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당신
사43:1 2008. 6. 15.
1. 모두 잘 알다시피 1인칭 대명사는 ‘나’요, 2인칭 대명사는 ‘너’, 그리고 3인칭 대명사는 ‘그, 그녀, 그것’이다.
그런데 한국말에는 큰 약점이 하나 있다.
2인칭 대명사가 어정쩡하다는 것이다.
거의 유일한 2인칭 대명사는 ‘너’인데 이는 낮추어 부르거나 동격의 사람에게 쓰는 말이다.
높임말로 ‘당신’이란 말이 있지만 사실 ‘당신’은 3인칭의 존칭대명사이다.
요즘은 2인칭으로도 쓰이기는 하지만 듣기에 따라 어감이 좋은 말이 아니다.
만일, 나보다 어린 사람이 나에게 ‘당신’이라고 부fms다면 기분이 좋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너’라고 부를 수 없는 상대방에게 찜찜하지만 그래도 ‘당신’이란 말고는 딱히 쓸 말이 없다.
그래서 자꾸 2인칭 대명사를 잘 쓰지 않게 된다.
잘 쓰지 않으니까 2인칭의 개념이 불투명해진다.
- 반면 영어는 다르다.
영어는 보통 존댓말이 없다.
2인칭도 낮춤말이나 높임말이나 모두 ‘You'라고 부른다.
그래서 상대방을 지칭할 때 고민할 필요가 없다.
‘You'라는 말을 자유롭고 활발히 사용한다.
그러니 2인칭의 개념이 우리보다 훨씬 분명하다.
게다가 영어에는 흔치 않은 존댓말이 예외적으로 2인칭에는 있다.
그것이 ‘Thou’다. 소유격은 Thy, 목적격은 Thee이다.
그래서 영어 주기도문을 보면 Thy name (당신의 이름), Thy will (당신의 뜻), Thy kingdom (당신의 나라)란 말이 나온다.
그러나 한국말 주기도문에는 마땅한 2인칭 높임말이 없으니 고민하다가 그냥 2인칭 소유격을 뺀 채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고, ‘나라’가 임하옵시고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이런 식으로 하든지, 새로 된 번역에서는 고육지책으로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의 나라, 아버지의 뜻’으로 헬라어 원문과 다르게 의역하였다.
- 이렇게 2인칭 개념이 불투명한 우리 말 때문에 한국 성도들의 올바른 영성 형성에 큰 지장을 초래하고 있고 신앙에 손해를 보고 있다.
-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하나님’ 즉 3인칭 하나님이 아니라 2인칭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부를 수 있을 뿐, 서술의 대상이 아니다.
반면에 3인칭은 만남의 대상이 아니다. 대화의 대상도 아니다.
사귐의 대상도 아니다.
3인칭은 관찰의 대상이요 이용이 대상일 뿐이다.
그러니 ‘그 하나님’은 관찰의 대상이요 이용이 대상에 머물 수밖에 없다.
‘그 하나님’에 대하여 연구하고, 토론하고, ‘그 하나님’을 이용하여 위안을 얻고 문제를 해결하지만, ‘그 하나님’을 만날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하나님’은 ‘당신으로서의 하나님’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 우리가 기도 응답 받았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을 만났다고는 말할 수 없다.
커피 자판기에 동전을 넣고 스위치를 눌렀을 때 커피 잔이 떨어지고 그곳에 커피가 채워진다고 해서 즉 자판기가 내 요구에 응답하였다고 해서 내가 자판기를 만났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만남이란 서로를 2인칭으로 부르고 서로 대화를 하는 인격적 대면인 것이다.
- 하나님은 물론 나의 기도에 응답하시지만 응답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그 응답을 통해 인격적으로 우리를 만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전능하신 자판기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만나야할 2인칭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한국말로 하나님을 ‘너’라고 할 수도 없고, ‘자기’라고 할 수도 없고 ‘당신’이라고 부르기도 그렇고..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항상 ‘아버지’라고만 부르는 것도 맞지 않는 일이니 아무래도 ‘당신’이라는 대명사를 사용하는 것을 밀고 나가야 할 것 같다.
2. “참된 삶은 만남이다.”
20세기 사상사에 큰 영향을 끼친 “I and Thou"라는 책의 저자 마틴 부버의 말이다.
내 삶의 정수, 삶의 의미는 ‘너와의 만남’에 있다는 말이다.
- 여러분, 과연 내 인생을 지배하는 존재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나일까?
나도 한 때 내 능력, 내 노력이 내 인생을 결정한다고 생각했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살아보니 그게 아니다. 내 인생을 지배하는 것은 내가 누구를 만났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떤 부모를 만났는가, 어떤 아내, 어떤 남편을 만났는가, 어떤 친구, 어떤 동업자를 만났는가, 어떤 자식을 만났는가, 어떤 목회자를 만났는가?
내 인생을 지배하는 것은 내가 아니고 오히려 내가 만난 ‘당신’이라는 존재들인 것이다.
나를 행복하게도 만들고, 불행하게도 만드는 것은 나 자신이라기보다 (물론 나도 중요하긴 하지만) 내 앞에 서 있은 “너, 당신”이라는 말이다.
