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자 근황, 장영자 이철희 부부 어음사기 사건-최순실 게이트 구치소 국회 청문회의 원조, 그리고 린다김 신정아 최순실...
작성자레제르작성시간16.12.31조회수43,887 목록 댓글 0장영자 근황, 장영자 이철희 부부 어음사기 사건-최순실 게이트 구치소 국회 청문회의 원조,
그리고 린다김 신정아 최순실......장영자 사위 김주승...
최근 서울 구로구 남부구치소에서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 국정조사특별위원회 현장 청문회가 진행됐다.
최순실씨는 구치소 청문회장에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구치소 청문회의 원조는 1989년 장영자다.
독재정권 치하였던 제5공화국의 '큰손' 장영자....
장영자 이철희 부부 어음사기 사건의 전말
장영자가 어음 사기 혐의로 구속된 것은 1982년.
1983년 법원에서 15년 형을 선고받고 장기 복역했다.
희대의 어음 사기 사건의 주인공
남편 이철희는 1923년생으로 육사출신 장성과 중앙정보부 차장, 국회의원을 지냈고
장영자는 1944년생으로 전두환 대통령 처삼촌 이광규(부인이 장영자의 큰언니 장성희)의 처제였다.
장영자는 숙대 메이퀸으로 뽑힐 정도로 미모였고 화술이 좋았다.
이철희를 만나기 전 사교계의 여왕이었는데 그와는 세번째 결혼이었음.
사기 내용의 골자는 이렇다.
자금회전이 잘 안 되어 현금이 당장 필요한 기업을 찾아간다.
권력을 등에 업고 은행에 잘 말해서 무담보 대출을 받아주겠다고 꾀어
대출금의 2배 많게는 9배에 이르는 어음을 받는다.
혹시 모르니 담보성으로 받아둔다는 것이 이유.
어음은 언제까지 유통시키지 않겠다는 약정을 맺지만 구속력이 없다.
장영자 부부는 어음을 돈 많은 사람들에게 들고 가 할인해서 판다.
1억을 대출해 주겠다고 기업가에게 받은 5억 짜리 어음을 자산가에게 4억에 팔아
현금화 하는 식이다.
이렇게 해서 총 1천 4백억여원을 손에 넣었다.
현재 가치로도 엄청난 돈이지만 당시 물가를 고려하면 가히 천문학적인 금액이다.
이 사건으로 당시 중견기업이었던 공영토건 일신제강 두 기업이 완전 망했고,
대기업 해태제과 등도 큰 피해를 입었다.
장영자는 전라남도 목포 시내에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목포의 거상이며 한민당 목포지구당을 지낸 차보륜은 그의 고모부였고,
김대중 대통령의 첫 번째 부인 차용애는 그의 외사촌 언니다.
아홉 살 때인 1953년 서울에 올라와 중학교와 계성여자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전문대학에 다니다 숙명여자대학교 교육학과에 편입했다.
숙명여자대학교를 졸업하였고 종교는 불교.
숙명여자대학교 재학시절 장영자는 '메이퀸'으로 뽑히기도 했다.
대학재학 시절 첫 결혼하였으나 실패하는 등 두 차례 이혼.
그 중 남편 김모씨에게서 아들 김모씨와 딸 김신아를 두었다.
장영자는 1979년 당시 유정회 소속 국회의원이었고 중앙정보부 차장까지 지낸 이철희를 만났다.
1982년 2월 서울 장충동 사파리 클럽에서 정관계인사들을 대거 초청하여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돈으로 1억원을 들인 초호화판 결혼식이었는데 두번째 결혼식으로 외부에 권력을 과시하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1982년에 장영자는 남편 중앙정보부 차장 이철희를 내세워 고위층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기업자금지원의 대가로 지원금의 몇 배에 달하는 어음을 받아 사채시장에서 유통(할인)하는
수법으로 2천억 원대의 사기 행각을 벌인 것.
어음 사기 혐의로 1982년 5월 4일 검찰에 구속되었고 당시 장씨 부부는 물론 은행장 2명과 내로라하는
기업인 등 모두 32명이 구속됐고 장씨의 형부이자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처삼촌인 이규광 씨도 사건에
휘말려 구속됐다.
1983년 어음사기 사건으로 징역 15년을 선고받은 뒤 형기를 5년남겨 둔 1992년 가석방되었다.
1차 구속 당시 함께 구속됐던 남편 이철희는 1991년 먼저 가석방되자 곧바로장씨가 수감 중이던
청주교도소 근처에 방을 얻어 이듬해 3월 장영자가 가석방될 때까지 옥바라지하는 부부애를 보임.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이 금용실명제 긴급명령을 발한 후 경제가 과도기적으로 혼란스럽자
전해에 출소한 장영자가 재기(?)에 나섰다.
부실기업을 인수해 그 기업의 이름으로 어음을 끊어 할인을 반복하다 결국 140억원의 사기 혐의로
다시 검찰에 구속되었다.
