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에 솟아오른 환상도시 팔미라와 우가리트(Ugar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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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모래사막 한가운데 땅 속에서 솟아오른 듯한 환상적인 도시 팔미라".
이것은 영국의 여성추리작가 아가사 크리스티가 팔미라를 방문한 후, 그곳에 매료되어 묘사한 구절이다. 시리아의 동부 사막지대 한복판에 세웠던 로마시대의 대도시 팔미라는 흔히 사막의 궁전이라고 불리며, 그곳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을 경이에 찬 감동과 찬탄으로 채워준다.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를 출발한 자동차는 새벽공기를 가르며 사막 길을 달린다. 사막에 만든 도로는 폭이 좁고, 노후했지만 다행히 교통량이 많지 않아 자동차는 빠른 속도로 질주한다. 다마스쿠스를 출발하여 약 240㎞쯤 달렸을 때 사막의 단색풍경에 익숙해진 눈에 갑자기 녹색의 울창한 야자수 숲이 신기루처럼 나타난다. 그러나 신기루가 아니다. 사막의 오아시스 도시 팔미라에 도달한 것이다.
팔미라가 있는 곳은 유프라테스강과 다마스쿠스 사이의 광대한 사막지대 안에 있는 오아시스 지역이다. 오늘도 이곳의 에프카(Efqa)샘에서는 수량이 풍부한 맑은 물이 바위틈 사이에서 솟아나 일대를 풍요롭게 적셔주고 있다. 이곳은 높이가 10m 이상 되는 종려야자와 대추야자 나무들이 큰 숲을 이뤄 주변의 사막과 대조가 되는 녹색의 이색지대다. 팔미라의 야자수는 고대부터 유명했다. 원래 이곳은 이름도 타드몰(Tadmor·구약의 다드모)이었다. 고대 셈족어로 야자수라는 뜻이다. 오아시스 도시로 발달한 팔미라는 예로부터 사막을 왕래하며 장사하던 카라반(caravan)들이 피곤한 몸을 쉬고 물을 공급받던 사막의 경유지였고, 동과 서를 잇는 교역도시였다.
이스라엘의 솔로몬 왕은 한때 이곳까지 영향력을 확장한 때도 있었다(구약 역대하 8장). 그러나 대부분 역사에서 팔미라는 정치적으로 독립적인 위상을 유지했다. 또 이곳을 지나는 대상들에게 세금을 거둬들였고, 사막의 교역로를 안전하게 지켜주는 대가로 통과세를 받기도 했다. 팔미라의 주민 중에는 국제 교역에 능력을 발휘하는 거상들도 생겨났다. 그 결과 팔미라는 부유한 도시로 성장했다. 팔미라의 전성기는 희랍과 로마시대였다. 그 때 도시의 이름도 본래의 타드몰에서 팔미라로 바뀌었고, 독자적인 군대를 가진 강력한 도시 국가로 발전했다.
로마제국시대에도 팔미라는 대체로 독립적인 지위를 유지했다. 오늘날 이곳에 남아있는 유적들의 대부분은 1∼3세기 로마시대에 건축한 것이다.
서기 260년대 팔미라에는 오데나투스 2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정치적 군사적으로 유능해 팔미라의 마지막 융성기를 구가했다. 그러나 그는 의문의 암살을 당한다. 역사가들은 왕의 암살 배후에 음모가 있었다고 생각하며, 음모의 주모자로 왕비 제노비아(Zenobia)에게 의혹의 눈길을 보낸다. 제노비아는 야심만만한 여자였다.
스스로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의 후손이라고 주장(역사가들은 이를 근거가 없는 것으로 일축한다)한 제노비아는 투구를 쓰고 말을 달리는 것이 취미였다. 그는 당당한 배포에 미모까지 갖춘 여걸이었다. 오늘날 남아있는 동전에 주조된 그의 모습은 상당한 미모였음을 보여준다. 그는 왕이 죽자 왕위에 오를 왕자가 미성년이라는 것을 구실로 모든 실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제노비아의 지나친 야심은 자신과 팔미라의 몰락을 가져오는 비극의 원인이 되었다.
서기 272년 제노비아는 아들에게 황제의 칭호를 수여하고 황제의 어머니로 자처했다. 로마의 황제가 이를 묵과할 리 없었다. 아우렐리안 황제는 친히 군대를 이끌고 팔미라로 진군해 성을 포위했다. 제노비아는 극적으로 포위망을 뚫고 팔미라를 빠져 나왔으나 유프라테스강을 건너려는 순간 로마 기병대에 붙잡히고 말았다. 제노비아는 황금사슬에 묶여 로마로 호송되었고 이로써 팔미라의 영광은 영원히 막을 내리게 되었다. 더욱이 11세기이 지역을 강타한 지진으로 팔미라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후 사막에 몰아치는 모래바람은 팔미라의 유적을 모조리 모래 더미 속에 파묻어 버리고 말았다.
오랜 망각의 시간이 지난 후 1930년대에 와서 팔미라의 발굴과 복원작업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약 16만평에 달하는 넓은 면적에 엄청난 유적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어 아직도 그 작업의 완결은 요원해 보인다. 팔미라에서 발굴한 유적은 전형적인 로마식이다. 그러나 그것은 겉모습일 뿐 내면적으로는 팔미라의 고유한 문명과 로마의 건축문명이 만나서 이룩한 독특한 문명이다. 사막의 도시 팔미라는 동양과 서양 두 문명이 만나 새로운 문명을 잉태한 문명의 산실이었다.
