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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요시모토 바나나: 달빛그림자

작성자은밤|작성시간06.11.11|조회수793 목록 댓글 2

달빛그림자 (ム-ンライト·シャドウ)

                                      - 요시모토 바나나 

 

히토시는 조그만 방울을 전철표를 넣는 지갑에 매달아, 항상 지니고 다녔다.

그것은 우리들 사이가 사랑으로 영글지 않았을 때, 내가 정말 아무 뜻 없이 준 건데, 마지막까지 그의 곁을 떠나지 않는 운명을 짊어졌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수학여행을 준비하면서, 서로 다른 반이었던 우리는 여행위원으로 알게 되었다. 정작 여행 때는 반별로 반대 코스를 돌게 되어, 내려가는 신칸센만 같이 탔다. 홈에서 우리는 장난을 치면서 헤어짐이 아쉬워 악수를 하였다. 나는 그때 집에서 기르는 고양이 목에서 떨어진 방울이 주머니 속에 들어 있다는 것이 문득 생각나, 작별 선물, 이라며 건넸다. 그는 이게 뭐야, 라고 웃기는 했지만 함부로 다루지 않고 소중하게 손수건에 쌌다. 그 나이 또래의 남자아이한테는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라서 나는 무척 놀랐다.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그것이 나한테 받은 특별한 것이라 해도, 그가 바르게 자라 다른 사람한테 받은 물건을 함부로 다루지 못한다 해도, 순간적으로 그렇게 한 태도에 나는 상당히 호감을 품었다.

그리하여 방울은 마음을 통하게 했다. 만날 수 없는 여행 내내, 서로 방울에 신경이 쏠려 있었다. 그는 방울이 울릴 때마다 나와, 내가 있었던 여행 전의 나날을 알게 모르게 떠올렸고, 나는 먼 하늘 아래서 울리고 있을 방울과, 방울과 함께 있는 사람을 생각하며 지냈다. 돌아와서 일대 연애가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어언 4년 동안, 방울은 모든 낮과 밤, 모든 사건을 함께 하였다. 첫 키스, 말다툼, 개이고 비오고 눈 온 날들, 함께 지낸 첫 밤, 모든 웃음과 눈물, 좋아했던 음악과 텔레비전 프로그램 - 둘이서 있었던 모든 시간을 공유하면서, 히토시가 지갑 대신 그 전철표 지갑을 내미는 손과 함께, 늘 딸랑딸랑 조그맣고 투명한 소리로 울렸다. 귓전을 맴도는 사랑스런, 사랑스런 소리다.

그런 기분이 들었다는 말 따위, 나중이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소녀의 감상이다. 그러나 나는 말한다. 그런 기분이 들었다고.

늘 이상했다. 히토시는 때로 아무리 빤히 쳐다보고 있어도 그 자리에 없는 듯한 기분이었다. 자고 있을 때도, 나는 어째서인가 몇 번이나 그의 심장에 귀를 갖다 대지 않을 수 없었다. 웃는 얼굴이 너무도 환하게 빛나면 눈동자를 조아리고 보았다. 그는 늘 그 분위기와 표정에 어떤 류의 투명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허망하고 불안하게 느껴지는 것이리라고 줄곧 생각하고 있었는데, 만약 그게 예감이었다면 이 얼마나 애처로운 일인가.

애인을 잃은 것은 긴 인생, 그래봐야 20년 정도지만, 에서 첫 경험이었고 나는 숨이 멎는가 싶을 만큼 고통스러워했다. 그가 죽은 밤부터 나의 마음은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여 좀처럼 원래 자리로 돌아오지 않는다. 도저히 옛날 같은 시점으로 세계를 볼 수가 없다. 머리가 불안정하게 떠올랐다가는 가라앉아 침착하지 못하고 멍하니 늘 괴롭다. 사람에 따라서는 평생에 한 번도 하지 않아도 좋을 일(임신 중절, 물장사, 큰 병치레 등) 중 하나에 이렇게 참가하게 된 것을, 그저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그야 아직 우리는 젊었고, 인생의 마지막 사랑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우리는 두 사람 사이에서 난생 처음으로 여러 가지 드라마를 보았다. 사람과 사람이 깊이 관여하여 보게 되는, 다양한 사건들의 축적을 확인하면서, 하나하나 알아가면서 4년을 쌓아갔다.

지금은 큰 소리로 말할 수 있다.

하느님 바보. 나는 히토시를 죽도록 사랑했습니다.


히토시가 죽은 지 두 달, 나는 매일 아침 그 강에 걸려 있는 다리 난간에 기대어 뜨거운 차를 마셨다. 잠을 잘 수가 없어서 새벽에 조깅을 시작하였고, 거기가 바로 되돌아오는 지점이었다.

무엇보다 밤이면 잠들기가 무서웠다. 아니 눈뜰 때의 충격이 감당할 수 없었다. 퍼뜩 눈을 뜨고 자기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알 때의 깊은 어둠에 떨었다. 나는 항상 히토시와 연관된 꿈을 꾸었다. 숨 막히고 옅은 잠 속에서 히토시를 만나기도 하고 만나지 못하기도 하면서, 항상 이건 꿈이고 실제로는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잠 속에서도 눈을 뜨지 않으려고 애썼다. 몸을 뒤척이고 식은땀을 흘리면서, 토할 듯한 우울 속에서 멍하니 눈을 뜨는 추운 새벽이 몇 번이었던가. 커튼 너머가 밝아지고, 파르스름하게 숨 쉬는 시간 속에 나는 방치된다. 이럴 거면 차라리 꿈속에 있는 게 나았다고 생각할 만큼 외롭고 춥다. 더 이상 잠들지 못하고 홀로 꿈의 여운 때문에 허덕이는 새벽이다. 항상, 그 시간에 눈을 뜬다.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해서 지칠 대로 지치고, 아침의 첫 빛을 기다리는 길고도 광기처럼 고독한 시간에 공포를 느끼기 시작한 나는 달리기로 마음먹었다.

비싼 트레이너 셔츠를 두 벌이나 사고 운동화를 사고, 마실 물을 넣는 조그만 알루미늄 마호병까지 샀다. 물건부터 사들인 점이 언짢았지만, 미래를 향하는 일이라 용납하기로 했다.

봄방학이 시작되자마자 나는 달리기 시작하였다. 다리까지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수건과 옷을 깨끗하게 빨아 건조기에 넣고 돌렸다. 그러고서 아침을 준비하는 엄마를 거들었다. 그런 다음 조금 잔다. 그런 생활을 계속 하였다. 밤에는 친구를 만나거나 텔레비전을 보면서 가능한 한 여유 시간이 생기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노력하였다. 그러나 무모한 노력이었다. 정말 하고 싶은 일은 하나도 없었다. 히토시를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어떻게든 손과 발과 몸과 마음을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노력을 무심히 계속하면 언젠가는 무슨 돌파구가 생길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보장할 수는 없지만 그때까지 어떻게든 버티자고 다짐하였다. 개가 죽었을 때도, 작은 새가 죽었을 때도, 대개는 이런 식으로 버텼다. 이번은 특별한 경우다. 아무런 전망도 없이 바삭바삭 메말라 가는 나날이 지나간다. 나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계속 뛰었다.

괜찮아, 괜찮아, 언젠가는 여기서 벗어날 날이 올 거야.


돌아오는 지점인 강은, 도시를 대충 둘로 가르는 큰 강이다. 하얀 다리가 걸려 있는 그 장소까지 20분 정도 걸렸다. 나는 그 장소를 좋아한다. 강 너머에 사는 히토시와 늘 만나던 곳도 거기였다. 그가 죽은 후에도 나는 그곳을 좋아한다.

아무도 없는 다리에서, 강물 소리를 들으며 마호병에서 뜨거운 차를 따라 천천히 마시고 쉰다. 하얀 둑이 하염없이 이어지고, 파란 새벽안개로 도시의 풍경이 아른하게 보인다. 투명하고 싸늘한 공기 속에서 그렇게 서 있으면 자신이 아주 조금은 <죽음> 가까이에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실제로 그 혹독하고 투명하고 고독한 풍경 속에서만 나는 편히 숨 쉴 수 있었다. 자학, 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시간이 없으면 나는 그날 하루를 제대로 보낼 자신이 일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의 나한테는 절실하게 그 풍경이 필요했다.

그날 새벽에도 무슨 나쁜 꿈을 꾸다가 퍼뜩 눈을 떴다. 5시 반이었다. 날이 맑을 듯한 새벽이면 나는 항상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가 달렸다. 아직 어둡고, 아무도 없다. 공기는 차갑고, 도시는 부옇다. 하늘은 짙은 군청색이고, 동쪽에서부터 붉은 기가 엷디엷게 퍼져 나오고 있다.

