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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간 무신 정권과 끝까지 싸운 농민, 천민

작성자손님|작성시간06.05.30|조회수80 목록 댓글 0

자유등반은 확보물에 직접 의지하지 못하므로 등반 중에 많이 떨어지게 된다.
가던 새 가던 새 본다 믈 아래 가던 새 본다

잉 무든 장글란 가지고 믈 아래 가던 새 본다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고등학교 때 배우는 고려 속요 `청산별곡`의 제3연입니다. 사람들은 이 구절을 여러 가지로 해석합니다. 가장 일반적인 해석은 아마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가던 새 가던 새 본다 속세로 가던 새 본다./ 이끼 묻은(녹슨) 쟁기를 가지고 속세로 가던 새 본다.` 그런데 `잉 무든 장글란`을 녹슨 쟁기가 아니라, 이끼 묻은 은장도 혹은 녹슨 병기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이 작품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검토가 아니라 그 중에서 `녹슨 병기`라는 해석은 왜 나온 것이고, 그러한 해석이 나온 시대적 배경은 무엇이었느냐 하는 점입니다.

 

이 작품이 창작된 시기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대략 고려 후기로 추정할 뿐입니다. 이 때는 무신 정변 이후이고, 이어서 몽고 침략이 있었던 때입니다. 그러므로 녹슨 병기를 가진 사람은 무신 정변과 몽고 침략 등과 관련해서 전쟁을 했던 사람일 것입니다.

 

이 작품은 고려 속요이므로 여기서의 화자는 농민 혹은 천민이라고 보아도 좋겠지요. 그렇다면 이 사람은 무신 정변 뒤에 있었던 농민이나 천민의 신분 해방 운동에 가담했다가 관군에게 쫓겨서 산으로 들어간 사람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또 몽고의 침략 뒤에 항전하다가 산으로 들어간 농민이나 천민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할 내용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몽고가 침략했을 때 왜 농민이나 천민들이 항전을 했으며, 그들의 싸움은 어떠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 역사에는 외침이 있을 때마다 그에 맞서 싸운 민족의 영웅들이 있었습니다. 고구려 때는 수나라의 침략군을 살수 대첩으로 쳐부순 을지문덕 장군, 당나라의 침략을 안시성에서 멈추게 만든 양만춘 장군이 있었습니다.

 

고려 시대에는 거란의 침입을 귀주 대첩으로 몰아낸 강감찬 장군이 있었고, 조선 시대에는 임진왜란 때 바다에서 왜군을 물리친 이순신 장군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고려 시대에 몽고가 침략했을 때에는 이들을 물리친 민족의 영웅이 없었을까요?

 

몽고가 침략했을 때 고려의 정권은 무신 정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신들이 좋은 대우를 받았을 것이고, 정권에서도 중요한 요직을 두루 차지하고 있었을 터인데, 어째서 외침에 맞서 뛰어난 능력으로 막아낸 장군이 나타나지 않았을까요?

 

당시의 집권 세력인 최씨 정권은 무신 정변 뒤에 무신들 사이의 권력 투쟁에서 마지막으로 승리한 정권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외침에 맞서 뛰어난 능력으로 막아낸 장군이 나타나지 않았던 것일까요?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통해 군인들이 정권을 잡는다고 해서 국방이 튼튼하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민족은 지정학적인 위치 때문에 중국 대륙과 밀접한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이 들어선 뒤 줄곧 모든 국가들이 중국 대륙에 어떤 국가가 들어서는가에 따라 영향을 받아 왔습니다.

