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일반 게시판

무학대사

작성자도원|작성시간26.06.13|조회수24 목록 댓글 0

● 무학대사 출생 사망이야기

무학은 태어날 때 여러 이야기가 있다. 현 대병면 집터에서 빨래하려 나간 엄마가 봉산 쪽에서 황강 물에 떠내려 오는 오이를 먹고 출생했다는 설도 있다. 창녕 우포늪에서도 이런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합천 고장의 출생 이야기는 이러하다. 합천댐 아래 대병면 집터 박안일의 아내 채씨(인천 채씨)~아 이상하기도 해라 한줄기의 환한 빛이 내 가슴을 쫙 비추고 사라지더니... 건강한 사내 아이를 낳았는데 그가 바로 무학이었다. 어렸을 적 주변 서당을 다녔는데 공부를 할 때는 먹은 것 자는 것도 잊어비릴 정도로 열심히... 18세에 불문에 입적하기 위해 고향을 떴다. 휼륭한 스승을 찾아 멀리 중국에서 공부를 한 후 무학은 고국으로 돌아왔다. 고려 31대 공민왕은 무학에게 왕사를 제의했다고 한다. 그러나 왕실에서 자기를 헐뜯는 무리가 많아 무학은 거절하게 되었다고 한다. 서산 고장의 출생 이야기는 이러하다. 70년도 신라문화회원과 2명과 소인이 서산군청과 간월암으로 탐방차 갔다. 당시 간월암에 군청에서 표지문을 세워두었는데 내용이 이러했다. 타지 출신 고령 서천 박현감의 아내가 아이가 없어 멀리 간월암까지 와서 불공을 올렸는데 태기가 생겨 이곳에서 해산, 출생하게 되었는데 서해바다 학의 무리가 날아와 간월암 주변을 밤낮없이 수일을 축복해 주었다고 한다. 무학이 출생 후 박 현감 가족은 현직에서 떠나 고향으로 갔던 것으로 전한다고 기록되어 있어 주변 고을에 연고가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고려 말 신돈의 정치개입과 실정을 상소하던 하륜의 조부 하시원은 여러 차래 귀향살이를 했고, 당시 10여년 귀양살이를 하던 정도전은 이성계를 찾아 유문국 개국을 여러 차례 논의했다. 이성계는 현 조정 고려 불문국을 제대로 정리할 민족의 거인이 필요했다. 함경도에서 이성계가 먼저 무학대사를 찾았다. 당시 상황를 보면 이성계는 무학을 모르고 있었지만 무학은 고향 친척처럼 이성계를 소상히 알고 있었다. 이를 계기로 정치적 콤비가 되어 황매산 영암사 무지개 터, 용주 용궁지에 무학과 이성계가 오게 되었다. 무학은 소승은 황매산 출생 민족통일 명군 김춘추 통일신라 300여년 외손이고 이 장군은 김춘추의 외손이고 황매산 도시조 이한의 후손입니다. 고려와 조선은 역성혁명이라 보기는 민족의 미래를 위해 불문에서 유문 왕씨 외손에서 이씨 외손으로 승계받은 것에 불과합니다. 역성혁명의 굴레에서 마음적으로 너무 괴로워 미세요. 그 후 1392년 불문 고려는 멸망하고 유문 조선이 건국되었다. 그 후에도 무학대사는 소요산 자재암 양주 회암사 금강산 암자를 오가며 불문에 정진하고 있었다. 소요산 자재암에서 정진 중 대낮에 거지 왼 똘중이 나타나 무학 이놈! 이리 나오너라 해서 나가니 다짜고짜 고려에서 조선도 좋다 불문애서 유문도 좋다는 것은 그렇다 치고 그런데 왜 죄 없는 중생은 많이 죽게 방치했느냐? 네놈 외삼촌 채귀하를 왜 두문동에서 불태워 죽게했느냐? 지옥 중에 지옥에 가거라! 무학 땡중 놈아! 하면서 자신을 폭헹해 자세히 보니 부처님이 때가 되어 나를 대리려 오갰구나 하면서 짐을 챙겨 행자를 데리고 간월암으로 내려가 며칠 불공 중 밤마다 악몽을 꾸다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무학대사가 세상을 뜨자 태어날 때와 같이 서해의 학들이 무리로 날아와 간월암에서 같이 지내면서 슬퍼하였다고 한다. 행자는 무학대사의 유언대로 간월암 주변에서 화장 후 이송 금강산 암자에 봉안하였다. 그 후 태종 이방원이 스승의 예를 갖춰 비문을 짓고 회암사 뒷산자락에 부도탑을 세워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다. 그 후 무학의 제자로는 이방원 이숙번 하륜 신숙주 황희 한명희 등이 거론되기도 합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