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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홍대선의 『어떻게 휘둘리지 않는 개인이 되는가』, 온몸으로 맞서 세상의 흐름을 바꾼 철인들

작성자방랑객|작성시간26.06.18|조회수142 목록 댓글 0

가. ‘개인’의 발견

 

철학책은 언제 펼쳐 봐도 만만치 않다. 한명도 버거운데 여러 명을 한꺼번에 들여다본다는 것은 더욱 그렇다. 그저 담 너머로 남의 마당을 슬쩍 엿보는 정도일 것이다. 그런데 슬쩍 엿보기의 관음증은 괜히 부끄럽다. 철학은 내게 늘 그랬다.

 

홍대선의 『어떻게 휘둘리지 않는 개인이 되는가』는 세계 지성사에 일획을 그은 여섯 명의 철학자를 조명한다. 그 각각은 데카르트, 스피노자, 칸트, 헤겔, 쇼펜하우어, 니체 등이다. 한번쯤은 들어본 이름이므로 용기를 내어 부끄러움을 감당하기로 했다.

 

그러나 사실 이들 각각의 철학에 접근한다는 것은 부끄러움을 넘어서 쉽지 않은 일이다. 이 책은 각각의 철학자들에 대해 그들의 일대기와 함께 핵심 개념을 적절히 드러내며 설명해주고 있다. 저자의 내공이 만만치 않다.

 

그러나 저자의 프로필은 단출하다. 그것만으로는 그의 내공을 가늠하기가 어렵다. 그는 자신을 치유하기 위해 삶의 고민과 혼란 속에서 헤매다보니 어느새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 같은 원론적인 질문에 빠졌다고 한다.

 

그것이 책을 쓰게 된 동기라고 한다. 그리고 이 책에 제시한 여섯 명의 철학자들은 나름대로 저자가 궁금해 하는 질문에 대한 그들 각자의 답을 찾았다고 말한다. 이 책은 그것이 바로 ‘개인의 발견’이라고 이야기한다.

 

책을 읽다 문득 드는 생각이 ‘신병’이라는 것이었다. 그게 어떤 병인지는 사실 자세히 모른다. 다만 어떤 사람들은 원인불명의 그 신병을 앓다가 결국은 무당이 길로 들어섰다는 이야기는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다.

 

여섯 명의 철학자들 이야기를 듣다보니 이들 역시 자기들만의 신병을 앓은 사람들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들은 그 신병을 헤쳐 나오기 위해 화석화된 거대한 세상과 온몸으로 부딪치며 처절하게 투쟁했고 마침내 승리했다.

 

그들에 공유되는 특징이라면 어딘가에 생각이 깊이 뿌리내리면 그것에서 좀체 헤어 나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서로 성장 배경과 생몰 시기가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하나의 문제에서만은 동일했다. 그들 눈에 비친 세상은 모두가 의아했고 의문투성이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의문을 풀어줄 수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결국은 둘 중 하나이다. 잊거나 문제를 정면으로 맞닥뜨리거나 하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정면 돌파를 택했다. 그것은 이제까지의 삶의 방식을 바꾸는 지난한 과정이었다.

 

어떤 이는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그 길을 걸었고, 또 어떤 이는 풍족한 삶을 포기하기도 했다. 갈증은 그만큼 컸고 그들은 결국 근대철학에 찬란한 금자탑을 쌓았다. 그들로 인해 사람들의 사유의 방식이 바뀌었고 그 여파로 조금씩 세상이 바뀌었다.

 

이 책은 여섯 명의 철학자들 각자가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개인’을 발견해 가는 과정을 전기 형식으로 세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들의 사유 과정을 통해 우리도 우리들 각자의 ‘개인’을 발견해 가는 경험을 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멋진 일은 없을 것이다.

 

여섯 명의 철학자의 생애와 철학을 소개하기 전에 저자는 친절하게도 각장의 첫머리에 그들의 삶과 철학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중간 중간에 철학자들이 주장하는 핵심개념을 간략히 소개해 놓기도 했다.

 

그것은 내게는 훌륭한 밑밥이었다. 붕어라 된 기분이었지만 그래도 그 밑밥 덕분에 한 장씩 흥미롭게 책장을 넘길 수 있었다. 철학자들에게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많은 이들에게는 이 부분이 더 없이 감사하고 소중하게 와 닿을 것 같다.

 

나. 그들을 엿보기

 

데카르트는 서양 근대철학의 아버지이자 대륙 합리론의 창시자다. 그는 의심의 철학자다. 그는 인간, 사물, 세계, 신,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 의심하기를 거듭했다. 그리고 그 의심의 주체는 말할 것도 없이 ‘나’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문장은 데카르트 철학의 핵심이다. 생각하는 내가 있으므로 나의 감각도 존재한다. 내가 감각하는 물질세계도 존재한다. 내가 존재할 공간도 존재한다.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의 근원이자 ‘보증인’인 신의 존재까지 증명한다.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나’를 현대적 개인으로 빚어냈다. 스피노자의 삶은 ‘개인주의자의 선언’이다. 그는 개인에게 이기적으로 살 권리를 부여했다. 그는 자유, 인권, 평등의 철학을 위해 기꺼이 소외당하는 삶을 받아들인 위대한 개인이자, 어쩌면 최초의 개인이다.