나는 쾌활하게 달리려 애썼다. 때로 숨이 가빠지면, 잠도 제대로 못 자는데 이런 식으로 달리는 것은 자신의 몸을 괴롭히는 일일 뿐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돌아가면 잘 거니까, 라며 불투명한 머리로 애써 지웠다. 잠잠한 도시를 빠져나갈 때면 정상적인 의식을 유지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강물 소리가 다가오고, 하늘이 시시각각 변화한다. 파랗게 밝아오는 하늘을 통하여, 아름답고 맑은 하루가 찾아온다.

나는 다리에 도착하면 늘 버릇처럼 난간에 기대어, 파란 공기 속에 가라앉아 있는 부연 도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콸콸 힘차게 흐르는 강물 소리가 울리고, 하얗게 거품을 일으키며 모든 것을 씻어간다. 땀이 잦아들고, 얼굴로 차가운 강바람이 분다. 아직은 추운 3월의 하늘에 투명한 반달이 비스듬히 떠 있다. 숨이 하얗다. 나는 강을 보면서 마호병 뚜껑에 차를 따라 마시려 하였다.

그때,

「 무슨 차? 나도 좀 마시고 싶은데 」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 나는 깜짝 놀랐다. 너무 놀라 마호병을 강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손에는 뚜껑에 담긴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차 한 잔이 남았다.

여러 가지 가능성을 생각하면서 돌아보자, 한 여자가 웃는 얼굴로 서 있었다. 나보다 나이가 많다는 것은 알겠는데 어쩐 일인가 나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고작해야 스물다섯 정도.... 단발머리에 눈동자가 아주 투명했다. 얇은 옷에 하얀 코트를 입었는데도 전혀 추위를 느끼지 않는 듯 소리 없이, 정말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녀는 거기에 서 있었다. 

그러고는 조금은 달큰한 비음 섞인 목소리로 반갑다는 듯,

「 지금, 그림이든가, 이솝이든가, 개 이야기하고 참 비슷하네 」

라고 웃으면서 말했다.

「 그 경우는 」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뼈를 놓쳤잖아요. 가해자는 없었어요 」

그녀가 미소지으며,

「 그럼 다음에 마호병 사줄게요 」

라고 말했다.

「 고맙네요 」

라면서 나도 웃어보였다. 그녀가 너무 자연스럽게 말해 나는 무섭지 않았고, 나까지 별 일 아니라고 생각하고 말았다. 더구나 그녀는 머리가 약간 이상한 사람이나, 새벽녘의 술주정뱅이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그녀는 지적이고 그 눈동자는 맑고, 마치 이 세상의 슬픔도 기쁨도 모두 삼켜버린 뒤 같은 깊은 표정을 지니고 있었다. 팽팽하게 긴장한 공기가 그녀와 함께 하고 있었다.

나는 차를 한 모금 마셔 목을 축이고 나머지를,

「 여기 있어요. 푸알차 (-녹차를 누룩으로 발효시킨 차) 」

라며 그녀에게 내밀었다.

「 아, 그 차 굉장히 좋아해 」

라며 그녀가 가느다란 손으로 뚜껑을 받아들었다.

「 지금, 막 여기 도착했어요. 꽤 멀리서 왔거든 」

여행자 특유의 고양된 반짝이는 눈으로 그녀가 말하고 수면을 내려다보았다.

「 관광으로? 」

이렇게 아무 것도 없는 곳에 뭣하러 왔을까 싶어 내가 물었다.

「 네. 알아요? 얼마 안 있으면 백 년에 한번뿐인 볼거리가 있다는 거 」

그녀가 말했다.

「 볼거리? 」

「 그래요. 조건이 갖춰지면 」

「 어떤 조건? 」

「 아직은 비밀. 하지만 꼭 가르쳐 줄게요. 차를 나눠주었으니까 」

그녀가 그렇게 말하고 웃어, 나는 우물쭈물 그 다음 질문은 하지 못했다. 다가오는 아침 기운이 온 세계를 가득 채운다. 빛이 하늘의 파랑에 녹고, 희미한 광휘가 공기층을 하얗게 비춘다.

나는 슬슬 돌아가자 싶어,

「 그럼 」

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맑은 눈동자로 똑바로 나를 보면서,

「 난, 우라라, 넌? 」

이라고 말했다.

「 사츠키 」

라고 나는 내 이름을 일렀다.

「 조만간 다시 만나요 」

- 우라라는 - 그렇게 말하고 손을 흔들었다.

나도 손을 흔들고 다리를 떠났다. 그녀는 묘했다. 그녀가 하는 말은 뭐가 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아무래도 평범하게 생활하는 인간 같지 않았다. 점차 달리는 속도를 늘이자 의문도 깊어지고, 왠지 불안하여 돌아보자, 우라라는 아직 다리에 있었다. 강을 내려다보는 옆얼굴이 보였다. 나는 놀랐다. 그녀의 얼굴이 내 앞에 있던 때와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듯 엄숙한 인간의 표정을 본 적이 없었다.

내가 멈춰섰다는 걸 알자 그녀는 다시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나도 당황하여 손을 흔들고 다시 뛰기 시작했다.

- 대체 어떤 사람일까. 나는 잠시 생각했다. 밝아오는 아침 속에서 드디어 졸려오는 머리로 우라라란 그 불가사의한 여자의 인상만이 눈부시게 부각된 날이었다.


히토시한테는 아주 유별난 동생이 있었다. 그는 사고방식이나 사물을 대하는 방식이 조금씩 묘했다. 나는 처음 그를 봤을 때부터, 마치 다른 차원에서 성장하여 철이 든 순간, 달랑 내던져진 그곳에서 살아가는 식의 삶이라고 생각해 왔다. 이름은 히라기라고 한다. 죽은 히토시의 친동생이고, 이번 달에 열여덟 살이 되었다.

히라기는 약속 장소인 백화점 4층 찻집에 세일러복 차림으로 나타났다.

나는 사실은 좀 창피했지만, 그가 너무도 예사롭게 찻집으로 들어오길래 평정을 가장했다. 나와 마주하여 앉자 잠시 숨을 돌리고,

「 기다렸어? 」라고 물었다.

내가 고개를 젓자 밝게 웃었다.

그가 주문을 하자, 웨이트리스는 그를 빤히, 빤히 위에서 아래로 죽 훑어보고는 신기하다는 듯, 네, 라고 말했다.

얼굴은 별로 닮지 않았지만 히라기의 손가락이며, 사소한 표정의 변화에 나는 심장이 멎을 뻔하곤 했다.

「 앗 」

나는 그때 일부러 소리 내어 말했다.

「 왜 그래? 」

라며 한 손에 컵을 든 히라기가 나를 본다.

「 다, 닮았어 」

라고 내가 말한다. 그러면 그는 항상 <히토시 흉내>라면서 히토시를 흉내 냈다. 그리고 둘이서 웃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마음의 상처를 희화하며 노는 정도밖에 달리 길이 없었다.

나는 애인을 잃었지만, 그는 형과 애인을 동시에 잃었다.

그의 애인의 이름은 유미코, 그와 같은 나이에 테니스를 잘 치고 키가 조그만 미인이었다. 나이가 비슷해 넷이서 사이좋게 놀러 다니곤 했었다. 히토시네 집에 놀러 가면, 히라기 방에 유미코 씨가 있어 넷이서 밤을 새워가며 게임을 한 적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 밤, 히토시는 히라기를 찾아온 유미코 씨를, 나가는 길에 역까지 태워다 준다고 같이 나갔다가 사고를 당했다. 그에게 잘못은 없었다.

그러나 둘 다 그 자리에서 깨끗하게 즉사하고 말았다.


「 조깅, 하고 있어? 」

히라기가 물었다.

「 응 」

내가 말했다.

「 조깅하는 셈 치고는 살이 좀 찌신 것 같은데 」

「 낮에는 꼼짝 않고 집에 처박혀 있으니까 」

나도 모르게 웃었다. 사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보면 확실하게 알 수 있을 정도로 야위어가고 있었다.

「 운동한다고 건강이 다 보장되는 건 아니야. 참, 무지무지하게 맛있는 튀김 덮밥 하는 집이 동네에 새로 생겼는데. 칼로리도 있고. 먹으러 가자. 지금 당장 」

그가 말했다. 히토시와 히라기는 성격은 전혀 달랐지만, 그래도 올바르게 자란 데서 오는 이런 허심탄회한 친절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 있었다. 마치 방울을 살며시 손수건에 싸는, 그런 친절이었다.

「 응, 좋아 」

나는 말했다.

