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나무의 여정 / 강미숙
낡은 책 한 권이 비에 젖어 나뒹군다
바래진 지면 속에는 닥나무로 시작되는
종이의 이야기가 들어 있다
닥나무가 숲으로부터 온 길은 수억만 킬로미터
수차례 도끼질에 허리 잘려도
뿌리째 뽑힌 적은 없었단다
이름을 묻어둔 자리에서는
유치 같은 새움이 돋고 있겠지
한 그루 나무는 한 두루마리의 종이
죽어가는 시집에 물을 주면 나무로 태어날까?
쓰다가 지워진 시어들은
기름진 거름이 되어간다
밑줄 쫙 그어지다 실금 든 가지마다
씨알 굵게 글자들이 열린다
나팔꽃 줄기가 책벌레처럼 기어오르면
오래도록 종이 내음이 향긋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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