 

더욱이 중국 대륙에 강력한 국가가 들어설 때마다 우리 민족의 국가들은 침략의 위협 앞에서 시달렸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민족이 중국 대륙의 국가에 일방적으로 영향만 받아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고구려는 수나라의 침략을 번번이 꺾음으로써 오히려 수나라를 멸망의 길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러므로 중국 대륙에 어떠한 국가가 들어서든 결국에는 우리 민족 국가의 내부 상태가 어떠한가에 따라 그 영향의 정도와 결과가 달라졌던 것입니다. `외인(外因)은 내인(內因)을 거쳐 작용한다`는 역사법칙이 있습니다. 이러한 법칙은 우리 민족사를 통틀어 볼 때 언제든지 적용할 수 있는 법칙입니다. 고려 시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려는 건국 뒤로 세 차례에 걸친 거란의 침입을 모두 거뜬히 물리쳤습니다. 거란의 소배압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온 3차 침입을 귀주에서 물리친 강감찬 장군의 귀주 대첩은 우리 민족사에서 빛나는 대첩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고려는 12세기 초에 들어와서 거란이 약해진 틈을 타서 힘이 커지기 시작한 여진족의 침입을 받고 곤욕을 치렀습니다. 그때까지 여진족은 고려의 속국이나 다름없던 존재였습니다. 그러던 여진족이 비록 강해졌다고는 하지만 고려를 침략할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그만큼 고려 사회 내부가 부패해 동요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고려는 외적을 물리칠 만한 힘이 있었습니다. 고려는 1107년 12월에 윤관을 총책임자로 하는 5개 부대 17만 명으로 원정군을 편성해서 여진족이 도사리고 있던 함흥 지방으로 쳐들어 갔습니다. 고려는 내친 김에 함주(함흥), 길주, 공험진을 비롯한 9개의 성을 쌓아서 여진족을 내쫓고 사람들을 그곳에 옮겨 살게 했습니다.

 

그러나 고려는 9성을 쌓은 뒤 2년 남짓 버티다가 결국 군대와 주민을 철수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중앙 정부의 부패와 병역 제도의 문란으로 오랜 기간의 전쟁을 버티어 나갈 힘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 뒤로 고려는 계속되는 내란으로 말미암아 약해질 대로 약해졌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무신 정변으로 무신 정권이 들어서고, 지배층의 권력 다툼과 부패 때문에 고통만 더해가는 농민들과 천민들의 봉기가 끊이질 않았습니다.

 

그런 소용돌이 속에서 중국 대륙에는 세계 역사를 통틀어 가장 광대한 영토를 정복한 몽고의 징기스칸이 지배자로 등장했습니다. 거란의 침략이 폐렴균의 침투라면, 여진족의 침략은 독감 바이러스의 침투였고, 몽고의 중국 대륙 제패는 폐결핵균의 침투가 눈앞에 닥친 꼴이었습니다.

 

거란의 침략 때 고려는 건강한 몸이었으므로 거뜬히 물리칠 수 있었고, 여진족의 침략 때도 처음에는 건강한 몸이었으므로 거뜬히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진족과의 싸움을 오랫동안 끌고 있는 상태에서 고려는 독감을 오래 앓으면서도 과로와 불규칙한 생활을 일삼는 사람처럼 매우 좋지 않은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폐결핵균처럼 강력한 몽고의 침략이 눈앞에 닥쳤으니 그야말로 고려의 운명은 바람 앞에 등불이었습니다.

 

몽고는 초기에는 자기 부족의 통합과 중국 대륙의 통일, 서쪽 지방에 대한 원정에만 힘을 쏟고 고려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군사 행동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동쪽으로도 힘을 쏟을 만한 여유가 생기자 자기들이 거란의 침략을 막아 주었다는 터무니없는 구실로 고려에 공물을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고려가 따르지 않아 두 나라 사이에 긴장 관계가 형성되어 있던 1225년에 몽고 사신 제구유가 고려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압록강변에서 암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은 몽고에는 침략을 감행할 수 있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였습니다.

 

이 사건이 실마리가 되어 고려와 몽고는 국교를 끊고 적대 관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몽고는 1231년부터 1258년까지 거의 30년에 걸쳐 자그마치 여섯 차례나 고려에 쳐들어 왔습니다. 몽고가 침입해 왔을 때 고려는 무신 사이의 권력 다툼에서 마지막 승자가 된 최충헌의 최씨 정권이 들어서 있었습니다.