지금 히라기가 입고 있는 세일러복은 유미코 씨의 유품이다.

그는 사복을 입는 고등학교에 다니는데, 그녀가 죽고부터는 그 세일러복을 입고 등교하고 있다. 유미코 씨는 이 옷을 좋아했다. 양쪽 부모님이 모두, 그렇게 하면 유미코 씨가 기뻐할 리 없을 거라고 치마 입은 남자를 만류하였다. 그러나 히라기는 웃으며 말을 듣지 않았다. 그때 내가, 그 옷 감상으로 입는 거니? 라고 묻자 그는, 그런 게 아니야.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고, 현실은 현실이지, 라고 대답했다. 그렇지만 차분해진다고.

「 히라기 너, 언제까지 그 옷 입고 다닐 거야? 」

라고 묻자,

「 모르겠어 」

라고 말하며 다소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 모두들 이상하다고 하지 않니? 학교에서, 이상한 소문 안 생겨? 」

「 아니, 그런 게 나아 」

그가 그렇게 말했다.

「 동정표가 굉장해. 여자애들이 얼마나 좋아하는데. 치마를 입으면 역시 여자 기분을 알아줄 것 같아서일까 」

「 그거, 다행이로구나 」

나는 웃었다. 유리창 너머 매장에서는 손님들이 신나게 시끌거리며 지나간다. 봄옷이 조명을 받으면서 죽 진열돼 있는 백화점의 모든 것이 행복해 보인다.

지금은 잘 안다. 그의 세일러복은 나의 조깅이다. 똑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만큼 유별난 인간이 아니라서 조깅으로 충분할 뿐이다. 그는 조깅 정도로는 전혀 효과가 없고 자신을 지탱하기에 부족하여 변주로 세일러복을 선택했다. 양쪽 다 시든 마음에 활력을 불어넣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기분을 다른 데로 돌려서 시간을 버는 것이다.

나나 히라기는 요 두 달 사이에, 십여 년을 살면서 한 번도 지어본 적이 없는 표정을 짓게 되었다. 그것은 잃어버린 것을 아쉬워하지 않으려 싸우는 표정이었다. 문득 떠올라 불현듯 고독이 밀려오는 어둠 속에 서 있다 보면 알게 모르게 그런 표정이 되고 만다.


「 저녁 밖에서 먹을 거면, 집에다 전화할게. 아아, 히라기는? 집에서 먹지 않아도 돼? 」

내가 일어서려고 하자 히라기가,

「 아 참, 그렇지. 오늘 아버지 출장 가셨지 」

라고 말했다.

「 엄마 혼자 계셔? 그럼 집에 가야지 」

「 아니, 일인분만 집으로 배달시키면 돼. 아직 이른 시간이니까 아무 것도 준비 안 했을 거야. 돈은 미리 지불하고, 저녁 식사는 아들이 한 턱 내지 뭐 」

「 제법 귀여운 기획인데 」

라고 내가 말하자,

「 기운이 날 것 같은데 」

신난다는 듯 히라기가 웃었다. 이런 때, 평소에는 어른스러운 이 소년이 나이에 어울리는 얼굴이 된다.


어느 겨울날, 히토시가 말했다.

「 동생이 있는데, 히라기라고 해 」

그때 처음으로 그한테 동생 이야기를 들었다. 당장이라도 눈이 내릴 듯, 무거운 회색 하늘 아래, 우리는 학교 뒤켠에 있는 긴긴 돌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오버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하얀 숨으로 히토시가 말했다.

「 그런데 어째 나보다 어른스러워 」

「 어른이야? 」

나는 웃었다.

「 뭐랄까, 배짱이 두둑하다고나 할까. 그런데도 가족들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어린애 같은 게 우스워서. 어제, 아버지가 유리에 손을 약간 벴는데, 정말 겁을 먹고 바들바들 떨더라니까. 굉장했어. 하늘과 땅이 뒤집히기라도 한 것처럼, 너무 뜻밖이라서, 지금 생각났어 」

「 몇 살인데? 」

「 그러니까, 열다섯인가? 」

「 히토시하고 닮았어? 만나보고 싶다 」

「 하지만 그 녀석, 굉장히 유별나니까. 형제라고 여겨지지 않을 정도. 만나보면 나까지 미움 받을 것 같다. 그래, 진짜 이상한 녀석이야 」

형다운, 아주 형답게 웃는 얼굴로 히토시가 말했다.

「 그럼. 동생이 좀 이상하다는 이유 때문에 사랑이 흔들리지 않을 만큼 세월이 지난 다음에 만나게 해 줄래? 」

「 아니 농담이야. 괜찮아. 틀림없이 사이좋게 지낼 수 있을 거야. 너도 좀 이상한 구석이 있잖아, 히라기는 선한 사람한테는 민감하니까 」

「 선한 사람? 」

「 그래 」

히토시가 얼굴을 옆으로 돌린 채 웃었다. 그런 때는 늘 부끄러워했다.

계단은 경사가 심해, 저절로 발길이 급해졌다. 하얀 학교 건물 유리창에 저물기 시작한 겨울 하늘이 투명하게 비쳐 있었다. 한 단 한 단을 밟는 검은 구두와 스타킹과, 내 교복의 치맛자락을 기억하고 있다.


밖에는 봄내음 가득한 밤이 찾아와 있었다.

히라기의 세일러복이 코트 속으로 숨어 나는 조금 안도하였다. 백화점의 불빛이 보도를 밝게 물들이고, 쉴 새 없이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도 하얗게 빛나 보인다. 바람에서는 봄다운 달콤한 향내가 나는데 아직은 사늘해서 나는 주머니에서 장갑을 꺼냈다. 

「 그 튀김집, 우리 집 바로 근처라서 좀 걸어야 돼 」

라고 히라기가 말했다.

「 다리 건너가지? 」

라고 말하고 내가 잠시 침묵하였다. 다리에서 만난 우라라란 사람이 떠오른 것이다. 그 이후에도 매일 아침 가는데, 만나지 못했다. ...고 멍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히라기가,

「 물론 집에 데려다 줄게 」

라고 큰 소리로 말했다. 나의 침묵을, 먼데까지 가야 하는 성가심으로 해석한 모양이었다.

「 아니 괜찮아. 아직 시간이 이른 걸 뭐 」

라고 당황하여 말하면서, 이번에는 마음속으로만, <다, 닮았다>고 생각했다. 지금 그 말은 흉내 낼 필요도 없이 히토시를 꼭 닮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균형을 절대로 무너뜨리지 않는 주제에, 반사적으로 친절을 베푸는 그 냉담함과 순진함에 나는 항상 투명한 기분이 되었다. 그것은 투명한 감격이었다. 그 느낌을 지금 생생하게 떠올리고 말았다. 보고 싶고, 마음이 아팠다.

「 며칠 전 새벽에 달리는데, 다리에서 좀 이상한 사람을 만났어. 그 생각이 났을 뿐이야 」

걸으면서 내가 말했다.

「 이상한 사람이라니, 남자야? 」

「 아니, 여자. 왠지 잊혀지지가 않아 」

「 흐음.... 또 만날 수 있으면 좋겠네 」

「 응 」

나는 몹시 우라라를 만나고 싶었다. 한번밖에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인데 다시 만나고 싶었다. 그런 표정 - 나는 그때,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조금 전까지 부드럽게 미소 짓던 그녀가 혼자가 되자, 비유하자면 <인간으로 변신한 악마가 갑자기, 더 이상 모든 것에 마음을 허락해서는 안 된다며 자신을 훈계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잊기 어렵다. 나의 고통이나 슬픔 따위 전혀 그에 미치지 못한다는 그런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나는 아직 할 수 있는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분이 들게 한다.

도심을 벗어나는 넓은 네거리에서 나와 히라기는 거북함을 느낀다. 그곳은 히토시와 유미코 씨가 사고를 당한 현장이다. 지금도 차들이 끊임없이 오가고 있다. 빨간 신호라서 나와 히라기는 나란히 멈춰 섰다.

「 땅귀신은 없으려나 」

히라기가 웃으며 말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 그런 말 할 줄 알았어 」

나도 웃었다.

라이트 빛이 교차하고, 빛의 강이 돌아온다. 어둠 속에 신호가 밝게 떠 있다. 여기서, 히토시가 죽었다. 은밀한 엄숙함이 찾아든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은 장소에서는 영구히 시간이 정지한다. 같은 위치에 서면 그 고통 또한 전해지리라고 사람들은 기도한다. 관광차 무슨 성 같은 데 가면, 가이드가 몇 년 전, 이곳은 누구누구가 걸었던 곳이다, 그러니 역사를 몸으로 느끼는 셈이라고 하던 말을 들을 때마다, 무슨 엉뚱한 소리야 싶었는데, 지금은 다르다. 알듯하다.

