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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리뷰시

나태주의 발문: 빙의된 목소리― 장인무 시집 『물들다』에 부쳐

작성자애지사랑|작성시간19.11.13|조회수288 목록 댓글 0

빙의된 목소리

― 장인무 시집 『물들다』에 부쳐

나태주(시인)

 

1 장인무 시인

  장인무이란 이름은 조금은 생소한 이름이다. 주인공이 여성인데 여성의 이름 치고서는 남성적인 울림이 있어 조금은 의외의 느낌을 주는 이름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사람을 만나보면 그가 지극히 사랑스런 여성이고 살가운 내면을 지닌 여성이란 것을 이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장인무란 여성은 공주에 사는 아낙네 시인이다. 언제부턴가 공주의 문화판을 드나들기 시작하면서 나하고도 얼굴을 익힌 처지다. 내가 문화원장으로 있을 때도 시창작반에 들어와 시를 공부했고 문화원을 떠나 풀꽃문학관에서 시창작반을 운영할 때도 여전히 자리를 지킨 사람이다. 초지일관 한결같은 사람이다.

  처음 볼 때 그녀는 그저 평범한 아낙네였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그 자신의 존재감을 나타내는 그런 스타일이었다. 실은 이런 사람 가운데 실력가가 많은 법이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말이 있다. 그렇다. 꽉 찬 수레는 수레 안에 들어있는 내용물을 보듬고 다니기가 힘들어 소리도 못 내는 법이다. 끙끙거리는 그 고통을 참아내는데 그것이 나중에는 축복이 되고 보석이 되는 것이다.  

  그녀는 문학 수업 또한 소리소문없이 하고 있었다. 늦은 학업이지만 대학 공부도 마치고 시 공부도 눈에 띄지 않게 소리 나지 않게 하고 있었다. 언뜻 볼 때 그녀의 시는 그저 조그맣고 낮은 시처럼 보인다. 한 편씩 볼 때 그렇다. 그런데 모아 놓고 보니 그렇지 않다. 졸렬함 뒤에 비범함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이번 시집 원고를 읽으면서 숨겨진 그녀의 퍼즐이 맞춰지는 걸 볼 수 있었다.  

 

  바로 이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신비이고 즐거움이고 놀라움이다. 시가 이래야 한다. 아니, 시집이 이래야 한다. 사실 나부터 이번 시집을 읽고 놀라운 느낌이 없지 않았다. 실상 시는 내밀한 정서의 정치한 언어 표현이다. 차라리 그것은 사어(私語)에 의탁한 고백이고 중얼거림 내지는 하소연이다. 그래서 산문의 문장과 시의 문장이 다른 것이다.

  약간은 비문도 허락된다. 비약과 생략은 다반사다. 그러한 허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인간의 감정을 곧이곧대로 전달하기만 되는 것이다. 시는 그렇게 인간의 감정을 전달하는 일에 열중해야 하고 탁월해야 한다. 그런 시를 만날 때 시를 읽는 보람과 즐거움이 따르게 마련이다.

 

2 장인무의 짧은 시

 시는 우선은 짧고 간결한 문장형식을 취한다. 그것이 정석이다. 아니다. 될수록 그래야 한다. 무엇보다도 감정을 길어 올려 바닥에 붓듯이 해야 한다. 이성적 방법이 아니다. 격정의 방법, 파토스다.

  인간의 의외로 이성적 존재보다는 감정적 존재다. 감정에 의해서 보다 많은 인간의 일들이 좌우되고 결정된다. 우리가 행불행을 말하는 것도 감정에 의한 것이기 십상이다. 그렇게 감정은 중요한 것이다. 이러한 감정을 다루는 인간 행위 내지는 예술로서 시보다 더 시급하고 강력한 것은 없다.

 

 심지어는 이 감정이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게도 만든다. 실로 무서운 일이다. 그래서 나는 시가 사람을 살린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우선은 자기 자신―시인―을 살리고 타인―독자―을 살린다. 시는 다만 단순한 문장이다. 하지만 그 단순한 문장이 흔들리는 사람 마음을 잡아주면 그 사람을 살리는 것이다.