재구속되면서 1992년의 가석방이 취소됨으로써 잔여 형을 복역하게 되었고 4년형을 선고받음.
1998년 8.15 특별사면으로 풀려났으나 2000년 구권 화폐 사기로 또 구속, 기소됐다.
천억대원에 달하는 구권화폐뭉치를 갖고 있는데 유통되기 어려운만큼 싸게 할인해 신권과
맞바꾸겠다고 한 사기사건.
정권을 수평교체한 김대중 정부가 1997년 김영삼 정부에서 초래한 IMF 외환위기를 치유하던 무렵이었다.
2004년 1심에서 고수익 채권투자 45억원 사기에 대해서 장영자에게 징역 2년이, 남편 이철희에게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이 선고되었다.
그러나 2006년 항소심에서 장영자에게 고수익 채권투자 사기 부분에 대해서는 특경가법상 징역 3년,
구권화폐 사기에 대해서는 7년 등 모두 10년이 선고되었다.
장영자 근황
이철희는 장영자 옥바라지를 계속 했다.
장영자는 만기 복역하고 2015년 1월 출소했다.
30대에 속임수를 감추고 미모와 권력을 앞세워 치마바람을 날리던 큰손 장영자도
어느덧 70이 넘은 할머니가 되었다.
지금까지 별다른 뉴스가 안나오는 것을 보면 평범하게 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철희는 올해 94세의 고령이니 대단히 장수한다..
이해가 안되는 것은 1992년 출소 후에 장영자가 왜 계속 사기를 첬는가 하는 점이다.
1982년 당시 강남세무서가 장영자로부터 압류중이던 골동품만 1천억원어치였다고 한다.
또 장영자는 제주도 남제주군 성읍리 오름봉 일대 290만평의 목장과 서울 곳곳 요지에 200억원대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었다.
1992년 출소한 장영자는 300억 국세 추징조치에 조정심판을 신청해 인용을 받고 26억만 내고
강남 세무서가 압류중이던 1천억원대 골동품을 돌려 받았다.
부동산 가격도 10년만에 몇배로 뛰어올랐다.
다른 재산을 제외하고 그 둘만 합해도 족히 1000억원을 훨씬 넘는 거부인데 왜 사기행각을 벌였는지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잘 알려져있다시피 장영자의 딸 남편이자 사위가 청춘스타 중 한 사람이었던 미남배우
김주승(61년생)이다.
김주승은 1990년 장영자의 큰 딸 김신아와 결혼했는데 사업에 손을 댔고 1994년 출소한 장영자가
다시 부도를 내 재구속되고 자신도 40억 사기혐의로 수배를 받고 미국으로 도피했다.
1996년 2년만에 귀국해 방송에 성공적으로 복귀함.
방송 복귀 1년만에 신장암 판정을 받고 투병하다가 회복돼 2002년 방송에 다시 복귀함.
이후 2003년 한국방송연기자협회 회장으로 선임되고 드라마 프로덕션도 설립하는 등 활발히 활동했다.
2007년초 암이 재발하고 췌장암으로 악화되면서 사망하였음.
김주승은 2007년초 병이 악화되자 결혼 17년 만에 이혼을 했고, 이후 주변과 연락을 끊고 투병
생활을 하다 세상을 떠났다.
5공 장영자 이후 최고(?)의 여자는 린다김과 신정아다.
그 뒤를 최순실이 이었는데 박근혜 대통령까지 탄핵하게 하였고 국민적인 집회가 활화산처럼
타오른 것은 최순실이 유일하다.
최고의 여자 4인방중 미모가 바쳐주지도 않는데 한 나라를 뒤흔들었으니 그중 최순실이 으뜸이라 할까?...
린다김은 김영삼 정권의 재미교포 로비스트다.
1953년 경북 청도에서 태어난 린다 김(한국명 김귀옥)에 대해선 학창시절 미국으로 갔다는 것 외에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린다김이 2001년 출간한 자서전을 통해, 자신이 고등학교 2학년 때 10년 연상의 재벌 2세 유부남을 만나
살림을 차렸다가 남자 집안의 반대로 헤어진 뒤 미국으로 건너갔다고 스스로 밝힌 것이 전부다.
젊은 시절 가수와 CF 모델 등으로 활동했다는 기록이 있음.
김영삼 정부가 추진한 2,200억 원 규모의 백두사업(통신감청용 정찰기 도입사업) 당시, 무기 중개상이었던 린다 김과
국방부 장관 등 군과 정치권 인사들의 부적절한 관계 의혹이 제기된 사건.
린다 김은 빼어난 미모와 뇌물을 활용해 군 간부들에게 접근, 무기 구매계획·예산 등 군 기밀을 빼냈다.
이 사건으로 예비역 공군 장성과 현역 장교 등 6명이 구속됐으며, 이양호 전 국방부 장관이 물러났다.
린다 김이 무기 로비스트로서 이름을 날리게 된 건 김영삼 정부에서 실시한 백두사업의 무기 입찰에 참여하면서다.
