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계간비평

임현준의 계간비평: 좋은 시 아니면 안 좋은 시

작성자애지사랑|작성시간25.11.10|조회수140 목록 댓글 0

좋은 시 아니면 안 좋은 시

임현준

 

이대흠, 나의 숲, 󰡔애지󰡕, 2025년 가을 호.

이산하, 계급론-악마는 꼬리부터 잡아먹는다, 󰡔창비󰡕, 2025년 가을 호.

나희덕, 우드와이드웹, 󰡔대산문화󰡕, 2025년 가을 호.

홍정미, 외딴집의 내력, 󰡔애지󰡕, 2025년 가을 호.

심보선, 침묵 예찬, 󰡔문학동네󰡕, 2025년 가을 호.

 

 

시의 윤리

 

‘말(言)’을 어지럽히는 것 중 하나가 경직된 언어 이해이다. 무분별한 신조어나 줄임말, 정제되지 않은 외래어, 심리적 반영으로서 된소리 거센소리의 난발 등은 ‘말’에 있어서 유행성 감기나 신경질적인 거부 반응 같은 알레르기 따위의 것이다. 사회적 관계 시스템의 면역성이 약해질 때 ‘말’은 고열에 시달리며 목이 붓고 가래 섞인 기침을 뱉어낸다. ‘말’의 피부는 부풀어 오르고 가렵고 뒤집어진다. 그렇지만 처방된 약을 먹고 앓아누워 있다가 얼마간의 시간을 견디다 보면 ‘말’은 기운을 되찾는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속된 유행어 때문에 한 사회의 근간이 무너졌다는 소식은 들어본 적 없다. 다만, ‘말’이 거느리는 언어의 한 단면만 보고 한쪽 이념에만 충성하다가 동족상잔을 겪었다거나 홀로코스트를 목격했다거나 핵폭탄을 맞았다는 역사의 암 투병은 흔하게 들려온다.

책을 한 권만 읽은 사람의 가장 무서운 점은 세상이 한가지로 이루어졌다는 맹신에 있다. 세계는 높이와 깊이, 넓이와 무게, 색과 냄새, 구체와 추상, 의미와 무의미 같은 것들이 뒤섞여 이루어진 총체다. 우주도 자연도 종교도 예술도 과학도 사람도 한가지로 요약될 수 없는 다각적인 가치들이다. 특히 문학에 있어서 ‘말’을 어지럽히는 경직된 언어 이해는 감동도 미적 흥취도 없는 정신적 도착 상태의 폭력을 행사하곤 했다.

‘윤리’라는 단어도 그렇다. ‘마땅히 행하거나 지켜야 할 도리’라는 개념의 인륜적 가치인 윤리는 ‘사람’에게 복무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사람’의 범위이다. 책을 한 권만 읽은 이들에게, 언어의 한쪽만 맹신하는 치들에게 ‘사람’은 저편 아니면 이편이라는 피아식별의 이분법적 경계일 뿐이다. 여기에 더해 부사 ‘마땅히’를 앞세워 ‘틀림없이 반드시 필연코 결단코’ ‘나’와 같은 편만 ‘사람’인 게 된다. 그들에게는 제삼자의 시선도 없고 한 걸음 물러난 사유도 없고 여러 각도의 가설도 없다. 종교적 선악의 개념에서도, 철학의 합리적 논리에서도, 사회적 실천의 의무에서도, 이들로부터 약간 빗겨선 문학에도 어김없이 그들은 언어의 한쪽 윤리만 들이댄다. 이때의 윤리는 의심하지 말아야 하고 어기면 처벌받아야 할 포장지로 세련되게 포장된 강제다.

특히, 시에 있어서 윤리는 두 가지 측면에서 점점 경색되어 간다. 하나는 시인에 대해서, 또 하나의 극단에는 시 자체에 대해서 그렇다. 먼저, 윤리는 시인의 삶과 연관되기 일쑤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우리 역사와 정치적 환경에서 자유롭지 못한 ‘시인이라는 위상’ 때문에 벌어진다. 해방과 이념 대결이라는 역사에서 당당하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시적 미학을 지닌 시의 창작자라 해도 욕지거리의 대상이 된다. 또 요즘에는 성 인식 같은 잣대가 시인의 됨됨이를 재단하는 강력한 척도로 적용되기도 한다. 이에 대한 이분법적 윤리 태도는 긍이든 부든 일리가 있다. ‘시인’도 ‘사람’인지라 피아식별로서의 ‘사람’ 구별은 사회의 효율성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일관되고 통일되는 윤리는 사회를 통합하는 강력한 기재이다.

또 다른 측면은 ‘시 자체’에 대한 윤리인데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요점이다. 당연하게도 ‘시에 대한 윤리’는 ‘사람됨’의 범위를 다른 측면에서, 다른 층위에서, 다른 차원에서 다루어야 한다. 시에 있어서 ‘마땅히 행하거나 지켜야 할 도리’로서 ‘사람’의 범주는 ‘공감되느냐, 감흥 있느냐, 미학적이냐’ 같은 ‘동화(同化)’의 차원에서 고민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선이냐 악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좋으냐 안 좋으냐’의 미적 성취와 보편적 취향의 기준이 모호하나마 시의 윤리라고 감히 말할 수 있겠다. 현대서정시는 독자들의 집단정체성을 반영하는데, 선악의 집단정체성이 아니라 미학적인 집단정체성을 반영한다. 때문에 시 본연의 내외적인 요소, 언어와 리듬과 사유와 이미지와 비유와 이야기성 같은 것들이 시적 윤리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군말을 덧붙이자면, ‘낡은 서정’을 타파해서 ‘새로운 형식과 내용을 갈망한다’는 현대서정시의 강박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으로서의 새것’만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이가 들면 감성이 무뎌진다’는 유언비어가 실체도 없이 유령처럼 떠도는 것도 시의 윤리에서 볼 때 통탄할 노릇이다. 서정시의 새로움은 ‘시 본연의 내외적인 요소가 절묘하게 들어맞음’에 있다. 그러니까 사물의 철저한 관찰과 경험 없이, 내면의 구체적 풍경화 없이, 이미지의 투명한 형상 없이, 냉담에 가까운 철석 같은 감정 제어 없이 쓴다고 해서 새로운 서정시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서정시의 본질을 깨뜨리고 짓밟고 외면하는 것이 ‘새로움의 시도’가 될 수는 없다. 시의 윤리는 ‘마땅히 틀림없이 반드시 필연코 결단코’ 관조와 내면의 전경화와 이미지의 형상화와 정제된 감정이 절묘하게 드러나는 시언어에 달려있다.

