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과 고뇌: Suffering and Anguish
12개의 히브리어와 21개의 헬라어(너무 많아 다 열거 할 수는 없다)는 고통을 겪다. 참다. 고통을 일으키다. 비탄에 잠기다. 어려운 시련을 당하다. 심한 억눌림을 당하다. 고난을 받다. 버린바 되다. 남겨두다. 혹은 혼자 있게 되다 등의 의미가 있다. 일반적으로 고통은 정신적인 고민으로 육체적 고통을 수반하기도 하고 안하기도 한다. 고뇌는 격렬한 고통을 말한다.
성서적 문맥은 왜 세상에는 그처럼 많은 고통이 있는가라는 지극히 어려운 질문에 대하여 몇가지 해답을 암시하고 있다. 고통이란 첫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이고 둘째, 다른 사람의 비참에 대한 연민의 결과이고 셋째, 다른 사람이 받아야 할 벌을 대신 지는 결과이고 넷째, 주님을 믿는 신앙과 진정한 회개의 결과이고 다섯째, 더 큰 악을 막는 경고의 결과이고 여섯째, 그리스도를 닮는 훈련을 위한 징계의 결과이다. 갖가지의 고통에 대한 적절한 반응은 그 존재 이유(raison d’etre) 만큼이나 각각 다르다. 이러한 중요한 차이점들은 모든 고통의 목적에 관한 일반화(一般化)를 부적당하고도 오해하기 쉬운 것으로 만든다. 가능한 한 통칙의 오류를 피하려는 시도에서 각 고통의 유형을 다음 순서대로 분리하여 생각해 본다.
※ ①. 심판적 고통(Judgemental) ②. 감정 이입(移入)의 고통(Empathic) ③. 대속적 고통(Vicarious) ④. 증거적 고통(Testimonial) ⑤. 예방적 고통(Preventative) ⑥. 교육적 고통(Educayional), 이러한 목적들 중 하나 이상이 어떤 주어진 고통의 실례로 작용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다 인정된다면 먼저 고통의 구별이 분명해지고 고통의 원인은 더욱 용이하게 인식되어 질 수도 있다.
1. 심판적 고통(Judgmental Suffering)
어떻게 해서 인류가 고통의 지배를 받게 되었을까? 창조되었을 때 인간과 자연은 “심히 좋았다”(창1:31). 무엇이 땅 위의 생을 “눈물 골짜기”로 만들었을까? 하나님의 변덕스러운 섭리에 의해 된 것도 아니고 운명에 의한 것도 아니다. 그 것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인간의 가식적이고 불신앙적인 범법 때문이었다. 해산의 수고와 힘에 겨운 노동은 최초의 죄를 인하여 하나님이 심판 하신데서 찾아 볼 수 있다.(창3:16-19) 타락한 세상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자원을 지혜를 따라 사용하지 못하므로 고통을 자초하는지도 모른다. “게으른 사람은 주릴 것이니라.”(잠19:15)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잠13:20).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하여도 어리석은 자들은 나아가다가 해를 받느니라.”(잠22:3)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잠11:24) 분명히 하나님은 사람들이 나태함과 선견지명의 결핍과, 어리석은 자들과 탐욕한 자들과 교제하기 때문에 심판하시는 섭리의 질서를 유지하신다. 더우기 고통은 죄 있는 사람을 정죄하는 사회적인 압력의 결과로 생길 수도 있다. 빌라도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을 인하여 애를 많이 썼나이다.”(마17:29)하였다. 물론 어떤 크리스챤도 그릇된 행위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지 말아야 한다.(벧후2:13) 심판적 고통 역시 선지자들이나 사도들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를 거역하는 죄 때문에 뒤 따라 일어난다. 이스라엘의 장년들은 아주 극적으로 애굽에서 구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고 불평했다. 저들의 불신앙 때문에 저들은 광야에서 고통을 당하고 죽었다. 그들의 자녀들도 역시 고통을 당하였다.(민14:31-33) 이방 문화 속에서의 가족의 경각심과 민족의 연대 책임은 분명히 명시되었었다. 그러나 후손들이 고통을 받은 것은 잠시 뿐이었다. 그들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갔다.
