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초에게
안현심
붓다를 만나려고 인도로 갔다지요?
고행하고, 깨닫고, 설법한 행적 위에 두 손을 모았나요?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모래폭풍 불어올 때마다 형형하게 일어서던 만년설 덮인 산맥, 빙벽은 영원의 법(法)을 말해주던가요? 서역 오만 리, 별자리 이고 걷는 발자국마다 올망졸망 피어나던 구도의 꽃, 그 꽃잎을 찾아 파미르고원 흙바람 속을 헤매고 있어요
혜초여, 부처의 눈을 저랑 같이 보아요
--안현심 시집 {혜초에게}에서
인도여행기인 {왕오천축국}의 저자인 혜초 스님은 신라 성덕여왕 때의 고승으로 서기 787년 중국의 오대산 건원보리사에서 입적을 했다고 한다. 일찍이 중국의 광저우에서 인도 승려 금강지에게 밀교를 배우고, 금강지의 권유로 인도 불교 유적을을 순례하고, 카슈미르, 아프가니스탄, 중앙 아시아 일대까지 답사한 후 금강지의 제자 불공으로부터 강의를 들었고, 그의 6대 제자 가운데 두 번째가 되었다고 한다.
부처란 누구인가? 부처란 불교의 창시자이며, 이 세상에서의 모든 번뇌를 극복하고 득도를 한 전 인류의 스승이라고 할 수가 있다. 불교는 자연친화적인 종교이며, 이 세상의 모든 동식물들에게 불성佛性이 있다고 가르친다. 이 세상에서의 모든 인간 차별과 살생을 금하고 만악의 근원인 탐욕을 억제하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가 있는 것이다. ‘마음이 곧 부처이다’라는 가르침과 ‘살부살조殺佛殺祖의 정신’은 영원불멸의 진리라고 할 수가 있다.
안현심 시인의 [혜초에게]는 ‘즉심시불卽心是佛의 시학’이며, 그것은 ‘마음이 곧 부처이다’라는 말로 설명할 수가 있는 것이다. “붓다를 만나려고 인도로” 간 것이 곧 부처가 된 것이고, “고행하고, 깨닫고, 설법한 행적 위에” “구도의 꽃”이 피어난 것이다.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만년설 덮인 산맥”에서, “서역 오만 리, 별자리 이고 걷는 발자국마다 올망졸망 피어나던 구도의 꽃”처럼, 부처가 되고자 하는 마음 속에서 날이면 날마다 새로운 부처가 태어나는 것이다.
부처가 다만 과거의 존재이고 고정불변의 존재라면 그 부처는 이미 죽어버린 존재에 지나지 않지만, 그 부처의 고행과 삶의 지혜를 새롭게 배우고 실천하면 그 부처는 나와 또는, 우리 모두와 함께 살아 있는 부처가 되는 것이다. ‘마음이 곧 부처이다’라는 진리는 따라서 ‘살부살조의 정신’으로 이어지게 된다. 아버지를 만나면 아버지를 죽이고 조사(부처)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지 않으면 안 된다.
안현심 시인의 [혜초에게]는 신라의 고승인 혜초에 대한 송가인 동시에 자기 자신을 ‘즉심시불의 위치’로 끌어올리려는 구도자의 시라고 할 수가 있다. 만악의 근원인 탐욕을 다 버린다는 것은 매우 어렵고 힘든 일이지만, 자기 자신의 모든 욕망을 다 비우며 옛 스승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고행 자체가 그것의 실천이라고 할 수가 있다. 다시 말해서, 탐욕을 버린다는 것은 함부로 이익을 취하거나 살생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며, 가화만사성을 이룩하고 그 사회적 실천을 통하여 그가 살고 있는 사회와 국가의 번영과 행복에 기여하겠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나의 것은 단 하나도 없고, 그 모든 것들을 다 돌려주고 떠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부처는 최고급의 진리(지혜)를 소유한 자이며, 전 인류의 스승이자 아버지이고, 최후의 심판관이라고 할 수가 있다. 부처는 그 옛날이나 지금이나 수도 없이 많으며, 이 부처의 화신들이 마르크스, 니체, 호머, 셰익스피어, 보들레르, 릴케, 모차르트, 베토벤 등이라고 할 수가 있다.
우리 시인들은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시를 쓰는가? 요컨대 우리 시인들은 날이면 날마다 언어를 갈고 닦으며 삶의 지혜를 창출해내고, 참다운 ‘시인—부처’가 되기 위해 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