 

 

살아 움직이는 운율의 시언어

 

‘말’은 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오랜 시간을 일련의 습관과 일정한 양식으로 주고받은 ‘말소리’의 총체다. ‘말소리’는 ‘사람’이 내는 소리다. 동의한 적 없어도 암묵적인 약속에 의해 지탱되는 ‘말’은 사람 사이의 의식체계를 효율적이고 합리적으로 연결한다. 시언어는 그러한 ‘말소리’의 본질 위에서 퍼 올리는 고차원적인 미학 놀이의 하나이다. 그렇지만 ‘고차원’이라고 해서 특별하게 고상하거나 범접 못 할 성스러운 언어를 따로 떼어놓은 것은 아니다. 시의 언어를 통한 미적 놀이는 일상생활에서 쓰이는 말을 대상으로 한다. 시의 주된 소비층은 일상생활에 속한 불특정 다수들이기 때문이다. 생활인들의 말은 입말, 그러니까 발성기관인 입과 혀에서 조음되어 나오는 소리의 파동이다. 그렇다 시언어는 말소리를 근간으로 한다. 말소리가 먼저 있고 문자가 나중에 생겨났다.

 

봄볕 아래에 암시롱 함시롱 좋음시롱 웃음시롱 그람시롱 미움시롱 옴시롱 봄시롱 들이 꼬불쳐 박혀 있습니다 쪼그려 앉아 있습니다 살째기 피어납니다

 

꼿꼿하니 꼬부장하니 짜울라져서 외로 꼬여서 희번덕하니 앵생하니

통통한 것들 물 짠 것들 반반한 것들 해린 것들 멀쑥한 것들

 

꼼시랑꼼시랑 구시렁구시렁 쪼물딱쪼물딱 헤벌쭉헤벌쭉

속아지 없이 속창아리도 없이 송알창시도 없이 속창새기도 없이 속알딱지도 없이 옥알머리도 없이 속대가리도 없이

 

맹물 같은 봄이 지나가는 내내 나의 숲은 아무렇습니다

이대흠, 나의 숲, 󰡔애지󰡕, 2025년 가을 호.

 

이대흠 시인의 「나의 숲」은 “맹물 같은” 시이다. 사유랄 것도 이야기랄 것도 없는 면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하지만 「나의 숲」은 말소리만으로 “봄을 지나가는” 모국어의 “숲”을 “아무렇”지도 않게 형상화해 낸다. “암시롱 함시롱 좋음시롱 웃음시롱 그람시롱 미움시롱 옴시롱 봄시롱 들이”이 일궈낸 각운의 라임은 시 초반부터 시적 분위기와 태도와 사유와 기법을 유쾌하게 드러내놓고 활주한다. 어미 ‘-으면서’의 전라도 남쪽 방언 ‘-음시롱’은 문법적 표지의 기능을 넘어, ‘-시롱’에서 약동하고 생동하는 모국어의 음악성을 안은 채 “봄볕 아래에” “쪼그려 앉아” “살째기 피어”난다. 1연이 “살째기 피어”나는 동사의 향연이었다면, 모습을 드러낸 “봄”의 존재를 형상화하는 2연은 형용사의 각축장이다. 3연에서는 “꼼시랑꼼시랑 구시렁구시렁”에서 ‘ㄱ, ㅅ’의 반복이, “쪼물닥쪼물딱 헤벌쭉헤벌쭉”에서 ‘ㅉ, ㄹ’의 연쇄가 우리말의 흥겨운 운을 형성한다. 이어서 ‘속생각’을 낮잡아 이르는 전라도 방언들이 두운 ‘ㅅ’으로 쏟아지면서, “속창아리도 없”는 주체가 “봄”에 “살째기 피어”난 것들인지 그것들을 바라보는 화자의 내적 풍경인지 혹은 둘 다가 동화되어 휩쓸려 가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봄”의 다각적인 정감이 감각적으로 드러난다. 여기에 동원된 부사어들은 명사도 종결 서술어도 없이 그 무더기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통사를 이루어 내고 있다는 점에서 문장의 주요성분을 자주 생략하는 모국어의 특색을 잘 잡아냈다. 그리고 마지막 연 “나의 숲은 아무렇습니다”라는 비문은 ‘아무렇지 않다’나 ‘아무러하다’나 또는 ‘아물다’로 소리 내어 말하게 만든다. 읽는 이로 하여금 자동 발화하게 만드는 마법을 부린다고나 할까. “맹물 같은 봄”은 사실 그 자체만으로 희망과 즐거움과 생명력과 웅대함을 거느리고 있다는 것을 시인은 ‘말소리’만으로도 입증해 보이고 있다.

일반적으로 말소리는 말하는 이의 입과 혀를 위시한 음성 기관이 움직여서 일어나는 소리를 뜻한다. 말은 정보와 감정 전달의 일차원적인 업무에 치중하지만, 시에 있어서 말은 주관과 상황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는 것으로서 인간의 의식에 복무한다. 따라서 시의 말소리는 사회적 약속이라는 규제보다도 개개인의 의식을 잘 드러내는지의 적확성이 중요하다. 이대흠의 「나의 숲」은 시인 개인의 ‘봄 인식’을 정확하게 드러내고 있는 좋은 시이다. 또한 시에서의 ‘말소리’는 소리의 파동이 입에서 귀로 가는 것까지를 포함하는 의미이다. 때문에 말하는 행위와 듣는 행위 둘 다를 ‘시의 말소리’ 개념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시의 리듬, 시의 운율, 시의 음악성이 정당화된다. 시에 외재하거나 내재하는 운율은 말하는 자와 듣는 자의 공명에서 비롯되는 가치들이기 때문이다. 「나의 숲」의 ‘말소리’들은 방언임에도 불구하고 봄의 보편적 정서를 지닌 채 시인과 독자 사이를 활보하며 생생한 공명을 울리게 하는 역시나 좋은 시이다.

