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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건들

길거리 목사의 삶(20)-친구를 잘 만나야.

작성자없이계신이|작성시간20.07.18|조회수278 목록 댓글 0

평생에 도움이 되던 친구 가운데 언더그라운드 가수 이이언의 아버지인 이학주 교수가 있다.

이 교수와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많았는데 한 번은 그가 내게 이런 질문을 해온 일이 있다.


"야! 너희 기독교에 UFO라는 단체가 있지? 도대체 그게 뭐냐?" 


"UFO라니?" 


"그거 있잖아? 뭐 대학생 선교회인가 뭔가 하는?" 


나는 순간 웃음이 터졌다. 


"아! UFO가 아니고 UBF! 대학생 성경읽기 선교회라고 있지." 


ubf-logo-RGB.jpg 


그의 이야기는 이랬다. 자기 강의를 듣는 여학생 하나가 신경쇠약을 앓다가 자살을 했는데 그 학생의 일기 어딘가에 '이 교수님의 강의를 듣고 충격을 받았네. 어저꾸 저쩌구........' 하는 내용이 있었단다. 이 여학생은 대학생성경읽기 선교회의 회원이었는데 같은 UBF 선교회의 회원들이 문제의 일기 내용 때문에 항의(?) 성격의 방문을 왔단다. 그런데 문제가 된 것은 항의의 내용이 아니고 항의의 자격문제였다. 아무래도 친족인 것 같지가 않아서, 


"실례지만 고인과는 어떤 사이들이신지?" 


"OOO는 저희들의 자매입니다." 


"자매라니? 여러분들인데 어떻게 자매가 되시는지?"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형제자매입니다."


"뭐요? 혈연적 자매라면 혹시 내가 댁들과 대화를 할 필요가 있을지 모르지만 종교적 관계의 사람들과는 내가 할 말이 없소."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형제자매로서 마땅히……." 


"그런 관계는 당신네들 조직 안에서 내부적으로 성립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사회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관계가 아니라고 생각하오. 그만 돌아가시오." 


라며 돌려보냈다는 것이다. 이 교수의 논리는 특정 신앙체계 안에서 서로를 형제자매로 규정하고 그 논리를 바깥 세상에 그대로 적용하려는 것은 조폭에서 형제를 맺은 사람들이 문제가 생겼다고 시비를 거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는 것이었다. 듣고 보니 그것도 그럴 듯한 말이었다. 




이교수와함께공부중.jpg 우리방시간표.jpg 우리방전체사진.jpg 전통놀이중.jpg 물 주는 중.jpg 철거촌아이들.jpg 쌀씻는아이들.jpg 


첫 번째 사진의 사람 중 가운데에 있는 이가 이 교수다.

 

다른 길을 걷게 된 친구와는 멀어질 수도 있는 법이지만 이 교수는 그러지 않았다. 넓은 일터를 만나자 나는 도와줄 학생들이 필요하게 되었다. 당시 인천 교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던 이 교수는 학생들이나 졸업을 하고 발령을 기다리던 제자들을 모아서 보내주었다. 나중에는 교사가 모자라서 내가 직접 서울 교대를 찾아가서 봉사를 할 학생들을 모집해 충원을 해야 했을 정도였으니 이렇게 보내준 학생들은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다. 


1987, 1988년 두 해 동안 수십 명의 학생들이 하안동을 2명 씩 매일 교대로 찾아와서 활동을 해주었다. 이 교수는 틈틈이 하안동 현장을 찾아서 제자들이 잘하고 있는지 살펴보고 격려를 해주었다, 

 

얼굴이 유난히 귀여운, 초등학생처럼 생긴 P가 어느 무더운 여름날 버스에서 내려 먼지가 풀풀 날리는 안양천 뚝방길을 20여 분은 걸어야 올 수 있는 공부방에 들어오자마자 "아이, 목말라!" 하기에 내가 얼른 냉수를 가져다주었다. 그랬더니 같이 온 그 날의 당번이었던 친구가 웃으면서 "그 애는 그것으로 안돼요. 소주를 마셔야 돼요."라고 했다. 내가 "정말이야?"하고 장난삼아 가게가 가서 소주를 한 병 사다 주었다. P는 큰 물 컵에 소주를 붓더니 단숨에 꿀꺽꿀꺽 한 잔을 들이켰다. 내가 기겁을 해서 "아니 무슨 여자애가 술을 그렇게 마시냐?"라고 하니까 손으로 입술을 닦으면서 수줍게 웃었다.


그 후에 학교에 발령을 받고 난 다음에 토요일 오후에 공부방을 찾아온 P에게 학교생활이 어떠냐고 묻자 회식을 할 때가 제일 괴롭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자기는 술을 마시고 싶은데 신임 여교사 처지에 자기가 스스로 따라 마시기에는 어색해서 마음속으로 누가 권하지 않나 하고 기다린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젊은 남선생이 "이제 P선생도 한잔 해야지?"하면서 잔을 내밀면 옆에 있던 교감이나 나이 많은 남선생이 "어이? 무슨 짓이야? P선생에게 술을 권하다니?" 하면서 말려서 번번이 술을 마실 기회를 놓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P는 누구도 그녀가 술을 마실 줄 안다고 생각하기가 힘든 외모였기 때문이다. 애주가인 P가 술을 마시지 못하고 침만 꼴깍 삼키고 있을 장면을 상상하니 배꼽을 잡지 않을 수가 없었다. 또 한 번은 발령을 받아서 교장에게 인사를 갔더니 교장이 인사기록을 보더니 "운동을 하셨다고 하는데 무슨 운동을 하셨나?"라고 물었다고 해서 폭소를 터트린 적도 있었다.


이 교수는 이런 유쾌한 제자들을 보내 줄 뿐만 아니라 내가 매달 발행하던 '빈들의 소리'에 가명으로 권두언을 썼다. 국립대학의 교수로서 운동권 인사가 발행하는 간행물에 글을 연재한다는 것은 자칫하면 신분상의 불이익을 초래할 수 있는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필명으로 써야 했던 것이다. 


또한 우리가 사무실로 쓸 집이 없어서 전전긍긍할 때 박사학위 논문 출판을 준비하기 위해서 마련한 돈 170만 원을 빌려주어 단칸방이지만 내 집 마련을 할 수 있게 도와주기도 했다. 다행스럽게도 돈은 나중에 철거보상비를 받아서 갚을 수가 있었고 덕분에 나도 철거민이 되어 아파트 분양입주권이 나왔다. 그 입주권을 팔지 않고 끝까지 가지고 있다가 우여곡절 끝에 아파트 분양을 받고 아파트를 팔아 지금 살고 있는 시드니의 집을 살 수 있었으니 결국 이 모든 것이 이 교수 덕인 셈이다. 어려웠던 시절을 버텨낼 수 있었던 좋은 친구가 있었던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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