀려지고 밑줄까지 그어져 친아빠에게 배달된다
(…)
그림일기가 일기로 변할 무렵
서류가 된 아이가 엄마에게 다시 전달되어 읽힌다
두 번째 서류로 양복 입은 남자가 엄마를 감금 폭행하고
남자의 속마음이 편지처럼 낭독된다
(…)
백지 같이 하얘진 아이 편지지에 엄마는 다시 편지를 쓰고
혼란스런 아이는 다시 서류가 되어 날아가고
밑줄을 쳐가며 공부할 수 있게 되면서 아이는,
자주 어른들 사이에서 요점 정리되고
그런 어른들이 아이는 책가방 같고,
― 「재혼 서류」 부분
학대당한 신체에서 신음소리를 흘리며 고유의 영혼을 거세당한 것은 불행한 자연만이 아니다. 효율적인 생산을 위해 모든 것이 대상화된 사회에서 인간의 신체 또한 예외가 아닌 것이다. 단위 시간당 최고의 생산량을 자랑하는 ‘포드주의Fordism’가 제품의 생산과정에 불필요한 여분의 사항들을 모두 소거함으로써 표준화된 노동자의 신체를 제조하는 것처럼 인간의 신체 또한 사회가 원하는 대로 규격화되고 제조된다. 인간 개개인이 가지는 개별적인 특수한 성질이란 마치 수확기에 들려오는 곡식의 비명소리와도 같아 대량생산에 있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용한 시 또한 마찬가지다. 시에서 아이의 신체는 자신의 의사와는 전혀 무관하게 “구겨져서 서류 봉투에 들어간다.” 아이는 자신의 신체에 닥친 끔찍한 위해를 막기 위해 “끅끅”하고 비명과도 같은 울음소리를 토해내지만 사람들은 그 소리를 외면하는 것은 물론, 혹시라도 아이의 신체가 복원되는 것이 두려워 “자꾸만 벌어지는 봉투의 출입구를 양복 입은 남자가 유리 테이프로 봉”한다. 그렇게 구겨진 아이의 신체는 곧 의식이 사라지고 영혼이 거세된 하나의 사물로써 “풍선처럼 부풀려지고 밑줄까지 그어져” 배달된다.
하나의 인격이 영혼이 거세된 사물로 전화하는 과정은 주의 깊게 천천히 반복된다. 아빠에 의해 “서류가 된 아이”는 “엄마에게 다시 전달되어 읽히고”, “백지같이 하얘진” 아이는 엄마에 의해 “다시 서류가 되어” 아빠에게 날아간다. 그렇게 몇 번의 과정을 거친 후에 아이는 지속적으로 “어른들 사이에서 요점 정리”된다. 마침내 아이의 신체는 이런 가학의 과정을 거쳐 사회가 요구하는 이상적이고 순종하는 신체로 전환한다. 이제 아이 스스로 다른 사물들에 대해 “밑줄을 쳐가며 공부할 수 있게”된 것이다. 아이가 노리는 것은 이제 또 다른 타인의 신체가 된다. 희생자가 다시 희생자를 생산해내는 시스템은 가해자와 희생자를 뒤섞음으로써 누구도 자신의 피해에 대해 책임을 추궁하지 못하게 하며 자기 자신을 수호한다. 시대를 지배하는 시스템이란 언제나 이렇게 주도면밀하다.
부채를 제공한 부모를 제하면
과도한 행운은 쉽게 사라진다
한동안의 불행은 부모를 제해도
용케 행운으로 지속된다
자식에게 대물림을 하는 유산은 합법적인 부채의 형식이다
받은 부채를 모두 탕진하는 순간,
또 다른 부채가 달려오고
부채의 형식은 돌변한다
― 「부채의 원칙」 부분
언젠가 아도르노는 “애니미즘은 사물들에 영혼을 불러 넣었지만 산업화는 영혼을 물화시킨다”고 말한바 있다. 오래 전 인간과 자연이 영적으로 교감하던 시절에 양자는 호혜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상대가 소통의 대상으로 자리할 수 있다면 서로에게 부채를 전가하는 행위를 삼가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대가 영혼 없는 사물이라면 이제 사정은 달라진다. 계몽의 시대에서 부채를 독촉할 수 없는 자에게 부채를 지우지 않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합리적인 생각이 아니다.
시인의 우려와 두려움 또한 이 지점에 있을 것이다. 인류가 사물이 지르는 비명 소리를 듣지 않게 된 시절부터 인류의 역사는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왔다. 탈신화적인 인식체계에서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은 고유의 영혼을 거세당하고 소통의 언어를 상실한다. 인류는 이러한 타자의 고통을 자산으로 삼아 자신의 성장을 위한 발판을 만든다. 다시 말해 변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부채의 형식’을 통해 “과도한 행운”을 누려온 것이다.
하지만 자연이 정한 ‘부채의 원칙’은 인류의 생각과 달리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아무리 유예해도 변제의 시간은 기어코 돌아오고야 마는 것이다. 물려“받은 부채를 모두 탕진하는 순간 또 다른 부채가 달려오고 부채의 형식은 돌변한다”
거센 바람의 권법에 모가지를 내밀거나 잘리기도 하지
공중이 어지럽고 들판에 흙바람이 부는 것은
모두 계절의 전조증상이야
한판 뒤집어엎겠다고 그가 오는 게지
그 많은 꽃잎을 일시에 담아가는 것도
꽃을 모르는 음지의 나라에 거저 주려는 것이야
― 「홍길동을 낳은 봄」 부분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인용한 시인의 시는 이제 이렇게 읽힐 수 있다. 공경과 소통의 대상에서 한낱 정복의 대상으로 전락한 자들의 귀환이 그 내용이다. “공중이 어지럽고 들판에 흙바람이 부는 것은” 어떤 “전조증상”에 해당한다. 그들은 영원히 부채를 변제하지 않음으로써 이제껏 자신을 착취하던 자들의 “모가지를” 자르면서 온다. 프로이트의 말처럼 억압된 것은 반드시 회귀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꽃이 가지는 의미를 다시 알려주기 위해 “그 많은 꽃잎을 일시에 담아가며” “한판 뒤집어엎겠다고” 오는 심판자를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다. 사물의 영혼과 교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짐으로써 이제는 어느새 희귀한 존재가 되어버린 현대의 샤먼이 발하는 마지막 경고다.
김대현 문학평론가 ―2012년 『실천문학』 평론 신인상 수상 ―『전태일통신』, 『리얼리스트』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