 

멀리서

거침없이 달려오는 하얀 그림자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나요

내 눈빛 너무 뜨거웠나요

철교만 건너오면

손잡을 수 있었는데

그대로

강물에 뛰어드셨네요

여보세요!

황홀한 손짓 그만하세요

그 눈빛 너무 깊어

하마터면 몸을 던질 뻔했잖아요

― 「금강에 빠진」 전문 

 

  장인무 시인의 짧은 시 가운데 한 편이다. 형식은 짧고 문장은 단순한데 읽어보면 그 내용을 속속들이 알 것 같지는 않다. 조금은 아리송하다. 그런 중에도 무언가는 느껴진다. 이것이 바로 시이다. 이것이 바로 시 읽기이다.

 

 시의 내용을 시시콜콜 파헤칠 일은 아니다. 다만 우리는 시의 문장에서 오는 감정만을 다소곳이 느끼기만 하면 된다. 그렇다면 이 시에서는 무엇이 느껴지는가? 불안이나 슬픔이나 절망과 같은 감정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것은 우선 밝음의 정서다. 어디라 없이 깊이 빠져든 자의 유현(幽玄)이고 나아가 기쁨이고 광휘(光輝)이고 시인이 말한 대로 생명의 극치인 ‘황홀’ 그 자체이다. 이러한 정서는 쉽게 맛보는 정서가 아니다. 깊이 빠져든 자에게만이 허락되는 정서이다. 장인무 시인이 이것 알았다니 놀라운 일이다.

  기쁘면서도 슬픈 경지. 살고 싶으면서도 죽어버리고 싶은 그 어떤 구렁텅이. 그것은 사실 인간이 자연이고 자연이 인간인 그 어떤 사잇길에서나 겨우 만나는 정성의 세계다. 이심전심의 세계요 너와 내가 하나가 된 우아일체(宇我一體)의 된 세상이다. 시의 제목도 그럴듯하다. 많이 나갔다.

 

꼬리 맞춘

빨간 고추잠자리 한 쌍

자동차 와이퍼에 앉아

파르르 떨림

미세한 전율

 

그랬어

여민 가슴 마디마디 파동

 

킬리만자로의 눈빛

활화산의 불꽃

피할 수 없는 거대한

태풍이었어

― 「가을」 전문

 

  또 한 편의 작은 작품의 예시다. 어느 사이 시인은 한시(漢詩)의 전경후정(前景後情)의 기법을 익히고 있다. 시의 기법이란 이론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열심히 쓰다 보면 저절로 익혀지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야 오래 간다.

  시인은 지금 자동차 안에 있다. 그러면서 자동차 밖 와이퍼에 앉은 ‘꼬리 맞춘’ 두 마리의 잠자리에 눈을 맞추고 있다. 그 두 가지의 ‘맞춤’이 ‘파르르 떨림’과 ‘미세한 전율’을 불러온다. 이런 표현과 곡절은 단순하지만 단순하지만은 않은 것이고 가상한 일이기까지 하다.

  그다음은 우리가 짐작하는 대로 시인의 소감 내지는 평가, 후정(後情)의 단계다. 그런데 그 부분에 와서도 비범한 면을 보인다. 지극히 작은 것에서 지극히 큰 것을 유추해내는 솜씨가 그것이다. 일단은 잠자리 두 마리의 꼬리 맞춤, 그 미세한 전율이다. 그것이 발전하여 ‘킬리만자로의 눈빛’이 되고 ‘활화산의 불꽃’ 이 되고 ‘태풍’이 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되 시인만이 찾아낼 수 있는 아름다운 상상이며 한 기쁨의 세상이다.

 

말갛게 웃던 푸른 하늘

감나무 이파리 나풀거리던

 

돌담 가 외할머니댁

 

얘야 오늘은

감나무 아래 가지 마라

치맛자락 감물 들라

 

첫 달거리

달무리 닮은 뽀얀 속살

붉게 붉게 번지던

 

감나무 아래 볼그레

타오르던 첫사랑

수줍어 눈망울 적시던

 

홍시 빛 추억    

― 「물들다」 전문

 

  시집 제목이 되어준 작품이다. 이 시에는 두 개의 자아가 존재한다. 성인이 된 지금의 나와 우린 시절의 나이다. 몇 살쯤 되었을까? ‘첫 달거리/ 달무리 닮은 뽀얀 속살/ 붉게 붉게 번지던’ 나이라니까 열 두서너 살쯤 되었을까. 어쨌든 초경의 나이 어린 소년가 주인공이다.