외재율과 내재율에 대한 본보기 시들은 이것 말고도 많겠지만, 「나의 숲」은 시가 어떻게 언어를 다뤄야 하는지, 모국어의 말소리에는 어떤 힘이 있는지, 시언어가 어떻게 시적 사유를 투명하게 거느려야 하는지를 대놓고 보여주고 있다. 시의 윤리적인 측면에서, 언어의 운율을 잃고 모국어의 익숙함을 잃고 말소리의 투명함을 잃은 시는 나쁘다. 새로움을 추구한다는 도전 의식에서나 ‘낯설게 하기’ 같은 인식의 지연을 의도하기 위해서는 모호하고 어색한 시어를 부러 선택할 수는 있겠다. 여기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과연 시가 ‘진실하지 못한 언어’, ‘말소리의 생동이 아닌 언어’, ‘추상과 개념으로 뼈다귀만 남은 언어’, ‘잘난척하는 언어’, ‘교만한 언어’, ‘장난만 치는 언어’, ‘신상이라는 이름의 껍데기만 쓴 언어’, ‘내면을 풍경화시키지 않고 내면에 부유하는 찌꺼기 같은 언어’, ‘내면의 내면의 내면 같은 귀신 씻나락 까먹는 언어’인가 아닌가를 따져봐야 한다는 점이다. 시가 언어로 된 예술이라 해서 언어를 “아무렇”게나 휘두르면 시를 사랑하는 독자가 나가떨어지거나 시를 쓰는 시인이 주화입마에 빠질 수 있다. 시의 윤리에 있어서 시언어는 적어도 살아 움직이는 말소리의 운율을 지향해야 한다.

 

 

말랑말랑한 사유

 

사유(思惟)는 어떤 대상에 대해 개념·구성·판단·추리 따위의 방식으로 두루 생각하는 이성적인 정신 작용이다. 이러한 사전적 의미는 ‘생각하고 생각하다’나 ‘생각을 벌여 놓다’라는 추상적인 형상을 모호한 대로 그릴 수 있게 한다. 다만, 시에서의 사유는 일반적인 경우보다 경직된 채로 이해되는 것 같다. 시적 사유는 서정시에서의 형상적 미학과 대치되는 개념으로 이해되거나, 달콤한 음식 속에 몰래 넣어둔 쓴 약같이 숨겨져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오래된 규율처럼 전파되어 왔다. 이는 시의 사유를 교훈이나 교조성의 영역으로 착각하는 데서 오는 오해일 것이다. 설상 시에서 사유가 날것으로 드러난다고 해서 미학적이지 않을 이유가 없다. 더 물고 늘어지자면, 지식과 지성의 평균적인 수준이 높아진 현대사회에서는 사유 자체를 미학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시에 있어서 사유 자체의 드러남이 문제가 아니라, 사유를 시적인 언어로 승화하지 못한 미숙아들이 사고유발자이다.

 

이슬 맺힌 벼가 자라는 새벽 논둑길을 산책하다가

‘17,000년 전 인류 최초의 벼가 청주 소로리에서

발견됐다는 옛날 신문기사가 불쑥 떠올랐다.

구석기시대 끝 무렵인데, 얼마 전에는 또 영국에서

17,000년 전의 안 썩은 달걀이 발견됐다고 한다.

우리 조상들이 농사지으며 물에 밥 말아 먹을 때

그들은 양계장을 차려 바비큐치킨을 먹은 모양이다.

허긴 120,000년 전 독일의 네안데르탈인들은

사골곰탕까지 우려먹었다는데, 과연 파도 썰어 넣었을까.

 

어릴 때 밥상 앞에서 할머니는 귀가 따갑도록

밥 남기지 마라. 밥 남기면 천벌을 받는다고 강조했고

그래도 남기면 할머니나 어머니가 몰래 먹어치웠다.

늘상 배곯던 시절이니 있을 때 많이 먹어둘 일이었다.

그런데 밥을 남기는 게 그토록 천벌을 받는 죄였을까.

밥이 남으면 쌀이 남고 쌀이 남으면 곳간이 차고

곳간이 차면 땅이 넓어지고 땅이 넓어지면 머슴이 생기고

그러다 흉년이라도 들면 마을은 마른 논바닥처럼 갈라져

부자는 또 꿩 먹고 알 먹고 둥지 털어 군불까지 때고……

 

그렇게 빈부격차로 계급이 생기니 밥 남기지 말라는 뜻일까.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게 쌀 한톨이라는 것도

실은 생명의 무게가 아니라 계급의 무게 탓이 아닐까.

악마가 머리가 아니라 꼬리부터 잡아먹는다는 것도

실은 위기 때마다 꼬리가 계급의 방향을 틀어버린 탓이 아닐까.

혹여 남아도는 쌀이 계급의 기원이라면 이 땅이 곧

탐욕과 분열의 발상지이자 모든 악의 축이었을지도 모른다.

 

오늘도 짐승들이 출몰했을 이 구석기시대의 논둑길을 걷는다.

돌도끼가 맹수를 찍고 독화살이 사슴을 향해 날아간다.

우리는 밥심으로 살아왔고 밥심으로 무너지고 있다.

벼는 익을수록 낫처럼 변해간다.

꼬리를 자른 악마가 성서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다.

이산하, 계급론-악마는 꼬리부터 잡아먹는다, 󰡔창비󰡕, 2025년 가을 호.

