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 일본의 기독교 역사와 선교
일본의 기독교 역사
서론 :
근세 봉건 사회의 성립을 향해 치닫고 있던 전국시대는 미지의 세계로부터 새로운 문명과 문화의 파도가 일본에 밀려들어온 때였다. 16세기 중반 포르투갈의 흑선이 가져온 총과 '동양의 사도'로 칭해진 자비에르가 전한 기독교가 그것이다. 일본의 기독교는 남만무역과 함께 포교활동이 이루어졌다. 1549년 일본 포교를 시작한 예수회의 프란시스 자비에르가 가고시마에 도착하여 오우치씨의 보호를 받으며 포교를 하였다. 막부는 초기에 기독교에 대해서는 방임하는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기독교의 포교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침략을 초래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신도가 신앙을 위해 단결하는 것을 꺼려하여 1612년 직할령에 금교령을 내리고, 다음해에는 전국으로 확대해서 신자의 개종을 강제했다. 이후 막부와 각 번은 선교사와 신자들에 대해 처형과 국외추방 등의 혹독한 박해를 가하게 된다.
본론 :
(A) 기독교 유입과 배경 :
막부 출범부터 기독교의 유입은 무역과 달리 수난의 길을 걸었다. 1543년 포르투갈인을 태운 중국 배가 규슈 남부의 타네가시마에 표착했는데 이것은 일본에 온 최초의 유럽인이었다. 이때 영주가 포르투갈인이 갖고 있는 철포를 구입하여 가신들에게 사용법과 제조법을 가르친 이후, 포르투갈인들은 매년 규슈의 각 항에 내항하여 무역활동을 했다. 스페인인도 1548년 나가사키현의 히라도에 내항하여 무역을 개시했다. 이들 포르투갈인과 스페인인을 남만인이라 부르고, 그 무역을 남만무역이라 불렀다.
큐우슈우의 제영주는 포르투갈배의 기항을 희망하고 생사나 군수품을 구입하기 위해 기독교 보호에 노력하였다. 포교와 무역의 일체화를 가장 강력히 추진한 다이묘는 오오무라 스미타다(大村純忠)로, 1562년 세례를 받고 영내의 기독교화를 도모하여 요코세우라와 후쿠다(福田), 나가사키등 3개 항을 개항하였다.
기나이(畿內)지방 포교는 1559년 빌레라 신부에 의해 착수되었는데, 다음해 장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를 만나보고 포교허가를 얻었다. 당시 민중은 히에이산의 파괴에 따른 구세력의 몰락, 잇코오종(一向宗)의 세속적 제세력과의 연합과 쇠퇴등의 구질서가 붕괴되면서 이미 영혼의 안식처를 잃은 상태였다. 이때 등장한 선교사는 과학적 지식을 토대로 천체와 기상현상을 설명해 주는 등 농민의 천문지식에 도움을 줌으로써 기독교가 용이하게 경작 농민사이에 침투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게다가 농문을 직접 지배하고자 했던 영주층은 사원과 결탁한 재지세력을 억압하기 위해 스스로 개종을 행하고 나아가 영민의 개종을 추진하여 영주권을 확립하려고 하였다. 오다 노부나가가 사원대책을 취하면서 통일 정책의 도구로서 선교사를 보호하고 기독교를 이용한 것은 교세확대를 더욱 촉진하였다.
(B) 기독교의 포교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와 마찬가지로 기독교에 호의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통일정책이 일환으로서 보호하고 이용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히데요시는 1587년 6월 돌연 하카다에서 <선교사 추방령>을 발하고 예수회 신부들에게 일본 퇴거를 명령하였다. 그리고 나가사키를 몰수하고 직할령으로 삼았다.
"신국(神國)" 일본을 표방하며 이단종교의 선교를 금한 이 추방령은 한편으로는 상선의 내항만큼은 환영한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결국 나가사키의 직할령화는 무역독점을 위한 포석이었던 샘이다. 그리고 일본국내에 공포한 법규에 따르면, '200정 2만 3천관 이상을 소유한 자'가 기독교인이 될 경우 히데요시의 허가를 받아야 하였으나, 그 이하의 무사는 어떤 신앙을 갖든 자유였다. 일반 하층민에게도 기독교 신앙은 자유에 맡겨졌다.
그러나 기독교인이 잇코오종파(一向宗波)인 본원사 승려들처럼 천하에 해를 미칠가능성을 생각 하고, 기독교에 잇코오잇키와 같은 구조적 성격이 있음을 느껴 위기감을 심화시킨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조선침략의 거점으로서 큐우슈우를 중시한 그에게 이는 중대한 문제였다. 또한 인격의 평등을 설파하는 기독교의 가르침은 통일자 히데요시 자신의 신격화를 위해서도 허용할 수 없었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예수회가 일본, 포르투칼 양국 상인의 조정자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고, 상품의 독점매입에 실패하게 되자 예수회 신부에 대한 금력을 완화시키고 나가사키에 포르투갈인을 위한 교회재건을 허가하였다. 그곳에 관리를 파견하고 봉행을 두었으나 나가사키는 이후에도 계속 기독교 도시로 남아있게 된다.