윌리암 하밀톤의 (William Hamilton)의 경우에 하나님의 고통이 죽음에 영향을 미치는데 특히 어린이들의 고통이 그러하다. 이것이 「카라마조프가(家)의 형제들」이라는 책속에서 도스트옙스키에 의해 현대 기독교 신자의 관심거리가 되었다. 이반(Ivan)은 “자녀들이 그들의 선조들의 범한 모든 죄에 대한 책임을 나누어 갖는다”는 것을 믿지 못한다. 성경에는 그 것을 가르치고 있는가? 광야에서 그러했던 것과 같이 가족이나 민족의 우두머리 위에 내려져 있는 심판이 가족 또는 국가 단위의 사람들에게 일시적으로 내려질 수도 있다. 그러나 에스겔은 의로운 아버지가 사악한 아들을 가질 수도 있고 또는 사악한 아버지가 의로운 아들을 가질 수도 있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찌라.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겔18:20)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불법과(시107:17) 그들의 죄(사24:5,6)로 인하여 거듭 심판적 고통을 받았다. 예레미야는 “슬프고 아프다 내 마음 속이 아프고 내 마음이 답답하여 잠잠할 수 없으니 이는 나의 심령 네가 나팔소리와 전쟁의 경보를 들음이로다.”(렘4:19) 라고 외쳤다. 유다는 그들의 불법이 컸기 때문에 멸망했다. (렘13:22) 많은 죄악으로 인하여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시온이 극심한 고통을 받았다.(애 1:5) 후에 느헤미야는 이렇게 고백했다."저희가 오히려 순종치 아니하고 주를 거역하며 주의 율법을 등뒤에 두고 주께로 돌아 오기를 권면하는 선지자들을 죽여 크게 설만하게 행하였나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그 대적의 손에 붙이사 곤고를 당하게 하시매(느9:26,27). 심판적 고통에 대한 신약의 묘사도 마찬가지로 엄격하다. 사도들과 성령을 계획적으로 속였기 때문에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갑자기 죽었다.(행5:1-11) 성찬석에서 주님의 몸과 피를 더럽힌 사람들은 심판을 당했다.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이러므로 너희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고전11:29,30). 죄의 결과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날 때까지 피조물은 허무한데 굴복하고 썩어짐의 종이 된다(롬8:18-21). 심판 때에 나무, 풀, 짚으로 된 신자들의 공력(works)이 불타버리고 그 사람은 “해를 받을 것이다.”(고전3:12-15) 나사로는 죽어 아브라함의 품에 갔지만 부자는 음부에서 불러 가로되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눅16:24)라고 했다. 주 예수께서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서 나타나실 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과 복음을 순종치 않은 자들에게 벌을 내리실 것이다.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살후1:9)라고 되어 있다.
2. 감정 이입의 고통(Empathic suffering)
격렬한 고통에 직면했을 때 선지자들은 놀라 번민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걱정하면서 "큰 환난과 애통하는 마음과 많은 눈물로" 편지를 썼다.(고후2:4) 우리 모두는 우는 자들과 함께 울어야 한다.(롬12:15) 어떤 고통은 죄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생기기도 한다. 우리는 상상과 관심을 통하여 충분히 다른 사람들의 감정에 들어갈 수 있다.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과의 감정의 일치는 고통을 일으킨다. 하나님의 감정이입은 고통을 경험하실까? 노아시대에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 속에서 생각하는 것이 계속 악하기만 한 것을 보셨을 때 세상에 인간 지으심을 한탄하시고 마음에 근심하셨다(창6:6) 인간의 죄 속에서는 하나님은 그 것을 묵인하신다.(옛 영어 표현으로는 "하나님은 함께 고통 당하신다"고 번역) 로빈슨(H.Wheeler Robinson)이 말한 것과 같이 "도덕적 악이 도덕적으로 선한 사람들의 의식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고통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은 비 인격적인 본체가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살아계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사랑과 감정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 속으로 완전히 들어가셨다.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그들을 구원하시며 그 사랑과 긍휼로 그들을 구속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다.(사63:9) 고통과 하나님의 관련에 대한 어떤 오해는 하나님의 내재성과 초월성을 공정하게 다루지 못한데서 생긴다.
칼 바르트(Karl Barth)의 초기 저술은 인간의 고통과 유사한 어떤 것과도 아주 거리가 먼 신의 초월성을 크게 강조하였다. 이것을 인식한 바르트는 후에 성육신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인성을 강조했다. 바르트는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이 겪는 모든 고통을 경험하셨다고 주장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까지 고난 주간에 극도로 고통을 당하셨다. 그 점에서 바르트는 역사적 교회의 입장을 지지했다. 십자가 위에서 성부 하나님은 죽지 않으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부활할 수 없이 죽으셨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죽음 자체의 깊은 고뇌를 극복할 수 있는 자기의 초월적인 힘을 배제하시기까지 하면서 인간성 속에 내재적으로 참여하셨다는 것을 강조했다. 하나님 안에서 고통하는 사람들도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살고 움직이며 생존하는 것이다.(행17:27,28)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의 초월적 지혜는 영원히 죽음 그 자체를 지배하신다. 어떤 사람들은 고통을 허용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그것을 완화시키려는 인간의 자유를 파괴시킨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허용이 기쁨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한다. 고통하는 사람들과 함께 괴로와 하시는 하나님은 그 원인을 제거 시키려고 힘쓰신다. "이스라엘 족속들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죽은자의 죽는 것은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겔18:31,32) 비록 하나님은 고통을 허용하시지만 그는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 할 올바른 근거를 제공하기 위하여 측량할 수 없는 댓가를 치루는 행위를 하셨다
[출처= 「성서대백과사전」 제1권 pp.350~355 기독지혜사 1992.]
③. 대속적 고통(Vicarious) ④. 증거적 고통(Testimonial) ⑤. 예방적 고통(Preventative) ⑥. 교육적 고통(Educayional) 은 다음 글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