이토록 나에게 2인칭은 결정적인 존재인 것이다.
(1) 우선, 2인칭 ‘너’와의 만남은 ‘나’라는 존재가 도대체 누구인가를 밝혀준다.
거울 앞에 서서 ‘나’란 도대체 어떤 존재일까, 질문해보라.
답이 나오던가? 안 나온다.
그러나 거울대신 아내 앞에 서보라.
그 순간- 즉 아내라는 2인칭 앞에 마주서서 대화하는 순간, 내가 누구라는 것이 금방 분명해 집니다. 바로 나는 ‘너’의 ‘너’인 것이다.
이렇게 2인칭 ‘너’는 ‘나’를 비추어주는 거울이다.
- 그리고 사실 인간의 의식 형성 과정을 살펴보면 2인칭 체험, 즉 ‘너’를 체험하는 것이 1인칭 체험, 즉 ‘나’를 체험하고 자각하는 것에 선행한다.
(2) 2인칭 ‘너’는 나를 지배한다.
평소에 잠이 많아서 밤하늘의 별들을 제대로 쳐다본 적도 없는 친구가 갑자기 이렇게 노래한다.
“그댈 위해서라면 나는 못할게 없네. 별을 따다가 그대 두 손에 가득 드리리” (이장희의 노래 ‘나 그대에게’에서)
그래서 깜깜한 밤에 사다리 찾고 난리를 피운다는 것 아닌가?
그대 위해서라면! 네가 원한다면... 이것이 바로 2인칭의 힘이다.
(3) 2인칭 ‘너’는 나의 생존의 절대 조건이다.
여기 또 하나의 유명한 유행가 가사가 있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님와 함께..”
주목할 점은 그림 같은 집을 짓고 나서 꼭 님이 나온다는 것이다.
3인칭이 아무리 멋지다 해도 거기서 함께 지낼 2인칭(사랑하는 님)이 없으면 한 백년이 무엇이란 말인가? 3일도 못산다.
사람은 2인칭 없이는 견디며 살 수가 없다.
- 죽음이란 무엇인가? 죽음이 왜 괴롭고 무서운가?
이 2인칭들과 어느 순간 아무런 기약도 없이 이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러분, 911 테러 이후 판매가 급증한 물건이 무엇인 줄 아는가?
바로 휴대전화기다.
사람들은 죽음을 코 앞에 둔 그 절박한 순간에 무엇을 하였을까?
911 때 보니까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 사랑하는 당신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랑했다고, 그리고 사랑한다고, 그리고 안녕.. 그리고 사라져 갔다.
1986년도에 일본에서 500명 이상이 사망한 일본항공 여객기 추락사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엔 휴대폰이 없을 때였지만, 대신, 사고 현장에는 메모지에 쓰인 수많은 편지들이 발견되었습니다.
편지는 2인칭에게 쓰는 것이지 3인칭에게 쓰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떨어지는 비행기 속에서 이렇게 사람들은 2인칭에게 편지를 썼던 것입니다.
(4) 2인칭 '너‘는 내 삶의 품질을 결정한다.
사르트르는 천국도 지옥도 모두 너로부터 온다고 했다.
황홀한 부부 간의 사랑을 체험할 때, 이 말이 실감이 날 것이다.
반면에 심각한 부부 갈등을 겪을 때, 또한 이 말에 공감할 것이다.
3인칭 그것들이 아무리 지옥 같아도 ‘너’가 천국이면 ‘나’도 천국이다.
그러나 3인칭 그것들이 아무리 천국 같아도 ‘너’가 지옥이면 ‘나’도 지옥이다.
3. 이렇게 우리의 인생의 본질은 2인칭과의 만남이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 맨 처음에 만나는 ‘당신’은? - 엄마다.
막 태어난 아이에게는 태어난 때가 여름이건 겨울이건 별 상관이 없다.
태어난 곳이 산부인과 분만실이건, 달리는 버스 속이건 별 상관이 없습니다. 3인칭은 별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이 아기에게 중요한 것은 눈앞에 있는 이인칭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삼인칭들은 모두 이 2인칭을 통해 오든지 말든지 하는 것일 뿐.
- 그 아이는 자라면서 또 다른 2인칭들을 만난다. 바로 친구들이다.
이것도 심각하다. 사춘기 때 친구들에게 소외(왕따) 당하면 못 견딘다.
- 그리고 좀 더 지나면 가장 중요한 2인칭, 즉 사랑하는 짝을 만난다.
그리고 그 만남 때문에 행복해하고, 그 만남 때문에 슬퍼하고,
좋아했다가, 혹은 티격태격했다가... 그렇게 산다.
- 그러나 어쩐 일인지 이 모든 이인칭들은 영원한 2인칭들이 아니다.
언젠가는 어떤 모습으로든지 헤어질 당신들이다.
그리고 완벽한 2인칭들도 아니다.
‘찬란한 당신’인 줄 알았는데 같이 살아보니 결코 찬란하지 않습니다.
찬란하기는커녕 불쌍한 2인칭, 때로는 남루한 2인칭 입니다.