히데요시의 금령 후 예수회 신부는 히라도에서 회합을 갖고 순교할 각오로 일본체류를 결정하였다. 박해 속에서도 선교사들은 아리마, 오오무라, 아마쿠사지방에서 포교에 주력하고 투철한 신앙심의 배양에 정진하였다.
한편 1593년 프란시스코회 수도사가 필리핀 총독사절로서 방일하여, 히데요시의 금교령을 무시하고 교토에서 과감한 포교를 전개하였다. 1596년, 때마침 도사의 우라토에 표착한 스페인선박 "산 펠리페호"의 승무원이 "스페인왕은 기독교로 먼저 인심을 끌어모은 후 그나라를 정복한다"한 호언장담한 것이 히데요시의 분노를 사 박해는 다시 강화되어 다음해 2월 프란시스코회 신부와 기독교인 26명이 나가사키에서 처형당하였다.
(C) 기독교의 박해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를 용인하였는데, 그결과 신도는 수십만으로 증가하고 야소카 이외에도 프란시스코파, 도미니코파 드잉 전국에 퍼졌다. 그러나 신자의 증가는 막번체제의 붕건지배에 위협을 느끼게 했으며, 전통적인 불교와 유교측에서도 반대했다. 특히 신교국인 화란과 영궁에서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영토침략의 의도가 있다고 소문을 퍼트렸다. 때마침 막부의 관리 중에서도 신자가 적발되자 이에야스는 금교를 결심 1612년 직할령에 금교령을 내린데 이어, 다음해에는 전국으로 확대했다. 이때 많은 선교사와 신자를 체포하거나 추방하고, 동시에 개종을 강요했다. 위로
이러한 막부의 금압은 오히려 신자들의 신앙을 강화시켰으며, 잠재하는 시도들이 각지로 퍼져가는 상황으로 되었기 때문에 막부는 카톨릭교를 전멸시키기 위해 가혹한 박해를 가하여 각지에서 장렬하게 순교하는 신도들이 적지 않았다. 거기에다 1622년 나가사키에서는 대순교라고 불리는 대규모 처형이 행해졌다. 이런 정세 속에 1637년 큐우슈우의 시마바라와 아마쿠사에서 신도 농민들의 봉기 (시마바라아마쿠사익키)가 일어났다.
막부는 1616년 유럽선의 기항지를 히라도와 나가사키로 한정함으로써 무역통제의 고삐를 죄었다. 이윽고 영국은 화란과의 경쟁에서 실패하고 이익면에서도 신통치 않자 1623년 스스로 히라도의 상관을 폐쇄하고 중국과 인도의 무역에 주력하게 되었다. 다음 해 스페인선의 내항마저 금지됐으며 또한 1635년에는 일본의 해외도항과 해외거주 일본인들의 귀국조차 전면적으로 금지되었다.
1635년 포르투갈인을 나가사키의 데지마로 옮겨서 격리시켜 놓고, "시마바라의 난" 후 1639년에는 포르투갈선의 내항을 금지하므로써 오랫동안 대일 무역의 주역이었던 포르투갈이 일본에서 철수하게 되고 이로써 본격적인 쇄국이 시작되었다. 막부가 쇄국을 취한 가장 큰 이유는 무역을 독점하여 막부의 재정을 확보하려는 경제적인 목적이었으며, 둘째는 정권안보의 차원에서 통치이념과 배치되는 그리스도교를 금지시키고, 셋째로는 큐우슈우의 시마즈 호소카와 아리마등의 번에서 그때까지 무역을 활발히 하여 부를 축적하자, 모반의 가능성을 원천 봉쇄하고, 다이묘오의 재정을 궁핍화 시키려는 통제책의 일환으로 쇄국을 실시한 것이다.
따라서 에도시대의 쇄국은 정치적으로는 체제의 안정을 굳건히 유지하면서, 경제적으로는 독점적인 통제무역을 통해서 폐쇄회로적 통상을 추구했던 것이다. 즉, 수입에서는 폭리를 취하고 해외정보를 독점하는 한편, 수출에서는 은의 과다 노출을 막아 물가를 조절하는 등 오늘날 말하는 소위 "통제된 국제무?quot;을 실시함으로써 메이지유신의 근대화 과정으로도 그 맥락이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1641년에는 유일한 유럽인인 화란 상인마저 히라도의 상관으로부터, 나가사키의 데지마로 격리시켜 일본인과의 접촉을 철저히 금지시키고, 막부의 파견관리인 나가사키부교오의 감시하에 두었다. 이러한 쇄국조치는 1854년 까지 존속되었다.