 

농업혁명이 인류 삶을 거대한 변혁으로 이끌었다는 역사적 사건은 지식이지 사실이 아니다.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에서 지적한 대로 인간이 쌀을 길들이고 품종을 발전시키는 와중에 정착도 공동체 안의 위계도 발명한 것이 아니다. 쌀이 인간을 길들인 것이다. 쌀이 인간을 한곳에 몰아넣고 계절마다 씨를 뿌리고 물을 대고 추수를 할 수 있게 기획 유도했다. 거기에 대한 대가로 쌀은 종자를 남겨두고 식량을 제공한다. 이런 생각은 논리성을 확보한 채로 문명의 이면을 들추어 살피는 새로운 인식의 판을 마련한다. “쌀이 계급의 기원이라면 이 땅이 곧/ 탐욕과 분열의 발상지이자 모든 악의 축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그동안의 역사적 사건을 변증법적 긍정과 희망으로 덧칠해 온 상위계층의 음모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폭로한다. 불경스럽기까지 한 사유는 우리가 문명의 주인이자 지구의 군림자라고 생각 없이 살아온 역사관 전체를 뒤집어엎는다.

이산하 시인의 「계급론-악마는 꼬리부터 잡아먹는다」는 시인의 사유 자체가 하나의 시적인 발상으로 형상화된 시이다. “새벽 논둑길을 산책하다가” 떠오른 “17,000년 전 인류 최초의 벼”는 “17,000년 전의 ‘안 썩은 달걀’”로 이어지고 “120,000년 전” “네안데르탈인들”의 “사골곰탕”까지 마인드맵을 그어 나간다. 이러한 정보 차원의 사유 흐름은 시적 위트의 문장 “과연 파도 썰어 넣었을까”를 거쳐 말랑말랑하고 소소한 상상으로 자연스레 넘어간다. 단순한 농담이나 장난스럽게 비꼬인 심사의 문장이 아니라는 말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 재치 넘치는 사유는 “밥 남기면 천벌을 받는다”는 민간 신앙과 “할머니나 어머니” 시대 “늘상 배곯던 시절”의 기억과 조우한다. 이는 개인의 기억과 역사라는 거시론적 기록이 동등한 선상에서 다뤄질 수 있다는 정당성을 함의한다.

나아가 “밥을 남기는 게 그토록 천벌을 받는 죄였을까”에 대한 전이된 사유는 질문의 형태이면서 이미 불경스러운 시각의 사유로 상상적 전환점을 제공한다. 이는 상부와 하부 계층 간의 생산과 소유에 대한 계급적 이념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시적 인식에 있어서 충격적인 것이다. “쌀”과 ‘대지’라는 숭고한 모성과 생명성에 대한 불경 자체가 우리의 인식을 크게 흔들어 놓는 까닭이다. 「계급론」은 “쌀 한톨”의 무게가 “생명의 무게”라는 인식 자체가 오히려 “탐욕과 분열”을 야기시킨 것은 아닐까 하는 반동적 사유를 전개해 나가기까지 한다. 여기까지만 사유의 꼬리를 물고 이 시가 나가떨어졌다면, 이 시는 그저 그런 잊혀질 소품 같은 작품이 되었을 것이다. 다행히 “새벽 논둑길을 산책”하는 현재의 시인은 “짐승들이 출몰했을 이 구석기시대의 논둑길을 걷는” 데까지 나아간다. 그리하여 사유의 꼬리를 또 다른 사유가 “잡아먹”는 것으로 해서 우리의 귀와 눈과 생각을 뒤덮고 있던 역사라는 희망찬 해석의 몸체를 없애버린다. 거기에는 “밥심으로 살아왔고 밥심으로 무너지고 있”는 실체적 역사와 “벼는 익을수록 낫처럼 변해간다”는 시적 사유가 날카롭게 벼려져 있음을 우리는 목도하게 된다.

‘이산하의 사유’는 역사라는 ‘검증된 사유 체계’에 대해 거꾸로 혹은 반항적으로 직시하는 ‘시적 사유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거기에 “파”와 “할머니”의 잔소리와 “밥심”과 “논둑길”이라는 생활의 기억을 첨가하여 사유가 생생한 상상력을 펼칠 수 있도록 장치해 놓는다. 그리고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꼬리를 자른 악마가 성서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다”는 상징적 언사를 통해 거대한 권력과 규율이라는 현실의 불변성까지 치고받을 사유를 예비한다. 󰡔성경󰡕의 마지막 파트인 「요한계시록」의 끝부분에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하는 으름장이 기록되어 있다.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그렇다니 우리는 그 협박에 무서움과 공포로 순종해야 할 운명이다. 그렇지만 이 지점에서 무서워할 일이 아니라, 시인의 또 다른 사유가 시 바깥에서 전개되고 있음에 우리는 안도할 일이다.

딴에는, 시에서 사유는 하나의 구조적인 역할을 한다. 사유는 시언어의 철골이고 시의 계획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구조만으로 철골만으로 계획만으로 서정의 꽃을 피울 수는 없다. 여기에는 사유가 상상력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또 다른 여러 사유적 장치가 필요하다. 생활에 친근한 사유, 생활에서 비롯된 사유, 생활이 역사와 철학과 종교를 품는 사유, 생활어에 담긴 시적 순간에 대한 사유, 모든 사건의 구심점에는 생활하는 사람이 등장하는 사유 등이 그 사유적 장치이다. 그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사유가 모나거나 튀거나 혼자 날뛰지 않게 흠씬 두드려 패서 생활하는 사람이 먹기 좋게 손질해 놓는 메타-사유이다. 사유가 말랑말랑해질 때까지 방망이로 다듬이질을 하는 감찰자로서의 사유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경직되고 고압적인 사유가 활개 치는 잘난척하는 시들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마련이다. 여기서의 형장은 ‘독자들의 외면’이라는 단두대를 말한다. 시의 윤리에서 사유가 날것의 사유로 끝나면 나쁜 것이다. 사유를 없애고 숨기라는 뜻이 아니다. 시적 언어로 잘 꿰매서 봉제선이 드러나지 않게 하라는 것이다.

