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소설 싯다르타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는 싯다르타의 일대기에 소설적인 재미를 곁들인 것이라 생각했었다. 헤르만 헤세를 너무 무시하는 옹졸한 발상임을 책장을 겨우 몇 장을 넘기면서 알게 되었다. 제목과 달리 부처의 일대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소설이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저 불교에서 영감을 받아 불교적인 색체로 쓴 소설이다. 그러므로 이 소설 속의 싯다르타도 창조된 인물이다. 아마도 옮긴이의 말처럼 고타마 싯다르타를 상당 부분 차용하였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런 점 때문에 자서전으로 착각할 수 있는 여지가 다분했던 것이다.
석가모니의 본명은 고타마 싯다르타다. 그러나 소설 속에서는 고타마와 싯다르타가 별개의 인물로 등장한다. 고타마가 먼저 깨달음을 얻었고, 후에 싯다르타도 강가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그러니 결국 그 둘은 하나로 통하는 셈이다.
어떻든 소설은 불교 사상의 한가운데를 꿰뚫고 가기 때문에 불교에 대해 문외한인 내가 서둘러 책장을 넘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어떻든 목사 가정에서 태어나 소설가가 된 작가가 불교 색체가 물씬 풍기는 이런 소설을 썼다는 것은 무척 경이롭다.
나. 대강의 줄거리
소설의 행간을 따라가 본다. 싯다르타는 어릴 적부터 비범했다. 그는 브라만인 아버지의 충실한 가르침 속에서 번거로운 제식을 익혔고 세상을 보는 법을 익혔다. 그러나 그는 곧 스승의 가르침에 한계를 느끼고 마침 같은 뜻을 가진 친구 고빈다와 함께 고향을 떠났다.
그들은 길을 가던 중에 마침 숲속의 사문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들을 따라가 사문의 제자가 되었다. 그리고 숲속에서 고행을 통한 자아의 초극을 체험하려 한다. 그러나 문득 싯다르타는 사문의 고행으로는 자신의 정신세계를 만족시키지 못함을 깨닫고 사문을 나선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이미 완성자로 이름을 크게 떨친 고타마 붓다에게도 한다. 그곳에서 고타마의 설법을 듣게 되자, 고빈다는 붓다에게도 인도되지만 싯다르타는 설법에 대한 불신만을 확인하고 다시 떠난다.
깨달음을 갈망하지만 어디에서도 스승을 구할 수 없었다. 발길 닿는 대로 길을 걷다보니 커다란 도시에 이르렀다. 그는 그곳에서 가장 밑바닥의 자아를 알기로 결심하고 방탕한 세속 생활 속으로 뛰어든다. 그 시작은 기생 카마라와의 만남이었다.
그는 카마라에게 사랑의 기술을 하는 법을 배우고, 카마라가 소개해준 카마스바미에게서는 장사 기술과 허세를 배웠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그런 생활을 경멸하며 도박에 손을 대기도 했다. 그러다 결국은 그런 생활에서 도망을 치게 된다.
방황하는 발걸음은 그를 처음 집을 나와 길을 걷다 마주친 예전의 강가에 이르게 된다. 그곳에서 기력이 쇠잔해지자 자살을 결심하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허탈한 기분으로 강물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반전이 일어난다.
그 순간 어디선가 음성이 들려온 것이다. ”옴.“ 그것이 그가 들은 음성이었다. 옴은 고대의 배다시대부터 사용된 신성한 소리로 우파니샤드의 각 장마다 그 처음에 시작되는 소리라고 한다. 옴은 창조, 파괴, 유지 또는 창조, 파괴, 무를 뜻하기도 하는 말이다.(다음 백과 참조)
그러자 그는 처음 그 강을 건널 때 신세를 졌던 뱃사공 바수데바를 다시 찾았다. 그리고 그의 조수가 되어 함께 기거를 하며 생활을 하게 되었다. 바수데바는 묵묵히 싯다르타를 지켜보며 그가 꼭 필요할 때 생각의 갈피를 잡아주는 역할을 했다.