이러한 막부의 조치 목적에는 카톨릭 금지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것 이외에 해외 무역을 막부의 독점아래 두려는 의도도 더해져 있었던 것이어서 완전히 해외 관계를 차단하려고 한 것은 아니였다. 그러나, 그후 오랫동안 이러한 상태가 지속되는 동안에 쇄국이라고 해서 깨뜨려려서는 안되는 규정이라고 생각되게끔 되었다. 이처럼, 쇄국 체제는 일부분의 지배자를 제외한 일반 사람들을 세계문명의 빛으로부터 차단함으로써 현상을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세계진보의 자극으로부터 멀어지게 했고, 국내에 대한 엄중한 사상 통제와 더불어 막부 전제하의 봉건 사회를 오래 유지하려고 한 것이다.
결론;
처음에 이에야스는 카톨릭교의 포교를 묵인하고 있었으므로 신도들의 수는 점차 증가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영국과 네델란드이 등장으로 남만무역에 대신하는 새로운 무역루트가 열리자 묵인정책을 고쳐 1612년 직할령에 금교령을 내려서 교회를 파괴하고, 선교사와 개종하지 않는 카톨릭 교도를 국외 추방했다. 이에야스는 시마바라의 난과 같은 민의 통제와 사상적문제, 중앙에 의한 무역통제를 위해 카톨릭을 강하게 탄압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한 당시 일본 사회에 결핍되어 있던 가치관, 인간관, 세계관을 사회적 실천을 통해 영주 지배층뿐 아니라 일반 서민에게까지 가르쳐 주는 등, 일본근세의 서막을 장식하기에 충분한 일대 문화활동이었다고 보여진다.
일본의 영적현황
1. 60만 우상 일본의 어느 곳에 가던지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신사(神社)다.
이 곳은 일본의 고유 종교인 신도(神道)의 신령을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일본의 700만 우상들을 모시는 곳이다. 우리나라에서 십자가를 흔히 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는 神社를 흔히 볼 수 있다. 일본은 복음화율이 0.41% 로 우리가 평소 생각하던 일본보다는 영적으로 훨씬 심각하고, 가장 복음을 필요로 하는 나라 중의 하나이다. 천황제, 신사참배, 우상숭배, 물질만능주의, 가치관의 혼돈으로 영적 황무지이다. 그리고 일본은 중소도시의 70%의 지역에 교회가 전혀 세워져 있지 않은 가장 선교가 필요한 지역이다. 또한 기독교인들 조차도, 일부 사람들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집에는 불당을 차려 놓고 절하는 사람들도 있다.
2. 아직도 천황제를 유지하고 있어서,
'천황=신' 이라는 의식이 뿌리깊게 남아있다.
1800년대말 기독교가 처음으로 일본에 전해질 때, 잔혹한 핍박으로 선교사들이 선교를 포기하거나 약해졌다. 그 후,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전쟁을 일으키기 위하여 더욱 천황의 이미지를 강화하였고, 이를 통해 기독교는 거의 유명 무실 해졌다.
3. 젊은이의 관심 = 물질! 쾌락 ! 물질적으로 부요해지면서,
젊은이들은 종교나 천황제에 대해 관심은 없고, 오직 쾌락과 물질에만 빠져들고 있다. 그래서 일본의 곳곳에는 성적으로 타락한 문화들이 집 문만 나가도 접하게 된다. 그래서 일본은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나라' 라고도 한다.
4. 크리스마스 = '산타의 생일??'
선교의 사각지대라고 불리워지는 일본 열도의 1억 3천만 사람들은 출생 후 신사에 입적하고 결혼은 교회에서, 장례는 절에서 하는 혼합주의 종교성을 갖고 있으면서도 흔히 자신은 무신론자라고 말한다. 전 인구의 0.25% 정도(약 28만명∼32만명)가 정기적으로 교회 예배나 가톨릭 미사에 참여하고 있다. 경제면에서는 지난 3∼4년 동안 종신고용제가 무너지면서 받은 정신적 쇼크로 '98년 한해 동안 약 3만7천명의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러한 경제적 위기상황은 일본인들에게 지나친 현실집착이나 반대로 탈현실 현상을 일으키는 부정적인 영향도 주었지만, 2차대전후 경제부흥으로 놀랄만한 경제적 성장을 이룩하고 물질적 풍요를 누려 오던 일본인들에게 이제는 삶의 목적과 이유를 심각하게 반문하게 하는 계기도 만들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