 

 

객관적 상상력

 

시에서는 사유가 상상력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상상력이 사유로 전이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사유와 상상력이 서로 꼬리를 물고 끝없이 이어지는 확장에 있다. 거기에는 나름대로 시적 논리가 내포되어 있음이 틀림없다. 서정시라고 해서 서정의 풍부만이 전부가 아니다. 서정과 서정의 관계성은 보편적 논리 수준에서 이어져야 한다. 그래야 시를 읽는 이들이 시인의 생각과 이미지를 따라갈 수 있다. 그러니 시적 함축을 논리적 단절로 이해하면 안 될 일이다. 비유의 거리가 멀면 멀수록 좋다는 것은 논리의 의외성을 말하는 것이지, 논리의 희박성을 말하는 게 아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버섯이라 부르지만

실은 유령에 가까워

 

버섯은

균사가 포자를 퍼뜨리기 위해

잠시 지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일 뿐

곰팡이의 생식기관일 뿐

 

균은 어디든 출몰하고

온갖 악조건 속에서도 살아남지

 

버섯 모양의 거대한 핵 구름이 휩쓸고 간 폐허에

가장 먼저 나타난 것도 버섯이었으니까

 

또는 버섯을 먹은 여자의 위벽에 붙어 자라는 버섯을 상상해 봐

 

자궁 속의 태아처럼

수분을 빨아들이며 무럭무럭 자라는 버섯을

 

버섯에게 도무지 노화라는 게 없어

아침의 버섯은 보름과 초하루를 알지 못하지*

 

며칠 만에 시드는 버섯도 있고

몇 시간 만에 잉크처럼 녹아내리는 버섯도 있어

 

미국 오리건주 국립공원에는

팔천 년을 살아온 잣뽕나무버섯도 있다지

개체라기보다는 아주 넓은 버섯 군락이긴 하지만

곰팡이의 유구한 역사를 보여주기엔 충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끝없이 뻗어가는 곰팡이의 세계

 

만국의 균들이여,

우드와이드웹에 접속하라!

 

식물과 곰팡이와 박테리아는

균사로 된 그물망을 통해 서로 얽혀 있지

수분과 영양분을 실어 나르고

빛과 장애물과 독성물질을 알아차리고

멀리서 오는 바람의 파동을 전하고

유령으로 떠도는 자의 슬픔과 두려움을 흘려보내면서

 

우리의 발밑에서 일어나는 균의 사건들,

우드와이드웹은 월드와이드웹보다 더 빠르게 전파되지

 

썩은 나무 한 토막, 또는

한 줌의 흙만으로도 시작되는 그 세계에서

*朝菌不知晦朔 蟪蛄不知春秋, 소요유(逍遙遊), 󰡔장자(莊子)󰡕

나희덕, 우드와이드웹, 󰡔대산문화󰡕, 2025년 가을 호.

 

영국의 비평가 콜리지에 의하면 상상력을 고전주의적 상상력과 낭만주의적 상상력으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 고전주의적인 입장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자연 모방으로서의 예술론을 내세운 이래 상상력을 기억의 모상(模像)으로 취급하는 것에 동의한다. 영국의 시인 스티븐 스펜서는 “내가 모르는 것을 상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상상력이라는 것은 우리가 이전에 경험한 것을 기억하여 그것을 어느 다른 환경에 작용하는 능력”이라고 말한다. 낭만주의 상상력 이론은 낭만적 태도답게 인상과 지각들의 구성을 통해 세계를 창조하는 신비스러운 어떤 힘으로서 상상력을 파악했다. 앙리 베르그송은 “비사실적, 부재하는 사물들에 대한 사고의 일종으로 기억도 지각도 아닌 구체적 재현을 사람들은 상상력이라 부른다”고 말하며 상상력의 초월적인 힘을 옹호한다. 여기서 콜리지는 상상력을 모방과 구별한다. 상상력은 단순한 재현의 묘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상상력과 환상을 구별한다. “환상은 시공간의 질서에서 벗어난 기억의 한 모형에 불과”하다면서 “상상력은 기억들을 융합하는 창조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고 정리한다. 스펜서의 말에서 얻을 수 있는 상상력의 중요한 함의는 “내가 모르는 것을 상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고, 베르그송의 말에서 뽑아낼 수 있는 말은 “부재하는 사물들에 대한 구체적 재현”이 상상력이라는 것이다. 콜리지의 종합에서는 “단순한 본뜨기가 아닌 기억의 창조적 융합이 상상력”이라는 의미를 얻어낼 수 있다. 모호하게나마 섞어서 갈무리하자면, 상상력은 ‘내가 겪어서 기억하는 것들을 재료로 해서 구체적이면서도 새로운 것을 생각하는 것’ 정도 되겠다.

나희덕 시인의 「우드와이드웹」은 ‘시적 관찰’이 곧 ‘내가 겪어서 기억하는 것들’을 의미하는 시이다. 시적 관찰은 곧 관조이다. 관조라는 함의가 여러 방면의 철학적이며 관념적 태도, 그리고 여러 미학적 세계관이 통과하는 자리에 놓여 있는 것이라 이 글에서는 사전적 의미에 가까운 ‘관찰’만 단순하게 따지고자 한다.