이 네거리, 이 빌딩과 가게들이 있는 밤의 색채가 히토시의 마지막 풍경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렇게 먼 옛날이 아니다.

얼마나 무서웠을까. 잠깐이라도 나를 생각했을까. 지금처럼 달이 저 높은 하늘로 오를 쯤이었을까.

「 파랑이다 」

히라기가 내 어깨를 밀 때까지 나는 그저 망연히 달을 보고 있었다. 마치 진주처럼 차갑고 하얗고 조그만 빛이 너무도 예뻤다.

「 거짓말처럼 맛있다 」

나는 말했다. 그 아담하고 나무 냄새나는 새 가게에서, 카운터에 앉아 먹는 굴튀김 덮밥은 식욕이 되살아날 정도로 맛있었다.

「 그치? 」

히라기가 말했다.

「 응, 맛있어. 살아 있기 잘했다 싶을 정도로 맛있어 」

나는 말했다. 칭찬이 과해, 가게 아줌마가 카운터 너머에서 부끄러워할 정도로 맛있었다.

「 그렇지! 사츠키는 분명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너의 입맛은 옳아. 맛있게 먹어주어서 정말 기쁘다 」

웃으며 단숨에 그렇게 말하고서 그는 엄마한테 배달을 시키러 갔다.

나는 성격도 집요하고, 아직은 이 암울함에 발목 잡혀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 하고 굴튀김 덮밥을 먹으며 생각했다. 히라기는 하루라도 빨리 세일러복을 입지 않고서도 지금처럼 웃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한낮, 느닷없이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감기에 걸려 조깅도 못하고 침대에서 선잠을 자고 있었다. 따끈한 머릿속으로 벨 소리가 몇 번이나 파고 들어와 침대에서 일어났다. 집에 아무도 없는지, 할 수 없이 나는 복도로 나가 수화기를 들었다.

「 네 」

「 여보세요. 사츠키 씨 있나요? 」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불렀다.

「 네? 전데요? 」

고개를 갸웃하며 내가 말했다.

「 아아, 나에요 」

수화기 너머에서 그 사람이 말했다.

「 우라라에요 」

나는 깜짝 놀랐다. 이 사람은 언제나 나를 놀라게 한다. 전화가 걸려올 리가 없었다.

「 불쑥 전화 걸어서 미안한데, 지금 시간 있으면, 나올 수 없나요? 」

「 네 괜찮아요...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내 전화번호를 알았죠? 」

나는 주춤주춤 물었다. 밖에서 전화를 거는지 차 소리가 들린다. 그녀가 후후, 웃는 것 같았다.

「 어떻게든 알고 싶다고 생각하면 자연히 알게 돼요 」

우라라는 주문을 읊듯 말했다. 그도 그런가, 싶을 정도로 당연하다는 듯.

「 그럼, 역 앞 백화점 5층, 주방용품 매장에서 」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평소 같으면 절대로 밖에 나가지 않고 집에서 쉴 정도로 몸이 안 좋았다. 전화를 끊고서, 아차 싶었다. 다리가 후들거렸고 열도 더 오를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만나고 싶은 호기심에 나갈 준비를 서둘렀다. 마치 마음 저 깊은 곳에서 본능의 빛이 반짝이며 나가라고 명령한 것처럼, 망설이지 않았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때 운명은 한 단도 헛디딜 수 없는 사다리였다. 단 한 장면을 빼놓아도 끝까지 올라갈 수 없다. 그리고 오히려 헛디디는 편이 쉬웠다. 그럼에도 나를 움직이고 있었던 것은 아마 죽어 가는 마음속의 빛이었으리라. 그런 건 없는 편이 차라리 편히 잠들 수 있다고 여겼던 어둠 속의 빛이었다.


두꺼운 옷을 입고 자전거를 타고 갔다. 봄이 정말 오리란 믿음을 주는 따스한 빛에 에워싸인 한낮이었다. 막 태어난 바람이 불어와 기분이 상쾌했다. 가로수에도 어린 연둣빛 잎사귀가 돋아 있었다. 하늘에는 엷은 하늘색 구름이 저 먼 도시 너머까지 이어져 있었다.

그 싱그러움에 나는 파삭파삭 메말라 있는 자신의 내부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내 마음에는 도무지 봄의 훈풍이 불어들지 않는다. 비누방울처럼 미끌미끌 표면에 비칠 뿐이다. 사람들은 모두 봄빛에 머리칼을 흩날리며 행복하게 스쳐 지나간다. 모든 것이 숨을 쉬고, 부드러운 햇살의 보호를 받으면서 찬란함을 더해 간다. 생명력으로 넘치는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내 마음은 메마른 겨울 길과, 새벽녘의 강가를 그리워한다. 이대로, 사라져 버리고 싶다고 생각한다.

우라라는 죽 진열된 마호병을 등지고 서 있었다. 핑크색 스웨터를 입은 등을 쭉 펴고, 북적거리는 사람들 속에 있으니 내 도래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 안녕하세요 」

라고 인사하며 내가 다가가자,

「 어머나, 감기? 」

라고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 미안해요. 알지도 못하고 불러내서 」

「 얼굴이 감기에 걸렸나 」

나는 웃었다.

「 응. 새빨개. 자 서둘러 골라요. 아무거나 마음에 드는 걸로 」

마호병 족으로 몸을 틀면서 그녀가 말했다.

「 글쎄, 역시 마호병이 좋을까? 아니면 들고뛴다는 데 중점을 두고 가벼운 걸로 할까. 이건, 지난 번 떨어뜨린 것하고 똑같은 거. 아 참, 디자인만 보고 고르려면, 중국 물산 매장에 가서 중국제로 살까? 」

너무도 열심히 그렇게 말해 나는 기쁜 나머지 스스로 느낄 정도로 얼굴이 빨개지고 말았다.

「 그럼, 그 하얀 걸로 」

나는 반짝반짝 빛나는, 조그맣고 하얀 마호병을 가리켰다.

「 음. 손님, 눈이 높으시군요 」

그렇게 말하며 우라라는 그것을 사 주었다.


옥상 근처에 있는 조그만 찻집에서 홍차를 마시면서,

「 이것도 가져왔어요 」

라며 그녀는 코트 주머니에서 조그맣게 접은 종이봉투들을 꺼냈다. 나오고 또 나오고 하여 내가 어리둥절해하자,

「 찻집 하는 사람한테서 좀 얻어왔지. 허브 차 각종, 홍차 각종, 중국차도. 이름은 겉에 씌어 있으니까, 재미 삼아 끓여봐요 」

「 ...고마워요 」

나는, 말했다.

「 아니, 소중한 마호병을 강물에 잠기게 한 건 바로 나야 」

우라라가 웃었다.

맑게 개어 저 멀리가지 보이는 오후였다. 빛이 애처로울 정도로 선명하게 거리를 비추고 있다. 구름 그림자가 거리를 빛과 그림자로 나누며 천천히 움직인다. 평화로운 오후다. 코가 막혀 뭘 마시고 있는지 별 느낌이 없는 것 외에는 아무 문제도 없을 것처럼 여겨지는, 온화한 날씨다.

「 그런데 」

내가 말했다.

「 정말 어떻게 전화번호 알았죠? 」

「 오래도록 혼자서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지내다보면, 어떤 부분의 감각이 동물처럼 예민해져요. 언제부터, 그런게 가능해졌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음, 그러니까, 사츠키 씨네 번호는? 하고 생각하면, 전화번호 누를 때는 아주 자연스럽게 손가락이 움직이고, 대개는 맞아요 」

「 대개는? 」

하고 나는 웃었다.

「 그래요, 대개는. 틀렸을 때는 죄송합니다, 하고 웃으면서 끊죠. 그러고는 혼자서 창피해해요 」

그렇게 말하는 우라라가 웃고 있었다.

나는 전화번호를 조사하는 방법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보다, 담담하게 말하는 그녀 쪽을 믿고 싶었다. 그녀는 사람을 그렇게 만든다. 나는 내 마음속의 어느 한 부분이 오랜 옛날부터 그녀가 알고 지내고 있었으며 재회가 반갑고 기뻐 울고 있는 것만 같았다.

「 오늘 고마웠어요. 애인 같아서 기뻤어요 」

나는 말했다.

「 그럼, 애인한테 가르쳐주지. 우선 내일 모레까지는 감기 낫도록 할 것 」

「 왜요? 아아, 볼거리라는 게 내일 모레 있나요? 」

「 딩동댕동. 알겠어요? 다른 사람한테 말하면 절대로 안 돼 」

우라라가 목소리를 약간 낮췄다.