3,400년전 고도 문명 꽃피운 도성
1928년 봄 시리아 해안 지역의 작은 마을에서 한 여인이 밭을 경작하다가 땅 속에 묻혀 있던 석판 하나를 발견했다. 석판을 들어올리자 놀랍게도 그 밑에는 부장품이 가득한 고대의 묘실이 드러났다.
이 소식은 그 지역을 관할하던 관리를 통해 불란서 파리까지 알려졌다. 당시 시리아는 불란서의 위임통치를 받고 있었다. 묘실에서 발견된 부장품을 조사한 불란서 고고학자들은 크게 놀랐다. 적어도 3000년은 된 고대 유물이기 때문이었다. 곧 고고학자 클로드 세페르(Claude Schaeffer)를 발굴단장으로 하는 고고학 팀이 그곳으로 파송됐다. 20세기 성서고고학의 최대 업적 중 하나로 평가되는 우가리트(Ugarit)의 발굴은 이렇게 우연히 시작되었다.
고고학자로서 세페르는 대단히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묘실의 발굴은 고대 공동묘지 발굴로 이어졌고, 이것은 다시 고대 문명의 중심지 중 하나였던 우가리트 발견으로 이어졌다. 그는 평생을 우가리트 발굴에 바쳐 3000년 이상 땅 속에 파묻혀 있던 우가리트 문명을 세상에 알려 준 공헌자로서 고고학사에 빛나는 이름을 남겼다.
우가리트의 위치는 오늘날 시리아의 최대 항구도시 라타키아(Latakia)로부터 북쪽으로 10여㎞ 떨어진 해안 지역이었다. 봄, 여름이면 노란색 샤므라 꽃이 뒤덮어 오늘날은 라스 샤므라(Ras Shamra·샤므라 꽃이 피는 갑)이라고 불린다. 지중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바닷가 언덕 위에 있는 우가리트는 신석기시대까지 소급되는 오랜 역사를 지닌 도성이다. 그러나 이곳이 도시국가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서기전 2000년경이었다. 우가리트의 번영을 가져다 준 것은 지중해의 섬 키프로스(성경의 구브로)와 한 교역이었다. 키프로스 섬은 고대부터 구리 생산으로 유명했다. 우가리트는 그곳에서 구리를 수입해 구리가 귀한 지역에 팔았다. 이러한 국제 교역은 우가리트에 막대한 부를 가져다주어 서기전 14∼13세기에는 전성기를 구가했다.
우가리트의 발굴자 세페르의 최대 업적은 궁전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왕실문서를 보관했던 방을 찾아 낸 것이다. 그 방에서는 수천 점에 달하는 토판 문서들이 쏟아져 나왔다. 우가리트에서 발굴된 토판 문서들은 이스라엘의 사해 근처에서 발굴된 사해사본과 함께 금세기의 가장 중요한 고고학적 발견으로 손꼽힌다.
여기서 잠시 고대 시대의 문자 기록에 관해 살펴보자. 고대 근동지역에서 최초로 문자를 사용한 것은 서기전 3000년대 후반이었다. 오늘날 이라크 남부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수메르(Sumer) 문명이 일어났고, 그곳에서 가장 먼저 문자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최초의 문자는 그림 형태인 상형문자였다. 그러나 곧 쐐기 모양의 글씨체인 쐐기문자(설형문자·cuneiform)로 발전되었다. 설형문자는 고대 근동지역 전역에 널리 확산되어 사용되었다.
문자의 사용은 곧 토판문서를 만들어 냈다. 토판문서란 진흙을 물에 개어 책정도 크기의 진흙판을 만들고, 그것이 굳기 전에 대나무 같은 도구를 사용해서 글씨를 눌러 쓴 것이다. 이것을 햇볕에 말리거나 뜨거운 불에 구워 내면, 돌같이 단단해져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었다. 고대 근동지역의 왕실 문서 보관소 기록들은 대부분 이러한 토판문서다. 우가리트궁전에서도 이러한 토판문서들이 대량으로 출토됐다.쐐기문자 형태로 기록된 우가리트의 토판문서들을 연구한 고대 언어학자들은 대단히 중요한 두 가지 사실을 알아냈다.
첫째는, 우가리트에서 사용된 언어는 그 지역에서만 사용된 독특한 것이었다. 학자들은 이것을 우가리트어(Ugaritic)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언어는 구약성경에 기록된 히브리어와 동일한 셈족어로 두 언어는 언어학적으로 대단히 가까운 관계다. 히브리어와 언어적 유사성 때문에 우가리트어는 오늘날 히브리어연구에 크게 도움을 주고 있다. 구약학자들에게 우가리트어는 필수적으로 공부해야 할 언어다.
둘째로, 우가리트 토판문서는 쐐기 문자를 사용한 최초의 알파벳(alphabet) 기록이다. 우가리트 사람들은 모두 30개에 달하는 자음과 모음을 고안, 이를 사용해 엄청나게 많은 기록을 남겼다. 이것은 문화사적으로 획기적인 일이다. 이들 토판문서의 기록은 서기전 1000년대 후반 그 지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특히 종교 연구에 더없이 귀중한 자료다.
지금부터 3400년전, 고도의 문명을 꽃피웠던 우가리트는 서기전 12세기 경 계속된 가뭄과 지진, 그리고 외적의 침입으로 몰락했다. 그후 오랫동안 동면의 세월을 지나 세페르의 발굴에 의해 다시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박준서 교수의 '성서세계 탐방'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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