나희덕 시인의 시들에서 보이는 특징은 따스하지만 집요한 관찰에서 비롯되는 경이로운 상상력에 있다. 이는 시인의 관찰이 여러 형태의 체험으로 시도되면서 내면을 구성하는 기억과 사유에 의해 시로 형상화되는 힘이 상상력에서 나온다는 의미이다. “버섯 모양의 거대한 핵 구름이 휩쓸고 간 폐허에/ 가장 먼저 나타난 것도 버섯”이라는 지식의 탐색은 “그것을 버섯이라 부르지만/ 실은 유령에” 가깝다는 시적 사유를 경유한다. 그리고 “온갖 악조건 속에서도 살아남”는 “버섯”이 “여자의 위벽에 붙어 자라는 버섯을 상상”하는 직간접적인 체험을 소환하면서 “곰팡이의 유구한 역사”와 “끝없이 뻗어가는 곰팡이의 세계”를 상상한다. 시 곳곳에는 “곰팡이의 생식기관”인 “버섯”을 관찰하는 지식들이 산재해 있다. “포자를 퍼뜨리기 위해/ 잠시 지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생태적인 관찰, “버섯 모양의 거대한 핵 구름이 휩쓸고 간 폐허에/ 가장 먼저 나타난 것도 버섯”이라는 파괴적 인간성을 상징하는 관찰, “아침에 버섯은 보름과 초하루를 알지 못”한다는 장자의 관찰, “팔천 년을 살아온 잣뽕나무버섯”이라는 무한한 시간성의 관찰, “만국의 균들이여,/ 우드와이드웹에 접속하라!”는 투쟁으로서의 관찰, “우드와이드웹은 월드와이드웹보다 더 빠르게 전파”된다는 사회학적인 관찰, “한 줌의 흙만으로도 시작되는” 문학적인 관찰들은 시인의 상상력을 객관적인 여러 시각의 총합으로 보이게 한다.

시의 윤리적 측면에서 상상력이란 「소요유」의 가치처럼 상대주의적인 포용성에 기반을 둔다. 모든 사물은 상대적이어서 옳고 그름이나 크고 작음의 이분법적 기준을 뛰어넘는다. 시의 상상력은 이러한 상대주의적 포용성을 위하여 여러 시각의 관찰을 시도한다. 그 관찰의 정도와 횟수와 가짓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상상력은 단단해지고 객관적인 힘은 강해진다. 시에서 ‘주관’이라는 말은 시인의 내면 상태를 말하는 것이고, ‘객관’은 시인과 독자가 공감대를 형성하는 지점을 말한다. 이성적인 것은 ‘사전적 의미의 객관’이고, 감동 감화를 제공하는 것은 ‘시적 객관’이다.

시적 논리는 상상력과 맞대응되는 현실과 관련된다. “우드와이드웹”의 상상력은 “우리의 발밑에서 일어나는 균의 사건들”이라는 현실과 맞대응한다. 그리고 “균의 사건들”을 시인은 다각적 관찰들로 직조해 거미줄 같은 상상을 펼쳐놓는다. 그 많은 관찰을 제공하는 것은 결국 현실 또는 실제적인 일상과 생활이다. 다시 말하자면, 시 윤리에서 상상력은 허구와 망상과 환상이 아닌 ‘상상’을 말한다. 시인이 사물을 바라볼 때 거꾸로, 옆으로, 앞으로, 뒤로, 위로, 아래로 보라는 건 ‘사물의 본질’과 ‘사물과 나의 관계성’과 ‘사물과 세계와의 관계성’을 먼저 따져보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것은 실질적인 현실 위에서 행해져야 한다. 거기서부터 상상력은 발아된다.

 

 

이야기가 자유롭게 놀 수 있는 시적 공간

 

좋은 시는 시를 읽는 이로 하여금 자신의 감정과 사유와 상상력을 풀어놓게 하는 시적 공간을 마련한다. 그것은 연과 행 사이의 듬성듬성한 여백일 수도 있고, 말소리와 말소리 사이의 휴지일 수도 있고, 함축된 시언어의 이면일 수도 있다. 제일 쉽고 간단하고 구체적인 방법은 시에 이야기를 얹는 것이다. 그런데 이 쉽고 구체적이고 간단한 방법을 터득하기 위해서는 불굴의 노력과 난해한 관념과 복잡한 서사 과정을 설계해야만 한다.

 

배나무 옆, 목 매달아 죽은 처녀 이야기가 전해 오는 집에서 유년을 보냈다 어머니는 배나무 아래에 가면 소름이 돋는다며 가지 않았다 처녀의 깊은 한은 마당에 흰 꽃잎으로 흩날렸다 나는 떨어져 내리는 그녀의 슬픔을 맞으며 내내 편안했다

그 외따른 집 강가에 있는 중학교에 다니며 영어 단어를 외웠다 구불구불한 학교 길에 영어단어들이 굴러다녔다 저녁이면 단어들이 저벅저벅 배나무 아래를 배회했다 보름달이 뜨는 밤, 배나무 가지가 창호 문에 어려들면 영어단어를 더 크게 외웠다

노발리스를 읽고 또 읽었다 많은 시의 텍스트가 배나무에 주렁주렁 열렸다 말없이 열리는 푸른 꽃의 세계, 은유는 낡은 벽 속에 갇혀 나오지 못했다 그 텍스트 속에 숨은 비밀은 말이 되지 못해 배꽃으로 흩날렸다 언어와 함께 배나무를 헤집고 도망치는 바람을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내 어린 날들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으므로 배

나무에 갇힌 채 다시는 나오지 못했다

홍정미, 외딴집의 내력, 󰡔애지󰡕, 2025년 가을 호.

 

홍정미 시인의 「외딴집의 내력」은 기억과 정서로 주조해 낸 환상성의 시이다. 이때의 ‘정서’라는 것도 시인 내면에 오래도록 살아남아 귀신처럼 배회하는 기억이 저절로 감정을 품게 되는 비현실적인 느낌 중의 하나이다. “배나무 옆, 목 매달아 죽은 처녀 이야기”로 시작하는 시에는 세부적인 사건도 없고, 특정한 사회상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배경이나 캐릭터도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배나무”와 “목 매달아 죽은 처녀”라는 사물과 파편적인 기억만으로 풍부한 서사를 내재하고 있다. 「외딴집의 내력」에 풍부하게 내재된 서사는 우리네 보편적인 정서를 자극하는 흔한 사물과 흔한 사연을 담보로 한다. “어머니는 배나무 아래에 가면 소름이 돋”고 “처녀의 깊은 한은 마당에 흰 꽃잎으로 흩”날리는 것도 이 시를 읽는 이로 하여금 각자가 직간접적으로 체험했던 이야기를 상기하게 만든다. 우리는 동질의 사연을 떠올리면서 “슬픔”을 공감하고, 같은 서정 위에 서 있는 것을 확인하면서 “내내 편안”할 수 있다. 시인이 펼쳐놓은 “배나무 옆,”(쉼표가 중요하다)에 독자들이 마음 놓고 놀 수 있는 시적 공간이 열린 것이다.