「 모레, 아침 5시 3분전까지 지난 번 장소에 오면, 혹시 뭘 볼 수 있을지도 몰라요 」

「 뭐라니, 뭐요? 어떤 거? 보이지 않을 수도 있어요? 」

나는 그저 의문의 홍수를 끼얹는 수밖에 없었다.

「 응, 날씨에 따라서도 다르고, 사츠키 씨의 컨디션에 따라서도 달라질 수 있고. 아주 미묘한 거라서 보장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그냥 내 느낌인데, 그 강과 사츠키 씨는 무척 관계가 깊어서. 그러니까, 틀림없이 보일 거예요. 모레 그 시각은, 정말 백 년에 한번 꼴로 여러 가지 조건이 충족돼서, 어떤 장소에서 어떤 류의 아지랑이가 보일지도 모르는 시간이거든요. 미안,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일 뿐이어서 」

무슨 뜻인지 설명을 이해할 수 없어 나는 고개를 갸웃하였다. 그래도 오랜만에 왠지 가슴 설레었다.

「 그거, 좋은 일이에요? 」

「 으-음... 귀중하긴 하지만, 글쎄, 요는 네 마음이지 」

우라라가 말했다.

요는 내 마음.

지금 이렇게 위축되어, 자기를 지키기가 고작인.

「 응, 꼭 갈게요 」

나는 웃었다.

강과 나의 관계. 나는, 가슴이 철렁하였지만 바로 가겠노라 생각하였다. 내게 그 강은, 히토시와 나의 국경이었다. 그 다리를 떠올리면 거기에 서서 기다리는 히토시도 보인다. 항상 내가 약속 시간에 늦어, 늘 그가 먼저 기다리곤 했었다. 돌아오는 길에도 항상 우리는 거기서 강을 사이에 두고 헤어졌다. 마지막에도 그랬다.

「 이제 다카하시네 갈 거지? 」

여전히 행복하고, 지금보다 투실투실 살쪄 있었던 나와 히토시의 마지막 대화였다.

「 응, 일단 집에 갔다가. 오랜만에 다 모이는 거야 」

「 안부 전해 줘. 그래봐야 남자들끼리 모여서 이상한 얘기만 할 테지만 」

내가 말하자,

「 그래서, 그러면 안 돼? 」 

라며 그는 웃었다.

하루 종일 노는 데만 정신이 팔려서, 발갛게 취해서, 우리는 조잘조잘 걸었었다. 오싹오싹 떨리는 겨울의 밤길은 호화로운 별하늘로 채색되어 있고, 나는 상쾌한 기분이었다. 바람이 두 뺨을 따끔따끔 찌르고, 별이 반짝인다. 주머니 속에서 꼭 잡은 두 손은 언제나 따스하고, 뽀송뽀송한 감촉이었다.

「 아, 하지만 너에 대해서는 절대로 이상한 말 안 할 거야 」

불쑥 생각났다는 듯 그렇게 말하는 히토시가 우스꽝스러워서 나는 머플러에 얼굴을 묻고 웃음을 참았다. 그때 나는 4년이나 사귀면서 이렇게 좋아하다니 참 신기한 일도 있다고 생각하였다.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를 열 살이나 연하로 느낀다. 강물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고 헤어짐이 아쉬웠다.

그리고 다리. 다리가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는 이별의 장소가 되었다. 물이 콸콸 소리를 내며 춥게 흐르고, 강바람이 정신이 반짝 깨일 듯한 싸늘함으로 불어댔다. 선명한 물소리와 온 하늘 가득한 별 속에서 짧은 키스를 나누고, 즐거웠던 겨울 방학을 생각하면서 둘은 웃으며 헤어졌다. 밤 속으로 딸랑딸랑 방울 소리가 멀어져 갔다. 나도 히토시도 자상했다.

우리는 심한 싸움도 했고, 잠시 바람을 피우기도 하였다. 욕망과 사랑의 균형에 괴로워한 적도 있고, 너무 어려서 서로에게 상처를 입힌 일도 더러 있었다. 그러니까 늘 그렇게 행복했던 것은 아니다. 품이 많이 든 세월이었다. 그래도 4년이다. 그 중에서도 그 날은 끝나는 게 두려울 정도로 완벽한 하루였다. 겨울의 아름답고 투명한 대기 속, 모든 것이 너무도 아름답고 부드러운 하루의 여운처럼, 돌아본 히토시의 검은 재킷이 어둠에 녹아드는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이 장면은 울면서 몇 번이나 되새긴 장면이다. 아니 생각날 때마다 눈물이 나왔다. 다리를 건너 쫓아가서, 가면 안 된다고 데리고 돌아오는 꿈을 몇 번이나, 몇 번이나 꾸었다. 꿈속에서 히토시는, 네가 못 가게 말린 덕분에 죽지 않았어, 라며 웃었다.

한낮에 이렇게 문득 떠올리면서도, 울지 않을 수 있게 된 것이 왠지 서글프다. 한없이 먼 그가, 점점 더 멀리로 가버리는 것만 같다.

강에서 보일지도 모른다는 그 무언가를, 절반은 농담으로 듣고 절반은 기대하면서, 우라라와 헤어졌다. 우라라는 방긋방긋 웃으면서 거리 속으로 사라졌다.

혹 그녀가 거짓말쟁이고, 가슴 설레며 달려간 내가 어리석었다 해도 상관없다. 그녀는 내 마음에 무지개를 보여주었다. 뜻밖의 일을 기대하는 설레임이 되살아나, 내 마음에 바람이 들어왔기 때문에. 설사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해도, 둘이서 나란히 차갑게 빛나는 강물의 흐름을 바라보면 기분이 좋으리라. 그것으로 족하다.

마호병을 껴안고 걸으면서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자전거를 가지러 가려고 역을 빠져나가는 도중에 히라기를 발견하였다.

대학생의 봄방학과 고등학생의 봄방학은 명백하게 다르다. 이 대낮에 사복 차림으로 거리를 어슬렁거린다는 것은 학교에 가지 않았다는 뜻이리라. 나는 웃었다.

달려가 말을 거는 것은 주저할 일이 아니지만, 나는 열 때문에 모든 것이 귀찮아서 걷던 그 속도로 그쪽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때마침 그도 반대쪽으로 걷기 시작하여 아주 자연스럽게 내가 그의 뒤를 쫓아 거리를 걷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의 걸음은 빠르고, 뛰고 싶지 않은 나는 좀처럼 좇지 못한다.

히라기를 관찰하였다. 사복을 입으니 그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뒤돌아볼 만큼 멋진 남자였다. 검은 스웨터를 입고 당당하게 걸어간다. 키도 크고 손발이 길다. 경쾌하고 상큼하다. 과연 애인을 잃은 그가 갑자기 세일러복을 입고 학교에 나타나고, 그 옷이 그녀의 유품이란 것을 알면 여자애들이 그냥 놔두지 않을 것이라고,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생각했다. 형과 애인을 한꺼번에 잃다니, 그리 흔히 있는 일이 아니다. 비일상의 극치다. 나도, 만약 한가한 여고생이었다면 그를 자기 힘으로 갱생시키려고 사랑할지도 모르겠다. 한참 젊을 때 여자들은 그런 걸 무엇보다 좋아하므로.

그는 말을 걸면 웃는 얼굴이 된다. 나는 알고 있었다. 그래도 혼자 걸어가는 그에게 말을 걸기가 왠지 미안한 기분이었다. 타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몹시 지쳐 있는지도 모른다. 아무 것도 똑바로 마음에 들어오지 않았다. 추억이 추억으로 보이는 곳으로, 하루라도 빨리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달려도 그 길은 멀고, 앞길을 생각하면 오싹 소름이 끼칠 정도로 외로웠다.

그 때 히라기가 우뚝 멈춰 서기에 나도 그만 그 자리에 서고 말았어. 지금까지는 정말 미행이었어, 라고 웃으면서 말을 걸려고 걸어가다가 - 히라기가 보고 있는 것이 뭔지를 알고는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테니스 숍의 윈도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담담한 표정으로 보아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생각이 없는 만큼 그 행위의 깊이가 전해져 왔다. 갓 태어난 새끼 오리 같았다. 새끼 오리는 태어나면 처음으로 자기 눈에 보이는 움직이는 물체가 자기 엄마라고 생각하고 뒤뚱뒤뚱 따라간다. 그 모습이 새끼 오리한테는 아무렇지 않아도 보는 이의 가슴을 적신다.

이렇게 적신다.

