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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만의 당진행

작성자없이계신이|작성시간26.06.20|조회수20 목록 댓글 0

내가 참여하는 신신사(신앙과 신학 사랑방)는 기본적으로 연구발표와 토론을 하지만 한 달에 한 번은 '나를 찾아가는 여행'이라는 이름으로 자기 이야기를 한다. 6월에는 김남철 목사님이 발표를 했는데 아주 평범한 것 같지만 평범치 않은 길을 걸어온 길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디지털 책자 만들기 전문가인 조종주 형제와 함께 김 목사님의 이야기를 책으로 만들어 보려고 김남철 목사님을 만나기 위해서 당진시를 찾았다. 그런데 내가 당진을 찾은 것은 60년만이다.

 

1967년도 6월 8일 제 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3선 개헌을 해서 영구집권을 꿈꾸던 박정희가 개헌저지선을 확보하기 위해서 투, 개표의 모든 과정에서 사상최대의 부정선거를 저질렀다.

이에 대한여 규탄 시위가 전국 대학가에 들끓었지만 나는 야간대학을 다니고 있어서 데모를 하고 싶어도 쉽지가 않았다. 그래도 신입생 주제에 선배들을 설득해서 시위를 시작했지만 가득이나 학생 수도 적은데다가 대부분이 직장에 다니는 나이가 많은 이들이어서 적극적으로 나서지를 않았다. 생각다 못해서 야간에 주목을 끌기 위해서는 횃불을 드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횃불을 준비했다. 그런데 계획이 알려져 학생과장에게 불려가서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

당시 야간 대학 캠퍼스는 낙원동에 있었다. 하기는 서슬이 시퍼런 독재정권 시절에 시내 한 복판에서 횃불을 든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는데 갓 고등학교를 졸업했던 나는 그런 것까지는 생각을 하지는 못했었던

것이다.

훈계를 끝낼 때 학생과장이 혼자 중얼거렸다. “무슨 동학란도 아니고….횃불을….”

.

그 후 학장이 부르더니 종로경찰서에서 야간 도심 시위에 대하여 문제를 삼겠다니 2학기에 등록을 하면 부득히 징계를 할 수 밖에 없으니 휴학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휴학을 해서 할 일도, 지낼 곳도 없어서 재수를 하고 있던 당진에 있는 고교 동창의 시골 집으로 내려갔다.

몇달 동안 그곳에 있는 동안 동아방송국에서 모집하는 30 만원 상금이 걸린 방송 드라마를 썼다. 원고지 3,000매를 채워서 200매 요약본을 들고 동아방송으로 갔는데 배동순이라는 담당 PD 의 충고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당시 우리나라 라디오 드라마의 수준은 중졸 수준에 맞추어야 하는 것인데 내용이 너무 어렵다는 것이었다.

나는 용기도 무쌍하게 도스도예프스키의 ' 죄와 벌'에 감명을 받아 어설프게 근친상간의 줄거리로 인간의 죄의식에 관한 주제를 가지고 썼기 때문이다.

어설픈 장편이었지만 나중에라도 고쳐서 보다 성숙된 작품을 만들 수도 있었을 터인데 안타깝게도 동가식 서가숙 하는 처지에 원고 뭉치를 가지고 다닐 수가 없어서 친구집에 맡겨두었더니 친구어머니가 아궁이에 처넣어서 흔적 조차 없어져 버렸다.

.

당진 생활에서의 가장 기억이 나는 것은 상여를 맨 일이었다. 동네에 초상이 나서 집집마다 한 사람씩 나와서 상여를 매는데 내가 친구 대신 상여꾼으로 나섰다.

동구 밖에 상여를 보관하는 곳에서 재료들을 가져다 상여를 조립한 후 관을 올리고 종이 꽃으로 장식을 했다. 상여꾼들은 종을 울리며 앞에 가는 소리꾼의 노래를 이어 받아 큰 소리로 곡소리를 내며 상여를 메고 걸었다.

"어으 허... 어하....”

날씨가 더워서 시신에서 냄새가 나기 시작했는데 동네 사람들이 아무 것도 모르는 초자 상여꾼인 나를 바로 관 옆으로 밀어너어 지독한 냄새를 피할 수가 없었다.

상여가 가다 보면 우거진 나무들에 상여 위 쪽이 걸려 장식들이 부러져 나가기도 하고 장맛비에 질퍽해진 땅에 장화가 박혀버리기 하고, 땅이 꺼지는 바람에 중심을 잃고 넘어지기도 했었다.

 

생각해보니 다시 해볼 수 없는 사라진 문명사적인 경험을 해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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