“그 외따른 집”에서 “유년을 보”낸 화자는 청소년기가 되어도 “배나무”의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유년”의 기억이 살아남아 스스로 “슬픔”의 감정이 되었듯 “영어 단어들”도 “배나무 아래를 배회”하는 또 다른 감정으로 살아남는다. 이때의 “영어 단어”의 감정은 “목 매달은 처녀 이야기”가 뿜는 감정과는 다른 형태로 변이된다. “단어”들이 “굴러”다니다 뭉쳐진 “노발리스”의 “시 텍스트”가 그것이다. 독일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자이자 시인인 노발리스는 스물여덟의 나이에 결핵으로 요절한 인물이다. 노발리스의 완결되지 않은 대표작 󰡔푸른 꽃󰡕은 그의 삶과 문학이 미완성인 채로 완성되지 못한 사랑을 그려내고 있다. 사랑하는 여인에 대한 그리움을 현실과 꿈과 환상을 넘나들며 하나의 교향곡으로 주조해 냈다. ‘여인’은 실제 노발리스가 사랑했던 어린 약혼녀 소피이다. 소피는 약혼한 지 2년 후에 결핵으로 죽는데, 이 병명만으로도 그들의 비극적인 서사가 완성된다. 노발리스에게 소피는 하나의 죽음이 아니라 죽음 후에 오는 슬픔과 영원한 결합을 갈구하는 “푸른 꽃”의 신앙이었다.

“푸른 꽃의 세계”에 걸어 들어간 「외딴집의 내력」의 화자에게 “배나무 옆,”의 시적 공간은 “목 매달은 처녀 이야기”와 ‘소피의 죽음’이 동화되는 곳이 된다. 이어 그 시적 공간에서 “내 어린 날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으므로 배/ 나무에 갇힌 채 다시는 나오지 못”하는 ‘나’를 발견한다. 딴에는, “노발리스”의 󰡔푸른 꽃󰡕이 비극적인 운명과 시적인 사명 위에서 사랑을 노래하다 미완으로 끝났다면, 거기에 투영된 ‘나’도 “은유의 낡은 벽 속에 갇혀 나오지 못”하는 미완의 시적 운명에 처하게 될 것이라는 예감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이 시가 유년에서부터 성년에 이르는 화자의 내면에 도사리는 정서 하나만으로 독자들 각각의 사연을 자극하고 있다는 점이다. “노발리스” 이야기는 사실 이 시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다. 노발리스에 대해 몰라도 되는 시, 모르면 더 흥미로운 서사를 상상하게 되는 시, 어쩌다 알고 보면 비극적 운명과 사랑의 열정에 몸부림 치는 시이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 「외딴집의 내력」은 시가 어떻게 이야기를 거느리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작품이다.

시에 반드시 서사나 이야기가 얹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순간의 이미지와 찰나의 정서만으로도 좋은 시를 창조해 낼 수 있다. 하지만 시에 서사적 요소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시 속에 내재된 이야기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짧은 시라도 각각의 시에는 반드시 이야기가 피어나는 시적 공간이 있다. 시의 서사성은 사건의 전개와 인물의 배치 같은 소설적인 개념이 아니다. 하나의 관념이나 순간적인 이미지 포착만으로 이미 그 안에 거대한 서사성이 낚여 있다. 그리고 내포된 채 드러나지 않은 서사 위에서 독자는 각자만의 사연과 감정과 상상력을 풀어놓고 논다. 시의 윤리에서 살펴볼 때, 독자의 놀 공간이 없는 시는 나쁘다. 이야기가 또 다른 이야기를 불러들일 시적 공간을 제공하지 않는 시, 자기 이야기만 특별하고 자기 사연만 뼈 아파하는 하소연을 늘어놓는 귀 아픈 시, 내면의 병리학적 증세가 러시아워처럼 막혀 이야기가 잠식되는 시, 숨 쉴만한 여유를 주지 않고 주저리주저리 시어로 찍어내는 시 같은 것들이 그렇다는 말이다. 이야기가 구체적인가 아닌가의 문제가 아니라, 공감할 수 있고 동화될 수 있는 시적 공간이 마련되어 있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다시, 시의 윤리 : 침묵의 태도

 

시의 윤리적 차원에서 다룰 수 있는 것은 시언어의 본질, 사유와 상상력, 관찰에 기댄 객관적 상상력, 서정성이 담보된 이야기성 말고도 많다. 선명하고 투명한 이미지, 역설과 아이러니, 형식과 구조, 비유와 상징 등 이 모든 것을 기술적으로 정제하는 시적 기법들은 아직 말도 꺼내지 못했다. 그만큼 서정시의 범위와 깊이가 무진장하다고나 할까. 그러니 시가 시다울 수 있는 윤리로서, 선과 악이라는 피아식별로서의 것이 아니라, 좋은 시인지 덜 좋은 시인지 안 좋은 시인지를 구분하는 것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어젯밤 꿈속에

아는 단어들을 죄다 토했다

 

꿈은 얼마나 깊고 깊던지

어릴 적 토한 비명들

여태 바닥에 닿지 않았다

 

오늘 아침 내게

남겨진 것은 침묵뿐

 

나는 그것을 어금니로

꼭꼬 씹어 삼키고 있다

오늘밤 꿈속에 다시 다 토하려고

 

내일이면 어렴풋이나마 알겠지

침묵이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

 

나의 자아가

각설탕처럼 부스러질 수 있다면 좋겠다

 

하루하루 조금씩

조용히 달콤하게

 

내 영혼을 아무리 세게 던져도

아무도 다치지 않게

 

침묵은 얼마나 경이로운가

 

말없이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사람은 황홀에

혹은 환멸에 빠져든다

 

창밖 길거리엔

뾰족하고 날카로운 모서리들이 모여

동그랗고 부드러운 척하고 있다

 

고양이 우는 소리와

개 짖는 소리만 진실하다

 

옛 뱃사람들은

항구라는 점이 보일 때

비로소 인간이 되었다고 한다

 

바다에서 그들은 서로에게 얼마나 잔인했던 것일까

 

침묵하는 동안

뒤돌아보면서

인간에게서 멀어질 수 있는 점이나 찾아야겠다

그러는 동안

나의 자아는 각설탕처럼 부스러지리라

 

하루하루 조금씩

조용히 달콤하게

 

내 영혼을 아무리 세게 던져도

아무도 다치지 않으리라

심보선, 침묵 예찬, 󰡔문학동네󰡕, 2025년 가을 호.