봄빛 속에서, 인파에 섞여 그는 물끄러미, 물끄러미 윈도를 보고 있었다. 테니스 기구 옆에 있으면 그는 아릿한 기분이 되리라. 내가 히라기와 함께 있을 때만, 히토시를 닮은 만큼 차분해지는 것처럼. 그런 슬픈 일이다.


나도 유미코 씨의 시합을 본 일이 있다. 그녀를 처음으로 소개받았을 때, 분명 귀엽기는 한데 너무 명랑하고 온순한 보통 사람처럼 보여서, 그 유별난 히라기가 어떻게 그녀에게 매력을 느꼈는지 짐작이 안 갔다. 히라기는 유미코 씨한테 푹 빠져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여느 때의 히라기인데, 그녀 안의 무언가가 히라기를 사로잡고 있었다. 실력이 백중이었다. 그게 뭘까 싶어 히토시한테 물었다.

「 테니스래 」

라며 히토시가 웃었다.

「 테니스? 」

「 응, 히라기 말로는 테니스를 굉장히 잘 친대 」


여름이었다. 쨍쨍 햇볕이 따가운 고등학교 테니스 코트에서, 나와 히토시와 히라기 셋이서 유미코 씨의 결승전을 보았다. 그림자가 짙고, 목이 말랐다. 모든 것이 눈부셨던 시절의 일이다.

정말 굉장했다. 그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내 뒤를 사츠키 씨, 사츠키 씨 하며 졸졸 다라 다니는 그녀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나는 시합을 경이롭게 관전하였다. 히토시도 놀란 모양이었다. 히라기는 <정말 굉장하지>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녀는 박력과 집중력으로 상대를 제압하고 인정사정없이 몰아붙이는 강력한 경기를 펼쳤다. 그리고 실제로도 강했다. 표정도 진지했다. 사람을 죽일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쇼트를 성공시키고 이긴 순간 제일 처음으로 히라기를 돌아보았을 때, 그 여린 얼굴이 평소의 그녀였던 게 인상적이었다. 

나는 넷이서 있으면 항상 재미있고 편안했다. 유미코씨는 곧잘 이런 말을 하였다. 사츠키 씨, 영원히 같이 놀아요. 절대로 헤어지면 안 돼요. 너희들은 어떤데 라고 내가 놀리면, 그야 물론, 이라며 웃었다.

그런데 이런 꼴인걸 뭐, 너무하다.

그는 지금, 내가 기억하고 떠올리듯 그녀를 생각하고 있지는 않으리라. 남자는 일부러 괴로워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런 만큼 그의 전신이 눈동자가, 한 가지 말을 하고 있었다. 그는 결코 말로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말로 하자면 아주 힘든 말이다. 아주 고통스러운. 그것은. - 돌아와 줘.

말이라기보다 기도였다. 나는 안타까웠다.

새벽의 다리 위에서 나도 혹 저렇게 보일까. 그래서 우라라가 내게 말을 건 것일까. 나도. - 나도, 만나고 싶다. 히토시를. 돌아와 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최소한, 작별의 인사라도 하고 싶었다.


나는 히라기를 만나면 오늘 봤다는 것을 말하지 않고 명랑하게 대하리라 다짐하고, 그대로 집으로 돌아갔다.


열은 신나게 올라갔다.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냥 가만히 있어도 상태가 안 좋은데 거리를 하염없이 어슬렁거렸으니, 그렇게 되는 것도 당연하다 할 수 있으리라.

엄마는 철드느라고 열나는 거 아니냐며 웃었다. 나도 힘없이 웃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생각해도 별 소용없는 사고의 독이 온몸으로 퍼진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밤에도 늘 그렇듯 히토시 꿈을 꾸다가 잠에서 깨어났다. 열을 뿌리치고 달려서 강으로 갔더니, 히토시가 서서, 뭐하는 거야 감기 걸렸는데, 라며 웃는 꿈이었다. 최악이었다. 눈을 뜨니 새벽이고, 여느 때 같으면 옷을 갈아입을 시간이다. 춥고, 오로지 추워서, 온몸은 펄펄 끓어오르는데 손발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오한이 들고, 욱신욱신 온몸이 아팠다.

나는 부들부들 떨면서 어스름한 어둠 속에서 눈을 뜨고 있었다. 내가 뭔지 모를 엄청나고 거대한 것과 싸우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다 어쩌면 다 질지도 모른다고, 난생 처음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히토시를 잃었음이 아프다. 너무 아프다.

그와 서로 껴안을 때마다 나는 말이 아닌 말을 알았다. 부모도 아니고 나 자신도 아닌 타인과 가까이 있음의 불가사의함을 알았다. 그 손을, 가슴을 잃고, 나는 사람들이 가장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것, 사람들이 가장 만나기 싫어하는 깊은 절망의 힘과 만났음을 느꼈다. 외롭다. 몹시 외롭다. 지금이 최악이다. 지금이 지나면 아무튼 아침이 될 것이고, 폭소를 터뜨릴 만큼 재미있는 일도 있을 것이다. 빛이 있다면. 아침이 온다면.

언제나 언제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입술을 깨물었지만, 일어나 강으로 달려갈 기운도 없는 지금은 그저 고통스러웠다. 모래를 씹는 듯한 시간이 재깍재깍 흐른다. 지금 강으로 가면, 히토시가 꿈속에서처럼 서 있을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미칠 것만 같았다. 썩을 것 같았다.

나는 천천히 일어나 차를 마시려고 부엌으로 걸어갔다. 목이 몹시 말랐다. 열 탓에 온 집이 초현실적으로 뒤틀려 보였다. 가족이 잠들어 조용한 부엌은 오싹 춥고 어두웠다. 나는 휘청거리면서 뜨거운 차를 들고 내 방으로 돌아왔다.

그 차 덕분에 꽤 좋아진 듯한 기분이었다. 목을 축이자 호흡이 편안해졌다. 나는 상반신을 일으켜 침대 옆 창문의 커튼을 걷었다.

내 방에서는 대문과 정원이 보인다. 정원수와 꽃이 파란 공기 속에서 살살 흔들리며, 파노라마처럼 밋밋한 색채로 퍼져 보였다. 아름다웠다. 새벽의 푸르름 속에서는 모든 것이 이렇게 정화되어 보인다는 것을 나는 최근에 알았다. 그렇게 밖을 내다보다가, 나는 집 앞 길을 걸어 이쪽으로 오는 사람을 발견하였다.

점점 다가오자, 나는 꿈인가 싶어 몇 번이나 눈을 깜빡였다. 우라라였다. 파란 옷을 입고, 방긋방긋 웃으면서 나를 보고 이쪽으로 걸어온다. 문 앞에 서서, 그녀는 들어가도 돼요? 라고 입을 움직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정원을 질러 창문 아래로 왔다. 나는 창문을 열었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 아- 춥다 」

고 그녀가 말했다. 밖에서 싸늘한 바람이 들어와 따끈따끈한 볼을 식혔다. 청렬한 공기가 맛있었다.

「 어떻게 된 거에요? 」

내가 물었다. 분명 나는 조그만 어린애처럼 신이 나 웃었을 것이다.

「 아침 돌아가는 길에, 산책. 아직 감기가 낫지 않은 모양이네. 비타민 씨 사탕 줄게요 」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내 나에게 건네주면서, 그녀는 아주 투명하게 웃었다.

「 항상 받기만 하고 미안하네요 」

나는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 열이 많이 있는 모양이야. 힘들죠? 」

그녀가 말했다.

「 네, 오늘 아침에는 조깅 못 하겠어요 」

나는 말했다. 나는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 감기는 말이죠 」

우라라는 속눈썹을 약간 내리깔고 담담하게 말했다.

「 지금이 가장 힘들 때예요. 죽는 것보다 더 힘들지도 모르죠. 하지만 아마 더 이상은 힘들지 않을 거예요. 그 사람의 한계는 변하지 않으니까. 언젠가 또 감기 걸려서, 지금처럼 아플 일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본인만 건강하면 평생, 없을 거예요. 그래, 그렇게 되어 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지겨워서 넌더리가 날 수도 있겠지만, 이까짓쯤 하고 생각하면 덜 힘들지 않을까? 」

그리고 웃으며 나를 보았다.

나는 잠자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사람은 정말 감기에 대해서만 말한 것일까. 무슨 소리를 한 것일까 - 푸르른 새벽과 열이 모든 것을 뿌옇게 만들어 나는 꿈과 현실의 경계마저 제대로 알 수 없었다. 그저 말을 마음에 새기면서, 말하는 우라라의 앞머리가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것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 그럼, 내일 봐요 」

라며 웃고는, 우라라는 천천히 밖에서 창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스텝을 밟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대문을 나갔다.