  그렇구나. 배경은 외할머니댁. ‘말갛게 웃던 푸른 하늘’ 이 펼쳐진 날. 외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얘야 오늘은/ 감나무 아래 가지 마라/ 치맛자락 감물 들라’. 이 음성이야말로 영원의 고향 안에서 들려오는 가장 평화롭고 자애롭고 아름다운 목소리다. 원점의 소리, 그것이다.

 

  인간의 삶은 하루하루가 힘겹고 타박거리는 발걸음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마음의 고향이 있고 그 고향에서 들려오는 음성이 있기에 하루하루의 노역을 그런대로 감내해내고 또 앞으로 나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이러한 미세한 목소리는 결코 무용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또 하나 삶의 에너지가 되어주는 것이다.  

 

3 장인무의 긴 시

  모름지기 시는 짧은 언어 형식이고 서정을 주된 내용으로 삼는다. 그러나 때로 시는 서사를 택할 때가 있고 이야기를 품을 때가 있다. 짧고 간결한 언어 형식으로는 도저히 해결되지 않는 내용이나 주제가 주어졌을 경우다. 하지만 그런 때에도 역시 그것은 시의 품격과 시의 특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면

엄마는 쪽마루 모서리에 앉아 막걸리 한 잔 마시며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에 젓가락 장단을 맞췄다. 그런 날에는 영락없이 내 머리채는 엄마 손에 잡혀 마당 구석 검둥이 집까지 끌려가곤 했다.

빗소리에 묻혀 통곡하는 엄마 품에 악착같이 기어들어 ‘이제 그만’을 외쳤고, 그럴 때마다 가슴을 파고드는 어린 딸을 안고 엄마는 비처럼 울었다.

 

대청 한가운데 시퍼런 칼날 위 오색 빛 치맛자락 펄럭이고, 요란한 징소리 기왓장을 흔들었다. 구경거리로 몰려든 동네 사람들은 하나같이 무표정했다.  

무명 홑이불에 칭칭 휘감긴 큰언니의 핏기 없던 얼굴은 그날 이후 보지 못했다.  

 

어린 동생이 엄마 등에 업혀 다녔다. 조카인 것을 안 것은 초등학교 입학식 때였다. 나는 장 씨, 동생은 정 씨.

 

종일 내리는 비는

차라리 폭포였음 했다.

빠른 속도로 휩쓸려가고 싶었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엄마 등은 여동생 차지였고

엄마 가슴은 남동생 차지였다.

 

늘 혼자였다.

그렇게 사는 건 줄 알았다.

 

사람들은 큰언니의 부름이라 했다. 강원도 홍천계곡, 동생은 스물셋의 순결을 바다로 향했다. 빛바랜 하얀 원피스 입은 채.

― 「나는 장 씨, 동생은 정 씨」 전문

 

  얼핏 한 편의 짧은 소설을 읽는 느낌이다. 역시 유년 체험의 한 장면. 음울한 분위기. 무속적이기까지 하다. 한 가정의 비극적 사연이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그렇지만 그 내용을 우리가 하나씩 뜯어볼 필요는 없다. 그냥 느끼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이 작품이 서사를 다루고 있지만 시의 품격을 잃지 않은 것은 시인 자신의 통제된 자아와 이성적 능력 탓이다. 시를 쓸 때 시인은 감성적 능력과 이성적 능력을 동시에 유념해야 한다. 시의 질료는 감정이다. 그렇지만 그것을 담아내는 도구는 언어이다. 감정을 다룰 때는 지극히 조심스럽게 그 원형이 상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언어를 동원할 때는 매우 날렵함과 냉철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장인무 시인은 그 두 가지 능력을 골고루 안배하여 이렇게 유장한 작품을 이루어내고 있다. 그만큼 아팠을 내면의 옹이다. 그 옹이를 이만큼이라도 아름답게 승화해서 풀어낸 그 시적인 솜씨가 가상하다.

