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신전의 기둥
박방희
기둥, 받칠 게 없으면 쓰러져야 한다.
주저앉을 수도 누울 수도 없는, 선 채로 바스러지는 이 형벌…….
길어졌다 짧아졌다 하는 제 그림자를 보며
밤마다 눕는 꿈으로 야위는
그리스 신전의 기둥들
너무나 오래 서 있어 하얗게 바래져
무엇을 떠받들었던지 기억조차 희미한
한 때 기둥이었다는 명백한 사실이 그를 꼿꼿이 서 있게 할 뿐!
----박방희 시집, {나무 다비}(근간)에서
아버지는 그리스 신전의 기둥과도 같고, 아내와 아들과 딸은 아버지가 떠받쳐야 할 성상聖像이며, 무거운 짐이라고 할 수가 있다. 아내는 ‘부부 일심동체’라는 불문률을 파기하고 예수중독증 환자가 되어 아프리카로 떠나갔고, 아들은 연간 1억 이상의 유학비가 있어야 하는 돈 먹는 하마가 되었고, 10여년 만에 대학을 졸업한 딸 아이는 결혼과 취업은커녕, 또다시 대학원 공부를 준비하고 있다.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더 이상 그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을 수도 없고, 그 무거운 짐을 팽개쳐 버릴 수도 없는 아버지. 아니, 아내와 아들과 딸 아이가 제 몫을 다 파먹고 둥지를 떠나갔어도 “주저앉을 수도 누울 수도 없는, 선 채로 바스러지는 이 형벌”만을 감당해내야 하는 아버지----. 오늘날 아버지의 권위는 다 무너졌는데, 왜냐하면 의무만 있지 권리는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올해로 66세로 새벽 4시 이전에 일어나 책을 읽거나 글을 쓰고, 아침 6시가 되면 밥을 먹고 러시아워를 피해 출근을 한다. 사무실에서 오늘 할 일들을 점검하여 지시하고, 책 주문이 들어오는 대로 발송작업을 마친다.
그 다음, 출판원고와 교정지 등을 챙겨들고 집으로 와 점심을 먹고, 잠시 눈을 붙였다가 곧바로 도서관으로 직행한다. 출판원고와 교정지 등을 검토하고, 때때로 저자섭외와 사무실의 잡다한 업무를 처리하며, 그리고 시간이 나면 명시감상을 쓰거나 주로 그동안 공부해 왔던 철학서적을 읽는다.
사업가도 아니고, 철학예술가도 아닌, 이 ‘일인오역의 생활’은 그토록 좋아하던 공부를 포기하고, 아버지로서의 사명감과 의무감 때문에 10여년 전 출판사를 차렸을 때부터 시작한 생활이었다. 아버지는 글을 쓸 때에도 하늘을 감동시키는 것이 목표였고, 계간시전문지 {애지}의 창간인이자 주간으로서도, 도서출판 지혜의 대표로서도 하늘을 감동시키는 것이 목표였다.
아버지의 낙천주의 사상과 이론의 정립은 대한민국 오천 년의 역사상 최고의 경사였지만, 아직도 학문 이전의 문맹과 문화 이전의 야만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한국인들은 오히려, 거꾸로 아버지를 이단시 하고 아버지를 철두철미 영원한 금기의 대상으로 처벌했다. 아버지는 지난 30년 동안 이름없는 존재였지만, 그러나 아버지는 이름없는 존재이면서도 수많은 사람들의 성원에 힘을 입어 작지만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고 할 수가 있다.
오후 5시이면 도서관을 나와 헬스장으로 운동을 하러가고, 6시 30분쯤이면 집으로 돌아와 잠시 TV를 보다가 그대로 쓰러져 잠을 잔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집, 혼자 밥 먹고, 혼자 술 먹으며, 혼자 잠 잔다. “너무나 오래 서 있어 하얗게 바래져” 가는 아버지,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아버지, 그리스 신전의 기둥들이 그 옛날의 그리스의 영광을 떠받들며 수많은 관광객들을 불러모아 황금알을 낳듯이, 황금을 낳고 또 황금을 낳아야만 하는 아버지----.
더 이상 떠받칠 것이 없어도 함부로 쓰러져서는 안 되는 아버지, 이 아버지가 쓰러지면 황금알을 낳는 자본주의 역사가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오오, 아버지의 삶은 전면적인 서어커스단의 어릿광대의 삶과도 같다.
호머,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아리스토파네스 등은 그리스 문학의 거장들이고,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헤라클레이토스, 에피쿠로스, 파르메니데스, 데모크리토스 등은 그리스 철학의 거장들이다. 데모스테네스, 페리클레스, 알렉산더, 리쿠르코스 등은 그리스 정치의 거장들이고, 제우스, 포세이돈, 하데스, 아폴로, 팔라스 아테네,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 헤라클레스, 테세우스 등은 그리스 신화의 영웅들(신들)이다. 고대 그리스는 서양문명의 발상지였고, 오늘날에도 그리스 문화는 정치, 경제, 사회, 역사, 철학, 문학, 신학, 종교 등에서도 그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그러나 오늘날의 그리스인들은 그들의 선조들의 고귀하고 위대한 업적에 반하여, 자기 역사와 전통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한 삼류 민족이 되었고, 그 결과, 그들의 수많은 신전들은 이슬람교도와 기독교도들에게 철저하게 파괴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파르테논 신전, 제우스 신전, 아폴로 신전, 헤라 신전 등, 그 어느 것도 파괴되지 않은 것이 없으며, 그 텅 빈 폐허와 그 신전의 기둥들만이 고대 그리스의 영광과 번영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가 아버지일 때는 “선 채로 바스러지는 형벌”, 즉,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된다. 아버지는 그 모든 역사와 전통의 가치를 파괴하고 새로운 역사와 전통을 확립하기 위하여 신성모독자라는 형벌을 받지 않으면 안 되고, 철학자로서, 예술가로서의 최고의 자부심은 커녕, 그 어떠한 인정도 받지 못하며 최하천민의 생활을 하면서 그 모든 것을 다 잃게 된다. 요컨대 모든 지혜는 신성모독의 댓가이며, 이 신성모독자는 지혜를 얻고 전체 인류의 행복을 창출해내기 위하여 영원한 형벌을 감내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아버지, 아버지, 모든 고귀하고 위대한 아버지는 이처럼 바스라질대로 바스라진 아버지이자, 사후에 존경과 찬양을 받게 되는 아버지이다.
아버지의 길을 쓰디 쓴 고통과 형벌 뿐이고, 아버지의 영광과 번영의 길을 결코 다가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