나는 꿈속에 떠 있는 것처럼, 그 모습을 배웅하였다. 힘들었던 밤의 끝에 그녀가 찾아와 주어 나는 눈물이 나도록 고마웠다. 이 환상처럼 파란 안개 속으로 당신이 와주어, 꿈처럼 반가웠다고 전하고 싶었다. 어쩐지, 잠에서 깨면 모든 것이 조금씩 좋아져 있을 듯한 생각마저 들었다. 그리고 잠에 빠져들었다.


눈을 뜨니 적어도 감기만큼은 조금 좋아져 있었다. 얼마나 깊이 잤는지, 벌써 저녁이었다. 나는 일어나 샤워를 하고 옷을 싹 갈아입고 드라이로 머리를 손질하였다. 열은 내렸고, 몸이 나른한 것만 제외하면 기운도 있었다.

정말 우라라가 왔던 것일까, 하고 나는 머리칼을 말리는 열풍 속에서 생각했다. 꿈속으로 울리는 듯한 말이었다.

예를 들면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에 아직도 깊은 그림자가 드리워 있어, 다시금 힘든 밤이 찾아오리라고 예감케 한다. 생각하고 싶지 않을 만큼 지친다. 정말 지친다. 그래도 - 기어서라도 빠져나가고 싶다.

예를 들면, 지금은 어제보다 조금 편히 숨을 쉴 수 있다. 또다시 찾아올 숨도 쉴 수 없을 만큼 고독한 밤은 나를 진저리치게 한다. 인생이 그 반복이라고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다. 그런데도, 돌연 편히 숨 쉴 수 있는 순간이 분명 있어 나를 설레게 한다. 때로, 설레게 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 웃을 수 있다. 열이 갑자기 내려 나의 사고는 술주정뱅이 같다. 그때 돌연 노크 소리가 들렸다. 엄만가 하고, 네라고 대답하자, 문이 열리고 히라기가 들어와, 놀랐다. 정말 놀랐다.

「 어머니가 몇 번이나 불러도 대답이 없다고 해서 」

히라기가 말했다.

「 드라이어 소리 때문에 안 들렸어 」

라고 내가 말했다. 막 머리를 감아 꼴이 말이 아니어서 당황했는데,

「 전화를 걸었더니 어머니가, 사츠키 감기 걸려서 열이 펄펄 끓는다고 하길래 병문안 왔지 」

라며 히라기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웃었다. 그러고 보니 히라기는 곧잘 히토시와 함께 우리 집에 놀러 왔었다. 동네 축제 때며, 야구를 보고 돌아오는 길이며, 그러니까, 거의 여느 때처럼 쿠션을 끄집어내 풀썩 앉았다. 잊고 있었던 건 나다.

「 이건 선물 」

히라기는 커다란 종이봉투를 보이며 말했다. 나는 새삼스럽게 다 나았다고 말하기가 어려워, 일부러 기침을 콩콩 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그는 친절했다.

「 누나가 제일 좋아하는 켄터키 치킨의 치킨 필레 샌드위치하고 셔벗, 콜라도 있고. 내 몫도 있으니까 같이 먹어 」

별로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는 마치 <종기>라도 다루듯 나를 대했다. 분명 엄마가 무슨 말을 했으리라. 나는 부끄러웠다. 그렇다고, 난 아무 일 없어, 무슨 소리하는 거야, 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상태가 좋은 것도 아니었다.

밝은 방, 따뜻한 스토브의 열기 속에서, 바닥에 앉아 우리는 그것들을 조용조용 먹었다. 나는 아주아주 배가 고팠던 것을 비로소 알고, 맛있게 먹었다. 나는 언제나 히라기 앞에서는 음식을 맛있게 먹는 듯하다. 그리고 그건 아주 좋은 일이다.

「 누나 」

「 왜? 」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나는 히라기가 부르는 소리에 퍼뜩 얼굴을 들었다.

「 혼자서, 그렇게 점점 야위어가고, 열까지 날 정도로 괴로워하면 안 돼. 그런 시간이 있거들랑 날 불러. 놀러 가자구. 만날 때마다 점점 초췌해지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태연한 척하고 있다니, 무모한 에너지 낭비야. 히토시 형하고 누나는 정말 사이가 좋았으니까, 죽고 싶을 만큼 슬프겠지. 당연해 」

그는 한꺼번에 그런 말들을 늘어놓았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가 이렇게 어린애처럼 나를 배려한 것은 처음이었다. 훨씬 더 쿨한 것을 좋아하는 아인 줄 알았는데, 너무도 뜻밖이라 오히려 순순히 마음으로 파고들었다. 히토시가, 가족하고 있을 때만 어린애로 돌아갈 수 있다며 훗훗 웃었던 그 기분을 정말 잘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 물론 난 아직 어리고, 세일러복을 입지 않으면 울고 말 정도로 듬직하지도 못하지만, 외로울 때 인류는 형제잖아. 난 누나를 한 이불에서 같이 자도 상관없을 만큼 좋아하니까 」

그가 진지한 얼굴에 딱히 이상한 속내를 털어놓는 것 같지도 않아, 역시 이상한 애로군, 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리고 마음으로 말했다.

<그럴게. 정말 그렇게 할게. 고마워. 정말이지 고마워>


히라기가 돌아간 후 나는 또 잤다. 감기약 때문인지, 오랜만에 편안하게, 꿈도 꾸지 않고 깊이 잠들었다. 어렸을 적 크리스마스 이브처럼 가슴이 두근거리는 신성한 잠이었다. 잠에서 깨면, 우라라가 기다리는 다리로, 그 무언가를 보러 간다.  


동트기 전.

몸이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가 뛰었다.

꽁꽁 얼어붙을 듯 차가운 달그림자가 하늘에 어려 있는 새벽이었다. 달리는 내 발소리가 조용한 파랑에 울려 퍼지고, 소리 없이 빨려들어 거리로 사라졌다.

다리에는 우라라가 서 있었다. 내가 도착하자, 주머니에 손을 넣고 머플러에 얼굴을 절반쯤 묻은 채, 빛나는 눈동자로 웃었다.

「 안녕 」

별이 하나 둘, 꺼질 듯 하얗게, 청자 같은 하늘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시리도록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강물 소리는 세차고, 공기는 청명하다.

「 몸까지 파란색으로 물들 것처럼 파랗네 」

손을 공중에 비춰보며 우라라가 말했다.

바람에 바스락바스락 흔들리는 나무들 그림자가 엷게 어린다. 천천히 하늘이 움직인다. 달빛이 어슴푸레한 새벽 어둠으로 스민다.

「 시간이야 」

우라라의 목소리가 긴장하였다.

「 잘 들어요. 지금부터 여기의 차원과 공간과 시간과, 그런 것들이 흔들리거나, 어긋날 거예요. 나랑 사츠키 씨가 나란히 서 있어도 서로 보이지 않을 지도 모르고, 전혀 다른 것을 볼 수도 있을 거예요... 강 너머로. 절대로 소리를 지르거나, 다리를 건너면 안 돼요. 알았죠? 」

「 네 」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침묵이 찾아왔다. 물소리만 콸콸 울리는 가운데, 우라라와 나란히 건너편 강기슭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다리가 떨렸다. 조금씩, 날이 밝아온다. 파란 하늘이 물색으로 변하고, 재재거리는 새 소리가 조금씩 커진다.

나는, 귓속으로 희미하게 어떤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흠칫 놀라 옆을 보니 우라라는 없었다. 강과, 나와, 하늘과 - 그리고 바람과 강물 소리에 섞여, 귀에 익은 반가운 소리가 들렸다.

방울. 틀림없다. 그것은 히토시의 방울 소리였다. 딸랑딸랑, 아무도 없는 그 공간으로 방울 소리가 울렸다. 나는 눈을 감고 바람 속에서 그 소리를 확인하였다. 그리하여 눈을 뜨고 강 건너를 보았을 때, 요 두 달 사이의 그 어느 때보다 심하게 자신이 미쳤다고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터져 나오는 외침을 억지로 참았다. 

히토시가 있었다.

강 건너, 꿈이나 광기가 아니라면, 이쪽을 향하고 서 있는 사람은 틀림없는 히토시였다. 강을 끼고 - 그리움이 북받쳐 오르고, 그 모습 전체가 마음속에 있는 추억의 초상과 초점을 맞춘다.

그는 파르스름한 새벽안개 속에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내가 엉뚱한 짓을 저질렀을 때 흔히 짓는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 가슴속에서 지낸 시간들을 가깝고도 멀리 느꼈다. 우리는 그저 쳐다만 보았다. 둘을 가로막는 그 격렬한 흐름을, 그 먼 거리를, 사그라드는 달을 지켜보고 있었다. 내 머리칼과, 그리운 히토시의 셔츠 깃이 강바람에 꿈처럼 살랑살랑 흩날렸다.

