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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시

Anecdote of the Jar (Wallace Stevens)

작성자Jane|작성시간06.11.11|조회수1,768 목록 댓글 0
 

Anecdote of the Jar



I placed a jar in Tennessee,

And round it was, upon a hill.

It made the slovenly wilderness

Surround that hill.


The wilderness rose up to it,

And sprawled around, no longer wild.

The jar was round upon the ground

And tall and of a port in air.


It took dominion everywhere.

The jar was gray and bare.

It did not give of bird or bush,

Like nothing else in Tennessee.


(Wallace Stevens)



항아리의 逸話 (일화)


나는 테네시에 항아리 하나를 놓았는데,

그것은 둥글었고 언덕 위에 있었다.

그로 인해 거친 황야가

언덕을 에워쌌다.


황야는 항아리 위로 솟아올라

주위로 뻗쳐있어 더 이상 황량하지 않았다.

항아리는 둥글게 땅위에 놓여

높은 키에 점잖아 보였다.


그것은 공간을 온통 지배했다.

항아리는 잿빛에 민무늬였다.

새나 덤불숲이 그려져 있지 않은 그것은,

테네시에서 별다르지 않은 항아리였다.


                     (김재현 역+심인보 역)



아들아이의 학교에서는 한 학년이 끝날 때마다 한 해 동안의 앨범들을 한 권씩 준다. 수업이나 특별활동, 학교 행사 사진도 있지만, 졸업생들 개개인이 꾸미는 코너가 꽤 비중이 크게 다루어지고 있다. 아주 어릴 때부터의 사진도 곁들이고, 하고 싶은 말이나 좋은 글도 채우는 등, 모두들 아기자기하게 꾸민다.

그 중 아들아이보다 학년은 높지만, 함께 오케스트라 활동을 하면서 친하게 지내는 Jude라는 친구의 것을 보게 되었는데, 어릴 때 클래식 기타를 안고 찍은 사진이 있었고, 다음에 이 시가 실려 있었다. 공부를 아주 잘하지만, 바이올린이 좋아 대학에서 바이올린 전공을 하려는 그 아이가 고등학생때 벌써 이웃에 있는 대학교에서 영어와 불어 수업을 들을 정도로 언어적 감수성과 음악적 감수성이 예민한 아이인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이 시에 관심이 갔다.


테네시주에 있는 학교로 아들아이가 유학 간 후 어디서 ‘테네시’와 관계된 단어만 나와도 반가웠던 적이 있어, 나도 예전에 이 시를 대했을 때 대충 읽어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막상 다시 이해해보려니까, 집에 있는 이 시가 실린 두 책의 번역이 서로 다른 부분이 많아 어느 것을 취할지 쉽지 않았다.

예를 들어 5~6행을 ‘황야는 항아리에 맞서 일어났다가 주변에 질펀히 눕고 더는 황량치 않았다’(김재현) / 7~8행을 ‘항아리는 땅 위에서 둥근 모양이었고 길쭉하게 공중을 향해 주둥이를 벌리고 있었다’(심인보) / 마지막 부분도 ‘그것은 테네시의 다른 어떤 것과는 달리 새나 수풀로 찌그러지지 않았다’(심인보)로, 정반대의 번역이었다.


일단 배우는 입장에서 두 분의 시 해석을 소개해본다.


(김재현, 영미시의 이해, 외국어연수사, pp.458-9)

1. 여기서 jar는 질박한 오지항아리나 단지인데 하나의 예술품이 형상화되기까지의 창작과정을 그려놓고 있다. 어느 특정한 대상은 원래 형체가 없다가(amorphous) 초점을 받고 집중적인 질서와 선택의 여과 과정을 통해 성취에 이른다. … 시의 구조는 8행까지 rhyme이 없는 couplet으로 이어지다가 9-10행에서 rhymed couplet으로 종결된다. 그러나 사실은 Tennessee가 나와 서두와 연결됨으로써, 끝났으나 끝나지 않는 유동적 reality요 창조행위는 계속됨을 시사하고 있다.

2. slovenly는 wild와 같은 chaotic, unpolished의 뜻으로 of a port in air(점잖고 의젓한)와 대조를 이룬다.


상상의 세계에서 질서를 부여하는 창작과정에는 장애가 많다. wilderness가 rose up한다.(반란을 일으킨다) 그러자 형상화가 이룩된다. surround, round - ground, around의 internal rhymes는 이런 형상화의 과정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jar는 상상력(the power of imagination)과 같이 그 자체는 無이다. 순간적 형체의 구현으로 그 임무는 다한 것이다.



(심인보, 현대 미국시인론, 한신문화사, pp203-5.)

이 항아리는 시인의 직접적 감정이 이입된 현실의 항아리는 아니다. 현실과 상관없는 관념의 항아리, 즉 비유의 항아리로 키이츠(John Keats)의 '항아리‘(Urn)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찬미하는 시상을 연상시킨다. 이 항아리가 풍기는 아름다움은 그의 ‘Peter Quince at the Clavier'(건반 앞에 앉은 피터 퀸스)에서 스티븐즈가 말하는 ’아름다움은 정신적으로는 순간적이다. … 하지만 육체적으로는 불멸이다‘(Beauty is momentary in the mind … But in the flesh it is immortal.)과 같다. 또 아름다움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면서 ‘가시적인 것은 불가시적인 것과 등가물이라는 사실의 믿음은 중요하다’(It is important to believe that the visible is the equivalent of the invisible;  … )고 하였다.

하필이면 그는 무엇 때문에 테네시 언덕에다 항아리를 버려두었을까? 우리는 황무지에 버려진 항아리의 모습이 소박하고도 수수한 회색에 무늬가 없는 둥근 것임을 안다. 숲, 나무, 잡초, 여러 가지 양상, 무질서, 혼돈 속의 자연환경에 버려진, 유독 깨끗하고 둥근 항아리만이 그 주위를 지배하고 있다. 9행의 ‘항아리는 모든 곳에 영토를 가졌다’는 표현은 시인의 사상의 징표이다. 항아리와 황무지의 대조는 신의 존재와 인간 세상의 대조와 같다. 바꿔 말하면 황무지에 발가벗은 인간을 남겨두고 신들이 사라지는 상황은 스티븐즈의 모든 사상의 근원이 되고 그의 모든 시의 바탕을 제공하기도 한다. … 이와 같이 신이 죽었다고 설파하는 스티븐즈의 시는 인간으로 하여금 이 세계를 보는 눈을 전환시켜 준다. 스티븐즈의 항아리와 키이츠의 항아리는 거의 같이 가시와 불가시의 시상을 다룬다고 볼 수 있고, 이 시 속의 테네시는 현실과 대치되는 장소로, 궁극적으로 스티븐즈의 항아리는 현실과 상상력과의 관계에 대한 일화에 지나지 않으며, 질서가 혼돈을 지배하는(order dominates confusion) 상황에 대한 불가시의 표현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참고로 까페 게시판에 실린 스티븐즈의 시를 두 편 읽어보았는데, 참 어렵게 느껴졌다.

아들아이가 내년에 나는 어떤 글을 실을지 모르겠다며, 이왕이면 멋있는 말을 쓰고 싶다고 하길래, 첼로 연주하는 사진이 분명히 들어갈 것이므로 키이츠의 ‘Ode on a Grecian Urn'의 유명한 구절을 소개해주었다.


“들리는 소리는 아름답다. 그러나 들리지 않는 소리는 더 아름답다.” (Heard melodies are sweet, but those unheard/ Are swee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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