 

1231년의 1차 침략은 몽고가 충주성 공략에 실패함으로써 더이상 남하는 하지 못하는 가운데, 고려 정부가 서둘러 화평을 제의함으로써 마무리지을 수 있었습니다. 몽고는 고려 정부가 화평을 제의하자 많은 물자를 요구하고 몽고 관리를 지방마다 파견했습니다.

 

몽고는 고려에 완전한 속국이 될 것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다시 한번 전쟁을 해서 승패를 가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1차 침략에 겁을 집어먹은 최충헌의 아들 최우는 이듬해에 서둘러 강화도로 피신해 버렸습니다.

 

최우 정권이 서둘러 강화도로 피신한 것은 오로지 자신들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계산에서였습니다. 그 무렵의 상황은 전국적으로 농민과 천민의 봉기가 불붙어 오르다가 소강 상태에 접어든 시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봉기가 몽고의 침략로 다시 불붙어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무신 정권의 진압에 밀려 산속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주로 게릴라전을 벌였던 초적들이 다시 세력을 이루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한결같이 몽고 침략군에 대해 강한 항전 의지를 갖고 있었습니다.

 

지배층이야 도망가거나 몽고의 침략을 인정하고 빌붙어 살면 되었지만, 농민과 천민 같은 민중은 몽고군의 약탈과 살육 따위의 횡포를 직접 겪고 있었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 싸우는 도리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마산 지방의 초적들은 최우에게 사람을 보내서 자신들에게 5천 명의 정예 부대가 있으니 관군과 힘을 합쳐 몽고군을 물리치기 위한 작전을 펴자는 제의를 하기도 했습니다.

 

최우 정권으로서는 진퇴양난이었습니다. 몽고와 맞붙어 싸우자니 이길 자신이 없었고, 굴복하자니 민중의 원성 때문에 정권을 유지하기 힘들 것 같았습니다.

 

몽고의 1차 침입 때는 최우 정권은 민중의 힘을 빌려서라도 몽고와 싸워 보려는 뜻을 조금은 갖고 있었습니다. 최우는 관악산의 초적에게 사람을 보내 큰 상을 내리고 그들을 군대에 편입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1차 침략의 항전 과정에서 최우 정권은 더 싸워 보려는 의지를 잃었습니다. 그들은 충주성을 둘러싼 공방을 보고는 더욱 의욕을 잃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충주성 전투에서 귀족들은 모두 도망가 버리고 농민과 천민들만 남아서 충주성을 굳게 지킴으로써 몽고군이 더 남하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태를 보면서 최우 정권은 설령 몽고의 침략을 물리친다고 해도 그 뒤에 더욱 커질 민중의 힘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두렵기만 했습니다. 그렇다고 몽고의 요구에 굴복한다고 해도 몽고가 요구하는 것은 완전한 속국이므로 최우 정권을 그대로 둘 것 같지 않았습니다. 싸우자니 질 것 같고, 이겨도 손해볼 것 같고, 항복하자니 정권을 유지할 수 없을 것 같았던 것입니다.

 

오도가도 못하는 이러한 상황에서 최우 정권이 생각해 낸 묘수가 장기 항전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도망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도망쳐 갈 곳으로서 해전에 약한 몽고가 쉽게 쳐들어올 수 없는 섬을 골랐습니다. 그곳이 바로 강화도였습니다.

 

최우 정권이 도망가 버리자 몽고는 두번째 침략을 해왔습니다. 이에 대한 항전은 고스란히 농민과 천민들의 몫이 되고 말았습니다. 몇몇 애국적인 지방 관리들이 힘을 보탰을 뿐이었습니다. 몽고는 최우 정권이 도망가자 2차 침략부터는 고려를 완전한 속국으로 만들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가는 곳마다 닥치는 대로 살육을 일삼았습니다.