히토시, 나랑 얘기하고 싶어? 나는 히토시랑 얘기가 하고 싶어. 곁에 있고 싶고, 껴안고 재회를 기뻐하고 싶어. 하지만 하지만 - 눈물이 넘쳐흘렀다 - 운명은 이미, 나와 너를, 이렇게 강의 이편과 저편으로 갈라놓고 말았고, 나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어. 나는 눈물을 흘리면서, 그냥 보고 있을 수밖에 없다. 히토시도 슬픈 눈동자로 나를 쳐다본다. 시간이 멈추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 그러나, 새벽 첫 빛이 지상을 비췄을 때 모든 것은 천천히 희미해져 갔다. 보고 있는 내 눈앞에서 히토시가 멀어진다. 내가 당황하자, 히토시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손을 흔들었다. 파란 어둠 속으로 사라져간다. 나도 손을 흔들었다. 그리운 히토시, 그 사랑스런 어깨와 가슴선 모든 것을 내 눈 안에 각인하고 싶었다. 그 어슴푸레한 풍경도, 뺨을 타고 내리는 뜨거운 눈물도, 모든 것을 기억에 새기고 싶다고 바랐다. 그의 가슴선이 잔상으로 공중에 비친다. 그는 천천히 엷어지고, 그리고 사라졌다. 눈물 속에서 나는 사라지는 그를 쳐다보았다.

완전히 보이지 않자,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갔다. 아침의 다리. 옆에 우라라가 서 있었다. 살이라도 에어내는 것처럼 슬픈 눈동자로.

「 봤어요? 」

「 봤어요 」

눈물을 닦으면서 나는 말했다.

「 감격했어요? 」

우라라가 내 쪽을 보며 웃었다. 내 마음에도 안심이 번지고,

「 감격했어요 」

라며 미소지었다. 빛이 비치고, 아침이 오는 그 장소에, 둘이 한참이나 서 있었다.


아침부터 문을 여는 도넛 숍에서 뜨거운 커피를 마시면서, 조금은 졸린 눈으로 우라라가 말했다.

「 나도, 비정상적으로 죽은 애인과, 마지막 작별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이 도시에 왔어요 」

「 만났어요? 」

나는 물었다.

「 응 」

우라라는 살며시 웃으며 대답했다.

「 정말 백 년에 한번 꼴로, 우연이 겹치고 겹쳐서 그런 일이 생기는 경우가 있어요. 장소도 시간도 정해져 있지 않죠. 알고 있는 사람들은 칠석 현상이라고 해요. 큰 강이 있는 곳에서만 생기죠. 사람에 따라서는 전혀 보이지 않아요. 죽은 사람이 이 세상에 남긴 사념과, 남은 사람의 슬픔이 서로 반응했을 때 아지랑이가 되어 보이는 거예요. 나도 처음 봤죠... 사츠키 씨는, 아주 운이 좋았어요 」

「 ...백 년이란 말이죠 」

나는 그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낮은 확률을 생각했다.

「 여기 도착했을 때, 미리 좀 봐두려고 거기 갔는데, 사츠키 씨가 서 있었어요. 틀림없이 누군가를 잃었을 거라고, 동물 같은 느낌으로 알았죠. 그래서 말을 건 거고 」

아침 햇살에 머리칼을 드러내고, 그렇게 말하며 웃는 우라라는 소리 없는 조각상처럼 흔들림이 없었다.

이 사람은 정말 어떤 사람일까.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 그리고 아까 강 건너로 어떤 사람을 보았을까... 물을 수가 없었다.

「 이별도 죽음도 힘들죠. 하지만 그게 마지막인가 싶지 않을 정도의 사랑은, 여자한테는 심심풀이 시간 죽이기도 못 돼요 」

우라라는 도넛을 오물오물 먹으면서 일상이라도 얘기하듯 그렇게 말했다.

「 그러니까, 오늘 제대로 작별 인사를 나눌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눈동자가 아주아주 슬퍼 보였다.

「 네... 저도요 」

나는 말했다. 그러자 우라라가 햇살 속에서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손을 흔드는 히토시. 그것은 마음에 빛이 스미는 것처럼 가슴 아픈 장면이었다. 잘된 일인지, 사실은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강렬한 햇빛 속에서, 그 여운에 가슴이 아플 따름이다. 숨쉬기 어려울 정도로 애달프다.

그래도, 그래도 그때 나는 눈앞에서 미소 짓는 우라라를 보면서, 엷은 커피 향 속에서, 자신이 <무언가>에 아주 가까이 있음을 느꼈다. 바람에 창문이 덜컹덜컹 흔들린다. 그것은, 헤어질 때의 히토시처럼, 아무리 마음을 열고 눈에 힘을 주고 보아도 확실하게 지나가고 마는 것이다. 그 무언가는 태양처럼 어둠 속에서 강하게 빛나고, 나는 엄청난 속도로 그곳을 통과한다. 찬송가처럼 축복이 내리고, 나는 기도한다.

<훨씬 더 강해지고 싶다>고.

「 이제 또 어디로 가는 거예요? 」

가게를 나오며 내가 물었다.

「 응 」

그녀는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 언젠가 또 만나요. 전화번호 잊지 않을게 」

그리고 사람들이 넘실거리는 아침거리로 사라져갔다. 그 뒷모습을 보면서 생각했다.

나도 잊지 않아요. 내게 많은 것을 준 당신을.


「 나, 얼마 전에 봤어 」

라고 히라기가 말했다.

뒤늦게 생일 선물을 주러, 점심시간에 모교를 찾아갔을 때의 일이다. 운동장 벤치에서 뛰노는 학생들을 보면서 기다리고 있는 나에게 달려온 그가 세일러복 차림이 아니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더니, 옆에 앉자마자 그렇게 말했다.

「 뭘? 」

「 유미코 」

그가 말했다.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하얀 체육복을 입은 학생들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눈앞을 지나갔다.

「 엊그제 아침이었나 」

그가 말을 이었다.

「 꿈이었는지도 모르지. 끄덕끄덕 졸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면서, 유미코가 들어왔어. 너무 자연스럽게 들어와서 죽었다는 것 그만 잊어버리고, 유미코? 라 그랬더니, 쉬- 라면서 집게손가락을 입에다 대고, 웃었어... 역시, 꿈같아. 그러고는 내 방 벽장 열고 세일러복을 조심스럽게 꺼내서는 가지고 가버렸어. 안녕이라고 입을 움직이고, 웃으면서 손을 흔들고. 난 어째야 좋을지를 몰라서, 또 자버렸지. 역시 꿈일까. 그런데 세일러복이 없어. 아무리 찾아도 말이야. 난, 그만 울어버렸어 」

「 ...그래 」

나는 말했다. 혹 강가에서만 아니라, 그날이라면, 그 아침이라면 그런 일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제 우라라는 없으니,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러나 그가 너무도 의연하여, 어쩌면 얘 굉장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을 직접 자기한테로 불러들였는지도 모른다.

「 나, 머리가 좀 어떻게 된 걸까 」

히라기가 농담조로 말했다.

봄날의 오후, 엷은 빛 속으로 점심시간의 시끌벅적한 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온다. 레코드를 내밀고 웃으며 내가 말했다.

「 그런 때는 조깅하면 좋아 」

히라기도 웃었다. 빛 속에서 한참을 웃었다.


나는 행복해지고 싶다. 오랜 시간, 강바닥을 헤매는 고통보다는, 손에 쥔 한줌 사금에 마음을 빼앗긴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지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히토시.

나는 이제 이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 시시각각 걸음을 서두른다. 시간의 흐름은 막을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다. 나는 갑니다.

한 차례 여행이 끝나고, 또 다른 여행이 시작된다. 다시 만나는 사람이 있고, 만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나도 모르게 사라지는 사람, 스쳐 지나가는 사람. 나는 인사를 나누며 점점 투명해지는 듯한 기분입니다. 흐르는 강을 바라보면서,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저 어린 시절의 흔적만이, 항상 당신 곁에 있기를 간절하게 기도합니다.

손을 흔들어주어서, 고마워요. 몇 번이나 몇 번이나, 흔들어준 손,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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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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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Jane | 작성시간 06.11.11 부담 없이 읽으려다가 너무 길어 한 호흡으로는 힘들었지만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얼마 전 어떤 모임에서 19차원까지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4차원 5차원도 제겐 어렵네요. 하지만 우주의 신비로움엔 경이의 눈길로 바라볼 수 밖엔....
  • 작성자jina | 작성시간 06.12.02 휴... 울지 말아야지 하면서 눈에 힘 주고 읽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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