 

가쁜 숨 들이쉬고 내뱉다가

메마른 아랫도리에 지리는 물똥

희미한 눈꺼풀 치켜세우며

 

, 집에 갈란다

 

아들딸이 사 온 알록달록한 가방은

곱디고운 치마저고리와 함께

장롱 속에 차곡히 쌓아놓고는

까만 빈 봉지 끌어안은 채

 

, 집에 갈란다

 

집이 어디길래

앙상한 늑골 뼈 잔뜩 웅크리고

미라의 형상으로 현관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행여 자식새끼 눈치챌까 봐

구십의 노모는 여윈 목소리에 힘을 준다

 

, 집에 갈란다

 

당신의 뜨락은 이곳이건만

오뉴월 가마솥에 보릿단 불을 지펴

백태 알알이 볶아

맷돌로 갈아 찰밥 지어

노란 콩가루에 버무려주던 아랫도리 힘은

내쉬는 숨에도 허물어져 버리고

 

한 발자국씩

저편의 세상으로 옮겨 가시렵니까

― 「어머니의 집」 전문

 

  역시 장인무 시인의 긴 시 한 편이다. 이 시 안에도 어머니가 등장한다. 앞의 시가 젊은 시절의 어머니라면 이 시의 어머니는 늙은 시절의 어머니다. 치매라도 걸리셨던가. 당신의 집에 있으면서도 당신의 집으로 가겠노라 자꾸만 우기신다.

 ‘, 집에 갈란다’. 어머니가 습관적으로 되풀이하시는 이 말 한마디는 그저 일상적인 언어지만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시겠다는 것처럼 들린다. 그래서 그 말씀은 의미심장하게 들려오고 마음 아프게 들려오는 것이다. 본래 우리의 집은 하늘나라였던 것일까.

 

  그것이 분명 그렇다면 치매 걸려 엉뚱한 소리처럼 하시는 어머니의 말씀은 결코 허언(虛言)이 아니고 진실의 언어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 인간적 한계와 비애가 따르게 된다. 역시 긴 시이지만 무리 없이 읽히는 가편의 작품이다.

 

4 장인무의 넉줄시 

  ‘넉줄시’라고 하면 많이 생소하게 들릴 것이다. 넉줄시는 공주대학교 명예교수인 육근철 시인이 창안해낸 새로운 형식의 시 작품을 말한다. 우리나라 전통시가인 시조시의 종장 부분만을 떼어내어 한 편의 시로 삼는다. 그러니까 3, 5, 4, 3의 자수율을 그대로 차용(借用)하여 한 편의 시가 되는 것이다.

  또 시조의 종장처럼 한 줄로 세우지 않고 3, 5, 4, 3, 그렇게 단락마다 한 줄씩 꺾어서 4행으로 하는 시이다. 일종의 글자 수를 맞추는 정형시이다. 제법 오래전부터 공주지역에서는 육근철 교수의 제안에 따라 이러한 형식의 시를 쓰는 사람들이 모여 시작 활동을 하는 것을 보아왔다.

  장인무 시인도 그 모임의 열성적인 회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넉줄시의 소산이 없을 수 없다. 이 시집의 말미에 수월찮게 많은 수의 넉줄시가 실려 있다. 넉줄시에 대해서는 설명이나 해설 없이 몇 편 골라서 여기에 실고 넘어가기로 한다.  

 

여름밤

멍석에 누워

초롱초롱

 

내 사랑

―「별」전문

 

간이역

코스모스길

홀로 떠난

그림자              

―「막차」전문               

 

! 조용

토끼풀 잔디

햇살 먹고

낮잠 중  

― 「봄 뜰」전문

 

  장인무 시인님! 첫시집 내는 것을 축하합니다. 첫시집이 좋아야 다음 시집도 좋을 수 있다는 것이 내 생각입니다. 말하자면 부모에게 첫 자식이 잘되어야 아래 자식들도 잘된다는 말처럼 말입니다.

  시를 쓰는 사람이 첫시집을 내는 것은 도착점이 아니라 출발점이란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야말로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부디 지치지 않게 멀리까지 가서 좋은 것 많이 듣고 보고 돌아와 좋은 시로 써서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글을 쓰는 사람들 피차의 예의요 본분입니다. 진실로 첫시집을 내는 기쁨을 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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