 

심보선 시인의 「침묵 예찬」은 ‘메타-시’의 면모를 보여주는 시이다. 시인 스스로가 시적 화자로 투영된 이 시는 ‘나’의 내면을 시적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아는 단어들을 죄다 토”하는 반성적 자각이 “내 영혼을 아무리 세게 던져도/ 아무도 다치지 않”길 바라는 시적 의지로 보인다는 점에서 ‘시에 대한 시’로 읽을 수 있다.

이 시에서 주체이면서 객체인 “나의 자아”와 “내 영혼”은 곧 “아는 단어들”의 다른 이름이다. ‘나’를 지탱하고 형성하는 “단어들”은 ‘나’를 “동그랗고 부드러운 척”하게 포장하지만, 결국에는 그 내면에서 “뾰족하고 날카로운 모서리”가 되어 “옛 뱃사람들”처럼 “잔인”성을 드러내는 것들이다. 이러한 시적 인식과 자각은 “꿈속에/ 아는 단어들을 죄다 토”하고 “그것을 어금니로/ 꼭꼭 씹어 삼키”게 한다. 결국 “오늘밤 꿈속에 다시 다 토하”겠지만, 그러나 거기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있다. “아는 단어들”이 텅 빈 자리에 “침묵”이 들어앉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시인이 보여준 시적 상상력도 눈을 비비고 다시 볼 것이지만, 이후 “침묵이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를 관찰하고 사유하는 데서는 타고난 시인의 됨됨이를 가늠하게 된다. 모름지기 시인이란 고통이라는 정서를 대상으로 시를 쓰는 이들이지만, 더 좋은 시인은 고통을 직시하는 자아까지도 시적으로 대상화하는 자들일 것이다. “침묵은 얼마나 경이로운 것인가”라는 직접적 언사는 ‘시를 시로 쓰는 시’의 관념적인 관점을 명확하고 친절하게 드러내 주는 대목이다. 일견 “아무도 다치지 않게” 하려는 시인의 배려로 읽으면 되겠다.

시적 침묵이라 해서 입을 다물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시인이 주조해 낸 말소리와 사유와 상상력과 이야기들을 “죄다 토”해 놓고 “침묵” 하나를 새로이 얻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 “침묵”은 그 자체로서 시적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한 뜻에서 “고양이 우는 소리와/ 개 짖는 소리만 진실하다”는 시인의 고백은 적확하다. “침묵이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를 단순히 소리 없음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서 멀어질 수 있는 점”으로서의 “고양이 우는 소리와/ 개 짖는 소리”의 절실함과 진정성에서 찾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루하루 조금씩/ 조용히 달콤하게” 부서지는 “나의 자아가/ 각설탕처럼 부스러질 수 있다면 좋겠다”는 반성적인 고백이 “침묵”의 본질에 맞닿아 있음을 시인은 넌지시 털어놓는다.

시의 윤리는 시인의 윤리와 일맥상통한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여라.”라고 화두를 던진 것은 중국의 고승 임제였다. 이 화두를 시인의 윤리에 갖다 붙이면, ‘시를 완성하면 시를 버리고, 시인의 내면이 완성되면 ‘나’를 버리고, 시언어를 얻었다면 그 시언어를 토해내 버려라’가 될 수 있을까. 거기에는 시언어로 가득한 “침묵”이 “조용히 달콤하게” 있을 듯도 하다.

‘말’을 어지럽히는 것 중 하나가 경직된 언어 이해에 있다고 서두에 밝혀놓았다. 경각심을 지닌 채로 ‘시의 윤리’라는 위험하고 불안정한 개념을 풀어놓은 것은 사실 시적 편애와 편향과 편식의 결과이다. 시에서 ‘마땅히 행하거나 지켜야 할 도리’가 있기는 있는 것인가. ‘마땅히 틀림없이 반드시 기필코 결단코’라는 부사어는 시가 가장 두려워하고 멀리해야 할 것들이다. 그러니 시는 객관적인 것도 과학적인 것도 논리적인 것도 아니다. 진리에 대한 복종도 아니고 진실에 대한 절대 충성도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꼭 당신의 취향에 맞는 것도 아니다. 나에게 좋은 음식이 당신에게는 목구멍을 붓게 하는 질식의 독약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나는 시에 있어서 보편적 윤리가 있다고 밀어붙인다. 시언어로서 말소리는 소중히 다뤄야 하고, 상상력은 현실에서 비롯되어야 하고, 사유는 단단한 구조물이 되어 상상력을 지탱해야 하고, 독자가 시에서 놀 수 있는 함축된 이야기 공간이 있어야 하고, 시인은 침묵이라는 내적 소란을 통해 늘 반성해야 한다는 것이 시의 윤리라고 믿는다. 그러한 시적인 윤리에 따라 좋은 시가 있고 그렇지 않은 시만 있을 뿐이니까 말이다.

 


*이번 겨울호를 더 받을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간직도 해야 하고, 여기저기 자랑도 하고 싶습니다.

10부 정도 더 받고 싶습니다.

책값은 <애지> 뒷장에 기재된 계좌로 넣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임현준

 

약력

2018년 󰡔애지󰡕 등단. 󰡔애지󰡕 편집위원.

단국대학교 문예창작과 출강 중.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