 

그는 신에 대해 의문을 품었고, 오랜 사유의 끝에 그가 취한 신은 인격신, 유일자가 아니라 범신론의 신이다. 범신론이란 모든 사물에 신성이 깃들어 있다는 의견이다. 이것을 정신이라고 한다. 결국 스피노자에게 신이란 철학적, 언어적으로만 존재한다.

 

나아가 그는 선악의 존재도 부정한다. 즉 도덕은 원래 없으며, 선악은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그는 인간은 목적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으며, 그저 어쩌다 어머니의 임신으로 태어나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에는 숭고한 선험적인 목적은 없다는 것이다.

 

애초에 그런 생명체는 있지도 않다는 것이다. 인간에게 사명이라는 것도 없다. 그런데도 삶의 목적이 있다면 인간은 단지 행복하기 위해 태어난다. 그것이 인간론의 전부라는 것이다.

 

칸트는 데이비드 흄의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그렇다고 흄의 제자가 되지는 않았다. 데카르트에서 시작된 대륙 합리론은 영국 경험론과 맞닥뜨렸다. 흄은 합리론을 사망 직전까지 몰고 갔지만 칸트는 합리론을 지키지도 경험론에 전향하지도 않았다.

 

칸트는 당시 긴장 관계에 있던 대륙 합리론과 영국 경험론을 흡수 통합해 자신만의 철학을 완성했다. 그는 경험론이 말하는 후천적 경험과 합리론이 붙잡아온 선험적 이성 모두 인간의 지식과 판단을 구성한다고 설명한다.

 

영미와 대륙의 양자구도는 남았지만 과거의 사조는 그로 인해 흐름이 끝났다. 서양사상은 칸트의 철학을 토대로 다시 시작된다. 스피노자의 <에티카>가 인간 윤리의 마지막 보루라면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은 윤리의 빛나는 첨탑이라고 저자는 평가한다.

 

헤겔의 관심은 종교가 아닌 현실에 있었다. ‘인간만사’는 헤겔 철학의 중요한 몸통이었다. 인간이 일을 해결해가다 보면 지나간 고된 과정이 기록으로 쌓인다. 그것이 역사다. 따라서 헤겔의 역사철학은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으며, 이를 변증법으로 설명했다.

 

헤겔은 우주의 시공간은 하나이며 오직 하나로 실재하는 전체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이것의 의지를 ‘절대정신’이라고 한다. 절대정신이 특정 시대에 맞게 모습을 드러내는 양상이 바로 시대정신이다.

 

역사가 진보하면 결국 어느 순간에는 인류의 이상향이 도래한다. 이때 역사 발전은 끝난다. 이것이 헤겔이 말하는 ‘역사의 종말’이다. 역사는 시간적 개념이기에 멈추면 그걸로 끝났다는 말이다. 역사가 종말하면 모든 사람이 예술가가 된다. 헤겔은 이를 ‘예술의 종언’이라고 했다.

 

쇼펜하우어는 헤겔이 완성한 근대를 부정하고 조롱했으며, 역사에 파묻힌 무미건조한 개인에 주목했다. 식물도 동물도 계속해서 살아남고 번성하려는 의지를 지니고 있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생의 의지를 갖고 있다.

 

의지는 세상을 피도 눈물도 없는 각축장으로 만든다. 의지 때문에 인간은 타인과 자연을 착취한다. 표상은 인식에 맺히는 주관적 상이다. 어차피 인간은 자기 주관의 한계로 세계를 인식할 수밖에 없다. 인간에게 세계는 의지와 표상으로 다가온다. 이게 전부다.

 

의지와 표상으로의 세계에서도 인간에게 남는 것은 있다. 세상은 지옥이며, 뿌연 안개처럼 알 수 없는 공간이다. 여기서 인간은 끊임없이 고뇌하며 매 순간 하나하나 선택해 나가야 한다. 이것이 인생이라는 것이다.

 

현대 철학의 창시자이자 최초의 현대인인 니체는 우리의 의식 구조를 형성한 정신적 선조 중의 하나다. 그가 보기에 ‘종교는 우상’이자 토템이었다. 니체는 철학의 길로 들어선 후 기독교 삼위일체의 사슬을 끊어버렸다.

 

니체의 종교는 인간이었다. 따라서 니체는 형이상학을 거부했다. 인간의 존재 근거는 형이상학이 아닌 인간 스스로다. 니체는 인간은 세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다고 말했다. 이성과 육체와 의지다. 그는 이성을 부정하지 않았다.

 

이성과 육체에 의지라는 재료가 더해져 인간을 꿈틀거리는 생명의 덩어리로 빚어낸다. 그 의지란 ‘힘에의 의지’이다. 힘에의 의지는 상승, 지배, 강화를 위한 에너지다. 중력은 물질을 지상에 붙잡아놓으려고 쉼 없이 작용하는 중이다. 힘에의 의지란 곧 욕망이다.

 

도덕이란 것이 있을 거라 착각하지만 실은 없다. 걷잡을 수 없이 불온해 보이지만 이것이 현대적인 윤리관의 밑그림이다. 모든 인간은 이 세상을 만드는데 동등하게 참여한다. 니체는 우리에게 인간성 회복이라는 과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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