그래서 서로에게 실망도 하고 상처도 받습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2인칭을 찾습니다.
상처 받으면서도, 그리고 언젠가 헤어질 줄 알면서도 또 2인칭을 찾아 헤맨다.
- 성도 여러분, 이 사실은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요?
왜 이렇게 우리는 2인칭을 찾아 헤매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만나야할 결정적인 2인칭이 존재한다는 단서요 증거인 것이다. 결정적 2인칭!
완전하고 찬란한 당신! 결코 헤어질 수 없는 영원한 당신!
누구입니까? 바로 나를 만드신, 나를 존재하게 하신, 그렇기에 나를 영원히 사랑하시는 2인칭 - 바로 하나님이시다.
- 아기가 처음 눈을 떠 마주 바라보게 되는 2인칭은? 엄마.
첫 인간 아담이 처음 눈을 떠 마주 바라본 2인칭은? 하나님.
아담 앞에서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신 분이다.
뒤에서 생기를 불어넣으시지 않았다.
앞에서 불어넣으셨다는 말은 처음부터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만남의 대면성’ 속의 그것이었음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인생의 참 2인칭, 영원한 당신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그의 고백록 제1권 1장에서 고백하기를
“당신은 나로 하여금 당신을 향하여(ad te) 살도록 창조하셨기에, 내 마음이 당신 안에서 쉴 때까지는 평안이 없었나이다.(안절부절 했었나이다)”라고 하였다.
- 하나님은 식물이나 다른 동물을 ‘너’라고 부르시지 않는다.
인간만이 하나님께서 ‘너’라고 불러주시는 유일한 동물이다.
왜냐하면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 그 모습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보고 ‘너’라고 불러주시니까 비로소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된다.
“내가 너를 지명하며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이사야 43장)
이 말씀 앞에서 우리는 이렇게 화답한다.
“아, 그렇군요! 나는 ‘찬란하고 영원하신 당신’의 ‘너’에 해당되는군요.
내가 나에 대해 스스로 생각했던 것보다 나는 특별한 존재이군요!
왜냐하면 나는 찬란한 당신의 ‘너’이니까요.”
4. 그러나 타락한 결과 우리에게 어떤 비극이 일어났는가?
바로 2인칭이 3인칭화이다.
‘당신 하나님’이 ‘그 하나님’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것을 철학자과 신학자들은 ‘소외’라고 부른다.
쉽게 말해 서먹서먹한 사이가 되는 것이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당신이라 부를 때와 서로를 그 여자, 그 남자라고 부를 때를 비교해보면 3인칭화의 서먹서먹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 그렇다면 구원이란 무엇인까?
3인칭으로 멀어졌던 그 하나님을 2인칭 내 하나님으로 다시 모시는 것,
즉 원래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여러분이 만일 그동안 신문이나 TV에서 보던 배용준을 지금 여기서 만나 서로 마주보고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동안 듣고 보고 생각하던 3인칭, 배용준과, 지금 만나서 내 앞에 앉아있는 배용준 당신은 완전히 차원이 다른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배용준이 온다고 하면 일본 여성들이 공항에서 그를 직접 보려고 그 난리를 피우며 행여나 자기 앞에 다가와 자기에게 말을 걸어줄까 기다리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3인칭으로 생각하는 그 하나님과 2인칭으로 만나는 내 하나님은 정말 하늘과 땅 차이다.
- “참으로 행복한 사람은 하나님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한마디라도 말을 걸 줄 아는 사람이다” 마틴 부버의 말이다.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내 하나님으로 모시고 대화하고 있는가?
- 이렇게 구원은 관계의 회복, 다른 말로 ‘화해 또는 화목’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를 위해 세상에 오셔서 기꺼이 화목을 위한 제물로 자신의 목숨을 주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아버지를 만날 자가 없느니라)”
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주파수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너무 거룩하시고 인간은 너무 비참하고 한심하다.
이런 상태로 서로 3 인칭화 되었기 때문에 만남과 대화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지니신 특별한 분이 중간에서 중보자가 되셔야 한다.
그 중보자가 바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
너희도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그 분 안에 거할 때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신 찬란하신 아버지 하나님’을 ‘당신으로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예수를 믿는 궁극적이고 근본적인 이유요 목적이다.
예수의 이름으로 병 낫고, 예수의 이름으로 죄 사함 받는 것은 다 이 찬란한 만남의 사랑방으로 들어가는 현관문에 해당하는 것이다.
5. 나의 근본적인 욕구는 무엇일까?
정말, 진심으로, 내 내면 깊은 곳에서 내가 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들’을 소유하는 것을 가장 원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내가 참으로 원하는 것은 ‘영원하고 절대적인 찬란한 당신’와 하나 되는 것이다.
찬란한 당신이신 하나님은 그런 나를 부르고 계시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우리는 우리 기도에 응답해달라고 하나님에게 요구한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실 때, 아브라함이 “주여, 제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했던 것처럼 우리가 먼저 응답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것이 바로 대화요 만남이 아닌가?
이것이 참된 삶의 처음이요 마지막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