 

그러나 이에 맞선 민중의 항전도 만만치는 않았습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광주와 처인성(용인), 충주성 방어 전투는 몽고의 남하를 매우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전투는 거의 농민과 천민들의 힘만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충주성 방어 전투를 지휘했던 김윤후는 더이상 귀족이나 관리들에게는 기대할 것이 없음을 깨닫고 노비 문서를 불태우면서까지 노비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었습니다. 이 때의 노비들은 몽고 침략 직전에 충주 지방에서 봉기를 일으킨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무신 정권이나 귀족들에 대한 싸움을 뒤로 미룬 채 민족 공동의 적인 몽고군과 용감히 싸웠습니다. 이들의 처절한 항전에 힘입어 충주 이남 지방은 몽고군의 살육과 약탈을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지경에서도 최우 정권은 이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낸 충주 이남 지방에서 세금을 거둬 들여 뱃길로 강화도에서 받아먹으며 사치와 방탕의 나날을 보냈습니다.

 

몽고에 맞선 항전에서 농민과 천민을 비롯한 민중이 주체였다는 사실은 민족사에서 커다란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민족공동체가 형성되었음을 뜻하며, 민족공동체의 형성은 민중 속에 민족공동체 의식을 새겨 주었습니다.

 

삼국 시대만 해도 외적에 맞선 싸움을 주도하는 것은 귀족이었습니다. 고구려가 수나라, 당나라와 싸울 때 민중들도 처절하게 싸웠지만, 그들의 투쟁은 어디까지나 귀족들이 앞서서 이끄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몽고에 맞선 항전에서는 민중 스스로 군사를 조직하고 스스로 지도했습니다. 그들이 목숨을 걸고 몽고와 싸운 것은 고려 왕조나 봉건 체제를 지키기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무신 정권을 지키기 위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민족공동체를 외적의 침탈에 맞서 지키고자 목숨을 걸었던 것이고, 민족의 이익이 자신의 이익임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농민이나 천민 같은 민중이 몽고와 처절히 싸운 것은 실제로 우리 민족공동체를 지켜내는 데에 결정적인 힘이 되었습니다. 고려는 몽고에 맞서 자그마치 40년 동안 전쟁을 치렀습니다.

 

몽고 민족이 세운 원나라는 몽고와 중국 대륙은 말할 것도 없고 중앙 아시아와 유럽까지도 진출한 세계를 아우른 대제국이었습니다. 이러한 대제국과 40년 동안 전쟁을 치를 수 있었다는 것은 조그마한 나라인 고려로서는 정말로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농민과 천민 같은 민중의 항전 덕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중앙 정부의 항전 의지 없이 민중의 항전만으로 버틴다는 것은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그 시대의 민중이 스스로 정권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의식적인 측면에서나 물질적 조건의 발전 정도에서나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끝내 고려는 민중의 처절한 항전도 보람없이 몽고에 무릎을 꿇게 됩니다. 그 굴복은 지배층, 특히 왕조가 민중을 배신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대의 역사에서 주의 깊게 보아야 할 상황은, 고려 왕조가 몽고에 굴복했지만 몽고는 고려 왕조를 그대로 두고 완전 속국으로 만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몽고가 지배한 광대한 원제국의 영토에서 예외적인 경우였습니다.

 

몽고는 자기들이 점령한 어느 나라에서도 왕권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몽고가 비록 허수아비일지라도 고려 왕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40년에 걸친 민중의 끈질긴 항전 때문이었습니다. 몽고는 고려를 조그마한 나라라고 우습게 보았다가 민중들의 끈질긴 항전에 기가 질려 버렸던 것입니다.

 

몽고는 비록 형식적이나마 고려 왕조를 그대로 둘 수밖에 없었고, 고려를 완전 속국으로 만들 수 없었습니다. 이에 힘입어 고려는 원나라가 약해졌을 때 원나라의 지배에서 쉽게 벗어날 수가 있었고, 그 뒤로도 중국 대륙에 들어선 나라와 확실하게 독립적인 관계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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