몇 해 뒤, 고타마의 임종을 앞두고 그를 보러 카마라와 그의 아들을 만났다. 카마라는 뱀에 물려 죽고 아들만 덩그마니 남았다. 싯다르타는 아들을 통해 강한 부성애의 번뇌를 겪는다. 그러나 강가 생활이 서툰 아들은 버릇없이 아버지를 대하며 싯다르타를 떠나게 된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그런 아픔을 힘겹게 이겨내고 속세의 쾌락에 대한 정신적ㅇ니 오만도 초극하게 된다. 결국 싯다르타는 바수데바를 길잡이 삼아 강의 가르침을 받게 되고 마침내 완성자에 이르게 된다.
사람들은 그를 숲속 강가에 사는 현자라고 이름을 알렸지만 싯다르타는 세속과 상관없이 하루하루 사람들을 배로 강을 건네주는 일을 했다. 어느 날 고빈다가 강가의 현자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래서 일부러 가던 길을 바꾸어 강가로 찾아온다.
물론 그가 싯다르타라는 사실은 알 리가 없었다. 그는 오랜 시간 고타마에게서 가르침을 받았지만 구도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런 그가 마침내 강가에 이르러 뱃사공이 싯다르타임을 알아보고 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그가 완성자임을 확인한다.
다. 완성자에 이르는 길
처음에도 이야기했지만 나는 이 책을 처음 집어 들었을 때 싯다르타의 일대기에 소설적인 재미를 곁들인 것이라 생각했었다. 마침 몇 달 전에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최후의 유혹>을 읽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최후의 유혹>은 예수의 일대기 중에서도 십자가에 매달린 이후 죽음에 이르기까지 얼마 안 되는 시간 동안의 혼미한 정신 속에서 환영을 보는 이야기가 핵심이다. 물론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예수의 일대기가 이어진다.
그러므로 <최후의 유혹>은 출간 당시 종교계에서 숱한 비난이 이어졌으며 카잔차키스의 말년은 곤혹스러웠다. 그러나 이 책 <싯다르타>는 예수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희화화된 것과 같은 장면은 없었다. 그러므로 적어도 헤르만 헤세가 카잔차키스와 같은 곤혹을 당할 일은 없었다.
싯다르타란 범어(梵語)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리라“라는 의미라고 한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는 말하자면 완성자에 이르는 길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저자는 완성자에 이르는 길로 소설이 세 가지 유형을 제시하고 있다고 분석한다.(178쪽)
바수데바의 길, 고타마의 길, 싯다르타의 길이 그것이다. 바수데바는 모든 사유와 언어 이전에 직접 자연에 접하여 그 소리에 귀 기울인 선험적인 각자(覺者)이다. 그는 이 작품에서는 다만 싯다르타의 각성을 촉구해주는 자연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고타마는 금욕과 고행을 통한 속세를 등진 길을 걸어 각성에 이른 유일자(唯一者 )요, 싯다르타는 모든 금욕과 본능, 질서와 혼돈, 선과 악을 온몸으로 체험함으로써 완성에 이른 각자(覺者)였다.
싯다르타는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고향(아버지)을 떠났고, 친구(고빈다)를 떠났고, 붓다(고타마)를 떠났고, 인간 세상을 떠났으며, 마침내 이른 곳이 바수데바가 있던 나루터, 즉 자연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강물에 귀를 기울이며 마침내 깨달음을 얻었다.
비록 소설이 창작이라고는 하나 싯다르타를 중심으로 한 그 주변 이야기를 흥미롭게 각색한 것이므로 새삼 불교에 대해 작은 관심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문득 석굴암의 석가여래좌상이 떠오른다. 깨달음의 극치를 기가 막히게 표현한 것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