일명 린다 김 무기 로비사건은 그녀를 고용한 미국의 E-시스템사가 무기 응찰업체 중 가장 비싼 가격을 제시했음에도
최종 사업자로 선정되자, 탈락한 경쟁업체들이 의혹을 제기하며 불거졌다.
조사 결과, 최종 사업자 선정 3개월 전 당시 이양호 국방부 장관이 린다 김을 만난 사실이 확인됐다.
린다 김은 국방부 장관을 비롯해 정관계 인사들을 만나 불법 로비를 했다는 의혹에 휩싸이게 된다.
특히 이양호 전 장관과 국회의원 등 3명으로부터 받은 '야릇한' 내용의 연서가 공개되며 더욱 세간을 시끄럽게 했다.
미모의 로비스트와 정부의 핵심 인물들이 얽힌 사건이었기에 많은 이들의 관심과 질타를 받았다.
이에 린다 김은 "몸 로비를 한 적이 없다"며 "난 외국에서 상당히 인정받는 로비스트인데,
한국에서만 섹스 스캔들의 산 증인인 양 떠든다"고 항변했다.
수사 결과 린다 김의 불법로비 의혹은 드러나지 않았다.
다만 공군 중령 등으로부터 2급 군사기밀을 빼낸 혐의로 징역 1년·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석방됐다.
재판 후 미국으로 떠난 것으로 알려졌던 린다 김은 한참 세월이 지난 올해 다시 언론에 등장했다.
국내에 거주하면서 돈을 빌린 뒤 갚지 않고 채권자를 폭행한 혐의였다.
이어, 자택에서 커피에 필로폰을 타 마신 것이 적발되면서 결국 63세의 나이로 쇠고랑을 찼다.
신정아는 가장 젊다.
2007년 노무현 정부 때 사건이 일어났다.
72년생으로 경상북도 청송군 출신인 신정아는 3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성곡미술관 큐레이터와
동국대학교 조교수라는 타이틀에 이어, 광주 비엔날레 심사위원에까지 선정되며 '미술계의 신데렐라'로 불렸다.
세간의 부러움을 사던 그녀가 추락하게 된 건, 예일대 박사학위 허위 학력 의혹과
변양균 당시 청와대 정책실장과의 부적절한 관계가 폭로되면서다.
신정아는 자신과 변 전 실장이 부적절한 관계라는 보도가 쏟아지던 2007년 미국으로 도피 잠적했다가
두 달여 뒤 귀국하는 공항에서 바로 검찰로 연행됐다.
호화스런 생활을 한 신정아는 알고보니 채무불이행자로 개인회생을 신청한 상태였고
애인관계였던 변양균이 대학과 기업에 외압을 가해 신정아에게 자리를 만들어 주고
각종 특혜를 주었던 것.
학력 위조로 시작된 이 사건은 당시 환갑에 가까운 청와대 정책실장과 30대 여인의 불륜에 세간의 관심이
집중됐다.
한 언론사에서는 신정아의 누드사진을 공개해 파장를 일으켰고 고소되었다.
두 사람이 주고 받은 100여 통의 이메일 중 공개된 일부에는 '성적인 관계'를 암시하는 표현이 있어 국민의
호기심과 함께 분노를 자아냈다.
동국대 이사였던 장윤 스님이 처음 제기한 '예일대 가짜 박사학위' 의혹만 사실로 확인되고(대학 중퇴)
변양균의 외압 등은 증거 불충분으로 사건이 종결됐다.
신정아는 학력을 속여 교수직을 얻고 미술관 공금을 횡령한 혐의 등으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복역했고 2009년 보석으로 석방됐다.
변양균은 엘리트로 살은 인생에 오점을 남기면서 청화대 정책실장에서 물러났고 가정적 사회적으로
매장되다시피 하며 추락했다.
신정아는 출소후 유명세(?)를 이용해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책을 발간했고 언론과 방송에도 출연했으며
미술계 큐레이터로 재기했다.
책은, 신정아가 세상을 시끄럽게 한 불륜녀라는 악평과는 반대로 은밀히(?) 다량의 부수가 팔렸으니
세상사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교도소 수감시 수인번호를 제목으로 한 책 내용에는 정운찬 전 서울대총장이자 전 국무총리의 위선적이고
부도덕한(?) 행위를 밝히는 등 정치계, 학계, 언론계의 유명 인사(다 남자들임)들이 다수 거론됐다.
그들은 신정아의 주장에 대해 즉각 허위사실이고 명예훼손이라 반박했으나 그들중 신정아에게 민형사상
고소를 한 사람은 현재까지 아무도 없다고 한다...
신정아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임에도 불교대학인 동국대학 인사들과 밀접한 관계를 설정했고
그녀가 큐레이터로 재기한 2015년 가수 조영남의 전시회도 부처님 오신날 부천 석왕사 법당에서
기획전으로 여는 등 종교를 자신의 출세나 돈벌이로 이용한 측면이 크다.
그 무렵 신정아는 독신 조영남과 손을 잡고 다닌다고 말하는 목격자들이 나와 서로 사귄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